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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깨달음"의 "사고묶음"이여야...
2016년 12월 13일 18시 53분  조회:2499  추천:0  작성자: 죽림

 3. '깨달음'을 주는 시

  인간사와 사물의 특징을 세심히 관찰하여 제대로 묘사하면 모종의 깨달음을 전해줄 수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1996년 조선일보 당선작 [부의(賻儀)]를 갖고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봉투를 꺼내어
  부의(賻儀)라고 그리듯 겨우 쓰고는
  입김으로 후― 불어 봉투의 주둥이를 열었다
  봉투에선 느닷없이 한 움큼의 꽃씨가 쏟아져
  책상 위에 흩어졌다 채송화 씨앗
  씨앗들은 저마다 심호흡을 해대더니
  금세 당당하고 반짝이는 모습들이 되었다
  책상은 이른 아침 뜨락처럼
  분홍 노랑 보랏빛으로 싱싱해졌다
  씨앗들은 자신보다 백 배나 큰 꽃들을
  여름내 계속 피워낸다 그리고 그 많은 꽃들은 다시
  반짝이는 껍질의 씨앗 속으로 숨어들고
  또다시 꽃피우고 씨앗으로 돌아오고
  나는 씨앗 속의 꽃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한 알도 빠짐없이 주워 봉투에 넣었다

  할머님 마실 다니시라고 다듬어 드린 뒷길로
  문상을 갔다
  영정 앞엔 늘 갖고 계시던 호두 알이 반짝이며
  입다문 꽃씨마냥 놓여 있었다
  나는 그 옆에 봉투를 가만히 올려놓았다.
                                     ―최영규, [부의(賻儀)] 전문

  어려운 시어도 없고 난해한 표현도 없습니다. 잘 알고 지내던 이웃집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문상을 하러 간 것이 내용의 전부입니다. 하지만 이 시에는 생명 옹호의 정신과 불교적 깨달음, 측은지심 같은 고차원적인 사상이 담겨 있습니다. 불가에서는 말합니다. 생로병사는 인간이 이상 어찌할 수 없지만 윤회전생(輪廻轉生)을 하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고요. 전생의 업보니 인연이니 억겁이니 하는 불가의 용어를 떠올려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할머니가 늘 갖고 계시던 호두 알이 입다문 꽃씨마냥 놓여 있다는 것은, 꽃이 씨를 남겨 자신의 목숨을 이어간다는 것과 의미의 맥이 이어집니다. 한마디로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이 돋보이는 작품이지요. 최영규 시인처럼 생명의 의미를 종교적 차원에서 다뤄볼 수도 있겠지만 사물의 의미는 어떤 차원에서 다뤄볼 수 있을까요? 

  몽키 스패너의 아름다운 이름으로
  바이스 프라이어의 꽉 다문 입술로
  오밀조밀하게 도사린 내부를 더듬으며
  세상은 반드시 만나야 할 곳에서 만나
  제나름으로 굳게 맞물려 돌고 있음을 본다
  그대들이 힘 빠져 비척거릴 때
  낡고 녹슬어 부질없을 때
  우리의 건강한 팔뚝으로 다스리지 않으면
  누가 달려와 쓰다듬을 것인가
  상심한 가슴 잠시라도 두드리고
  절단하고 헤쳐놓지 않으면
  누가 나아와 부단한 오늘을 일으켜 세울 것인가
                                     ―최영철, [연장論] 마지막 연

  모서리와 모서리가 만난다
  반듯한 네 귀들이 날카롭게 모진 눈인사를 나누고
  같은 방향 바라보며 살아가라는 고무망치의 등 두들김에도
  끝내 흰 금을 긋고 서로의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붙박인 모서리 단단히 잡고 살아야 하는 세월
  화목이란 말은 그저 교과서에나 살아 있는 법
  모와 모가 만나고 선과 선이 바르게만 살아 있어
  어디 한구석 넘나들 수 있는 인정은 없었다
  이가 딱 맞다
                                     ―주강홍, [타일 벽] 앞 2연

  산과 산 사이에는 골이 흐른다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골과 왼쪽으로 돌아가는 산이 만나는 곳에서는 눈부신 햇살도 죄어들기 시작한다 안으로 파고드는 나선은 새들을 몰고 와 쇳소리를 낸다 그 속에 기름 묻은 저녁이 떠오른다 한 바퀴 돌 때마다 그만큼 깊어지는 어둠 한번 맞물리면 쉽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마지막까지 떠올랐던 별빛마저 쇳가루로 떨어진다 얼어붙어 녹슬어간다

  봄날 빈 구멍에 새로운 산골이 차 오른다
                                     ―송승환, [나사] 전문

  [연장論]은 198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고 [타일 벽]은 2003년 계간 {문학과 경계} 신인상 공모 당선작이며 [나사]는 2003년 계간 {문학동네} 신인상 공모 당선작입니다. 3편 다 '충격'과 '감동'의 차원에서는 운위하기 어렵고, 결국 '깨달음'을 지향하는 시라고 여겨집니다. [연장論]은 건설현장의 공구를 소재로 삼은 시인데 궁극적으로는 이웃과의 연대와 화해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많이 배웠건 많이 가졌건 제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무인도에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인간의 결국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이타적인 삶을 살지 않으면 고립되고 만다는 주제가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이 사회를 보다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연장의 역할을 하기를 바라는 주제도 유추해볼 수 있지요. 
  [타일 벽]을 쓴 사람은 건설회사 사장입니다. 그래서 이 분이 쓴 시는 다 현장성이 두드러집니다. 타일을 의인화한 이 시는 공사현장에서 펼치는 인생론입니다. 욕실 타일 벽 공사를 하면서 시인이 깨달은 것은 고무망치의 두들김에도 "흰 금을 긋고 서로의 경계를 늦추지 않는" 타일의 저항과 "붙박인 모서리 단단히 잡고 살아야 하는 세월"의 의미입니다. 공사현장에서 타일 벽은 이가 딱 맞아야 하지만 우리 인생이란 것이 어디 그렇습니까. 때로는 언밸런스이고 때로는 뒤죽박죽이고 때로는 오리무중이지요. 하지만 타일 벽이 그래서는 안 되지요. 규칙과 규율을, 감독과 관리의 세계에 있습니다. 그래서 시는 제4연에 가서 역전을 시도합니다. 

  낙수의 파형(波形)만 공간 가득하다
  물살이 흔들릴 때마다 욕실 속은 쏴아쏴아
  실금을 허무는 소리를 낸다
  욕실을 지배하는 건
  모서리들끼리 이가 모두 딱 맞는 타일 벽이 아니었다

  이가 모두 딱 맞는 타일 벽에 반항하려고 욕실의 물살이 "쏴아쏴아/실금을 허무는 소리"를 냅니다. 세상 너무 모나게 살 필요가 없는 법, 때로는 두루뭉실하게, 때로는 비스듬하게 살아가자고 시인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송승환의 시는 나사의 의미를 확장하여 당선작이 되었습니다. 시인은 사물의 본질을 파고들어 미세하게 그려내기도 하지만 내포(內包)보다는 외연(外延)을 지향하기도 합니다. 이미지 연상작용은 초현실주의자들의 전유물이었는데 송 시인은 그 기법을 멋지게 사용하여 독자에게 깨달음을 줍니다. 나사는 이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 가는 과정에서 일종의 화두가 되었던 것입니다. 나사의 사전적인 의미 고찰에 머물지 않고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을 갖추었기에 그는 시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안다는 것과 깨닫는다는 것은 다릅니다. 앎은 지식의 영역이고 깨달음은 지혜의 영역입니다. 시는 우리에게 충격과 감동과 함께 깨달음을 줄 수 있습니다. 철학서 한 권, 역사책 한 권에 들어 있는 내용을 압축하여 한 편의 시로 쓸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을 세상에서는 시인이라고 합니다. 깨달음이란 '크게 느낀다'는 뜻이 아닐까요? 우리가 사물과 인간에 대한 관찰의 안테나를 계속 세우고 있으면 시로 쓸 수 있는 것은 무궁무진합니다. 좋은 시는 늘 우리 주변의 사물을 잘 살펴 깊이 생각하는 사람의 손에 의해 씌어지는 것입니다. 일기나 수기는 자신이 체험한 것을 곧이곧대로 쓰면 되지만 시는 축소지향의 장르입니다. 구질구질 설명하지 않고 몇 마디로 줄여서 쓰면 그것이 바로 촌철살인이고 정문일침입니다. 시는 '충격'과 '감동' 혹은 '깨달음'을 지향한다는 말을 다시 한번 하면서 강연을 마치기로 하겠습니다. 제 강연을 경청해주신 분들 모두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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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 ―이정록(1964∼ )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이 시를 쓴 사람을 좀 소개하고 싶은데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그는 학교 선생님이고, 한 여인의 남편이고, 시인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한다면 한참 부족하다. 그의 소개에는, 나름대로 유명한 그의 어머니 이야기가 들어가야 한다. 이 시인은 한 어머니의 아들이다. 아들보다 더 시적이며 아들보다 더 위트 있으며 아들보다 더 심오한 세계관을 가지신, 한 어머니의 아들이다. 

어머니의 삶과 말씀은 아들에게 창작의 보물창고가 되어 주었다. 하시는 말씀마다 어찌나 주옥같은지, 시가 되지 못할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이 시에서도 어머니의 목소리가 등장한다. 어느 날, 어머니는 병원으로 가시면서 아들에게 말한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인다고 말이다. 자주 앉아야겠고 힘드니까 자동적으로 의자를 찾게 되었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어머니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의자를 찾아보니까, 내가 앉을 그 의자만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만사 의자에 앉아 있는 이치가 보였다. 꽃도 열매도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고, 사람의 인생이란 좋은 의자를 만들고 좋은 의자가 되는 일이었다. 
 

 

지난주 벌초 행렬로 인한 고속도로 정체가 있었다고 한다. 때가 되었다는 신호다. 나에게 좋은 의자가 되어준 이를 만나러 갈, 또는 좋은 의자가 되기 위해서 가야 할 때. 어머니의 의자 이론을 생각하는 추석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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