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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적 이미지는 눈부신 은유의 창고이다...
2017년 07월 24일 04시 03분  조회:2360  추천:0  작성자: 죽림

소통, 그 은유의 불빛들

김수우(시인)


1

눈, 그것은 눈이었다. 아니, 눈빛이었다.

빈 나뭇가지에 꽃이삭처럼 조롱조롱 눈들이 걸려 있었다. 수많은 눈빛들이 나를 보고 있고, 그 깊은 눈동자마다 내가 서 있었다.

거미줄에 갇힌 듯 나는 꼼짝없이 서서 그 우물 속의 내 모습들과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단풍잎 한 장이 날아왔다.

그 바람결에 수많은 내가 흔들렸다. 무수한 내 영혼이 모두 출렁였다. 와르르, 어디선가 쏟아지는 웃음소리.
꿈이었다. 그 날은 종일 안개가 깊었고, 은회색 들길을 걷다가, 온몸에 물방울이 피어난 빈 나무 한 그루를 보았다.

나뭇가지를 타고 송송히 열린 물방울이 유난히 투명하더니, 그런 꿈을 꾸었다. 어쨌건 내 몸이 몽땅 젖어버린 느낌. 내가 만난 한 세계가 내 속에서 또다른 세계를 만들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 경이로움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무를 바라보는 동안 나무도 나를 오래 바라보았음이 틀림없으리라.

작은 나무가 보여준 그 은유의 세계. 결국 꿈은 소통으로 가는 긴 터널이던가.
왜 태어나, 왜 늙으며, 왜 아프며, 왜 죽을까. 그 다음의 싯달타의 고뇌는 무엇이었을까. 그건 아마 '어떻게 말할까'가 아닐까.

아니, 싯달타의 모든 고뇌 자체가 자신과의 소통을 향한 의지였으리라. 소통이 될 때 우리는 삶도 죽음도 이해할 수 있으니까. 그 다음에야 희망을 낳을 수 있으니까.

바벨탑이 무너진 후, 인간이 추구해온 것은 소통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해야 했기 때문이다. 어눌한대로 대답을 하자.

답은 없다고, 모든 대답은 자의적인 것이라고 미루어두기에는 우린 참 슬픈 족속이므로. 세상의 모든 답은 바로 '그대'이다.

그대는 '희망' 자체니까. 그리고 희망은 '이미지'로 존재한다.


2

수많은 질문을 이미지로 열며 내게 다가온 시. 그건 항상 어느 순간, 강렬한 빛으로 내 뒤통수에 닿았다가 돌아보면 청보라빛 노을로 가뭇없이 서산을 넘는 중이었다.

그 이미지들을 언어로 살려야 하는 시인들의 절박함을 나는 사랑했던가.

문득 곁으로 달려온 존재들의 눈빛들과 부딪친다는 건 하나의 희열이고 절망이고, 절망이면서 희망이었다. 사진도 그랬다.
렌즈를 통해 세계를 들여다보는 사진과 영화는 여러 면에서 시와 닮았다.

표현에 앞서 더 본질적으로 사진과 영화의 문법은 시적 사유와 맞닿아 있다.

방치된 대상에게 언어로 그 존재의미를 회복시키는 작업과, 렌즈를 통해 포착한 대상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의미부여 작업은 동일하다.

표현도구는 다르지만 표현양식은 결국 이미지라는 점도 그렇다. 때문에 시인의 눈과 카메라의 눈은 매우 유사하다.

둘다 섬세하고 자유롭게 무한한 내포를 담아 삶의 중층성을 그려내는 눈동자들이다.

버려진 나무토막이 언어나 렌즈를 통해, 갑자기 살아 푸른 숨을 내쉬는 은유가 되어 세상을 건너가는 다리로 놓이는, 그 놀라움. 
브레쏭의 사진에서 보이는 도심의 뒷골목, 고양이와 한 부랑자의 소통과 소외. 그것은 꿈의 통로처럼 보인다. 쓸쓸하면서도 내밀한 언어가 들린다.

사방으로 이어진 골목, 그래, 우린 어딘가로 이어질 수 있으리라,

아주 조심스런 아우라에 붙들린다. 한 장 종이에 인화된 그 시간의 명암과 질감이 전달하는 삶의 강한 실체. 무심한 일상은 파인더 속에서 비로소 존재의 실루엣을 확연히 드러내며 말을 건넨다.

얼마나 많은 아름다움과 절망과 구원이 은유의 세계로 확장되어 드러나는가. 
카메라 파인더 속에서 어떤 대상과 부딪칠 때 나는 면회를 신청한 한 수감자의 애인처럼 서글프면서도 그리웁고 고마운 마음이 된다. 소통에서 오는 다행스러움 때문인지 삶이 더 간절해진다.

사진을 찍는다는 건 대상이 건네는 눈빛을 따라가다가, 숨겨진 원시의 늪에 닿은 듯 가슴떨리는 신비다.

영화도 마찬가지, 카메라 앵글 속에 있는 거대한 눈동자들에 비친 세상은 분명 일상이면서,

일상이 아닌, 현실이면서 현실이 아닌, 은유의 세계를 보여준다. 꿈이야기를 해보자.

꿈이 가진 무의식적 이미지는 상상계의 큰 바탕이며, 수많은 소통의 음성이며, 눈부신 은유의 창고이다.
어떤 함축이 무한한 내포를 지니거나, 어떤 여백이 낭만적인 서정으로 넘칠 때 우리는 '시적'이라고 한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꿈}은 8개의 에피소드로 나뉜 꿈의 파편들로 매우 시적인 영화라 할 수 있다.

여든에 만든 구로사와의 마지막 작품인 {꿈}은 매우 일본적이며 자연주의를 표방하는 비현실적 이미지로 구성된다.

유년의 동화적인 이미지부터 묵시론적 악몽이 포함되어 있는 이 작품은 경이로운 이미지와 상징들로 가득하다.

현실원칙과는 다른 논리의 지배를 받는 꿈을 통해 재창조된 세계가 두렵고도 아름답게 펼쳐지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꿈인 <여우비>와 <복숭아밭>, 고호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 금빛 보리밭 위로 날으는 까마귀떼를 보는 <까마귀>는 시각적 이미지의 정수를 보여준다.

또한 극적 구조를 초월하고 절제된 이미지로 구성된, 자연주의 세계관은 슬프고 기이하기까지 하다. 은유 속에 작용하는 동일화도 있지만 비논리적으로 뒤섞인 은유를 통해,

{꿈}은 일상이 삼킨 우리의 본래를 드러냄과 동시에 인식의 한 영역을 흔들어대는 것이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인간이란 꿈을 꿀 때 천재가 된다고 말한다.

꿈은 과감하고 대담무쌍하게, 천재적인 기술로 희망을 표현해낸다.

한 사람의 꿈은 사실 사람들 모두의 꿈이 된다. 그것이 꿈의 힘이며, 마음 밑바닥에 있는 세계의 무한함일 것이다.

결국 꿈이란 삶의 신비를 드러내는 하나의 암시이며, 인간은 그 상상력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명시적이든 잠재적이든 상상계를 구성하는 꿈은 일상을 개별성의 세계로, 다시 진정한 보편적 우주를 획득하는 공간으로 확장시킨다. 그리하여 삶의 이미지는 더 깊어진다.

바람의 길 위에서, 떠도는 푸른 깃털들을 만났습니다. 길 떠나기 전 그대들의 옛집이 어디냐고 물어 보았더니
모두들 하나같이 대답하더군요. 죽은 청호반새가 우리들 옛집이었다고.
―최승호, [떠도는 깃털들]

방안의 쥐구멍으로 들어갔더니 어릴 때 놀던 학교운동장이 나온다던가,

 큰 구렁이와 엉겨 놀다가 책꽂이 속으로 걸어 들어가던 어릴 적 꿈은 위 시의 푸른 깃털을 보는 시인의 자연적 깨달음에도 연결될 수 있으리라.

 내가 출발한 곳은 어디일까.

죽은 청호반새가 깃털의 실체이듯, 깃털 같은 나의 실체는 청호반새 같은 꿈이 아닐까. 꿈, 그 무한대 상상력의 장은 언제나 현실을 뒤돌아보게 한다.

말하지 못한 것이 꿈으로 나타나듯, 꿈을 통해서 나의 숨은 세계를 마주보게 되는 것이다.

존재에 대한 성찰은 언제나 먼 지평. 나의 옛집은 어디일까. 위의 깃털들처럼 나의 옛집도 죽은 청호반새임이 분명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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