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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를 표방했던 시 전문 잡지, <장미촌>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시만을 전문으로 다룬 잡지는 1921년 5월 24일에 창간된 <장미촌>이다.
이 무렵 문예지는 대개 동인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장미촌>도 역시 상아탑 황석우, 월탄 박종화, 회월 박영희, 수주 변영로, 공초 오상순, 춘성 노자영, 우영 정태신, 근포 신태악, 이훈 등이 동인이 되어 발간된 것이었다.
잡지의 크기는 사륙판으로 23면밖에 되지 않는다. 여기에 15편의 시가 실려 있는데, 그중 1편은 번역시이다.
이렇게 작은 잡지인데도 <장미촌>은 낭만주의를 맨 먼저 표방하고 나서 주목을 받았다.
당시 문단의 분위기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박종화가 <개벽>지에 기고한 '문단 1년을 회고하면서'를 보면 어느 정도 참고가 될 것이다. 1921년에 대한 회고다. 그는 힘의 문학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썼다.
3·1운동 이후 많은 신문·잡지 그리고 출판물이 나와 문화적인 면에서 각성과 인식의 폭이 넓어졌지만 내용에 있어서 나약한 점을 드러내고 있는 문단에 만족치 못하는 글이다.
<장미촌>이 1921년에 창간되었고, 박종화가 이 문예지의 동인이었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당시 시인들이 어떤 각오를 지니고 이 잡지를 창간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표지엔 제호 아래에 '자유시의 선구'라는 문구가 실려 있어 이 잡지 동인들의 문학적 태도를 단적으로 대변해주고 있다. 또 그 아래엔 '선언'이라는 글이 실려 있는데, 첫 부분에 제호를 <장미촌>이라 한 연유가 있다.
발간사에 해당하는 이 글은 수주 변영로가 쓴 것으로 되어 있다. 수주는 이 글에서 잡지가 황석우의 주도 아래 창간되었다는 사실도 밝히고 있다.
그런데 판권란을 보면 황석우는 편집인으로 되어 있고, 발행인은 미국인 변영서로 되어 있다. 이는 일제 치하에서의 잡지 발행에 따른 제재를 피하기 위한 편법을 말해주는 것이다. 즉, 한국인이 잡지를 발행하려면 미리 원고 검열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장미촌>은 비록 출발은 작았지만 계획적이고 패기에 차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맨 뒤에는 '동인의 말'을 실어 동인들의 근황을 알려 친근감을 주었고, 독자 투고 안내문도 보인다.
정가는 20전. 광고도 게재하겠으니 참고하라면서 요금표까지 실려 있다. 그러나 2호를 내지 못한 채 종간되고 말았다.
회월 박영희는 1920년대를 '시의 황금시대'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이 시기에 우리 현대시의 기틀을 마련해주었던 <창조> <폐허> <백조> 세 종류의 순수 문예지가 창간되었다는 사실만으로서도 그 표현은 걸맞는다고 할 수 있다.
바로 그런 시기에 시만을 전문으로 다룬 잡지가 최초로 출현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동인들의 당시 나이는 대부분 20대 초반. <장미촌>은 재기발랄했던 젊은 문인들이 한국 문학사에 찍어놓은 작지만 분명한 족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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