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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를 낳고싶을 때에는 동시산실에 가 지도를 받으라...
2017년 02월 11일 17시 59분  조회:2359  추천:0  작성자: 죽림

동시 창작법 ①

동시(童詩) 산책(散策)

신 현 득

  동시가 어떻다는 말을 하기 전에 나는 나의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나는 사범학교 출신이지만 그 때 어느 곳에서나 다 그랬듯이 아동문학이란 말은 조금도 들어보지 못하고 졸업했다. 간혹 동화란 말은 들었지만 동시란 말은 전혀 듣지 못했던 것이다.
  학장 시절 나도 남만 못지 않은 문학 지망생이었다. 시(
)도 쓰고 소설도 습작을 했다. 이 중 소설은 그 뒤 지방의 작은 규모의 현상 모집에서 뽑히기까지 했으니 약간은 소질이 있었던 것 같다. 학창 시절에는 이런 것을 씁네 하고 제법 우쭐거리기도 했다.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곧 교사로 부임을 하게 됐는데 마침 도내(
道內)의 무슨 글짓기 행사가 있어 글짓기 지도를 맡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종목은 동요·동시·산문이었다. 나는 이 때 처음 동시라는 말을 들었다. 동요는 알고 있었지만, 동시란 말을 처음 들은 나는 나름대로 정의를 내려봤다.
  「동요가 4·4조 7·5조 등의 정형시이니 동시는 아마 어린이들이 읽을 자유시를 말할 것이다.」
  내 생각은 적중했다. 내 생각대로 아이들을 지도해 간 것이 도내 행사에서 3등이란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 뒤 그 때 씌어진 아동작품이 모두 지상에 발표되었는데 아이들이 쓴 글은 동요는 없고 모두 동시뿐이었다. 그러자 동시 동요의 구별없이 통틀어 상을 주고 만 것이다.
  그 때부터 아동들의 운문은 동시가 되었고 동요는 이들 세계에서 사라지고 있는 단계가 되었다. 이것이 1955∼6년 때의 일이다.
  동요가 아이들의 글짓기에서 사라지게 되기까지는 이상의 과정들을 겪었다. 아마 아동들에게는 자유스런 표현이 가능한 동시보다는 동요가 더 구속적이고 어려웠기 때문이었을는지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면에서 아직도 신춘문예는 동요를 모집하고 있었다. 그런데 동요를 응모하는 사람이 없어서 뽑히는 것은 모두 동시뿐이었다. 동요 모집이라는 간판을 걸고 동시를 당선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얼마 후에는 신춘문예에서도 동시라는 간판을 내걸게 되었다. 이것이 60년대의 초기다. 이런 모든 것이 동요와 동시의 미분화 시대에 있었던 일이다.
  이상의 이야기에서처럼 동시는 동요에 맞서는 아동문학의 장르로 동요가 정형시인데 반해 동시는 자유시의 한 형태이다.
  지금에 와서는 우리 나라에서 동시만을 전공하는 사람이 백 명이 넘게 되었지만 그 당시만해도 동시는 개척 단계여서 지금 손꼽을 수 있는 아동문학의 대가급 외엔 없었다.
  물론 아동문학과 글짓기 지도는 별개의 것이며, 전자가 창작 행위인데 비해 후자는 하나의 교육 활동이지만, 어쨌든 나는 나의 아동문학에 접한 코오스가 아동작문이란 비정상적인 것이었다.
  나는 아동들을 지도하면서 나도 아이들처럼 이런 글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것이 잘 되지 않는 것이다. 아이들 지도하는 일은 되는데 내가 글을 쓰기란 여간 힘들지 않았던 것을 지금 나는 기억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나는 습작기에서 애를 태우고 있는 아동문학 지망생들을 선험자(
先驗者)로서 동정을 하면서 격려하고 싶다.
  나는 하루종일 작품을 생각하다가 지쳐서 저녁이면 술을 들이키곤 했다. 괴로운 작업이기도 했다.

빠꼼
빠꼼

문구멍이
높아간다.

아가 키가
큰다.

  스무 글자가 되지 않는 이 작품은 이런 피나는 작업 긑에서 이루어진 것인데 69년도 조선일보에서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뽑혔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이런 작품을 쓰기 위해 그와 같은 힘을 들였던가 싶은 마음뿐이다. 이 작품의 짜임새나 깊이가 뭐 대단하지 못한데도 실망이 되지만 지금 같으면 단 몇 시간만에 써버릴 것을 몇 달을 두고 머리를 짜내던 일이 우습게만 여겨지는 것이다.
  그 때 나에게는 겨우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가 있었다. 이 아이가 창호지로 바른 문을 뚫는 것이다. 어느 아이나 그런 버릇이 있다. 곧잘 손가락을 내밀어 구멍을 뚫는다.
  아이가 있는 집이면 으레 문구멍이 있다. 문구멍이 없는 집처럼 서글픈 집은 없다. 자식이 흔하지 않는 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아니었다. 아이가 문구멍을 뚫을 때마다 아이에게 야단을 쳤다. 셋방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문구멍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이 때 문구멍의 높이와 아이의 키와의 관계 같은 것을 생각하면서 상당히 긴 시를 썼다고 기억이 된다. 그러다가 그것을 줄이고 줄인 끝에 남은 것이 이 열여덟 개의 글자였다.
  나는 이 열여덟 자의 동시를 완성하고
  「길이가 너무 짧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신춘문예에 내는 작품 가운데 별반 기대도 하지 않으면서 끼워 넣었다. 그런데 우연히도 이것이 가작에 뽑힌 것이다. 이리하여 내 이름 석 자가 신문에 발표되었다.
  작품을 써 놓고
  「왜 이렇게도 뭇난이 작품을 썼을까?」
  「참 할 수 없어.」
하고 부족을 느끼는 이들은 이제 안심해도 될 것이다.
  나는 1961년 첫 동시집 <아기눈>을 냈다. 70페이지밖에 되지 않는 4·6판의 작은 책이다. 내가 고백하고 싶은 것은 이 작품집의 체재가 못되고 책이 얇다는 말이 아니다. 못난이 작품들이 있기 때문이다.

뽕잎이 핍니다.
뽕잎이 피면서
생각합니다.
<올에 누에는 입맛이 어떨까?>

아까시아 잎이 핍니다.
아까시아 잎이 피면서
생각합니다.
<올에 토끼는 입맛이 어떨까?>

  <봄>이라는 작품이다. 어떤 이들이 이 작품을 읽고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고 난 다음에사 이 작품이 객관성이 없는 표현에서 씌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 소리를 듣고 나는 고민했다. 그러나 이제와서 어쩔 수도 없었다. 내딴은 뽕잎이 피면서 누에의 입맛을 생각하고 아까시아가 피면서 아까시아를 가장 즐기는 토끼의 입맛을 생각하는 내용을 그려낸다고 쓴 작품이다. 그런데 그 표현 수법이 잘못되었던 모양이다.
  그밖에도 실패작은 얼마든지 있다. 그런가 하면 지금 읽어봐도 괜찮다 느껴지는 것도 더러 있다.

까만 아기 눈 속
샘 그림자.
조그만 샘 속에
엄마 그림자.

그림자 덮고
잠이 들면
그림자 살아서
꿈이 되지요.

꿈 속에서
엄마와 뛰어다니면
찰방찰방
잔물결이
일어나지요.

  이 작품은 제법 시가 담겨져 있다. 그러나 역시 표현들이 분명하지 못하다. 그것은 끝연에 가서 더욱 그렇다.
  그러나 나는 그 당시 이 변변치 못한 작품을 쓰기 위해 땀을 흘렸고 여러 가지 방면으로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아기의 눈 속에 내 그림자가 지는 것을 발견해 냈다. 그 그림자를 엄마 그림자로 바꾸어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그 아기눈의 그림자가 어쩌면 옹달샘에 비친 그림자와 같다는 데서 이런 시를 잡은 것이다.
  어쨌든 힘드는 작업이었다.
  「작품이 잘 씌어지지 않는다. 왜 이렇게도 잘 되지 않는가」 하고 자신을 투덜대는 사람은 이 말을 듣고 안심해도 될 것이다.

아가씨가 베를 짜고 있었습니다. 뒷밭에 목화씨가 베짜는 장단에 싹이 틉니다.
<딸깍> 한 눈.
<딸깍> 한 눈.
<딸깍> 또 한 눈…….
뒷밭에는 하룻밤 사이에 목화꽃이 소복이 나왔습니다.

목화싹은 베짜는 장단에 쑤욱쑤욱 키가 컸습니다. 베짜는 장단에 잎이 돋고 가지가 나고, 베짜는 장단에 꽃망아리를 맺고 꽃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딸깍> 한 송이.
<딸깍> 한 송이.
<딸깍> 또 한 송이…….
목화밭은 하룻밤 사이에 아름다운 꽃밭이 되었습니다.

베짜는 장단에 뚝뚝 꽃이 지고 베짜는 장단에 복숭아 같은 다래가 열고 다래가 벌어 목화가 피기 시작했습니다.
<딸깍> 한 송이.
<딸깍> 한 송이.
<딸깍> 또 한 송이…….
목화밭은 하룻밤 사이에 하얀 솜밭이 되었습니다.

  <목화밭>의 전문이다.
  산문시 목화밭을 쓰기 위해서도 힘드는 작업이 필요했다. 첫째는 베틀 소리에 맞추어 목화싹이 트고 목화꽃이 피고 목화송이가 피도록 하는 일이었고, 그보다도 힘이 든 것은 목화밭을 베틀 가까이로 끌어들이는 작업이었다. 두 번째의 작업이 이루어졌을 때 이 산문시는 절반의 일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사실 목화밭을 들판 가운데 두고서는 이 시의 장면을 상상할 수 없다. 그래서 목화밭을 집뒤로 끌어온 것이다. 이것이 아직 그 당시의 내 사고력으로서는 큰 작업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목화밭을 집뒤에 두고 나니 베짜는 소리에 목화가 크도록 하는 일은 쉽게 진행되었고 베틀 소리에 싹이 트는 일, 꽃 피는 일 등을 적당한 대구(
對句)로 만들어 행()을 잡음으로써 시각적(視覺的) 효과도 노릴 수가 있었다.

(1978년 가을 『아동문학평론』 제9호)

 

동시 창작법 ②

동시(童詩) 산책(散策)

신 현 득
 

학교 종이 땡땡 친다.
어서 가 보자.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

  이 <학교종> 노래의 「땡땡 친다」는 어법에 맞지 않다 해서 지금은 「땡땡땡」으로 고쳐 부르고 있다. 첫 행에서 「땡땡」을 빼버리면 「학교 종이 친다」가 된다. 「종이 친다」는 「글씨가 쓴다」「옷이 입는다」「공이 친다」와 마찬가지로 문법적인 모순이 있다.
  그런데 이런 식의 동시가 얼마든지 있다. 이 동요를 지은이도 처음 그 문장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글이 되었고 그것이 작곡되어 상당히 오랜 동안 어린이들 입으로 불려졌던 것이다.
  시처럼 어법을 따지는 문장은 없을 것이다. 동시는 더욱이 그렇게 해야 되고 그렇게 해야 어린이들을 위한 시가 되는 것이다.

저기 가는
저 영감
꼬부랑 영감
우물쭈물 하다가는
큰일 납니다.

  처음 지어졌을 때의 <자전거>라는 이 동요는 교육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이런 노래를 권한다면 도의 교육이 어떻게 되겠는가? 어른을, 특히 나이 많은 할아버지를 놀리는 것이 되고 만다.
  도의를 범하는 것이 아동문학일 수는 없다. 아동문학은 교육과 문학의 중간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긴 하지만 따지고 보면 교육이 되지 않는 문학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따위의 글은 동요뿐만 아니라 어느 노래의 가사로도 좋은 것이 아니다.
  섹스를 동원할 수 없는 게 아동문학이라고 한다. 섹스가 꼭 비도덕적인 것만은 아니지만 어린이들은 아직 섹스가 그들의 생활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따라서 아동문학의 소재가 되지 않는다.
  이런 도덕 문제나 섹스 문제를 생각지 않고 씌어진 아동문학 작품이 눈에 띄기도 하는 것이다.

땅 속엔
땅 속엔
누가 있나 봐.

손가락으로
쏘옥 올려미나 봐

쏘옥
모란꽃 새싹이 나온다.

  이 아동시는 조금 전까지도 교과서에 실려 전국 어린이들의 본보기 글이 되어 주었다. 땅속에다 손가락을 두고 봄날 돋아나는 새싹의 광경을 재미있게 표현했다.
  그러나 이 시에는 모순이 있다. 모란싹은 땅 속에서 솟은 것이 아니라 모란의 가지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모순을 처음 발견해낸 사람은 시인 박목월씨라고 한다.
  이와 같이 아무리 착상을 잘 잡은 글이라해도 내용에 모순을 가지고 있어서는 작품이 되지 않는다.
  이런 보기는 얼마든지 있다.

병아리떼 뿅뿅뿅
놀고 간 뒤에
미나리 파란 싹이
돋아났어요.

  병아리가 놀던 곳은 무논 가운데가 아니다. 그런데 미나리는 미나리논 같은 물이 고인 데서 싹을 틔운다. 물론 마른 땅에서 미나리가 돋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보편성이 없다. 보편성이 없는 경우는 작품에서 피하는 것이 좋다.
  언젠가 나는 백두산 천지에 대해서 재미나는 걸 생각햇다. 천지의 물이 그 넓은 호수에 하나 가득 괴자면 얼마나 깊은 땅밑에서부터 많은 물이 솟았겠느냐 하는 생각이었다.
  「그것은 백두산의 뿌리쯤 되는 깊이에서일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보니 퍽 재미가 있었다.
  이 물이 백두산에 고여 있다가 압록강 두만강이 돼 흐르는 것이다. 이 때 호수의 물은 절반씩 나뉘어서 서로 이야기를 할 것이라 생각했다.
  「얘, 너는 압록강물 되어라. 나는 두만강물 될께.」
  「그래 그래 지금부터 작별이야. 그렇지만 바다에서 만나게 될걸.」
  나는 이렇게 천지의 물이 압록강 두만강의 물줄기로 나뉘어 흐르는 장면을 생각했다.
  나는 이런 착상이 좋은 시가 될 것이라 생각하고 며칠 밤이나 시를 낳느라 끙끙거렸다.

하나의 물줄기로
같이 솟아서
너는 압록강
나는 두만강

나뉘어져 흐르는데
손 흔들며 헤어지지만
너른 바다에서는
다시 하나가 돼
만날 걸.

  나는 며칠만에 이런 낱귀절 몇을 생각하고 더 다듬어 보면 대작이 되리라는 기대를 해봤다.
  그렇지만 확인을 해야 한다. 정말 압록강 두만강이 천지에서 흐르는가? 그 때 어느 교과서에 그렇게 배운 듯하고 학교 선생님도 그렇게 가르쳤다. 그러나 확인을 할 필요는 있다.
  그런데 온갖 서적을 다 뒤진 결과 천지에서 흐르는 것은 엉뚱하게도 송화강(
松花江) 하나뿐이었다. 백두산에 오른 등정기(登頂記)를 읽어봐도 역시 그러했다.
  실망은 컸지만 다행이었다. 이것을 잘못 알고 이 작품을 발표했더라면 나중에 얼마나 웃음거리가 됐을까?
  결국 이렇게 해서 이 엉터리 작품은 폐기가 되고 말았다.

비가 돼 내리면서
내려다봤네.

하나의 반도가 젖고 있네.
산맥이 젖고 있네.
총부리가 젖네.

나의 한 끝은 벌써
강을 이루며 긴 구비를 돌아
바다로 흐르고 있네.
저쪽 영상강으로도 흐르고 있네.

도롱이를 쓴
농부들이 논둑을 걷고 있네.

틀림없는 같은 나라 사람이 걷고 있네.
시들었던 땅이 푸르게 일어서네.

백두산 천지가, 작은 그릇이
나를 받아 모으네.
송화강으로 나를 쏟아 보내고 있네.

저쪽에서도 한라산이
백록담이란
그릇을 들고
방울방울 나를 받아 모으네.

  이 시는 동시라는 이름으로 지난 여름 『소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제목은 <비가 돼 내리면서>였다.
  이 시의 내용에서 <나>는 구름이다. 구름인 <나>가 비가 돼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의 표현으로 봐서는 구름이 백두산 한라산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높이에 떠 있다. 이것은 인공위성 정도의 높이에 있어야 한다. 도대체 그런 소나기 구름이 있을 수 있는가? 사실은 한 고장을 내려다볼 만한 높이의 구름도 잘 있을 것 같지 않다.
  시는 허풍이며 거짓말일 수 있다. 그러나 이치에 맞는 거짓말이어야 한다. 그런 점으로 봐서 이 시는 단단히 얻어맞아야 하고 그 책임은 지은이인 필자가 져야 한다.
  그러나 이런 모순을 알면서도 이 엉터리 글을 발표한 것은 이 시를 낳기까지의 수고와 이 시에 담긴 나의 염원 같은 것이 아까워서였던 것이다.

(1978. 10. 『아동문학평론』 제10호)

 

동시 창작법 ③

철저히 의인(擬人)을 하라

신 현 득

  ―연필이 말을 한다
  거짓말이다.
  ―이슬비가 속삭인다
  거짓말이다.
  ―나무가 생각한다
  거짓말이다.
  연필이 말을 한다든가, 이슬비가 속삭인다든가, 나무가 생각한다든가, 모두가 거짓말이다. 그러나 시의 세계에서는 그것이 사실이다.
  「그것이 사실이다. 그것이 사실이다.」
  이런 생각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렇게 느껴지기를 바라다 보면 그렇게 느끼지 않으려 해도 느껴지는 것이다. 이 때 온 세상 자연과 자연스런 대화가 될 때, 참 편안하게 앉아서 쉽게 시를 쓸 수가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이 하나의 습관이 되고 생활이 되도록 노력해 보는 것이 좋다.
  ―사람만이 생각한다.
  ―사람만이 말을 한다.
  이것은 사람과 사물을 구별하는 생각이다. 나와 남을 구별하는 생각인 동시에 차별하는 생각이다.
  ―사람이니까 당연히 저런 나무보다는 낫다. 훌륭하다. 
  ―그러니 저까짓 나뭇가지 하나쯤 꺾으면 어떠랴.
  이런 생각이 바로 나와 남을 구별하는 생각이요 차별하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이 발전하면「나만 제일이다」하는 자만에 빠지게 된다. 이웃과 남을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 나만 편하고 배 부르고 잘 견디면 그만이라는 생각도 이런 생각이 발전한 것이다.
  그러나 시를 쓰는 마음은 그러해서는 안 된다.
  ―남도 나와 똑같으리라.
  이것이 시를 낳게 하는 바탕이 되는 것이다.
  ―남도 나와 같이 배고프리라. 남도 나와 같이 괴롭고 아프리라.
  이런 생각을 하고 보면 세상은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나와 같이 생각한다. 나와 같이 말을 하리라. 나와 같이 그도 나를 사랑하리라.
  이런 것은 모든 것을 하나로 보는 생각이다. 모든 것은 나와 똑같다. 모든 것은 나와 평등하다는 생각이다.
  ―연필이 말을 한다.
  이 생각은 바로 연필이 나와 똑같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것이다. 연필이 나와 같지 않다고 생각할 때 연필이 말을 한다는 건 거짓으로 들리게 된다.
  ―이슬비가 속삭인다.
  이런 생각도 그렇다. 이슬비가 나와 똑같은 생각과 목소리를 갖고 있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것이다. 모든 걸 하나로 본 것이다.
  ―나무가 생각한다.
  역시 그렇다. 나무와 나를 하나로 생각지 않고는 이런 생각이 나지 않는다.
  「모든 걸 하나로 보는 눈」
  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자. 여기 한 그루의 나무가 있다. 
  하나로 생각하자. 나무에는 가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 나무의 팔이다.
  하나로 생각하자. 나무의 가지에는 꽃이 피어 있다. 그것은 나무의 팔에 달린 꽃이다. 꽃은 자라서 열매가 된다. 그것은 나무의 팔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래서 시인들은 나무가 과일을 들고 있다고 표현한다.

  ―나무는 들고 있네
    조롱조롱 열린 과일

  그렇게 보고 있으니 재미있다.

  ―나무는 그 많은 과일을 들고, 낑낑거리네.

  이렇게 생각해 봐도 재미있다.
  어쨌든 가지가 나무의 팔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재미있는 일이다.
  우리가 손에 과일을 들고 있다면 어떻게 할까. 나무는 과일을 많이 익혀서 들었을 때 어떻게 할까?
  『얘, 이거 하나 먹어 봐.』
  이렇게 말하면서 슬쩍 동무의 손에 과일 하나쯤을 던져 줄 것이다. 나무도 그럴까? 그렇고 말고. 여기 감나무 한 그루가 있다. 가을에 빨간 감을 많이 익혔다. 여기 또 사과나무가 있다. 가지에 사과가 잘 익은 사과가 달려 있다. 어떻게 할까?

  돌각담 너머로
  감나무 긴 팔이
  감 한 개 들고
  아가 손에 와 닿는다.

  ―이거 내가 익힌 거야
  맛 좀 봐.

  탱자 울타리 밖으로
  사과나무도
  아기 손에
  사과 한 개 놓아주면서

  ―이거 내가 익힌 거야
  맛 좀 봐 줘.

  이건「가을」이라는 제목을 가진 시이다. 재미있다.
  가을이다. 가을에 감나무도 사과나무도 열매를 익혔다. 익혀서 그냥 떨어뜨리고 마는 게 아니다.
  「누구에게 줄까? 같은 값이면 예쁘고 착한 아이에게 더 많이 줘야지.」
  이런 생각에서 과일나무들은 과일을 들고 있는 것이다. 참 재미있고 평화스러운 광경이다.

    대추나무
  돌각담 위에
  가지를 얹고
  마당 끝에 서서
  대추나무가

  오롱조롱
  가지에
  대추를 달고
  꼬마들이 모이기를
  기다립니다.

  바람이 가지를
  흔들어 주면
  마당 끝에 서서
  대추나무가

  빨간 대추
  하나 둘
  던져 주면서
  어서어서 주워 가라
  손짓합니다.

  이 글은「대추나무」라는 동요다. 여기서도 나무의 착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나뭇가지는 바람에 흔들린다. 소리를 내면서 흔들린다. 그런데 정말 흔들리는 걸까? 모든 건 나와 같은 생각이라고만 생각하자. 바람이 분다고 흔들려본 일이 있는가. 그렇지 않았을 테지. 그러니까 그건 대번에 알 수 있다.

  ―바람이 불어서 흔들리는 게 아니라 자기가 자기 몸을 흔드는 거로군.

  그런데 자기 몸을 자기가 흔들 때는 무슨 뜻이 있어서일 것이다.

  ―틀림없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그러나 보다.

  시인이면 누구나 나무가 흔드는 모습을 보고 느끼는 것이다.
  재미있다. 다음의 시를 읽으면서 다시 생각하자.

    몸짓
  말로는
  다하지 못하기 때문이어요
  몸짓을 하는 것은.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아
  그 많은 잎을 흔들어 댈까요?

  나무는
  가지마다 꽃을 단 날은
  얼마나 자랑이 하고 싶을까요?

  몸이라도 흔들어
  보여야지요.

  나무를 관찰하는 김에 다시 나무의 가지를 바라보자. 나뭇가지에는 새가 집을 짓는다. 새둥지 안에는 새새끼가 자란다. 이 때 나무가 흔들리는 건 바로 새새끼를 잠들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걸 시인은 쉽게 알아낸다.

  엄마 까치
  아빠 까치
  일터에 가고
  둥지 속 새끼 까치
  누가 봐 주나?

  나무가
  흔들흔들
  흔들어 주어
  둥지 속 새끼 까치
  낮잠 들었다.

  이 글은「까치 둥지」라는 동요다. 나무가 흔들리는 것은 까치 새끼를 잠재우기 위해서라는 뜻에서 씌어진 글이다.
  이와 같이 모든 사물을 보거든 우선 이런 생각을 하자.

  ―내가 이 나무라면?
  ―내가 이 꽃이라면?
  ―내가 이 방아깨비라면?
  ―내가 이 돌멩이라면?

  이렇게 해서 습관이 되면 무엇을 보든지 우선 이런 방법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 때 꽃송이가 돼 나뭇가지에 열려보는 것이다. 눈을 감고 아주 꽃송이로 나무에 열렸을 때의 광경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꽃송이가 되었다면 어떻게 될까?

  ―내가 예쁘다고 모두 쳐다보는군.
  ―벌과 나비가 나를 향해 모여드는군.

  벌써 시가 되었다.

    꽃송이
  지나는 사람마다
  쳐다보네.

  벌과 나비가
  모여드는군.

  다음은 방아개비가 되었을 때를 생각해 보자. 아주 작은 방아개비가 된 것이다.
  돌멩이가 되었을 때의 광경을 생각해 보자. 아주 돌멩이가 되었을 때의 광경을 그대로 생각하는 것이다.

    불국사의 층계다리
  누구의 발이나
  한 번은
  불국사 올라가는
  층계 위에 놓인다.

  층계는
  여러 개 돌이 누워
  눈을 감고서도
  제 위에
  그 여럿 발자국이 생기는 걸
  느낀다.

  발자국 위에 놓이는 신발
  신발 속에 담긴
  사랑의 무게.

  옛날의 왕에서
  옷차림과 말씨는 변했어도
  그만한 사람의
  무게는 같다.

  발자국 위에
  발자국이 놓여 지워지듯
  옛 기억은
  오늘의 일로 희미해지지만

  온 신라를 살다 간 사람의
  몸 무게를
  제 안에 새겨 둔 층계는

  그 하고 싶은 이야기를
  돌이기 때문에 참는다.

  이 시는 불국사 자하문을 올라가는 층층대인 청운교, 백운교를 놓고 지은 시이다. 물론 자기가 층층대가 되었다는 가정에서 씌어진 글이다. 층층대의 입장이 되어 본 것이다. 누구나 불국사의 자하문 올라가는 층층대가 되었다는 생각을 해 보면 이런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 대해 지은이는 이렇게 작품을 지은 동기를 말하고 있다.

  <불국사에 가 보았습니다.
  여러 번 가 보았습니다.
  그 때 그 불국사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어쩌면 신라 때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했습니다.
  나는 계속 생각을 했습니다. 불국사를 둘러싼 소나무는 틀림없이 그 때 신라 때의 씨앗에서 목숨이 전해와 지금 이 터에서 자라고 있다는 걸 느낀 것입니다.
  우리 사람도 그것과 같습니다.
  틀림없이 그럴 것입니다.
  그 때 소나무의 후손이 지금 이 소나무이듯이, 그 때 신라 사람의 후손은 바로 신라 사람입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신라 사람입니다.
  「우리가 신라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참 즐거웠습니다.
  불국사에는 두 개 층층대가 있습니다.
  ―청운교
  ―백운교
  참 이름도 좋은 층층대입니다.
  나는 문득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 불국사의 층층대가 돼 봤습니다.
  아득한 옛날이었어요. 층층대가 어느 석수장이 아저씨의 손에 의해 다듬어졌거든요. 참 예쁘게 다듬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무거운 돌을 어떻게 여기다 옮겨 쌓았을까요? 불국사 층층대가 되면 그것을 모두 알 수 있지요.
  내가 층층대가 되고 보니 그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튼튼한 밧줄에 나를 매고 그 때 아저씨 여럿이 달려들어 목도를 했지요.
  「어영차!」
  「어영차!」
  그렇게 해서 여기다 갖다 쌓은 거여요.
  ―청운교
  ―백운교
  우리는 여러 개의 돌이 이렇게 쌓여 누운 거여요.
  참 오래 누워 있었지요.
  백 년도 천 년도 넘게 누웠어요.
  그런데 우리는 누워서 잠만 잔 게 아녜요. 생각을 한 거여요. 참 오래 생각을 했지요.
  「이런 것을 잘 기억해 두어야지.」
  「그래 그렇고 말고.」
  우리는 서로 속삭이면서 기억을 가슴 속에 새겨 둔 거여요.
  우리를 밟고 불국사 대웅전으로 올라간 사람과 우리를 밟고 대웅전에서 내려온 사람.
  참 많아요. 누구나 한 번씩은 올라가 보는 층층대이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이 참 많아요.

  ―누구의 발이나
  한 번은
  불국사 올라가는
  층계 위에 놓인다.

  나는 층층대의 돌이 돼 이렇게 생각한 거여요.
  『그 많은 사람을 몽땅 기억할 수 있을라구?』
  누가 이런 말을 하겠지요. 그러나 층층대의 돌이 된 나는 나를 밟고 올라간 사람의 모습만 기억해 둔 게 아녜요. 그 몸무게까지를 몽땅 기억해 두고 있는 걸요.
  ―이 사람은 가볍다
  ―이 사람은 무겁다
  ―이 사람은 더 무거워
  사람마다 나를 밟고 올라갈 때 나는 그 무게를 기억해 둔 거지요.
  참 놀라운 기억이요.
  신라 때는 신라 사람…… 여왕도, 왕자도, 공주도 모두 이 층층대를 오르고 내렸지요.
  다음은 고려 때 사람……
  조선 시대……
  그러다가 오늘 여러분이 그 층층대를 오르고 있는 거지요.
  생각하면 재미있고 고마운 일이어요.
  사람의 생명은 야문 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녀요.
  그 때 그 신라 때 사람도 고려 사람도 다 이제는 없지만 불국사 층층대인 나는 남아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 나는 생각하지요.
  「벌써 천 몇백 년이 되었구나!
  사람들의 옷차림이나 말씨들이 상당히 변했어.」
  그런 불국사의 층층대가 된 돌은 천년을 두어 시간의 길이로 생각하면서 앞으로 수십억 년을 그대로 견디며 살아갈 거여요.
  물어 보셔요. 불국사에 가거든 불국사 올라가는 층계다리가 된 바위에게 물어 보셔요. 그리고 한 번 불국사의 층층대에 놓인 길다란 돌이 되어 이 시를 생각해 보셔요.>  

(1979년 봄『아동문학평론』제11호)

 

동시 창작법 ④

자연의 음성을 번역해서 들어야

신 현 득

  자연의 어느 것도 생각을 갖고 있다고 했다.
  자연의 어느 것도 음성(언어)을 갖고 있다고 했다.
  이것은 정말이다.
  그래서 냇물이 속삭인다고 한다. 그래서 산들바람이 속삭인다는 말을 한다. 이슬비가 속삭인다고도 한다.
  이들은 모두 제대로의 음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의 말로 속삭여 주지 않는 것으로 들린다. 냇물은 냇물의 소리만 낸다. 산들바람은 산들바람의 소리만 낸다. 이슬비는 이슬비의 음성으로만 말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말을 알아 듣지 못한다.
  그래도 시인은 그 음성을 알아 듣는다. 이것이 시인의 특기다. 아프리카 사람의 말은 우리말로 번역해야 알아 듣는 것처럼 냇물의 말이나 산들바람의 말이나 이슬비의 말이나 모두 우리들 사람의 말로 번역을 해야 한다. 번역을 하는 것이 시인의 기술이다. 사물의 음성을 번역하는 것은 시인만이 할 수가 있다.
  번역을 잘해야 한다.
  엉터리 번역은 번역을 않는 것만 같지 못하다.
  그럼 냇물의 소리를 들어보자.
  ―졸졸졸 졸졸졸, 졸졸졸…….
  아무리 들어도 졸졸졸 뿐이다. 그런데 이것을 번역해서 들어야 한다.
  ―졸졸졸……
  그 물 소리 속에는「달이 밝구나」하는 음성이 있다. 그 물소리 속에「오늘은 물레방아를 돌렸지. 참 재미있던데」하는 말이 들어 있다.「자, 우리 모두 모여서 바다로 가는 거야」하는 뜻이 들어 있다.
  산들바람 소리 속에도 그렇다. 번역을 잘해야 한다.
  ―귀를 간지려 줄까?
  ―머리칼을 날려 줄까?
  ―나뭇잎을 흔들어 보자.
  ―잔디를 쓰다듬어 보자.
  ―…….
  이렇게 무수한 언어가 있다. 이 산들바람의 음성을 잘 번역해 들어야 한다.
  이슬비의 음성도 그런 것이다.
  ―박꽃에 사뿐이 앉을까?
  ―아니야, 연못물에 앉아 동그라미 그려 보는 게 재미있어.
  ―…….
  이런 무수한 음성이다.
  이런 음성을 알아 듣지 못하는 사람이야 참 바보같이만 느껴진다. 그런데 시인만이 이 말은 알아듣는다. 그러니, 시인만이 바보가 아니다.
  그러고 보니 시란 자연의 음성을 번역해 듣는 그것이다.
  자연의 음성을 번역해 듣는 그것.
  그렇다. 시는 바로 그런 것이다.

  나는 나는 갈 테야.
  연못으로 갈 테야.
  동그라미 그리러
  연못으로 갈 테야.

  나는 나는 갈 테야.
  꽃밭으로 갈 테야.
  꽃봉오리 만지러
  꽃밭으로 갈 테야.

  강소천은 이슬비의 음성을 알아 듣고 이 동요를 지었다. 그래서 처음 이 동요의 제목을 <이슬비의 속삭임>이라 했다.
  이와 같이 냇물이나 산들바람이나 이슬비는 소리를 스스로 내기 때문에 번역이 쉽다. 사람의 목소리로 번역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도「물소리가 나는구나」「바람 소리가 나는구나」「이슬비 내리는 소리가 나네」정도는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말 없는 돌멩이나 마른 나무 막대기 같은 것, 빈 병 같은 것, 축구공 같은 것도 음성이 있을까?
  음성이 있다. 그들 나름대로 음성이 있다. 그들 나름의 말이 있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가 실험을 해 보자. 돌멩이의 언어를 들어보기로 하자.
  냇가에 가서 두 개의 자갈돌을 마주 들고 두드려 보자.
  ―딱 딱!
  분명히 말을 한다. 돌에게도 언어가 있다. 제대로의 음성이 있는 것이다.
  ―딱 딱…….
  그 말이 무슨 뜻인가를 알아야 한다. 번역을 해서 우리들 말로 알아들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돌을 마주 두드려 보자.
  ―딱 딱!
  (나는 돌멩이다.)
  ―딱 딱 딱!
  (꼬마들과 공기놀이라도 하고 싶어.)
  ―딱 딱 딱 딱!
  (냇물에 뛰어들어 수제비라도 뜨고 싶구나.)
  ―딱딱 딱딱!
  (깊은 물에 퐁당 빠지고 싶어.)
  돌멩이에게 계속 말을 시켜 보자. 그 말을 알아들으려고 애를 써 보자. 그 목소리를 잘 알아들어야 한다. 그러고 보면 온갖 부딪히는 소리를 다 알아듣게 된다. 까마귀 까치가 우짖는 소리쯤이야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물소리나 바람소리나 비소리나 돌멩이가 부딪히는 소리처럼 어떤 음성으로든지 소리를 내어 주어야 그 말을 알아듣게 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정말 남의 뜻을 잘 살피는 사람은 사람의 눈빛만 보고도 그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를 안다. 표정만 보고도 그 사람이 하고 싶어 하는 말을 알아낸다.
  마찬가지다.
  정말 시인은 사물이 놓여 있는 모습만 보고도 그 음성을 알아듣는다.
  몽당연필을 보면 몽당연필의 하소연이 들린다.
  지우개 조각을 보고 지우개 조각의 하소연을 듣는다.
  나팔꽃을 보고 그 꽃 속에서 쏟아지는 노래를 듣는다.

    빈 화분·빈 병
  화분이 빈 그릇으로
  교실 구석에 놓여 있게 되자
  『국화 한 포기만 심어 주셔요.』
  사정을 한다.

  국화는 선생님 손으로 심겨진다.
  국화가 화분 속에 들어 앉자
  물주개가 가랑비를 뿌려 준다.

  병이 빈 병으로 굴러 다니며
  『내 안에 물이라도 채워 줘.』한다.
  물을 채워 주니
  『꽃 한 포기만 꽂아 다오.』한다.
  꽃은 우리 손으로 꽂혀진다.

  화분과 꽃병은
  양지바른 창 밑에 놓여
  마주보고 웃는다.

  이 시에 대하여 지은이는 시를 지을 때까지의 일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어느 날이었어요. 교실의 대청소를 하고 있었지요.
  교실 뒤의 급식대를 들어내고 교실 바닥을 닦을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겨울에 숨겨둔 화분이 있었어요. 정말 지난 초겨울에 담고 있던 꽃부리를 비우고 여태까지 교실 구석에 박혀 있었지요.
  화분은 참 심심하고 답답하게 겨울을 난 거예요. 누구도 화분의 마음을 알아주지는 못했을 거여요.
  화분은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있었어요. 그러면서 화분은 무엇인가 나에게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어요.
  그 커다랗게 벌린 입의 모습에서 나는 대번에 그걸 알아차렸지요.
  참 그래요.
  「화분이 얼마나 말을 하고 싶을까?」
  내 생각은 틀림이 없었지요. 곧 그 화분의 커다란 입에서 말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어요.
  ―무엇이나 심어 줘. 국화 한 포기라도 심어 줘. 제발 그렇게 해 줘.
  화분의 하소연이었어요. 참 가여운 화분이었어요.
  나는 곧 그 화분을 들고 꽃밭에 나갔지요. 국화 모 한 포기를 떠서 그 화분에 심어 주었어요. 보드라운 흙에 부엽토를 섞어 넣었지요. 그리고
  ―잘 자라라.
  속으로 말을 하면서 국화의 뿌리를 다져 줬지요. 그러자 화분이 그냥 있는 게 아니었어요.
  ―고마워요, 선생님.
  나는 그 화분으로부터 분명히 이런 소리를 들었어요. 분명히 그런 소리가 났던 거지요.
  ―그것 참 희한한 일이다.
  여러분은 그런 생각을 할 테지요. 그렇지만 나의 귀에는 그 말이 틀림없이 들렸던 것이었어요.
  나는 국화가 심겨진 화분에 물을 뿌려 주었어요. 가랑비를 뿌려 주었지요. 화분이나 화분에 심겨진 국화 모는 참 기쁜 모습을 하는 것이었어요.
  화분을 교실의 창가에 갖다 두고 다시 청소를 계속 했지요.
  그런데 이번에는 교실 구석에 빈 유리병 하나가 굴러 다니는 것이었어요.
  나는 생각했지요.
  「이 병은 또 얼마나 심심할까?」
  그런데 정말 빈 병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어요.
  ―심심하고 말고요. 내 안에 물이라도 채워 주십시오. 제발 제발 제발…….
  이것은 빈 유리병이 사정을 하는 목소리였지요.
  「가엾다.」
  나는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곧 이 유리병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습니다. 아이들을 시켜 수도에 가서 물을 채워 오라고 했지요.
  그런데 물을 채워 넣고 보니 병은 다시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
  ―고마워요, 선생님. 이왕 수고하시는 김에 나에게 꽃 한 송이 만 꽂아 주셔요.
  나는 참 그렇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빈 병에 물을 채워 넣었으니 꽃을 꽂아야지요.
  꽃병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유리병은 반드시 사이다나 쥬우스만 담아야 하는 것이 아니어요. 꽃을 꽂으면 꽃병이 되는 것입니다.
  꽃은 곧 아이들 손으로 꽂혀졌어요.
  나는 화분이 놓인 양지바른 창가에 병을 갖다 놓았지요. 꽃병과 화분, 꽃병의 꽃과 화분의 국화 모가 서로 바라보고 웃는 것이었어요. 그 웃음 소리도 분명히 들리는 것이었지요.
  ―히히히히…….
  나는 분명히 그 웃음 소리를 들었어요.
  이 이야기는 사실일 것이다. 이런 마음으로 사물을 바라보면 자연에서 호소해 오는 많고 많은 소리가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숲에서도 그렇다.
  나무와 나무끼리는 저들끼리의 말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 소리를 못 들으면 시인이 아니다.
  나무들 끼리는 서로가 남이 아니다.
  도토리 열매를 여는 떡갈나무를 보기로 들자.
  떡갈나무 그 옆에 있는 나무는 남이 아니다. 서로 어버이와 자식의 관계에 있는 나무가 있다. 할아버지와 손주가 되는 나무도 있다. 이들은 같은 골짜기에 뿌리를 박고 살고 있다.
  이렇게 가까이에 살면서 서로 바라보면서 모른 척할까?
  그렇지 않다.
  ―어머니 어머니!
  ―그래 그래 너는 내 씨앗에서 태어난 나무로구나.
  ―그럼요 어머니.
  산에 가 보면 분명히 이런 말소리가 들린다. 들으려고 노력만 하면 누구의 귀에도 들리는 목소리다.
  ―우리는 형제다. 같은 나무 같은 가지에서 정답게 씨앗으로 익었댔지.
  ―그럼 그럼 우린 형제야.
  이런 말도 들려 온다. 사람이었다면 서로 손을 잡아보고 끌어안기도 할 것이다. 이런 나무의 심정을 아는 이가 시인이다.

    나무끼리
  산에 가면
  나무끼리
  주고 받는 말이 들리네.

  ―잎을 
    내 놔 봐라.
  ―꽃을
    피워 보자.

  잎이 같을 때
  나무끼리 반갑네.
  꽃이 같을 때
  더욱 반갑네.

  나무는
  같은 나무 아니면
  꽃가루를 나누지 않네.

  같은 나무끼리는
  멀리서도
  잎을 흔들어 서로 반기네.
  한 날 한 모양의 열매를 다네.

  ―너는 형제다.
    너는 내 형제.

  추운 겨울을 눈 속에 떨면서도
  같은 나무는
  그 나무끼리
  서로 생각하네.
  목이 메이네.

  이 시는 산에 가서 나무의 소리를 듣고 그것을 시로 옮긴 것이다.

    첨성대
  눈을 감으면
  들리는 듯하네.이 돌을 다듬을 때
  울리던 정 소리.
  이 돌을 쌓을 때
  메기던 노래들이.

  신라의 옷을 입은
  그 때 아이들이둘러서서 구경하고 있었겠지.
  이 돌을 다듬고 쌓는 것을.

  이 돌이 쌓여지던 날
  어여쁜 그 때의 여왕님이
  금관을 쓰고
  비단 수레를 타고 와
  첨으로 불러 줬겠지
  첨성대란 이름을.

  그 날부터 점잖은 학자님들이
  여기서 밤마다 별을 바라보고
  저 많은 별의 이름을 지었겠지.
  저 별을 바라보고
  별자리를 그렸겠지.

  그리고
  그 넓은 우주 안의
  작은 자기를 생각했겠지.
  거기 비하면
  이 서울도
  신라도
  얼마나 작은 겔까 생각했겠지.

  이 시는 지은이가 첨성대를 바라보고 지난 날을 미루어 생각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으나 사실 첨성대에게 물어보아 첨성대가 대답하는 것을 적은 것이다.
  경주에 가는 길이 있으면 누구든지 첨성대 앞에 서서 조용히 눈을 감으면 이런 소리가 들린다.
  ―나는 첨성대이다.
  ―내 몸뚱이의 돌은 정으로 다듬었지. 옛날 신라의 석수장이들이 말이야.
  ―그것을 쌓으면서 메기던 노래들이 아직도 들려.
  ―내 이름은 선덕여왕이 지어 주셨지. 그 날 비단 수레를 타고 오셔 처음「첨성대다!」하고 내 이름을 부르셨어.
  이렇게 첨성대가 시인의 귀에 일러 주는 그것을 그대로 옮겨 쓴 것이 이 작품이다.

(1979년 여름『아동문학평론』제12호)

 

동시 창작법 ⑤

손은 생각지 않아도 된다

신 현 득

  사람의 손이 작용을 해 주어야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세상에는 너무도 많다.
  수레는 밀어주어야 움직인다. 사람의 손이 미는 것이다. 더구나 자동차는 운전기사의 손에 의해 움직인다.
  양말은 손이 있어야 신을 수 있다. 양말 스스로 발에 와 신겨지는 법은 잘 있지 않다.
  청소할 때의 빗자루 역시 그렇다. 손이 들어야 비로소 방의 먼지를 쓸어낸다. 의사의 주사기도 그렇다. 의사의 손이 있어야 주사약을 혈관에 넣어 사람을 치료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팽이도 그렇다. 팽이채를 쥔 손이 있어야 팽이가 맴을 돌 수 있다.
  바느질할 때의 바늘도 그렇다. 
  밥 먹을 때의 숟가락도 그렇다.
  가위도 그렇다. 송곳도 그렇고 책상의 빼닫이도 그렇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모두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손 이상 가는 보배가 없다고 한다.
  인류는 손이 있음으로써 지구를 지배했다는 말도 있다. 
  ―그런데 이 때 손을 생각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현재 세상의 움직임에서 세상을 생각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자동차는 이름 그대로 스스로 움직이는 수레 즉 「자동차」가 된다. 운전기사의 손을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양말은 스스로 발에 와 신겨지는 것이 된다. 빗자루는 혼자 걸어다니게 된다. 팽이는 혼자서 맴을 돌게 된다.
  바늘은 혼자서 바느질을 하게 된다. 숟가락은 혼자서 밥을 뜨게 되고 송곳은 혼자서 구멍을 뚫게 되고 빼닫이는 저절로 열리고 저절로 닫긴다.
  그것뿐인가? 컵은 사람에게 물을 마셔주고 귀비개 혼자서 귀를 후벼주고 호미는 혼자서 밭을 맨다.
  만일 이런 세상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재미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시를 쓸 때 특히 동시를 쓸 때 이 사람의 손을 어떻게 할 것이냐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물건은 사람의 손에 의해 움직여진다.
  ―그런데 그 손의 동작을 꼭 그대로 표현하는가?
  가령 여기 감나무가 있다고 하자. 감나무는 가을에 많은 감을 열었다. 빨갛고 탐스러운 감이다.
  감을 따고 싶다. 그런데 감이 스스로 움직여 줄 리 없다.
  「감아 내려오너라. 가지에서 내려오너라.」
  이렇게 말해봐야 감이 나무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제 스스로 중력을 감당할 수 없을 때까지는 가지에 매달려 있다. 사람이 말한다 해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할 수 없이 사람이 나무에 올라가서 감을 딴다. 감을 따는 「감집게」라는 것이 있다. 긴 대나무장대 끝에 작은 그물을 달아 감이 떨어져 깨어지는 걸 막는다. 그래 이 감집게로 감을 하나씩 담아 가지를 비틀어 꺾어 내린다.
  감을 따는 것은 이렇게 복잡하다. 이 과정을 시로 표현해 보자.

      나무에 올라가 
      빨간 감을 따 
      광주리에 담고 
      ……………….

  이런 시의 구절이 된다.
  그런데 이 때 손을 생각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사람의 손을 생각지 않고 장대 끝에 달린 감집게도 생각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감은 제 스스로 나무에서 내려와 광주리에 담긴 것이 된다.
  이 때의 시구절을 생각해 보자.

      빨간 감이 
      나무에서 내려와 
      광주리에 쌓이고.

  아무래도 감이 제 스스로 내려왔다는 표현에 맘이 끌린다.
  이 경우에서는 손을 생각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는 말이 된다.

      소 등을 타고 오든지
      지게 위에 놓여 오든지

      시월에 
      대문을 열어놓고 있으면
      봄에 나갔던 씨앗이 
      몇 백 배의 열매를 거느리고
      들어와 이엉을 쓰고 쌓이고

      산에서 여문 도토리도 
      멍석에 널리고

      가을 씨앗이 대신 나가
      이랑에 묻히고 나면
      텅 비어버린 들판.

  10월을 노래한 시의 구절이다. 10월이 마당이다. 추수를 해들이는 광경이다. 어느 것이나 사람의 손에 의한 것이다. 실어 들이는 것도 져 들이는 것도 그렇다. 가을 씨앗을 묻는 것도 그렇다.
  그러나 여기서 곡식이 소 등이나 기게 위에 놓여 스스로 들어와 마당에 쌓이는 것처럼 표현하고 보니 가을 마당이 더 실감되는 것 같다.

  ―연필이
  공책 위를 걷는다.

  이런 시의 구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생각을 할 수 있다. 논리만을 따지는 사람이 있다면
  『연필이 어떻게 걸어다녀? 사람의 손이 잡아주는 거지.』
  이렇게 말을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표현은 엉터리요 억지라고 우길 수도 있다.

  ―지우개가
  글씨를 지우다.

  이런 시의 구절에서도 같은 이야기가 된다.
  『지우개가 어떻게 글씨를 지워? 사람이 손으로 지우개를 잡아주는 거지.』
  틀림없는 말이다. 그러나 시는 과학이나 논리가 아닐 수도 있다. 과학이나 논리를 초월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산 것, 산 것이 아닌 것, 숨쉬는 것, 숨 쉬지 않는 것, 생각을 가진 것, 생각을 가지지 않는 것, 말을 하는 것, 말하지 않는 것을 구별해 생각지 않는다.
  또한 모두가 생명있는 것이며, 숨쉬는 것이며, 같이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런 입장에서 본다면 연필이 공책 위를 걷기도 하는 것이다. 지우개가 스스로 글씨를 지우기도 하는 것이다.
  시인은 이런 입장에 눈의 위치를 두어야 한다.

      학교는 제 시간에
      품을 연다.
      교문이 문짝 두 개를 
      열어젖혔다.

      학교 이름을
      커다랗게 가슴에 달고
      교문은 아침마다
      교장 선생님이 된 기분이다.
      교장 선생님의 눈으로 
      들어오는 아이들의 
      마음 속을 읽는다.

      첫 번째 교문을 들어서는 아이
      완장을 팔에 감은
      선도 반장.
      그러다가 학교 앞에
      줄이 이어진다.

      집에서 밭갈이를
      거들던 아이
      그 아이는 
      손마디가 텄다.

      저녁 썰물에
      조개를 캐던 아이
      그 아이 손에는 
      개흙이 묻었다.

      그러나 더러는
      숙제를 잊은 아이
      그렇지만 그 아이도
      들여보내고

      집은 가까워도 
      정해 논 지각생
      그렇지만 
      그 아이도 들여보내고

      학교의 품은 크다.
      참새가 우짖고
      아침해가 
      산 위에 한 뼘.

      그래도 오는 아이가 없나?
      살피며 
      교문은 
      두 개 문짝을 닫는다.

  이야기가 담긴 이런 시를 읽고도
  『뭐가 이래? 교문이 문짝을 열어젖혔다니?』
  이런 말을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작품도 사람을 손을 생각지 않았기 때문에 시가 되어 있다. 교문이 스스로 열리는 것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훨씬 더 시다운 표현이 되었다는 결론이다. 시를 이해하는 어린이라면 여기서 재미를 느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아침에 교실에서
      철수가 책보를 푼다.
      같이 쌓여 온
      풀 냄새가 한 보자기.

      영희가 보자기를 풀었다. 
      들에서 같이 쌓여온 새 소리
      ―찌찌꼴 찌찌꼴 찌찌꼬르르르
      
교실이 새소리로 찬다.

      드르륵―
      문을 열고 꽃다발이 들어온다.
      학교 길에서 꺾어 모은 꽃다발.
      하품만 하고 있다가
      꽃병이 입을 벌려 받는다.
      (하략)

  5월의 교실을 노래한 이 시에서 「문을 열고 꽃다발이 들어온다」 「꽃병이 입을 벌려 받는다」의 두 구절을 두고 생각해도 그렇다.
  전혀 사람의 손을 생각지 않는 데서 실감을 더 느끼게 한다.

      골목에 아침에
      대문이 열리며
      아이 하나를 내보낸다.

      저 집서도 대문이 열리며
      아이를 내보낸다.
      책가방을 맨 아이.

      ―학교 가자.
      ―안녕!
      아이들은 골목을 나간다.
      골목이 아이들을 내보낸다.

      저 골목서도
      아이들을 내보낸다.
      책가방을 맨 아이들

      참새 짹짹 
      우짖는 아침에
      학교를 향하는
      길다란 행렬.

  아침에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있는 골목의 광경을 이렇게 노래했다. 손을 생각지 않은 것이다.
  손을 생각지 않을 때 대문이 아이를 내보내는 것이 된다. 작은 골목은 큰 골목으로 아이를 내보내는 것이 된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면 세상은 하나의 요술나라 같기도 하다. 
  신은 사람의 발에 신겨 사람을 따라 다니게 된다. 신이 사람의 몸뚱이를 담고 다니는 것이다.
  괭이는 제 혼자 일을 하게 된다. 사람의 손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괭이가 제 스스로 흙을 파고 논밭을 가꾸게 된다.
  크레용은 스스로 그림을 그리고 피아노는 스스로 곡을 연주하게 된다. 세상의 모든 사실에서 손이라는 관념을 지워버리고 세상을 바라보자.
  그러나 이런 생각으로 세상을 관찰하는 것은 시를 짓는 한 방법일 뿐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이렇게 생각을 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소재나 표현하는 각도에서 따라 이런 표현을 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손을 생각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손을 생각하지 말아야 된다」는 말과는 다르다.
  즉 사람의 손이 작용하는 소재가 아닐 때는 이런 입장의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된다.

      거울 속에 
      우리 한 식구
      정답게 살고 있어요.

      새벽이면
      거울 속에 불이 켜지고
      엄마가 아침 쌀을 갖고 나가고
      밥상에 온 식구가 둘러 앉아요.

      거울 속에서 
      문이 열리고 
      아빠가 장난감 사가지고
      들어오셔요.

      거울 속을 들여다보면
      거울에서 내다보는
      내가 보여요.

      거울 속에 내다보며
      이쪽을 거울 속이라 생각겠지요.

      우리를 
      그림자라 생각겠지요.

  이 시는 거울 속의 세상을 두고 생각한 내용이다. 즉 이 소재에는 사람의 손이 작용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손이 있고  없고는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1979. 겨울. <아동문학평론> 13호에서
 

 

동시 창작법 ⑥

모든 것을 하나로만 본다

신 현 득
 

  시를 쓰는데 있어서 비인격물을 인격화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세상을 하나로 보는 작업이다. 나와 남이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서 출발이 된 것이다.
  비인격물의 인격화뿐만 아니라 인격체인 사람을 딴 것에 비유하는 것도 같은 작업이 된다.
  내 한 몸뚱이가 사람이지만 나무일 수도 있고 돌일 수도 있고 흐르는 물일 수도 있고 햇볕일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나무가 곧 돌일 수도 있고 돌이 나무일 수도 그것이 곧 내 몸일 수도 있다.
  이것이 나와 남을 하나로 보는 작업이다.
  비유라는 것이 또한 그렇다. ㄱ이 ㄴ에 비유된다는 것은 ㄱ과 ㄴ에서 같은 속성을 찾는 것이요 ㄱ과 ㄴ을 동일화시키는 작업일 수 있다.
  역설이라는 것 역시 그렇다. ㄱ을 지칭하기 위해 그와 반대가 되는 ㄴ을 가르치는 것은 ㄱ과 ㄴ을 같은 입장에서 하나로 본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매우 사랑스럽다는 표현을 밉다고 한다. 낮은 것을 오히려 높다고 한다. 흐르는 것을 멈추어 있다고 한다.
  이 때 사랑과 미움은 같은 것이며 높은 것과 낮은 것은 같은 것이며 흐르는 것과 멈춤은 같은 것이다. 따라서 원수와 친구가 따로 없고 나쁜 것 좋은 것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이런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들어가고 나감이 없이 쪽 골라 보인다. 모두가 평등해 보인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보살의 눈이다.
  이런 눈으로 죽음과 삶을 하나로 보자.

교장실의 시계 속
아득한 시간을 감은 태엽이
퇴근 시간을 치는 시간에

상당히 먼 옛날일 텐데
쉽게 와서
페스탈로찌 선생이
축하의 손을 잡았어요.

―중략―

벙글거리는 아이들의 얼굴을 거느리고 교문을 나오셨을 때
기다리던 안데르센 할아버지가
불쑥 손을 잡았어요.

  이 시는 유여촌 선생의 회갑을 축하하는 시의 몇 구절이다. 유 선생은 교단에서 회갑을 맞으셨다. 동화 작가다. 그러므로 페스탈로찌나 안데르센과 관계를 가진다. 그런데 페스탈로찌와 안데르센은 생존자가 아니다. 그러나 생과 사를 둘로 보지 않는다면 한자리에서 서로 만나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는 것이다. 생사를 하나로 보았을 때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것은 곧 과거·현재·미래의 삼세를 꿰뚫어 보는 작업이기도 하다. 다시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고향 마을로 드는
오솔길에서
발가숭이 적 나를 만났네.
내 옛날을 만났네.
발가숭이 적 나와 손을 잡았네.

나와 같이 크던 산짐승
그들은 층바위에서
그대로 메아리를 부르며
살고 있었네.

  고향에 돌아와서 옛일을 회상하는 장면을 노래했다.
  "아, 옛날이 그립구나!"
  이렇게 회고의 탄식을 하는 일은 너무도 바보스런 것이다. 10년 전, 20년 전, 30·40년 전의 일을 바로 오늘 이 시간 안에 불러들이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과거와 현재는 바로 하나다. 그 때 그 옛날의 나와도 만날 수 있다.
  이런 눈으로 먼 데 가까운 데를 하나로 보고자 아주 거리 감각을 없애는 것이 좋다.

선생님이 걷는 길은
교실과 교실 사이

쪽지 한 장을 들고
산을 넘는다.

한 교실
두고 온 아이들이
되돌아보며
울며 울며 걷는 걸음도

새 소리 솔바람이
길을 이끌어
쉽게 쉽게 발이 놓인다.

―중략―

산꿩이 우는 골을
내려다보니
학교 두 교실이
가지 끝에 와 보이고

산토끼들이 모이라는 듯
―땡 땡 땡.
학교 종이 울린다.

  발령장을 들고 먼 산골로 전근가는 교사의 심정을 노래했다. 여기서 교사가 걷는 길을 교실과 교실 사이라 했다. 이것은 전에까지 근무했던 교실과 이동해서 근무해야 할 교실의 사이다. 사실 교실과 교실 사이인 것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먼 것 가까운 것을 하나로 보지 않았을 때는 이 사실을 발견할 수가 없다.

엄마는
가지 많은 나무

오빠의 일선 고지서
소총의 무게 절반을 오게 하여
가지에 단다.

  어머니를 하나의 나무에 비유한 이 시에서 소총의 무게 절반을 가지에 단다는 구절을 음미해 보자. 일선 고지와 나무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그 멀리에 있는 소총을 끌어 오는데 있어 마치 옆에 있는 물건을 거머쥐는 듯이 표현했다. 거리를 전혀 의식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눈으로 보면 많고 적은 것이 하나로 보인다. 전체와 부분이 하나로 보인다. 전체는 부분인 동시에 또한 전체다. 1은 10과도 같지만 또한 1이 된다. 수에 대한 관념을 아주 없애는 것도 좋다.

나의 하나는
바다로 보내고
나의 그 하나는
산으로 보내고
나의 또 하나는
오지 않는 내일에도 보내어 두고

나는 누워서
그들을 보네.

―중략―

그러나 바다에서 가지고 온 것
그러나 산에서 가지고 온 것
내일에서 가지고 온 것을

틀리지 않게
내 안에
쌓아 두네.

그것들이
작게 나를 이루네.

  내가 어떻게 하루하루를 자라고 있는가를 살펴본 것이다. 이 시에서는 외부에서 받아들여진 것이 쌓여서 나를 형성하고 있다. 이 때 나는 하나이지만 사실 열도 되고 백도 된다. 그것이 모두 또한 나다. 그 많은 나가 하나인 나 안에서 나타나 외부와 작용을 하고 있다. 내 몸 밖으로 나가 내 생각이 미치는 데까지를 쏘다닌다.
  하나인 나는 누워서 여럿인 나를 본다. 이것들은 내가 생각을 거두었을 때 나에게로 되돌아온다. 이렇게 해서 보면 나는 하나라고 우길 수가 없다. 어째서 내가 하나뿐이란 말인가?
  이런 눈으로 형체가 있는 것 없는 것을 하나로 보자.

아기 울음이
바위에 스며들어 다져집니다.
오늘의 이야기가
차례로 스며들어 다져집니다.

바위도
내일부터 입을 다물면
박혁거세가 날 때까지
견뎌냅니다.

  석기시대의 어느 날을 노래한 것이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이 아기 울음과 이야기다. 울음은 형체가 없다. 이야기도 형체가 없다. 그러나 어떤 액체의 형태가 되어 바위에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

계절은 오다가
강가에 머물러
남몰래 배에 실려 건너옵니다.
남쪽 나라 건너 북쪽 나라로
살구꽃이 차례로 꽃잎을 엽니다.

―중략―

저녁 해에 돌아오는
시골 장꾼의
시끄런 사투리도
한 배 가득 건넙니다.

산 넘어 사라지는
해그림자도
강가에 머물러 배를 탑니다.

  여기서 「계절」이란 말을 두고 생각하자. 계절은 물체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배를 탄다는 것이 거짓으로 들리지 않는다.
  사투리도 부피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배에 실린다는 것이 어색하기는 커녕 아름답고 재미있게만 들린다.
  이런 눈으로 세상을 보면 보이지 않는 걸 쌓아도 부피와 무게가 된다.

나무―
그 많은 잎에는
종일 햇살이 와서 만져집니다.
송아지 우는 소리
학교의 종소리가 와서
만져집니다.
그것뿐이었습니다.

그것뿐인 그것이
나무에게는
가지 끝에 무게가 되어 달립니다.
가슴 둘레가 커집니다.

  이 시는 햇살이나 송아지 울음, 학교의 종소리 같은 것이 쌓여 무게를 갖는 과정을 노래했다. 재미있는 생각이라 느껴지는 것이다.

햇볕은 물 위에 쌓인다.
따뜻하다.
햇볕은 피라미 새끼의 체온이 된다.
햇볕은 붕어 새끼의 체온이 된다.
따뜻하다.

―중략―

바람 소리 새 소리가
물 밑에 쌓인다.
물 소리가 커진다.

  봄 개울을 노래한 것이다. 형체가 없는 햇볕이나 바람 소리·새 소리가 물밑에 쌓이면서 부피를 느끼게 한다. 그 부피는 커지는 물 소리에서도 나타나 있다.

도라지 뿌리가
기지개 켜는 소리도
모이면 커다란 메아리가 됩니다.

소나무 큰 뿌리에
물 오르는 소리도
모이면 커다란 메아리가 됩니다.

―중략―

새 움의 입김이 모여
하얀 안개가
산을 감고
하늘로 피어오릅니다.

  봄 산의 광경이다. 도라지가 기지개 켜는 소리, 소나무에 물 오르는 소리들이 모인다. 메아리가 커졌다는 데서 그 부피를 느끼게 한다. 새 움의 작은 입김들이 모여 산을 감을 수 있는 커다란 안개를 이룬다. 입김의 부피가 쌓인 것이다.
  액체는 그 온도에 따라 기체가 되든지 고체가 된다. 그래서 물은 얼어서 단단해지기도 하지만 증기가 되고 구름이 된다. 바위는 부서지면 돌이 되고 돌은 모래가 되고 다시 부서져 흙이 된다. 그러나 세상을 하나로 보면 변화가 일정하지 않다. 모든 것은 하나이며 같은 속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사물은 같은 것이어서 서로 변하면서 옮겨다니는 것이다.

그런 일들이
키가 되어 크는가?
길가에 우는 아기를
달래어 준 일.

아, 그런 것이
조그맣게
내 위에 와서 쌓이네.
자는 사이 밤 사이에

  이 시에서는 착한 일 한 것이 쌓여 키가 되고 있다. 키 크는 원인이 착한 일 한 것에 있는 것이다. 영양분이 쌓여서 키를 이룬다는 생각이 아니지만 거짓말로 느껴지지 않는다.

종일
뻐꾸기 수다스런 울음이
한 개씩 머루 알이
돼 열리고,

종일 푸르른
산의 색깔이
바위 틈 물소리로
돼 들리고,

  여름 산의 정경을 읊은 것이다.뻐꾸기 울음이 머루 알이 되고 산의 빛깔이 물 소리가 된다.
  이런 눈으로 주위를 살피면 도대체 불가능이란 것이 없다. 온갖 조화를 다 가지게 되는 것이어서 홍길동이라도 된 기분이다.  
  

(1980년 봄 『아동문학평론』 제14호)

 

동시 창작법 ⑦

의인(擬人)에는 난이도(難易度)가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신 현 득

  아이들은 그림을 그릴 때 해를 그리기 좋아한다. 그리고 해에다 눈이나 귀·코·입들을 그려 넣는다.
  이것은 해에게 사람의 모습을 주려는 생각이 작용한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이다.
  아이들은 미분화된 사고를 가지고 있어서 무엇이나 자기와 같다는 생각을 한다.
  즉 그들의 사고에 의하면 세상의 모든 사물이 생각하고, 말하고, 웃고, 동작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태양에게도 얼굴이 있어야 한다.
  아이들의 세계는, 특히 나이 어린 아이일수록 그들은 철저히 의인화된 세계에서 살고 있다.
  어린이를 위해 시를 쓸 때 철저히 의인을 하라는 말은 이런 어린이의 심리를 이용하자는 것일 수도 있다.
  아이들은 의인화된 것일수록 거기서 재미와 친밀감을 느낀다. 아이들은 동물을 좋아하지만 사납고, 불결하고, 잔인한 동물의 그 성질을 잘 알아서가 아니라, 동물에게 사고력·웃는 모습 등 사람이 가진 능력을 모두 주어 놓고 동물을 좋아하는 것이다.
  어린이들의 사고에서 느껴지는 동물은 언제나 어느 정도 의인이 된 동물이다.
  이와 같은 어린이의 심리를 이용한 것이 동물 만화다. 그러므로 동물 만화는 문장상의 의인법을 그림에 적용시킨 것이다. 즉 동물 만화는 의인된 그림인 것이다.
  세계 어린이들이 모두 좋아한다는 미키마우스는 손과 발을 가지고 있고 아래 윗도리 옷을 차려 입은 새양쥐다. 이 의인된 동물은 말도 잘하고 영리하며 비상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
  만화가가 미키마우스에게 손과 발과 옷과 판단력을 주었으므로 아이들에게 친근감을 줄 수 있는 동물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미키마우스는 하수구에 버리는 음식찌꺼기나 찾아다니는 불결하고 연약한 새양쥐가 아니다.
  그러면서 화가들은 동물에게만 의인법을 쓰는 것이 아니다. 연필이나 돌멩이·나무, 심지어는 물방울에까지 의인법을 적용시켜 보는 것이다.
  이 때는 대개 연필이나 돌멩이·나무·물방울에게 눈·코·입 등을 곁들여서 얼굴을 만들어 주고 때에 따라서는 팔과 다리를 그려주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래도 동물의 경우에서처럼 실감이나 친근감이 덜하다.
  왜 그럴까?
  여기서 우리는 사물의 속성이 사람과 닮아 있는 것일수록 의인하기가 용이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인형이 웃는다.
  ―나무가 웃는다.
  ―돌멩이가 웃는다.
  ―물방울이 웃는다.
  위의 네 가지 표현을 읽어보면 의인에도 어렵고 쉬운 정도, 즉 난이도(
難易度)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이 네 가지의 표현 가운데 <인형이 웃는다>에 가장 공감이 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무가 웃는다> <돌멩이가 웃는다> <물방울이 웃는다>에 공감을 주기까지는 거기에 상당한 상황 설명이 따라야 한다. 그래도 그것이 실감있게 받아들여질 것 같지 않다.
  그러므로 철저히 의인을 하라는 말과는 상대적으로 덮어놓고 의인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성립되는 것이다.

  비 오는 날
비가 온다.
마당이 운다.
빗방울을 맞아
마당이 운다.

빗방울을 빗방울을
자꾸 맞으며
「앙 앙!」운다.

비가 개었다.
울던 마당이
이제 살았다고
활짝 웃었다.

  이 시는 놀랍지도 못한 글이지만 마당을 의인한데서 더욱 어색한 느낌을 갖게 한다.
  마당은 입체가 아니다. 사람의 모습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여기에 인격을 주어 사람의 모습으로 바꾸어 생각하는데 저항을 느낀다. 따라서 마당이 운다는 표현이나 웃는다는 말이 어색하게만 느껴지는 것이다.

  감
감나무 빨간 감은
여러 형제다.

형아,
아우야,
부르며 익는다…….

  감나무에 달린 감은 의인화해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그것은 감이 가지고 있는 모양과 몸빛깔에서 사람과 닮은 요소를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사람을 아주 닮아버린 인형에서 더욱 실감과 재미를 느낀다.

  인형
내 다리로
달리게 해 주세요.

내 팔을
움직이게 해 주세요.

정말이어요.
나를 예쁘다
칭찬만 하지 말고
나를 걷게 해 주세요.

영이를 따라
학교에도 가고 싶어요.

  이 인형의 호소는 실감나게 들린다. 그것은 인형이 아주 어린 아이를 닮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인을 하는데서는 이 세 가지 소재의 경우서만 보아도 「마당 < 감 < 인형」의 공식이 성립되는 것이다.
  ―종이를 사람이라 생각해 보자.
  ―연기를 사람이라 생각해 보자.
  ―배추잎을 사람이라 생각해 보자.
  ―비닐끈을 사람이라 생각해 보자.
  그런데 연상이 잘 되지 않는다. 이런 것들이 사람과 닮은 데가 적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별한 경우를 제하면 이런 것은 거의 의인이 되지 않는다.
  ―도토리를 사람이라 생각해 보자.
  ―돌멩이를 사람이라 생각해 보자.
  ―연필을 사람이라 생각해 보자.
  ―공을 사람이라 생각해 보자.
  이 경우는 그래도 앞의 네 가지 경우보다 연상이 잘 된다. 의인이 쉬운 것은 어느 정도 입체물이어야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입체물이라 해서 사람의 성질을 다 가진 것이 아니다. 모든 각도로 다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중요한 말이다.
  ―돌멩이가 운다.
  ―돌멩이가 웃는다.
  ―돌멩이가 노래한다.
  ―돌멩이가 성낸다.
  ―돌멩이는 야물다.
  ―돌멩이는 구른다.
  ―돌멩이는 달린다.
  ―돌멩이는 부딪힌다.
  위의 <운다·웃는다·노래한다·성낸다·야물다·구른다·달린다·부딪힌다>는 모두 사람의 성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모두 돌멩이의 속성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돌멩이가 운다>·<돌멩이가 웃는다>·<돌멩이가 노래한다> 등은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돌멩이는 야물다. 그리고 동글동글하다. 그리고 잘 구른다. 구르다 보면 다른 물건들과 부딪히길 잘 한다.
  그러므로 돌멩이를 의인할 경우 이런 돌멩이의 성질에 맞추어야 한다.

  돌멩이 ①
돌멩이가 굴렀다.
산위에서 굴렀다.

냇물에 퐁당 빠졌다.
고기들이 깜짝 놀랐다.

  돌멩이 ②
<한번 부딪혀 볼까?>
돌멩이가 말했다.

<쬐그만 게 까불어>
항아리가 말했다.

<정말이냐?>
돌멩이가 대들었다.

<아니 아니 제발>
커다란 항아리가 빌었다.

  이상의 작품은 돌멩이의 성질을 잘 알아서 의인했기 때문에 실감과 재미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돌멩이가 갖는 성질과 맞지 않을 때는 저항을 느끼게 된다.

  돌멩이 ③
냇가에 돌멩이가
뙤약볕을 쬐었다.

몸뚱이가
뜨끈뜨끈
달아 올랐다.

소나기 한 줄기가
지나갔다.

―시원해요, 시원해요.
  아이고 시원해.
돌멩이가 좋아서
노래를 불렀다.

  여기서 돌멩이가 노래를 불렀다는 표현이 어색하게 느껴진다. 노래라는 것이 돌멩이의 특성에는 맞지 않아서이다.
  어떤 사물이나 소재가 사람의 성격을 다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다시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대개의 사물은 사람과 같은 성격을 몇 가지는 지니고 있으므로 그 방향으로 의인이 되어야 한다.
  가령 <바위>라는 소재가 있다면,
  ○ 무게가 있다.
  ○ 입을 다물고 있다.
  ○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 간사한 말로 꾀어봐야 잘 넘어가지 않는다.
  ○ 많은 일을 참는다.
  ○ 알면서도 모른 척한다.
  ○ 오랜 세월 견뎌낸다.
와 같은 방향으로 의인이 되어야 한다. <가볍다> <시시하다> <지껄인다> <달랑거린다>의 방향으로 의인화해서는 바위의 이미지를 살릴 수 없다.
  「꽃이 웃는다」는 것은 꽃의 빛깔의 밝기와 꽃의 모양과 사람의 웃는 모습과 사람의 입모양이 연관되므로 이루어진 표현이다. 세상의 꽃이 모두 어두운 검정색이었다면 꽃이 웃는다는 표현이 생겨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꽃의 모양이 꽃잎을 벌린 모양이 아니고 태초부터 주먹이나 공과 같은 모양이었다면 꽃이 웃는다는 말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같은 밝은 빛깔을 띤 전깃불이나 초롱불을 보고 「전깃불이 웃는다」「초롱불이 웃는다」라고 말하고 보면 어색하게 들리는 걸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모양이야 어떻게 생겼든, 또는 형체가 없는 추상물일지라도 그 소재가 사람을 닮은 성질이 강하면 그 성질의 방향으로 의인이 쉽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질이 강할 때만 있을 수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 「천둥 소리」나「바람」은 형체를 따질 수 없지만 그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쉽게 의인이 되고 또한 실감을 느낄 수 있다.
  천둥이라면,
  ○ 고함 소리
  ○ 무서운 목소리
  ○ 성낸 목소리
등으로 의인이 쉽게 된다. <그러므로 천둥이 하늘에서 고함을 친다> <푸나무가 그 소리를 듣고 벌벌 떤다> <번개를 터뜨리며 위협을 한다>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게 받아들여진다. 이렇게 하여 씌어진 작품을 살펴보자.

  천둥
누군가 하늘에서
소낙비 오는 날
성이 났다.

먹구름 속에서
소리를 친다.

겁먹은
나무들이
비를 맞는다.

  바람의 경우에도 그렇다.
  ○ 나뭇가지를 흔든다.
  ○ 세상을 바쁘게 돌아다닌다.
  ○ 아무것이나 만져보고 쓰다듬는다.
  ○ 물위를 걸어다닌다.

  등이 바람의 성질이다. 그러므로 이런 방향으로 의인이 되어야 한다.

  바람 ①
감나무 잎을 흔들어 보다가
잘못해
「톡!」
풋감 한 개 떨어뜨리고,

개암나무 가지를 흔들다가
잘못해
「톡!」
개암 한 알 떨어뜨리고.

  바람 ②
바람이 물 위로 걸어간다.
물 위로 발을 끌며 걸어간다.

바람의 발끝에 걸려
물결이 사르르 일어난다.

  바람 ①에서는 바람의 손을 생각했고, ②에서는 바람의 발과 발끝을 생각했으나 조금도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여기서 그럴 만한 조건만 있다면 어느 소재를 어느 경우에서나 의인화할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되기도 한다. 이것은 돌멩이가 웃는다는 말이 어색하게 들리기는 하지만 그럴 만한 상황이라면 돌멩이가 웃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보기를 들어보자.
  ―나무가 소리를 듣는다.
  이 한 구절의 표현으로는 약간 어색하게 들리는 싯구도 여기에 그럴 만한 분위기, 즉 그럴 만한 이유를 설정해 줌으로써 어색하게 들리지 않게 된다는 말이다. 작품을 한 편 살펴보자.

  달밤의 나무
달이 뜨면서
나무의 영혼이
가지 끝에 나와
반짝이게 되면서

나무는 귀가
열린다.

개울가 물소리를
알아듣는다.

  이 시에서 나무가 물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게 된 것은 달이 떴다는 사실 때문이다. 달이 뜸으로써 나무의 영혼이 가지 끝에 나와 달빛에 반짝이게 되고 영혼의 문이 열리면서 나무는 귀로써 개울물 소리를 듣게 된다. 이렇게 그럴사한 분위기를 설정해 놓고 보니 나무가 소리를 듣는다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처음으로 되돌아 생각해 봐야겠다. 어떻게 생각하면 의인에 난이도(
難易度)가 있다는 말이 모두 거짓으로 느껴진다.
  이것은 결국 시에는 방법이 많으면서 별다른 방법이 따로 없다는 논리가 되기도 한다.  

(1980년 여름 『아동문학평론』 제15호)

 

동시 창작법 ⑧

표현(表現)과 객관성(客觀性)의 사이

신 현 득

  작품은 작가가 쓰는 것이지만 독자인 어린이에게 호감을 얻어야 한다. 공감이란 독자가 그 작품에 대해서 작가와 같은 걸 느끼는 일이다.
  ―그것 참 그렇겠다!
  ―참 재미있네!
  ―나는 미처 생각지 못 했더니!
  이렇게 감탄사를 내면 이는 독자가 작자의 작품에 동조하는 이상의 것이 되지만 아무 저항 없이 읽고 작가의 뜻이 전달되기만 해도 이것으로 공감이 된 것이다.
  작가의 시가 독자에게 공감되지 않을 때 독자는
  ―이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이건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시원치 못한 글 같다.
  ―어색하다.
  이렇게 느낀다. 이 때 작가가 옆에 있다면 그 작가의 체면을 위해 그 말을 직접 표현하지 않을 수는 있으나 내심으로는 좋게 여기는 것이 아니다.
  이럴 때 이 작품은 성공한 것이 아니다. 물론 독자도 그 계층에 따라 작품을 이해하는 정도가 다르나 여기서는 일반적인 독자, 아동문학 작품을 꼭 읽어야 할 독자를 상대했을 경우를 뜻한다.
  대체로 시가 독자에게 공감되지 않을 때는 표현에 객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객관성이 부족하다는 것은 작품이 주관적이라는 말을 할 수 있겠다.
  작가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남이 정말 내 생각에 동조할까? 공감해 줄까? 하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이 말은 독자에만 영합해서 글 아닌 글을 써야 된다는 말이 아니다.
  그런데 적어도 습작기의 경우 이것이 참으로 힘드는 과정이 된다.
  습작기의 경우 대개 그 작품이 자기 위주의 주관이 되기 쉽다. 자기만 아는 표현을 하는 것이다. 이런 작품은 물론 표현의 미숙에서 온다. 그래서 남이 읽어보면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는 글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습작기를 벗어났다 해서 반드시 객관성이 있는 글만을 쓰는 것은 아니다. 다만 주관과 객관을 어느 정도 일치시킬 수 있을 뿐이다. 그 두 가지 관점의 일치가 이루어질수록 그 작품은 작가와 독자가 공감을 하게 되고 공유의 것이 된다.
  여기에 남의 예를 들 것이 아니라 내 습작기의 노우트를 뒤져 한 작품을 꺼내어 보자.

  박덩굴
박덩굴이
지붕에
올라갔다.
높은 지붕 마루에
올라갔다.

어떻게 어떻게
올라갔나?
사다리를 놓아주어
올라갔다.

  놀랍지 못한 작품이다. 그러나 독자들이 이해되지 않을 구절은 없을 듯하다. 그런데 이 작품을 쓰고 몇 해 후에 느낀 것은 <사다리를 놓아주어/올라갔다>는 두 행이 독자들에 그릇 이해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독자들은 문면에 나타난 대로 사람이 정말 사다리를 놓아주어 박덩굴이 며칠 동안 쉬엄쉬엄 지붕까지 기어올라간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표현한 의도는 그와는 얼토당토 않은 것이었다. 시골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한 것이지만 박은 대개 뒤안에 심어 지붕으로 올린다. 박이 자라서 덩굴손을 휘두르게 되면 지붕까지 올라가는 덕을 만들어 준다. 나뭇가지나 막대기 또는 못쓰는 장대 같은 것으로 덩굴손을 이끌어 지붕까지 안내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했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 때 지붕에 걸쳐준 그 나무막대기는 바로 박덩굴의 사다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나 혼자의 생각이었다. 주관적인 생각이었던 것이다. 알고 보니 이 작품의 문면에 그것을 깨우치거나 힌트를 줄 만한 낱말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의 잘못은 하나도 없다.
  나는 크게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 다음부터 나는 작품이 일단 완성되면 여태 나를 휩쓸던 영감이나 환상 같은 것을 완전히 가라앉혀 놓고 순전히 독자의 입장에서 내 작품을 바라보고 수정하게 되었다.
  일단 작자가 아닌 독자의 눈으로 내 작품을 바라볼 때 내 작품은 모순투성이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작품을 보기로 하자.

  꽃나무 가지
꽃나무가 흔들리네.
꽃가지가 흔들리네.
바람이 살짝 밀어주네.

꽃냄새가 풍겨오네.
꽃가지를 뛰어오네.
바람이 살짝 날라다주네.

  언뜻 읽어서 무난한 글 같지만 나는 얼마 후 이 글에서 모순을 발견했다. 물론 독자가 되어 이 작품을 완전히 객관적인 자리에 두고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꽃가지를 뛰어오네> 하는 구절이다.
  나는 여기서 꽃향기가 꽃가지에서 나의 코에 와 닿는 상태를 표현했던 것이다. 누가 이 문맥을 그렇게 인정해 주겠는가. 나 혼자 도취되어 지껄인 나 혼자만 아는 표현이었던 것이다.
  이런 예는 얼마든지 있지만 우선 내 작품의 두 가지 예를 들어둔다.
  되풀이되는 말이지만 습작기의 사람들에게 이런 표현이 많지만 습작기의 사람이 아닌 누구의 작품에도 이런 면이 더러는 있을 수 있다고 보아지는 것이다. 요즘 동시가 난해하다느니 하는 것도 사실은 이런 미숙한 표현, 즉 객관성이 없는 표현이 상당 부분 차지하고 있다. 시가 되지 않아 독자에게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고 무슨 뜻인지 모르니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다. 전체의 독자가 시에 소양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인즉 작품이 되었느니 어떠니 하고 따질 능력이 없어 털어놓고 어렵다 모르겠다고만 하는 것이다.
  응모되어 오는 작품을 살펴보면 객관성이 없는 표현인 경우는 여러 가지다.
  첫째는 낱말이 제자리를 찾아앉지 못한 것이다. 낱말이 뜻하는 의미, 낱말에서 풍기는 분위기, 이미지 등을 깊이 생각지 않았을 때다. 시에서 비슷한 말은 안 된다. 비슷한 말은 같은 말이 아니며 같은 말이란 없기 때문에 제자리에 맞는 하나뿐인 낱말을 찾아야 한다.
  다음은 지나친 과장이다. <배가 고플 때마다 꼬르륵 소리가 난다> <시침이 한 시간에 스물네 바퀴나 도는> <강물이 흐르다가 잘못 산꼭대기에 닿았다>…… 등은 주위의 분위기를 여간 잘 끌어가지 않고는 과장된 것으로 읽혀지게 된다.
  다음은 몇 구절의 표현은 좋으나 전체를 하나로 아우르지 못한 것이다. 이 때는 시의 중간에 빈 곳이 생기는 수가 있거나 동강이가 나 있는 경우가 많다.
  다음은 표현에 통일성이 없는 것이다. 어느 부분은 직관적이다가 엉뚱한 데 하나가 추상물이 돼버리는 경우다. 어느 부분은 시가 돼 있고 어느 부분은 산문이 돼 있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다음은 표현에 보편성이 없는 것이다. 나팔꽃이 위로만 감아 올라가는 것은 보편적인 표현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아래로 감아 내려가는 것을 하나 보았다 해서 그것을 독자에게 강요하는 예와 같은 것이다.
  다음은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것이다.
  겨울 밤 하늘에 은하수가 떴다든가(새벽이 되면 뜰 때도 있지만) 압록강이 천지에서 흐른다든가 하는 표현은 모두 관찰 부족·조사 부족에서 온 것이다. 작가는 어떤 씨앗이 언제 싹트며 어느 나무는 언제 꽃이 피는가를 대강은 알고 있어야 한다.
  다음은 도덕성에 바탕을 두지 않은 것이다. 이웃집의 감을 따먹는다든지 아무 죄책감도 없이 심한 장난을 하는 것을 그대로 그려 놓은 것.
  다음은 아동 심리에 위배되는 일이다. 이럴 때는 아예 아동문학이라는 딱지를 떼어야 하며 동시라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이 때 이런 초심자에게 우리는
  ―알맞은 낱말을 찾아라.
  ―알맞은 표현을 찾아라.
  ―지나친 과장을 삼가라.
  ―부분을 두고 전체를 생각하라.
  ―표현에 통일성을 두라.
  ―표현은 보편성을 지녀야 한다.
  ―사실에 근거를 두라.
  ―도덕성에 위배돼서는 안 된다.
  ―아동 심리에 근거를 두라.
하고 일러준다. 그러나 사실 이 모든 말은 표현에 객관성을 두어 독자에게 공감을 주라는 말이 된다. 나 하나의 생각으로 작품을 쓸 것이 아니라 독자의 눈으로 작품을 써라는 말이 된다.

  겨울의 노래
얼음이 얼면
얼어서 즐겁고
눈이 오면
눈이 와서 즐거운
겨울은 우리의 세상.

수정보다 맑은
한얼음 유리판 위로
식식식 달리며
커다랗게 그려보는
오색 무지개.

눈이 오면
눈싸움 편을 갈라서……
눈싸움에 지치면
썰매를 탄다.
야호야호 달리는 썰매.

바람이 부는 날은
연을 날린다.
팽팽한 연줄을 감을 때마다
연도 즐거워 붕붕거리며
하늘 복판에서 노랠 부른다.

팽이도 쳐야지
양지바른 골목에
함께 모여서
윙윙 우는 팽이의 노래
윙윙 우는 겨울의 노래.

처마마다 기다란
수정 고드름
한 개씩 꺾어내어
골목마다
전쟁놀이도 신나지.

얼음이 얼면
얼어서 즐겁고
눈이 오면
눈이 와서 즐거운
겨울은 우리의 세상.

  이 작품은 4학년 국어 교과서 12페이지에서부터 시작되는 시 한 편이다. 교과서에 수록될 만한 작품이라면 어린이들에게 본보기글로 제시된 것이다. 그런데 이 시는 그 분위기는 되어 있으나 몇 구절의 표현이 모호해서 상당한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아동문학 세미나에서도 이 작품에 대한 말이 나와 토론을 벌인 일이 있다. 그래서 이왕 말이 난 것이기 때문에 이 작품을 예문으로 든 것이다.
  이 시의 <커다랗게 그려보는 오색 무지개>의 부분이 모호한 것이다.
  얼음판 위에 무지개를 그려 본다는 이 대목을 두고 교사들의 생각이 구구한 것이다.
  어떤 교사는 이 무지개라는 표현이 스케이트의 자국일 것이라고 말한다. 스케이트의 빙 돌아가는 자국이 마치 무지개의 곡선과 같지 않느냐고 한다.
  그럼 「오색」이란 수식어를 왜 끼웠느냐는 말에는 아이들이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있으니 무지개 같지 않느냐고 한다.
  또 어떤 참고서에는 이 오색 무지개가 마음속에 있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스케이트를 타게 될 때 느껴지는 느낌이라는 것이다.
  또 어떤 해석에서는 스케이트를 탈 때 얼음가루가 해에 비쳐져 프리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 시는 이런 입장에서 표현됐을 것이라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표현은 보편성을 잃었다. 스케이트를 탈 때마다 프리즘이 생기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조사를 한 것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어린이에게 스케이트를 지도하던 교사에게 물어보아도 그런 사실은 잘 모른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이 하나의 구절 때문에 야단이다. 표현이 전혀 객관화되어 있지 않아서 독자로부터 공감이 되지 않고 있다.
  다음은 팽이 우는 소리를 노래라 한 것이다. 겨울의 노래라 했다. 팽이 우는 소리를 정작 들어본 사람이라면 아무리 해도 그것을 노래에 비유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얼음판 위에서 돌리는 팽이라 해도 팽이가 노래로 흥겹게 들릴 만한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다. 그저 「윙―」 소리를 몇 초 동안 내고 만다. 이것을 겨울의 노래라 표현한 것은 공감이 되지 않는다. 어색한 과장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팽이 우는 소리를 노래로 비유한다면 선풍기 도는 소리·기계 소리·비행기 소리를 모두 노래로 보아야 한다.
  되풀이되는 말이지만 분위기만으로는 동시가 되지 않는다. 주관적인 표현만으로도 동시가 되지 않는다. <동시는 직관적인 표현이어야 한다!> <동시의 표현은 분명한 것이어야 한다!> 하는 주장은 모두 객관성이 있는 문장이 되게 하자 그 소리다. 
 

(1980년 가을 『아동문학평론』 제16호)

 

동시 창작법 ⑧

표현(表現)과 객관성(客觀性)의 사이

신 현 득

  작품은 작가가 쓰는 것이지만 독자인 어린이에게 호감을 얻어야 한다. 공감이란 독자가 그 작품에 대해서 작가와 같은 걸 느끼는 일이다.
  ―그것 참 그렇겠다!
  ―참 재미있네!
  ―나는 미처 생각지 못 했더니!
  이렇게 감탄사를 내면 이는 독자가 작자의 작품에 동조하는 이상의 것이 되지만 아무 저항 없이 읽고 작가의 뜻이 전달되기만 해도 이것으로 공감이 된 것이다.
  작가의 시가 독자에게 공감되지 않을 때 독자는
  ―이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이건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시원치 못한 글 같다.
  ―어색하다.
  이렇게 느낀다. 이 때 작가가 옆에 있다면 그 작가의 체면을 위해 그 말을 직접 표현하지 않을 수는 있으나 내심으로는 좋게 여기는 것이 아니다.
  이럴 때 이 작품은 성공한 것이 아니다. 물론 독자도 그 계층에 따라 작품을 이해하는 정도가 다르나 여기서는 일반적인 독자, 아동문학 작품을 꼭 읽어야 할 독자를 상대했을 경우를 뜻한다.
  대체로 시가 독자에게 공감되지 않을 때는 표현에 객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객관성이 부족하다는 것은 작품이 주관적이라는 말을 할 수 있겠다.
  작가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남이 정말 내 생각에 동조할까? 공감해 줄까? 하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이 말은 독자에만 영합해서 글 아닌 글을 써야 된다는 말이 아니다.
  그런데 적어도 습작기의 경우 이것이 참으로 힘드는 과정이 된다.
  습작기의 경우 대개 그 작품이 자기 위주의 주관이 되기 쉽다. 자기만 아는 표현을 하는 것이다. 이런 작품은 물론 표현의 미숙에서 온다. 그래서 남이 읽어보면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는 글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습작기를 벗어났다 해서 반드시 객관성이 있는 글만을 쓰는 것은 아니다. 다만 주관과 객관을 어느 정도 일치시킬 수 있을 뿐이다. 그 두 가지 관점의 일치가 이루어질수록 그 작품은 작가와 독자가 공감을 하게 되고 공유의 것이 된다.
  여기에 남의 예를 들 것이 아니라 내 습작기의 노우트를 뒤져 한 작품을 꺼내어 보자.

  박덩굴
박덩굴이
지붕에
올라갔다.
높은 지붕 마루에
올라갔다.

어떻게 어떻게
올라갔나?
사다리를 놓아주어
올라갔다.

  놀랍지 못한 작품이다. 그러나 독자들이 이해되지 않을 구절은 없을 듯하다. 그런데 이 작품을 쓰고 몇 해 후에 느낀 것은 <사다리를 놓아주어/올라갔다>는 두 행이 독자들에 그릇 이해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독자들은 문면에 나타난 대로 사람이 정말 사다리를 놓아주어 박덩굴이 며칠 동안 쉬엄쉬엄 지붕까지 기어올라간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표현한 의도는 그와는 얼토당토 않은 것이었다. 시골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한 것이지만 박은 대개 뒤안에 심어 지붕으로 올린다. 박이 자라서 덩굴손을 휘두르게 되면 지붕까지 올라가는 덕을 만들어 준다. 나뭇가지나 막대기 또는 못쓰는 장대 같은 것으로 덩굴손을 이끌어 지붕까지 안내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했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 때 지붕에 걸쳐준 그 나무막대기는 바로 박덩굴의 사다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나 혼자의 생각이었다. 주관적인 생각이었던 것이다. 알고 보니 이 작품의 문면에 그것을 깨우치거나 힌트를 줄 만한 낱말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의 잘못은 하나도 없다.
  나는 크게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 다음부터 나는 작품이 일단 완성되면 여태 나를 휩쓸던 영감이나 환상 같은 것을 완전히 가라앉혀 놓고 순전히 독자의 입장에서 내 작품을 바라보고 수정하게 되었다.
  일단 작자가 아닌 독자의 눈으로 내 작품을 바라볼 때 내 작품은 모순투성이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작품을 보기로 하자.

  꽃나무 가지
꽃나무가 흔들리네.
꽃가지가 흔들리네.
바람이 살짝 밀어주네.

꽃냄새가 풍겨오네.
꽃가지를 뛰어오네.
바람이 살짝 날라다주네.

  언뜻 읽어서 무난한 글 같지만 나는 얼마 후 이 글에서 모순을 발견했다. 물론 독자가 되어 이 작품을 완전히 객관적인 자리에 두고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꽃가지를 뛰어오네> 하는 구절이다.
  나는 여기서 꽃향기가 꽃가지에서 나의 코에 와 닿는 상태를 표현했던 것이다. 누가 이 문맥을 그렇게 인정해 주겠는가. 나 혼자 도취되어 지껄인 나 혼자만 아는 표현이었던 것이다.
  이런 예는 얼마든지 있지만 우선 내 작품의 두 가지 예를 들어둔다.
  되풀이되는 말이지만 습작기의 사람들에게 이런 표현이 많지만 습작기의 사람이 아닌 누구의 작품에도 이런 면이 더러는 있을 수 있다고 보아지는 것이다. 요즘 동시가 난해하다느니 하는 것도 사실은 이런 미숙한 표현, 즉 객관성이 없는 표현이 상당 부분 차지하고 있다. 시가 되지 않아 독자에게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고 무슨 뜻인지 모르니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다. 전체의 독자가 시에 소양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인즉 작품이 되었느니 어떠니 하고 따질 능력이 없어 털어놓고 어렵다 모르겠다고만 하는 것이다.
  응모되어 오는 작품을 살펴보면 객관성이 없는 표현인 경우는 여러 가지다.
  첫째는 낱말이 제자리를 찾아앉지 못한 것이다. 낱말이 뜻하는 의미, 낱말에서 풍기는 분위기, 이미지 등을 깊이 생각지 않았을 때다. 시에서 비슷한 말은 안 된다. 비슷한 말은 같은 말이 아니며 같은 말이란 없기 때문에 제자리에 맞는 하나뿐인 낱말을 찾아야 한다.
  다음은 지나친 과장이다. <배가 고플 때마다 꼬르륵 소리가 난다> <시침이 한 시간에 스물네 바퀴나 도는> <강물이 흐르다가 잘못 산꼭대기에 닿았다>…… 등은 주위의 분위기를 여간 잘 끌어가지 않고는 과장된 것으로 읽혀지게 된다.
  다음은 몇 구절의 표현은 좋으나 전체를 하나로 아우르지 못한 것이다. 이 때는 시의 중간에 빈 곳이 생기는 수가 있거나 동강이가 나 있는 경우가 많다.
  다음은 표현에 통일성이 없는 것이다. 어느 부분은 직관적이다가 엉뚱한 데 하나가 추상물이 돼버리는 경우다. 어느 부분은 시가 돼 있고 어느 부분은 산문이 돼 있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다음은 표현에 보편성이 없는 것이다. 나팔꽃이 위로만 감아 올라가는 것은 보편적인 표현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아래로 감아 내려가는 것을 하나 보았다 해서 그것을 독자에게 강요하는 예와 같은 것이다.
  다음은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것이다.
  겨울 밤 하늘에 은하수가 떴다든가(새벽이 되면 뜰 때도 있지만) 압록강이 천지에서 흐른다든가 하는 표현은 모두 관찰 부족·조사 부족에서 온 것이다. 작가는 어떤 씨앗이 언제 싹트며 어느 나무는 언제 꽃이 피는가를 대강은 알고 있어야 한다.
  다음은 도덕성에 바탕을 두지 않은 것이다. 이웃집의 감을 따먹는다든지 아무 죄책감도 없이 심한 장난을 하는 것을 그대로 그려 놓은 것.
  다음은 아동 심리에 위배되는 일이다. 이럴 때는 아예 아동문학이라는 딱지를 떼어야 하며 동시라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이 때 이런 초심자에게 우리는
  ―알맞은 낱말을 찾아라.
  ―알맞은 표현을 찾아라.
  ―지나친 과장을 삼가라.
  ―부분을 두고 전체를 생각하라.
  ―표현에 통일성을 두라.
  ―표현은 보편성을 지녀야 한다.
  ―사실에 근거를 두라.
  ―도덕성에 위배돼서는 안 된다.
  ―아동 심리에 근거를 두라.
하고 일러준다. 그러나 사실 이 모든 말은 표현에 객관성을 두어 독자에게 공감을 주라는 말이 된다. 나 하나의 생각으로 작품을 쓸 것이 아니라 독자의 눈으로 작품을 써라는 말이 된다.

  겨울의 노래
얼음이 얼면
얼어서 즐겁고
눈이 오면
눈이 와서 즐거운
겨울은 우리의 세상.

수정보다 맑은
한얼음 유리판 위로
식식식 달리며
커다랗게 그려보는
오색 무지개.

눈이 오면
눈싸움 편을 갈라서……
눈싸움에 지치면
썰매를 탄다.
야호야호 달리는 썰매.

바람이 부는 날은
연을 날린다.
팽팽한 연줄을 감을 때마다
연도 즐거워 붕붕거리며
하늘 복판에서 노랠 부른다.

팽이도 쳐야지
양지바른 골목에
함께 모여서
윙윙 우는 팽이의 노래
윙윙 우는 겨울의 노래.

처마마다 기다란
수정 고드름
한 개씩 꺾어내어
골목마다
전쟁놀이도 신나지.

얼음이 얼면
얼어서 즐겁고
눈이 오면
눈이 와서 즐거운
겨울은 우리의 세상.

  이 작품은 4학년 국어 교과서 12페이지에서부터 시작되는 시 한 편이다. 교과서에 수록될 만한 작품이라면 어린이들에게 본보기글로 제시된 것이다. 그런데 이 시는 그 분위기는 되어 있으나 몇 구절의 표현이 모호해서 상당한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아동문학 세미나에서도 이 작품에 대한 말이 나와 토론을 벌인 일이 있다. 그래서 이왕 말이 난 것이기 때문에 이 작품을 예문으로 든 것이다.
  이 시의 <커다랗게 그려보는 오색 무지개>의 부분이 모호한 것이다.
  얼음판 위에 무지개를 그려 본다는 이 대목을 두고 교사들의 생각이 구구한 것이다.
  어떤 교사는 이 무지개라는 표현이 스케이트의 자국일 것이라고 말한다. 스케이트의 빙 돌아가는 자국이 마치 무지개의 곡선과 같지 않느냐고 한다.
  그럼 「오색」이란 수식어를 왜 끼웠느냐는 말에는 아이들이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있으니 무지개 같지 않느냐고 한다.
  또 어떤 참고서에는 이 오색 무지개가 마음속에 있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스케이트를 타게 될 때 느껴지는 느낌이라는 것이다.
  또 어떤 해석에서는 스케이트를 탈 때 얼음가루가 해에 비쳐져 프리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 시는 이런 입장에서 표현됐을 것이라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표현은 보편성을 잃었다. 스케이트를 탈 때마다 프리즘이 생기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조사를 한 것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어린이에게 스케이트를 지도하던 교사에게 물어보아도 그런 사실은 잘 모른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이 하나의 구절 때문에 야단이다. 표현이 전혀 객관화되어 있지 않아서 독자로부터 공감이 되지 않고 있다.
  다음은 팽이 우는 소리를 노래라 한 것이다. 겨울의 노래라 했다. 팽이 우는 소리를 정작 들어본 사람이라면 아무리 해도 그것을 노래에 비유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얼음판 위에서 돌리는 팽이라 해도 팽이가 노래로 흥겹게 들릴 만한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다. 그저 「윙―」 소리를 몇 초 동안 내고 만다. 이것을 겨울의 노래라 표현한 것은 공감이 되지 않는다. 어색한 과장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팽이 우는 소리를 노래로 비유한다면 선풍기 도는 소리·기계 소리·비행기 소리를 모두 노래로 보아야 한다.
  되풀이되는 말이지만 분위기만으로는 동시가 되지 않는다. 주관적인 표현만으로도 동시가 되지 않는다. <동시는 직관적인 표현이어야 한다!> <동시의 표현은 분명한 것이어야 한다!> 하는 주장은 모두 객관성이 있는 문장이 되게 하자 그 소리다. 
 

(1980년 가을 『아동문학평론』 제16호)

 

동시 창작법 ⑩

동시(童詩)는 동화적(童話的)인 시(詩)다

신 현 득

 

           바다 속
                                                     강소천 

     조개들의 조그만 단간 집들이
     올망졸망 둘러앉은 동구 밖엔 
     사철 산호꽃이 만발하고

     조용히 흔들리는 미역 숲에선
     하루 종일 아기 고기들이 
     술래잡기를 하고 

     푸른 바다를
     멋지게 날아다니는 
     가지가지 고기들

     등대에 배들에 불이 켜지면, 
     "별 하나 나 하나…."
     등불을 세고. 


  지난 날 초등학교의 교과서에 수록됐던 이 동시(童詩)에 대해 지은이 소천(小泉)은 어느 교육지(敎育誌)에 그 해설을 곁들이면서 이런 말을 한 일이 있다. 
  즉 처음에 이 작품은 동화(
童話)로 구상을 했다는 것이다. 동화로 쓸려던 것이 그 결과(結果)에서 동시(童詩)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은 교과서에 본보기글로 수록될 만큼 수작이다. 훌륭한 동시(童詩)라는 말이 된다. 그러나 이 내용을 그대로 옮겨 동화가 되게 할 수가 있다는 것도 이 작품을 읽으면서 느끼게 된다. 
  결국 소천의 말은 헛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내용을 소재로 해서 동화를 썼다면 역시 수작의 동화를 뽑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말은 동시 동화의 거리 관계를 말해 주는 것이 된다.
  일반 쟝르에서는 소설의 소재로 희곡을 쓸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설의 소재로 시를 쓴다는 말은 잘 듣지 못한다. 시의 소재로 시조를 쓴다는 것은 용이한 일이다. 그것은 자유시와 정형시의 차이밖에는 없는 가까운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소설(
小說)을 무대에 올렸을 때는 희곡이 된다는 것도 같은 이야기를 곁들일 수 있는 산문이기 때문이다. 가까운 관계라는 말이다. 
  이와 같은 말을 동시와 동화에서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동문학(
兒童文學)의 작가(作家)들 사이에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이런 것을 느껴왔지만 아직 이론적(理論的)인 전개(展開)를 한 사람은 없다.
  여기서 동화(
童話)란 사실적(寫實的)인 문장(文章)으로 된 소년소설(少年小說)이나 생활동화(生活童話)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팬터지로써 씌어진 본격동화(本格童話)를 말한다. 
  이런 환상동화(
幻想童話)와 동시(童詩)의 관계를 먼저 그 문장수사(文章修辭)에서 찾아보기로 하자.
  환상동화의 경우 동물(
動物)이나 사물에 인격(人格)을 주어 사람차럼 사고(思考)와 언어(言語)를 갖게하는 의유(擬喩)가 쓰인다. 이것은 시()의 수사(修辭)에 쓰이는 한 방법(方法)이다. 동시(童詩)의 수사(修辭)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냇물이 지껄인다.
  ―나무가 춤을 춘다.
  이렇게 간단한 동시(
童詩)의 구절(句節)도 냇물과 나무를 하나의 인격체(人格體)로 보고 있는 데서 시작된 표현이다.
  이런 동시(
童詩)의 의유법(擬喩法)을 동화(童話)가 공유(共有)하고 있는 것이다. 전래동화(傳來童話) 창작동화(創作童話)를 막론하고 의인적(擬人的)인 전개(展開)가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다.
  "옛날 호랑이 한 마리가 뻐끔뻐끔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하는 구전(
口傳)의 이야기나 
  "돌멩이는 생각했지요. '산꼭대기에서 내리굴렀으면 재미있겠는데' 하고…"
  이런 창작동화(
創作童話)의 한 대목도 모두 그렇다.
  그러므로 철저히 의인(
擬人)된 문장(文章)이라는 데서 동시(童詩) 동화(童話)는 가깝다. 환상(幻想)이라는 것 역시 그렇다.
  동심(
童心)을 담은 같은 그릇이라는 점, 재미성을 지녀야 할 수밖에 없는 문장(文章)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러므로 동화(
童話)는 산문(散文) 가운데서 동시(童詩)에 가까운 것이며 동시(童詩)는 운문(韻文) 가운데서 동화(童話)에 가까운 것이라는 설명이 된다.
  김요섭씨는 동시(
童詩) 동화(童話)가 하나의 포에지(poesy), 즉 이 포에지라는 시()의 광석(鑛石)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광석의 제련술(製鍊術)에 따라 동시(童詩)로도 동화(童話)로도 결정이 되는데 그 바탕인 광석(鑛石)은 같은 것이라는 풀이가 된다. 이 제련술(製鍊術)이라는 것은 바로 형식(形式)이요 모티브이다.
  그래서 김요섭씨는 동화(
童話)야말로 시인(詩人)이 써야할 쟝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시()의 소양 없이는 환상동화(幻想童話)를 쓰기 어렵다는 말로도 느껴진다.
  요즈음 동시(童詩)작가들이 동화((
童話)를 많이 쓰고 있고 사실 이 두 가지 쟝르를 겸하는 작가들이 대단히 많다. 
  "그것이 그렇게 쉽게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으나 원체 가까운 문장(
文章)에 가까운 발상(發想)의 것이기 때문에 별로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없는 것이다.
  동시로 씌어져야 할 소재로 동화를 썼다는 말은 조유로씨도 말한 바가 있고 필자도 이런 경험이 더러 있다. 
  이것을 다시 동시(童詩)의 입장에서 보면 동시(童詩)는 동화적이어야 된다는 말로 해석이 된다. 이것은 동시(童詩)가 산문(
散文)이 되라는 말과는 다르다.
  그 문장(
文章)의 전달면(傳達面)이나 문장난해도(文章難解度)에 있어 동시(童詩)는 동화(童話)를 본받아야 된다는 말이 된다. 곧 동시(童詩)는 동화(童話)의 문장(文章) 이상으로 난해해서는 전달(傳達)에 지장이 된다는 것이다. 동화(童話)의 문장(文章)을 하나의 자로 삼아야 된다는말이다.
  되풀이 말했듯이 동시(童詩)는 그 개념이 지닌 그대로 구속성(
拘束性)을 갖고 있다 . 이 구속(拘束)을 벗어버리면 이것은 일반 자유시(自由詩)가 된다. 동시(童詩)의 기능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속성(拘束性)이 있으므로 동시(童詩)인 것이다.
  여기서 백번 양보를 해도 동시(童詩)는 시(詩)의 모더니즘을 따라갈 수도 없고 그런 방법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 것이다. 
  모더니즘에서는 모호(
模糊)한 표현이 오히려 시(詩)다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언어(
言語)의 건축(建築)이라고도 볼 수 있는 이들 표현(表現)을 위해 암시(暗示)와 상징(象徵)과 은유(隱喩)의 방법(方法)을 동원한다. 이것이 현대시(現代詩)의 수사(修辭)다. 그런데 이것은 전혀 동시(童詩)의 방법(方法)이 될 수 없다. 
  동시(童詩)에서 모호(
模糊)한 표현은 지탄이 돼야하며 은유(隱喩)나 암시(暗示)는 독자인 어린이에게 거리를 두게 한다.
  같은 포에지에서 출발된 동시(童詩), 동화(
童話)는 근본 문장(文章) 수사(修辭)에서도 같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동시(童詩)는 난해(
難解)한 현대시(現代詩)보다 동화(童話)쪽에 가까운 문장(文章)이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동시(童詩)는 동화적(
童話的)인 시(詩)요, 동화(童話)는 동시적(童詩的)인 산문(散文)이다. 
  여기에 그 예문(
例文)을 들어 이를 실증(實證)할 수도 있다. 
 

       엄마 심부름
                                                     윤석중 
     아기가 반찬 가게로
     엄마 심부름을 갑니다.
     조그만 소쿠리를 옆에끼고
     아장아장 콩나물을 사러 갑니다.

     콩나물을 담아 놓은 치룽이 너무 높아서
     아기는 못 보고 그냥 지나갑니다.
     자꾸자꾸 걸어갑니다.
     집이 점점 멀어집니다.

     집을 잃어버리고 우는 아기를
     엄마가 달려가서
     넬름 업어 왔습니다. 


  이 '엄마 심부름'은 1961년에 출판된 윤석중 동요집 <엄마손> 중의 한 편이다. 이 시는 저학년 어린이의 감각을 잘 살린 작품이다. 이런 작품들 말고라도 윤석중씨의 작품만큼 어린이들과 친밀한 작품은 드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동시에서 동화적인 것을 느끼게 된다. 사실 이런 소재라면 좋은 유년동화 감이다. 동화로 썼으면 좋을 뻔했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이다. 

1981. 봄. <아동문학평론> 제18호에서
 

 

동시 창작법 ⑪

자연(自然)에게 물어보라. 
가르쳐 줄 것이다.

신 현 득
 

  자연(自然)의 음성(音聲)을 듣는 것만으로는 시()가 씌어지지 않을 때가 있다. 이 때는 자연물(自然物)에게 대화(對話)를 거는 것이 좋다. 그러면 자연(自然)은 나름의 음성(音聲)으로 대답해 줄 것이다.
  ―내가 짤깍짤깍 소리내면 동네 꼬마들이 모여들지.
  이것은 엿장수 가위의 대답이다.
  ―나는 방망이로 얻어맞기만 해.
  이것은 빨랫터의 빨랫돌의 대답이다.
  ―네가 꼬마였을 땐 이랬단 말이야.
  이것은 내 돌사진이 하는 말이다.
  어느 것이나 몇 마디의 대답은 하여 준다.
  ―나는 뱃속에서 종소리를 낼 수도 있다.
  괘종시계의 말이다.
  ―꽃밭에 이슬비를 오게 해 주는 굉장한 재주가 있지.
  이것은 물뿌리개의 말이다.
  그런데 이 때는 가장 깊이있게 대답해 줄 만한 놈에게 가서 수작을 거는 것이 한 가지 요령이다. 시는 있을 만한 곳에 있으니까.
  도랑물에게 가서 물어보자.
  "도랑물아 어디로 가니? 어디를 거쳐서 가니? 무슨 일을 하면서 가니?"
  이렇게 물어 놓고 기다리자. 대답이 없거든 하루종일이라도 도랑가에 앉아서 대답을 기다리자. 그러면 도랑물은 대답할 것이다.
  "바다까지의 긴 여행이다. 우리는 여행을 하다가 쉬는 일이 없단다."
  "밤낮 쉬지 않고 흘러 가지. 밤에는 달그림자를 띄우고 낮에는 산그림자를 띄우고 흘러 가지."
  "긴 여행에 지치지 않게 노래를 부르며 흐르지."
  "종이배도 띄우고, 나룻배도 띄우게 될 걸."
  "마을 앞을 지나다가 물레방앗간에 들르게 될 거야. 쿵덕쿵덕 물레방아를 올려 봐야지."
  자연(
自然)의 대답은 모두가 시()다 . 이것을 그대로 정리해 보자.

          달그림자를 띄우고 
          산그림자를 띄우고
          마을 앞을 지나다가
          물레방아를 돌린다.
          -쿵덕 쿵덕 쿵덕!

  다시 더 깊은 이야기를 해 줄 것과 대화를 나누어 보자. 우리에게는 두 개의 손이 있다. 내 가장 가까운 손에게 물어 보자.
  "손아 내 손아 네가 하는 일은?"
  ―공을 치는 일이지. 그렇지만 커서는 큰일을 하게 될 걸. 나는 (손은) 자라고 있어.
  "할머니 손이 하는 일은?"
  ―아기 궁둥이를 닦아 주는 일.
  "엄마손이 하는 일은?"
  ―쌀단지를 긁어 퍼내는 일이지.
  "오빠의 손은?"
  ―구두닦는 일(마침 이 때는 6.25전쟁 때였다)
  손으로부터 들은 말이다. 충분히 시가 될 수 있다.

               손

          할머니가 
          아기 둥둥이르 닦아 주고 있다.

          엄마가 
          쌀 단지를 긁어 퍼낸다.
          오빠는 구두닦이에서 돌아왔다.

          할머니 손에
          아기 똥이 묻지 않았나 보셔요.

          오빠 손에는 
          거멓게 구두약이 묻었다.

          죽 한 그릇씩을 먹고
          저녁상을 치우고 나서

          자 이리로 
          손을 모아 보셔요.

          아기 손부터
          차례로 놓아 보셔요.
          작은 손들이 어떻게 커서
          어른이 되는가를 알게.

          내 손이 커서
          오빠 손만해지고
          오빠 손이 
          엄마손보다 커졌을 때
          우리집은 아무도
          쌀단지를 긁어내지 않아도 된다.

          아기가 커서 
          오빠만 해졌을 때는
          아기 손에 
          구두약이 묻지 않아도 된다.

  자연에 물어보니 자연은 무엇이나 가르쳐 주고 있다.
  어느 때 시골 학교에 가서 자취를 하며 1년 3개월을 지낸 일이 있다. 학교서 자취방까지에는 과수원이 있었고 과수원을 둘러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었다.
한적한 시골이라 아이들을 만나는 시간 외에는 자연을 만나는 일밖에는 없었다. 나는 탱자꽃이 피는 봄부터 여기를 지나다니며 과일나무보다는 탱자울타리가 재미있는 소재(
素材)라는 걸 느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시()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하루는 재미있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울타리를 만들고 있는 탱자나무에게 물어보면 될 게 아니냐는 생각이었다. 정말이지 탱자나무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바로 탱자나무다.
  "미처 몰랐구나!"
  나는 아침마다 이 탱자나무 울타리르 지나며 조용히 대화를 걸었다.
  "탱자나무 울타리야!"
  "응"
  대답을 해 줄 때도 있었고 대답이 없을 때도 있었다. 며칠인가 지났을 때다. 
  "우리는 여럿이 어깨동무를 하여 울을 만들고 있단다."
  울타리는 재미있는 대답을 해 주었다. 역시 탱자나무에 대해서는 탱자나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다음에는 이런 대답을 얻어내었다.
  "우리에겐 가시가 있어. 문을 지키는 이는 무기가 있어야 되거든 우리는 이 뾰족한 무기를 이파리 밑에 숨겨두고 있단다. 누구든지 과일밭에 들어오기만 해 봐."
  가을 날이 되고부터 과일밭의 사과가 빨갛게 익어 있었고 과일밭을 지키는 탱자나무도 노란 구슬로 된 자기 열매를 들고 익히고 있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학교에 가다가 보니 탱자나무 울타리 한 곳이 해쳐져 있었다.
  '간밤 도적이 들었구나!'
  그러면서 탱자나무의 이야기를 들었다. 탱자나무의 말을 들으면 어제 저녁 밤중에 과일밭의 사과를 탐내는 사람이 들어오다가 가시에 찔려 달아났다는 것이다.
  나는 이 탱자나무들이 그 밤도적을 물리치기 위해 어떻게 힘을 합쳐 싸웠을까를 상상해 보았다. 참으로 기특한 탱자나무다. 이렇게 하여 나는 한 편의 작품을 얻을 수 있었다.

            탱자나무

          같은 나무이지만
          착한 탱자나무는
          과일나무 울이 돼 준다.

          여럿이 어깨동무하고
          울이 되어 서서
          봄 사월
          날이 선 가시 위에 
          잎과 꽃을 단다.

          잎은 자라
          가시를 덮는다.
          가시는 움츠리고
          이파리 밑에 숨는다.

          과일밭의 과일이 익을 무렵에
          탱자꽃은 커서
          향기를 가득 담고
          구슬이 돼 다시 열린다.

          그러나 어둡고 무서운 밤에
          가슴이 떨리도록 무서운 밤에
          발자국 소리 여럿이 몰려 온다.
          검은 그림자가 손을 내민다.

          ―과일을 탐내는 놈이냐?
          ―내 열매를 탐내는 놈이냐?
          숨었던 가시가 나와
          마구 찌른다.

          ―아야 아얏!
          ―아야 아얏!

          자국 소리도 그림자도
          달아나고
          여러 개 구슬을 가지고 놀면서
          탱자나무는 
          한가을까지 즐겁다.

          과일밭을 지키면서 
          즐겁다. 

  <흙과 나무>의 한 작품도 자연과의 대화에서 씌어졌다. 처음에는 흙과의 대화였다.
  "나는 세상의 어머니다."
  이것이 흙의 대답이었다. 세상 모든 것이 흙을 의지해 살고 있다는 것이다.
  "풀과 나무가 나를(흙을) 의지해 살고 있지. 이 풀을 먹고 나무의 과일을 먹고 온갖 동물이 자라고 있지. 내가 없다면 누가 목숨을 유지할 수 있겠니. 나비도 잠자리도 살 수 없다."
  이것도 들판을 덮고 있는 흙의 말이었다.
  "나는 젖을 주고 있다. 배나무가 뿌리를 뻗어 오면 배맛이 나는 열매가 되도록 젖을 주지. 복숭아나무에게도 살구나무에게도…."
  이것도 흙의 말이었다. 
  "내가 나무의 뿌리를 잘 잡아 두니까 나무가 서 있을 수 있는 거야. 나무뿐 아니지. 모든 풀뿌리도 내가 잡아 주고 있다."
  이것도 흙의 말이었다.
  "나무끝 새집에서 새새끼가 잘 크는 것도 내가 잘 흔들어 주기 때문이야."
  이것도 흙의 말이었다.
  다음에는 나무에게 물어보았다. 
  "너는 흙을 엄마라 생각하니?"
  "그럼, 흙은 우리 엄마다. 지평선 끝으로 아침해를 띄우는 것도 모두 흙엄마가 하는 일이야. 그리고 내가 익힌 씨앗이 가서 묻히는 것도 흙엄마다. 내가 넘어져 묻힐 곳도 흙엄마야."
  흙의 말은 깊은 뜻을 지니고 있었다. 다음으로 이 흙과 나무끼리 대화하는 소리까지 엿듣게 됐다. 분명히 저희끼리도 엄마와 자식 사이처럼 다정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흙과 엄마

          "나는엄마다."
          흙은 그런 생각으로
          하늘을 마주 보고 누워 있어요.

          배나무가 뿌리를 뻗어 오면 
          배맛 될 것만 골라
          젖을 주어요.

          미루나무 키다리를
          젖으로 키워요.

          흙은 넘어지지 않게
          뿌리를 잡고
          그 줄기 끝에다 새집을 달고
          새집을 흔들어 새끼새를 키우며
          그 위로 
          구름이 흐르게 해요.

          아침에 태양이 지평선에 떠서 
          나무꼭지서 
          열두시를 만나게 해요.

          "엄마야!"
          "나다 나다."
          "엄마야!"
          나다.

          흙과 나무는 
          불러주고 대답해요.

          "엄마야 
          내 씨가 떨어지면
          어디로 가노?"
          "그야 엄마한테로 오지."

          "엄마야
          내가 넘어지면
          어디로 가노?"
          "그 때도
          엄마께로 와 묻힌다." 

1981. 가을 '아동문학평론' 제20호에서
 

 


동시 창작법 ⑫

동요운동(童謠運動)에 붙여

신 현 득

  동요(童謠)를 쓰자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근 30년 동안 자유동시(自由童詩), 즉 동시(童詩) 일변도가 되어온 아동문학의 시분야(詩分野)가 동요도 아동문학의 책임영역이라는 자기 반성을 한 데서 시작된 것이다.
  동요의 학술용어(
學術用語)는 「정형동시(定型童詩)」다. 그러므로 동시의 한 갈래로 정의(定義)가 된다. 다만 오랫동안 「동요」라는 용어를 써온 습관상 이 학술용어를 취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냥 「동요」라고만 할 때는 시(
)로서의 의미와 곡()으로서의 의미를 같이 지니고 있어서, 낱말 구성의 분위기를 따지지 않으면 구별이 되지 않는 수도 있다.
  즉 「동요를 쓴다」와 「동요를 작곡한다」「동요를 부른다」에서 씌어지는 동요라는 의미는 각각 다른 것이다. 동요를 정형동시로 불러야 할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
  동요는 정형시(
定型詩)이지만 시조( 時調)·경기체가(景幾體歌)·가사(歌辭)나 한시(漢詩)의 칠언절구(七言絶句)·오언시(五言詩)와 마찬가지로 정해진 외형률(外形律)이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4·4조나 7·5조가 반드시 동요의 요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동요는 어느 정형시보다 그 표현이 자유로운 것이다.
  그러면서 동요는 정형시로서의 제약을 받는다. 그것은 그 작품 나름의 리듬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과 연(聯)과 연 또는 절(
)과 절 사이의 대칭관계(對稱關係), 즉 대구(對句)를 유지하는 데에 있다. 모든 동요는 그 첫 연이 기준이 된다. 그 다음의 연이 여기에 맞추어져 대칭을 유지함으로써 정형시의 성격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대칭관계의 맞서는 자리에 같은 자수(
字數)의 시어(詩語)를 두되 서로 나란히 놓을 수 있는 것이나 대구가 될 수 있는 낱말을 두어 전체의 조화를 이루게 된다.

          봄비
                      
김종상
보슬보슬 봄비야 잔디밭에 내려라.
마른 잔디 속잎을 파릇파릇 피워라.
산과 들을 파랗게 융단으로 덮어라.

보슬보슬 봄비야 꽃나무에 내려라.
가지마다 꽃잎을 곱게곱게 달아라.
산과 들을 예쁘게 꽃밭으로 꾸며라.

  위의 동요의 경우를 두고 보자. 첫 연과 둘째 연을 볼 때 「보슬보슬 봄비야」로 시작이 되고 있다. 「잔디밭에 내려라」와 「꽃나무에 내려라」의 대구다. 행을 살펴보면 「파릇파릇 피워라」와 「곱게곱게 달아라」의 대구다. 끝맺음을 「융단으로 덮어라」와 「꽃밭으로 꾸며라」의 대구로 이루어져 있다.
  그 형식을 따져 보면 맞서는 자리에 같거나 비슷한 내용의 시어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문장의 종지를 「내려라」「피워라」「덮어라」 등 「라」로 끝나는 낱말을 받혀 전체의 조화를 이룬 것도 이 동요의 재미있는 구성이다.
  이와는 반대로 맞서는 자리에 전혀 반대가 되는 낱말을 놓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보기를 들면 「높다」와 「낮다」,「길다」와 「짧다」,「검다」와 「희다」 등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의 마방진(
魔方陣)처럼 낱말이 있을 자리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동요는 표현이 자유롭지 못하다. 쓰기에 어려운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의 동요는 이런 구속에서조차 벗어나려고 하고 있다. 반드시 연을 가지지 않아도 동요가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연이 없는 단련동요(
短聯童謠)는 특히 구전동요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 나라의 민요는 4·4조를 기본 외형률로 하고 있다. 그러나 동요의 경우는 반드시 그런 것이 아니다. 성인(
成人)의 작의(作意)가 작용하지 않는 것일수록 그 표현이 아주 자유롭다.

황새야 덕새야
네 모가지 짜르고(짧고)
내 모가지 길―고

  이것은 황새를 보고 부르는 구전동요이지만 4·4조도 7·5조도 아니다.

별 하나 똑 따서
행주 닦아
망태에 담아서
동문에 걸―고
별 둘 똑 따서
행주 닦아
망태에 담아서
서문에 걸―고…….

  별을 세는 이 구전동요(口傳童謠)도 4·4조와는 멀다. 이것만 보아도 동요는 그 리듬이 퍽 다채로우면서 자유로웠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단련의 동요가 지어지고부터 표현이 자유스러워진 반면 자유시와의 한계가 모호해진 것이다.
  시조는 글자가 한정돼 단수에서도 시조의 성격을 지닌다. 가사는 정해진 음률이 있어서 길이에 관계 없이 그 성격이 변하지 않는다.
  자수의 제한도 정해진 음률도 없는 동요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이 때의 척도를 문장의 리듬과 담긴 내용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창작동요(
創作童謠)가 씌어진 것은 1908년 육당에 의해서였다. 이후 20년대부터 동요는 아동문학의 주류로서 그 황금시대(黃金時代)를 이룬다. 그러나 이 당시의 동요는 현재의 동시적인 성격의 것도 있었다. 즉 현재의 동시와 동요의 기능을 다 맡고 있었다. 동시·동요의 미분화시대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정형시인 동요를 써도 노래가 될 수 있는 것과 노래가 되기에 용이했던 것과 노래가 붙여질 수 없었던 것이 있었다.
  그것은 정형시라 해서 다 노래가 아니라는 말이 된다. 현대의 자유동시를 동요의 틀에 잡아 넣었다 해서 반드시 노래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동요는 오히려 외형적인 것보다 그 내용적인 조건이 갖추어져야 된다. 즉 시의 내용에서 악상(
樂想)이 풍겨 나와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동시를 함축미(含蓄美)의 시라고 한다면 동요는 밖으로 발산되는 내용을 갖추어야 한다.

  「푸른 물 출렁출렁 어디로 가나?」

  이 시구(詩句)는 1행()만으로도 동시의 문장과는 구별이 되고 있다. 악상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 때 의성어나 의태어가 악상을 잡아 주는데 역할을 한다고 믿어 왔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동요는 경쾌하고 발랄하면서 재미있고 흥겨운 표현이 되어야 한다.
  동시를 쓴다 해서 동요도 쓸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동요를 쓸 때 동시와는 전혀 다른 표현 방법을 가지고 임해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시인들이 동요에 실패하는 원인은 동시에서 배배 꼬인 비유들을 동요의 틀에 잡아 넣기 때문이다. 문장에다 의미를 강조해 두려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주 딱딱하고 뻣뻣한 것이 돼버린다. 이런 것은 노래가 될 수 없다. 동요의 문장은 부드러워야 한다. 따라서 시의 소재에서도 동시보다 제약을 받아야 한다. 충분히 노래가 담길 만한 소재여야 하는 것이다. 어두운 면보다는 밝은 면이 있는 것이 좋다.

    이슬 눈 방울 눈
                    유경환
풀잎 끝에 마알간
이슬 눈 한 개.
풀잎 끝에 은빛의
방울 눈 한 개.
눈빛을 반짝이는 풀잎들이
세상은 파랗다 생각할 거야.

풀잎 끝에 매달린
이슬 눈 한 개
풀잎 끝에 또로록
방울 눈 굴러
해님을 쳐다보다 잠이 들면
풀잎은 눈 감고 꿈나라 간다.

  이 동요는 소재를 잘 택한 보기가 된다. 「이슬 눈 방울 눈」이라는 제목에서 벌써 노래가 연상돼 온다. 좋은 동요가 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요를 쓰고자 할 때 소재의 발견이 큰 열쇠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주제가 정해졌을 때 거기에서 재미나는 몇 개의 사실을 골라 알맞게 배치해 놓고 그것을 전체의 뼈대로 삼는 것이다.
  2연이나 3연의 노래를 지을 경우 이 뼈대 위에 대구가 될 만한 시어들을 배치한 다음 문장을 다듬어 간다.
  그러나 동요는 어디까지나 문학인 만큼 문학적인 조화가 어느 정도인가에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한때 동요가 아동문학의 주류를 이루었던 만큼 동요에는 훌륭한 문학을 담을 수 있다.

        겨울 밤
                        김재원
나무 속에 하늘이 들어와 있다.
가지마다 매달린 수많은 별들
나무들은 별을 세며 추위를 잊고
별들은 가지에서 겨울을 난다.

나무들아 춥거든 별을 보아라.
반짝반짝 눈부시게 살아있잖니?
별들아 춥거든 나무를 보렴.
찬 바람 이겨내고 살아있잖니?

  이 작품에서 느끼는 것은 강한 문학성(文學性)이다. 그러므로 이만한 작품을 쓰기가 쉽지 않다. 각고(刻苦) 끝에 낳아진 작품이다.
  동요가 아동문학의 책임 분야라는 것을 새삼스레 강조해야겠다. 만일 아동문학인이 동요를 써 주지 않을 경우 어린이들은 첫째 노래에서 굶주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동요의 기능은 그것뿐이 아니다. 어린이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고 전달이 쉬운 시를 제공해 주게 된다.
  그러나 동요운동이 자유시로서의 동시가 발전하는데 지장을 주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한편 동요운동을 일으키는 단계에서 살펴볼 때 우리의 할 일은 너무도 많다.
  육당(六堂)은 창작동요를 처음 쓰면서 『흥부전』 『나무꾼과 선녀』 『별주부전』 같은 옛 얘기를 소재로 한 이야기 노래를 창작했다. 7、5조 4행을 1연으로 하는 이들 이야기 노래는 현재의 동화시(童話詩)와는 다르다. 동화시는 자유시인데 반해 이 이야기 노래는 철저한 7、5조의 정형시다.
  이러한 작품은 처음부터 노래를 위해서라기보다 이야기를 재미있게 전달해 주기 위한 수법으로 보인다. 그 길이가 엄청나게 길기 때문이다.
  별주부전을 주제로 한 <자라 영감 토끼 생원>을 예로 들면 56행의 정형시다. 또한 이보다 긴 작품도 있다. 그러므로 이런 작품은 7·5조로 된 가사(歌辭)로 보아도 될 만하다.
  만일 이와 같은 작업이 현대에 와서 이루어질 때 우리의 고전 이야기는 물론 지리적인 기행문, 물건의 생산 과정, 유통 과정(流通過程)을 모두 노래에 담을 수 있다. 물론 이런 작품을 시도한다고 할 때 현대적인 감각에서 씌어져야 할 것이다.
  다음에는 고전동요인 구비전래동요(口碑傳來童謠)를 현대동요에 어떻게 수용할 것이냐의 문제다.
  구전동요(口傳童謠) 중에는 녹두새요(謠)처럼 현대적인 가락에서 곡이 지어진 것도 있다.
  그러나 나머지는 이 많은 노래의 소재(素材)들이 방치되고 있는 상태다.
  구전동요가 현대적인 노래가 되지 못하는 것은 그 시어들이 낡고, 길이가 너무 길고, 표현이 모호하다는 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동요에서 구전동요를 받아들인다면 그 전체가 아니고 소재면이 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 중에는 약간의 수정으로 현대적인 노래가 될 수 있는 것도 있다.
  임동권 교수의 한국민요분류표(韓國民謠分類表)에 의하면 우리 나라 민요 362형 중에서 동요가 절반이 넘는 197형이다. 이들 전래동요는 동물요, 어류요, 식물요, 채약요(採藥謠), 수무자장요(受撫자장謠), 정서요, 자연요, 풍소요(諷笑謠), 어희요(語戱謠), 수요(數謠), 유희요(遊戱謠) 등 참으로 다양하고 많다. 이것이 모두 현대동요의 자산(資産)이다.
  동화의 경우 우리의 동화는 전래동화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동요 또한 전래의 것에 뿌리를 두어야 우리 것이 될 것이다. 맡겨진 자산을 어떻게 키워가야 할까?
  이렇게 생각할 때 동요운동에서 지워진 일이 참으로 많다는 것을 다시 느끼게 된다.  

(1982년 여름 『아동문학평론』 제23호)


 출처 ㅡ 허동인의 동시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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