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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라 모더존-베커
[Paula Modersohn-Becker]
독일 표현주의의 선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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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엔진, 열정
“나는 가늘고 길게 살기보다 짧고 굵은 삶을 살기를 바란다.” -이븐 시나
철이 들면서, 삶과 죽음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과연 운명의 여신은 나의 생명줄을 어떻게 재단할까?
그리스신화에 따르면 운명의 여신 3인조클로토Klotho, 라케시스Lachesis, 아트로포스Atropos는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클로토는 생명의 실을 잣고, 라케시스는 실을 팽팽하게 펴거나 감기도 하고, 아트로포스는 수명이 다하는 순간 가위로 매정하게 실을 자른다.
16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몽테뉴는 『수상록』에서 인간의 생명줄이 얼마나 허망하게 끊어지는지 여러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너는 얼마나 바보스러운가. 도대체 누가 네 수명을 정해주었단 말인가. …… 아이스킬로스는 집이 쓰러진다는 예언에 겁이 나 옥외에서 살았으나 소용없었다. 그는 하늘을 나는 독수리 발에서 떨어진 거북에 맞아 죽었다. …… 어떤 자는 포도 씨 한 알 때문에 죽었고, 어떤 황제는 머리카락을 빗다가 빗에 찔린 상처 때문에 죽었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는 자기 집 문지방에 발이 걸려서, 아우피디우스는 회의실에 들어가다 문에 머리를 받혀 죽었다. …… 재판관 베비우스는 판결 집행을 일주일 연기해 주는 동안에 가련하게도 제 생명의 기한이 끝나서 저승으로 잡혀 갔다. 그리고 의사 카리우스 율리우스는 한 환자의 눈에 약을 발라주다가 죽음이 와서 그의 눈을 감겨주었다. …… 그러니 어떻게 죽음이 항상 우리의 목덜미를 잡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짧게, 혹은 길게 살기에 관한 결정권은 운명의 여신에게 있겠지만 삶의 넓이와 깊이를 선택하는 일은 나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생명의 토양을 깊숙이 파고 들어가는 삶을 추구했던 나의 롤모델role model 중에는 20세기 독일의 표현주의 화가 파울라 모더존 베커Paula Modersohn-Becker가 포함되어 있다.
그녀는 31세로 요절했지만 독일의 국민 화가, 페미니즘 아티스트의 선구자라는 찬사를 받을 만큼 미술사에 업적을 남겼다. 1927년, 브레멘의 뵈트혀 슈트라세에는 파울라의 예술적 업적을 기리는 ‘파울라 모더존 하우스’라는 미술관이 설립되었다. 이 미술관은 여성 예술가를 기념하는 최초의 미술관으로도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파울라 모더존 베커, 〈어머니와 아이〉 1907년, 캔버스에 유채
짧지만 강렬했던 파울라의 삶과 예술을 그림을 통해 체험해보자.
인물화의 주인공은 어머니와 아기, 배경은 독일 브레멘 근교의 시골 마을 보르프스베데Worpswede다. 화가는 야외에서 젊은 엄마가 아기를 품에 안고 있는 평화로운 순간을 화폭에 묘사했다. 여성 화가답게 주제는 모성애를 선택했지만 화면에서 여성 특유의 섬세함이나 부드러움은 찾아보기 힘들다. 색조는 가라앉았고, 물감은 자갈처럼 울퉁불퉁하게 칠해졌으며, 붓질은 거칠다. 이른바 ‘위대한 단순함’으로 불리는 파울라식式 화풍으로 그려졌다.
파울라는 미술의 전통과 관습을 따르지 않고 독특한 방식으로 작업했다. 스케치를 하지 않고 곧바로 화폭에 그림을 그렸다. 대상을 꼼꼼하게 묘사하는 대신 뭉툭한 붓으로 단순하고 투박하게 표현했다.
남성들이 화단을 지배하던 시절, 미술계의 아웃사이더인 여성 화가가 독창성을 강조하는 파격적인 제작 방식을 선보였으니 스스로 불행을 자초한 셈이었다. 그녀는 1899년 브레멘 미술관에서 열린 첫 번째 전시회에서 새로운 화풍을 시도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다. 비평가 피트거는 ‘자격 미달’, ‘초보자의 습작’, ‘예술에 대한 모독’이라는 혹평을 퍼부었다. 충격을 받은 파울라는 전시 5일 만에 자진해서 작품을 철수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비평가의 조롱과 비난은 파울라의 예술 의지를 불태우는 결과로 나타났다.
그녀는 좌절하는 대신 예술의 메카인 파리 유학을 선택했다. 원하는 길을 가라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던 것이다. 그녀는 파리에서 체류하는 동안 아카데미 콜라로시에 등록해 미술 수업을 받았고, 루브르 미술관, 파리 만국박람회 그랑 팔레 전시관을 방문하는 등의 예술 현장 체험을 통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다.
삶의 에너지를 재충전한 그녀는 1901년 독일로 돌아와 친구이며 동료 화가인 오토 모더존Otto Modersohn과 결혼했다. 열한 살 연상의 남편 오토 모더존은 열린 마음의 소유자였다. 아내의 예술적 재능을 확신하고 미술계에 홍보하는 역할을 도맡았다.
하지만 안정된 결혼 생활도 독립된 생활과 창작의 자유를 갈망하는 파울라의 영혼을 잠재우지는 못했다. 누구의 아내로 살기보다 자신에게 충실하고 싶었던 그녀의 속내는 친구인 시인 릴케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드러난다.
“이제 어떻게 서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나는 더 이상 모더존이 아니고 그렇다고 파울라 베커도 아니거든요. 나는 나입니다. 그리고 점점 더 내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아마도 모든 싸움의 최종 목표가 될 겁니다.”
파울라 모더존 베커, 〈동백나무 가지를 든 화가(자화상)〉 1907년, 목판에 유화
그녀는 창조 에너지가 고갈되었다는 경보음이 울릴 때마다 가정을 떠나 홀로 파리로 건너가 예술혼을 불태우곤 했다. 파리에서 성취감과 자신감을 되찾은 그녀는 남편과 어머니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여보, 나는 이제 새 삶을 시작하니 방해하지 말고 허락해주세요. 너무 아름다워요. 지난주에 나는 취한 것처럼 살았어요. 정말 좋은 작품을 완성했다고 생각했거든요.”
“엄마. 언제나 바빠요. 아주 가끔씩 쉬고 다시 목표를 향해 돌진하곤 해요. 때때로 내가 사랑이 부족하게 보일 때면 이 점을 고려해주세요. 내 힘을 단 한 가지에 집중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이것을 이기주의로 불러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그것은 가장 고귀한 것이에요.”
1907년 파리 체류를 끝낸 후 그녀는 더 이상 가정을 떠나지 않는다. 예술적 자유만큼이나 소중한 무언가를 얻었다. 결혼 6년 만에 간절히 바라던 임신을 한 것이다.
이제 그녀는 모성이 주제인, 임신을 상상한 자화상을, 아이들이 주인공인 인물화를 그리면서 허전함을 달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파울라는 1907년 11월 2일, 딸 마틸데를 출산하고 3주 후 색전증塞栓症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녀는 비록 31세에 요절했지만 자신의 삶을 완성하고 세상을 떠난 셈이다.
단 한순간도 예술적 재능과 시간을 낭비하지 않은데다 간절히 바라던 자식도 얻었으니 생의 절정에서 인생을 마감했다고 볼 수 있다. 파울라의 열정적인 삶은 내게 매순간 자신에게 집중하면서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지금 이 순간 아트로포스가 ‘타임아웃’이라고 외치면서 생명줄을 자를지라도 미련을 갖지 않도록 치열하게 삶을 살아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의 양보다 질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고. 파울라처럼 삶을 축제로 받아들여야한다고 말이다.
“내가 아는데 나는 오래 살지 못할 것 같다. …… 내 삶은 하나의 축제, 짧지만 강렬한 축제다. 마치 나에게 주어진 짧은 시간에 모든 것, 전부를 느껴야 하듯 나의 감각은 점점 더 예리해진다. …… 내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내 안에서 사랑이 한 번 피어나고, 좋은 그림 세 점을 그릴 수 있다면 나는 손에 꽃을 들고 머리에 꽃을 꽂고 기꺼이 이 세상을 떠나겠다.”
-파울라 모더존 베커의 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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