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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석류, 그리고 파렬, 분출, 문여는 소리...
2016년 12월 22일 18시 47분  조회:2602  추천:0  작성자: 죽림

석류가 영글어 터지는 계절 
성숙이고 파열이고 분출이며 시큼한 슬픔이거나 환희인 열매 
알갱이 하나하나에 생각 쏟아져… 
붉은색은 우리 자랑거리인 푸른 가을 하늘과 잘 어울려
 

박해현 문학전문기자
박해현 문학전문기자
한여름 내내 뙤약볕에 시달리던 석류(石榴)가 여물어 붉은빛으로 터지는 계절이 왔다. 솔직히 석류 맛이 뭔지 잘 모른다. 지금껏 한두 번 먹어봤을까. 그래도 이 계절이 오면 괜히 생각나는 과일이다. 봄에 머리에 쓰고 싶은 화관(花冠)처럼 가을엔 이마를 간지럽히는 허영(虛榮)이라고나 할까. 석류를 칼로 싹둑 잘라 먹기보다는 물끄러미 바라보고 싶을 뿐이다. 석류 한 알은 과일이라기보다는 여러 개의 밀실을 내부에 지닌 종자(種子)들의 집이기도 하다. 그 단단한 덩치를 깨물기도 전에 붉은 속내를 떠올리기만 해도 꿀꺽 침을 삼키게 된다.

이 계절에 읽을 시 한 편을 꼽는다면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가 1920년에 발표한 '석류'를 빼놓을 수 없다. '알맹이들의 과잉에 못 이겨/ 방긋 벌어진 석류들아,/ 숱한 발견으로 파열한/ 지상(至上)의 이마를 보는 듯하다!'라며 시작하는 작품이다. 우리말로 여러 차례 옮겨졌지만, 평론가 김현의 번역 시집 '해변의 묘지'를 통해 읽은 이들이 많다. 이 시의 도입부는 익을 대로 익어서 터진 석류를 시각적으로 묘사했다. 곧이어 둥그스름한 석류는 심사숙고 끝에 얻은 깨달음으로 인해 절로 이마를 치게 되는 시인을 떠올리게 한다. '지상(至上)의 이마'(des fronts souverains)는 지존(至尊)의 경지에 이른 지성(知性)이 담긴 두뇌를 가리킨다. 발레리는 언어의 건축가였다. 그는 감정의 절제와 이성의 통제를 통해 마치 집을 짓듯 시어를 차곡차곡 쌓으며 시를 지었기에 지적(知的)으로 섬세한 시인으로 꼽혔다.

최근엔 성귀수 시인이 발레리의 대표시를 옮겨 시집 '바람이 일어난다! 살아야겠다!'를 내면서 '석류'를 새롭게 번역했다. '알갱이들의 과잉에 못이겨/반쯤 벌어진 단단한 석류들아,/ 마치 자신의 발견들로 터져 나간/ 당당한 이마들을 보는 듯하여라'라고 도입부를 옮겼다. 그는 내부의 힘에 겨워 터진 단단한 석류를 '당당한 이마'라고 위풍당당하게 옮겼다.

 
김현의 번역으로 이 시를 이어서 읽어보면 이렇다. '너희들이 감내해 온 나날의 태양이,/ 오 반쯤 입 벌린 석류들아,/ 오만(傲慢)으로 시달림 받는 너희들로 하여금/ 홍옥(紅玉)의 칸막이를 찢게 했을지라도,// 비록 말라빠진 황금의 껍질이/ 어떤 힘의 요구에 따라/ 즙(汁)든 붉은 보석들로 터진다 해도,// 이 빛나는 파열은/ 내 옛날의 영혼으로 하여금/ 자신의 비밀스런 구조를 꿈에 보게 한다.' '이 빛나는 파열'로 시작한 마지막 3행은 원문의 산문적 서술 구조를 기막히게 한글로 고스란히 반영한 번역이다. 시를 언어의 건축술에 비유한 발레리의 생각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석류는 가혹한 햇빛을 오만하게 견디면서 스스로 껍질을 찢어 붉은 내부를 터뜨린다. 시인은 오만할 정도로 자긍심이 강한 영혼을 궁굴려서 시를 빚어낸다. 석류를 정물화처럼 세밀하게 묘사한 이 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창작의 신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게 된다. 성귀수 시인의 번역은 마지막 3행시에서 남다르다. '그 찬란한 파열은/ 꿈꾸게 한다, 내 지난 영혼의/ 은밀한 건축술을'이라며 원문의 구조를 살리면서 운문(韻文)의 맛을 가미했다. 원문에 없는 '쉼표'(꿈꾸게 한다, 내 지난 영혼의)까지 창안해 시 읽기의 말맛을 살리려 애썼다.

발레리의 석류가 사람의 머리를 떠올리게 한다면, 숱한 한국 시인들의 석류는 가슴을 가리킨다. 이가림 시인은 '언제부터/ 이 잉걸불 같은 그리움이/ 텅빈 가슴속에 이글거리기 시작했을까(중략)/ 내가 깨뜨리는 이 홍보석의 슬픔을/ 그대의 뜰에 받아주소서'라며 가슴에 맺힌 그리움을 토로했다. 박라연 시인은 '오 열어젖힌/ 석류의 말 못 할/ 알알이 알알이'처럼 연속된 'ㄹ' 받침의 음악성을 살리며 가슴속 슬픔을 노래했다. 발레리의 석류가 내적 성숙을 거쳐 튀어나온 언어를 노래했다면, 한국 시인들은 억눌렸던 감정의 분출을 참지 못해 서러워한다. 그 설움을 해소하느라 석류를 관능적으로 노래한 시인들도 적지 않다.

아무튼 석류는 성숙이고 파열이고 분출이다. 시큼한 슬픔이거나 달콤한 환희다. 알갱이 하나하나 음미하다 보면 저마다 맛이 달라서 이러저러한 생각이 쏟아져 나오기도 한다. 시인 정지용은 겨울 밤 화롯가에 앉아 익을 대로 익은 석류 알갱이를 하나씩 씹었나 보다. '한 겨울 지난 석류 열매를 쪼개어/ 홍보석 같은 알을 한알 두알 맛 보노니/ 투명한 옛 생각, 새론 시름의 무지개여/ 금붕어처럼 어린 녀릿 녀릿한 느낌이여'라고 노래했다.

서정주는 석류가 열린 것을 보곤 '어쩌자 가을 되어 문은 삐걱 여시나?'라고 읊었다. 그는 다른 시에선 '석류꽃은 영원으로 시집 가는 꽃'이라고도 했다. 붉디붉은 석류는 우리 산하의 자랑거리인 푸르디푸른 가을 하늘과 잘 어울린다. 올가을엔 석류 맛을 제대로 느끼고 싶다. 석류가 터지면서 가을이 익어간다.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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