清明(청명) - 杜牧(두목)
淸明時節雨紛紛(청명시절우분분) : 청명절 즈음에 비가 어즈러히 내려
淸 : 맑을 청
明 : 밝을 명
時 : 때 시
節 : 마디 절
雨 : 비 우
紛 : 어지러울 분
紛 : 어지러울 분
路上行人欲斷魂(노상행인욕단혼) : 길 걷는 나그네의 넋을 잃게 하네,
路 : 길 로
上 : 위 상
行 : 다닐 행
人 : 사람 인
欲 : 바랄 욕
斷 : 끊을 단
魂 : 넋 혼
借問酒家何處有(차문주가하처유) : 주막이 어디냐 물었더니,
借 : 빌릴 차
問 : 물을 문
酒 : 술 주
家 : 집 가
何 : 어찌 하
處 : 곳 처
有 : 있을 유
牧童遙指杏花村(목동요지행화촌) : 목동은 멀리 행화촌을 가리키네.
牧 : 칠 목
童 : 아이 동
遙 : 멀 요
指 : 손가락 지
杏 : 살구나무 행
花 ; 꽃 화
村 : 마을 촌
杏花村(행화촌) : 살구꽃 핀 마을, 주막(酒幕)이 있는 마을.
이 시에서 나오는 행화촌(杏花村)이
바로 중국 명주의 하나인 분주(汾酒)와 죽엽청주(竹葉靑酒)를 만드는
산서(山西)성 분양(汾陽)시 행화촌이다.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과거에 분주를 만들때
살구씨가 필요해서 당(唐)조에 이르러
행화촌 인근지역에 많은 살구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때문에 당조대부터 행화촌으로 불리운 지명은 술과 연관된다고 할수 있다.
행화촌의 주기(酒旗)와 목동,
행화촌은 술집을 의미한다.
이것은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의 〈청명(淸明)〉에서 유래한다.
그래서 지난날 길가의 막걸리 술집 기둥에는 위의 두목의 시구절을 써 붙였다.
그래서 따로 주기(酒旗)가 꽂혀 있지 않아도
선비는 금세 술집임을 알아차리고 발걸음을 그 집 안으로 옮길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술집 앞에는 으레 한두그루의 살구나무를 심었다.
이 경우 그 살구나무는 그 술집의 훌륭한 표지 구실을 하였다.
조선 선조 때의 문신이자 학자였던 조호익(曺好益)의 문집
[지산집(芝山集)]에 실려 있는 〈살구꽃(杏花)〉이란 제목의 시에
"오직 문앞에 붉은 살구나무가 있으니(惟有門前緋杏樹)
길가는 나그네가 응당 술집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네 (行人應擬酒家看)"
라는 구절을 볼 수 있다.
杜牧(두목) :
경조(京兆) 만년 (萬年 : 지금의 산시 성[陝西省] 시안[西安])(803 ~ 852)
중국 당대(唐代)의 시인.
자는 목지(牧之).
828년 진사(進士)에 급제했다.
후에 황저우[黃州]·츠저우[池州]·무저우[睦州]·후저우[湖州] 등에서
자사(剌史)를 지냈고 중서사인(中書舍人)이 되었다.
시(詩)에서 이상은(李商隱)과 나란히 이름을 날려
'소이두'(小李杜 : 작은 李白·杜甫)라고 불렸다.
고시(古詩)는 두보·한유(韓愈)의 영향을 받아 사회·정치에 관한 내용이 많다.
장편시 〈감회시 感懷詩〉·〈군재독작 郡齋獨酌〉 등은
필력이 웅장하고 장법(章法)이 엄정하며 감개가 깊다.
근체시(近體詩)는 서정적이며 풍경을 읊은 것이 많은데
격조가 청신(淸新)하고 감정이 완곡하고도 간명하다.
청명절(淸明节)이란 ?
청명절(淸明节)은 중국 주나라때에 시작되여 이미 2000여년의 역사를 갖고있다.
이십사절기의 하나로 춘분(春分)과 곡우(穀雨)의 사이에 들며, 양력으로 4월 5일 무렵이다.
물론 음력의 절기이기는 하나 매년 그 날자는 일정하지 않다.
이십사절기는 중국에서부터 시작 된 것으로
중국은 청명절의 하루 전이 한식, 한국은 다음날이 한식(寒食)이다.
‘하늘이 차차 맑아진다’는 의미의 청명절(淸明節)은
다섯 번째 절기로 동지(冬至)로부터 105일째 되는 날이고,
찬 음식을 의미하는 한식(寒食)은 설날, 단오, 추석과 함께 4대 명절 중의 하나다.
중국의 청명절 풍습은 보통 조상의 묘를 찾아 성묘하고
봄꽃놀이나 나들이를 떠난다는 점에서 한국과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성묘뿐 아니라, 답청, 그네뛰기, 버드나무 가지 꽂기, 공놀이 등 보다 다양한 풍습들이 전해진다.
한식(寒食)의 유래 - 개자추를 추모하다.
춘추전국시대에 진문공(晋文公)은 춘추오패 중의 한 사람으로 천하를 호령하였지만,
그가 왕위에 오르기 전 공자의 신분 희중이(姬重耳)로 있을 당시는 그리 평범한 삶이 아니었다.
왕위 계승권을 두고 배 다른 형제들과의 암투에 휘말리며 아버지 헌공에게 추방을 당하고
19년을 이 나라 저 나라로 망명 생활을 하며 갖은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그의 밑에는 목숨을 걸고 보필한 충신들이 여럿 있었고, 개자추(介子推)역시 그 여럿 중의 하나였다.
어느 날 공자 희중이가 배가 고파 헛것이 보이며 아사지경에 놓여 있을 때
개자추는 어디서 생겼는지 고깃국 한 그릇을 중이에게 바쳤고,
그 고깃국의 출처를 알 길도 없이 맛나게 먹은 중이가 자초지종을 알아보니 그 고깃국은 개자추의 허벅지살 이었던 것이다.
“ 넓적다리를 베어 임금에게 먹인다는 뜻으로 할고담군(割股啖君)이라는 고사 성어가 있다.
”개자추는“효자는 제 몸을 죽여서 까지 부모를 섬기고, 충신은 제 몸을 죽여서 까지 임금을 섬기는 것”이라며
자신의 허벅지 살을 도려내어 고깃국이라며 끓여 바칠 정도의 충정을 보였던 것이다.
할고담군(割股啖君)이라는 성어는 이때 생겨난 것이다.
그 후 공자 중이가 왕위에 오른 후 논공행상을 벌일 때, 일등공훈은 당연히 개자추에게 돌아가야 마땅했었다.
그런데 논공행상이 모두 끝났을 때 개자추의 이름은 없었던 것이다.
논공행상이라는 잔치만 흥겨웠을 뿐이지 진문공과 신하들의 눈에는 개자추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기실 개자추는 처음부터 논공행상엔 참여 할 생각이 아예 없었던 것이다.
진문공과 그의 충신들은 진문공이 왕으로 추대되어 오르는 귀국길의 배 안에서 논공행상을 벌이는 과정을 개자추는 지켜보며,
진문공과 한 때는 동지였던 신하들 모두의 속물근성에 침을 뱉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논공행상의 자리에 얼굴을 내밀지도 않았거니와
나중에 정신이 돌아 온 진문공의 부름을 피하여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산으로 달아났던 것이다.
이들의 처지를 가련하게 생각한 개자추의 시종은 궁궐 대문에 시를 적었고,
이를 본 진문공이 개자추가 생각나 뒤늦게 찾았지만,
이미 개자추는 금상(錦上)에 있는 산속에 들어간 이후였다.
진문공은 대신 주변 땅을 그에게 봉토로 주고 산의 이름을 개산(介山)으로 칭했다.
산속에서 은거하는 개자추를 찾기 위해 문공은 산에 불을 놓았고, 건조한 날씨에 삽시간에 온 산을 다 태워 버렸다.
하지만, 개자추와 그의 모친은 나오지 않고 불 속에서 목숨을 잃었다.
뒤늦게 자신의 과오를 깨달은 진문공은 그를 기리기 위해 이날만은 불을 피우지 못하게 했다.
불을 피우지 않고 찬 음식을 먹는 한식(寒食)이 여기에서 비롯됐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나오는 이야기로,
후일에 탐천지공(貪天之功) 즉 "하늘의 공을 탐내어 자신의 공인 체 한다"는 고사 성어가 생겨나기도 하였다........(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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