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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한점의 그늘 없이 화창해야 한다...
2017년 03월 27일 18시 25분  조회:2437  추천:0  작성자: 죽림

처음 시를 배울 때 고쳐야 할 표현/도종환 



또 다음과 같은 시를 한 편 더 보자. 


이름보다 먼저 그대 귀를 찾았을 
죽도록 사랑한다는 말이 
더한 부름으로 버거웠던지 
유령처럼 스르르 
가버렸다 

- 「겨드랑이에 각개표로 손을 끼워 넣는 건 그 어느 한쪽의 필요만은 아니다」 

이 시의 시적 자아는 죽도록 사랑한다는 말이 버거워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 버린 빈 공간에 서 있다. 

이 시의 제목대로 '겨드랑이에 각개표로 손을 끼워 넣는' 것은 어느 한 쪽의 필요에서가 아니듯 서로 따뜻한 온기가 필요해 사랑했을 텐데 그냥 황망히 떠나 버린 것을 못내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심정이 나타나 있다. 

그런데 제목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도 내용의 한 부분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고, 
거기에다 원래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더해서 한 편의 시로 자기 감정을 제대로 형상화하려는 노력이 더 있어야 할 것 같다. 

'겨드랑이~'로 시작되는 긴 제목이 새롭다는 느낌을 주기보다는 제목도 내용도 다 미완성으로 끝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우리는 시를 쓰면서 내가 지금이 시를 통해 무슨 이야기를 표현하려고 하고 있는가 하고 되물어 보아야 한다. 

다음 시는 어떤가 함께 읽어보자. 


돌담은....., 
아닙니다. 
어릴 땐 가지런한 층층에 끄덕머리 하다가, 흔들고 다시, 여물게 손가락질 하나 둘 헤다가, 
마침내 올라서서 이쪽과 저쪽 세상 가운데를 걸으며 조심스레 팔저울도 했지요. 

하지만 이젠 아닙니다. 저는 이미 많이 자라서 한여름 놀던 그 그늘, 한 겨울 고인 볕뉘와 
속살거림, 모두 까닭 없었어요. 때로 생각이야 나지요. 가을이었어요 누군가 싸리비 하나 
꺽어들고선 저 산 너머로 가라며 저를 자꾸 내몰았어요. 
가라면 간다며 그 길로 돌담 등지는데, 때깔 곱게 물든 단풍 숲 사이 바알간 노을이 깃들더니 이내 두 눈 가뭇가뭇 멀게 했어요. 

그 후론 여기 이 바깥 세상에 쭉 살았지요. 어떤 날은 취해 밤낮을 바꾸고 또 어떤 날엔 싸우다 승리, 패배, 승리 패배 패배했어요, 삭신 다 닳은 세월 속절 없지만 아파서 제겐 더 살뜰한 기억이지요. 

다만 잊을 수 없는 건 그 낮은 돌담. 웃자란 키로 들여다봅니다. 
안팎으로 그늘과 속살거림 거느린 것이며, 자라지 못하는 속엣 것들 고즈넉이 품은 모양이며, 누군가 또 싸리비 꺾어 괜찮다고, 가라고, 사는 건 그렇게 등지는 거라며 저를 쫓아내는 것까지도 두고 올 적 그대로지만, 삶이란, 예전에 그랬듯, 홱 떠나는 것은 아니더군요. 

....안됐거든요. 

저물 무렵 
그 모든 게 노을 함께 지면 
참 안돼 보이거든요. 

이제 와서 저는 
슬퍼할 밖에요. 

- 「돌담」 

많은 쉼표와 현실에서 과거로 과거에서 현실로 들락거리는 구성은 자칫 혼란스럽게 비쳐질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그 속에도 정연한 내적 질서가 있다. 
돌담이라는 소재를 통해서 유년기와 성장기, 세월의 이쪽과 저쪽을 넘나들면서 아름답고 아프던 어린 시절을 추억한다. 

떠나기 싫던 우리들 근원적 삶의 터전과 그 터전을 떠나와 끊임없는 싸움을 되풀이하며 성장 해야하는 현실의 경계에 돌담이 있다. 

'괜찮다고, 가라고, 사는 건 그렇게 등지는' 것이라고 말하는 주제를 내포한 구절도 자연스럽게 시 속에 녹아 있고 우리 모두가 체험한 통과의례의 상징으로 '돌담'이 제 구실을 한다. 

그러면서도 자꾸 되돌아 보여지는 유년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성장시'로 손색이 없다. 
전통적인 기법으로 표현하든 새로운 기법으로 그려내든, 문제는 한 편의 시를 통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제대로 나타나 있느냐 그렇지 못하냐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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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
―폴 엘뤼아르(1895∼1952)

그녀는 내 눈꺼풀 위에 서 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칼은 내 머리칼 속에.
그녀는 내 손의 모양을 가졌다,
그녀는 내 눈의 빛깔을 가졌다,
그녀는 내 그림자 속에 삼켜진다.
마치 하늘에 던져진 돌처럼.

그녀는 눈을 언제나 뜨고 있어
나를 잠자지 못하게 한다.
훤한 대낮에 그녀의 꿈은 
태양을 증발시키고
나를 웃기고, 울리고 웃기고,
별 할 말이 없는데도 말하게 한다. 


엘뤼아르의 이 유명한 시에 무슨 말을 덧붙일 수 있을까. 뛰어난 연애시들은 흔히 죽음을 암시하곤 하는데, 이 작품은 그늘 한 점 없이 화창하다. 화자와 ‘그녀’ 사이의 사랑이 생생히 느껴지는 이 투명한 시적 진술! ‘그녀’와 화자는 같은 편이다. 더 나아가, 하나다. ‘그녀는 눈을 언제나 뜨고 있어/나를 잠자지 못하게 한’단다. ‘훤한 대낮에 그녀의 꿈은/태양을 증발시키고/나를 웃기고, 울리고 웃기고,/별 할 말이 없는데도 말하게 한다’에 이르러 독자는 사랑으로 격하게 동요하는 화자의 영혼에 공명하며 뭉클, 울컥해진다. 연대의 시이자 사랑의 시이자 합일의 시 ‘연인’, 이 온전한 사랑의 시 속의 ‘그녀’는 엘뤼아르의 부인이었는데 화가 살바도르 달리가 더 좋아져서 ‘달리 부인’이 된 갈라일까. 어쩌면 이 시 화자의 느낌이 일방적인 것이었을 수도 있지만, ‘연인’은 연애시사(戀愛詩史)의 한 정점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프랑스의 대표적 초현실주의 시인 엘뤼아르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결기 있는 정치시인이기도 했다. 한국 독자에게도 널리 알려진 ‘통금’이나 ‘자유’ 같은 시를 보면, 그는 서정주나 황동규의 선배가 아니라 김남주의 선배다. 엘뤼아르의 ‘통금’이나 ‘자유’에서 김남주의 ‘조국은 하나다’나 ‘학살’을 떠올리지 않기는 쉽지 않다. 공산주의자로 살았고 공산주의자로 죽은 엘뤼아르는, 김남주처럼, 저항과 혁명의 시인이었으며 자신의 문학 속에서 사랑과 혁명을 통일하기를 꿈꿨다. 그렇다면 ‘눈을 언제나 뜨고 있어/나를 잠자지 못하게’ 하는 ‘그녀’를 그의 현실 참여적 의식의 근간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만, 그러기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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