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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시인 - 폴 클로델
2017년 04월 19일 23시 35분  조회:5408  추천:0  작성자: 죽림

폴 클로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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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Claudel 01.jpg

폴 클로델 (Paul Claudel, 1868년 ~ 1955년) 은 프랑스의 외교관이자 시인이다.

북프랑스의 농촌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수학하고, 랭보를 비롯한 상징주의적인 근대시인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1890년 처녀희곡으로 서사시극 <황금의 머리>를 발표, 이후에도 <도시> <교환> <대낮에 나눈다> 신비극 <마리아에의 계시(啓示)> <인질> <비단구두> <크리스토프 콜롱의 서(書)> 등을 대표작으로 하는 30편이 넘는 극작품을 계속 발표했다.

그러나 이들 희곡은 1886년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에서 크리스마스 저녁기도때에 성령의 계시를 받은 후 열렬한 가톨릭 신자가 되었던 클로델에 있어서는 어디까지나 신을 찬미하는 노래였고, 시작과 마찬가지로 양식이나 제재에 있어서도 일상적인 척도를 초월한 것이었기 때문에 제1차 세계대전 후에도 좀처럼 상연되지 못했다.

그의 희곡이 지니는 연극적인 진가가 인정을 받게 된 것은 아주 근년의 일이며, 연극의 사명이나 전체연극의 발상이나 제전(祭典)을 위해 상연된다는 점 등과 연결되어, 오늘날에는 20세기 연극을 대표하는 프랑스 작가로 지목되기에 이르렀다. 외교관으로 세계 각지를 순회한 클로델은 동양의 연극에도 이해가 깊었다.

그는 시의 운율은 사람의 호흡에 따라야 된다고 주장하여 "클로델적 시형"을 만들었다.

/////////@@=덤으로 같이 알아보기=@@////////

카미유 클로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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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유 클로델.

카미유 클로델(프랑스어: Camille Claudel1864년 12월 8일 - 1943년 10월 19일)은 프랑스의 조각가이다. 시인이자 외교관인 폴 클로델의 누나이다. 1884년경 로댕의 아틀리에에서 조수로 일하게 된다. 이후 로댕과 연인의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카미유 클로델을 연기한 배우들[편집]

이자벨 아자니 - 1988년 까미유 끌로델 (1988년 영화)

쥘리에트 비노슈 - 2013년 까미유 끌로델 (2013년 영화)

같이 보기[편집]
까미유 끌로델 (1988년 영화)
까미유 끌로델 (2013년 영화)

 
출생 1864. 12. 8, 프랑스 빌뇌브쉬르페르
사망 1943. 10. 19, 아비뇽 근처 몽파베 몽드베르그 보호소
국적 프랑스

요약 클로델은 작품이 거의 남아있지 않는 조각가로, 오귀스트 로댕의 오랜 연인이며 그에게 영감을 준 인물이다. 가정교사의 가르침을 받아 정식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지만 10대에 이미 조각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당대 미술가들에게 재능을 인정받았다. 파리에 있는 콜라로시 아카데미에 들어가 초기 작품활동을 했다. 1883년경 로댕과 처음 만난 그녀는 곧 그의 제자이자 협력자, 모델, 애인이 되어 자신의 작품 제작외에도 로댕의 작품들에 삽입될 많은 조상을 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1893년 무렵부터는 독립하여 작업하며서 점점 세상을 멀리하게 되었지만, 공인된 미술전람들에는 작품을 계속 전시했다. 로댕과의 관계악화로 인한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다가 말년에는 강제로 정신병원에 수용되었고 그 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작품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오귀스트 로댕의 오랜 연인이며 그에게 영감을 준 인물로 더 알려져 있다. 시인인 동생 폴 클로델의 일기와 회고록은 그녀의 생애에 관한 많은 자료를 제공해준다.

5~12세에 그리스도 교리수녀회에서 공부했다. 가족이 노장쉬르센으로 이주한 뒤로는 가정교사가 클로델가의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때부터 그녀는 정식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지만 수많은 책이 갖추어진 아버지의 서재에서 여러 분야의 책을 읽었다. 10대에 이미 조각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당대의 미술가들에게 재능을 인정받았다. 1881년 아버지가 다시 직장을 옮기면서 가족과 함께 파리로 이주했다. 거기에서 그녀는 콜라로시 아카데미(지금의 그랑드 쇼미에르)에 들어가 평생 친구인 제시 립스컴(뒤에 엘보른으로 알려짐)을 만났다. 현존하는 초기 작품은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클로델과 로댕은 1883년에 처음 만난 것으로 보인다. 그뒤 곧 그녀는 그의 제자·협력자·모델·애인이 되었다. 그녀는 계속 자신의 작품을 제작하면서도 당시 로댕의 작품들, 특히 〈지옥문 The Gates of Hell〉 등에 삽입될 많은 조상과 그 일부를 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녀는 1888년 라폴리뇌부르에 있는 로댕의 작업실 근처로 숙소를 옮겼으나 1892년경 로댕과의 관계가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1898년까지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1893년경에는 독립하여 작업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녀는 끊임없이 일을 했지만 가난해지고 점점 세상과 등지게 되었다.

그녀는 때때로 작업실에 있는 모든 작품을 완전히 부수기도 했으나 공인된 미술전람회들(살롱 도톤과 살롱 데 앵데팡당) 및 뱅 화랑과 외젠 블로 화랑 등에 작품을 계속 전시했다. 로댕이 자신에게 부당한 처사를 저질렀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그와 그의 '무리'에게 학대를 받고 있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사람과 사회를 멀리하고 가족 가운데 유일하게 가까웠던 동생 폴과도 멀리 떨어져 살았으며 이러한 사정이 그녀를 더욱 짓눌렀다.

1913년 3월 10일 그녀는 강제로 빌레브라르의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 1914년 9월 몽드베르그의 정신병원으로 옮겨져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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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사랑 = 

거장 로댕 만난 19세 여제자…
공동작업하며 사랑 불태워...
명작 '사쿤달라' 탄생 밑거름 

결혼약속 불이행에 배신감…
정신착란 빠져 불행한 말년



나의 사랑, 그대를 보지 않고는 하루도 살 수 없다오. 그럴 수 없다면 끔찍한 광란이 있을 뿐이오. 나는 더 이상 작업할 수 없다오. 얄미운 당신. 그렇지만 미치도록 당신을 사랑하오…당신의 모습을 매일 볼 수 있게 해주오. 오직 당신의 관대함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다오. 

스물네 살 연하의 제자를 사랑하게 된 조각가 로댕(1840~1917)의 눈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1883년 친구 알프레드 부셰가 로마로 떠나면서 맡긴 조각 레슨에서 처음 만난 카미유 클로델(1864~1943). 이 19세의 조숙하면서도 매혹적인 제자에게 로댕은 완전히 백기를 들고 말았다. 클로델이 없는 생은 무의미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는 순식간에 사랑의 늪에 빠져들었다. 

로댕은 사랑하는 제자와 함께 있는 시간을 더 늘리고 싶은 나머지 이듬해 클로델을 ‘지옥의 문’ 제작을 위한 조수로 고용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것이 불행한 사랑의 출발점이 되리라는 것을 알 턱이 없었다. 둘은 또 다른 지옥의 문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로댕은 클로델로 하여금 제작을 보조하는 업무뿐만 아니라 모델을 서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눈부신 아름다움을 영원히 돌 속에 고정시키고 싶은 조각가로서의 본능에 따른 것이었다. 클로델의 솜씨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을 거듭했고 로댕은 그런 제자에게 작품의 중요한 부분을 직접 제작하도록 맡겼다. 둘의 작품은 누구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뒤섞여 버렸다. 물론 두 사람의 몸과 마음도 분리할 수 없는 일체로 나아가고 있었다.  

만난 지 3년이 되던 1886년 로댕은 클로델에게 6개월간의 이탈리아 여행을 끝낸 후 아내로 맞이하겠다는 맹세를 담은 편지를 보낸다. 복잡한 여자관계로 유명했던 로댕이 이 깜찍한 제자에게 얼마나 푹 빠져 있었는지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로댕의 명작 ‘키스’(1886)와 클로델 최고의 명작으로 프랑스 예술인 상을 수상한 ‘사쿤달라’(1888)는 이 시기 두 사람의 사랑이 이뤄낸 값진 예술적 결실이다. 

그러나 결혼을 약속한 두 사람 사이는 1892년을 전후해 점차 파국으로 치달았다. 로댕은 이 드세고 독점욕이 강한 여인에게 점차 부담을 느꼈고 클로델은 결혼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로댕에 대한 반감을 점차 키워 나갔다. 가장 큰 걸림돌은 로댕과 20년 넘게 동거 관계를 지속하고 있는 로즈 뵈레라는 여인이었다. 로댕이 결코 이 여인과 갈라서지 않으리라는 점을 감지하면서 클로델의 질투는 증오심으로 변해갔다. 클로델은 그런 격분의 감정을 자신의 작품에 쏟아부었다. 그럴수록 로댕은 이 여인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고 사랑의 감정도 식어갔다.

둘은 더 이상 함께 작업하지 않음은 물론 다시는 서로 얼굴을 마주치지 않는다. 클로델은 로댕에 대한 배신감에 치를 떨었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함으로써 로댕에게서 독립하려 했다. 그러나 로댕은 소리 없이 클로델의 독립을 지원했다. 후원자를 물색, 클로델에게 주문하도록 유도했다. 그러나 이런 선의는 되레 클로델이 로댕의 ‘판박이’라는 입방아를 부추겼고 클로델의 분노를 더욱 키울 뿐이었다. 그는 로댕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배신감과 증오심을 담아 ‘중년’이라는 작품을 제작한다. 한 중년 남자가 무릎 꿇고 애원하는 젊은 여인을 뿌리치고 나이 든 여인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담은 작품이었다. 누가 봐도 로댕과 뵈레를 풍자한 것이 분명했다. 정부는 당시 이미 거물이 된 로댕을 의식, 작품 구매를 거절했다. 

다행히 클로델은 나름대로 인정받기 시작했고 아르튀르 드 매그레 백작부인 같은 든든한 후원자도 만난다. 독립의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행운은 오래가지 않았다. 1906년 그를 재정적으로 뒷받침해주던 남동생 폴 클로델이 결혼과 함께 중국으로 떠나버리자 깊은 좌절감에 빠진다. 이때부터 클로델은 자신의 작품들을 파괴하고 작업실에 칩거한다. 그런 가운데 정신착란의 독버섯이 거침없이 자라났다. 그는 로댕이 자신을 살해하려 한다는 망상의 포로가 되고 만다. 화상 외젠 블로가 그를 도우려 했지만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클로델의 마음을 되돌리기에는 때가 늦었다.  

1913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평소 클로델의 처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어머니는 그를 정신병원에 유폐시킨다. 외교관이었던 폴 클로델도 자신의 앞날에 누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는지 누이의 감금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렇게 클로델이라는 천재는 주변의 몰이해와 무심한 세월속에 잊혀져갔다. 한때의 사랑이 가져온 결과치곤 너무나 참혹하지 않은가.  
 

사랑이 없으면 미움도 없다. 사랑이 없으면 증오도 없다. 둘은 어쩌면 종이 한장 차이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종이 한장 차이가 극과 극의 결과를 가져온다. 때로 그것은 행복과 비극의 갈림길이 된다. 클로델은 증오의 강을 너무 깊게 판 나머지 자신의 육신마저 가둬버린 비련의 주인공이 됐다. 클로델은 ‘비극의 터널’에서 영영 빠져 나오지 못했지만 그 속에서 탄생한 작품들은 1980년대 이후 재평가받아 다시금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다. 그의 비극적 삶을 보면서 인생은 짧지만 예술은 영원하다는 진리를 새삼 되새기게 된다. 

/한국경제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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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40년 11월 12일, 프랑스 파리
사망 1917년 11월 17일, 뫼동
국적 프랑스

요약 웅대한 청동상과 대리석상으로 유명하며, 조각사에서 가장 뛰어난 초상 조각가로 평가된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로댕은 13세에 미술학교에 들어가 드로잉과 모형제작을 배웠다. 1880년 파리와 브뤼셀의 살롱 전에서 인정을 받으면서 40세의 나이에 조각가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당시 파리에 세워질 장식미술관에 놓기 위해 의뢰받아 제작한 <지옥문>은 미완성인 채 남겨졌지만, 그중에는 그의 역작인 <생각하는 사람>, <입맞춤>이 들어 있다.

로댕(Auguste Rodin)
로댕(Auguste Rodin)

프랑스의 조각가이다. 근대 조각의 시조이며, 근대 조각 사상 가장 위대한 조각가이다.

개요

웅대한 청동상과 대리석상으로 유명하며, 조각사에서 가장 뛰어난 초상 조각가로 평가된다.

당시 파리에 세워질 장식미술관에 놓기 위해 1880년에 의뢰받아 제작한 〈지옥문 La Porte de l'Enfer〉은 미완성인 채 남겨졌지만, 그중에는 그의 유명한 역작인 〈생각하는 사람 Le Penseur〉(1880)·〈입맞춤 Le Baiser〉(1886)이 들어 있다. 초상 조각들로는 빅토르 위고와 오노레 드 발자크의 기념상들이 있다.

입맞춤(Le Baiser)
입맞춤(Le Baiser)

1886년 로댕의 작품

초기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로댕은 13세에 미술학교에 들어가 드로잉과 모형제작을 배웠다.

17세 이후 에콜 데 보자르 입학시험에 3차례나 떨어지자, 그 다음해(1858) 석조 장식일에 종사하기로 결심했다. 1862년 누이인 마리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수도사가 될 생각까지 했지만, 1864년 재봉사인 로즈 뵈레를 만나게 되면서 결국 그녀와 일생을 같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식 결혼은 1917년 2월 그녀가 죽기 몇 주 전에야 이루어졌다.

로댕은 조각가 A.E. 카리에 벨뢰즈 밑에서 일하며 1864년 처음으로 살롱 전에 〈코가 이그러진 남자 L'Homme au nez cassé〉를 출품했으나 거절당했다.

초기 작품으로는 뵈레를 모델로 조각한 여러 점의 습작도 있다. 1871년 카리에벨뢰즈와 함께 브뤼셀에 가서 공공기념물을 장식하는 일을 맡았으나 카리에벨뢰즈에게 해고당했다. 얼마 후 청동장식물 만드는 일자리를 다시 찾았고, 로즈 뵈레도 브뤼셀로 와서 그와 함께 살았다.

1875년 35세가 되도록 장식일에만 쫓겨 독자적 표현양식을 개발하지 못한 그는 이탈리아(제노바·피렌체·로마·나폴리·베네치아) 방문을 계기로 비범한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특히 미켈란젤로와 도나텔로에게서 감명을 받고 브뤼셀로 되돌아온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경험한 아카데미즘에서 벗어난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첫 작품이 바로, 다시 태어나려는 활력을 정복당한 고통을 표현한 청동상 〈정복당한 자 Le Vaincu〉이다. 이 작품은 처음에 브뤼셀의 미술계에서, 그리고 1877년 파리 살롱 전에 〈청동시대 L'Âge d'Airain〉라는 제목으로 전시되면서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청동시대(L'Âge d'Airain)
청동시대(L'Âge d'Airain)

1875-1876년 로댕의 작품

이 작품은 당대의 다른 조각상들과는 대조적으로 매우 사실적인 표현 때문에, 살아 있는 사람 몸에 틀을 떠서 만든 것이 아니냐는 비난을 받았다.

1877년 파리로 돌아와, 1879년부터 세브르 자기(瓷器)공장의 공장장이 되어 있는 옛 스승 카리에벨뢰즈의 부탁으로 자기 도안을 맡았다. 그러면서 런던과 파리에 세워질 기념비 제작에 여러 차례 응모하여 실패했으나, 마침내 파리 시청의 조각상 제작을 의뢰받았다. 한편 〈설교하는 세례자 요한 St. Jean-Baptiste prêchant〉(1878)에서 자신의 독창적인 양식을 개척했으며, 1880년 파리와 브뤼셀의 살롱 전에서 이 작품과 〈청동시대〉가 인정을 받으면서 40세의 나이에 조각가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성숙한 작품으로의 발돋음

대부분의 작가들이 이미 많은 작품을 완성했을 나이에 로댕은 겨우 자신의 예술 세계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는 정부로부터, 그 당시 세워질 파리 장식미술관의 청동문 제작을 의뢰받자 2개의 작업실을 차렸으며, 작업 대금을 선불로 받아 재정적으로 안정되었다. 그는 약속한 1884년까지 완성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1917년 그가 죽을 때까지도 결국 완성하지 못했다. 그 문은 주제를 단테의 〈신곡 Divine Comedy〉에서 따왔기 때문에 〈지옥문〉이라 불리게 되었다.

지옥문(La Porte de l'Enfer)
지옥문(La Porte de l'Enfer)

처음의 구상은 15세기 이탈리아의 조각가 로렌초 기베르티가 피렌체 성당에 세운 〈천국의 문 Gates of Paradise〉에서 따오려 했던 것이나, 1881년 화가 알퐁스 르그로의 초청으로 런던을 방문하면서 그 계획이 크게 바뀌었다. 로댕은 영국에서 단테의 영향을 받은 라파엘 전파(前派)의 많은 회화와 소묘들, 특히 윌리엄 블레이크의 환상적인 작품들을 보고 그 영향으로 사랑·고통·죽음에 괴로워하며 몸부림치는 인간군상들을 보여주기로 작품방향을 바꾸었다.

이 미완성의 작품은 커다란 네모틀 안에 독립적으로 제작된 인물상과 군상들을 짜맞추어 만든 것으로서, 그 가운데는 유명한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이것은 원래 문의 윗부분에 놓여질 단테의 좌상으로 구상된 것이었다.

1884년에는 칼레 시로부터 기념물 제작을 의뢰받았다.

그것은 1347년 1년간의 포위공격으로 굶주림에 허덕이던 그 도시를 구하기 위해 영국의 에드워드 3세에게 스스로 볼모로 잡혀간 시민들의 희생을 추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2년 안에 완성된 이 〈칼레의 시민 Les Bourgeois de Calais〉은 1895년에야 비로소 헌정되었으며, 1913년에는 당시 영국의 왕비가 남편 에드워드 국왕을 설득하여 그 영웅들에게 관용을 베풀도록 중재한 것을 기념하여 런던의 국회의사당 정원에 이 작품을 청동으로 떠서 세웠다.

로댕의 명성은 올라갔으나, 그의 무절제한 사생활로 인해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잇달았다.

1885년쯤 그는 시인 폴 클로델의 재능있는 누이이며 자신의 제자인 카미유 클로델과 연인이 되어 잦은 말다툼을 하면서도 연애를 했지만, 결국 1898년 카미유가 미치면서 그들의 연애도 끝났다. 순식간에 프랑스인들의 관심을 모은 그들의 애정은 매우 열렬했으며, 로댕은 그 기간에 욕망으로 시달리는 연인상을 많이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감각의 〈입맞춤〉은 원래 〈지옥문〉을 위해 구상한 파올로와 프란체스카 상(像)으로서 그의 걸작으로 평가되기도 하는데, 이 작품으로 로댕은 수많은 추문에 휘말렸다.

대립과 성공

그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로댕은 국립미술아카데미인 프랑스 학술원과 일반대중, 심지어 국회와도 자주 충돌했다.

그는 10년을 바쳐 풍경화가인 〈클로드 로랭 Claude Lorrain〉·〈아르헨티나 대통령 도밍고 사르미엔토 President Domingo Sarmiento of Argentina〉·〈빅토르 위고 Victor Hugo〉·〈오노레 드 발자크 Honoré de Balzac〉 등 4점의 기념상들을 제작했으나, 모두가 비평가들의 심한 공격을 받았다.

〈클로드 로랭〉은 프랑스 낭시에서, 〈아르헨티나 대통령 도밍고 사르미엔토〉상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각각 큰 소동을 야기시켰고 〈빅토르 위고〉와 〈발자크〉는 훨씬 더 심한 충돌을 낳았다. 1886년 그는 프랑스의 위인 기념관인 팡테옹에 위고의 기념비를 만들어달라는 주문을 받고, 나체상을 제작하려 했으나 큰 물의를 빚게 되자 그 계획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09년에 나체상이지만 앉아 있는 〈빅토르 위고〉가 뤽상부르 공원을 위해 만들어졌으나 결국 팔레 루아얄 미술관에 놓여졌다.

1891년 로댕은 저술가 협회로부터 발자크상을 의뢰받고 여러 개의 발자크 초상화를 조각으로 옮기는 대규모 작업에 몰두했는데 그는 발자크가 다니던 양복점에 가서 고인의 정확한 신체 치수까지도 알아냈다. 그는 조각상에 어울리는 자세를 잡느라고 온갖 상상과 실험을 거친 뒤, 마침내 옷을 반쯤 걸친 발자크의 모습을 구상해냈다. 간결하게 구상된 이 조각의 원형은 선사시대의 유물인 멘히르 또는 수직 석제대(石祭臺)와 닮았으며, 현대미술의 간결함을 앞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작업이 늦어지고 조각상의 구도가 드러나자 저술가 협회는 그를 법적 소송에 걸었다. 1898년 그 원형이 국립미술협회전(展)에 선보여 격렬한 논쟁을 야기시켰을 때, 후에 총리가 된 조르주 클레망소가 나서서 그를 도와주었다. 결국 로댕은 저술가협회에 손해배상을 해주고 그 원형을 철회했다.

그 발자크 초상은 1939년에야 비로소 청동으로 주조되어 파리에 있는 몽마르트르 네거리에 세워졌다.

1900년 파리 세계박람회에서는 로댕의 조각 150점과 수많은 드로잉들이 특별 전시되어 그의 국제적인 명성을 증명했으며, 전시되었던 작품들은 1896년에 그가 뫼동에 사 두었던 집으로 옮겨졌다. 그의 집은 그의 제자들과 조수들로 붐비는 거대한 작업장이 되어 로댕은 조각가라기보다는 차라리 조각 청부업자에 가까웠다.

그 자신은 마음에 드는 형태를 찾느라고 오로지 원형만을 수없이 만들었다. 청동 주조를 전문가들에게 맡겼을 뿐 아니라 대리석의 절단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자신은 지휘만 했다. 산업 공장과도 같은 이 작업장에서는 짧은 기간이기는 하지만 오스트리아 시인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등 여러 사람의 비서들이 그를 보조했다.

1900년 이후로 로댕은 세계적으로 알려지면서 미국·독일·오스트리아·영국·프랑스 등에서 흉상 제작 의뢰가 쇄도했고, 특히 영국에서 아주 유명해 많은 영국 친구들을 사귀었고 그곳을 자주 방문했다.

1902년 그를 축하하는 런던의 한 연회장에서는 학생들이 대대적으로 환호했다. 그는 1907년 런던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에 세운 시인 윌리엄 헨리 기념상 개막식에 참석했고 프랑스 작곡가 카미유 생 상스,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 등과 함께 옥스퍼드대학의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1908년 5월에는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가 직접 뫼동의 작업실을 방문했다.

당시 로댕은 커다란 정원에 둘러싸인 18세기 파리풍의 아름다운 비롱 저택의 한 층을 빌려쓰고 있었다.

이때 프랑스 정부는, 이 저택을 로댕 박물관으로 만드는 조건으로 로댕의 전작품을 기증할 것을 제의했고 로댕은 이에 동의했다. 그후, 그의 마지막 추종자인 미국인(나중에 슈아쇨 공작부인이 됨)의 이기적인 음모로 이 협상이 위기에 빠지게 되었으나 그의 연대기 편집자이며 이 협상의 성공을 위해 활동한 주디트 클라델과 그의 유산을 노리는 여자들을 막아내기 위해 노력한 마지막 비서 마르셀 티렐의 도움으로 결국 성사되었으며 1916년 저택을 양도받고 작품들을 기증하였다.

이 미술관은 자치기관으로서 로댕이 남겨놓은 석고 주형에서 떠낸 주조물을 팔아 유지하고 있다. 로댕의 장례식 날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에서는 그를 추도하는 엄숙한 추모식이 치러졌다.

로댕은 일생 동안 조각 외에도 책 삽화와 드라이포인트, 동판화, 여인의 누드 드로잉 등을 많이 남겼다. 또한 문학적 자질이 있어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여러 편의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특히 중세 미술에 심취했으며, 주요역작으로는 〈프랑스의 대성당들 Les Cathédrales de France〉(1914)이 있다.

로댕에 대한 평가

20세기초에 로댕은 전세계에 널리 알려져 현대의 미켈란젤로이자 조각의 거장 또는 비범한 천재성의 화신으로 오랫동안 추앙받았다.

그의 유별난 여성 편력조차 뛰어난 재능의 상징으로 용납되었다. 그러나 그후 70~80년이 지난 근대에는 그에 대한 평가가 이전처럼 한결같지는 않아 어떤 비평가는 로댕의 작품에서 장식조각가로서의 경력이나 전문적 수업의 결여를 드러내는 요소가 있음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후대의 조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여러 나라 출신의 수많은 제자들을 통해 그의 조각양식은 널리 퍼졌다. 그의 작품은 특히 샤를 데스피오와 아리스티드 마욜, 에밀 부르델 등의 프랑스 조각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대부분의 주요미술관들마다 그의 복제품들이 소장되어 있으며, 파리·필라델피아·도쿄[東京]에는 로댕 미술관이 있다. 로댕의 주요한 업적이라면 서양 조각의 근본적인 힘이 되어온 인체에 대한 지식과 그 풍부한 묘사를 되살려 놓은 데 있다. 〈조지 버나드 쇼 George Bernard Shaw〉나 〈니진스키 Nijinsky〉와 같은 작품들은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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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혀진 집 / 폴 클로델

 

  땅은 이제 몇 줄의 모래에 불과하며 당신이 지으신

하늘만이 항상 가림 없이 눈에 보이는 이 땅 끝으로 저를

인도하신 하나님.

 

  그들의 말도 모르는 제가, 이 미개한 백성들 가운

데서

 

  저의 처나 자식과 똑같은 모든 사람들, 저의 형제들

을 잊게 하지 마옵소서.

 

  천문학자가 뛰는 가슴으로, 마치 교태의 여인이 거울

속 자기 모습을 들여다보듯,

 

  감동된 호기심으로 화성(火星)의 모습을 살피며 측성기(測星器)

앞에서 밤을 새는데,

 

 저에게는 작은 당신의 아들이 얼마나 더 소중한 것입니

까?

 

  가장 작은 당신의 아들이 얼마나 더 소중한 것입니

까?

 

  자비는 너무 많이 가진 것을 무심히 내주는 일이 아

니라 학문과 같은 정열입니다.

 

   자비는 학문과 같이 당신이 지으신 이 가슴 속에서

당신의 모습을 찾는 발견입니다.

 

  당신의 모든 성신(星辰)이 저에게 필요하다면 저의

모든 형제들은 얼마나 더욱 필요할 것입니까?

 

  당신은 저에게 먹여 살려야 할 빈자(貧者)도, 고쳐

주어야 할 병자도 주지 않았습니다.

 

  나누어야 할 빵을 주시지 않았고 저에게는 빵과 물로

다도 더욱 온전하게 받아들여진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

고 영혼 가운데에 용해(溶解)될 영혼을.

 

  제가 이 말씀을 저의 맘 속에 있는 가장 좋은 것으로

열매 맺게 하소서, 땅이 있는 곳에는 어디서나(길 가운데

떨어진 이삭까지) 계속 자라게 하는 수확(收穫)과 같이.

 

  그리고 맺은 열매로부터 명예나 이익을 바라지 않고

오로지 가능한 열매를 내주는 성스러운 무지(無知) 속의

나무와 같이.

 

  각자는 자기가 가능한 것을 줍니다; 어떤 사람은 빵

을, 다른 사람은 빵의 씨앗을 줍니다.

 

 

우상들을 멀리하여 / 폴 클로델

 

 

   축복받으소서, 나의 하나님이시여, 저를 우상들에게

서 구원하시고,

   이시스나 오시리스 신이 아니며

   정의나 진보, 진리나 성물(聖物) 또는 인류나

자연의 법칙 혹은 예술이나 미(美)가 아니라

   당신만을 경배하게 하신, 나의 하나님

   당신은 있지도 않은 이 모든 것들, 또는 당신의 부재(不在)

로 생긴 허무를 존재하도록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작은 목선을 짓고 남은 목재로 아폴론 상(像)

을 만든 미개인(未開人)처럼

   이 모든, 말하기 위해 말하는 자들은 남아 도는 형용

사들로 실체 없는 괴물들을 만들었습니다.

   이 괴물들은 어린애들을 잡아 먹는 몰로크 신보다도

더 실체가 없고 그 몰로크 신보다도 더 잔인하고 끔찍스

러운 것입니다.

   이들은 소리는 가지고 있으나 목소리는 없으며 이름

은 가졌으나 인격은 없습니다.

   그리고 불결한 정신이 거기 있으나 목소리는 없으며 이름은

가졌으나 인격은 없습니다.

   주여, 그대는 저를 책과 사상과 우상과 그것들의 사

제(司祭)들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이스라엘이 우상 숭배자인 에페니메

족속의 속박 아래 당신을 섬기게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당신이 죽은 자들의 신이 아니라 산 자들의 신

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결단코 유령들과 꼭둑가시들을 숭배하지 않을

것입니다. 디아나 여신도 의무도 자유도 아피스 황소도

   그리고 그대들의 '천재들'과 그대들의 '영웅들', 그대

들의 위인들과 그대들의 초인들도.

   저는 이 모든 변형자(變形者)들에 대하여 똑같은 혐

오를 가집니다.

   그것은 저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실재하는 사물 가운데 존재하며 이 사

물들로 하여금 저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를 갖도록 합

니다.

   저는 어떤 것보다 우월하길 원치 않으며 다만 바른

사람,

   그대 온전하심같이 따르기를, 다른 실재하는 정신

가운데서 바르고 생기 넘치기 원합니다.

   저들의 지어 낸 이야기가 무슨 소용입니까? 다만 저

로 하여금 창가로 가 밤을 열게 하시고 저희 두 눈에 하

나의 동시적(同時的)인 숫자가 나타나게 하소서

   저의 필요성이 계수(係數) 1의 수(數)뒤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0(零)의 숫자들을!

 

 

폴 클로델(1868~1955): 

폴 클로델은 일생을 거의 외교관으로 일하면서 문학사에 남는 많은 시, 연극, 평론 등을 써낸 드문 외교관 작가이다. 그가 얻은 작가로서의 큰 영광은 대부분 그의 연극 작품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강렬하고 종교적인 시들도 우주적인 깊은 뜻과 신비로운 사상-독창적인 시법으로 당대에도 시단의 거성(巨星)이었으며 현대의 저명한 몇 시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클로델은 샹파뉴 지방의 한 지방 공무원의 경건한 카톨릭 가정에서 태어났다. 14세 때 가족과 함께 파리로 이사했으며 유명한 루이 드 그랑 중고등 학교에서 공부했다. 이 때부터 이미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파리 대학에서는 법학 공부를 정치학 대학에서는 정치학 공부를 했다. 1890년 그가 22세 때 프랑스 외무성 외교관 채용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외교관이 되었다. 이후 약 40년간 그는 미국-중국-일본-유럽-남미 등 거의 전세계에 걸쳐 영사-공사-대사로 일하며 외교적으로도 활약한 바 적지 않았으나 도리어 문학계에 있어서 그는 더욱 찬란한 작품들을 남기었다. 그의 명성은 프랑스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떨치었다.

  그의 작가로서의 창작 활동도 연극 작품과 시 작품으로 나뉘는데 그는 이미 1890년 이전 외교관이 되기 전부터 연극 <황금의 머리(1889)>, <도시(1890)> 등을 썼고, 외교관으로 유럽-남미 재국-일본-워싱턴에 근무하는 동안 그의 주요 작품을 완성하였다. <인질>,<마라아에게 주어진 계시> <굳은 빵>, 그리고 그의 대표작 <사탄 천의 신발(1920)> 등이 출판되고 상연됨으로써 그는 위대한 사상가-작가로 추앙받았다.

 시인으로서의 클로델의 창작 활동은 주로 그가 극동 지방에서 체재한 1895년에서 1909년에 이르는 14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그는 이 동안 중국의 상해-복건-북경-천진 등과 일본에 영사로 있었는데 당시 이국 만리 타향에서 고독과 신앙의 명상 가운데 많은 중요한 시를 썼다. <5대송가>, "두 편의 여름의 시" "3성(聲) 칸타타" 등이다. 이 외에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쓴 "전쟁 시집"과 "성도의 나뭇잎" 등이 있다.

 1936년 주 벨기에 대사를 끝으로 40 여년의 외교관 생활을 은퇴한 그는 만년에는 시골에 있는 그의 소유지에서 주로 성경의 연구-해석과 주석에 정열을 쏟았다. 그러나 이 저작들은 신학자로서의 학문적인 것이 아니라 시인으로서의 서정적이며 신비적인 것이었다. <현존과 예언>, <묵시록> 등이 있다.

 1946년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피선되었고, 1952년에는 그의 <사탄 천의 신발>이 100회 공연이 있었다. 1955년에는 파리의 국립 극장에서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이 늙은 시인-극작가에게 최후의 경의를 표하기 위해 공화국 대통령 임석하에 <마리아에게 주어진 계시>의 특별 공연이 있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클로델은 86세를 일기로 영광과 추앙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시인으로서의 그에게 결정적 영향을 준 두 가지의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1886년 그가 20세 때 랭보를 발견한 일이며 또 하나는 같은 해 크리스머스 전날 밤 그가 우연히 파리 노트르담 성당에서 경험한 신비로운 충격이었다.

 19세기 후반 사상계에서는 물질주의와 기계주의가, 문학계에서는 자연주의가 지배하던 때에 소년기의 신앙을 잃은 쿨로델은 허무적이며, 부도덕하고, 생의 목적을 찾지 못하였다. 이 때에 그는 랭보의 <일뤼미나시옹>과 <지옥의 계절>을 읽고 나서 처음으로 진리의 빛을 보았고 물질주의의 수용소에서 벗어나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분명하고 거의 물리적인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또 한 가지는 이 해 크리스머스 전날 밤 그는 성탄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노트르담 성당에 갔다. 믿음에서가 아니라 일종의 호기심에서였다. 교회 내진(內陳)에 다른 신도들과 함께 서 있었고 합창단 어린이들이 성모 찬가를 부르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그의 가슴은 무엇에 접촉되고 자기가 신의 영원한 아들이라은 것을 느꼈다. 자신의 전존재가 공중으로 실려 올라감을 경험했고, 이 순간 그는 믿음을 얻었다. 이 믿음은 확실하고 강력하여 그 후 일생 동안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는 마치 다메섹으로 가던 바울의 회심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러므로 클로델의 중심 사상은 현존한 사물 가운데 초자연적인 것을 보는 것이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결합을 깨닫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세계는 보이는 것 만으로는 혼돈과 우연의 연속뿐으로, 보이지 않는 것으로 받쳐질 때 비로소 현실성과 참뜻을 가지게 된다고 믿는다. 그에게 있어서 보이지 않는 것의 실체는 신으로서 신 없는 세계는 불완전할 뿐 아니라 그 때에 세계는 무산될 것이며 무의미하며 허무뿐이라고 했다.

  따라서 그에 있어서 시는 은총의 행위이며 신에 대한 기도, 우주를 창조한 신의 영광을 노래하는 끝없는 기도가 되었다. 그러므로 그의 시는 전통적인 시형이나 운율을 쫓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리듬, 자연과 정신의 맥박과 호흡을 쫓아 세계와 인간과 신의 리듬을 기록하는 소위 클로델 시절(詩節)이 있을 뿐이다.

 그에게 있어서 시와 믿음은 완전히 일치되어 있으므로 그는 "시인은 신의 모방자이며 시는 창조의 모방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의 시는 시형의 단조로움-자기 도취-판단의 조잡하고 난폭함-저속한 취미 등 많은 흠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만이 가질수 있는 우주적인 통찰력, 강력하고 진실된 독창성, 지성이나 기교를 넘어선 천재적인 서정성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뜻에서 많은 사람은 그를 프랑스 낭만파의 거성(巨星) 빅토르 위고와 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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