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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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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녀성 시인 - 에밀리 디킨슨 << 1775 : 7>>
2016년 05월 25일 07시 54분  조회:5577  추천:0  작성자: 죽림
에밀리 디킨슨
1830-1886
 
미국 시인
 
미국의 여성 시인. 매사추세츠 주 에머스트의 청교도 가정에서
태어나 일생 동안 외부 세계와 담을 쌓고 지냈다.
 
에머스트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뒤 마운트 홀리요크 신학대학에
입학하였으나 1년 만에 중퇴하고 시쓰는 일에 전념하며 평생을
독신으로 보냈다. 처자가 있는 목사와의 사랑이 실연으로 끝나자
그녀의 시적 재능은 둑을 터뜨린 봇물처럼 넘쳐흘렀다.
 
그러나 그녀가 쓴 시 1775편 가운데 생전에 발표된 것은
단 7편에 불과하다.
 

그녀의 시는 자연과 사랑 외에도 퓨리터니즘을 배경으로 한
죽음과 영원 등의 주제를 많이 다루고 있다.
 
운율에서나 문법에서나 파격적이었기 때문에 19세기에는 인정을
받지 못하였으나, 20세기에 들어와서 이미지즘과 형이상학파적 시의
유행과 더불어 높이 평가받게 되었다.

 
작품으로는 〈상처난 사슴은 높이 뛴다〉 등이 있다.
 
주요저서 : 《전시집(全詩集)》(1855) 《전서간집 (全書簡集)》(1858)


 
 

애 타는 가슴 하나 달랠 수 있다면
 

애 타는 가슴 하나 달랠 수 있다면
내 삶은 결코 헛되지 않으리.
 
한 생명의 아픔 덜어줄 수 있거나,
괴로움 하나 달래 줄 수 있다면,
 
헐떡이는 작은 새 한 마리 도와
둥지에 다시 넣어줄 수 있다면,
 
내 삶은 결코 헛되지 않으리.
 
 
 
길에 뒹구는 저 작은 돌
 

길에서 혼자 뒹구는 저 작은 돌
얼마나 행복할까
 
세상 출셀랑 아랑곳없고
급한 일 일어날까 두려움 없네
 
천연의 갈색 옷은
지나던 어느 우주가 입혀줬나
 
혼자 살며 홀로 빛나는 태양처럼
다른 데 의지함 없이
 
꾸미지 않고 소박하게 살며
하늘의 뜻을 온전히 따르네
 
 
 
죽음을 위해 내가 멈출 수 없어
 

죽음을 위해 내가 멈출 수 없어
그가 나를 위해 친절히 멈추었다.
 
마차는 바로 우리 자신과
불멸을 실었다.
 
 
우리는 서서히 달렸다. 그는 서두르지도 않았다.
그가 너무 정중하여
 
나는 일과 여가도
제쳐놓았다.
 
 
아이들이 휴식 시간에
원을 만들어 뛰노는 학교를 지났다.
 
응시하는 곡식 들판도 지났고
저무는 태양도 지나갔다.
 
 
아니 오히려 해가 우리를 지나갔다.
이슬이 스며들어
 
얇은 명주, 나의 겉옷과
명주 망사-숄로는 떨리고 차가웠다.
 
 
부푼 둔덕처럼
보이는 집 앞에 우리는 멈추었다.
 
지붕은 거의 볼 수 없고
박공은 땅 속에 묻혀 있었다.
 
 
그 후 수 세기가 흘렀으나
말 머리가 영원을
 
향한듯 짐작되던
바로 그 날보다 더 짧게 느껴진다.
 
 
나는 고뇌의 표정이 좋다
 

나는 고뇌의 표정이 좋아.
그것이 진실임을 알기에-
 
사람은 경련을 피하거나
고통을 흉내낼 수 없다.
 
 
눈빛이 일단 흐려지면-그것이 죽음이다.
꾸밈없는 고뇌가
 
이마 위에 구슬땀을
꿰는 척할 수는 없는 법이다.
 
 
내 인생은-장전된 총
 

내 인생은 - 장전된 총으로
구석에 서 있던- 어느 날
 
마침내 주인이 지나가다- 날 알아보고
나를 데려갔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국왕의 숲을 헤매면서
사슴사냥을 하고 있다.
 
내가 주인 위해 말할 때마다-
산들이 당장 대답한다.
 
 
내가 미소지으면 힘찬 빛이
계곡에서 번쩍한다.
 
베수비어스 화산이
즐거움을 토해내는 듯하다.
 
 
밤이 되어 멋진 하루가 끝나면
나는 주인님 머리맡을 지킨다.
 
밤을 함께 보내다니 푹신한
오리 솜털 베개보다 더 좋다.
 
 
그분의 적에게- 나는 무서운 적이다.
내가 노란 총구를 겨누거나
 
엄지에 힘을 주면
아무도 두 번 다시 움직이지 못한다.
 
 
비록 그분보다 내가- 더 오래 살지 모르나
그분은 나보다- 더 오래 살아야 한다.
 
나는 죽이는 능력은 있어도
죽는 힘은 없으므로-
 
 
 
희망은 날개를 가지고 있는 것
 
희망은 날개를 가지고 있는 것
영혼 속에 머무르면서
 
가사 없는 노래를 부르면서
결코 멈추는 일이란 없다.
 
 
광풍 속에서 더욱더 아름답게 들린다.
폭풍우도 괴로워 하리라.
 
이 작은 새를 당황케 함으로 해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했었는데.
 

얼어들 듯 추운 나라나
멀리 떨어진 바다 근처에서 그 노래를 들었다.
 
그러나 어려움 속에 있으면서 한 번이라도
빵조각을 구걸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황야를 본적 없어도
 

나 아직 황야를 본 적 없어도,
나 아직 황야를 본 적 없어도,
 
히드 풀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
파도가 어떤 건지 알고 있다오.
 
 
나 아직 하느님과 말 못 했어도,
저 하늘 나라에 간 적 없어도,
 
지도책을 펴놓고 보는 것처럼
그 곳을 자세하게 알고 있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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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 1830년~1886년)

   3월

                  에밀리 디킨슨

 

3월이네요, 어서 들어오세요!

오셔서 얼마나 기쁜지요

일전에 한참 찾았거든요

모자는 내려놓으시지요

아마 걸어 오셨나보군요

그렇게 숨이 차신 걸 보니

그래서 3월, 잘 지내셨나요?

다른 분들은요?

자연은 잘 두고 오셨나요?

아, 3월 바로 저랑 2층으로 가요

말씀 드릴게 얼마나 많은지요

 

내가 만일    

 

          - 에밀리디킨슨

 

 

 

미국 여류 시인 에밀리 디킨슨의 '내가 만일' 의 시를 읽노람,

우리는 얼마나 작은 것들에 신경을 쓰며 세심하게 배려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가장 작은 것에 충실한 자가 가장 잘 기도하는 자이다' 라는 말과 같이

작은 이슬 방울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맺혀져 있음을 깨닫고

내가 만일 천지 만물을 담을 수 있는 큰 그릇으로 살아가도록 조금씩 

자꾸 노력한다면 

우리의 가슴은 우주를 품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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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재치는 야망과 공인으로서의
삶을 조롱한 <288번 시> 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전 무명인입니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당신도 무명인인가요?
그럼 우린 같은 처지인가요?
입 다물고 있어요, 사람들이 소문낼지 모르니까 ─ 아시다시피.
정말 끔찍해요, 유명인이 된다는 건
정말 요란해요, 개구리처럼
긴긴 6월에 존경심 가득한 늪을 향해
개골개골 제 이름 외쳐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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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 디킨슨은 19세기와 20세기의 문학적 감수성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과격한 개인주의자였던 그녀는 매사추세츠 주의 작은 칼뱅주의 마을 애머스트에서 태어나 평생을 보냈다. 그녀는 결혼하지 않았던데다 외부적으로는 별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내면적으로는 격렬한, 예사롭지 않은 삶을 살았다. 그녀는 자연을 사랑했으며 뉴잉글랜드 시골의 새, 동물, 식물, 계절의 변화 등에서 깊은 영감을 얻었다.

디킨슨은 감수성이 너무 풍부했던 나머지 말년을 은둔자로 보냈다. 그녀는 아마도 시를 쓰기 위해 은둔자가 되었는지도 모른다(그녀는 하루에 시 한 편 정도를 쓰곤 했다). 그녀는 시를 쓰는 것 이외에도 변호사이자 애머스트의 유명 인사이며 후에 연방의원이 된 아버지를 위해 집안일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디킨슨은 독서를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성경,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 고전 신화 관련 작품들을 꿰뚫고 있었다. 디킨슨은 당시 가장 은둔하는 문학인이었기에 이러한 책들만이 그녀의 진정한 스승이었다. 수줍음 많았고, 작품을 거의 발표하지도 않았으며, 또 세상에 알려지지도 않았던 이 시골 여성이 19세기 최고의 미국 시들을 창조해냈다는 사실은, 그녀의 시가 재발견된 1950년대 이래 독자들을 매혹시키고 있다.

디킨슨의 간결하면서 이미지즘적인 스타일은 휘트먼에 비해 더욱 현대적이며 혁신적이다. 그녀는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 때 결코 두 단어를 사용하는 일이 없었고, 거의 속담처럼 응축된 스타일로 추상적인 사고와 구체적인 사물을 결합했다. 그녀의 수작들은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다. 다수의 시들은 현 시대의 감수성을 조롱하고 있고, 어떤 시들은 심지어 이교도적이기까지 하다. 그녀는 때로 놀라울 정도로 실존적인 깨달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포처럼 마음의 어둡고 감추어진 부분을 탐구하면서 죽음과 무덤을 극화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꽃과 벌 같은 단순한 사물들도 찬미했다. 그녀의 시는 대단한 지적 능력을 보여주고 있으며 시간에 갇힌 인간 의식의 한계에 대한 고통스런 역설을 일깨우고 있다. 그녀는 뛰어난 유머 감각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녀가 다루는 주제의 범위와 묘사 방법은 놀라울 정도로 다양했다. 그녀의 시의 제목은 일반적으로 토머스 H. 존슨이 1955년 표준판에서 할당한 번호로 알려져 있다. 그녀의 시는 불규칙한 대문자와 대시(dash, ─ )로 북적댄다.

소로처럼 불순응주의자였던 그녀는 단어와 문구의 의미를 뒤엎으며 역설법의 효과를 충분히 활용하고 있다. 다음은 그녀의 시 435번이다.

구별할 줄 아는 눈으로 보면, 깊은 광기는
가장 신성한 감각이다.
깊은 감각은 순전한 광기일 뿐이다.
항상 그렇듯이 여기에서 우세한 것은
다수이다.
동의하면 당신은 제정신이다.
반대하면 당신은 즉각 위험한 존재가 되어
쇠사슬을 차게 된다.

 

 

 

디킨슨의 시 1,775편은 비평가들을 계속 자극하는데, 비평가들은 그녀의 시에 대해 대개 의견을 서로 달리한다. 어떤 비평가는 그녀의 신비로운 면을 강조하고 어떤 비평가는 자연에 대한 그녀의 감수성을 강조한다. 많은 비평가는 그녀의 독특하고 이국적인 호소력에 주목한다. 현대 비평가 R. P. 블랙머는 디킨슨의 시가 때로 "고양이 한 마리가 영어를 말하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듯"하게 느껴진다고 논평했다. 디킨슨의 깨끗하고 투명하며 섬세하게 조각된 시들은 미국 문학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동시에 도전적인 작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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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 디킨슨의  詩와 삶

 

뉴잉글랜드의 신비주의자'라고 불렸으며, 시의 운율과 압운을 실험했다.

거의 모든 시가 죽은 뒤에 출판되었다.

에밀리 디킨슨은 3남매 중 둘째였는데, 그들은 모두 어른이 되어서도 우애가 두터웠다. 여동생 래비니아는 가족과 함께 독신으로 지냈고 오빠 오스틴은 에밀리의 친구와 결혼해 옆집에 살았다.

 할아버지 새뮤얼 파울러 디킨슨은 애머스트대학의 설립자이며, 아버지 에드워드 디킨슨은 1835~72년에 이 대학에서 회계일을 맡았다.

1853~55년 의회에서 일하기도 한 변호사 에드워드 디킨슨은 엄한 아버지로서 인정없는 편은 아니었으나 거리감이 있었다.

에밀리의 어머니 역시 아이들과 가깝지 않았다.

에밀리는 애머스트 아카데미에서 공부했고, 1847~48년에 '마운트 홀리요크 여자신학교'에 다녔는데 이 학교는 지적 성장뿐 아니라 종교적인 성장도 강조했기 때문에 그녀는 열렬한 기독교인이 되어야 한다는 심한 부담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이에 저항하여 많은 시에서 신에 대해 다루었지만 평생 회의주의자로 남았다.

이러한 회의 속에서도 강한 종교적 감정에 지배되었으며, 이 갈등이 시에 긴장감을 더해준다.

1850년경 아마도 랠프 월도 에머슨과 에밀리 브론테의 시에 매료되었을 무렵, 아버지의 사무실에서 법률을 공부하는 젊은이 벤저민 F. 뉴턴의 지도를 받아 시를 쓰기 시작했다.

1858년에는 전에 쓴 시 몇 편을 모아 손으로 꿰맨 소책자를 만들기도 했다. 1850년대에 쓴 편지들에는 생기와 유머가 넘치면서 수줍은 처녀다운 면모가 드러난다. 1855년에는 의회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만나려고 여동생과 함께 워싱턴 D. C.에 갔다.

 여행 도중 필라델피아에 들러 설교를 듣게 된 유명한 목사 찰스 워즈워스는 그녀의 표현대로 '지상에서 가장 소중한 친구'가 되었다. 워즈워스는 꽤 낭만적인 인물로, 큰 슬픔을 겪었다고 알려졌는데 강단에서의 웅변은 그의 외로운 침잠과는 대조적인 것이었다.

에밀리는 그와 영혼의 문제에 대해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그의 칼뱅주의적 정통주의는 그녀의 사색에 유용한 밑거름이 되었다. 그의 단호하고 엄격한 믿음을 통해, 그녀는 에머슨을 비롯한 초절주의자들이 가졌던 자비로운 우주관이라는 안일한 가정을 잘 교정할 수 있었다.

1850년대에 조지아 G. 홀랜드 박사 부부 및 새뮤얼 바울스와 편지왕래를 시작했다.

이 두 사람은 문학에 관심을 두고 시를 싣기도 한 신문 〈스프링필드 리퍼블리컨 Springfield Republican〉의 편집자였다.

이들과는 여러 해 동안 편지왕래를 했는데, 1850년대 이후에는 주로 에밀리의 섬세함과 재치를 이해하는 이지적인 홀랜드 부인과 편지를 주고 받았다. 에밀리는 바울스가 자신의 시에 관심을 갖게 하려고 노력했으나, 예민한 사람이었지만 전통적 문학적 취향을 가진 그는 그녀의 시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으므로 그녀는 큰 충격을 받았다.

시를 점점 많이 써나가던 1850년대 후반경에, 디킨슨은 3통의 편지에서 '선생님'이라고 표현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이 사람은 이미 알고 지내던 친구들과 일치하지는 않지만 바울스나 워즈워스일 가능성도 있다. 이 사랑은 시 속의 몇몇 행에 나타나는데, 예를 들어 "나는 자유롭다 세상에서 벗어났으므로", "너무 큰 기쁨이네! 매우 큰 기쁨이네", "그대는 감히 백열하는 영혼을 보려는가?" 같은 것들이다. 또다른 시들은 이 사랑의 좌절과 그것이 차츰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되어 그와 영적인 결합을 이루는 것을 보여준다.

1850년대의 시들은 정서나 형식이 꽤 관습적이지만, 1860년부터는 영국 찬송가 작가인 아이작 와츠의 운율과 셰익스피어, 흠정역 성서에 영향을 받았으며 실험적인 언어와 작시법을 구사했다.

에밀리의 대표적인 시형식은 강약격 3음보로 된 4행시로서 집안의 서재에 꽂힌 워츠의 책에 설명된 형태이다.

 이밖의 형식도 많이 썼는데, 단순한 찬송가 가사의 박자에도 변화를 부여해 그녀 생각의 보조에 맞도록 빠르거나 느린 또는 망설이는 듯한 운율을 사용했다. 또한 생각과 그 긴장감을 전달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원래의 압운을 변형하거나 파괴함으로써 시의 새로운 기초를 다졌다. 경구적인 간결성을 이루기 위해 쓸데없는 단어는 삭제했으며, 남은 단어들은 생생하고 정확한 것이 되도록 했다.

구문을 자유로이 변경하여 특별한 문맥 속에 평범한 단어를 놓는 것을 즐겨 독자들에게 관심과 신선함을 던졌다. 그녀는 1862년 4월 15일 4편의 시를 동봉한 편지를 문학가 토머스 웬트워스 히긴슨에게 보내 자신의 시가 '살아 있는지'를 물었다.

히긴슨은 시 출판에는 반대했지만 시의 독창성을 인정했고 그뒤에도 계속하여 훈계자 역할을 했다. 1862년 이후 그녀는 시를 발표하라는 친구들의 모든 성의를 물리쳤으며, 그결과 생전에는 불과 7편의 시만 출판되었고 그 가운데 5편은 〈스프링필드 리퍼블리컨〉지에 실렸다.

약 800편에 이르는 많은 시를 쓴 최고 시작기는 남북전쟁 때이다.

시의 소재는 전쟁이 아니라 내면을 향한 것이었지만 전쟁중의 긴장된 분위기는 시작(詩作)의 긴박감을 고무했던 것 같다. 긴장이 가장 고조되었던 때는 1862년으로, 먼 거리와 조국의 위험이 에밀리의 친구들을 매우 긴장하게 만들었다. 당시 새뮤얼 바울스는 건강 때문에 유럽에 있었고, 찰스 워즈워스는 샌프란시스코의 갈보리 교회의 목사가 되어 떠났으며, T. W. 히긴슨은 군대의 장교로 있었다. 에밀리도 눈병이 낫지 않아 1864~65년에 치료를 받기 위해 메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에서 몇 달을 지냈다.

애머스트로 돌아온 뒤 다시는 여행하지 않았으며 1860년대 후반부터는 가족의 농장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남북전쟁이 끝난 뒤에는 그리 많이 쓰지 못했으나 더욱더 자신의 삶을 예술의 규율로 조절하려고 했다. 그녀의 편지들은 때로 예술성에서 시에 견줄 만한 것으로, 경구적인 문체로 일상적 경험들에 대해 썼다(서간체 문학). 예를 들어 한 친구가 에밀리와 여동생에게 한꺼번에 편지 1통만을 보내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했을 때, 그녀는 대답하기를 "자두 하나가 둘다의 것이면 자두가 아니다.

나는 예의가 있어서 과육을 먹을 수 없고 씨는 좋아하지 않으니까."라고 했다. 1870년경에는 흰 옷만 입었으며, 집으로 찾아온 사람도 거의 만나지 않았는데, 이 은둔생활을 충실한 여동생이 잘 지켜주었다. 1870년 8월에 애머스트를 방문한 히긴슨은 당시의 에밀리를 빨간머리에 흰 옷을 입은 "소박한 작은 여자"라고 말했으며, 그에게 인사로 꽃을 주었고 "부드럽고 놀란 듯이 숨죽인 아이같은 목소리"로 말했다고 묘사했다.

말년에는 그녀가 사랑하던 많은 사람들이 죽어 슬프게 지냈다.

특히 가장 슬펐던 1874년의 아버지의 죽음과 1883년의 여덟살 난 조카 길버트의 죽음에 대해, 가장 뛰어난 몇 통의 편지를 썼다. 1878년 바울스, 1881년 히긴슨, 1882년 워즈워스와 어머니, 1884년 오티스 P. 로드, 1885년 헬렌 헌트 잭슨이 각각 죽어 슬퍼했다. 에밀리가 1878년경에 사랑한 로드는 메사추세츠 주 세일럼 출신의 판사로서 아버지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로드에게 보낸 여러 편지에는 온화하고 성숙한 사랑이 담겨 있으며, 로드도 그 사랑에 응답했다. 한편 잭슨은 시인이자 인기 소설가였는데, 에밀리의 시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출판하도록 설득했었다.

그녀가 죽은 직후 동생 래비니아는 시를 출판하기로 마음먹었다.

1890년 T.W. 히긴슨과 메이블 루미스 토드가 편집한 〈에밀리 디킨슨 시집 Poems by Emily Dickinson〉이 선보였다. 이밖에도 주로 메이블 루미스 토드, 마사 디킨슨 비안치(에밀리의 조카딸)와 밀리슨트 토드 빙엄이 편집한 시집들이 1891~1957년에 출판되었고, 1955년에는 토머스 H. 존슨이 현존하는 모든 시들과 여러 이본(異本)들을 편집했다.

디킨슨의 시에서 친밀하고 익숙한 언어로 표현된 주제들은 사랑·죽음·자연 등이다.

자신이 태어나고 죽은 집에서 조용히 지낸 은둔생활과 간결한 시에 담긴 깊이와 강렬함 사이의 대조는 그녀의 성격과 개인적인 인간관계에 대해 많은 추측을 불러일으켰다. 1775편의 많은 시들과 비슷한 수에 달하는 편지들을 통해 본 에밀리는 열정적이고 재치가 있는 여성이며, 시뿐만 아니라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들과 자신의 삶 전체를 예술로 승화시킨 철저한 예술가임을 알 수 있다.

 

 

희망은 한 마리 새

          • 희망은 한 마리 새
            영혼 위에 걸터앉아
            가사 없는 곡조를 노래하며
            그칠 줄을 모른다.

            모진 바람 속에서 더욱 달콤한 소리
            아무리 심한 폭풍도
            많은 이의 가슴 따뜻이 보듬는
            그 작은 새의 노래 멈추지 못하리.

            나는 그 소리를 아주 추운 땅에서도,
            아주 낯선 바다에서도 들었다.
            허나 아무리 절박한 때에도 내게
            빵 한 조각 청하지 않았다. 

            에밀리 디킨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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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똑똑 문을 두드렸다

 

-에밀리 디킨슨(1830~1886)-
 

 

바람이 피곤한 나그네처럼 문을 똑똑 두드렸다.
주인처럼 나는 근엄하게 대답했다.
“들어오시오.”
그러자 발 없는 손님이 재빨리

집안으로 들어왔다.
손님에게 의자를 내주려 했으나
그것은 공기에게 소파를 내주는 것처럼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손님은 몸을 지탱시켜 줄 뼈가 없었다.
그가 말을 꺼내면
우거진 수풀에서 수많은 벌새들이 일제히
날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가 지나갈 때는
소용돌이치는 얼굴과 손가락이
유리컵 안에서 떨며 도는 바람의 곡조처럼
음악소리를 냈다.

우리 집에 와서 경쾌하게 날아다니다가
소심한 사람처럼 그는
당황스러워하며 다시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나는 홀로 남겨졌다.


 

<감상>

 

 

   바람에게서 뼈 없는 몸과 빠른 걸음을 보는 시인. 바람의 한 동작 한 동작에서 얼굴과 목소리를 보고 듣는 시인. 앉을 수만

있다면 바람에게 의자를 내주고 마실 수만 있다면 바람에게 차를 대접하고 싶어 하는 시인. 사소한 사물의 작은 움직임에도

온몸의 호기심이 일어나 자세히 관찰하는 모습이 개구쟁이 같으면서도 귀엽다. 보이지 않는 미세한 사물에게 생동감과 생명

력을 부여하는 섬세한 감각이 놀랍다.

 

 

바람조차도 찾아오면 반갑고 함께 놀고 싶어 보내기 싫어하는 장면에서 깊은 외로움이 느껴진다. 마음으로는 친하고 싶어

하면서도 몸은 금방 숨어버리고 마는 바람의 모습이 시인을 꼭 닮은 것 같다. 시인으로 활동하지도 않고 결혼도 하지 않고

골방에서 시를 썼지만, 모든 사물과 자연이 친구였기에 마음은 풍요로웠으리라. 사후에 제목 없는 시 원고 이천편가량이 발

견되었다고 한다. 제목은 임의로 첫 행에서 따왔다.

-김기택(시인)

 
 
 
 

 

 

 

은둔 속에 핀 예술혼, 에밀리 디킨슨
(Emily Dickinson, 1830~1886년)

그리고 1775편의 시

 

 


살아생전,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1800여 편에 달하는 시는 그저 혼자 내뱉은 독백 같았습니다.

사랑, 이별, 죽음, 영혼, 천국, 자연 등을 다룬 시는,
은둔생활 속에서 핀 꽃이었나 봐요.

그는 내내 고독했지만,
그 고독은 그의 모든 것이었던 시를 잉태한 동력이었습니다.
시와 고독을 평생 친구로 곁에 두고 지냈던 이 사람,
영문학사상 최고 시인 중 하나로 꼽히는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입니다.
이상하고 의외의 일이죠?
그가 살아서는 별 볼 일 없는 시인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 말이에요.

하긴 별 볼 일 없다는 것도,
그의 시를 제대로 접할 수 없었던 까닭도 있었겠지요.



에밀리를 얘기할 때, 가장 흔히 따르는 것은, 평생 독신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따지고 보면, 독신으로 살았다는 것이 그닥 부각돼야 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결혼을 인류보편의 것으로 인식하는 대부분의 사회에서,
독신생활하면서 시 짓기에만 몰두하다시피 한 그의 행보는,
호사가가 아니더라도 입방아에 올릴 수 있는 호기심거리가 될 수 있었겠죠.

마치 시와 결혼한 듯,
자신만의 공간에서 치열한 문학적 열정을 불태운 그였기에,

보통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생의 궤적은 호기심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에밀리는 미국 매사추세츠주 엠허스트에서,
변호사 아버지 에드워드 디킨슨과 에밀리 노크로스의 둘째 딸로 세상과 접촉했습니다.
잘 보시면, 그의 이름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에서 하나씩 딴 것이죠.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 신학교에도 진학했지만,
그는 보수적인 청교도 신앙에 그닥 흥미를 느낀 것 같진 않습니다.
청교도 정신부활을 위한 '영적대각성운동'이 있었을 때도,
그는 되레 청교도 신앙과 종교적 구원에 대한 회의를 숨기지 않았으니까요.

에밀리를 에워싸고 있던 종교가 시작(詩作)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한 반면,
한 만남이 그를, 그의 시상(詩想)을 일깨웠습니다.
설핏 짐작 가시죠?
맞아요. 역시나 사랑.
독신이었다지만, 설마 그가 사랑 한번 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진 않으셨죠?
아버지가 하원으로 당선돼,
그의 가족은 1854년부터 이듬해까지 워싱턴에서 살았는데,

필라델피아의 한 장로교회에서 만난 찰스 워즈워스 목사를 만났습니다.
찰스 목사는 스승과도 같았습니다.
문학적인 설교와 칼뱅주의에 입각한 그의 웅변이,
에밀리의 머리와 마음을 흔들었던 거죠.

그것은 하나의 지적도전과도 같았고, 시작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두 사람은 죽이 잘 맞았던 것 같아요.
편지를 주고받았고,
워싱턴을 떠나 다시 엠허스트로 돌아간 에밀리를 찰스 목사가 찾기도 했습니다. 에밀리는 여러 글에서 그를 '지상에서 가장 소중한 친구'라고 적기도 했어요.

그러나 역시나 장벽은 존재했죠.
찰스 목사는 기혼자였고, 그가 1861년 샌프란시스코의 한 교회로 옮기면서,
두 사람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이 났어요.

에밀리는 그를 정녕, 사랑했나봅니다.
친구부부와 동생에게 실연의 아픔을 토로했고, 더더욱 시에 매달렸습니다.
사랑의 아픔 때문인지 시는 봇물처럼 흘러넘쳤고,
좌절된 사랑으로 둘 곳 없는 마음은 작품 속에서 영적인 결합을 이뤘습니다.

고통을 잊기 위해서였을까요.
실연을 겪고 난 뒤, 그러니까 30세 이후 은둔생활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흰 옷만 입고 지냈다고 전해집니다.
'뉴잉글랜드의 수녀'라는 별명도 그래서 지어졌습니다.

시작도 계속했으나, 그는 출판에는 소극적이었습니다.
생전에 불과 7편의 시만 발표했을 정도로,
그는 철저히 고립된 속에서 시와 함께 했어요.

물론, 에밀리에게 사랑이 한번만 거쳐 간 것은 아니지만,
그는 독신생활을 청산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오랜 친구이자, 아내를 잃고 홀로 된 로드 판사와도,
사랑을 나눴습니다.

두 사람의 서신에서도 서로 사랑했음이 충분히 드러나 있었지만,
이미 익숙해진 독신생활을 버리지 못해,
그의 청혼을 거절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어요.

그러나 1884년 로드 판사가 죽자,
실의에 빠져 있던 에밀리는,
결국 건강 악화로 2년 뒤인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다시 겪은 사랑의 아픔, 그의 전부였던 시도,
그를 더 이상 지탱시켜주지 못했나 봅니다.

 
 

에밀리가 죽은 뒤, 그의 동생이 1775편에 달하는 시를 묶어 발표했습니다.
그의 시는 1890~1945년 동안 8권의 시집으로 묶여 출판됐고,
살아생전 주목받지 못했던 그의 시들은 20세기에 와서 제대로 평가를 받았어요.
그는 겉으로 보기엔 은둔자였지요. 가사 일을 끝내고 이층 방안에서 시작에만 몰두하는 것이 그의 일과이다시피 했으니.
그러나 시와 편지를 보자면 열정적이고 재치있는 예술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엔 친밀한 언어로 생과 죽음, 영원과 자연 등에 대해 무한한 상상과 사색, 사랑과 이별을 담았습니다.
그의 예술혼은 그래서 아직도 후세인들에게 전파되고 입에 오르내리는 것 아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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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과 고독 그리고 화해의 질서

                                  - 姜銀蕎(시인)

1. 시인의 위치

<시인이란 아마도 자기의 시대를 증오하게 마련이다.
시인이란 말하자면 추방당한 자이다>라는
Allen Tate의 견해는 Emily Dickinson 이라는
한 신비한, 영원한 처녀 시인에게 있어
그 어떤 얘기보다 정당성을 지닌다.

그녀는 이 세상을 끝마칠 때까지 처녀였다.
현실적으로 결혼을 거부하였을 뿐 아니라,
당대의 사회, 또는 문학이라고 이름지어지는 모든 행위
가령 자신의 시를 발표한다거나, 저술을 한다든가, 명성을 기다린다든가 하는,
일체의 관습 (나는 이런 것을 감히 관습이라는 표현을 쓰기로 한다)
에 타협할 것도 거부했다.

그리고 이런 거부는 물론 의식적이라기보다는 천성적,
또는 천부적인 것이었다.
그녀는 생전에 겨우 7편 가량의 시를 <세상에 보일 목적>으로랄까,
지면에 발표했다.
그러나 곧 그녀는 발표를 포기하고 자기의 울타리 안으로 숨어 버렸다.
왜냐하면 당시로서는 그녀의 시는 받아들여지기 곤란한 것이었고,
그 다음 그녀의 독특한 스타일
즉 dash의 사용과 대문자의 사용,
또 행과 연의 특이한 구분 따위는
편집자의 기이한 눈총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완전히 홀로 시를 썼다.
문학적인 대화 같은 것을 시도하지도 않았다.
(다만 한번 T.W.Higginson 에게 문학에 대한 충고를 요청하는 편지를 띄운 일이 있을 뿐이다)
거기에 당시의 사회는 비평 의식이 그렇게 활발하지 못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녀의 시는 완전히 가려진 채 시인의 고독 속에서 은밀히 창조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1700 여편의 원고 뭉텅이와
한 순수한 생애를 서랍속에 감추고
일생동안 거의 한 번도 떠나지 않은 고향집에서
소리없이 세상을 하직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부활했다. 이번에는 완전하고 위대한 한 시인으로서.
정확히 말하자면 그건 1955년이후,
그러니까 시인의 사후 69년이 되는 해의 일이었다.
그해에 비로소 그녀의 본격적인 시집이 3권으로 Havard에서 출판되었고,
그때부터 Emily Dickinson은 한 위대한 미국의여류시인으로서 재조명을 받게 된 것이다.

흔히 시인의 최초, 최대의 허영 (정확한 묘사인지는 모르지만)은
발표 또는 어떤 식이든 간에 독자에의 전달에 있다고 말해진다
. 그래서 시인들은 현실적으로 돈이 되지 않더라도
대개 한 두 권끔 생전에 시집을 만들어 보거나
발표를 꿈꾸거나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에밀리 디킨슨은 결코 스스로 시집을 만들지 않았다.
그녀의 근원적인 절망과 고독은 그런 최초의 허영마저도
극복해버리게 했고 그 때문에 문학 사상 에밀리 디킨슨처럼
사후의 시집 간행으로 시 자체에 수난을 당한 시인은 없게 된 것이다. 

2. 생애

1830년은 영문학 사상 두 개의 별을 지상에 태어나게 한
묘한 인연의 해였다.
영국의 여류시인 크리스티나 로제티와 미국의 에밀리 디킨슨이 그 두 별이다.
같은 12월에 닷새의 간격을 두고, 로제티는 5일에
디킨슨은 10일에 한 사람은 런던에서
, 한 사람은 미국동북부 매사추세츠주의 Amherst에서 각각 출생하였던 것이다.

두 시인은 그러므로 자주 대조되어 얘기되는데,
로제티가 감성의 시인이라면 디킨슨은 지성의 시인으로
전자가 따뜻한, 음악적인 시를 썼다면
후자는 냉정하고 고독한, 은둔자의 시를,
또 전자의 시가 즐거움을 노래했다면
후자의 시는 깊은 비애를 노래한 것이었다.

두 사람의 가계에서도 이런 대비는 성립되는데
로제티의 아버지가 이탈리아계의 학자였던 반면에
디킨슨의 아버지는 법률가로 그곳 Amherst의 유지였다.
디킨슨에게 있어 아버지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아버지 주위에는 친구들이 늘 많이 드나들고 있었고
이들은 대체로 상류층 사람들이었다.
또 집에는 아버지의 커다란 서재가 있었는데,
민감한 에밀리 디킨슨은 이 서재와 드나드는 사람들을 통해서,
말하자면 세계를 엿듣고 있었다.
그녀는, 소녀시절에는 가족과 친척, 친구들 사이에서
재치있고 영리하며 호기심 많은 소녀로 평판이 나 있었다.
그러나 자라면서 어찌된 일인지 그녀는 외부세계,
또는 외부의 현실에 대한 관심을 잃어갔다.
그리고 24세가 될 무렵에 이르러선
<난 무슨 큰 일이 생기지 않는 한 절대로
집을 떠나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차츰 그것은 현실이 되어 갔다. 그
녀는 잠시의 볼일 외에는 결코 일생 동안 집을 떠나지 않았으며,
아버지의 집 안에 스스로를 감금시켜 버렸다.
한정된, 현실의 육체적인 여행보다는 더욱 광대하고
본질적인 정신의 여행을 하고 있었다고나 할까.
그러면서 스스로 둘러친 그 사소한 사물들의 울타리 안에서
그녀는 순간과 동시에 영원에 부딪치고,
삶과 함께 죽음을 깨달으며 자기의 궤적을 시화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런 이유만으로도 그녀의 생애는
다른 어떤 당대의 시인들보다 신비에 가려져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편지라든가 산문 또는 시의 연대같은 것들의 증거에 의해서,
후세에 와선 1860년 경 그러니까 그녀가 30세가 되던 무렵에
그녀에겐 결정적인 어떤 사건이 일어났던 것으로 풀이되곤 한다
. 그것은 사랑의 사건이었다.

30세란 여성에게 있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성숙기에 접어드는 시기이고,
이것은 한 여성으로서의 디킨슨에게나 또는 한 시인으로서의
디킨슨에게나 마찬가지로 해당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실패로 끝났다.
실연의 불꽃은 곧 시로 폭발되었고, 그녀의 절망은
시 속에서 하나의 세계로 승화되었다.
그 세계란 고독하고 비극적인, 인간의 본질적인 삶의 세계였다.
그녀는 그 속에 스스로를 감추고, 고독, 절망의 손길에 자기를 쓰다듬어 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녀는 현실에의 문을 완전히 닫았다.
현실의 결혼도 물론 거부되었다.
그녀는 돌처럼 자연스레 인간과 삶, 시간, 우주 따위를 이해하여 갔고,
거기에 일푼의 항거도 없이 융화되어 갔다.

그녀는 대신 우주와 결혼했다.
그녀의 남성은 성스런 세계, 끝도 없고 시작도 없는
영원한 세계 속의 우주로 대체되었다.
그에게 그녀는 전신을 바쳤고,
소박한 옷을 차려 입었으며, 매일 기도의 노래를 지었다.
그 노래들은 그때로부터 6년 동안 거의 1000여편이 이어졌다.
그 숫자는 그녀의 일생동안의 작품 수의 반 이상을 넘는 것이었다.
1862년 한 해에만 그녀는 366편의 시를 썼다. 

3. 시의 테마

에밀리 디킨슨의 시는 여러가지의 분류방법으로 분류하지만
- 가령 사랑에 관한 것, 자연과 신에 관한 것, 경구, 단상 등 -
여기선 죽음을 주제로 한 것,
자연에 대한 이해에 관한 것,
시인의 개인적인 실연의 고백을 주제로 한 것으로 나누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세가지의 주제는 인류의 영원한 주제일 뿐 아니라 1
800년대의 한 여류시인이 오늘날 어떻게 우리에게 공감과 애정을
일으킬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의 대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그녀에게 있어서 죽음의 주제는 거의 절대적이다.
그녀의 죽음은 보편적인 서구의 죽음
- 즉 기독교적인 고통의 죽음, 그리고 그 고통함으로써
극복하는 죽음과는 상당히 특이한 양상을 띤다.
그녀의 죽음은 따뜻한 구원자로서
꽃마차(carriage, chariot)의 이미지를 빌려
다가오는 끊임없는 원망(願望)의 대상이 된다.
그녀의 죽음은 어떻게 말하면 동양적인 자비,
구제의 모습을 띠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기다린다.
시간에 실려 끝없이 삶이라는 원 위를 돌면서
그 죽음의 꽃마차가 자기의 영혼을 실어주기를 꿈꾸는 것이다.

Beacause I could net stop for death-
He kindly stopped for me
The Carriage held but just Ourselves-
And Immortality. (이하 생략)
 
내 죽음 때문에 멈출 수 없기에-
친절하게도 죽음이 날 위해 멈추었네-
수레는 실었네, 우리들 자신은 물론-
또 영원을.
그녀의 시 중에 가장 완벽하게 써진 것으로 평가되는 이 시는
그런 죽음의 모습을 아주 극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시인은 이 죽음을 삶 속에서
늘 직관적, 또는 선험적으로 경험한다.
그러므로 에밀리 디킨슨의 죽음은 동양의 죽음에 가까운 것이다.
이런 죽음과의 친교
, 그것은 시인에게 하나의 질서를 요구한다.

그것은 즉 고독이다. 고독이 죽음에의 제물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고독은 곧 시인의 절망을 합리화 하고
순화하며 이러한 절망의 순화를 통해 세계와의 화해,
또는 융화라는 <종말적 성취>에 시인은 성공적으로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쉽게 단계적으로 축소 한다면
< 시인--> 절망--> 고독--> 죽음--> 우주--> 화해 > 라는 표식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또 자연에의 통찰을 주제로 한 시의 그룹이 있다.
그녀에게 있어 자연은 그러므로 어찌할 수 없는 완벽한 세계이다.
자연은 그것 그대로 <성취>이다.
그 속에서 산은 눈치채지 못하게 자라고 (The Mountain grow unnoticed) 물은 끝없이 흐르며,
곳곳에서 화산이 터질 준비를 하고 있다.
그 목적은 물론 아무도 모른다.
인간은 숨으려고 하지만 결코 숨을 수 없다.
그것이 자연의 질서인 것이다.
인간은 끝나지만 자연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이것은 시인에게 있어 절망이자
또 희망이 된다. 고통스런 희망 그녀는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시인의 고독과 절망은 다시 한 번 확인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개인적인 고백의 시,
즉 실연의 테마를 우린 배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실연의 시들은 모두 날짜가 써 있고, 빠른 필적으로 써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미지들은 그녀에 대해 놀랄 정도로 에로틱하고
열정적이며 자기를 몰입시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돌처럼 냉정하게, 하잘 것 없이, - 고통도, 비애도 넘어선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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