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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人는 언어란 감옥의 감옥장이다...
2016년 10월 01일 18시 25분  조회:3939  추천:0  작성자: 죽림

 

시의 언어에 대하여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카는 시의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 했다. 모든 존재가 언어에 의하여 명명되었을 때 비로소 존재의미를 갖게 된다는 뜻이다. 언어로 이름지어지기 이전의 존재는 이미 존재로서의 가치가 없다. 아니 존재의미가 드러나지 아니한 상태인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언어는 존재를 밝히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언어의 힘을 빌려서 존재를 인식한다. 존재가 가지고 있는 외연뿐만 아니라 그 본질까지도 인식한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언어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시는 언어를 재료로 하는 예술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는 존재 인식의 세계를 그 영역 안에 끌어들이게 된다. 혹자들은 시가 존재를 밝히기 위하여 존재해야 하는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이런 입장에서 시인은 존재에 이름을 부여하는 명명자로서 절대 권능을 갖는다. 시인은 한 편의 시로서 그가 인식한 존재의미를 드러내 보여주어야 한다. 그 인식이 얼마나 새로우며 깊이 있는가에 따라 시의 수준도 결정된다. 
그러나 시는 언어예술로서 미학적 토대 위에 있어야 한다. 여기서 시의 언어는 우리가 현실에서 사용하는 일상적 언어와 다르다는 자각이 전제되어야 한다. 특히 시가 예술의 영역에 있음을 고집하고자할 때 더욱 그렇다. 언어가 가지고 있는 실용적 기능, 즉 사전적 의미인 개념 전달의 기능만으로는 미학적 진실에 도달하기가 어렵다. 존재의 시적 인식에도 방해가 된다. 시는 실재적인 것만을 지시하는 설명적 언어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비실재적 세계를 가시화할 수 있는 함축적인 언어를 요구한다. 
시에서 이미지가 중요시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미지화된 언어는 시를 살아 있는 예술로 느끼게 하는 힘이 있다. 시인이 존재를 어떤 언어로 인식하느냐 하는 것도 이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존재를 개념으로 인식하느냐 이미지로 인식하느냐 하는 문제는 시와 철학을 구별하는 기준이 된다. 존재의 철학적 인식과 미학적 인식의 경계가 여기에 있다. 시인이 시에서 관념적 세계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는 이유도 시를 예술의 영역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미 기성의 관념의 때가 묻은 언어를 시인은 과감히 버려야 한다. 그래야만이 상상력의 새로운 눈으로 존재를 인식하게 되고 시적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누구도 그 사내의 얼굴을 모른다 
진종일 죽은 듯 기척이 없다가 
밤중이면 뚜벅뚜벅 
느린 발자국 소리 시멘트 바닥을 울린다 
두꺼운 벽 굵은 쇠창살 
그리고 파수병의 섬엄한 총검도 
그 소리만은 어쩌지 못한다. 
어쩌지 못하는 그 소리는 겨울의 소리 
천지가 골수까지 얼어붙는 소리 
별빛이 얼음에 박히는 소리 
사람들아 빙하시대에 떼죽음을 한 
공룡의 무덤을 아는가 
머리를 깎이운 복면의 삼손이 
오늘밤도 그 무덤을 찾아가는 
둔중한 발자국 소리 들린다 
--------이형기의 <복면의 삼손> 전문 

이 시는 제목부터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시 대상을 뛰어넘고 있다. 여기서 복면한 삼손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인물을 가리키지 않는다. 변형된 의미, 또는 새로운 인식의 세계를 보여주기 위한 창조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시를 다 읽고 나면 복면한 삼손이 시인의 독특한 안목으로 새롭게 인식한 겨울의 소리에 대한 비유적 이미지란 것을 알 수 있다. 겨울의 소리를 삼손의 이미지로 유추할 수 있기까지 시인은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명명자로서의 탐구가 있었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탐구는 과학적 개념 추구를 뜻하지 않는다. 시인은 직관으로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야 하고 그것을 시의 언어로 드러내야 한다. 
그러면 겨울의 소리와 복면한 삼손이 시안에서 같은 의미관계로 동거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 근거의 설득력 여부가 시의 성패를 가름한다고 볼 수 있다. 동시에 겨울의 소리에 대한 존재인식이 얼마만큼의 울림으로 시적 전달력을 갖게 되는가를 결정하게 된다. 
이 시에서 겨울의 소리는 진종일 죽은 듯 기척이 없다가 밤중이면 뚜벅뚜벅 찾아오는데, 두꺼운 벽 굵은 쇠창살로도 가둘 수 없고 파수병의 삼엄한 총검도 어쩌지 못할 정도로 위력적인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천지를 골수까지 얼어붙게 하고 별빛이 얼음에 박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 추위의 위력을 실감하게 하는 표현이다. 이쯤되면 겨울을 세기의 역사 삼손에 비유하는 이유도 납득이 된다. 
그런데 이 시는 겨울의 위력적 이미지만을 표출하지 않는다. 시인의 상상력은 빙하시대에 떼죽음을 한 공룡의 무덤을 겨울 이미지의 연장선상에서 떠올림으로써 시적 인식의 폭을 확장한다. 보이지 않는 실체이면서 위력적 존재이기에 삼손으로 비유되는 겨울, 그 겨울의 향방을 상상하게 한다. 여기에 동화적 상상력이 개입하여 미학적 구조를 형성한다. 겨울의 움직임을 복면한 삼손이 무덤을 찾아가는 둔중한 발자국 소리로 형상화하여 상상력의 폭을 넓히고 있는 것이다. 이 시가 미학적 구조 위에 있다는 것은 관념 진술의 언어가 거의 없고 시적 대사을 이미지화하는 구상적 언어가 주를 이루고 있다는데서 찾아진다. 그리고 시 전체가 내용상 기승전결의 극적 구조를 바탕으로 이미지를 전개하고 있다. 이것은 시를 구성하는 각 개의 이미지들이 하나의 주 심상을 중심으로 의미의 연결고리를 가지면서 긴밀한 내적 통일을 이루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덩쿨장미는 가시를 맞대고 
아프게 뻗어 오른다 
담장 위로 지붕 위로 
서로 얽히면서 
찌르고 찔리면서 
휘어지면서 끝쯤에 이르러 
꽃을 달고 얼굴을 
들어 내 보인다 
그러나 
따로 이름은 없다 
-------이병훈의 <가시> 전문 

이병훈의 시 <가시>는 인식의 시에 속한다. 인식의 시에서는 시적 대상에 대한 관찰력의 예민함이 관건이다. 똑 같은 대상이라도 시인의 독특한 안목으로 새롭게 인식된 세계를 획득했을 때 설득력을 갖는다. 자칫 이런 유의 시가 빠지기 쉬운 함정은 누구나 쉽게 하는 평이한 인식을 평이한 진술로 드러냈을 때이다. 그 대 독자는 전연 시적 긴장을 느끼지 못한다. 시의 생명인 경이감도 창출되지 못한다. 인식의 내용이나 표현이 경이감으로 전달되지 못하면 시는 예술로서의 존재 가치를 획득할 수 없다. 
시 <가시>는 서술적인 시어를 주로 사용하고 있다. 부사어와 동사를 통하여 시적 대상의 움직임이나 변화과정을 묘사하거나 진술한다. 덩쿨장미가 꽃을 달기까지의 과정을 가시를 맞대고, 아프게, 서로 얽히면서 찌르고 찔리면서 또는 휘어지면서 등의 서술어를 통하여 형상화한다. 그리하여 생명 탄생의 배면에 준재하는 인고의 세월을 감지하게 한다. 찔리는 아픔과 서로 얽히는 고달픔과 휘어지는 좌절의 시간을 인내한 결과로서 하나의 생명이 존재하게 된다는 인식을 이 시는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시는 이런 인식의 내용을 직접 설명하지 않는다. 덩쿨장미가 성장하는 과정을 관찰하여 형상화하는 언어를 구사하고 있다. 물론 외적 현상만을 제시하지 않는다. 상당히 내면화된 현상이다. 이 점이 시적 인식의 울림으로 전달되는 근거다. 거기에다 생명 탄생의 결과를 놓고 따로 이름은 없다고 진술함으로써 생명의 근원적 허무를 암시한다. 무릇 모든 생명적 존재는 일회성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이 시는 인식의 공명을 확보하고 있으면서도 시적 상상력의 폭은 좁다. 원거리 이미지의 연결이 없기 때문이다. 서술적 시어로는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의 확장이 어렵다는 사실을 이 시는 보여주고 있다. 단조로운 느낌, 어떤 틀 안에 갇힌 듯한 한계성을 느끼게 한다. 

내 수첩에는 바다가 들어 있다. 
파도가 싱싱한 기억을 톡톡 건져낸다. 

'나의 20년' 유행가 가사가 울려 퍼지던 사춘기 시절 
철 이른 비인 해수욕장은 
내 퇴화된 꼬리뼈에 자꾸만 방울을 달아준다 
파도가 칠 때마다 
바다에서는 방울 소리가 난다 

벚꽃이 도톰한 입술로 휘파람 소리를 내던 열아홉 살 
작약도 별빛을 모두 삼킨 활화산이 된다. 
백야의 아찔한 울렁거림으로 폭발하던 
심장 소리가 들린다. 

뼈 속으로 내리는 장대비를 맞던 어느 해 추운 겨울 
해운대는 퉁퉁 부풀어오른 상처를 안고 넘어진다. 
온종일 그 곳에서 
하얀 얼굴로 내 이름을 지워낸다. 

꽃샘추위에 마음을 베어버린 어느 해 새벽 
무작정 강릉행 고속버스를 탄 싸락눈이 
밤새 경포대에 뛰어들었다.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너를 안고 
나도 바다에 뛰어든다. 

수첩 속에서 바다가 꿈틀거린다. 
내가 바다가 된다. 
------박 윤의 <내 수첩에는 바다가 들어 있다> 전문 

박 윤의 시는 생동감이 넘친다. 감각화된 시들이 그런 느낌을 더욱 입체화시키고 있다. 살아 숨쉬는 언어가 신선함으로 다가온다. 박 윤은 언어를 이미지로 갈고 닦는 조련사로서의 역량을 보인다. 물론 이 시의 언어가 일상성의 지시 기능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하는 시인의 의식으로 해서 일상성을 환기하는 지시적 기능을 일정 부분 갖는다. 그러나 그 기능에만 머무르지 않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비약적 이미지를 만드는 기법에서 이 시인의 언어를 다루는 장인적 능력을 보게 된다. 
이 시에서 표현되고 있는 바다는 추억 속에 들어 있는 19살 사춘기 시절에 만났던 과거의 바다다. 그러니까 시인의 의식 속에 자리 하고 있는 이미 나와 일체가 된 바다다. 바다가 수첩 속에 있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를 내포한다. 바다는 과거의 다른 기억과 중첩되어 의식 속에서 살아 있다. 그래서 바다는 과거의 기억을 떠오르게 하는 작용도 한다. 비인 해수욕장이 퇴화된 꼬리뼈에 방울을 달아준다. 또는 파도가 칠 때마다 바다에서 방울 소리가 난다는 표현은 그런 의미망을 형성한다. 퇴화된 꼬리뼈란 기억 속에 갇힌 과거의 추억일 것이고 방울소리는 그것을 자꾸 의식선상에 떠오르게 하는 바다의 작용일 것이다. 
이 시가 그려 보여주고 있는 과거의 추억은 누구나 성장하면서 한번은 겪어야 하는 통과의례적인 사춘기 시절에 얽힌 이야기다. 3연에서 5연까지의 내용은 이런 고백적 진술을 이미지 속에 감추고 있다. 자꾸 말하고 싶은 화자의 의식이 잡힌다. 이 때 잘못하면 상투적인 서술적 진술로 흘러서 시적 긴장감을 해칠 위험이 있다. 그런데 이 시는 감각적인 이미지와 지시적인 언어가 적당히 조화를 이루면서 꽤 감동적으로 전달된다. 사춘기 소녀의 막연한 기대와 황홀감에 젖어 들뜨는 심리 변화과정, 그리고 상처 받고 절망하는 그 시절의 상반된 의식이 감각화된 언어 속에 용해되어 경이감을 창조해내고 있다. 그러나 시가 지나치게 감각화되면 경박해질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시인은 언어에 대한 자각이 우선되어야 한다. 언어의 효능에 대한 자각 없이 훌륭한 예술의 시는 창조되지 않는다. 예술이 표현이라는 고유영역을 고집하는 한 이 명제는 절대 진리다.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도 언어의 창조기능을 살리지 못하면 드러나지 않는다. 시적 감동도 결국 언어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이다. 시인이 존재의 집을 짓는 사람이라고 했을 때 역시 언어의 기능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시인은 새로운 존재의 집을 짓기 위하여 언어를 새롭게 갈고 닦아야 한다. 언어에 윤활유를 부어야 하고 오랜 세월 동안 묻은 관념의 때를 벗기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랬을 때 비로소 시는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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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동 버스 종점 
―최호일(1958∼ )

버스를 잘못 내렸네 장지동은 모르는 곳

입이 없고 커다란 모자를 눌러쓴 사람이 내 몸에 모르는 물건을 놓고 나간 듯 신열이 나고 개망초 꽃이 보였네

탁자가 있고 낡은 시간이 놓여 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고
머리칼이 하얀 남자가 상점에서 라면을 끓이고 있었네

칠십 년대식으로 사이다를 샀네 나는 이미 사라진 
풀벌레 소리인가 아마존의
주인 없는 미나리 밭으로 두 시간 걸어온 걸까


 
시계가 고장 나 지구별에 늦게 도착한 고양이의 신음 소리를 냈네
나 장지동에 잘못 왔네 라면을 먹지 않았네

내 몸은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이 다녀간 곳

장지동에 가야겠네 그곳은 한없이 가다가 개망초 앞에서 멈추는 곳

미나리 밭을 지나 목성을 지나 더 먼 별의 기억을 지나 라면을 후후 불며 먹고 와야겠네

나도 모르는 사이
사라진 시간을 찾아서 지우고 와야겠네


 
서울 송파구 장지동에 나도 한 번 가 본 적이 있다. 강북 구시가에 사는 내게는 멀기도 멀더라. 서울이 엄청 넓어졌다. 늦은 밤에 버스에서 잠들었다가 버스기사가 흔들어 깨울 때야 눈을 뜬다면 여간 난감하지 않을 테다. 택시요금이 꽤 나올 테다. 한남동이나 마포가 버스 종점인 시절이었다면 집까지 걸어갈 수도 있으련만. 다행히도 화자는 한낮에 버스에서 잘못 내렸다. 

졸지에 모르는 동네, 그것도 개망초 꽃 핀 공터며 ‘머리칼이 하얀 남자가 라면을 끓이고 있는’ 구멍가게가 있는 한적한 옛날 동네에 떨어진 화자는 어리둥절하고 막막하다. ‘입이 없고 커다란 모자를 눌러쓴 사람이 내 몸에 모르는 물건을 놓고 나간 듯 신열이’ 난단다. 여기가 어딘가요? 이건 70년대 아닌가? 화자가 모르는 새 뚫고 지나온 시간의 막이 기이한 감촉으로 휘어지는 듯하다. 그렇거나 말거나 여긴 목적지가 아니지. 화자는 사이다 한 병 사서 마시고 장지동을 벗어난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예사로운 일을 시인은 예사롭지 않은 사건으로 기발하게 펼쳐 보인다. 최호일은 일상을 날선 감각으로 집요하게, 그러나 유유히 음미하며 낯설게 하는 재능을 타고난 듯한 시인이다.

 

 

 

 

 

 

시의 언어에 대하여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카는 시의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 했다. 모든 존재가 언어에 의하여 명명되었을 때 비로소 존재의미를 갖게 된다는 뜻이다. 언어로 이름지어지기 이전의 존재는 이미 존재로서의 가치가 없다. 아니 존재의미가 드러나지 아니한 상태인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언어는 존재를 밝히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언어의 힘을 빌려서 존재를 인식한다. 존재가 가지고 있는 외연뿐만 아니라 그 본질까지도 인식한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언어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시는 언어를 재료로 하는 예술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는 존재 인식의 세계를 그 영역 안에 끌어들이게 된다. 혹자들은 시가 존재를 밝히기 위하여 존재해야 하는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이런 입장에서 시인은 존재에 이름을 부여하는 명명자로서 절대 권능을 갖는다. 시인은 한 편의 시로서 그가 인식한 존재의미를 드러내 보여주어야 한다. 그 인식이 얼마나 새로우며 깊이 있는가에 따라 시의 수준도 결정된다.

그러나 시는 언어예술로서 미학적 토대 위에 있어야 한다. 여기서 시의 언어는 우리가 현실에서 사용하는 일상적 언어와 다르다는 자각이 전제되어야 한다. 특히 시가 예술의 영역에 있음을 고집하고자할 때 더욱 그렇다. 언어가 가지고 있는 실용적 기능, 즉 사전적 의미인 개념 전달의 기능만으로는 미학적 진실에 도달하기가 어렵다. 존재의 시적 인식에도 방해가 된다. 시는 실재적인 것만을 지시하는 설명적 언어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비실재적 세계를 가시화할 수 있는 함축적인 언어를 요구한다.

시에서 이미지가 중요시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미지화된 언어는 시를 살아 있는 예술로 느끼게 하는 힘이 있다. 시인이 존재를 어떤 언어로 인식하느냐 하는 것도 이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존재를 개념으로 인식하느냐 이미지로 인식하느냐 하는 문제는 시와 철학을 구별하는 기준이 된다. 존재의 철학적 인식과 미학적 인식의 경계가 여기에 있다. 시인이 시에서 관념적 세계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는 이유도 시를 예술의 영역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미 기성의 관념의 때가 묻은 언어를 시인은 과감히 버려야 한다. 그래야만이 상상력의 새로운 눈으로 존재를 인식하게 되고 시적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누구도 그 사내의 얼굴을 모른다

진종일 죽은 듯 기척이 없다가

밤중이면 뚜벅뚜벅

느린 발자국 소리 시멘트 바닥을 울린다

두꺼운 벽 굵은 쇠창살

그리고 파수병의 섬엄한 총검도

그 소리만은 어쩌지 못한다.

어쩌지 못하는 그 소리는 겨울의 소리

천지가 골수까지 얼어붙는 소리

별빛이 얼음에 박히는 소리

사람들아 빙하시대에 떼죽음을 한

공룡의 무덤을 아는가

머리를 깎이운 복면의 삼손이

오늘밤도 그 무덤을 찾아가는

둔중한 발자국 소리 들린다

--------이형기의 <복면의 삼손> 전문

 

이 시는 제목부터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시 대상을 뛰어넘고 있다. 여기서 복면한 삼손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인물을 가리키지 않는다. 변형된 의미, 또는 새로운 인식의 세계를 보여주기 위한 창조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시를 다 읽고 나면 복면한 삼손이 시인의 독특한 안목으로 새롭게 인식한 겨울의 소리에 대한 비유적 이미지란 것을 알 수 있다. 겨울의 소리를 삼손의 이미지로 유추할 수 있기까지 시인은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명명자로서의 탐구가 있었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탐구는 과학적 개념 추구를 뜻하지 않는다. 시인은 직관으로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야 하고 그것을 시의 언어로 드러내야 한다.

그러면 겨울의 소리와 복면한 삼손이 시안에서 같은 의미관계로 동거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 근거의 설득력 여부가 시의 성패를 가름한다고 볼 수 있다. 동시에 겨울의 소리에 대한 존재인식이 얼마만큼의 울림으로 시적 전달력을 갖게 되는가를 결정하게 된다.

이 시에서 겨울의 소리는 진종일 죽은 듯 기척이 없다가 밤중이면 뚜벅뚜벅 찾아오는데, 두꺼운 벽 굵은 쇠창살로도 가둘 수 없고 파수병의 삼엄한 총검도 어쩌지 못할 정도로 위력적인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천지를 골수까지 얼어붙게 하고 별빛이 얼음에 박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 추위의 위력을 실감하게 하는 표현이다. 이쯤되면 겨울을 세기의 역사 삼손에 비유하는 이유도 납득이 된다.

그런데 이 시는 겨울의 위력적 이미지만을 표출하지 않는다. 시인의 상상력은 빙하시대에 떼죽음을 한 공룡의 무덤을 겨울 이미지의 연장선상에서 떠올림으로써 시적 인식의 폭을 확장한다. 보이지 않는 실체이면서 위력적 존재이기에 삼손으로 비유되는 겨울, 그 겨울의 향방을 상상하게 한다. 여기에 동화적 상상력이 개입하여 미학적 구조를 형성한다. 겨울의 움직임을 복면한 삼손이 무덤을 찾아가는 둔중한 발자국 소리로 형상화하여 상상력의 폭을 넓히고 있는 것이다. 이 시가 미학적 구조 위에 있다는 것은 관념 진술의 언어가 거의 없고 시적 대사을 이미지화하는 구상적 언어가 주를 이루고 있다는데서 찾아진다. 그리고 시 전체가 내용상 기승전결의 극적 구조를 바탕으로 이미지를 전개하고 있다. 이것은 시를 구성하는 각 개의 이미지들이 하나의 주 심상을 중심으로 의미의 연결고리를 가지면서 긴밀한 내적 통일을 이루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덩쿨장미는 가시를 맞대고

아프게 뻗어 오른다

담장 위로 지붕 위로

서로 얽히면서

찌르고 찔리면서

휘어지면서 끝쯤에 이르러

꽃을 달고 얼굴을

들어 내 보인다

그러나

따로 이름은 없다

-------이병훈의 <가시> 전문

 

이병훈의 시 <가시>는 인식의 시에 속한다. 인식의 시에서는 시적 대상에 대한 관찰력의 예민함이 관건이다. 똑 같은 대상이라도 시인의 독특한 안목으로 새롭게 인식된 세계를 획득했을 때 설득력을 갖는다. 자칫 이런 유의 시가 빠지기 쉬운 함정은 누구나 쉽게 하는 평이한 인식을 평이한 진술로 드러냈을 때이다. 그 대 독자는 전연 시적 긴장을 느끼지 못한다. 시의 생명인 경이감도 창출되지 못한다. 인식의 내용이나 표현이 경이감으로 전달되지 못하면 시는 예술로서의 존재 가치를 획득할 수 없다.

시 <가시>는 서술적인 시어를 주로 사용하고 있다. 부사어와 동사를 통하여 시적 대상의 움직임이나 변화과정을 묘사하거나 진술한다. 덩쿨장미가 꽃을 달기까지의 과정을 가시를 맞대고, 아프게, 서로 얽히면서 찌르고 찔리면서 또는 휘어지면서 등의 서술어를 통하여 형상화한다. 그리하여 생명 탄생의 배면에 준재하는 인고의 세월을 감지하게 한다. 찔리는 아픔과 서로 얽히는 고달픔과 휘어지는 좌절의 시간을 인내한 결과로서 하나의 생명이 존재하게 된다는 인식을 이 시는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시는 이런 인식의 내용을 직접 설명하지 않는다. 덩쿨장미가 성장하는 과정을 관찰하여 형상화하는 언어를 구사하고 있다. 물론 외적 현상만을 제시하지 않는다. 상당히 내면화된 현상이다. 이 점이 시적 인식의 울림으로 전달되는 근거다. 거기에다 생명 탄생의 결과를 놓고 따로 이름은 없다고 진술함으로써 생명의 근원적 허무를 암시한다. 무릇 모든 생명적 존재는 일회성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이 시는 인식의 공명을 확보하고 있으면서도 시적 상상력의 폭은 좁다. 원거리 이미지의 연결이 없기 때문이다. 서술적 시어로는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의 확장이 어렵다는 사실을 이 시는 보여주고 있다. 단조로운 느낌, 어떤 틀 안에 갇힌 듯한 한계성을 느끼게 한다.

 

내 수첩에는 바다가 들어 있다.

파도가 싱싱한 기억을 톡톡 건져낸다.

 

'나의 20년' 유행가 가사가 울려 퍼지던 사춘기 시절

철 이른 비인 해수욕장은

내 퇴화된 꼬리뼈에 자꾸만 방울을 달아준다

파도가 칠 때마다

바다에서는 방울 소리가 난다

 

벚꽃이 도톰한 입술로 휘파람 소리를 내던 열아홉 살

작약도 별빛을 모두 삼킨 활화산이 된다.

백야의 아찔한 울렁거림으로 폭발하던

심장 소리가 들린다.

 

뼈 속으로 내리는 장대비를 맞던 어느 해 추운 겨울

해운대는 퉁퉁 부풀어오른 상처를 안고 넘어진다.

온종일 그 곳에서

하얀 얼굴로 내 이름을 지워낸다.

 

꽃샘추위에 마음을 베어버린 어느 해 새벽

무작정 강릉행 고속버스를 탄 싸락눈이

밤새 경포대에 뛰어들었다.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너를 안고

나도 바다에 뛰어든다.

 

수첩 속에서 바다가 꿈틀거린다.

내가 바다가 된다.

------박 윤의 <내 수첩에는 바다가 들어 있다> 전문

 

박 윤의 시는 생동감이 넘친다. 감각화된 시들이 그런 느낌을 더욱 입체화시키고 있다. 살아 숨쉬는 언어가 신선함으로 다가온다. 박 윤은 언어를 이미지로 갈고 닦는 조련사로서의 역량을 보인다. 물론 이 시의 언어가 일상성의 지시 기능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하는 시인의 의식으로 해서 일상성을 환기하는 지시적 기능을 일정 부분 갖는다. 그러나 그 기능에만 머무르지 않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비약적 이미지를 만드는 기법에서 이 시인의 언어를 다루는 장인적 능력을 보게 된다.

이 시에서 표현되고 있는 바다는 추억 속에 들어 있는 19살 사춘기 시절에 만났던 과거의 바다다. 그러니까 시인의 의식 속에 자리 하고 있는 이미 나와 일체가 된 바다다. 바다가 수첩 속에 있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를 내포한다. 바다는 과거의 다른 기억과 중첩되어 의식 속에서 살아 있다. 그래서 바다는 과거의 기억을 떠오르게 하는 작용도 한다. 비인 해수욕장이 퇴화된 꼬리뼈에 방울을 달아준다. 또는 파도가 칠 때마다 바다에서 방울 소리가 난다는 표현은 그런 의미망을 형성한다. 퇴화된 꼬리뼈란 기억 속에 갇힌 과거의 추억일 것이고 방울소리는 그것을 자꾸 의식선상에 떠오르게 하는 바다의 작용일 것이다.

이 시가 그려 보여주고 있는 과거의 추억은 누구나 성장하면서 한번은 겪어야 하는 통과의례적인 사춘기 시절에 얽힌 이야기다. 3연에서 5연까지의 내용은 이런 고백적 진술을 이미지 속에 감추고 있다. 자꾸 말하고 싶은 화자의 의식이 잡힌다. 이 때 잘못하면 상투적인 서술적 진술로 흘러서 시적 긴장감을 해칠 위험이 있다. 그런데 이 시는 감각적인 이미지와 지시적인 언어가 적당히 조화를 이루면서 꽤 감동적으로 전달된다. 사춘기 소녀의 막연한 기대와 황홀감에 젖어 들뜨는 심리 변화과정, 그리고 상처 받고 절망하는 그 시절의 상반된 의식이 감각화된 언어 속에 용해되어 경이감을 창조해내고 있다. 그러나 시가 지나치게 감각화되면 경박해질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시인은 언어에 대한 자각이 우선되어야 한다. 언어의 효능에 대한 자각 없이 훌륭한 예술의 시는 창조되지 않는다. 예술이 표현이라는 고유영역을 고집하는 한 이 명제는 절대 진리다.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도 언어의 창조기능을 살리지 못하면 드러나지 않는다. 시적 감동도 결국 언어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이다. 시인이 존재의 집을 짓는 사람이라고 했을 때 역시 언어의 기능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시인은 새로운 존재의 집을 짓기 위하여 언어를 새롭게 갈고 닦아야 한다. 언어에 윤활유를 부어야 하고 오랜 세월 동안 묻은 관념의 때를 벗기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랬을 때 비로소 시는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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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동 버스 종점

―최호일(1958∼ )

 

버스를 잘못 내렸네 장지동은 모르는 곳

 

입이 없고 커다란 모자를 눌러쓴 사람이 내 몸에 모르는 물건을 놓고 나간 듯 신열이 나고 개망초 꽃이 보였네

 

탁자가 있고 낡은 시간이 놓여 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고

머리칼이 하얀 남자가 상점에서 라면을 끓이고 있었네

 

칠십 년대식으로 사이다를 샀네 나는 이미 사라진

풀벌레 소리인가 아마존의

주인 없는 미나리 밭으로 두 시간 걸어온 걸까

 

 

 

 

 

시계가 고장 나 지구별에 늦게 도착한 고양이의 신음 소리를 냈네

나 장지동에 잘못 왔네 라면을 먹지 않았네

 

내 몸은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이 다녀간 곳

 

장지동에 가야겠네 그곳은 한없이 가다가 개망초 앞에서 멈추는 곳

 

미나리 밭을 지나 목성을 지나 더 먼 별의 기억을 지나 라면을 후후 불며 먹고 와야겠네

 

나도 모르는 사이

사라진 시간을 찾아서 지우고 와야겠네

 

 

 

 

 

 

 

서울 송파구 장지동에 나도 한 번 가 본 적이 있다. 강북 구시가에 사는 내게는 멀기도 멀더라. 서울이 엄청 넓어졌다. 늦은 밤에 버스에서 잠들었다가 버스기사가 흔들어 깨울 때야 눈을 뜬다면 여간 난감하지 않을 테다. 택시요금이 꽤 나올 테다. 한남동이나 마포가 버스 종점인 시절이었다면 집까지 걸어갈 수도 있으련만. 다행히도 화자는 한낮에 버스에서 잘못 내렸다.

 

졸지에 모르는 동네, 그것도 개망초 꽃 핀 공터며 ‘머리칼이 하얀 남자가 라면을 끓이고 있는’ 구멍가게가 있는 한적한 옛날 동네에 떨어진 화자는 어리둥절하고 막막하다. ‘입이 없고 커다란 모자를 눌러쓴 사람이 내 몸에 모르는 물건을 놓고 나간 듯 신열이’ 난단다. 여기가 어딘가요? 이건 70년대 아닌가? 화자가 모르는 새 뚫고 지나온 시간의 막이 기이한 감촉으로 휘어지는 듯하다. 그렇거나 말거나 여긴 목적지가 아니지. 화자는 사이다 한 병 사서 마시고 장지동을 벗어난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예사로운 일을 시인은 예사롭지 않은 사건으로 기발하게 펼쳐 보인다. 최호일은 일상을 날선 감각으로 집요하게, 그러나 유유히 음미하며 낯설게 하는 재능을 타고난 듯한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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