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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알고싶다] - 노벨 "유언장"?...
2017년 11월 03일 00시 43분  조회:5025  추천:0  작성자: 죽림

 
출생 1833. 10. 21, 스웨덴 스톡홀름
사망 1896. 12. 10, 이탈리아 산레모
국적 스웨덴

요약 다이너마이트 및 그보다 더 강력한 폭발물들을 발명했으며 노벨상을 제정했다. 
주로 가정교사에게서 교육을 받은 노벨은 16세에 벌써 유능한 화학자가 되었으며, 영어·프랑스어·독일어·러시아어·스웨덴어 등에 능통했다. 1850년 러시아를 떠나 파리에서 1년 동안 화학을 공부했다.스웨덴으로 되돌아온 노벨은 니트로글리세린을 규산질 충전물질인 규조토에 스며들게 하여 건조시키면 안전하게 취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발견하고서 마침내 완벽한 다이너마이트와 그에 필요한 뇌관을 만들어냈다. 영국(1867)과 미국(1868)에서 다이너마이트 특허권을 따낸 그는 폭발성 젤라틴을 개발하여 1876년 특허를 땄다. 인도주의적이고 과학적인 자선사업에 돈을 아끼지 않았으며, 재산의 많은 부분을 기금으로 남겨 오늘날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있는 상이 된 노벨상이 제정되었다.

 
Alfred Nobel
Alfred Nobel

다이너마이트 및 그보다 더 강력한 폭발물들을 발명했으며 노벨상을 제정했다.

외가 쪽의 조상으로는 림프관에 대한 논문(1653경)으로 유명한 스웨덴 자연학자 올로프 루드베크가 있다.

그는 아버지 이마누엘 노벨에게서 공학의 기초를 배웠으며 아버지를 닮아 발명에 재주가 있었다. 1842년 식구 모두 스톡홀름을 떠나 아버지가 있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사했다. 주로 가정교사에게서 교육을 받은 노벨은 16세에 벌써 유능한 화학자가 되었으며, 영어·프랑스어·독일어·러시아어·스웨덴어 등에 능통했다. 1850년 러시아를 떠나 파리에서 1년 동안 화학을 공부했고, 그뒤 미국으로 가서 장갑함 모니터호(號)를 만든 존 에릭슨의 지도를 받으며 4년 동안 일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뒤에는 아버지가 경영하던 공장에서 일했다(공장은 1859년 파산했음).

스웨덴으로 되돌아온 노벨은 폭발성 액체 니트로글리세린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1864년 공장이 폭발하여 막내 동생 에밀을 비롯하여 5명이 목숨을 잃었다. '미치광이 과학자'로 낙인찍힌 데다가 스웨덴 정부도 공장의 재건을 허락하지 않자, 노벨은 배 위에서 니트로글리세린 취급에 따른 위험을 극소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실험을 시작했다.

그는 니트로글리세린을 규산질 충전물질인 규조토에 스며들게 하여 건조시키면 안전하게 취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발견하고서 마침내 완벽한 다이너마이트와 그에 필요한 뇌관(雷管)을 만들어냈다. 영국(1867)과 미국(1868)에서 다이너마이트 특허권을 따낸 그는, 더 강력한 다이너마이트를 개발하기 위한 실험을 거듭한 끝에 폭발성 젤라틴을 개발하여 1876년 특허를 땄다.

또 약 10년 뒤에는 최초의 니트로글리세린 무연화약이자 코르다이트 폭약의 전신인 발리스타이트(ballistite)를 만들었다. 그는 코르다이트 폭약도 자신의 특허권 범위 안에 든다고 주장하여 1894~95년 영국 정부와 격렬한 법정 소송을 벌였다. 그러나 노벨은 결국 이 소송에서 졌다. 그는 화약제조뿐 아니라 발사만으로는 폭발되지 않는 화약에 쓸 뇌관을 만들고 이를 완벽한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전세계에서 그에게 지불하는 화약류에 대한 사용료와 더불어 러시아 바쿠 유전지대의 대규모 부동산 덕택에 돈을 많이 벌었지만 그때문에 늘 여기저기 돌아다녀야 했다.

그렇지만 가능하면 은퇴하여 조용히 지내려 애썼으며, 결혼도 하지 않았다. 타고난 바탕이 평화주의자였던 노벨은 자기가 발명한 무기로 크고 작은 전쟁을 끝낼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인류와 국가들에 대한 견해는 비관적이었다. 그는 또한 문학에도 변함없는 관심을 기울였는데, 젊은시절에는 영어로 시를 쓰기도 했다. 후에 그의 서류뭉치 속에서 그가 쓴 소설의 초고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인도주의적이고 과학적인 자선사업에 돈을 아끼지 않았으며, 재산의 많은 부분을 기금으로 남겨 오늘날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있는 상이 된 노벨상이 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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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노벨 유언장 첫 공개 전시




(스톡홀름 AFP=연합뉴스)
노벨상을 창설하라는 유지가 담긴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장이 오는 13일(2015년 3월)부터 스웨덴 스톡홀름 노벨박물관에서 전시된다.


노벨의 유언장이 일반에 공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노벨박물관 측은 4일(현지시간) '유산'이라고 명명된 전시회의 일환으로 노벨 유언장을 공개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유언장은 한장 분량으로 반으로 접힌 채 금고에 보관돼 왔다.

스웨덴 출신의 학자이자 실업가인 노벨은 1896년 사망하면서 자신의 재산을 세계 평화와 문학, 물리학, 화학, 의학 등 5개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거둔 이에게 전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숨질 당시 그의 재산은 현재 가치로 환산해 20억 크로나(약 2천649억 원)에 달했다.

수상자들은 800만 크로나의 상금을 받고 매년 12월 스톡홀름에서 열리는 수상자 연회에 참석한다.

노벨이 유언장에서 시상 주관단체를 명시하고도 시상 방법은 언급하지 않아 첫 시상식은 사후 5년이 지난 1901년 처음 열렸다. 

경제학상은 1968년 스웨덴 중앙은행에 의해 제정된 뒤 매년 10월 다른 분야 노벨상과 함께 수상자가 발표된다.

이번 전시회는 오는 2015년 11월까지 이어지나 노벨의 유언장은 전시 기간이 단축될 수 있다고 박물관은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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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산은 유언집행인에 의하여 안전한 유가증권에 투자한다. 그 이자는 매년 그 전해에 인류의 복지를 위해서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들에게 상금형식으로 분배해야 한다….”

1896년 12월 10일 알프레드 노벨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친필 유언장이 공개되자 노벨의 가족 친지들은 경악했다. 특히 조카들은 삼촌이 어마어마한 재산을 상금으로 기부한데 대해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실망한 사람은 비단 가족만이 아니었다. 스웨덴 국민도 노벨이 재산을 조국을 위해 쓰지 않고 온 세계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로 한데 대해 비(非)애국적 처사라고 비난했다.(1) 이러한 논란 때문에 노벨의 유언이 집행되기까지는 5년의 세월이 흘러야 했다. 1901년 12월 10일 노벨의 5주기에 처음으로 노벨상을 수여했다.(2)

노벨이 남긴 재산은 당시 스웨덴 화폐로 3,323만크로나(US$770만)였다. 오늘의 물가수준(20배)으로 환산하면 6억6,460만크로나(1,850억원)의 거금이다. 노벨재단은 그동안 유가증권과 부동산에 투자하여 30억크로나로 불렸고,(3) 수상자는 부문당 790만크로나(11억원)를 받는다.

노벨은 왜 노벨상을 제정했을까? 정확한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노벨은 1891~1895년까지 3회에 걸쳐 직접 유언장을 작성했다. 다른 사람들은 유언장의 내용을 몰랐고, 노벨상 제정에 대한 어떠한 암시도 없었다. 이로 인해 노벨의 유언배경을 놓고 몇가지 억측이 있다.

그 하나는 노벨이 다이너마이트로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을 씻기 위해 재산을 내놓은 것이라는 추론이다. 이 추론에는 2가지 에피소드가 따라다닌다. 하나는 1888년 한 프랑스 신문이 낸 오보(誤報)이다. 노벨 형의 죽음을 노벨의 죽음으로 잘못 안 이 신문은 노벨을 ‘죽음의 상인’으로 묘사하여 노벨에게 충격을 주었다. 이것이 노벨의 인생관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1864년 발생한 폭발사고이다. 노벨이 운영하던 다이너마이트 원료 니트로글리세린 제조공장이 폭발하여 동생 에밀 등 5명이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고, 이것이 노벨의 유언장 작성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하지만 노벨재단이나 노벨연구자들은 이러한 추론을 부인한다. 노벨은 이상주의자였으며 개인이 큰 돈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오보사건이나 폭발사고, 그 어느 것도 노벨상 제정의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1833년 스웨덴 북쪽의 작은 도시에서 출생한 노벨은 사업적 성공과 실패한 인생이라는 양면이 교차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여 부와 명예를 쥐었지만 내성적이면서 괴팍한 성격과 우울증 등 심신의 병약으로 결혼조차 하지 않았다. 1896년 사망하기 직전에는 협심증과 심장발작으로 괴로워했다.

어려서부터 부친을 따라 러시아, 프랑스 등을 전전했던 그는 사망 당시 스웨덴 국적도 없었다. 이러한 인생역정이 그를 스웨덴이라는 작은 틀에 얽매이지 않고 전 세계로 눈을 돌리게 했으며 노벨상을 탄생시킨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1999/07/29 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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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벨의 유언장이 공개됐을 때 노벨을 비난했던 스웨덴 국민은 지금 ‘스웨덴=노벨상’이라는 등식에 매우 만족해한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노벨의 참뜻을 깊이 새기고 세계로부터 추앙받는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2) 첫 수상자로 X선을 발견한 독일의 뢴트겐(물리학상), 삼투압과 화학반응 속도를 연구한 네덜란드의 반트 호프(화학상), 디프테리아 혈청요법을 개발한 독일의 베링(생리의학상)이었다. 프랑스 시인 르네실리 프리돔이 문학상, 적십자를 창설한 스위스의 앙리 뒤낭과 국제평화동맹을 창립한 프레드릭 퍼시는 평화상을 받았다.

(3) 노벨재단은 재산을 불리기 위해 전문 펀드매니저를 두고 있고 부동산, 주식 등에 투자해 그 수익금으로 상금을 마련한다. 노벨재단은 유럽에서 무시할 수 없는 큰손이다. 그러나 비용을 줄이기 위해 직원은 9명으로 초미니 운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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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P Relax=GNN) –
노벨상을 재정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한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장이 처음으로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공개될 예정이다

현재까지 몇 명 안되는 사람만이 실물의 유언장을 본 적이 있다. 1895년 제작된 유언장은 현재 스톡홀름에 위치한 노벨 재단의 금고에보관되어있다. 그러던 것이 노벨 박물관이 새로운 전시회인 ‘유산’의 일환으로 유언장을 공개하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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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P Relax=GNN) – 노벨의 유언장. Alfred Nobel’s will and testament ©JONATHAN NACKSTRAND

“이번 전시회는 유언장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관심을 집중시켜줄 것이다. 유언장이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단지 단순한 서류이지만 오늘 날까지도 여전히 이 것이 노벨상에 대한 우리의 기본적인 작업을 제시하고 있다”고  전시회를 담당한 큐레이터 카린 존슨은 AFP와의 인터뷰에서 전했다.

“이번 전시회의 목적은 알프레도 노벨의 유산을 대중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대중은 그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고 전했다.

노벨상은 스웨덴의 가장 유명한 브랜드 중 하나이다.

유언장은 4장의 노란종이에 적혀져 있다. 검정 잉크로 오래 전 방식의 핸드 롸이팅 기법으로 쓰여졌다. 일부분은 얼룩이 져잇고 주석이나 덧붙인 부분을 양 옆 군데군데에서 볼 수 잇다.

다이나마이트의 창시자인 알프레도 노벨은 노벨상의 창시에 대해 26줄에 걸쳐 설명하고 있다. 이는 1페이지의 약 3/4에 해당되는 분량이다.  1896년 세상을 떠나며 그는 20억 크로나를 사회에 환원했다. 20억 크로나의 현재가치는   2억4100만 달러(약 2600억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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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
노벨상의 저울…1895년 노벨,유언장 작성

입력 | 2003-11-26 18:37:00

 



100여년을 헤아리는 노벨상의 역사는 고귀한 명예와 빛나는 영광의 순간만으로 채워진 것은 아니었다. 수상자 선정을 둘러싸고 끊임없는 공정성 시비에 휘말려 왔다.

 

평화상은 물론 20세기 과학의 지표 역할을 해온 과학 분야마저 정치적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문학상은 스웨덴 한림원이 자국어 이외의 언어에 대한 무지(無知)를 드러내고 있다는 혹독한 비판에 직면해야 했다.

 

노벨위원회의 게이어 룬데슈타트는 “아마도 가장 큰 잘못은 마하트마 간디에게 상이 수여되지 못한 것이며, 하마터면 아인슈타인이 상을 받지 못할 뻔한 것”이라고 말했다.

 

1918년 독일의 과학자 프리츠 하버가 화학상을 수상하자 국제사회는 경악했다. 하버는 카이저 빌헬름 물리화학연구소 소장으로 있으면서 독가스를 제조했던 장본인. 그는 독가스 개발에 반대하는 부인과 이혼할 정도로 독일제국의 전쟁에 광신적이었다.

 

1970년대 들어 노벨평화상은 비난을 넘어서 냉소를 받기에 이른다.

 

1973년 미국의 헨리 키신저와 공동 선정된 베트남의 레 둑 토가 상을 거부한 데 이어 그 다음해에는 사토 에이사쿠 당시 일본 총리에게 상이 돌아갔다. 사토는 일본의 비핵 평화정책을 “난센스”라고 비웃었으며 부패혐의까지 받은 정치인이었다.

 

노벨위원회는 데탕트에 뒤이은 국제사회의 ‘새로운 거래’에 과도하게 반응했던 것이다.

 

노벨 자신도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역설과 모순으로 가득 찬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는 비관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이상주의자였다. 동시대인들에게 자유주의자, 심지어 사회주의자로까지 비쳤으나 그 자신 민주주의를 불신하고 인류의 미래를 낙관하지 못했다.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노벨위원회는 수상 논란에 대해 “여러 해 동안 과오가 저질러진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라며 “진짜 놀라운 일은 과오가 극히 드물게 저질러졌다는 점”이라고 밝힌 바 있다.

 

아마도 노벨상 운영이나 노벨의 생애에 대해 그 이상의 적절한 평가는 없을 것 같다.

 

/동아일보 이기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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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의 유언장


다음은 노벨상의 제정을 명기한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장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나의 전 재산을 아래와 같은 방식으로 처리할 것을 밝혀둔다.
원금은 나의 집행인들에게 맡겨 안전한 곳에 투자해 기금을 조성하게 하고, 거기서 나오는 이자는 지난해 인류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들을 선정해 상을 주는 형태로 매년 지급하도록 한다. 앞서 언급한 이자는 5개 부문에서 공헌한 사람들에게 골고루 분배하도록 한다. 첫째, 물리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나 발명을 한 사람, 둘째 화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나 발명을 한 사람, 셋째 생리학이나 의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나 발명을 한 사람, 넷째 문학 분야에서 가장 탁월한 이상주의적인 경향의 작품을 쓴 사람, 다섯째 국가간 우애를 돈독히 하거나 군대를 폐지 또는 축소시키거나 평화회담을 주창·개최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이다.

물리학상과 화학상은 스웨덴 왕립 과학 아카데미에서 수여하도록 한다. 생리학·의학상은 스웨덴 스톡홀름의 캐롤라인 연구소에서 수여하도록 한다. 문학상은 스톡홀름 아카데미에서 수여하도록 한다. 평화상은 노르웨이 의회에서 선출된 5인위원회에서 수여하도록 한다. 상을 수여하는데 있어 어떠한 경우에도 후보자의 국적이 고려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따라서 상은 스칸디나비아인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수상할 가치가 있는 사람에게 수여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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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의 생애 

알프레드 베르나르드 노벨은 1833년 10월 21일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이마누엘 노벨과 카롤리나 노벨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이마누엘은 발명가이자 공학자로, 1827년 카롤리나 안드리에타 알셀과 결혼했다. 원래 이들 부부는 8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알프레드와 3명의 남동생을 제외하고는 모두 어렸을 때 죽었다. 어린 시절의 알프레드는 병약한 편이었으나, 어머니와의 사이는 상당히 친밀했다. 

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왕성한 지적 호기심을 보였으며 특히 폭탄에 관심이 많아 아버지로부터 공학의 기초를 배웠다. 한편 아버지 이마누엘은 그동안 벌여왔던 사업에 실패하자 1837년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게 된다. 거기서 이마누엘이 광산 발파용 폭탄과 공작기계를 제작해 성공을 거두자, 1842년 노벨 가족은 스톡홀름을 떠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아버지와 합류한다. 러시아에서 재기한 알프레드의 부모는 아들에게 개인 가정교사를 붙여줄 정도로 경제적인 여유를 회복하게 된다. 이에 힘입어 알프레드는 이미 16세에 유능한 화학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스웨덴어는 물론 영어·프랑스어·독일어·러시아어에도 능통하게 된다. 

알프레드 노벨은 1850년 러시아를 떠나 파리에서 1년간 화학을 공부한 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장갑함 모니터호(號)를 만든 존 에릭슨 밑에 들어가 4년간 일한다. 그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알프레드는 크림 전쟁기에 군수품을 만들어 납품하던 아버지의 공장에서 일하게 된다. 1856년 전쟁이 끝나자, 회사는 증기선 부품 제작에 손을 댔으나 경영난에 시달리다 1859년 파산하기에 이른다. 

알프레드는 부모와 함께 스웨덴으로 돌아왔으나, 남동생 로베르트 루드비그는 가족의 사업을 정리하기 위해 러시아에 남았다. 스웨덴으로 돌아온 직후 알프레드는 아버지 소유의 토지에 마련한 조그만 실험실에서 폭탄 제조 실험에 착수한다. 당시 광산에서 안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폭탄은 화약의 일종인 흑색화약이 유일한 제품이었다. 그 무렵 발견된 액체 폭탄인 니트로글리세린은 폭발성은 뛰어났지만, 휘발성이 강해 안전에 문제가 있었다. 

그럼에도 노벨은 1862년 니트로글리세린을 제조하기 위해 공장을 세우는 한편, 니트로글리세린의 약점인 이상폭발을 제어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연구를 시작한다. 그 결과 1863년 노벨은 금속용기에 니트로글리세린을 채운 다음 목제 점화 플러그를 끼워넣는 방식을 사용해 실용적인 뇌관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 간단히 말해, 점화장치에 설치한 소량의 흑색화약을 폭발시켜 액체 니트로글리세린의 폭발을 유도하는 방식이었다. 이 뇌관의 발명으로 노벨은 폭탄 제조자로서 부를 쌓아나가는 한편 발명가로서의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 1865년 노벨은 여기서 일보 전진해 '폭발성 캡슐'(blasting cap)이라는 뇌관을 발명한다. 폭발성 캡슐은 충격이나 적당한 열을 가하면 폭발하는 뇌산수은을 소형 금속용기에 채워넣어 만든 뇌관으로, 이의 발명과 함께 고성능 폭탄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니트로글리세린의 운반과 취급은 여전히 난제로 남아 있었다. 그만큼 니트로글리세린은 위험한 물질이었다. 1864년 노벨의 니트로글리세린 공장에서 일어난 폭발사고는 막내동생 에밀을 포함해 여러 명의 인명을 앗아갔다. 그러나 노벨은 이에 굴하지 않고 여러 기(機)의 니트로글리세린 제조 공장을 건립한다. 이들 공장은 그 당시로서는 안전수칙을 엄격하게 지켰으나, 우발적인 사고가 심심찮게 발생하곤 했다. 노벨의 생애에서 2번째 중요한 발명은 1867년 다이너마이트의 발명이었다. 노벨은 니트로글리세린을 투과성이 높은 규산이 함유된 규조토에 스며들게 해 말리면 사용과 취급이 훨씬 용이하고 편리하다는 사실을 우연히 발견하고는 이 새 제품에 다이너마이트('힘'을 뜻하는 그리스어 디나미스에서 따온 말)라는 이름을 붙여 영국(1867)과 미국(1868)에서 특허를 받았다. 다이너마이트는 노벨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 주었을 뿐만 아니라 굴착공사, 수로발파, 철도 및 도로 건설에도 곧바로 사용되었다. 


1870, 1880년대에 노벨은 유럽 전역에 다이너마이트 제조공장을 세우는 한편, 자기가 만든 폭탄을 생산·판매하기 위한 기업망을 구축한다. 이밖에도 노벨은 더 나은 폭탄을 개발하기 위한 실험을 계속해 1875년에는 훨씬 더 강력한 형태의 다이너마이트인 폭발성 젤라틴을 발명해 그 다음해 특허를 받는다. 이번에도 우연하게 이루어진 일로, 니트로글리세린 용액과 니트로셀룰로오스로 알려진 물질을 섞다 일반 다이너마이트보다 물 저항성과 폭발력이 뛰어난 물질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후 1887년 노벨은 최초의 니트로글리세린 무연화약이자 코르다이트 폭약의 전신인 발리스타이트를 개발한다. 노벨은 다이너마이트와 기타 폭약에 대한 특허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제조법을 도용한 경쟁자들과 다투다 특허권 소송을 벌이기도 했다. 

한편 노벨의 남동생 루드비그와 로베르트는 카스피 해 주변의 바쿠(옛날에는 러시아령이었으나 지금은 아제르바이잔령임) 근처에서 새로 발견된 유전을 개발해 갑부가 된다. 러시아에 있는 남동생들 회사에 대한 자기 몫의 지분과 전세계에서 거두어들이는 폭탄판매 수입액은 노벨에게 막대한 부를 안겨준다. 그후 1893년 노벨은 스웨덴의 군수산업에 뛰어들어 그 다음해인 1894년에는 베름란드 근처에 있는 보포르스의 제철공장을 사들인다. 뿐만 아니라 폭탄 외에도 인조 비단이나 가죽과 같은 물건들을 발명해 전세계적으로 총 350개 이상의 특허권을 따냈다. 

노벨의 복잡한 성격은 주변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사업 때문에 거의 1년 365일을 여행을 하면서 보내야 했지만, 노벨은 가끔씩 우울증에 시달리는 고독한 은둔자였다. 말년에는 은퇴해서 검약한 생활을 꾸려나갔지만, 저녁식사에 사람들을 초대하곤 했다. 그는 남의 말을 들어주는 능력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기지가 번득이는 사람이기도 했다. 연애보다는 발명을 더 좋아해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으며 문학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 희곡과 소설, 시를 썼으나 출간은 하지 않았다. 그는 에너지가 넘쳐났던 사람으로 한동안 집중해서 일하고 나서도 여간해서는 쉬려 들지 않았다. 동시대인들 사이에서는 자유주의자, 심지어는 사회주의자로 알려져 있었으나, 실상 그는 민주주의를 불신했을 뿐만 아니라 여성의 참정권을 반대했으며 부하직원들에게도 너그럽긴 했지만 가부장적 태도를 견지했다. 노벨은 근본적으로 평화주의자에다 자신이 발명한 폭탄들이 전쟁을 종식시키는 데 기여하기를 바랐으나, 인류와 국가들에 대한 견해는 비관적이었다. 노벨은 1895년까지 협심증으로 고생하다 그 다음해인 1896년 12월 10일 이탈리아 산레모에 있는 별장에서 뇌출혈로 사망했다. 사망 당시, 가히 제국이라 할 만한 세계적 규모의 그의 사업체 수는 폭탄 제조공장과 탄약 제조공장을 합해 90여 기를 넘을 정도였다. 그가 1895년 11월 27일 파리에서 작성해 스톡홀름의 한 은행에 보관해두었던 유언장이 공개되자, 가족과 친지는 물론 일반인들까지 깜짝 놀랐다. 노벨은 인도주의와 과학의 정신을 표방하는 자선사업에 늘 아낌없는 지원을 했으며, 재산의 대부분을 기금으로 남겨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있는 상으로 인정받고 있는 노벨상을 제정했다(노벨의 유언장 참조). 

우리는 노벨이 자신의 이름을 딴 상을 제정한 이유를 그저 추측할 따름이다. 노벨은 워낙 입이 무거웠던 편이라, 죽기 몇 달 전에도 자신의 결정을 아무한테도 알리지 않았다. 이 점과 관련해서는 1888년에 발생한 기괴한 사건이 그로 하여금 노벨상을 제정하게 한 계기로 작용한 게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이 가장 그럴듯하다. 기괴한 사건이란 알프레드의 남동생 루드비그가 그 해 프랑스 칸느에 머물다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프랑스 신문들은 루드비그의 사망을 보도했지만, 그와 알프레드를 혼동한 어느 신문에서는 '죽음의 상인, 사망하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이와 관련해 사람들은 노벨이 이 때이른 사망기사를 통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사후의 오명을 피하기 위해 상을 제정했을 거라는 추측을 하고 있다. 어쨌거나 분명한 사실은 알프레드 노벨이 설립한 상이 물리학, 화학, 생리학, 문학 분야에 대한 평생에 걸친 그의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평화상 설립과 관련해서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걸출한 평화주의자인 베르타 폰 주트너와의 교분이 강력한 동기로 작용했다는 설이 우세하다. 

그러나 노벨은 역설과 모순으로 가득찬 인물로 남아 있다. 비상하면서도 고독하고, 비관주의자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상주의자였던 그는 현대전에 사용된 강력한 폭탄을 발명했을 뿐만 아니라, 인류에 이바지한 지적인 업적에 수여하는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상을 제정하기도 했다. 



●노벨의 유언장 

"The whole of my remaining realizable estate shall be dealt with in the following way: the capital, invested in safe securities by my executors, shall constitute a fund, the interest on which shall be annually distributed in the form of prizes to those who, during the preceding year, shall have conferred the greatest benefit on mankind. 

The said interest shall be divided into five equal parts, which shall be apportioned as follows: 
one part to the person who shall have made the most important discovery or invention within the field of physics; 
one part to the person who shall have made the most important chemical discovery or improvement; 
one part to the person who shall have made the most important discovery within the domain of physiology or medicine; 
one part to the person who shall have produced in the field of literature the most outstanding work of an idealistic tendency; 
and one part to the person who shall have done the most or the best work for fraternity between nations, for the abolition or reduction of standing armies and for the holding and promotion of peace congresses. 

The prizes for physics and chemistry shall be awarded by the Swedish Academy of Sciences; that for physiology or medical works by the Karolinska Institute in Stockholm; that for literature by the Academy in Stockholm, and that for champions of peace by a committee of five persons to be elected by the Norwegian Storting. It is my express wish that in awarding the prizes no consideration be given to the nationality of the candidates, but that the most worthy shall receive the prize, whether he be Scandinavian or not." 


"나의 전 재산을 아래와 같은 방식으로 처리할 것을 밝혀둔다. 원금은 나의 집행인들에게 맡겨 안전한 곳에 투자해 기금을 조성하게 하고, 거기서 나오는 이자는 지난해 인류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들을 선정해 상을 주는 형태로 매년 지급하도록 한다. 앞서 언급한 이자는 5개 부문에서 공헌한 사람들에게 골고루 분배하도록 한다. 

첫째, 물리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나 발명을 한 사람, 
둘째, 화학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나 발명을 한 사람, 
셋째, 생리학이나 의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나 발명을 한 사람, 
넷째, 문학 분야에서 가장 탁월한 이상주의적인 경향의 작품을 쓴 사람, 
다섯째, 국가간 우애를 돈독히 하거나 군대를 폐지 또는 축소시키거나 평화회담을 주창·개최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이다. 

물리학상과 화학상은 스웨덴 왕립 과학 아카데미에서 수여하도록 한다. 생리학·의학상은 스웨덴 스톡홀름의 캐롤라인 연구소에서 수여하도록 한다. 문학상은 스톡홀름 아카데미에서 수여하도록 한다. 평화상은 노르웨이 의회에서 선출된 5인위원회에서 수여하도록 한다. 상을 수여하는데 있어 어떠한 경우에도 후보자의 국적이 고려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따라서 상은 스칸디나비아인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수상할 가치가 있는 사람에게 수여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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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와 문화의 가교 "한경"

‘죽음의 상인, 사망하다.’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해 막대한 부를 쌓은 알프레드 노벨은 55세이던 1888년 자신의 사망을 알리는 부음 기사를 접했다. 형 루드비그 노벨이 죽었는데, 한 프랑스 신문이 그가 죽은 것으로 잘못 알고 부음 기사를 실었던 것. 노벨은 자신이 ‘죽음의 상인’으로 불린 것에 충격을 받았다.

그 영향인지 노벨은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인 1895년 작성한 유언장에 이런 내용을 넣었다. “(나머지 재산으로) 기금을 마련해 거기에서 매년 나오는 이자로 지난해 인류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에게 상을 수여하길 바란다.” 1901년부터 수여된 세계 최고 권위의 노벨상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노벨은 1833년 10월21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태어났다. 9세에 아버지가 군수공장을 운영하고 있던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했다. 1864년 노벨가 소유의 니트로글리세린 폭약 공장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나 동생 에밀을 비롯해 5명이 숨지는 비극을 겪었다. 곧이어 아버지마저 뇌졸중으로 쓰러져 노벨이 공장 운영을 도맡아야 했다. 
 
노벨은 공장을 폐쇄하려고도 했다. 오랫동안 안전한 폭약을 만드는 연구를 했지만 계속 실패했고, 폭발 사고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느 날 한 직원이 들고 가던 양철통에서 니트로글리세린이 새어 나와 흙에 스며드는 것을 보고 다이너마이트를 만들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한다. 

/한국경제 임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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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백과

노벨상

[Nobel Prize음성듣기 ]

요약 스웨덴의 화학자 알프레드 노벨의 유산을 기금으로 하여 1901년에 제정된 상으로, 해마다 물리학, 화학, 생리학·의학, 경제학, 문학, 평화의 6개 부문에서 인류 문명의 발달에 공헌한 사람이나 단체를 선정하여 수여한다.
노벨상 시상식

노벨상 시상식노르웨이 오슬로.

분야 문화
주최기관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 노르웨이 노벨위원회
주최시기 및 기간 매년 12월 10일
개최장소 스웨덴 스톡홀름 (단, 평화상은 노르웨이 오슬로)
시작년도 1901년
시상내역 물리학, 화학, 생리학·의학, 문학, 평화, 경제학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고 이를 기업화하여 거부가 된 알프레드 노벨(Alfred B. Nobel)은 1895년 11월 27일 유언장을 남겨, ‘인류복지에 가장 구체적으로 공헌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그의 유산 약 3100만 크로네를 스웨덴의 왕립과학아카데미에 기부하였다. 이에 따라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는 이 유산을 기금으로 하여 노벨재단을 설립하고, 기금에서 나오는 이자를 해마다 상금에 충당하는 방식을 택하여 1901년부터 노벨상을 수여하고 있다.

노벨상은 물리학, 화학, 생리학·의학, 문학 및 평화, 경제학의 6개 부문으로 나누어, 해마다 각 선출기관이 결정한 사람에게 상금을 수여한다. 노벨재단은 스웨덴 정부가 임명하는 이사장이 관장하는 이사회에서 관리하며, 수상자 심사는 물리학과 화학상은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 생리·의학상은 스톡홀름에 있는 카롤린의학연구소, 문학상은 스웨덴·프랑스·에스파냐의 세 아카데미, 평화상은 노르웨이 국회가 선출한 5인위원회가 분담한다. 

1969년부터는 경제학상이 신설되었는데, 이 상은 노벨기금과는 별도로 1968년 스웨덴국립은행의 창립 300주년기념사업의 일환으로서 제정된 것으로, 수상자는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에서 선출한다. 각 선출단체는 소속 의원, 과거의 노벨상 수상자, 각국의 학자·작가에게 후보자 추천을 의뢰하고, 추천서를 접수한 각 단체는 극비리에 몇 사람으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심사한 후 지명 공시한다.

수상식은 노벨의 사망일인 매년 12월 10일에 스톡홀름에서 거행되는데, 소개사는 수상자의 모국어로, 추천사는 스웨덴어로 하며, 보통 스웨덴 국왕이 임석하여 시상하도록 되어 있다. 단, 평화상은 같은 날 노르웨이의 오슬로에서 시상한다. 수상자는 시상식 후 6개월 안에 수상업적에 관한 강연을 할 의무가 있으며, 강연 내용의 저작권은 노벨재단에 귀속된다. 상은 금메달·상장·상금으로 구성되는데, 상금은 이자율의 변동, 수상 해당자가 없었을 때의 기금의 증가 등으로 매년 그 금액이 다소 다르다. 또, 한 부문의 수상자가 2명 이상일 경우에는 해당 부문의 상금을 분할하여 지급한다. 

과거의 유명한 수상자로는 물리학상과 화학상의 두 부문을 수상한 마리 퀴리(프랑스), 부부가 함께 화학상을 수상한 퀴리 부부(프랑스;피에르 퀴리와 마리 퀴리) 및 졸리오 부처(프랑스;장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와 이렌 졸리오퀴리), 문학의 어니스트 헤밍웨이(미국), 평화상의 알베르트 슈바이처(프랑스) 등이 있는데, 마리 퀴리와 이렌 졸리오퀴리는 모녀간이어서 더욱 이채롭다.

2000년 노벨평화상은 한국과 동아시아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그리고 특히 북한과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 노력한 김대중 대통령이 한국인 최초로 수상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노벨상 [Nobel Prize]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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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상을 노르웨이가 선정하는 이유

노벨상 6개 부문 중 노벨 평화상 수상자를 스웨덴의 왕립 과학아카데미나 한림원이 아니라 노르웨이 노벨위원회(The Norwegian Noble Committee)가 선정하는 이유는 뭘까. 
노벨 평화상 수상자를 노르웨이에서 결정하게 된 것은 노벨의 유언에 따른 것인데 노벨이 평화상만을 유독 노르웨이 노벨위원회가 결정하도록 한 이유에 대해서 정설은 아니지만 3가지 설이 있다.
첫째, 노벨이 유언장을 작성한 1895년 당시 노르웨이는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스웨덴과 합병된 상태였는데 노벨이 노벨상 선정자를 찾는 과정에서 통합국가의 일부분인 노르웨이에 평화상 선정을 맡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라는 설이다.
둘째, 당시 노르웨이와 노르웨이 의회가 중재와 협상을 통해 각종 국제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데 기여했고 노벨이 이같은 노력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라는 설이다.
세째, 노벨 자신이 당시 평화운동가였던 노르웨이 작가를 워낙 좋아해 그렇게 결정했다는 주장이다. 
현재 이 세 가지 설 중 어느 것이 맞다는 견해보다는 세 가지 이유가 맞물리면서 평화상의 선정자를 노르웨이로 정한 것이 아니냐고 보는 사람이 많다.
노벨의 유언대로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1901년부터 수상자 심사와 선정을 맡게 됐고 이는 노르웨이가 1905년 스웨덴으로부터 평화적으로 독립한 이후에도 그대로 유지됐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의회에서 선출한 5명의 위원으로 구성된다. 
위원의 임기는 6년이며 재선될 수 있다. 1977년부터 현직 의원이 위원이 되는 것을 금지했다. 
노벨위원회는 수상자 선정에 있어 완전히 독립적인 권한을 행사한다. 
후보자 평가나 수상자 결정 과정에서 외부의 어떤 압력이나 지침도 받지 않으며 노벨 재단의 규정에 따라 수상자 선정과 관련된 토론내용에 대해서는 외부에 일체 발설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발표 이후에 개최되는 공공토론에도 참여하지 못 한다. 다만 50년이 되면 후보는 공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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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5일(2017년), 한국문학계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스웨덴 한림원 쪽으로 눈과 귀를 크게 열어두고 있었다. 올해 노벨 문학상 후보로 케냐의 응구기 와 티옹오, 일본의 무라카미 하루키, 캐나다의 마거릿 애트우드, 우리나라의 고은 시인을 유력후보로 손꼽았기 때문이다.그러나 지난 해 밥 딜런을 수상자로 선정했던 한림원은 올해도 일본계 영국 소설가 가즈오 이시구로를 파격적으로 결정하여 발표했다.영국의 도박사이트 래드브록스도, 문학전문가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후보였다. 노벨상 위원회는 “이시구로가 위대한 ‘감정적 힘’을 가진 소설을 통해 세계를 연결하는 우리의 환상적 감각 아래에 있는 심연을 발견했고, 제인 오스틴과 프란츠 카프카를 섞어 놓은 듯 하다. 여기에 마르셀 프로스트의 성향도 약간 가미돼 있다”며 독특한 미학 세계를 높이 샀다. 

이시구로를 선정한 이유를 문학 전문가들은 ‘낡은 문법’을 버리고 ‘독특한 목소리와 방식’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노벨상 선정위원회의 메시지로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전 세계 문학인들의 가을잔치에서 또 다시 쓴 잔을 마신 우리나라의 문학계에서는 다양한 분석과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국내 문학계에는 당장 노벨상을 받아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훌륭한 작가들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전 세계문학잔치의 정상에 올라서지 못하는 이유를 전문가들은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첫째, 부실한 번역의 문제를 들고 있다. 영어권과 불어권 번역만으로는 부족하고, 적어도 15개 나라에 우리 책이 소개 될 수 있는 시장을 만들어야 한다는 견해이다. 60년대 이후 스웨덴인을 제외한 다른 나라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조사해 본 결과 수상시기에 즈음하여 평균 5권 정도가 스웨덴에서 출판되었다고 한다. 다양한 언어로 우리의 문학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번역가의 양성이 시급하다.둘째, 우리나라 국민들이 책을 많이 보지 않는 것도 이유 중의 하나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2015년 우리나라의 독서량은 192개 국가 중 166위에 불과하다.셋째, 출판사들의 해외시장 개척에 대한 치열한 노력이 필요하다.거기에 덧붙여 문학 후계자를 양성하는 교육 시스템과 프로그램이 국가적 차원에서 제고 되어야 한다. 

전문가들은 한국문학의 수준은 높지만 ‘깊은 사유’가 부족한 것은 아닌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전문가들이 지적한 사항을 개선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필자는 결국 교육의 문제로 이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문학계에 널리 회자되는 이야기로 최승호 시인의 ‘아마존 수족관’을 텍스트로 출제된 문제를 시인에게 풀어보게 했더니 두 문제 모두 정답을 벗어났다고 한다. 그러한 정답 고르기만을 가르치는 문학교육에 대해 “모국어의 맛과 멋을 느껴야지, 시의 주제가 뭐냐 사조가 뭐냐 묻는 교육은 ‘가래침’ 같은 것이다” 라고 일침을 가한 최승호 시인의 말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다양하고 깊이가 있는 사유를 기르기 위해 책을 읽고, 그 읽은 내용으르 다른 이들과 토론하고, 그리고 체계적인 글쓰기 교육이 연계되는 문학교육으로 변화되지 않는 한 노벨문학상은 여전히 다른 나라 사람의 잔치로 끝날 것이다.
 
/강원도민일보 김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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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한림원은 왜 하필 가즈오 이시구로를 올해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결정했을까. “위대한 정서적 힘을 가진 소설들을 통해, 세계와 닿아 있다는 우리의 환상 밑의 심연을 드러냈다”가 공식 이유다. 하지만 커튼 뒤 비공식 이유를 들춘다면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우리 신문 지면에서 한림원의 이전 선택과 이번 선택을 비교하는 칼럼을 쓴 적이 있다. 지난 2년간 노벨문학상이 과격한 선택으로 논란을 자초했으며, 이번 유턴을 환영한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오늘은 기자도 커튼을 한 번 들춰보려 한다. 기자협회보는 ‘선수’들을 상대로 하는 매체니까. 나는 합리적 의심이라 생각하지만, 일종의 문학적 음모론이자 유쾌한 농담으로 읽어 주셔도 무방하다. 

 

주지하다시피 지난해 밥 딜런이라는 선택은 ‘악성’에 가까웠다. 문학과 음악의 경계에 대한 의문이야 문화적으로 풍성한 화제를 이끌어낼 수 있겠지만,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표절 시비’를 일으킨 수상자는 전례가 없었으니까. 

 

작품도 작품이지만, 한림원이 가장 고마워했을 대목은 가즈오 이시구로의 인터뷰였을 것이다. 발표 직후 인터뷰에서 이시구로는 이렇게 말했다. 밥 딜런은 나의 영웅이며, 영웅 다음 차례에 상을 받게 되어 영광이라고. 시상식장에서 밥 딜런 노래를 불러달라는 인터뷰어의 요청에 흔쾌히 답했다. 

 

한림원으로서는 뜻밖의 선물을 받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뉴욕에서 발행하는 ‘파리 리뷰’라는 문학 전문지가 있다. 문학적 성취를 보편적으로 인정받은 작가와의 인터뷰로 유명한데, 단순히 신간이나 작가 홍보를 넘어, 소설 기법과 글쓰기 방식, 삶에 관한 진솔한 내용까지 포함한 길고 긴 대담이다. 문학 전문 독자라면 챙겨보는, ‘작지만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문학잡지’이기도 하다. 1953년 창간된 이 잡지가 가즈오 이시구로와 인터뷰했던 시점은 2008년. ‘남아있는 나날’로 1989년 부커상을 받은 지 20여년이 지났고, 2005년의 ‘나를 보내지마’를 쓴 3년 뒤였다. 

 

200자 원고지 70매에 달하는 이 긴 인터뷰에서 그는 예외적으로 록음악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간증한다. 밥 딜런과 레너드 코엔이 그 안에 있다. 셜록 홈즈에 탐닉했던 소년 시절 이후 그는 20대 초반까지 책을 읽지 않았다고 했다. 대신 열광했던 게 음악. 열한 살부터 팝을 들었고, 자신의 용돈을 모아 난생 처음으로 산 음반이 열세 살 때의 ‘존 웨슬리 하딩’이었다. 밥 딜런의 음반이다. 그는 밥 딜런을 ‘위대한 작사가’로 추앙했고, “딜런을 통해 처음으로 초현실주의 가사와 만났다”고 다시 한 번 간증한다. 그리고는 밥 딜런에게서 영향을 받았다는 자신의 첫 노래 가사를 단숨에 소환했다. “그대의 눈은 다시 열리지 않으리. 우리가 한 때 살았고 놀았던 해변에서.”

 

다시 문학적 음모론으로 복귀한다. 한림원은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고, 지난해의 소음과 잡음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전통적 문학 독자들의 신뢰와 지지도 회복하고 싶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대목에서 안도의 한숨과 함께 발견한 텍스트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파리 리뷰’인터뷰가 아니었을까. 

 

문학은 궁극적으로 타인과의 경쟁이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이다. 일정 수준 이상의 경지에 오른 예술적 성취에 대해 우열을 가르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법. 그 중 한 작가에게만 월계관을 수여해야 한다면, 문학 이외의 판단이 개입하는 건 당연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오해는 마시기를. 기자는 제인 오스틴의 다변(多辯)과 카프카적인 꿈의 기억을 기품있는 문장으로 담아내는 올해 수상자의 작품을 진심으로 좋아하니까. 가즈오 이시구로로 돌아온 한림원의 선택을 다시 한 번 지지한다. 다행이다. 한림원을 위해서나, 문학을 위해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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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3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태어난 알프레드 노벨(Alfred Nobel)은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여 막대한 재산을 모았습니다. 

 
이미지1 : 노벨 / 이미지2: 다이너마이트

알프레드 노벨은 1888년 신문기사에서 자신의 부고를 읽고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물론, 프랑스 기자가 노벨의 형 루드비히 노벨이 죽었을 때 알프레드 노벨로 착각하여 기사를 쓴 것이었습니다. 기사에는 '죽음의 상인이 죽다(The merchant of death is dead)'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자신이 '죽음의 상인'으로 묘사가 된 것을 보고 노벨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8년 뒤인 1896년 알프레드 노벨이 진짜로 숨을 거두었을 때, 노벨은 자신이 평생 모은 재산 3,100만 크로네(단순 환산으로 약 50억원,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약 2,700억원의 가치)를 유언 집행자에게 위탁하고 '이 재산을 운용하여 해마다 인류 복지에 가장 구체적으로 공헌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prizes to those who, during the preceding year, shall have conferred the greatest benefit to mankind)고 유언장에 적어 놓았습니다. 

 
이미지3 / 이미지 4 : 노벨의 유언장 1,2페이지

유언장이 공개되자 유산을 기대했던 친척들(노벨은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없었음)은 유산 상속권을 주장하며 법적 대응에 나서기도 했고, 스웨덴 국왕은 스웨덴 사람이 벌어들인 돈이니 스웨덴 국고에 귀속해야 한다고 불만을 표시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미지5 : 노벨상 메달

우여곡절끝에 노벨 사후 5년만인 1901년에 노벨재단이 수립되었고, 노벨상의 기반이 마련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해 1901년 12월 10일, 5개 부문 6명이 처음 노벨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노벨 물리학상 (스웨덴 왕립 고등 과학원에서 결정) 
노벨 생리학·의학상 (스웨덴 스톡홀름의 카롤린 의학연구소에서 결정) 
노벨 화학상 (스웨덴 왕립 고등 과학원에서 결정) 
노벨 문학상 (스웨덴 스톡홀름 아카데미에서 결정) 
노벨 평화상 (노르웨이 국회 스토르팅의 추천에 의해 구성되는 노르웨이 노벨위원회에서 결정)
노벨 경제학상 (스웨덴 왕립 고등 과학원에서 결정)

노벨이 왜 평화상을 스웨덴이 아니라 노르웨이에서 수여하게 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969년 노벨기금과는 별도로 1967년 스웨덴국립은행의 창립 300주념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경제학상이 추가되었습니다. 정식 명칭은 '알프레드 노벨을 기념하는 스웨덴 중앙은행 경제학상(Swedish National Bank's Prize in Economic Sciences in Memory of Alfred Nobel)'입니다. 

이미지6: 노벨의 유언장 일부 ('하리하라의 청소년을 위한 의학 이야기'의 들어가는 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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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5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동북호랑이 풍채 2018-01-26 0 3283
1834 우리 조선민족의 문화유산수집사업은 미룰수없는 사명이다... 2018-01-25 0 3140
1833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강추위 너희들은 괜찮니?"... 2018-01-25 0 5241
1832 [이런저런] - 감옥살이 = 175년 = 감옥살이... 2018-01-25 0 3617
1831 [그것이 알고싶다] - "시간연장 수첩" 2018-01-24 0 3891
1830 [타산지석] - 우리 연변 화룡에도 "온돌공연 연출대"가 있다... 2018-01-24 0 4813
1829 [그것이 알고싶다] - 양귀비가 려지(茹枝)를 즐겨 먹다... 2018-01-24 0 3536
1828 [그것이 알고싶다] - 최초의 아이스크림 제조법?... 2018-01-24 0 3685
1827 [그것이 알고싶다] - "중국 치즈" = 썩두부 2018-01-24 0 3702
1826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세계 최대 규모 야외 공기 청정기 2018-01-24 0 3768
1825 [이런저런] - "바지 벗고 지하철 타기" 2018-01-24 0 4541
1824 [이런저런] - 세계에서 가장 긴 얼음으로 만든 바 테이블 2018-01-24 0 4362
1823 [이런저런] - 참대곰 핀란드로 출국길에 오르다... 2018-01-24 0 5000
1822 [쉼터] - 중국 료녕성 대련에 펭귄새가 없다?... 있다!... 2018-01-24 0 5107
1821 [쉼터] - 중국 길림성 장춘에 참대곰 없다?... 있다!... 2018-01-24 0 4786
1820 [이런저런] - "소시지마을" 2018-01-24 0 3691
1819 [쉼터] - 개야, 황금개야, 우리 함께 놀아보쟈... 2018-01-24 0 5490
1818 [쉼터] - 붉은 물이 흐르는 적수(赤水)를 아시나요... 2018-01-23 0 4722
1817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까치야, 까치야, 우리 함께 놀아보쟈... 2018-01-23 0 5549
1816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버들강아지야, 우리 함께 놀아보쟈... 2018-01-23 0 4318
1815 [쉼터] - 중국 최초 국가삼림공원 = 장가계 2018-01-23 0 4821
1814 통일아, 어서 빨리 "통일잔치한마당" 벌려나보쟈... 2018-01-23 0 4363
1813 "고향의 이미지 우리가 스스로 지켜야"... 2018-01-20 0 4931
1812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다람쥐야, 맘껏 놀아라... 2018-01-20 0 4006
1811 [대련문단] - 중국 조선족 시문단 故 김파시인 기리다... 2018-01-20 0 4041
1810 [쉼터] - 한번 가 보고싶은, 경간 가장 넓은 다리 2018-01-19 0 4205
1809 [이런저런] - 가짜 동전, 남의 일 아니다... 2018-01-19 0 3573
1808 [그것이 알고싶다] - "八一軍旗"?... 2018-01-19 0 3828
1807 [그것이 알고싶다] - 일본군 모자 "천 조각" 용도?... 2018-01-19 0 4436
1806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범아, 범아, 맘껏 뛰여놀아라... 2018-01-10 0 4871
1805 [이런저런] - 그림 그리는 "진도개" 2018-01-10 0 4412
1804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멸종위기종", 남의 일이 아니다... 2018-01-10 0 4812
1803 [쉼터] - 눈사람아, 나와 놀쟈... 2018-01-10 0 3367
1802 록색스포츠평화주의의 물꼬가 확 트이여 통일평화 오기만을... 2018-01-10 0 4833
1801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당연히+개누리+개유리"+제주 도민 2018-01-10 0 4643
1800 [동네방네] - 이색적인 축제 = 필리핀 편 2018-01-10 0 5254
1799 [이런저런] - 주인 묘지 찾은 강아지... 2018-01-10 0 4972
1798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재밋는 자연동물세계... 2018-01-09 0 5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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