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파시, 파괴시에 대한 옹호
요즘 시(詩)가 어려워졌다는 말이 심심찮게 들린다. 시인 평론가들조차 불편함을 토로할 정도다. 한 두 사람 한 두 편의 돌출적인 현상이 아니라, 최근 등단했거나 한 두 권의 시집을 낸 젊은 시인들을 중심으로, 뚜렷한 경향을 형성하고 있다.
현대시학 11월호, 현대시 11월호에 나오는 <이달의 작품>, <현대시작품상 추천작>을 보면 김근, 김언, 황병승의 작품이 올라가 있다. 이들은 모두 <실험시>, <엽기시>, <미래파시>, <파괴시>, <잔혹시>라 불리는 작품을 쓰고 있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젊은 시인들이다.
박현수 평론가는 '포스트 아방가르드의 문법- 잔혹시'라고 명명하고 있다. 주어 자리에 적절한 명사가 없으며, 서술어 자리에 주어와 어울리지 않는 동사가 들어가 있다. 비문 투성이다. 정재학, 김민정, 여정, 김언, 김근, 김참, 황병승, 김이듬, 이민하, 진수미 시인이 선두 주자들이다. 이들 시에 등장하는 소재들은 찢김, 뜯김, 잘림, 시체, 분열, 파편, 상처, 무료, 일탈, 거부, 공격, 회의 등 가학과 자학으로 가득 차 있다. 잔혹함을 주된 정서로 삼는다.
세상이 외면하니 시가 세상을 외면하려는 것이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없지 않다. 하지만 문화적 감성이 변했으니 시도 변하는 것일 뿐이라는 견해도 있다. 새로운 문학적 성감을 찾고 달래기 위한 다양한 체위의 변주라는 것이다.
김행숙(35) 시인의 비교적 짧은 시 ‘달무리’를 보자. “그의 진동이 그에게 후광을 만든다. 그가 문둥이같이 뭉개질 때/ 배는 출렁이고 있었다. 내가 깔고 누운 파랑은 나를 통과한 그의 뒤편일까? (중략) 그의 뭉개진 코가 킁킁대며 누구니? 누구니? 묻고, 다시 물을 때// 아으, 부풀어 오르는 한 그루 버드나무.” 그의 시는 이성적 사고체계로 스며들지 않는다.
오히려 무의식과 느낌, 환상ㆍ분열적 내면 풍경에 철저히 기대고 있는 듯하다. 전통 서정시의 독법에 따라 어떤 의미나 이미지를 포착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하고 무모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2003년 등단한 황병승(35)은 무의식의 시인으로 통한다. 그만큼 모호하고 난해하다는 의미다. “하늘의 뜨거운 꼭짓점이 불을 뿜는 정오// 도마뱀은 쓴다/ 찢고 또 쓴다//(악수하고 싶은데 그댈 만지고 싶은데 내 손은 숲 속에 있어)…”(‘여장남자 시코쿠’) 이 이미지의 분열적 분방함과 해체적 언술을 두고 그는 “새로운 문화현상과 비주류적인 것에 대한 관심을 굳어져버린 주류의 언어와 문법으로 풀어내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시의 길이 꼬이고 뒤틀리고 갈라지고 끊김이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이들 시의 메커니즘은 다양하다. 빛이나 공기 입자의 산란처럼 어지럽게 좌충우돌하는 사유의 혼종성, 세계와 자아의 대립과 반영을 넘어 자아분열적이기까지 한 현란한 이미지, 성적ㆍ관능적 환상과 잔혹하고 그로테스크한 상징 등…. 이성과 관념 이전의 원초적 시어들이 은닉하고 있는 ‘무엇’을 감지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 독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이와 관련 김행숙 시인은 문학적 감성의 변화를 말한다. “어떤 시는 시인ㆍ평론가보다 시를 잘 알지 못하는 일반 독자들이 오히려 뜨겁게 반응합니다. 폭 넓게 소통한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좁은 대신 깊이 소통하는 층이 분명히 있어요.” 그는 그것을 생물학적 세대차이라기 보다는 차별화한 문화체험에서 비롯된 문화적 세대차이일 것이라고 말했다.
김이듬은 <시와 반시> 여름호에서 "나는 말쑥하고 균형 잡힌 시를 혐오한다. 안정감 있고 깨달은 자는 침묵하면 좋겠다. … 나는 내가 쓴 시에 관해서 말하기가 뭐하다. 낯설고 잘 모르겠고, 몰라서 쓴다.… ‘노력’해야 한다면 그때는 안녕."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김언 시인은 <웹진 문장>10월호에서 "시단에서 유일하게 죄악인 것이 있다면 바로 다양한 꼴을 못 보아주는 태도이다. 시적으로 봐도 그렇고 생물학적 측면에서도 굉장히 위험한 태도다.… 자신 안에 스스로 잡종의 비율을 높여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권혁웅 시인은 비평집 <미래파- 2005년 젊은 시인들>에서 "아름다움은 움직이는 거다. …최근 시들을 비판하는 이들이 논거로 삼은 자리는 절대로,항구적인 진리의 자리가 아니다. 차라리 최근 시들이 진리로 간주되어온 그 자리를 비판의 대상으로 겨누고 있다고 말해야 옳다. ........ 60년대의 김수영, 80년대의 이성복이 당대 시단에 충격을 준 것처럼, 이들 시가 낯설고 불편한 것은 새로운 미학과 세계관을 한 발 앞서 반영한 것이기 때문........ 먼 훗날, 이들의 작품이 낡았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날이 분명히 올 것이다. 다르게 말해서 이들의 작품이 가까운 미래에 우리 시의 분명한 대안이라는 것을 인정할 날이 올 것이다.”고 그들을 적극 옹호한다.
2003년 김행숙씨의 첫 시집 ‘사춘기’(문학과지성사)의 해설에 이장욱(시인ㆍ소설가ㆍ평론가)씨는 “우??도달해가는 현대시의 어떤 징후”라는 조심스러운 표현을 쓴 바 있다.
이제 그 징후는 좋든 싫든 하나의 도도한 경향으로 자리잡았다. 그는 “최근 젊은 시인들의 경향이 우리 현대시의 다양성을 확장하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지배적 경향을 형성할 지는 미지수”라고 말했다.
황현산(고려대 불문) 교수는 “한국 현대시단의 양대 흐름을 형성했던 농경사회적 정서와 도시적 정서의 굳은 틈을 비집고 서울의 하위정서 혹은 지방도시적 정서들이 새로운 경향을 형성하는 듯하다”며 “하기에 따라서는 향후 2~3년 내에 우리 시단의 지형도가 바뀔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소통의 문제와 관련, 그는 “승리한 자의 말은 상식에 근거하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소통되지만, 억압 받는 자는 말 한 마디 하기도 힘들고 하더라도 타박 당하기 일쑤”라며 “하지만 그 말은 우리가 반드시 소통해야 할 말“이라고 말했다.
■미래파시, 파괴시에 대한 비판
이들 시에 대한 비판도 있다.
⇒문학의 본령이 문자언어를 통한 소통이다. 암호에 가까운 자의적 기호와 자폐적 무의식의 흔적들이 어떻게 문학인지 모르겠다.
⇒환상이 없는 문학은 없다. 두보의 시에도, 카프카의 글에도 환상은 있다. 하지만 이들의 시는 삶의 리얼리티를 상실한 채 머리(환상) 속에서 떠오른 느낌들을 시적 긴장 없이 풀어놓은 것 같다.
⇒하나 하나의 작품을 놓고 보면 참신하지만 모아놓고 보면 시를 형성하는 문법이나 문장을 엮는 방법 등이 흡사하다. 일종의 유행 같다는 생각이다.
■ 커밍아웃 / 황병승
나의 진짜는 뒤통순가 봐요
당신은 나의 뒤에서 보다 진실해지죠
당신을 더 많이 알고 싶은 나는
얼굴을 맨바닥에 갈아버리고
뒤로 걸을까 봐요
나의 또 다른 진짜는 항문이에요
그러나 당신은 나의 항문이 도무지 혐오스럽고
당신을 더 많이 알고 싶은 나는
입술을 뜯어버리고
아껴줘요, 하며 뻐끔뻐끔 항문으로 말할까 봐요
부끄러워요 저처럼 부끄러운 동물을
호주머니 속에 서랍 깊숙이
당신도 잔뜩 가지고 있지요
부끄러운 게 싫어서 부끄러울 때마다
당신은 엽서를 썼다 지웠다
손목을 끊었다 붙였다
백년 전에 죽은 할아버지도 됐다가 고모할머니도 됐다가…
부끄러워요? 악수해요
당신의 손은 당신이 찢어버린 첫 페이지 속에 있어요
▲ 그러다가 어느 날 / 진수미
유방은 부풀어오른다 터질 듯이 고요한 프로펠러
갈증을 느낀 비행선이 그림자를 몰고 나타난다.
보라색 태양일랑 내가 오려냈다오.
승냥이들이 거품 무는 파도가 쫓아오고
내장 없는 배의 항로를 걱정하는
어머니, 이 배에 앓는 항구가 누워 있어요.
사랑스런 임차인들아,
나는 그들에게 돌려줄 것이 있다오.
당신의 장기를 물어뜯는 거리의 개들
적선은 더 큰 바람을 부를 거예요.
소유를 짤랑이는 열쇠와 함께
집달리들이 득달같이 들이닥친다.
그들은 신부의 의상을 하고 있어요.
냉장고는 머리가 깨져 시큼한 국물을 지리는데
벌레들이 바람의 커튼을 흔들며 날아올라요.
뒤엉킨 서랍의
껍질 벗고 교미하는 실뱀 한 꾸러미,
그들은 신부의 의상을 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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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에게 ― 문정희(1947∼ )
아들아
너와 나 사이에는
신이 한 분 살고 계시나보다.
왜 나는 너를 부를 때마다
이토록 간절해지는 것이며
네 뒷모습에 대고
언제나 기도를 하는 것일까?
네가 어렸을 땐
우리 사이에 다만
아주 조그맣고 어리신 신이 계셔서
(…)
이젠 쳐다보기만 해도
훌쩍 큰 키의 젊은 사랑아
너와 나 사이에는
무슨 신이 한 분 살고 계셔서
이렇게 긴 강물이 끝도 없이 흐를까?
대한민국에는 아주 많은 아들들이 살고 있다. 갓 태어난 아가부터 할아버지까지, 대략 5000만 인구의 반절이 남성이고 누군가의 아들이다. 그러니까 문정희 시인의 이 시는 우리나라 인구의 절반을 향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시를 진짜로 이해할 사람은 아들들보다는 어머니들이다. 아들의 경우에는 시의 모든 내용이 마음속에 사무치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원래 아들이란 어머니의 마음을 짐작할 뿐, 전부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모든 어머니들은 이 시를 읽으면서 단박에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아들아’라는 첫 구절을 읽는 순간 내 아들의 얼굴이 떠올라 벌써부터 마음이 동요될지 모른다. 어머니에게 아들의 이름은 참 간절했다. 그를 위해 기원하고 기도하는 시간은 절절했다. 어려서는 근거 없이 든든했고, 까닭 없이 사랑스러웠으며, 절대적으로 귀했다. 아들은 커가면서 주로 뒷모습만 보여주었지만 그것마저 사랑했다. 그렇게 어머니의 기도와 사랑과 시선을 받으며 아들의 어깨는 넓어져 갔다.
시인의 표현에 의하면 그와 나 사이에는 위대한 신이 사는 것 같았다. 이 말에 많은 어머니들이 공감하실 것이다. 아들은 믿고 의지하고 지키는 종교 같았다. 그러니까 아들은 이미 축복받은 사람이고, 어머니는 이미 거룩한 사람이다.
어머니의 사랑을 확대해서 생각한다면 누구든 귀한 자식이니 세상에 귀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 이 시를 읽으면 왜 학대나 괴롭힘이라는 말, 가혹 행위나 폭력이라는 행동을 미워해야 하는지 다시금 깨닫게 된다. 종교 같은 사람이고, 종교 같아야 할 사람이다. 그러니까 누구든 함부로 하지 말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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