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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와 방정환 그리고 "강도"
2017년 10월 17일 01시 46분  조회:4856  추천:0  작성자: 죽림

 

                                                      ★ 소파 방정환 선생 ★

 

1. 생애와 활동 

 방정환선생은 1899년 11월 9일 서울 당주동에서 경수(慶洙)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소파(小波)이다.

 소파는  ‘어린이’라는 말과  ‘어린이날’을 처음으로 만든 사람일 뿐만 아니라, 아동문학가, 독립운동가, 문학가,

사회ㆍ문화운동가, 동화구연가, 언론인, 출판인, 교육자, 아동교육 사상가이다. 1908년 10살 때 ‘소년입지회

(少年立志會)’를 조직하여 토론ㆍ연설회를 개최하였고, 1917년 천도교 제3대 교조인 손병희(孫秉熙)의 셋째 딸

용화(溶嬅)와 결혼하였다. 1918년 보성전문학교 입학하였고, 1919년 3ㆍ1운동 때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1주일 만에 석방되었다. 1920년 3월 일본 도요대학(東洋大學) 철학과에 입학하여 아동예술과 아동심리학을

연구하였다. 1920년 8월25일 ‘어린이’라는 말을 『개벽』지에 처음 사용하였고, 1921년 ‘천도교 소년회’를 조직

하였다. 1922년 5월 1일 처음으로 ‘어린이의 날’을 제정하고, 1922년 6월 번안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간행

하였다. 1923년 3월 우리 나라 최초의 순수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하였고,  ‘색동회’를 창립하였다. 같은 해

5월 1일에 ‘어린이날’ 기념식을 거행하고 「어린이날의 약속」이라는 전단 12만장을 배포하였다. 1925년 제3회

어린이날을 기념하는 동화구연대회를 개최하였고, 1928년 10월2일 세계 20여 개 나라 어린이가 참가하는 ‘세계

아동예술전람회’를 개최하였다. 어린이에 대한 지극한 정성과 사랑을 가지고 일생을 오직 어린이를 위한 사업에

바친 그는 1931년 7월 23일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한다.’ 는 말을 남기고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 ‘어린이’와 ‘어린이날’ 제정의 배경

소파는 처음에는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났으나, 종조부의 사업 실패로 생가가 파산 하게 되자 밥을 굶고 쌀을 꾸러

다닐 만큼 가난한 생활을 하였다. 이렇듯 판이하게 다른 두 가지의 성장과정에서 당시의 어린이들이 단지 어른들의

편리한 도구로밖에 인정되지 않는다는 현실을 깨닫고 어린이의 인권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당시에는

‘장유유서(長幼有序)’란 유교의 가부장적 가족제도 밑에서 어린이들은 천대받고 억압당하는 존재였다. 소파는

어린이들이 좀더 자유롭게 뛰놀 수 있고, 티 없이 밝게 자랄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로 뜻을 세웠다. 그래서 ‘늙은이’,

‘젊은이’와 같이 아동들을 하나의 인격체로 격상시키는 뜻이 담긴 낱말인 ‘어린이’라는 호칭을 쓸 것을 주창하였다. 

1922년 5월 1일 처음으로 ‘어린이의 날’ 제정하여 어린이의 권익 옹호에 앞장섰는데, 이후 5월 첫째 공일로

바뀌기도 하고, 일제의 탄압으로 금지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기도 하였지만, 그 뜻이 이어져 1946년 5월 5일로

 ‘어린이날’을 확정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소파는  어린이날에 배포한 「어린이날의 약속」에서 “어린이는 어른보다 더 새로운 사람입니다. 어린이를 어른보다

더 높게 대하십시오. 어린이를 결코 윽박지르지 마십시오. 어린이의 생활을 항상 즐겁게 해주십시오. 어린이는 항상

칭찬해가며 기르십시오. 어린이의 몸을 자주 주의해 보십시오, 어린이에게 잡지를 자주 읽히십시오.” 라고 하여

어린이는 새시대의 새인물로서 인식되고 존중받아야 하는 인격체임을 지적하였다. 

 

3. 소파 방정환 선생의 업적 

소파 방정환은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최초의 아동문화운동가요, 사회운동가였다. ‘소년입지회’를 조직하고

3ㆍ1독립운동에 참가하였으며, ‘천도교소년회’를 결성 및 육성하였으며, ‘어린이’라는 호칭을 만들고, 아동문제

연구단체인 ‘색동회’ 조직, ‘어린이의 날’을 제정하는 등 어린이를 잘 키우는 것만이 우리 민족이 살길이라고

믿어 어린이를 위한 다양하고 적극적인 활동을 하였다. 또한 번안 및 개작작가ㆍ동화작가ㆍ동화구연가ㆍ아동

잡지 편집인으로서의 활약도 뛰어났다. 『사랑의 선물』을 비롯한 본격적인 개작 번안, 창작동화를 남기며 최초의

대표적인 구연동화가로 활약하였고 『어린이』잡지를 통하여 윤석중(尹石重)ㆍ이원수(李元壽)ㆍ서덕출(徐德出)

등 아동문학가의 발굴, 육성에 힘썼다. 소파는 어린이를 소박하고 천진난만하며 순진무구한 존재로 보고 감성적ㆍ

교훈적ㆍ권선징악적인 작품을 통해서 사회교화와 어린이들의 자유로운 감성해방을 추구하였다.

 

4. 추모 

1957년 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새싹회에서 ‘소파상(小波賞)’을 제정하였고, 1971년 40주기를 맞아 서울

남산공원에 동상을 세웠으나, 1987년 5월 3일 서울특별시 성동구 능동에 있는 서울어린이대공원 야외음악당

으로 이전되었다. 1983년 5월 5일에는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리 묘소에 이재철(李在徹)이 비문을 새긴 ‘소파

방정환 선생의 비’가 건립되었으며, 1987년 7월 14일에는 독립기념관에 그가 쓴 「어른들에게 드리는 글」을

새긴 어록비가 건립되었다. 1991년에는 아동문학평론사에서 ‘방정환문학상’을 제정하였다. 1978년 금관문화

훈장, 1980년 건국포장이 수여되었다. 그가 생전에 발간한 책은 『사랑의 선물』이 있고, 그밖에 사후에

발간된『소파전집』(박문출판사, 1940)ㆍ『소파동화독본』(조선아동문화협회, 1947)ㆍ『방정환아동문학독본』

(을유문화사, 1962)ㆍ『칠칠단의 비밀』(글벗집, 1962)ㆍ『동생을 찾으러』(글벗집, 1962)ㆍ『소파아동문학전집』

(문천사, 1974) 등이 있다.
 

 

 강도를 감화감동 시킨 방정환(1899~1931)선생 

어느 날 밤 소파 방전환 선생님 집에 칼을 든 강도가 들었다.
"돈을 있는 대로 내놔! 안 그려면 찔러 죽인다."
"돈이 필요하면 달라고 하면 되지 무슨 칼을 들이대고 그러시오?"
"돈이 필요하다면 주겠오"

너무나 부드럽고 친절하기까지한 방정환 선생의 말에 오히려

강도가 당황하였다. 방정환 선생은 침착하게 돈을 꺼내 주었고,
강도는 주섬 주섬 돈을 챙겨가지고 나가려고 할 때 방정환 선생은

강도에게 다시 말했다."여보시오! 달라고 해서 돈을 주었으면

고맙다고 인사는 하고 나가야지 않소?"
"예 감사합니다."
하지만 강도가 밖으로 나가다가 때마침 근방을 지나던 경찰에게

강도는 잡히고 말았다. 경찰은 강도를 데리고 방정환 선생 댁을 갔다.
현장검증을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경찰과 강도를 본 방정환

선생은 태연하게 "또 오셨네그려. 방금 준 돈을 벌써 다 썼단 말이오?"
경찰은 "아닙니다. 이 자가 여기서 강도질을 했다고 자백을 하였습니다."
"저 사람은 강도가 아닙니다. 사정이 딱한 것 같아서 내가 돈을

주었습니다." "그는 내가 준 돈을 받고 나가면서 고맙다고 인사까지

한걸이오" 고맙다고 인사한 사람이 어떻게 강도란 말입니까?"
경찰은 의아해 했지만 어쩔 수 없이 강도를 풀어주었습니다.
그제서야 강도는 무릎을 꿇고는 눈물을 흘리면 용서를 빌었습니다.
"제가 정말로 잘못했습니다. 앞으로는 절대로 나쁜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어린이날 노래 * ( 윤석중 작시 / 윤극영 작곡 )

 

 

 

 

 

 

어린이날 노래

 

 

윤석중 작시 윤극영 작곡

 

 

 

- 아름다운 황혼열차에서 모셔온 글 -

 

 

 

 

 

1.방정환의 일생


방정환(方定煥, 1899년 11월 9일 ~ 1931년 7월 23일) 독립운동가, 아동문화운동가, 어린이 교육인, 사회운동가.

방정환 선생의 호 소파(小波)는 일본 유학 시절에 선생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일본의 아동 문학가 이와야 사자나미(岩谷小波)의 사자나미(小波)를 따온 것이다. 일본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소파 외에도 잔물, 몽견초, 몽견인, 삼산인, 북극성, 쌍S, 서삼득, 목성, 은파리, CWP, 길동무, 운정, 김파영, 파영, ㅈㅎ생이라는 이름을 필명으로 사용하였다. 

 

 

 

 

방정환 선생은 1899년 11월9일 서울 종로구 당주동에서 어물전과 미곡상을 경영하던 방경수(方慶洙)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어머니와 누나를 잃고 새어머니가 들어왔으나 정을 못 붙이고, 그 대신 그림그리기와 글짓기에 재미를 얻었다. 방정환의 집안은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마음씨 좋은 고모에게 식량을 꾸러 갈 정도로 가난하였다.

 

방정환이 7살 때인 1905년 삼촌을 따라갔다가 우연히 만난 김중환 교장의 설득으로 보성소학교 유치반에 입학하였다. 보성소학교에서는 입학하는 학생은 댕기를 자르고, 머리를 깎아야 하였는데, 이를 본 할아버지는 전통을 단절해야 할 구습으로 보는 진보 지식인들의 급진성에 대한 거부감으로 매우 화를 내었지만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손주의 뜻을 존중하여 학교에 다니는 것을 묵인하였다고 한다.

 

 

1908년에는 ‘소년입지회’를 조직하여 동화구연, 토론회, 연설회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09년에 매동보통학교에 입학한 뒤 이듬해 1910년 서울 미동보통학교로 전학, 1913년에 졸업했다. 졸업후 방정환은 아들이 상업을 전문적으로 배워서 가업을 이을 것을 바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선린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1913년 이광수가 펴내던 잡지 《청춘》에 보낸 글이 게재되었다. 어머니의 병환으로 2년 만인 1914년 선린상고를 중퇴하였다. 당시 담임교사와 부친은 아들이 공부를 계속하기 바랐으나, 집안이 어려웠기 때문에 스스로 학교를 그만두게 된 것이다

 

 

1916년 생활비 조달을 위해 조선총독부 토지 조사국에서 취직하여 서류 필사 업무를 하였는데, 조선총독부 토지 조사국은 토지조사사업 즉, 조선인의 토지수탈작업을 담당하여 지탄을 받는 기관이었기 때문에 곧 사직하고 천도교 청년회, 개벽사, 천도교 소년회 등의 천도교 기관들과 관계를 맺었다. 그가 천도교 기관에서 일한 이유는 부친이 성실한 천도교 신자였고, 방정환 자신도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천도교의 인내천 사상에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17년 유광렬(柳光烈)·이중각(李重珏)·이복원(李馥遠) 등과 청년운동조직체인 '청년구락부'를 조직했다.

1918년에는 천도교 3대 교주인 의암 손병희의 셋째 딸인 손용화 여사와 중매 결혼하였다. 결혼하던 해에 청년문학단체인 청년구락부(여기서 구락부는 Club의 음역이다.)를 조직하여 이듬해부터 기관지 〈신청년〉을 펴냈다. 5년간 활동하면서 어린이 운동에 열성을 보였으며, 당시 손병희가 지도하던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등사판 '독립선언문'을 인쇄해서 중학생들과 배포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주일 간 구치소에 갇혀 있었다. 일본경창이 들이닥치기 전에 등사기를 우물에 버렸기 때문에, 일주일 만에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난 것이었다. 하지만 같이 독립신문 발행에 동참한 청년구락부 동료들은 일경의 고문으로 옥사하였으며 방정환도 고문을 당했다.

 

1919년 말, 일본 도쿄의 도요 대학(東洋大學) 철학과에 입학하여 아동 문학과 아동 심리학을 공부했다. 계몽사에서 출판한 《방정환》전기에 따르면, 당시 일본 경찰은 독립 운동 경력이 있는 유학생 방정환에게 형사를 보내 감시하였다.

1920년~1923년 사이 유학 기간에 천도교 잡지인 《개벽》에 계급 투쟁을 주장하는 사회주의 성격의 우화들을 연재하였다. 1920년 《개벽》 3호에 번역 동시 ‘어린이 노래: 불 켜는 이’를 발표하였는데 이 글에서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였으며, 사회주의자가 쓴 글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1921년에는 일본 유학 기간 동안 외국 동화를 번역한 《사랑의 선물》을 출판하였다.《사랑의 선물》은 방정환이 살아있을 때 만든 유일한 단행본이며, 다음과 같은 번안 동화 10편이 실렸다.

 

 

1920년 일본 도요대학[東洋大學] 철학과에 입학해 아동문학과 아동심리학을 공부했다. 이때 〈개벽〉 도쿄[東京] 특파원으로 활동하면서 그해 7월호에 시 〈갈마반도〉와 12월호에 소설 〈그날 밤〉을 발표했다.

1921년 서울특별시서울에서 "천도교 소년회"를 만들었다. 한편 방정환은 전국 순회강연을 통해 뛰어난 이야기꾼으로 활약했는데, 강연내용은 어린이들을 위해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자는 것이었다.

 

1923년에는 한국 최초의 순수아동잡지인 월간 《어린이》(1923년 창간- 1934년 7월 통권 122호를 마지막으로 발간 중지)를 창간하였다. 하지만 처음에는 엽서에 이름과 주소를 적어서 보내 주면 돈을 받지 않고 보내 준다고 선전해도 불과 8명이 신청할 만큼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이는 일제의 식민지 수탈로 대다수의 민중들이 먹고 살기조차 힘들었던, 그래서 민중들에게는 독서가 사치로 여겨지던 조선의 현실 때문이었다. 

하지만 방정환은 자신의 특기인 재미있는 구연 동화로 현실의 장벽을 극복하였다. 어린이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 주면서, 잡지를 선전했다. 《어린이》는 이원수, 마해송 등 아동 문학가들이 이름을 알리는 기회가 되어, 한국 아동문학계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5월 1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어린이 문제를 연구하는 단체인 색동회를 창설하였는데, 색동회라는 이름은 후에 동요작가로 활약하게 되는 윤극영 선생이 예쁜 색동저고리를 떠올리며 제안한 이름이다. 1927년 어린이 단체를 통합한 ‘조선소년연합회’ 위원장 역임하며 〈아기별 삼 형제〉등의 동요·동화·추리소설인《칠칠단의 비밀》등의 소년 소설·동극 창작과 외국 동화 번역에 힘썼으며,세계어린이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전시회를 열기도 하였다. 당시 그가 기획한 전시회는 지방에서 수학여행을 올 만큼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아동잡지에 기고 활동을 하면서 소설가 현진건(玄鎭健), 소설가 심훈(沈熏) 등과 문우(文友)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1931년 7월 23일 동화집필, 구연동화, 어린이대상 출판활동 등으로 인한 과로와 비만으로 건강이 나빠진 방정환은 구연동화 활동 중에 쓰러져 경성제국대학병원(현 서울대학교병원)으로 옮겼으나, 고혈압으로 32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병원에 입원해서도 간호사들에게 동화를 들려줄 만큼 성격이 밝았던 그는 '문간에 검은말이 끄는 검은 마차가 날 데리러왔으니 떠나야겠소. 어린이를 두고 떠나니 잘 부탁하시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의 사후 1940년 5월 1일에 마해송(馬海松)·최영주(崔泳柱)가 〈소파전집〉을 펴냈고, 1957년 '새싹회'에서 그의 아동문화운동과 아동문학의 업적을 기리는 '소파상'을 제정하여 매년 시상하고 있다. 1978년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수여했다. 1971년에는 색동회가 주관하고 전국 어린이들의 성금을 기금으로 하여 2년간 제작한 동상이 남산 어린이회관 옆에 세워졌다. 1983년 어린이날 망우리 묘소에 「소파방정환 선생의 비(碑)」가 세워졌으며, 1987년에는 독립기념관에 그가 쓴 "어른들에게 드리는 글"을 새긴 어록비가 건립되었다.

 

 

2.방정환에 대한 평가


방정환의 아동문화운동은 어린이들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한 소년운동과 아동문학의 발전을 위한 문필활동으로 나누어진다.

1920년대 한국 사회전반에 나타나 있던 어린이에 대한 불합리한 의식을 계몽하는 활동을 펼치는 한편 유교적 가부장제 아래에서 희노애락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었던 어린이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감성의 해방을 추구했던 것이다.

이 같은 목적을 위해 그는 〈어린이〉 등 여러 아동잡지에 창작작품은 물론 해외 아동문학작품을 번역해서 실었다. 그의 번역작품은 선량·정직·노력 등 권선징악의 교훈을 바탕으로 한 해학과 풍자를 특징으로 한다. 이것은 그의 작품이 사회교화와 어린이의 사회적 지위향상을 도모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의 창작동화는 비록 양적으로는 번역동화에 미치지 못하나 가난과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는 명랑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일제의 지배와 유교적 전통 아래에서 고통받는 어린이에 대한 독자의 인식을 일깨워주는 노력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불우한 어린이들은 불합리한 현실을 극복해나가려는 적극적인 행동을 보여주지 못한 채 독자들의 감상에 호소함으로써 소극적인 감상주의를 드러내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번역동화와 창작동화에서 나타나는 경향은 어린이를 지나치게 천진난만하고 순진무구한 존재로 보았는데, 이는 1920년대 한국 아동문학의 일반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1967년의 신동아 5월호에 따르면 일본 고등계 경찰관 미와(三輪)는 방정환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고 윤극영이 인용하였다. “방정환이라는 놈, 흉측한 놈이지만 밉지 않은 데가 있어… 그놈이 일본 사람이었더라면 나 같은 경부 나부랭이한테 불려다닐 위인은 아냐… 일본 사회라면 든든히 한 자리 잡을 만한 놈인데… 아깝지 아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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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정환

조선의 소년 소녀 단 한 사람이라도 빼지 말고 한결같이 ‘좋은 사람’이 되게 하자.

- 방정환 -

글을 시작하며

소파 방정환은 어린이운동의 창시자, 선구자로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방정환에 대한 연구는 주로 어린이운동과 문학이라는 측면에 주목한 것이 대부분이고 그의 민족운동에 대한 연구는 미진한 편이다. 따라서 방정환의 삶을 정리하면서 아직 밝혀지지 않은 그의 삶의 다른 측면에 대한 연구도 이루어져야 하며 이 글을 통해 방정환의 삶을 민족운동이라는 측면에서 파악해 보려고 한다.

이 글에서는 방정환의 출생과 성장을 짧게 살핀 후 그의 민족운동을 청년운동, 3·1운동, 소년운동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민족운동가로서의 그의 삶을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가 천도교의 계대교인이며, 교주 손병희의 사위라는 것만 보아도 그의 삶이 천도교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방정환의 활동이 천도교를 기반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 글은 그의 천도교 활동을 전제로 전개하였다.

출생과 성장

방정환선생 생가터

방정환선생 생가터ⓒ독립기념관

방정환은 1899년 11월 9일(음력 10월 7일) 서울의 야주개(지금의 당주동)에서 출생하였다. 족보 및 방정환이 자신에 대해 남긴 기록들을 보면 방정환은 2남 3녀 중 둘째로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어린 시절의 방정환은 증조부, 증조모, 조부, 조모, 큰고모, 작은 고모, 삼촌 등과 4대가 함께 거주하는 대가족의 일원으로 성장하였다.1)

방정환 집안의 성향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나 그가 태어났을 무렵 그의 집안은 “장사를 크게 하였고 대단히 큰 기와집을 하나 가지고는 부족하여서 두 집을 사서 사이를 트고 한 집을 만들어 쓰고 있었다.”는 그의 술회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매우 부유한 편이었다.2) 그러나 아홉 살 때에 별안간에 그 큰 집에서 쫓겨3)나면서 몰락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세가 기운 이후 방정환의 집은 사직동 도정궁 앞의 초가로 이사했고, 그의 조부와 부친은 권병덕4)의 소개로 인쇄소 직공으로 취직5)하여 생계를 유지하게 되었으나 경제적으로는 매우 궁핍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매우 명랑하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리더십을 갖추고 있었다. 이는 1908년에 조직된 소년입지회의 활동을 통해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방정환 소년시절

방정환 소년시절ⓒ독립기념관

한편 방정환은 5세 때인 1903년부터 7세 때인 1905년까지 할아버지로부터 천자문을 배우는 한편 1905년 두 살 위인 삼촌을 따라 보성소학교에 갔다가 교장 김중환()의 눈에 띄어 머리를 깎고 보성소학교 유치반에 입학하였다.6) 이후 방정환은 1909년 사직동에 위치한 매동보통학교 1학년에 입학하였고 사직동에서 근동으로 이사하여 12살 때인 1910년 10월 미동보통학교 2학년으로 전학하였으며, 1913년 3월 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7)

1913년 미동보통학교를 졸업한 방정환은 할아버지의 권유로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것은 가난한 방정환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1920년 일본 유학을 떠나 야나기 무네요시()가 교수로 재직 중이던 도요대학()에 입학하여 수학하였으나 학업보다는 천도교 활동에 치중하여 졸업하지 못하고 귀국하였다.

민족운동에 투신

방정환의 민족운동은 천도교를 바탕으로 전개되었다. 소년입지회와 경성청년구락부는 물론이고 천도교소년회와 천도교청년회 활동 역시 마찬가지였다. 소년입지회와 경성청년구락부는 천도교가 전면에 나선 것은 아니었으나 천도교소년회와 천도교청년회의 활동은 천도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1) 청년운동

방정환이 최초로 사회운동에 참여한 것은 1908년 조직된 소년입지회를 통해서였다. 방정환의 일생에서 최초의 조직 활동8)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소년입지회는 일종의 토론회로서 8~9명의 회원으로 조직되었다.9) 소년입지회는 점차 규모가 커져서 1910년에는 회원수가 16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리고 방정환은 이 소년입지회의 총대장으로서 훈련원에서 대운동회를 개최하거나 대한문에서 경축행사를 가진 일, 장충단으로의 소풍, 성북동에서의 밤줍기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10)

방정환은 1913년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공부에는 뜻이 없었고, 신문화를 흡수하기 위해 독서에 주력하였다. 14살 때인 1914년을 전후로 최남선이 발간한 『소년』, 『붉은저고리』, 『새별』 등을 탐독하였다.11) 그러던 중 방정환은 졸업을 1년 앞 둔 시기에 선린상업학교를 중퇴하였다.

이후 그는 토지조사국에 사자생으로 취직하며, 독학할 것을 결심하였다. 사자생의 임금은 하루에 20전, 한 달에 대략 5원 내외였다.12) 이시기 방정환은 적은 월급으로 인해 매우 궁핍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1917년 그는 권병덕의 중매로 천도교주인 손병희의 딸 손용화와 결혼하면서 경제적 곤궁상태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며, 사회경제적으로도 주목받는 인물이 되었다. 1918년 7월 7일 방정환은 이중각과 함께 경성청년구락부를 발기, 조직하여 회장 이복원(), 부회장 이중각()을 선출하고, 문예부, 체육부, 음악부를 두었다.13)

경성청년구락부는 방정환이 소년입지회의 활동의 연장선에서 조직된 것으로 판단된다. 소년입지회를 졸업할 정도의 나이인 14세부터의 청소년들로 경성청년구락부를 조직한 것으로 확인되는데, 유광렬은 이 경성청년구락부가 1918년 무렵 회원이 200여명이었다고 증언하였다.14) 이로 보아 방정환은 소년운동단체를 청소년운동단체로까지 확장하여 지속적으로 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경성청년구락부는 음악회 개최, 연극 공연, 회원의 친목을 도모하는 모임 등 계몽활동을 주로 전개하는 한편 기관지 성격을 갖는 잡지『신청년』을 발간하였다. 이러한 경성청년구락부의 활동은 1920년대 초 우리 실력양성운동의 흐름과 일치한다. 특히 잡지『신청년』의 발행을 통해 자신들의 논리와 활동을 전파하였다.

한편 3․1운동을 주도적으로 지도한 천도교는 3·1운동 이후의 제반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문화통치를 선언한 일제의 지배정책을 이용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신지식을 수용한 천도교의 젊은 지도층을 중심으로 1919년 9월 2일 경성에서 이돈화, 정도준, 박래홍, 박달성 등이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이하 교리강연부)를 조직하였다.

방정환은 박래홍, 손재기, 이돈화, 황경주, 최혁, 박용회와 함께 간의원으로 선출되어 교리강연부의 지도부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교리강연부는 1920년 4월에는 보다 구체적이면서 적극적으로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천도교청년회라 개칭하였다. 천도교청년회는 1920년 6월에는 개벽사를 설립하여 이돈화, 박달성 등이 중심이 되어 월간지 『개벽』을 발간하였다. 방정환도 『개벽』의 기자로 활동하였다.

개벽사 전경(방정환, 이정호, 최영주, 윤석중)

개벽사 전경(방정환, 이정호, 최영주, 윤석중)

1921년 일본 유학을 위해 동경에 도착한 방정환은 천도교청년회 동경지회의 설립을 추진하였다. 동경지회는 1921년 1월 10일 발기인 대표 방정환을 비롯하여 김상근, 이기정, 정중섭, 박달성 등이 발기한 후 1월 16일 오후 1시 조도전() 학권정() 302호 대선관()에 모이라고 광고하였다. 여기에는 방정환, 김상근, 이기정, 정중섭, 이태운, 박춘섭, 김광현, 박달성 등 10여 명이 모였고, 5~6명은 참석하지는 못하였으나 주소와 성명을 통지하였다.

1921년 4월 5일 수운 최제우가 동학을 창도한 것을 기념하는 천일기념식을 올리고 오후 3시부터 소석천정() 차고 앞에 있는 보정() 2층에서 천도교청년회 동경지회 발회식이 개최되었다. 보정의 문기둥에는 궁을기가 내걸리고 정면에는 ‘천도교청년회동경지회발회식’이라고 하는 간판이 걸렸다. 회장 방정환의 개회사에 뒤이어 내빈으로는 학우회 회장 김종필, 동우회 회장 김봉익, 동아일보 특파원 민태원, 매일신보 특파원 홍승서, 각 대학 동창회 대표, 여자흥학회 회장 유영준, 그리고 10여 명의 축사가 있었다. 천도교청년회 동경지회의 조직 이후 방정환은 1921년 11월 10일 태평양회의를 계기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려 했다는 혐의로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었다.15)

천도교청년회 동경지회 외에도 동경에는 1922년 1월 천도교 동경전교실을 설치하였다. 동경전교실의 주요 구성원은 방정환을 비롯하여 민석현, 박달성, 이기정, 김상근, 이태운, 구중회, 고경인, 박영환, 강영호, 김의진, 배기원, 정일섭, 정중섭 등이었고, 박사직이 동경전교사로 임명되어 1922년 7월 부임하였다. 이렇게 조직된 천도교청년회 동경지회는 1921년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3개반의 강연대를 조직하여 천도교 진리의 선전과 현대사상의 고취를 목적으로 조선 각지를 순회하는 강연회를 조직하였으며, 방정환은 이와 같이 천도교 청년단체의 변천과 활동 과정에서 각 지역에서 이루어진 강연회의 강사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2) 3․1운동

한편 경성청년구락부 조직 이후 방정환은 천도교주 손병희의 사위로서 교내에서도 상당한 주목을 받는 위치가 되었다. 이러한 관계로 방정환은 손병희가 기독교세력과 3․1운동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더욱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당시의 민족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젊은 지식인들에게 희망이 되고 있었다.

경성청년구락부는 이러한 시대 분위기 속에서 청년들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였다. 그리하여 1918년 송년회 자리에서 이들은 청년구락부를 중심으로 민족운동을 일으키자는 논의를 하였다. 방정환 역시 이들의 의견에 동조하였는데 1918년 송년회에서 그가 연출한 연극 ‘○○령’의 ‘○○령’은 ‘민족동원령’을 의미하였다. 즉 전 민족을 동원하여 일제의 지배로부터 민족의 독립을 이루자는 것이었다. 이 연극의 대본은 방정환이 쓴 것으로 청년기에 접어드는 민족에 대한 방정환의 생각을 잘 알려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나 아쉽게도 현재 이 연극의 대본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얼마 뒤인 1919년 1월 유광렬이 방정환을 방문하였을 때 방정환은 유광렬에게 경성청년구락부의 민족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은 요지의 발언을 하였다고 한다.

“우리가 청년구락부를 동원하여 한번 소리쳐 보자고 한 것은 어른들이 아무 소식이 없으니까 답답하여서 우리들로라도 무엇이나 하여 보려 하였던 것인데 손선생님은 벌써 지난해 여름부터 세계적 대조류인 민족자결의 원칙에 의지하여 조선민족도 독립운동을 일으키도록 여러 수제자들과 지방 두목에게 지시하여 지금 모든 준비가 집행 중이니 우리 청년들이 섣불리 하는 것보다 어른들이 하는 일에 심부름이나 힘써 하자는 것이었다.”16)

이러한 언급에서 우리는 방정환이 장인인 손병희를 통해 3․1운동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을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는 3․1운동의 전개과정에서 청년들의 역할로 ‘어른들의 심부름이나 힘써 하자’는 것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방정환은 3․1운동에서 청년들의 역할은 민족지도자들의 활동을 뒷받침하는 것에 두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방정환의 주장에 대해 경성청년구락부의 회장과 부회장이었던 이복원과 이중각의 반응은 알 수 없으나 현재까지 경성청년구락부가 3․1운동에 조직적으로 참여하였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으므로 방정환의 주장이 수용되었다고 판단된다.

그렇다면 방정환은 어떠한 방법으로 민족지도자들의 활동을 뒷받침하였을까. 이에 대해서는 역시 유광렬과 이태운의 회고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유광렬과 이태운의 회고에 따르면 방정환은 유광렬과 함께 재동의 방정환의 처가에서 등사판으로 『독립신문』을 출판하여 시민에게 돌렸다고 한다. 『독립신문』은 1919년 3월 1일 이른바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며 인쇄소 보성사의 사장이던 이종일이 발의하여 윤익선의 명의로 발간된 지하신문이다.

『독립신문』은 1만장 혹은 1만 5천장이 발행되었는데, 시가행진하는 군중에게 나누어주기도 하고 새벽에 15~16세의 남녀학생들이 다른 신발은 소리가 난다 하여 짚신을 신고 밤을 새워 배달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조선총독부 경찰이 방정환의 집을 포위하고 수색하려 하자 방정환이 민첩하게 등사판과 원지를 자기 집 마당의 우물에 넣어 증거를 없애 무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경찰은 방정환을 체포하여 일주일 동안 구금하면서 온갖 고문을 가하였으나 방정환은 자백을 하지 않았고, 석방된 이후 방정환은 비밀장소에서 계속 『독립신문』을 발행하였다고 한다.

(3) 소년운동

방정환은 1920년 「어린이 노래」(『개벽』3, 1920)를 번역하여 소개하면서 어린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즉 방정환은 ‘어린이’라는 용어를 ‘늙은이’, ‘젊은이’라는 용어와 대등한 의미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하였다. 이는 어린이를 비하하거나 낮추어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존중하여 부르자는 의미라 생각된다.

이렇게 어린이라는 용어에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고 강조했던 그이지만 소년이라는 용어도 계속 사용하였다. 그는 어린이를 대략 10세 정도로, 10세 이상의 연령이 높은 어린이는 소년이라 구분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오늘날 사회적으로 보통 인식되는 어린이와 소년의 연령은 그로부터 비롯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린이 창간호

어린이 창간호ⓒ독립기념관

어린이 7호

어린이 7호ⓒ독립기념관

혜성 창간호

혜성 창간호ⓒ독립기념관

방정환의 소년운동은 잡지 『어린이』의 창간 및 그와 관련된 활동, 천도교소년회를 중심으로 한 조직 활동, 그리고 색동회 등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이외에도 동화, 동요 등의 창작과 번역, 번안 등의 활동도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방정환의 소년운동은 『개벽』을 통해 그 필요성이 주장되고 논의되었다. 천도교 소년운동의 이론을 이끈 김기전은 「장유유서의 말폐」에서 전통사회의 유교적 제도와 체제가 소년의 인격을 말살했으며, 조선이 해방된 근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소년을 해방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바탕에서 이돈화는 소년교육에 대해 언어 교육, 유희를 통한 교육, 의복과 침식 교육 등의 가정교육을 강조함과 동시에 유치원과 소년단 등을 통한 교육을 촉구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사람의 개조 본위는 온전히 아동문제에 있다”고 하였다.17) 그리고 이돈화는 어린이에게 경어를 사용할 것을 주장하였다.18) 김기전, 이돈화 등 천도교의 이론가들은 소년, 즉 어린이에 대해 ‘인간’으로서 대우할 것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천도교의 이론적 흐름을 실천하여 어린이운동의 선구가 된 인물이 방정환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이론적 틀 속에서 천도교청년회 포덕부 산하에 1921년 4월 지육체의 발육 방법과 실행을 강구하기 위해 소년부를 설치하였고, 5월 1일 어린이의 인격 옹호, 어린이의 정서 함양, 건전한 사회성의 함양을 목적으로 이를 천도교소년회19)로 개칭했던 것이다. 일본 유학 중이던 방정환은 방학기간을 이용하여 적극적으로 지도하여 방학이 끝나고 일본으로 떠날 때 400~500명에 달하는 회원을 확보하였던 것이다.

방정환은 1921년 무렵까지 강연활동에 주력하였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것은 방정환이 강연보다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동화구연에 집중하였기 때문이다. 강연이라 하더라도 1922년 이후의 주제는 주로 어린이와 관련된 것이 많았다. 특히 1925년 3월 20일부터 30일까지 『어린이』 창간 2주년 기념으로 서울을 비롯한 대구, 마산, 부산, 김천, 인천 등지에서 ‘소년소녀대회’를 열었을 때 그 선전포스터에 ‘방정환씨 출장 참석합니다.’라는 문구를 삽입하는 것만으로 대단한 광고 효과를 얻었다. 또 그가 천도교당에서 동화회를 열 때 입장권을 1,000매 발행했으나 늘 2,000여 명씩 와서 많은 사람들이 돌아가는 사태가 발생할 정도로 그의 동화회는 각지에서 크게 환영을 받았다.

이와 같이 소년운동이 활발해지자 방정환이 이를 보다 확산시키기 위해 소년운동의 지도적인 잡지라 할 수 있는 『어린이』를 1923년 3월 20일 창간하였다. 창간 이후 『어린이』는 독자가 급증하여 1925년 신년호의 경우 발간 7일만에 매진되어 3판까지 발행할 정도였다.20) 이와 같이 3판까지 인쇄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개벽』 이후 최초의 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방정환이 『어린이』 창간부터 편집을 담당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방정환이 일본 유학 중인 관계로 김옥빈()을 편집 및 발행인으로 두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방정환이 담당하였다고 한다.21) 방정환은 1925년 8월에 발간된 『어린이』31호부터 1931년 2월에 발간된 82호까지 『어린이』의 편집과 발행을 담당하였다. 방정환이 병으로 눕고 사망하기 전까지 『어린이』의 편집과 발행을 담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방정환은 『어린이』의 창간부터 자신의 사망 때까지 『어린이』와 함께 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방정환은 1923년 3월 16일 동경 센다가야 온덴() 101번지 방정환이 하숙하던 집에서 방정환, 강영호, 손진태(와세다대학), 고한승(니혼대학), 정순철, 조준기(이상 도요대학), 진장섭(도쿄고등사범학교), 정병기 등과 함께 어린이문화단체인 색동회를 조직하였다. 색동회 조직 과정에서 진장섭과 방정환의 제안에 따라 어린이날 제정을 주장하였다.

색동회 회의록(1923.3.16.)

색동회 회의록(1923.3.16.)

어린이 날

이와 같이 방정환을 중심으로 한 소년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는 과정에서 조선소년단, 조선소년군, 불교소년회 등도 조직되었다. 방정환은 1923년 4월 17일 이들 단체 등 40여개의 소년운동단체와 함께 조선소년운동협회를 조직하였다. 그리하여 어린이날을 조선소년운동협회가 주관하게 되었던 것이다.

방정환과 색동회 회원

방정환과 색동회 회원ⓒ독립기념관

방정환 어린이날 기념식

방정환 어린이날 기념식ⓒ독립기념관

그러나 1920년대 중반 이후 소년운동계에 사회주의가 확대되고 민족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함에 따라 방정환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계열에서는 조선소년협회, 사회주의계열에서는 오월회라는 소년운동의 연합기관을 조직하여 소년운동은 분열되었다가 1927년 민족유일당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방정환을 위원장으로 한 조선소년연합회가 10월 16일 조직되었다.

맺음말

이상에서 방정환의 민족운동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의 삶을 정리하면, 첫째, 그는 상인집안의 매우 유복한 가정에서 출생하였으나 9살 무렵 가세가 몰락하여 어려운 생활을 영위하였다. 이 시기 그는 할아버지로부터 천자문을 배우는 한편 보성소학교에 입학하였다가 매동보통학교를 거쳐 미동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중퇴하였고, 손병희의 사위가 된 이후에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둘째, 그는 시천교 계통의 소년입지회의 회장으로 활동하였고, 1918년에는 경성구락부를 조직하여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 3·1운동 이후에는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 천도교청년회, 천도교청년당, 천도교청우당 등 천도교의 청년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일본 유학과 잡지 『개벽』의 기자로서도 활동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각종 강연회의 연사로서 참여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하였다. 강연주제는 크게 천도교와 관련된 주제, 소년 혹은 어린이와 관련된 주제, ‘잘 살기 위하여’와 같이 삶의 방향성에 대한 주제로 나눌 수 있다. 이는 그가 천도교라는 종교 속에서 활동을 전개하였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셋째, 경성청년구락부 활동 과정에서 이른바 ‘민족대표’ 등의 어른들의 활동을 뒷받침하는 것이 청년의 역할이라 생각하고 활동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3·1운동 때 ‘민족대표’를 뒷받침하여 『독립신문』을 출판하여 시민에게 돌리는 활동을 전개하다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기도 하였다.

넷째, 그는 소춘 김기전과 함께 1921년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였고, 1923년에는 잡지 『어린이』를 창간하고 어린이날을 제정하는 등 소년운동을 주도하였다. 특히 어린이날은 그가 일본에서 색동회를 조직함과 동시에 추진한 일이었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 여타의 민족운동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계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소년운동에서도 민족주의계열의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소년운동단체는 방정환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계열에서는 조선소년협회, 사회주의계열에서는 오월회라는 소년운동의 연합기관으로 분화하였다.

1931년 7월 10여년에 걸쳐 소년운동 뿐만 아니라 청년운동 등의 민족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였던 그는 무리한 활동으로 신장염과 고혈압으로 만 31세의 짧은 삶을 마감 하였고, 대한민국정부는 1990년 방정환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방정환 영결식

방정환 영결식

방정환의 묘(망우리)

방정환의 묘(망우리)

[네이버 지식백과]방정환 [方定煥] - 어린이의 영원한 벗, 건국훈장 애국장 1990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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