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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국보 | |
종목 |
국보 제70호 (1962년 12월 20일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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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량 | 1책 |
시대 | 조선시대 |
소유 | 전성우 |
위치 | |
주소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로 102-11, 간송미술관 (성북동) |
좌표 | |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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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훈〮민져ᇰ〮ᅙᅳᆷ, 訓民正音)은 조선 초기 세종대왕이 지은 책의 제목, 그리고 그 책에서 해설하고 있는 뒷날 한글로 불리게 된 한국어의 표기 문자 체계를 말한다.
한글은 1443년(세종25년) 훈민정음 28자를 연구·창제하고 3년 동안 다듬고 실제로 써본 후, 1446년 음력 9월에 이를 반포하면서[1][2] 조선 세종은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 解例本)』을 통하여 문자와 천지인을 바탕으로 하는 음양오행의 관계를 설명하였다.
오늘날 남아있는 훈민정음의 판본 가운데 하나인 《훈민정음 해례본》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과 대한민국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훈민정음의 판본에는 크게 해례본(한문본), 언해본이 있고, 그밖에 예의본이 있다. 실록본이 있는데, 이는 예의본에 속한다. 이 가운데 완전한 책의 형태를 지닌 것은 해례본이다.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은 《훈민정음 원본》이라고도 부르며,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어 있다. 1997년 10월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내용은 “國之語音異乎中國(나라말 소리가 중국과 달라)……”로 시작하는 세종의 어제 서문과 본문에 해당하는 〈예의(例義)〉및 〈해례(解例)〉, 그리고 정인지가 쓴 〈서(序)〉로 구성되어 있다.
— 《훈민정음 해례》(訓民正音解例), 〈제자해〉(制字解)今正音之作
이제 훈민정음을 만드는 것은
初非智營而力索
처음부터 슬기로 마련하고, 애써서 찾은 것이 아니라
但因其聲音而極其理而已.
다만 그 (원래에 있는)성음(의 원리)을 바탕으로 이치를 다한 것 뿐이다.
理旣不二 則何得不與天地鬼神同其用也.
(음양의) 이치가 이미 둘이 아니니 어찌 천지 자연, (변화를 주관하는) 귀신과 그 사용을 같이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正音二十八字 各象其形而制之.
훈민정음 스물 여덟자는 각각 그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다.
해례본은 1940년 안동에서 발견된 것과 2008년 상주에서 발견된 것 두 부가 존재한다.
간송본(안동본)은 1940년 무렵 까지 경상북도 안동군 와룡면의 이한걸 가문에 소장되어 있었다. 그의 선조 이천이 여진을 정벌한 공으로 세종이 하사했다고 한다. 표지 2장에 본체 33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로 20 센티미터, 세로 32.3 센티미터 크기이고, 처음 두 장이 망실되었는데 연산군의 기훼제서율을 피하기 위한것이다.
훗날 이것을 입수한 간송 전형필은 6.25전쟁 때 이 한권을 오동상자에 넣고 피란을 떠났으며, 잘 때도 베개 삼아 잤다고 한다.
상주본은 2008년 8월 상주에 사는 배익기가 집 수리 과정에서 발견되었다고 공개했다. 세 장이 떨어져 나간 상태이다.
그러나 골동품상을 하는 조모가 도난당한 것이라며 주장하여 소송이 오갔다. 상주본은 낱장을 비닐에 넣어 보관하고 있는데 이는 서적을 오히려 훼손할 우려가 있어 서적 보호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나 분쟁으로 인하여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
민사 소송에서 대법원은 조씨의 손을 들어줬으며 문화재청에 기증했다. 배 씨는 형사 재판에서 1심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것이 안동 광흥사에서 복장유물이라는 논란이 제기되어 광흥사가 소속된 조계종이 반발했다.
그러나 2심 법원은 배 씨에게 증거 부족으로 무죄 판결을 내렸다. 2심 과정에서 조씨가 주장하는 보관 과정과는 배치되고, 배씨와 일치되는 증거가 나왔다.
재판부는 골동품상 조모씨등의 진술에 신빙성이 없고 직접 본 사람과 다른 점, 절취하였다는 날 직후에 공개된 점이 의심스러운 점을 무죄 선고의 이유로 밝혔다. 그러나 대법원은 2011년 5월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소유권자는 조씨라고 확정 판결했다.
배씨는 2012년 9월 무죄로 풀려났지만 재판 과정에서 마음의 상처를 받은 듯하여 조씨에게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을 돌려주지 않았고 오히려 배씨는 재판 과정에서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던 증인들을 위증 및 교사 등 혐의로 고발하면서 현재 외부와 연락을 끊은 상태이다.[4] 그러나 경북 상주시는 '훈민정음해례 상주본'을 상주박물관에 유치를 위한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본격 운영에 들어갔다고 2013년 4월 9일 밝혔다. 한편 배익기씨는 2017년 4월 12일 재보궐선거에 상주-군위-의성-청송 국회의원 보궐선거 후보로 출마하였다.
해례(解例)와 예의(例義)가 모두 포함된 해례본과 달리 예의 부분만 들어 있는 것을 예의본이라 부른다. 그런데 이 예의본은 단행본이 아니라, 《세종실록》과 희방사판(喜方寺版) 《월인석보》에 실린 것 등 여러 종류가 있다.
훈민정음 언해본은 해례본의 한 종류이나 편의상 따로 언해본으로 불린다.
언해본은 본디 한문(해례본/원본)으로 되어 있던 것이 1459년(세조 5년) 간행된 《월인석보》에 실린 훈민정음의 어제 서문과 예의(例義) 부분이 한글로 번역되어〈세종어제훈민정음(世宗御製訓民正音)〉으로 합본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을 통상 언해본이라고 한다.
훈민정음 언해본이 어떻게 읽어졌는지 궁금하다면, 이
중세 한국어 | 현대 한국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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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랏:말ᄊᆞ·미中듀ᇰ國·귁·에달·아 |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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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한글의 창제 원리를 설명하고 있으며, 중세 한국어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중요한 책이다. 《해례본》에 포함되어 있는 있는 예의(例義)는 특히 창제 당시의 자체(字體)를 그대로 보이고 있어서 그 중 가장 높이 평가된다. 또한, 해례는 오랫동안 문제로 삼던 글자의 기원 등 여러 가지의 의문점을 밝혀 주고 있다.
1940년 안동에서 발견된 간송본(국보 70호)과 2008년 상주에서 발견된 상주본 모두 한글 창제 원리를 풀이한 한문으로 된 해설서다. 훈민정음 창제 3년 뒤인 1446년(세종 28년) 편찬됐다. 서울 간송미술관에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과 동일한 판본이지만 상주본은 간송본보다 보존 상태가 좋고 학자의 어문학적 견해가 많아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4]
《예의본》은 《해례본》이 발견되기 이전에 훈민정음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일차적 문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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