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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란 100년의 앞을 보는 망원경이다...
2016년 10월 01일 18시 40분  조회:3827  추천:0  작성자: 죽림

 

시간을 잘 읽어야 문학을 안다



코끼리와 고래의 줄다리기 시합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던 어린 시절이 생각날 때가 있다. 서로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힘겨루기와 관련시켜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시킨 이야기다. 필자는 이 생각이 날 때마다 색다른 생각들을 많이 하게 된다. 고래와 코끼리가 누리는 시간 경험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뭐 이런 허무맹랑한 상상이다. 고래와 메뚜기, 코끼리와 멸치, 원시인과 문명인, 일제 강점기의 우리 선인들과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각각 그 시간 경험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선다. 

이러한 상상이 남들에게는 하찮게 보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소중한 경험이다. 하나의 꼭 같은 사실에 대해 이들은 각각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상상이 발전하기 시작하면 좀더 복잡해진다. 예를 들어 '태극기'라는 한 상징물을 놓고 볼 때 고려시대의 왕건, 조선시대의 세종대왕, 일제 강점기의 김구, 채만식의 [논이야기]에 나오는 해방공간의 '한생원', 월드컵 응원의 그 열정을 세계에 떨친 '붉은악마'들은 각각 이에 대한 인식의 차원이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는 통시적인 시간과 관련된 이야기이고, 또 공시적 시간의 경우도 있다. 저 아프리카의 부시맨, 외국의 공사 현장에서 땀 흘리는 우리의 기술자, 노동자의 권익을 외쳐대는 사람들에 있어서 태극기는 똑 같은 태극기일 수 없다. 이렇게 동시대의 시간도 그 인식의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다.

한 시대의 문학사적 사실도 이와 마찬가지로 바라보는 사람마다 그 인식의 차원이 다를 것이다. 그래서 세종대왕이 갑자기 오늘 이 자리에 현신하여 스티븐 호킹과 대화를 나눈다면? 또는 신사임당이 현신하여 요즘의 패션모델과 만난다면? 이런 상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런 상상들이 문학 속에서는 얼마든지 실현이 가능하다.
어느 과학 이야기에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 '수명이 하루밖에 안 되는 하루살이가 30,000 날이나 사는 인간의 일생을 조사할 수 있을까.' 이런 물음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다. 이 말은 '100년도 못 사는 인간이 100억 년 이상을 사는 별들의 일생을 조사할 수 있을까.'로 이어진다. 이야기인 즉 이렇다. 머리가 매우 좋은 하루살이가 그들 수명의 3만 배를 살 수 있는 인간의 일생을 조사하려면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시장에 가서 어린 아이에서부터 나이가 많은 사람들을 연령대별로 조사하여 정리하면 하루라는 시간이지만 인간의 일생을 그런 대로 조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100년도 못 사는 인간도 그 억 배를 더 사는 별들의 일생을 충분히 조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별들이 많은 은하계에 가서 별들을 나이별로 조사하여 정리하면 별들의 일생을 조사 정리할 수 있으며, 이를 토대로 우주의 생성 원리도 유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단편 소설에서 인생의 한 단면을 그리되 그 단면이 그 인생의 전부를 내비쳐줄 수 있는 단면을 그리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위의 이야기는 모두 시간에 관계된 이야기들이다. 문학이 시간 예술이기 때문만은 아니지만 문학에서는 시간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가 있다. 작가 역량과 관련되는 시간 인식 문제, 소설이나 시에서 하나의 기법처럼 이야기되는 시간 착오, 그 외에 문학의 배경에 해당되어 그 속에 반영되는 새벽, 아침, 오전, 한낮, 오후, 저녁, 밤, 한밤중과 같은 하루 중의 시간 등이 있다. 

이 중에서 '문학 정신'과 관련시킬 때 중요한 것은 작가의 시간 인식 문제라 할 수 있다. 필자는 "문학을 잘 하려면 시간을 잘 읽어야 한다."라고 말할 때가 많다. 특히 소설일 경우에는 시간을 어떻게 읽어내느냐가 작가의 역량이자 작가 정신이기 때문이다.

시간 인식의 문제인 시간 읽기는 그리 간단한 문제는 결코 아니다. 이는 작가 개개인의 성향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고 시대와 사회의 관심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는 역사 인식, 세계관, 가치관 등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6·25 전쟁 때 7살 전후의 나이로 길거리를 헤매면서 겨우 목숨을 부지했던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이 사람이 이제 좀 살만했다 싶더니 외환위기 때에는 55세의 나이로 실직을 당하여 길거리에 나앉게 되어 그 자식들을 결혼도 시켜보지 못한 채 한숨만 쉬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을 수 있다. 

작가는 이를 읽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가난과 시련의 대물림 같은 것을 읽어내는 것이 시간 읽기라고나 할까. 이런 경우는 하근찬의 [수난이대]를 예로 들 수 있다. 아버지 박만도가 일제에 징용되어 비행장 공사의 노역을 하다가 부상을 당하고 아들 진수는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부상을 당하는 가족 수난사는 가족 문제의 차원을 넘어 민족 문제의 차원으로 확대되고 있다.

또 정년을 맞아 퇴직금으로 노후를 편히 지내려던 사람이 그 퇴직금을 유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 자녀들이 한창 경제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지만 그 기반이 든든하지 못하고 불안하기 때문이다. 결국 자식의 부도 방지책으로 퇴직금을 내놓았다가 길거리로 나앉게 된다는 시간 읽기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시간 읽기는 운명과의 싸움같은 것으로 연계하여 읽어나가는 방법도 있다. 우리나라는 태풍이나 큰비로 인해서 재해를 겪을 때가 많다. 이 때에 재해의 모습을 보면 하나의 결과적 뼈다귀만 보이겠지만, 한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어 그 개인의 과거와 미래를 바탕으로 쳐다보면 또다른 것들을 볼 수 있다. 그냥 그들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사업에 거듭 실패한 사람이 고향에 돌아와서 무언가 새롭게 시작하여 이제 그 결실을 보는가 했더니, 그만 비바람의 위력 앞에 처참하게 무너져 버리는 경우도 상상해 볼 수 있다. 문학이란 결과를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과정을 읽어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소설에서뿐만 아니라 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시대와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는 시는 바로 이런 시간 읽기에 기초하고 있다. 다음의 시를 보자.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신동엽의 시 [껍데기는 가라]이다. 이 시는 현실적 시간을 거부하고 과거의 시간을 추구하고 있다. 현실의 모순적인 시간을 과거의 순수한 시간을 빌어서 읽어내고 있다. 현실 거부의 한 방법으로 과거로의 회귀를 소망하고 있다. 현실의 부끄러운 시간과 과거의 순수한 삶은 서로 별개로 인식할 수도 있지만 시인에 의해 두 시간이 만나서 현실의 모순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는 과거로의 시간 읽기라고 할 것이다. 
이렇게 시간 읽기는 과거로 읽는 방법도 있고, 또 미래로 읽는 방법도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와 사회, 역사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는 작가 정신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문학의 일반에 대한 이해의 문제라 할 것이다. 서로 다른 세계의 시간을 만나게 하는 것은 분명 작가의 상상력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시인이나 소설가를 두고 '그 시대의 산소(O2)'나 '민감한 렌즈'로 비유하거나 '특출한 눈을 가진 존재'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시인이나 작가는 때로는 현미경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100년을 뛰어넘어 쳐다볼 수 있는 시간 망원경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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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의 채널을 돌리지 말아요

            서안나

  기억의 채널을 돌리지 말아요. 무대의 조명을 꺼버리지 말아요. 나는 당신의 추억 속에서 언제나 데뷔를 시작하는 가수랍니다. 티브이를 켜고 채널을 돌리던 당신의 젊은 손길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내 노래에 맞추어 박자를 짚어내던 손가락의 짧은 주파수들을 기억하고 있어요. 내 귀에서 한다발의 악보들을 빼내어 보여드릴까요. 내 눈동자 속에 담겨진 당신의 첫사랑의 곡조들을 연주할까요. 환호와 화려한 무대조명이 아직도 내 꿈속 구석구석을 밝게 비춰요.

  거품처럼 흘러다니던 악극단시절 난 노래 한 소절이면 배가 불렀어요. 사랑보다 노래가 더 간절했지요. 간절한 것들은 시간을 멈추게 하지요. 넓은 무대에서 당신과 난 하나였지요. 무대에는 언제나 꽃들이 피고 서러운 계절들이 성급하게 몰려들어요. 난 더 이상 꽃이 아니듯 당신 채널을 돌리지 말아요. 내 눈가의 주름마다 당신의 추억들이 접혀져 있어요. 당신의 기억이 언제나 나를 노래 부르게 해요. 아직도 화려한 데뷔를 꿈꾸는 풋내기 가수랍니다. 나를 비웃지 마세요. 그 절정의 끝에서 나는 노래합니다. 나는 언제나 당신의 절정이지요.


    <단평>

  일반적으로 시를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로 기억과 체험과 상상력을 들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기억은 우리의 삶을 통시적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현재라는 스크린에 과거를 새롭게 환기시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특히 현재적 삶이 고달프고 불안할수록 인간은 과거에 집착하게 되고 과거를 그리워하게 마련이다. 서안나의 시 「기억의 채널을 돌리지 말아요」는 현재라는 거대한 망각의 늪 속에서 쉽게 잊혀져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새롭게 환기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시이다. 
  이 시는 표면적으로 ‘가수’를 화자로 내세우고 있지만, 그 이면에 ‘시인’이 숨어 있다. 이 시에서 시인은 가수가 되어 관객인 ‘당신’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과거의 화려했던 시절을 되짚어 보고 있다. 하지만 시적 화자인 ‘가수’는 현재 관객인 ‘당신’으로부터 잊혀져가는 가수일 뿐이다. 그러므로 가수는 당신에게 “기억의 채널을 돌리지 말아요”라고 말하면서 자신은 언제나 관객의 기억 속에서 새롭게 데뷔를 시작하는 가수이기를 갈망하고 있다. 이러한 정신은 시인의 관점에서 보면 쉽게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끝없이 새로워지고 싶어하는 자기갱신의 태도로 읽힌다. 그렇기 때문에 시적 화자는 “사랑보다 노래가 더 간절”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간절한 것들은 시간을 멈추게”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성급하게 몰려드는 “서러운 계절”의 망각이라는 폭력을 딛고  “언제나 당신의 절정”이기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시가 더 이상 전위가 아닌 시대, 더 이상 밥도 꽃도 아니 시대에 살고 있는 시인은 슬프다. 그렇기 때문에 가수이면서 시인인 ‘나’는 나를 쉽게 망각해버리려는 시대에 절규로 호소하지 않을 수 없다. 가수이며 시인인 ‘나’를 당신의 절정에 서 있게 해달라고, 망각 쪽으로 기억의 채널을 너무 쉽게 돌리지 말아달라고. 
  가수가 된 자들은 누구나 “거품처럼 흘러다니던 악극단시절”이 있게 마련이다. 시인이 이 시에서 그 시절의 아픔을 새롭게 환기시키고 있는 것은, 이미 머나먼 기억이라는 시간의 거울 속에서 굴절되어버린 ‘변해버린 자아’에 대한 반성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 시에서 가수가 더 이상 꽃이 아니듯, 이 험난한 시대에 시인은 더 이상 꽃이 아니다. 가수가 ‘꽃’으로 상징되는 외모보다는 ‘노래’에 그 본질을 두고 있듯이, 시인 역시 꽃의 화려함보다는 ‘시’라는 언어에 최종적인 가치를 두어야 한다. 그리고 물신화된 시대가 시인을 비웃을지라도 시인은 늘 시대의 ‘절정’에 서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서안나의 시는 화려함이라는 현대적 매너리즘에 빠져있던 시인의 반성적 내면을 새롭게 전경화시켜서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땅의 시와 시인이 더 이상 시대의 배경으로 우두커니 머물러 있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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