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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네 기숙사에는 "팔도 사투리"가 욱실욱실하였다...
2017년 09월 30일 01시 07분  조회:2047  추천:0  작성자: 죽림


연희전문 재학 시절 윤동주가 기숙사 생활을 했던 연세대 핀슨홀 전경. 양회성 기자 
 

언어의 역사는 얼마나 장구한가. 원시인들은 어떻게 소통했을까. 중세 언어인 라틴어나 한문은 권력의 상징이었다. 근대에 들어 민족어가 탄생하면서 개인은 비로소 단독자로서 자유를 얻는다. 1446년 세종대왕이 한글을 반포한 후, 한글은 조선인에게 존재와 자유를 주었다.
 
1938년 2월 광명중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4월 9일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진학한다. 입학하자마자 핀슨홀 3층 ‘천장 낮은 다락방’에서 고종사촌 송몽규, 브나로드 운동을 열심히 했던 강처중과 한방을 쓴다. 사실 그리 기분 좋은 시기만은 아니었다. 1938년 3월 총독부는 ‘일본인과 조선인 공학(共學)의 일원적 통제를 실현’한다면서 조선어를 수의(隨意)과목, 곧 선택과목으로 만들었다. 조선어를 폐지하는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국어(일본어)를 쓰는 학생과 안 쓰는 학생을 구별하여 상벌을 주라는 훈시가 내렸다. 



연세대 핀슨홀 건물 앞에 세워진 시비. 양회성 기자 

조선어로 동시 쓰면 누가 읽겠어, 염려하는 친구 윤석중의 말에 “땅에 묻지”라고 박목월이 경주에서 말했던 해였다. 재일(在日)시인 김시종은 제주도에서 아잇적 조선어로 말했다가 선생님께 뺨을 맞았다. 이듬해 국민학교에 조선어 수업이 숫제 없어 시인 고은은 아잇적 머슴 대길이에게 가갸거겨를 배웠다(고은, ‘머슴 대길이’). 이때부터 일본어 친일시가 활발하게 발표되기 시작했다.  

윤동주가 한글로 글을 쓰면 손해라는 사실을 몰랐을까. 윤동주는 좋아하던 최현배 교수의 두툼한 ‘우리말본’(1937년)을 읽었다. 최현배 교수의 금지된 조선어 수업을 수강했고, 입학하고 한 달 후 5월 10일 동주는 검박한 언어로 ‘새로운 길’을 썼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 윤동주, ‘새로운 길’  




핀슨홀 내부에는 윤동주 기념관이 마련되어 있다. 양회성 기자 

교과서에도 실려 있고, 광화문에 현판으로도 걸렸고, 서대문구청에서 연북중학교 뒷면으로 이어진 ‘안산 자락길’ 산책로 왼편에 시비도 있어 친숙한 작품이다. 내를 건너고 숲을 지나 고개를 넘어 마을로 가는 길은 험난한 길일 수 있다. 1연과 5연이 같은 수미상관이다. 2연과 4연은 묘하게 비틀린 대칭을 이룬다. 쉽게 오지 않을 희망을 그는 반복한다. 

포기하지 않고 견딜 수 있는 까닭은 가운데 3연에 나오듯,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기 때문이다. 보이는 ‘곁’이 있기 때문이다. ‘식구로는 굉장한 것이어서 한 지붕 밑에서 팔도 사투리를 죄다 들을 만큼 모아놓은 미끈한 장정들만이 욱실욱실하였다’(‘종시·終始’)는 기숙사 핀슨홀 생활이 즐겁기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최현배, 손진태, 이양하 등 당시 최고의 스승들에게 역사며 우리말을 배울 수 있는 긍지는 얼마나 뿌듯했을까.  

원하던 학교에 입학한 달뜬 기대를 표현한 시로 이 시를 읽을 수 있다. 한글로 썼다는 사실도 대단치 않을 수도 있다. 이전에도 한글로만 쓴 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어 사용과 교육이 금지되기 시작한 배경을 생각하면, 조금 고집스러운 오기를 느낄 수 있다. 희망 없는 반복이 지겹더라도, 이 길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걷겠다는 풍성한 반복 의지가 엿보인다.  

윤동주는 힘들 때 성찰할 때 산책을 즐겼다. 기타하라 하쿠슈의 동시 ‘이 길(この道)’을 동생들에게 자주 불러줬던 그는 ‘연희 숲을 누비고 서강 들을 꿰뚫는 두어 시간 산책을 즐기고야 돌아오곤 했다’(정병욱 ‘잊지 못할 윤동주’),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서시’)는 구절도 그의 일상이었을 것이다.

그의 길은 어떤 길이었을까. 윤동주를 저항시인이니 민족시인이니 특정 브랜드로 정하는 것은 부분으로 전체를 규정하는 침소봉대를 범할 수 있다. 그의 시에 저항과 민족이라는 요소가 있지만, 그 범주로 윤동주를 한정할 수는 없다. 그의 저항과 실천은 미묘하게 숨어있다. 수수하게만 보이는 ‘새로운 길’에도 저항의 단초가 숨어 있다. 

역사를 지키는 투쟁은 기관총에 의해서만이 아니다. 망각에 저항하는 기억이야말로 지루한 투쟁이다. 지옥 같은 세상에서도 살 만한 세상을 꿈꾸는 판타지를 유지하는 것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잔혹한 낙관주의(cruel optimism)다. 대학교 초년생의 한낱 달뜬 마음을 담은 소박한 소품일지 모르나, 여기에는 죽지 않는 저항의 씨앗이 담겨있지 않은가.  

 
‘새로운 길’을 시발로 금지된 언어로 계속 시를 쓰며 그는 금지된 시대에 균열을 일으켰다. 그에게 ‘새로운 길’을 가자는 의지는 ‘아Q정전’(루쉰)의 정신승리법이 아닌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어졌다. 금지된 언어로 19편의 시를 깁고 다듬어 시집을 내려 했다. 이것이야말로 ‘죽어가는’ 한글을 사랑하는 실천이었고, 망각을 강요하는 권력에 대항하는 저항이었다. ‘새로운 길’을 꿈꾸며 견디려 했던 그는 4학년에 오르면 급기야 ‘모가지를 드리우고 피를 흘리겠다’는 위험한 다짐까지 써 놓는다. 

 
스승 한 명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그 제자들에게서 나타난다. 스승 최현배와 제자 윤동주는 1940년대 지역은 다르지만 함께 감옥에 갇혔고 한글을 잊지 않았다. 최현배의 금지된 조선어 수업에서 함께 배웠던, 윤동주의 2년 선배 박창해는 광복 후 ‘바둑아 바둑아 이리 오너라’로 유명한 ‘바둑이와 철수’를 만들어 국어교과서 독립선언을 완성한다. 최현배는 제자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자신의 큰아들이 대표로 있는 정음사에서 가로쓰기로 낸다. 최현배는 여러 학자와 함께 ‘조선말 큰사전’을 완성시킨다. 

무한한 성찰과 저항을 거쳐 조선어는 존재해 왔다. 보이지 않고 하찮아 보이는 저항들이 모여, 거대한 언어의 역사와 단독자의 자유를 지켰던 것이다.
   
///김응교 시인·숙명여대 교수 

==============================
올해로 탄생 100주년이 되는 윤동주는 130편의 시를 남겼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다 잘 아는 윤동주의 <서시> 전문이다. 익숙한 시는 또 있다. “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자화상>,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별을 헤는 밤>

지난해 이맘때쯤 영화 <동주>가 극장가에서 상영되고 있었다. 일 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니 마치 윤동주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전주곡 같다는 느낌이 든다. <동주>는 흑백영화이면서 어떤 극적인 장면이 연출되거나 역사적 장면을 담아내지도 않는다. 말과 글도, 성명조차도 우리 것으로 쓸 수 없었던 암울한 세상에 대한 분노도 표출하지 않는다. 꿈도, 희망도, 모든 것이 허락되지 않았던 시대를 살았던 주인공을 재단(裁斷)하지도 않는다. 그냥 윤동주가 남긴 시어들이 실오라기처럼 하나씩 풀어지면서 잔잔하게 몰입되도록 인도한다.

영화는 주인공과 대비되는 또 한 사람의 인물을 등장시킨다. 윤동주보다 석 달 먼저 태어난 고종사촌 형이자 평생 친구였던 송몽규이다. 한 집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명동소학, 은진중학, 연희전문을 같이 다녔다. 다만 중학교 고학년 즈음 윤동주는 평양 숭실중학을 거쳐 광명중학을, 송몽규는 독립운동 언저리에 머물다가 다시 돌아와 대성중학을 졸업했다. 두 사람은 27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거의 같은 공간에 살면서 많은 것을 공유했을 것이다. 두 사람 다 신장이 훤칠하고 미남이어서 남들의 부러움을 샀으며, 언어습관도 순후했다고 전한다.

필자는 송몽규의 약전(略傳)을 정리하여 발표한 바 있다. 5년 전에 윤동주의 생가를 방문한 후 그의 존재를 알았고, 그를 세상에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독서량이 많았고, 문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남달리 총명했던 그는 윤동주, 문익환과 더불어 선두그룹을 형성했는데 그 중에서 언제나 으뜸이었다. 어린이 잡지를 서울에서 주문해 와서 그것을 친구들과 돌려보기도 하였고, 크리스마스가 되면 연극을 연출하는 등 활동력이 뛰어난 소년이었다. 수줍음이 많고 조용한 성격의 윤동주와는 무척 대조적이었던 것이다.

그는 중학교에서도 문학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자신의 호를 ‘문해’라 지었다. 마침내 그는 ‘송한범’이라는 아명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하여 1935년에 콩트 <술가락>이 당선되었다. 약관에 못 미친 열여덟의 나이로 당당히 등단한 것은 그가 얼마나 문재가 뛰어났는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송몽규의 빠른 문단 진입은 윤동주에게 큰 자극이 되었을 것이고, 이 무렵부터 윤동주는 그의 시작(詩作) 결과를 하나하나씩 쌓아두기 시작했다. 송몽규는 이처럼 정적인 성격의 윤동주에게 문학에 대한 열정을 견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두 사람은 연전 시절에도 같이 활동했다. 윤동주도 1939년에 소년지에 시를 발표하여 등단하였다. 1941년 6월부터 동인지 <문우>를 발간하였는데 적극적인 성격에다가 능변인 송몽규가 주도하였다. 이때 윤동주는 <새로운 길>, <우물 속의 자상화> 등을, 송몽규는 ‘꿈별’이란 필명으로 <하늘과 더불어>를 발표한다. 그러나 이 동인지도 압력이 있었던지 문우회의 해산과 함께 단명으로 끝이 났다. 송몽규는 독립운동에 가담한 전력으로 ‘요시찰인물’로 낙인이 찍혔지만 학업에 충실하여 졸업할 때 성적 우수상을 받은 바 있다.

송몽규의 작품은 세 개가 전해진다. 훨씬 더 많은 글을 썼을 것으로 추정되나 등단 작품인 콩트와 연희전문 시절의 시 두 편이 그것이다. “고요히 침전된 어둠/ 만지울 듯 무거웁고/ 밤은 바다보다 깊구나. / 홀로 밤 헤아리는 이맘은/ 험한 산길을 걷고/ 나의 꿈은 밤보다 깊어/ 호수군한 물소리를 뒤로/ 멀리 별을 쳐다보다 휘파람을 분다.”<밤>, “……푸르름이 깃들고/ 태양이 지나고/ 구름이 흐르고/ 달이 엿보고/ 별이 미소하여/ 너하고만은/ 아득히 사라진 얘기를 되풀고 싶다. / 오 하늘아/ 모든 것이/ 흘러 흘러갔단다.……”<하늘과 더불어>

두 사람은 1942년 이른 봄,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그리고 18개월 후 일제의 ‘특별고등경찰’에 걸려들었다.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이었다. 교토에서 한 번씩 만나 겨레의 앞날을 걱정하던 대화를 꼬투리로 삼은 것이다. 1945년 2월 16일에 윤동주가, 3월 7일에 송몽규가 후쿠오카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집안 어른들은 북간도에 무덤을 쓰면서, ‘시인윤동주지묘’, ‘청년문사송몽규지묘’라는 묘비를 세웠다. 윤동주는 그가 남긴 주옥같은 시로 인해 별이 되었다. 오늘 72주기를 맞은 송몽규도 이제 함께 별이 되어 후학들의 가슴에 오래토록 쌍별로 빛날 것이다.

///이정호 수필가, 전 울산교육과학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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