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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비극이라 생각할 때 비로서 살기 시작하는것...
2016년 11월 06일 23시 13분  조회:4203  추천:0  작성자: 죽림
 

 

 

 

술노래/ 예이츠 
술은 입으로 흐르고 사랑은 눈으로 흐른다.
우리가 늙어서 죽기까지 전에
참이라 깨달을 건 이것 뿐이다.

나는 내 입에 잔을 들면서 
그대를 바라보고 한 숨 짓는다.

Drinking Song / Yeats


wine comes in at the mouth and love
comes in at the eye;

That's all we shall know for truth
before we grow old and die.

I lift the glass to my mouth
I look at you, and I si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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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 / 예이츠

 

가을은 우리를 사랑하는 긴 잎사귀에 왔다

그리고 보릿단속에 든 생쥐에게도

우리위에 있는 로우먼나무 잎사귀는 노랗게 물들고

이슬맺힌 야생딸기도 노랗게 물들었다

 

사랑이 시드는 철이 우리에게 닥쳐와

자금 우리의 슬픈 영혼은 지치고 피곤하네

우리 헤여지자 정열의 계절이 다 가기전에

그대의 수그린 이마에 키스와 눈물을 남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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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천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He Wishes for the Cloths of Heaven] 
[하늘의 천] 

Had I the heaven's embroidered cloths 
Enwrought with golden and silver light 
내게 금빛과 은빛으로 짠 
하늘의 천이 있다면

The blue and the dim and the dark cloths 
Of night and light and the half-light, 
어둠과 빛과 어스름으로 수놓은 
파랗고 희뿌옇고 검은 천이 있다면

I would spread the cloths under your feet, 
그 천을 그대 발밑에 깔아드리련만

But I, being poor, have only my dreams, 
나는 가난하여 가진 것이 꿈뿐이라

I have spread my dreams under your feet, 
내 꿈을 그대 발밑에 깔았습니다

Tread softly because you tread on my dreams. 
사뿐히 밟으소서. 그대 밟는 것 내 꿈이오니.

      
내게 금빛과 은빛으로 짠
하늘의 천이 있다면,
어둠과 빛과 어스름으로 수놓은
파랗고 희뿌옇고 검은 천이 있다면,
그 천을 그대 발 밑에 깔아드리련만
나는 가난하여 가진 것이 꿈뿐이라
내 꿈을 그대 발 밑에 깔았습니다.
사뿐히 밟으소서, 그대 밟는 것 내 꿈이오니.
===================================================================================================

 

 

 

호수위의 섬 이니스프리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나 이제 일어나 가리, 이니스프리로 가리

나뭇가지 엮어 놓고 그 위에 진흙바른 오두막 한 채에 콩은 아홉 이랑, 그리고 벌통 하나 놓으리 벌소리 다정하면 홀로 살만 할 것임에… 그러면 평안이 오리, 작고 느린 물방울로 평안이 오리 아침에는 안개로, 귀뚜라미 우는 밤엔 이슬로… 밤은 별빛으로 아련하고, 한 낮은 태양으로 붉게 타오르겠지 그리곤 저녁이 오리, 풍성한 홍방울새의 날개짓으로… 나 이제 일어나 가리, 밤이나 낮이나 호숫가에 부딪는 작은 소리의 물결들 잿빛 포장도로나 도시의 어느 길에 있거나 내 가슴 저 깊은 곳에 들리는 것을…

 

예이츠(1865-1939)의 유명한 이니스프리 호수 섬("The Lake Isle of Innisfree")이라는 시입니다. 도시의 소음과 번잡스러움을 떨치고 한적한 자연에 묻혀 홀로 살고 싶은 마음, 그 떨쳐버릴 수 없는 소망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는 전원 서정시입니다. 시인 자신의 설명에 의하면, 이런 전원적 삶에 대한 동경의 마음은 어린 십대 때부터 간직하게 되었답니다. 나중에 런던 한복판을 걷다가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듣거나 쇼윈도에 마련된 작은 샘 장식만 보아도 향수에 젖어 이 호수를 떠올리고는 이내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곤 했습니다. 이니스프리는 아일랜드 Sligo현의 Lough Gill 호수에 있는 작은 섬입니다. 어린 시절 시인은 아버지와 함께 이 섬에서 지낸 적이 있습니다. 그 시절 그의 아버지는 쏘로우의 월든에 나오는 구절들을 그에게 읽어주곤 했습니다.

 

시인은 그것에 감명을 받아 언젠가 “이니스프리라 불리는 작은 섬 오두막집에서” 살아갈 계획을 하게 됩니다. 쏘로우의 삶을 모방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쏘로우는 세속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 나름의 독특한 삶에 충실했던 미국의 대표적인 초절주의사상가입니다. 그는 국가주의에 의한 것이든 자본주의의 물질문명에 의한 것이든, 스스로의 기준에 의해 검증되지 않은 것은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 것입니다. 미국이 일으킨 멕시코 전쟁에 반대하여 납세를 거부하기도 했던 그의 비폭력 저항운동 정신은 간디나 마틴 루터 킹 목사 등에게 고스란히 전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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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You are Old
- William Butler Yeats -

When you are old and grey and full of sleep, And nodding by the fire, take down this book, And slowly read, and dream of the soft look Your eyes had once, and of their shadows deep;

How many loved your moments of glad grace, And loved your beauty with love false or true, But one man loved the pilgrim soul in you, And loved the sorrows of your changing face;

And bending down beside the glowing bars, Murmur, a little sadly, how love fled And paced upon the mountains overhead And hid his face amid a crowd of st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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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늙었을 때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
 
그대 늙어 백발이 되고 졸음이 많아져 벽난로가에서 고개를 끄덕끄덕할 때, 이 책을 꺼내어, 천천히 읽으며 한때 그대 눈에 지녔던 부드러운 모습과 그 깊은 그림자를 생각해 보시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대의 즐거운 기품을 사랑했고 또 그대의 미를 거짓 사랑 혹은 참사랑으로 사랑했던가를. 그러나 다만 한 사람만이 그대의 순례의 영혼을 사랑했고, 그대의 변해가는 얼굴의 슬픔을 사랑했음을.
 
그리고 달아오르는 쇠살대 곁에 몸을 구부리고서, 좀 슬픈듯이 중얼거리시오, 어떻게 사랑이 머리 위에 솟은 산 위로 도망치듯 달아나 무수한 별들 사이에 그의 얼굴을 감추었는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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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 full of sleep: “졸음이 많아져”.
  • by the fire: “벽난로가에서”.
  • pilgrim soul: “순례의 영혼”.
  • bars: “쇠살대”.
  • pace: ran.
  • amid:among.
  • a crowd of: “무수한”.
 
감상과 해설
 
이 시는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1865-1939)의 것입니다. 아일랜드가 낳은 대시인 예이츠는 1865년 더블린의 샌디마운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원래가 영국계였지만 아일랜드에서 200년 이상 살아온 오랜 정통있는 가문이었습니다.

 

그의 부친은 법률가였지만, 화가로 전향하여 변호사업을 버렸기 때문에 생활은 어려운 편이었습니다. 1883년에 더블린에서

 

고교를 졸업한 그는 미술 학교에 진학하였으나 곧 중퇴하고 시를 쓰는데 전념하였다고 합니다. 그의 첫 시편들은 1885년에

 

『더블린 대학 잡지』 Dublin University  Review 에 발표되었습니다. 그는 더블린과 런던 사이를 내왕하면서 지내다가

 

1891년에 존슨 Lionel Johnson, 도슨Ernest Dowson 등과 더불어 “시인클럽” Rhymer's Club을 시작하였고, 여기서

 

라파엘 전파 P운동의 영향을 받아 몽상적이고 영묘한 시를 썼습니다. 한편 그는 고향의 전원적 생활과 민요를 통하여 토속적인

 

정취를 받아들였고 더블린의 생활에서는 아일랜드의 국수주의(國粹主義)를 몸에 지니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편, 그는 스펜서

 

Edmund Spenser, 셀리, 블레이크 등의 19세기 시인들에게서 상당한 영향을 받아 그의 시에 낭만주의적 색채를 띠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문학 이론은 그의 긴 생애를 통하여서 여러 번 번복된 바 있으나 1900년을 전후하여 알게 된 두 여인,

 

즉 모드 곤 Maud Gonne이라는 아름다운 배우와 그레고리 부인 Lady Gregory이라는 후원자를 만난 것이

 

그의 일생에 있어서의 가장 큰 변화를 가져왔다고 봅니다. 이 두 여인은 모두 열렬한 아일랜드 국수주의자들이기 때문에

 

어느덧 그는 아일랜드에서의 문예 부흥 운동에 앞장 서게 되었고 “게일 동맹” Gaelic League과 “아일랜드 국민 극장”

 

Irish Literary Theatre의 설립을 적극적으로 돕게 되었습니다. 또 그는 아일랜드의 전설을 소재로 하여 극과 시를

 

쓰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낭만주의에서 시작하여 후에는 상징주의로 기울더니, 50세 때부터는 이제까지 애용해 오던 추상적이고 아름다운 상징의

 

세계를 떠나서 구체적인 현실 세계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와 더불어 그의 어휘는 점점 더 솔직하여졌습니다. 그는 평생을

 

보통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을 찬양하고 그들을 우상화하였으나 말년에 가서는 보통 사람들에게 환멸을 느꼈고 아일랜드에

 

문예 부흥을 실현시키겠다는 꿈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현실에 실망을 느끼고, 저속한 사회의 흐름에 화를 내고는

 

결국은 영국을 떠나 남부 유럽에서 지냈습니다. 1939년 1월 28일에 지중해변의 니스 부근에 있는 로커브릔에서

 

사망하였습니다. 이 때 그는 젊었을 때의 뜨거운 정열을 잃고 만사를 냉소하면서 죽었음이 그의 글 속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 시는 예이츠가 사랑했던 아름다운 여인 모드 곤에게 바친 시입니다. 그가 곤을 만난 것은 1889년 1월이었습니다.

 

이때부터 그의 몇 차례의 구혼에도 불구하고 모드 곤이 존 맥브라이드와 결혼한 1903년 2월까지가 예이츠의 초기 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곤은 그에게 있어서, 특히 초기에 있어서 삶을 질서잡힌 미로 형상화하는 길잡이가 되는 이상적인

 

여인이었으며, 미라는 추상적인 개념에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의미를 부여해 준 여인이었습니다. 모드 곤을 향한 그칠 줄

 

모르는 사랑 가운데서 예이츠는 진정한 아름다움의 속성을 깨닫게 되었으며, 인간의 영혼과 육체의 문제라는 심오한 사색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름다운 용모와 정열적이고 활동적인 성격을 소유한 여배우 모드 곤은 그 자신의 젊음을 바칠 어떤 위대한 행위를

 

찾고 있었고 그녀의 조국 아일랜드의 독립을 위해서는 목숨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애국적이고 정열적인

 

모드 곤에게서 예이츠는 깊은 감명을 받았고, 그가 추구하던 영원미의 모형을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초기시들은 대부분 곤을 찬미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영원미와 모드 곤의 미를 결합해 주는 심볼로

 

장미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시에 있어서 장미는 현상적인 꽃이 아니라 시적인 심상으로서 그가

 

추구하던 영원미를 상징하는 동시에 모드 곤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례로서 “평화의 장미”라는 시의 일절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하늘과 지옥이 마주 싸울 때/ 천군의 지휘자

 

미가엘이/ 천성의 문간에서 그대를 내려다보면/ 자기가 하던 일도 잊어버리라>” 수려한 미모와 그 아름다움의 파괴적인

 

힘을 노래할 때는 트로이 전쟁의 장본인이었던 헬렌에게 비유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모드 곤을 천사의 경지까지 끌어올려

 

찬미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대로 세상의 역사가 있기 전 천상에서는 그리스도의 군대와

 

루시퍼(반역천사)의 군대가 남북으로 나뉘어 싸움을 벌였다고 합니다. 그때 천군의 지휘자는 대천사 미가엘이었다고 하는데,

 

그가 평화의 장미인 모드 곤을 내려다보았다면 싸울 생각은 더 이상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노래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도시로 오게 되고 마침내 하나님은 종전을 고하고 조용히 하늘과 지옥의 평화, 곧 장미의 평화를

 

만들 것이라고 노래합니다. 이와 같이 예이츠는 장미의 상징을 통해 모드 곤을 정신적 미의 표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대가 늙었을 때”도 사랑의 슬픔과 그 슬픔까지도 사랑하는 마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늙엊지면 많은 변화가 오기

 

마련입니다. 검은 머리가 희어지고 잠이 많아져 따뜻한 벽난로가에 앉아 있노라면 졸음이 밀려오게 됩니다. 눈도 희미해져

 

책도 읽기 어렵고 빨리 읽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 나이가 되면 돌이켜 생각을 해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이 그대의

 

즐거움과 기품과 미를 사랑한 것이 틀림업지만, 그러나 “그대의 순례의 영혼”을 사랑한 것은 오직 단 한 사람 자기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여기 순례의 영혼이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녀의 활동적인 성격을 지칭한 것입니다.

 

또한 예이츠는 변해가는 얼굴의 슬픔까지도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이츠 자신이 그의 시 “시간과 더불어 오는 지혜”

 

에서 밝히고 있듯이 모드 곤은 그의 시 전체에 직접 간접으로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입니다. 그녀의 완전한 아름다움은

 

그가 오랫동안 추구해 오던 영원미의 상징이었으며 동시에 아름다움의 파괴적인 힘을 깨닫게 해준 표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모드 곤에 대한 사랑과 구혼을 거절한 데서 맛본 슬픔과 절망은 점차 그에게 모드를 바라보는 새로운 안목을 제공해 주었고

 

아름다움이 지닌 이중적인 속성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이런 아름다움의 이중적인 속성에도 불구하고, 또한 사랑의 변화와 세월의 흐름 그리고 그에 따르는 육체의 쇠퇴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변화와 쇠퇴의 슬픔까지도 사랑하겠다고 합니다. 1903년 모드 곤이 결혼하면서 예이츠는 그 꿈의

 

상태에서 깨어나 자신과 현실을 직시하며 보다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생활을 추구하지만 그래도 끝까지 그녀는 예이츠의

 

영원한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남아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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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William Butler Yeats (1865-1939)  아일랜드 시인. 20세기 영미시단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꼽히고 있다. 화가의 아들로 태어나 더블린, 런던 등지에서 화가가 되려고 미술학교에 다니기도 했지만 곧 문학쪽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정통적인 기독교 대신 여러 형태의 신비주의, 민담, 영매술, 신플라톤사상 등에 몰두했고, "라파엘 전 예술가(Pre-Raphaelites)"의 이념에 동조하여 꿈같고 환상적인 주제를 즐겨 다루었다. 스펜서, 셸리 및 블레이크로부터 영향을 받아 그의 시는 낭만주의의 향기를 풍긴다. 주소재도 시냇물, 언덕, 바위, 숲, 바람과 구름 같은 것이었다. 아일랜드 문예협회를 창립하여 아일랜드 문예부흥운동을 주도하였고 아일랜드 국민극장을 창립하여 아일랜드 연극발전에 힘썼다. 아일랜드 독립운동에도 적극 참가하여 아일랜드가 독립자유국이 된 뒤에는 그 공으로 원로원 의원이 되기도 하였다. 1923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주요 시집으로 "오이진의 방랑기(The Wanderings of Oisin and Other Poems)", 책임(Responsibilities)", "쿨호의 백조(The Wild Swans at Coole)", "탑(The Tower)", "마지막 시집(Last Poems)"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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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이츠의 생애 


대립되는 전통의 계승

예이츠의 아버지 존 버틀러 예이츠는 변호사였지만 나중에 초상화 화가가 되었다. 처녀시절 이름이 수잔 폴렉스펜인 어머니는 아일랜드 슬라이고의 부유한 상인의 딸이었다. 사람들은 예이츠가 아일랜드의 압도적인 로마 가톨릭교도 사이에서 강력한 소수를 대표하는 영국계 아일랜드의 프로테스탄트 전통을 이어받은 인물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런던에서 학교에 다닐 때도 아일랜드의 영상으로 가득 차 있어 자신을 이방인으로 느낄 정도였지만 아일랜드에서도 2가지 역사적 전통에서 분리된 채 있었다. 왜냐하면 가톨릭교도들과는 신앙을 공유할 수 없었기 때문이며 프로테스탄트들은 '출세만 생각하고 있는 듯해 보였기 때문이다' 예이츠는 조너선 스위프트, 에드먼드 버크, 올리버 골드 스미스, 조지 버클리 같은 유명한 영국 문인들의 문학과 사상에 나타나 있는 18세기의 찬란한 프로테스탄트 앵글로아일랜드 전통을 존중했다. 그러나 이 전통은 이제 쇠퇴해가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새로운 시대가 부상하고 있는 것 같았고 그 시대는 가톨릭 전통에 유리하며 영어보다 게일어로 표현되는 시대였다. 예이츠는 자신의 엄격한 예술적 취향과 조화시킬 수 있는 이 운동을 지지했지만 아일랜드가 영국 정부로부터 완전히 분리될 것을 주창하는 애국단체에서의 그의 행동은 자주 애매한 것이었다. 예이츠는 그 두 아일랜드 사회 중 어느 한 곳에 자리를 잡기 전에, 자기 자신의 입장을 주목할 만큼 애매한 자신의 고국의 입장과 관련지어 명백하게 밝혀야 했다. 이러한 시도는 그의 시를 통해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최고의 희망은 가톨릭 전통이나 프로테스탄트 전통보다 더욱 깊은 전통을 계발하는 것이었는데 그 전통은 그리스도교보다는 더 이교도적인 성격을 띠며 아직까지 남아 있는 관습·신앙·성지 같은 인류학적 증거 속에서 널리 찾아볼 수 있는 숨겨진 아일랜드의 전통이다. 1886년부터 발표된 예이츠의 많은 수필과 평론들은 시기가 적당했으므로 진정한 아일랜드를 알려야겠다는 시도였다.

1867년 예이츠가 불과 2세였을 때 가족은 런던으로 이사했으며 그곳에서 아버지는 더블린에서 받았던 것보다 더 많은 수수료를 받기를 희망했다. 1880년 가족은 다시 더블린으로 돌아왔고 거기서 고등학교에 다녔다. 휴일에는 슬라이고에 있는 외삼촌 조지 폴렉스펜과 함께 지냈는데 이 슬라이고는 많은 시의 배경이 되었다. 1883년 더블린에 있는 메트로폴리탄 예술학교에 다녔으며 이곳에서 받은 교육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다른 시인과 예술가들을 만난 것이었다.

탐미주의자·신비주의자·민족주의자로서의 예이츠

그동안 예이츠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처음 발표한 것은 2편의 짧은 서정시로 1885년 〈더블린 유니버시티 리뷰 Dublin University Review〉에 발표되었다. 같은 해에 예이츠는 비술(秘術)에 관심이 있는 단체, 즉 더블린 연금술협회의 결성을 도왔다. 1887년 가족이 다시 런던으로 돌아가자 예이츠는 '신지학(神智學)협회'에 가입했다. 이 협회는 신비주의를 통해 지혜와 형제애를 추구하는 국제적인 운동으로 점차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마술은 일상 세계에서 멀리 떠난 상상의 삶의 한 방식이었기 때문에 그를 사로잡았다. 반면 과학의 시대는 혐오스러웠으며 천문학보다 점성술에 훨씬 관심이 많았던 신비주의자로서 자신이 시적 영상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주장했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예언서들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이런 모험은 플라톤 철학, 신플라톤 철학, 스베덴보리 신학, 연금술 등의 다른 신비주의 전통과 접촉하는 것으로 발전했다. 예이츠는 이미 자긍심이 강한 젊은이였고 이런 자존심 때문에 자신의 취향과 예술 감각에만 의지하게 되었다. 자랑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정신적 오만함이 잘 드러나곤 했다. 〈오이신의 방랑기 외(外) The Wanderings of Oisin, and Other Poems〉(1889)에 수록된 초기 시는 탐미주의 작품으로, 아름답지만 난해하며 사소한 문제로부터 해방되고 싶어하는 한 영혼의 외침이었다. 1889년 예이츠는 열정적이고 화려한 미모의 아일랜드 여인 모드 을 만났다. 그는 그 순간부터 "내 인생의 고뇌는 시작되었다"라고 기술했다. 예이츠는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으나 그 사랑은 희망이 없는 것이었다. 모드 곤은 그를 좋아하고 존경했으나 사랑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열정을 아일랜드에 아낌없이 바쳤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목소리와 몸으로 몸소 구사하는 반항자이며 웅변가였다. 예이츠가 아일랜드 민족주의 운동에 가담했을 때 부분적으로는 신념 때문이었으나 대부분은 모드를 향한 사랑 때문이었다. 그 시절 아일랜드에 대해 쓴 많은 글들은 모드를 향한 속삭임이었다. 1902년 더블린에서 희곡 〈캐슬린 니 훌리안 Cathleen ni Houlihan〉이 초연되었는데, 모드가 캐서린 역을 맡았다.

1891년 논쟁의 여지가 많은 아일랜드의 지도자 찰스 스튜어트 파넬의 급속한 몰락과 죽음 이후 예이츠는 아일랜드의 정계가 희망을 잃었다고 느꼈다. 정치가 남긴 텅빈 공간을 문학·예술·시·희곡·전설이 채울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에세이집 〈켈트의 여명 The Celtic Twilight〉(1893)은 이런 목적을 향한 예이츠의 첫번째 노력이었지만 1896년 오거스타 그레고리 부인을 만날 때까지는 진전이 없었다. 그레고리 부인은 귀족으로서 극작가가 되었고 그의 한 친구가 되었다. 그녀는 이미 서부 아일랜드 지방의 민간전승인 옛날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있었다. 예이츠는 이 전승 지식이 고대 의식 및 자신의 감정과 그리스도교가 완전하게 파괴하지 못한 이교도 신앙에 대한 자신의 느낌과 일치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이 민간전승이 농촌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몰두하여 연구하면 사람들과의 명백한 관계를 증명할 수 있으리라고 느꼈다. 예이츠가 아일랜드의 민속을 엄격하고 고매한 문체로 표현하면 순수한 시를 창작할 수 있고 개인적인 용어로 그 자신의 정체성에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이상을 정치에 적용하면 농부와 귀족을 연결시키는 것인데, 즉 경험은 농부의 것, 문체는 귀족적인 것을 취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런 연결은 도시와 부의 산물인 미움받는 중산층을 비난하게 된 것이고 이것이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더라도 도덕적 효과는 가져올 것이다. 1897년부터 예이츠는 카운티 골웨이의 쿨파크에 있는 그레고리 부인 집에서 여름을 보냈고 쿨파크를 사라져가는 우아함의 세계와 결부시켰다. 그 공원이 농부들로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이 그 시각을 완벽하게 해주었다.

1899년 예이츠는 모드 곤에게 청혼했으나 거절당했다. 4년 후 그녀는 아일랜드의 애국 동지이며 영국의 압제를 함께 증오하던 아일랜드 군인 존 맥브라이드 소령과 결혼했다. 그는 1916년에 일어난 부활절 봉기에 참여한 죄로 사형당한 항거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 한편 예이츠는 시와 연극이 아일랜드 전 국민을 변모시킬 수 있으리라 믿고 문학과 희곡에 전념했다. 그런 활동은 더블린에 그 유명한 애비 극장을 설립하면서 절정에 다다랐고 이 극장은 1904년 첫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아들과의 반목을 주제로 한 〈베일 해변에서 On Baile's Strand〉는 첫 상연 계획에 들어 있었다. 그후 수년 간 예이츠는 애비 극장의 일반적인 운영에 몰두해 있었다.

그당시는 논쟁이 빈번한 시기였다. 그의 작품들은 비종교적이고 반가톨릭적이어서 반아일랜드적이라고 비난받았다. 배우·제작자·신문 등과 논쟁도 잦았다. 1907년 존 밀링턴 싱의 〈서부의 난봉꾼 Playboy of the Western World〉의 초연 때는 극장 안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언제나 자긍심이 강하고 당당했던 예이츠는 논쟁시 만만찮은 투사였다. 그는 또한 과거의 상처를 빨리 잊지 못해 많은 사람의 미움을 샀으며, 중산층, 상인 및 대부분의 더블린 사람들처럼 인습적인 성공을 원하는 모든 사람들을 경멸했다. 현대의 시민들, 가톨릭교도, 프로테스탄트 등은 모두 예이츠가 영웅적 가치관에 호소한다는 사실을 자신들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했다. 점차 중산층의 관심사에서 멀어져갔고, 애비 극장도 생명력을 잃어가는 것 같았다. 애비 극장에서 상연된 많은 연극들이 그의 눈에는 천박하고 통속적인 것으로 보였다. 예이츠는 대중의 변덕에 의존하지 않는 다른 종류의 연극으로 마음을 돌렸다. 1913년 미국의 시인 에즈라 파운드의 비서로 일하며 서식스 주에 있는 스톤카티지에서 그와 몇 개월을 보냈다. 파운드는 그당시 일본의 고전극인 [能]의 번역 원고를 교정하고 있었고 예이츠는 그 극으로 인해 큰 자극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 극들은 대중보다 조신들을 기준으로 한 귀족문화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었다. 점차적으로 노극에 해당되는 대응물로 간주될 수 있는 극들을 고안해냈는데 그것은 〈무희를 위한 4개 극 Four Plays for Dancers〉(1921)으로 극장에서뿐만 아니라 응접실에서도 상연될 수 있는 일련의 짧고 형식적인 극이었다. 예이츠는 이러한 연극들을 새로운 종류의 연극, 즉 말·가면·춤·음악, 모방이 아니라 상징적인 동작의 조화로 생각했다. 그 연극들은 상류 사람들, 즉 그런 형태의 장점을 즐기는 소수들에게만 사랑받을 수 있을 것이다. 1916년 초연된 〈매의 우물에서 At the Hawk's Well〉는 그가 믿어왔던 많은 가치관을 구현한 작품이었다. 돈과 대중을 위한 부르주아 극장은 고대 그리스 연극이 일으킨 동정과 공포보다는 '신경질적인 흥분'의 장소일 뿐이었다. 이 시기에 예이츠가 관심을 가졌던 예술은 관객들을 잠시 동안이나마 '지금까지 너무나 미묘해서 우리가 들어가 볼 수 없었던 마음의 심연' 속으로 빠져들도록 할 수 있는 예술이었다.

이러한 가치관은 아일랜드 생활의 일상적인 상황에서는 존속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1913년 휴 레인 경이 수집한 39점의 프랑스 인상파의 그림 처리문제에 대해 벌어졌던 분쟁은 예이츠의 눈에는 사악한 힘이 작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레인은 그 그림들을 더블린 시립현대미술관이 한 화랑을 마련해 그것들을 전시한다는 조건 아래 기증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계획대로 되지 않자 레인은 화가 나서 런던의 국립미술관에 빌려주었고, 1915년 그가 죽자 두 미술관이 이 그림의 소유권을 주장했다. 1913년 예이츠는 이 논쟁에 개입했다. 왜냐하면 레인의 훌륭한 행동이자 귀족적 조치가 한 비천한 더블린인에 의해 능멸당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예이츠의 〈책임 Responsibilities〉(1914)에 실린 많은 시들은 레인 논쟁에 의해 고취된 작품으로 매우 통렬한 작품들이다. 이것은 예이츠와 아일랜드 관계의 새로운 국면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1907년 그레고리 부인과 함께 피렌체·밀라노·우르비노·페라라·라벤나 등지를 여행했고 이탈리아 마을과 도시들이 나타내는 귀족적 우아함의 증거를 결코 마음속에서 잊지 않았다. 1913년부터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즉 예의와 정중함을 존중하던 완전히 사라져버린 왕국에 대한 갈망이 그의 작품 속에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성숙한 시인이며 상원의원

1917년 예이츠는 모드 곤의 딸 이졸트 곤에게 청혼했으나 거절당했다. 몇 주 뒤 조지 하이드 리스에게 청혼해 1917년 결혼했다. 1919년 딸 앤이 태어났고 1921년 아들 윌리엄이 태어났다. 1922년 아일랜드 자유국이 설립되어 예이츠는 아일랜드 상원의 새 일원이 되어달라는 요청에 수락했고 6년간 봉사했다. 1923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이제는 유명한 인물이 되어 현대의 가장 탁월한 시인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명예에 의존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상상력, 역사, 비술의 관계에 쏠려 있었다. 그는 그의 생각을 한 위대한 책, 즉 예술에 관해 신성시될 만한 책으로 재현하고 싶었다. 그결과 1925년 〈비전 A Vision〉의 초판이 출간되었다. 그러나 예이츠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몇 년 간 계속적으로 연구하여 1937년 결정판을 냈다. 한편 그의 시는 날이 갈수록 기량을 더해가고 있었다. 〈탑 The Tower〉(1928)은 그가 고트에서 구입한 무너진 노르만 성의 이름을 따서 붙인 제목으로 그의 작품 중 가장 도도한 것 중의 하나이며 매우 노련한 예술가의 작품이다. 그 작품 속에는 일생의 경험이 완벽한 형태로 구사되어 있다. 그렇지만 예이츠의 가장 위대한 작품들 가운데 일부는 그뒤에 씌어진 〈나선층계 The Winding Stair〉(1929)로 나왔다.

예이츠는 60대 후반에 이르러서도 계속 작품을 썼다. 그의 감정은 예전처럼 강렬했지만, 이 시기의 시는 대부분 상상력의 병적인 흥분 때문에 손상되었고 현실과 정의 사이의 균형도 불안정했다. 세계는 산산 조각나는 것 같았고, 예이츠는 그것을 혐오했지만 자주 세상의 몰락에 매혹되기도 했다. 귀족적 스타일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독재적인 이데올로기에 봉사해 말년에는 파시스트라는 비난을 받았다. 자신이 존중해온 가치관이 파괴되고 있다고 느끼며 예이츠는 그 가치들이 위대한 인물, 즉 강력한 지도자에 의해 구출될 수 있다고 상상했다. 예이츠는 활력과 독재주의적인 명쾌함 때문에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를 숭배했다. 산문으로 된 소책자 〈보일러에 관하여 On the Boiler〉(1939)에서 자신의 분노와 절망을 부패한 세상에 토로했다. 이것으로 인해 그는 정치 권력을 갈망하며 그 권력을 갖게 되면 폭력적으로 사용하리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예이츠의 분노는 시인의 분노였고 삶에 대해 갖고 있던 시각은 시인의 시각이었다. 그는 단지 도덕의 힘, 즉 어떤 위대한 상징들이 만들어내는 힘을 원했다. 그는 아일랜드 상원의원으로서 정치적 권력을 실질적인 것에 쏟았다. 즉 검열, 레인의 그림들, 건강 보험, 이혼, 아일랜드어, 교육, 저작권 보호, 아일랜드의 국제연합 가입 문제 등에 관심을 가졌다. 상원의 화폐위원회 의장이기도 했다.

예이츠의 말년은 긴장의 연속이었었다. 그의 건강은 좋지 않았고 그래서 아일랜드의 습한 겨울을 피해 여행을 다녔으나 은퇴하지는 않았다. 1930년대의 폭력이 끝내 전쟁을 몰고올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한편으로는 그 전망에 두려워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매혹되었다. 그는 무솔리니가 이끄는 이탈리아의 군대의 행진소리가 사랑·예술·미·예의범절의 주제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그 시절 예이츠의 삶의 감각은 계시적인 것이었다. 가끔 그는 두려워 그 계시로부터 도망치기도 했으나 또 어떤 때는 그 계시에 동조했다. 1936년 자신이 사랑했던 시이며 대부분 자기 친구들이 쓴 시모음집 〈옥스퍼드 현대시 모음집 1892~1935, Oxford Book of Modern Verse 1892~1935〉가 발간되었다. 여전히 그의 마지막 연극 작품들을 쓰면서 예이츠는 그의 시 중 가장 귀에 거슬리는 시 〈헌의 알 The Herne's Egg〉을 1938년 완성했다. 그후 1년도 채 되지 않아 그는 외국에서 죽었다. 아일랜드에 매장하기 위한 최종적인 준비는 성사될 수 없었다. 그래서 프랑스의 로크브륀에 묻혔다. 그의 시신을 슬라이고에 매장하려는 의도는 1939년 가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좌절되었다. 1948년 그의 시신은 슬라이고로 결국 넘겨져서 드럼클리프에 있는 작은 개신교 교회 묘지에 매장되었다. 이곳은 그의 〈마지막 시집 Last Poems〉(1939)에 수록된 시 〈벤 블벤 아래에서 Under Ben Bulben〉에 명시된 장소로 그의 묘 비문에는 자신이 직접 썼던, "삶과 죽음을 냉정히 바라보라. 그리고 지나가라!"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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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 호수의 백조 / 예이츠 ~♬

 
     
    나무들은 아름답게 가을 단장을 하고 숲 사이의 오솔길은 메마른데  10월의  황혼 아래 물은  고요한 하늘을 비춘다.  바위 사이로 치런히 넘치는   물 위에 떠노는 쉰 아홉 마리의 백조   내가 처음 세어 보았을 때로부터  열 아홉 번째 가을이 찾아왔구나.  그 때는 내가 미처 다 세기도 전에 모두들 갑자기 치솟아 올라  커다란 원을 그리면서  날개 소리도 요란히 흩어졌던 것을.   저 눈부신 새들을 바라보노라면,  내 가슴은 쓰라려진다.  모든 것은 변해 버렸으니  맨 처음 이 기슭에서 황혼에  머리 위에 요란한  날개 소리를 들으며,  보다 가벼운 걸음으로 걸었던 그 날 뒤로,   아직도 지칠 줄 모르고 자기 짝끼리  그것들은  차가운 정든 물결을  헤엄치거나 공중을 날아가  그들의 마음은 늙지 않았다.  어디를 헤매든지 그들에게는  정열과 패기가 항상 따른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고요히 물 위를 떠간다.   신비롭게, 또 아름답게  어느 동심초 사이에 둥우리를 짓고  어느 호수가 또는 물웅덩에서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할것인가.   내 언제 잠깨어 그들이 날아가 버렸음을 깨달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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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예이츠가 베드포드 파크(Bedford Park)의 가족 저택에서 아름다운 여배우이자 아일랜드의 독립운동가였던 모드 곤(Maud Gonne:1866-1953)을 만난 때는 그가 스물 세 살 때의 어느 봄날 아침이었다. 그녀는 뺨에 홍조(紅潮)를 머금고 있었고 183센티미터나 되는, 하늘이 내린 조각상같은 몸에 동작이 우아하고 매력적이며 활력이 넘치는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예이츠는 이 여인을 첫 눈에 반하였다. 그의 자서전에서 당시의 첫 만남은 이렇게 기록되고 있다. "안색은 빛을 받은 사과 꽃의 윤기처럼 빛났다. 생각건대 그 첫날 그녀는 마치 창문에 어리는 그러한 꽃무더기 옆에 서 있었던 것처럼 기억이 난다." 시인 예이츠는 그녀를 이상적인 여인상으로 흠모하여 곧바로 구혼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래서 한때 다른 여인을 찾아 방황도 해 보았지만 결국 모드 곤에로 마음이 몰입되었다.

 

 예이츠는 그녀를 만난 이래로 20여 년을 줄곧 구혼했고 수 많은 시를 바쳤으나 모두 허사였다. 또한 그녀의 관심을 끌기 위해 능동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려고 무단히 노력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모드 곤은 예이츠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도 그렇다고 절교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갔고 모드 곤은 다른 남자, 맥브라이드(MacBride) 장군과 결혼하였다가 얼마 후 이혼하였다. 예이츠는 이혼녀 모드 곤에게 다시 청혼하나 이번에도 그녀는 시인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예이츠는 그녀를 단념하고 쉰 한 살 때에 하이드-리즈(Georgie Hyde-Lees)와 결혼하였다. 예이츠와 모드 곤과의 연인아닌 연인의 관계는 거의 삼십 년에 걸쳐 지속되었고, 시인의 창작에 큰 영향을 끼쳤다.

 

 예이츠는 초기의 시에서 그녀를 트로이전쟁의 절세미녀 헬렌(Helen)과 같은 이상적인 여성으로 칭송하고 있다. 그러나 중기로 접어들면서 그녀는 아일랜드 정치운동을 주도하는 투사의 이미지로 바뀌며 다소 어둡고 파괴적인 이미지로 변형되었다. 그러나 이 때까지만 해도 예이츠의 가슴 속에 모드 곤은 변함없는 찬미의 대상이었다. 결국 모드 곤과의 사랑이 미완의 결말로 끝나 버리자 예이츠는 그 실연에 대한 슬픔을 잃어버린 지중해의 문명국가였던 비잔틴세계로의 탐미와 환상으로 표출하였다. 즉 시인 예이츠에게 있어서 모드 곤은 삶의 전부였으며 시인의 정체성의 일부였던 셈이다.

 예이츠는 여러 연애시에서 그녀와의 관계를 암시하는 시들을 다수 남겼는데, 대체로 시 안에서 구현되는 두 사람의 관계는 미해결된 중간 상태이자 긍정과 부정, 수용과 거부가 교차하는 회색빛 상태에 머물렀다. 그리고 시인의 자서전이나 여러 기록들에서 모드 곤은 '사랑하나 합일될 수 없는', 동경과 반발의 두 요소를 동시에 함축하고 있는 대상으로 그려진다. 다소 소심하고 유약했던 시인에 비해 모드 곤은 강인한 투사의 성향이 뚜렷했다. 예이츠는 '투쟁하는 지식인'이라기보다 '조국을 사랑하는 예술인'의 입장이었는데 비해 모드 곤은 '열렬한 독립투사이자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정치.사회 활동을 시인은 신화의 수준에까지 끌어올려 찬양할 뿐이었다. 예이츠는 한때 모드 곤의 권유를 받아들여 아일랜드 독립운동의 대열에 합류하나 큰 활약을 담당하지는 못하였다. 당시까지 예이츠의 의지와 심성은 당시 정치운동가들의 과격한 노선에 대한 두려움과 회의로 가득했던 것이다. 사실 서로의 성향과 인생관이 다름을 먼저 깨달았던 쪽은 모드 곤이었다. 그녀는 예이츠의 감수성 높은 지성과 순수함을 존중하고 사랑하였으나 자신이 지향하는 정치적 이상이나 노선과는 맞지 않았음을 인식하였던 것이다. 심지어 그녀는 예이츠의 애매하고 소극적인 연애관에 대해 비판하며 결혼하지 않고 사는 삶이 더 나을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모드 곤 역시 예이츠에 대한 연정과 호감을 평생동안 완전히 떨쳐 버리지는 못하였다. 그렇게 서로는 거리를 두고 사귀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

 

 예이츠는 그의 시 <사랑의 슬픔:The Sorrow of Love>에서 그녀의 당당하고 강한 존재감을 한편으로는 칭송하고 또 한편으로는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러다 어떤 처녀가 나타났지, 슬픔 머금은 붉은 입술의,  슬픔에 찬 세상의 위대함을 간직한 듯이 보이는 어떤 처녀가.  오딧세우스의 힘겹게 항해하는 배와도 같은 운명인 그녀는  신하들과 함께 살해당한 프리아모스처럼 자부심 넘쳐라;

 

A girl arose that had red mournful lips And seemed the greatness of the world in tears, Doomed like Odysseus and the labouring ships And proud as Priam murdered with his peers;

 

 

                   카노바(Antonio Canova) 작, <트로이의 헬레나>

 

 시인 예이츠에게 트로이의 헬레나와도 같은 여인 모드 곤은 영웅이고 신화적 존재이면서도, 전쟁이 끝난 후 10년 동안이나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방황해야 했던 오딧세우스처럼 불운한 여성이었고, 도주하거나 항복하는 대신 마지막까지 싸우다가 살해당한 트로이의 왕처럼 자존심이 넘쳤던, 불행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이러한 시각은 그의 시 <그대 늙었을 때:When You are Old>에서 더욱 또렷이 나타난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발랄하고 우아한 그대 모습 사랑하였고,  진실된 또는 거짓된 사랑으로 그대의 아름다움 사랑했던가를,  그러나 오직 한 사람만이 그대 마음속 순례하는 영혼과  그대의 변화하는 얼굴에 깃든 슬픔을 사랑했음을;

 

 How many loved your moments of glad grace,  And loved your beauty with love false or true;  But one man loved the pilgrim soul in you,  And loved the sorrows of your changing face.

 

 만년의 예이츠는 세월의 힘을 어기지 못하고 늙어가는 여성 투사 모드 곤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다. 그는 그녀의 색바랜 얼굴에서 외로이 떠도는 방랑자의 이미지를 발견한다. 스스로의 인생과 사랑을 돌보지 못한 채 고귀하고 가치있는 것들을 위해 헌신하고 인내하는 한 여성의 고단한 삶의 여정을 꿰뚫어 본 것이다.

 

 시인 예이츠와 정치가 모드 곤은 서로를 흠모하고 친애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미결로 끝났다. 시인은 유유부단했고, 정치투사는 이상향을 꿈꾸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로는 상대에게 몰입되거나 상대를 수용하지 못하였다. 시대적 상황과 서로가 처한 여건 또한 부합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 두 사람은 각자의 분명한 세계가 있었고 그 영역이 사랑을 위해 포기하기에는 너무 크고 광대했다. 그렇게 이 불세출의 세기의 연인들은 화합되지 못하고 무수한 이야기와 주옥같은 시만 남겼다.

 

 위 시에서 예이츠는 오랜 사랑의 결과는 오직 허무한 이별뿐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연인끼리의 만남에서 시간의 경과는 그 풋풋한 설레임과 절실한 열정이 사그라짐을 의미한다. 사회심리학자 스턴버그(Robert Sternberg)의 '삼각형 이론'에 따르면 사랑에 빠지는 것은 서로의 관계에서 친밀감과 열정, 헌신을 공유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연애의 초기 단계에서 제일 먼저 발현되는 것은 열정이다. 열정적이고 도취감을 느끼는 이 단계는 서로가 취한 듯, 꿈꾼 듯 서로를 갈망하며 그리워한다. 그러나 이 기간은 짧고 쉽게 변질된다. 연인들의 관계는 친밀감으로 나아가면서 서로를 정서적인 관계로 지각하게 되며 상대방으로부터 따뜻한 느낌을 전해 받는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헌신(또는 책임감)이 두 사람의 관계를 지속시킨다. 그런데 이 세 가지 구성요소 중 한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 연애관계는 비정상적이고 불완전하여 그 결실을 보지 못한다. 친밀감 만으로 이루어진 관계는 단순한 친구사이로 끝나 버리고, 열정만으로 가득한 사랑은 독한 술에 취한 듯 매혹적이나 진정된 후 허공으로 흩어진다. 또한 책임감만으로 구성된 관계는 공허하며, 친밀감과 열정으로 비롯된 사랑은 낭만적이나 책임감이 결여되어 있고, 친밀감과 책임감으로 이루어진 사랑은 동반자적 관계로 끝나고, 열정과 책임감만 있으면 극적인 사랑으로 불타오른 후 사라진다. 열정과 친밀감, 책임감의 요소가 다 갖추어져야 진실로 완전한 사랑이 되는 것이다.

                               

 오래된 연인들이 느끼는 사랑은 이 중 친밀감이나 책임감만으로 이루어진 사랑이라 할 수 있다. 브람스와 클라라가 이와 같은 관계를 유지하였고, 예이츠와 모드 곤 또한 이 단계에서 그치고 말았다. 무릇 열정이 없는 사랑은 열기가 사라진 모닥불과 같다. 시인이 경계한 '유행에 뒤쳐진 사랑'이 되고 마는 것이다. 사랑을 이루고자 하는 연인들은 모름지기 오랜 기간 사랑하지 말아야 할 터이다. 상대를 향한 사랑의 헌신과 열정은 매 순간 새로워져야 하고 항상 뜨겁고 간절해야 한다. 그렇게 끊임없이 노력하고 헌신해야 두 사람의 사랑은 영원하게 빛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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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자 잉거스의 노래  - 예이츠  머리 속에 타는 불 있어  나 개암나무 숲으로 갔네  가서 나뭇가지 꺾어 껍질 벗기고  갈고리 바늘에 딸기 꿰고 줄을 매달아  흰 나방 날고  나방같은 별들 멀리서 반짝일 때  나는 냇물에 그 열매를 던져  작은 은빛 송어 한 마리 낚았네.

 

돌아와 그걸 마룻바닥에 놓고  불을 피우러 갔을 때  뭔가 마룻바닥에서 바스락거렸고  누가 내 이름을 불렀네.  송어는 사과 꽃을 머리에 단  어렴풋이 빛나는 아씨가 되어  내 이름을 부르곤 뛰어나가  빛나는 공기 속으로 사라졌네.  낮은 땅 높은 땅 헤매느라고  비록 나 늙었어도  그녀가 간 곳을 찾아내어  입 맞추고 손 잡으리,  그리하여 얼룩진 긴 풀 사이를 걸으며  시간과 세월이 다 할 때까지 따리라  달의 은빛사과  해의 금빛 사과를.  *'잉거스'는 아일랜드 신화에 나오는 美와 靑春과 詩歌의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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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상의 장미 - 예이츠  아름다움이 꿈처럼 사라진다고 누가 생각했던가?  슬픈 교만이, 너무 슬퍼서  새삼 놀라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이 붉은 입술 때문에,  트로이는 치솟는 죽음의 화염에 휩싸여 사라졌고,  우스나의 아들들도 죽었다.  우리도, 움직이는 세상도 사라진다.  겨울 강물의 파리한 물살처럼  출렁이며 흘러가버리는 인간들의 영혼 속에,  하늘의 물거품, 꺼져가는 별들 아래서  이 외로운 얼굴은 영원히 살아남으리.  대천사들이여 그대의 어둠 속에서 머리를 숙여라.  그대들도, 어떠한 생명들의 심장도 뛰기 전에,  피로하고 친절한 한 미녀가 신의 옥좌 곁을 머뭇거렸고,  신은 이 세상을 풀밭 길로 만들었다.  그녀의 헤매는 발길 앞에.  =====================================================================================================================

 

<편집을 마치며 ~~~ 예이츠의 말을 생각해 봅니다. >

 

♧ 인생은 비극이라고 생각할때 우리는 비로소 살기 시작하는 것이다. <예이츠>

    

 

 

 

 

{자료사진}= “公主”의 삶의 한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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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3 詩人 되기 먼저 자기자신을 완전히 깨닫는것, 곧 구리쇠 잠깨어 나팔 되기 2016-11-06 0 3249
1752 프랑스 상징주의 시 감상하기 2016-11-05 0 3866
1751 詩란 자연과 함께 인간의 덕성을 말하는것이다... 2016-11-05 0 3940
1750 너무나 많은 라침판이여,- 그때는 그때, 지금은 지금이라... 2016-11-03 0 3283
1749 詩는 "만드는것"이 아니라 생체를 통한 "발견"이다...... 2016-11-02 0 3800
1748 윤동주가 사랑했던 시와 시인들 2016-11-01 0 3798
1747 죽은지 10여년 지나서야 시적 가치를 찾은 "악의 꽃" 2016-11-01 0 3747
1746 프랑스 상징파 시인, 모험가 - 랭보 2016-11-01 0 3786
1745 프랑스 상징파 시인 - 베를렌느 2016-11-01 0 4389
1744 詩란 우연스러운 "령감들의 모음집"이 아니라 언어행위이다... 2016-11-01 0 3893
1743 파블로 네루다 시모음 2016-11-01 0 5809
1742 칠레 민중시인 - 파블로 네루다 2016-11-01 0 4604
1741 詩쓰는것이 돈벌이 된다면 어렵다는 말은 사라질것이다... 2016-11-01 0 3178
1740 조기천시인과 김철시인 2016-11-01 0 3814
1739 백두산은 말한다... 2016-11-01 0 3492
1738 "백두산"과 조기천 2016-11-01 0 3787
1737 "백두산", 완결물이 아니라 미완물이다... 2016-11-01 0 4645
1736 체코 문학을 알아보다... 2016-10-31 1 5577
1735 시인이 된다는것은... 2016-10-31 0 3413
1734 "풀"의 시인 김수영을 다시 떠올리다... 2016-10-31 0 4765
1733 "곰팡이는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것처럼..." 2016-10-31 0 3813
1732 "내가 저의 섹스를 개관하고 있는것을 아는 모양이다"... 2016-10-31 1 3428
1731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2016-10-31 0 3877
1730 한국적 모더니즘 대변자 김수영 작품 공자에 젖줄 대다... 2016-10-31 0 3570
1729 변변한 불알친구 하나 없어도 문학이란 친구는 있다... 2016-10-31 0 3646
1728 니체은 니체로 끝나지만 공자는 공자로 지속되다... 2016-10-31 0 3225
1727 詩란 사자의 울부짖음이다... 2016-10-31 0 3467
1726 참말이지 과거는 한줌 재일 따름... 2016-10-30 0 3340
1725 정지용, 김기림과 "조선적 이미지즘" 2016-10-30 0 3763
1724 김기림, 그는 누구인가... 2016-10-30 0 4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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