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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려과없이 씌여지면 시가 산만해지고 긴장감을 잃는다...
2017년 04월 18일 17시 32분  조회:1878  추천:0  작성자: 죽림

너무 많은 소재의 남용

대상 작품

가을비

1* 어스름한 저녁 무렵 약속없는 빗줄기를 만나면
2* 오던 길을 뒤돌아 봅니다
3* 빗길 저 끝으로
4* 사주팔자 짚어가던 할머니가 서 계십니다
5* 고불고불 골목마다
6* 이름없는 들풀이 비를 맞습니다
7* 명분 세운 고목나무도
8* 비에 젖습니다 
9* 이리저리 이럭저럭 함께 왔으니
10*스스로 대견하여 손길이 다정합니다
11*비에 젖은 불빛이 말을 시작하자
12*가장들은 젖은 어깨 위에
13*고단한 생활을 올려놓고 바삐 갑니다
14* 나는 맨 몸을 다시 걸으며
15* 그러려니 하고
16* 초라한 삶을 웃어봅니다

평설

처음 시를 쓰는 사람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문제점들을 안고 있는 작품이다. 초심자의 경우, 한 편의 시 속에 많은 이야기를 한꺼번에 하려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 본 것, 느낀 것을 여과없이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에 시가 산만해지고 긴장감을 잃고 만다. 그리고 언어의 선택에도 문제가 있다. 어휘력이나 언어에 대한 감각이 부족하여 부적절한 비유법을 사용한다거나, 상투적인 표현을 하는 점 등이다. 
위의 시를 살펴 보자. 비가 오는 날의 저녁 풍경을 할머니, 풀잎, 고목, 불빛, 귀가하는 가장들을 소재로 삼아 그려내고 있지만, 정작 지은이가 이 많은 소재들을 통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가는 나타나 있지 않다. 지은이는 14행부터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라고 할 지 모른다. 독자들도 그렇게 짐작은 하겠지만, 구체적으로 닿아오는 내용이 없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어떠한 문제점을 안고 있는지 꼼꼼히 따져 보기로 하자.
‘사주팔자 짚어가던 할머니’ ‘이름없는 들풀’ ‘명분 세운 고목나무’ ‘가장들의 고단한 생활’ ‘초라한 삶의 나’는 모두 함께 비를 맞고 있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이것들이 서로 어떤 연관성을 지니지 못하고, 비오는 저녁의 풍경을 단순히 나열한 것으로 그치고 있다. 각기 이야기는 성립하되, 전체적으로는 서로 어떠한 영향도 주고받을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초심자들은 이야기를 벌려놓고 그것을 다시 하나의 구심점을 향해 몰아가는 힘이 부족한 탓이다. 
시를 포함해 모든 글은 초점이 뚜렷해야 한다. 시는 짧은 형식에 비유법을 위주로 내용을 전달하므로 더욱 그러하다. 위의 시는 모든 소재들이 제각기 하나씩의 이야기로 독립되어서, 시의 초점을 흐려놓고 있다. 지은이가 비 오는 저녁 우산도 없이 맨몸으로 걷고 있는 초라한 자신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고자 했다면, 앞의 소재들은 모두 자신과 연관된 어떤 내용들이어야 한다. 그래야지만 독자들을 설득시키고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이다. 시는 주위 풍경의 감상적인 묘사가 아니다. 그 묘사 속에 자신의 감정이나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들어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시의 상징성이며 묘미이다.
잘못된 표현에 대해 지적해 보기로 한다. 이 시는 거의 모든 행에서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지만, ‘약속없는 빗줄기’ ‘사주팔자 짚어가던 할머니’ ‘명분 세운 고목나무’ ‘초라한 삶’은 특히 거슬리는 부분이다. 낡은 언어끼리, 혹은 의미없이 갖다 붙인 언어의 결합은 시의 품격을 떨어뜨린다. 예를 들면 ‘사주팔자 짚어가던 할머니’는 이 시의 이미지와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비 오는 날과 할머니, 그것도 사주팔자를 짚어보시는 할머니를 떠올릴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독자들이 시를 읽고 공감하는 것은 자신도 그러한 체험이나 느낌을 가졌을 때이다. 개인적인 체험이 아닌 보편적인 체험이나 감정만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 또 ‘명분 세운 고목나무’는 앞뒤 행을 읽어보아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이렇게 자신만이 알고 있거나, 그럴 듯하다고 해서 아무런 의미도 없이 마구잡이로 언어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시는 일단 언어를 도구로 삼아 표현하는 예술 행위이다. 아무리 머리 속에서 뛰어난 발상이나 고상한 생각이 떠올랐다 하더라도, 표현된 언어 자체가 유치하면 시 역시 그러한 수준으로 떨어지고 만다. 아직 언어에 대한 감각이 부족한 아마추어 때일수록 더욱 언어를 치열하게 갈고 다듬어야 할 것이다.
5, 6행의 골목길과 들풀은 말의 앞뒤가 맞지 않는다. 골목길에 들풀이 어떻게 자라고 있겠는가. 시가 상상의 세계라고 해서 아무 말이나 서로 연결시켜 놓아서는 안 된다. 그 상상의 세계에서도 논리가 있고 질서가 있는 법이다. 9행과 10행의 대화체는 누가 하는 말인지 불분명하다. 지은이 자신이 하는 말인지, 11행에 나오는 불빛이 하는 말인지를 분명하게 처리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리저리 이럭저럭’과 같이 불필요한 부사가 중첩되었으며, 누가 함께 온 것인지 무엇이 대견한지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 그 다음 11행과 12행에서도 불빛과 젖은 어깨의 가장 역시 무의미하게 연결되어 있다.
위의 시는 전체적인 의미가 통하지 않고 부분적으로 수정해야 할 곳도 많아 고치기가 쉽지 않다. 필자는 이러한 때 작품을 버리라는 충고를 하고 싶다. 자신이 꼭 쓰고 싶은 작품이라면 언젠가 다시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불필요한 부분을 삭제하고 약간의 수정만 가해 보았다. 

수정

가을비

어스름한 저녁 무렵 빗줄기를 만나면
오던 길을 뒤돌아 봅니다
빗길 저 끝 골목마다
이름없는 풀들이며 나무들이 비에 젖어듭니다
비에 젖은 불빛은
집으로 돌아가는
가장들의 고단한 어깨 위에
초라하게 흔들립니다
나는 우산도 없이 걸어가며
삶이란 다 그러려니
가볍게 웃어봅니다

----------------------------------------------------------------

 

강가
―이용악(1914∼1971)

아들이 나오는 올 겨울엔 걸어서라도
청진으로 가리란다
높은 벽돌담 밑에 섰다가
세 해나 못 본 아들을 찾아오리란다

그 늙은인
암소 따라 조밭 저쪽에 사라지고
어느 길손이 밥 지은 자췬지
그슬린 돌 두어 개 시름겹다


시집 ‘오랑캐꽃’에는 이용악이 1939년부터 1942년까지 쓴 시들이 수록돼 있다. ‘강가’는 그중 하나다. 1939년이면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해이고, 독일의 동맹국이었던 일본이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해 전쟁이 태평양으로 확대된 때가 1941년 말. 그러니까 전쟁은 나라 밖에서 벌어졌지만 식민지에 대한 수탈이 극도로 치닫기 시작한 시기에 쓰인 시다.

노인은 암소한테 물을 먹이러 강가로 몰고 나왔을 테다. 그 김에 등짝이랑 뱃구레랑 엉덩이에 말라붙은 오물도 씻어주고 있었을 테다. 누가 먼저 말을 걸었는지, 어느새 노인은 초면의 화자에게 속에 담긴 말을 털어놓는다. (노인의 떳떳한 발설로 짐작건대) 독립운동을 하다가 잡혀 갔을 아들, 청진까지 갔다 올 차비를 마련하기 힘겨운 가난. 갈 때는 혼자 겨울 삭풍을 헤치고 걷겠지만, 아들과 함께 돌아올 때의 차비는 꽁꽁 여퉈 놓으셨으리라.
 

 

조밭은 어쩐지 논이나 밀밭보다 풍요롭지 않게 느껴진다. 그러고 보니 암소도 비쩍 말랐을 것 같다. 시 전편에 쓸쓸한 가난과 시름겨운 유랑의 기운이 자욱하다. 어느 길손인가 이 적빈한 마을의 강가에서 돌 두어 개 모아 불 지피고 밥을 지어 먹고 지나갔구나. 노인도 청진 가는 길에 어느 길섶에서 밥을 지어 드시게 될 테다. 화자도 정처 없이 떠도는 중이었을 테다. 그런데 시 속의 ‘그 늙은이’는 어머니일까, 아버지일까? 어머니일 것 같다. 이 늙은이의 결기는 간절한 모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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