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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와 환유
은유와 환유는 그것이 쓰이는 역사적 맥락과 깊은 관계를 맺는다. 한 시대에는 환유로 취급받던 것이 다른 시대에는 은유로 취급당한다. 이를테면 <창백한 죽음>이라는 표현은 요즘 은유로 쓰인다. <지치다>라는 말은 원래 설사를 한다는 뜻으로 환유적 표현이었으나 요즘에는 은유적 표현으로 쓰인다.
은유와 환유는 특정한 시대와 관련을 맺기도 한다. 역사 철학자 지암비스타 비코는 <새로운 과학>에서 은유를 비롯한 환유, 제유를 단순히 비유의 차원을 넘어 언어사와 문화사를 재는 잣대로 삼았다. 신의 시대에는 어느 비유보다 환유가 지배적으로 쓰였고, 영웅의 시대에는 제유가 압도적이어서 이 무렵 인간은 곤잘 주피터 신의 아들로 자처했다. 그런가 하면 인간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어떤 비유보다도 은유가 가장 널리 쓰였다.
이탈리아 기호학자 에코는 심층적인 면에서 은유와 환유가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은유적 메커니즘과 환유적 메커니즘은 서로 상호작용을 하게 마련이다. <모든 은유는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부호 체계를 구성하고 부분적이건 전체적이건 모든 의미장의 구조가 기초하는 일련의 환유적 연관성과 만난다>
축어적 관념과 비유적 관념 사이에 상호작용이 일어난다는 것은 이미 이 둘이 환유적 관계를 맺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실제로 어떤 비유는 은유로 봐야 할지, 환유로 봐야 할 지 경계선이 모호하고 애매하여 분류하기가 쉽지 않다. 한 이론가는 아예 <은환유(메타프토노미)>라는 용어로 부른다. 메타프토노미란 바로 메타포(은유)와 미토노미(환유)를 합하여 만들어낸 합성어다.
은유가 한 사물의 다른 사물의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라면, 환유는 한 개체를 그 개체와 관련 있는 다른 개체로써 말하는 방법이다. 은유의 기능이 주로 사물이나 개념을 이해하는 데 있다면 환유는 사물이나 개념을 지칭하는데 그 기능이 있다. 은유가 이해를 위한 장치라면 환유는 지칭을 위한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비유는 어떤 사물의 가치를 그 자체에 고정시키지 않고 다른 것에서 유추한다. 미국 철학자 어번(W.M.Urban)은 언어와 현실에서 언어의 가동성을 강조했다. 사물과 언어관계는 거리가 있으므로 부단히 움직인다고 본 것이다. 이는 언어의 추상성과 언어 의미 사이에 무한한 가능성을 뜻한다. 한편에서 비유는 진리를 전달하는데 방해가 된다는 인식도 있었으나, 18c 말엽부터는 비유는 필수적이며 세계를 인식하는데 꼭 필요한 도구로 보고 있는 태도가 강하다. 비유는 인생관이나 세계관과 맞닿아 있어 인간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형식이 되는 것이다.
은유는 매개어의 개입 없이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결합되어 의미의 轉移와 새로운 의미를 환기시키는 비유법이다. 은유를 이해하려면 유사성을 파악해야 하지만 동일성과는 별 관계가 없다. 예를 들어 아리스텔레스는 '인생의 황혼'으로 노년을 표현했다. 수학적 비례로 치환시시켜 a/b=c/d 따라서 ad=bc이나 노년의 인생에 대한 관계가 황혼이 하루에 대한 관계와 정확히 같지는 않다. 유사성은 바로 흡사한 것이기 때문에 이같은 관계가 성립한다. 은유는 일종의 수수께끼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뜻을 유추하기 힘들다. 은유의 장르라 할 만한 시를 두고 새뮤얼 코울리지가 <시란 완벽하게 이해되지 않고 막연하게 이해될 때 가장 큰 기쁨을 준다>고 얘기한 것은 바로 이같은 맥락이다. 윌리엄 엠슨은 은유가 가능한 것은 애매성 때문이라고도 했다. 은유는 우리를 당혹하게 하지는 않지만 이제껏 보지 못한 유사함을 밝혀 우리를 일깨워주고 매료시킨다.
환유는 원관념을 연상되는 다른 말로 바꾸어 한 부분으로 전체를 나타낸다. '그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다' 라든가 '십자가와 초승달' 등이 그 예이다. 환유는 상징의 발생에 주요한 역할을 한다. 깃발이나 십자가, 베일 같은 상징은 실재를 환기시키는데 상징과 실재가 모두 같은 문화에 있기 때문이다. 문화가 변하면 상징이 사라지는 것처럼 환유는 확고한 문화적인 관습에서 설득력이 생긴다. 환유는 최근에 들어와 주목받기 시작했다. 환유의 어원인 미토노미아는 '이름을 바꾼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일상 생활 언어에서 은유보다 환유가 더 많이 쓰이고 언어학자들은 환유쪽에 더 관심을 갖는 경향이 있다.
20C 미국의 야콥슨은 은유와 환유의 성격을 밝혀내는 데에 크게 이바지한 학자이다. 그것을 실제 비평에 적용해 문학의 스타일도 은유나 환유 쪽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고 밝혀냈다. 18C에서 19C 낭만주의 예술에서는 은유적 성격이 강하고 19C 중엽부터의 리얼리즘 예술에서는 환유적 성격이 강하며 세기말의 문예 사조라 할 상징주의에서는 은유적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다. 또한 문학 장르에 있어 시는 은유적이고 소설은 환유적이며 연극은 은유적이고 영화는 환유적이라 주장한다.
이탈리아 기호학자 움베르트 에코는 이 둘의 관계가 깊이 연관성을 띠며 상호작용을 하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어떤 비유는 은유로 보아야 할지 환유로 보아야 할지 그 경계선이 굉장히 애매하고 모호하다. 메타프토노미라 하며 은유, 환유 동시 성격으로 규정하기도 한다.좋은 예로 밀양 아리랑이 있다.
정든 임 오시는데 인사를 못해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벙긋
이 경우 입을 벙긋거리는 행위로 웃는 행위를 나타낸 것은 '환유'이나 이것이 행복하다는 마음을 나타내니 '은유'가 되는 것이다. 은유는 한 사물을 다른 사물의 관점에서 말하는 방법이고 환유는 한 개체를 그 개체와 관련 있는 다른 개체로써 말하는 방법이다. 은유는 개념 이해의 방법으로 많이 쓰며 환유는 지칭하는데 많이 쓴다. 은유와 환유는 그 역사적 맥락과 연관되는데 한 시대의 환유가 다른 시대 은유가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서양에서 <창백한 죽음>이 예전에는 환유였으나 현재는 은유이다. 사람이 죽은 뒤에는 얼굴 빛이 희게 변하기 때문에 결과로써 원인을 나타내는 환유였으나 추상적 관념인 죽음을 의인화하여 그 얼굴 색깔이 희다고 하는 은유로 현재 쓰는 것이다.
제라르 주네트·새뮤얼 레빈·존 설 같은 이론가들은 환유를 은유의 하위 갈래로 여기기도 하지만 이 둘의 형식에는 차이가 있다. 은유가 유사성에 의존한다면 환유는 인접성에 기초한다. 환유는 은유와 비교하여 인간의 경험적 토대가 크다. 흔히 은유는 추상적인 느낌이 강하고 환유는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느낌이 강하다. 영국 이론가 호미 K.바바는 최근 은유와 환유를 포스트식민주의 문학 이론에 적용했다. 은유적으로 읽으면 의미의 보편성에 주목하게 되고 환유로 읽으면 보편성보다는 개별성이나 특수성에 주목한다는 것이다. 바바에 따르면 피식민지 주민을 문학 작품 속에 재현하는 것은 <차별의 주체, 타자의 역사와 타자의 문화>를 재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은유화하면 등가의 원칙을 끌어들이고 이 원칙은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추상적 명제로 환원할 위험이 있다고 염려한다. 이는 다시 말해 제국주의나 식민주의의 담론에서 은유가 많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은유를 폭력의 언어, 환유를 저항의 언어로 볼 수도 있다. 전통적인 제도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것은 환유의 수사적 장치가 적당하고, 영원불변하고 본질적인 것과 연관되는 은유는 기존의 폭력적 성격의 것들을 표현하는데 적절한 것이다. 은유는 모든 현상을 하나로 뭉뚱그려 동일성에 무게를 싣고 환유는 인간을 모든 구체적 현상 속으로 낱낱이 파헤쳐놓는다. 김욱동 교수는 그 예를 문정희의 시 「작은 부엌노래」와 정현종의 시 「부엌을 기리는 노래」로 설명한다. 문정희의 시는 남성 가부장 질서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보이며 환유가 지배적인데, 정현종의 시는 남성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은유가 많이 쓰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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