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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탄생 100주년 기념 동시집 영원한 소년 윤동주와 아우 윤일주의 동시를 만나다
출처: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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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시인 윤동주(1917∼1945) 탄생 100주년을 기리며 윤동주와 그의 동생 윤일주(1927∼1985)가 쓴 동시를 묶은 '민들레 피리'(창비)가 출간됐다.
이 책에는 윤동주가 1935년부터 3년여간 쓴 동시 34편과 아우 윤일주가 쓴 동시 31편이 담겼다.
윤동주의 동시는 그가 쓴 주옥같은 시들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꾸밈없는 동심을 깨끗한 서정으로 그린 뛰어난 작품들로 아동문학계에서도 높이 평가받는다. 가족의 가난하고 고된 삶까지도 밝게 끌어안는 낙천적인 동심과 아기자기한 운율이 두드러진다.
"누나의 얼굴은/해바라기 얼굴./해가 금방 뜨자/일터에 간다.//해바라기 얼굴은/누나의 얼굴./얼굴이 숙어 들어/입으로 온다." (윤동주 '해바라기 얼굴')
"넣을 것 없어/걱정이던/호주머니는//겨울만 되면/주먹 두 개 갑북갑북." (윤동주 '호주머니')
"빨랫줄에 걸어 논/요에다 그린 지도는/지난밤에 내 동생/오줌 싸서 그린 지도//꿈에 가 본 엄마 계신/별나라 지돈가/돈 벌러 간 아빠 계신/만주 땅 지돈가" (윤동주 '오줌싸개 지도')
윤동주는 서울과 일본 유학 시절 만주의 아우들에게 문예지를 부치거나 동화를 권해주며 향수를 달랬다고 한다.
아우 중 특히 윤일주는 건축학 학자·교수가 된 뒤에도 일하는 틈틈이 동시를 썼다. 작고한 뒤인 1987년 유고 동시집이 출간됐지만, 지금은 모두 절판됐다. 그는 가난한 이웃과 보잘것없는 존재를 귀하게 여긴 형 윤동주의 정신을 이으면서 자신만의 시 세계를 이뤘다. 따뜻한 서정성과 순수함을 담은 시들은 형의 시 세계와 맞닿아 있다.
"숯불은 따뜻하게/피어오르고//아기는 토끼처럼/잠이 들었네.//아기가 잠든 새에/엄마는 장에 가고//아기가 깰까 봐/함박눈도 가만가만/소리 없이 내리네." (윤일주 '함박눈')
"새벽 아닌 대낮에 어디선지/길게 오는 닭 소리 들려옵니다.//울며 울며 팔려 간 우리 집 수탉/어쩐지 그 수탉의 소리 같아요." (윤일주 '대낮')
"햇빛 따스한 언니 무덤 옆에/민들레 한 그루 서 있습니다./한 줄기엔 노란 꽃/한 줄기엔 하얀 씨.//꽃은 따 가슴에 꽂고/꽃씨는 입김으로 불어 봅니다./가벼이 가벼이/하늘로 사라지는 꽃씨.//-언니도 말없이 갔었지요.//눈 감고 불어 보는 민들레 피리/언니 얼굴 환하게 떠오릅니다.//날아간 꽃씨는/봄이면 넓은 들에/다시 피겠지.//언니여, 그때엔 우리도 만나겠지요." (윤일주 '민들레 피리')
우리 옛말에서 '언니'는 동성의 손위 형제를 부르는 말로 쓰였다. 윤일주는 이 시에 형 윤동주를 향한 짙은 그리움을 담은 것이다.
이 동시집에는 일러스트레이터 조안빈의 아름다운 그림이 함께 실려 시의 정취를 더한다.
선백(仙伯)의 생애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 가져가라」 이런 전보 한 장을 던져주고 29년간을 詩와 고국만을 그리며 고독을 견디었던 舍兄(사형) 윤동주를 일제는 빼앗아가고 말았으니, 이는 1945년 일제가 망하기 바로 6개월전 일이었습니다.
1910년대, 북간도 明東(명동) -(현주소 : 중국中國 지린성吉林省 옌볜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 룽징시龍井市 명동촌明東村)- 그곳은 새로 이룬 흙냄새가 무럭무럭 나던 곳이요, 조국을 잃고 노기에 찬 지사들이 모이던 곳이요, 학교와 교회가 새로 이루어지고 어른과 아이들에게 한결같이 열과 의욕에 넘친 모든 기상을 용솟음치게 하던 곳이었습니다.
1917년 12월 30일 동주형은 이곳에서 교원의 맏아들로 태어 났습니다. 그의 생가는 할아버지가 손수 벌재하여 지으신 기와집이었습니다. 할아버지의 고향은 함북 회령이요, 어려서 간도에 건너 가시어 손수 황무지를 개척하시고 기독교가 도래하자 그 신자가 되시어 맏손주를 볼즈음에는 장로로 계시였습니다.
동주형의 근실하고 관용함은 할아버지에게서, 내성적이요, 겸허함은 아버지에게서, 온화하고 치밀함은 어머니에게서, 각각 물려받은 성품이라고 생각됩니다. 그의 아명은 海煥(해환)이었고, 그 아래로 누이와 두 동생이 있었습니다.
얌전한 소학생 해환은 아동지 『어린이』의 애독자였고, 그림을 무척 좋아하였다고 합니다. 1921년에 명동소학을 마치고 大拉子(대랍자)라는 곳에서 중국인관립학교에 1년간 수학하였으니, 詩 『별 헤는 밤』의 佩(패), 鏡(경), 玉(옥)이란 묘한 이국소녀의 이름은 이때의 추억에서 얻어진 것이 아닌가 합니다.
1932년 그가 용정 은진중학교(註. 1932 ~ 1935)에 입학하자, 저희 집은 용정에 이사하였습니다. 중학교에서의 그의 취미는 다방면이었습니다. 축구선수이던 그는 어머니의 손을 빌지않고 네임도 혼자 만들어 유니폼에 붙이고 기성복도 손수 재봉틀로 알맞게 고쳐 입었습니다. 낮이면 운동장을 뛰어 다니고 초저녁에는 산책, 밤늦게까지 독서하거나 교내 잡지를 만드느라고 등사 글씨를 쓰거나 하던 일이 기억됩니다. 끝까지 즐기던 이 산책은 이때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운동복이거나 문학서적만 들고 다니는 그의 성적에 뜻밖에도 수학이 으뜸 가는 것에는 다들 놀랐습니다. 특히 기하학을 좋아함은 그의 치밀한 성품에서 였다고 짐작됩니다.
1935년 봄, 3학년을 마칠 즈음, 그는 불현듯 고국에의 유학을 꿈꾸고 겨우 아버지의 승낙을 얻어 평양 숭실중학교(註. 1935 ~ 1936)에 옮기였습니다. 그의 습작집으로 미루어 평양시절 1년에 가장 문학에의 의욕이 고조된 듯 합니다. 이 즈음 백석시집 『사슴』이 출간되었으나 100부 한정판인 이 책을 구할 길이 없어 도서실에서 진종일을 걸려 정자로 베껴내고야 말았습니다. 그것은 소중히 지니고 다닌 모양으로, 지금은 나에게 보관되어 있습니다. 평양 유학도 끝을 맞게 되었으니 숭실학교가 신사참배문제로 폐교케 되었던 까닭입니다. 1936년 다시 용정에 돌아와 광명중학교(註. 1936 ~ 1938) 4학년에 들었습니다. 이때 당시 간도에서 발간되던『카톨릭소년』지에 동주(童舟)라는 닉네임으로 동요 몇편을 발표한 일이 있습니다.
그의 비운은 중학교 졸업반에서부터 비롯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둔 그는 진학할 과목을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때 벌써 많은 동요와 詩稿(시고)를 가지고 있던 그에게 문학 이외의 길이란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외아들인 아버지는 젊어서 문학에 뜻을 두어 북경과 동경에 유학하고 교원까지 지내셨건만, 자기의 생활상의 실패를 아들에게까지 되풀이시키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는 그에게 의사가 되기를 권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굳이 듣지 않고 아버지의 퇴근전부터 산이고 강가이고 헤매다가 밤중에야 자기 방에 돌아오는 날이 계속되었습니다. 한숨이 늘고 가슴을 두드리는 때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반년을 두고 아버지와의 대립이 계속되다가 졸업이 닥쳐오자 그는 이기고 말았습니다. 할아버지 권고로 아버지가 양보하신 것입니다. 소학과 은진중학 동창이며 고종사촌이며 또 동갑인 송몽규형과 동행하여 서울로 온것은 1938년 봄이었습니다.
상경하자 두분 다 延專(註. 1938 ~ 1941, 연희전문학교 문과, 現 연세대학교)에 입학하고 그후부터 집에 오기는 1942년까지 매년2회 여름과 겨울 방학 때뿐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시절의 나도 추억도 단편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눈앞에 선한 그 정답던 모습은 사각모에 교복을 입은 형님이 아니라, 베바지, 베적삼에 밀짚모자를 쓰고 황소와 나란히 서있는 형님입니다. 고향에 돌아오면 그날로 양복은 벗어놓고 우리 옷으로 바꾸어 입고는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일을 도왔습니다. 소꼴도 비고 물도 긷고 때로는 할머니와 마주앉어 맷돌도 갈며 과묵하던 그도 유모어를 섞어 가며 서울이야기를 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생활 속에서도 남몰래 쉬는 한숨을 나는 옆에서 가끔 들은 듯합니다. 그것은 사소한 일로 傷(상)함을 입어 끓어오르는 時興(시흥)과 독서시간의 아쉬움에서였을 것입니다.
노여움도 아까움도 미소로서 흘려 보낼 수 있었던 그는, 차마 집안 어른들의 일을 돕지 않고는 마음을 놓지 못하였습니다. 관유함이 그의 의지를 지탱케 못하였을지나 결코 우유부단하지는 않았습니다.
용정은 인구 10만에 가까운 작지 않은 도시였으나, 대학생인 그는 아무 쑥스러움 없이 베옷을 입은 채 거리로 소를 이끌고 다녔습니다. 그럴 때에도 그는 릴케나 발레리의 시집, 또는 지이드의 책을 옆에 끼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으스름때면 의레이 하는 산책에, 동생인 나는 그의 손목을 잡고 같이 거니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가로수가에서 북원백추(北原白秋)의 『고노미찌』를 콧노래로 부르기도 하고 숲속에 앉아 새로 뜨는 별과 먼 강물을 바라보며 손깍지를 낀채 묵묵히 앉았을 때에는 그의 얼굴에 무슨 동경과 감정이 끓어오름을 연소한 나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신작로를 걷다가도 부역하는 시골 아낙네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고 싶어 하고 골목길에서 노는 아이들을 붙잡고 귀여워서 함께 씨름도 하며 한포기의 들꽃도 차마 못 지나치겠다는 듯 따서 가슴에 꽂거나 책짬에 꽂아 놓곤 하였습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註. 1941. 11. 20. 作, 『서시』 中에서)
하는 연약한 것에 대한 애정의 표백은 그의 천품의 기록이었습니다. 방학때 마다 짐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수십권의 책으로 한 학기의 독서의 경향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나에게 小川末明(오가와 호노카) 동화집을 주며 퍽 좋다고 하던 일과 수필과 판화지 『백과 흑』7, 8권을 보이며 판화가 좋아 구득하였으며 기회가 있으면 자기도 목판화를 배우겠다고 하던 일이 기억됩니다. 이리하여 집에는 근8백권의 책이 모여졌고 그중에 지금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앙드레 지이드 전집 기간분 전부, 도스토예프스키 연구서적, 발레리 시전집, 불란서 명시집과 키에르케고르의 것 몇 권, 그밖에 原書(원서) 다수입니다. 키에르케고르의 것은 연전 졸업할 즈음 무척 애찬하던 것입니다.
1941년 12월 연전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는 졸업장과 함께 정성스러이 쓴 시고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들고 왔었습니다. 그것은 초판 77부로 출판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소중히 지니고 다녔습니다.
더 공부하고 싶었던 그는 1942년 『참회록』이란 시를 써놓고 도일하여 立敎(릿코)대학에 적을 두었습니다. 그간 마지막으로 집을 떠난 것은 그해 7월 여름방학 때였습니다. 그때에는 병환으로 누워계시는 어머님의 침대에 걸터 앉아 이야기 동무로 며칠을 보내다가 뜻밖에 속히 떠나게 되었습니다. 동북대학에 있던 한 친우의 권유로 그 학교 입학수속 치르러 오라는 전보까닭이었습니다. 놀이터에서 돌아온 나는 그가 떠났음을 알자 눈물이 글썽하였습니다. 늘 정거장에서 맞고 바래던 그와 그렇게 헤여짐이 최후의 작별이 될줄이야 어찌 알았겠습니까. 떠나면서도 어머님걱정을 뇌이고 또 뇌이드랍니다. 아마 운명시까지 눈앞에 어머님의 모습만 어른거렸을 것입니다. 동북대학(註. 1942, 당초 일본 미야기현 도호쿠東北대학이 아닌 도쿄東京 릿교立教대학 영문과에 입학)에 간줄 안 형에게서 무슨 의도에서였는지 동지사(註. 1942 ~ 1943, 교토京都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로 옮겼다는 전보가 오자 아버지는 좀 노여운 기색이었습니다.
東京(도꾜)와 京都(교또)에서의 그의 고독은 절정에 달했습니다. 태평양에서는 戰火(전화)가 들끓고 존경하던 선배들은 붓을 꺾거나 변절하였고 사랑하던 친구들은 뿔뿔이 헤여졌고 – 하숙방에서 홀로인 듯한 자기를 발견하고 스스로 눈물 짓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六疊房(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쉽게 씌여진 시』의 11절 1942. 6. 3.作)
그러나 홀로 『새로운 아침』을 기다리며 그의 고독만으로 항거하기에는 현실의 물결은 너무 거센 것이었습니다.
1943년 7월 귀향일자를 알리는 전보를 받고 역에 나갔으나 그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매일 같은 마중 끝에 한 열흘 후에 온 것은 우편으로 보내온 차표외, 그 차표로 찾은 약간의 수화물뿐이었습니다. 차표를 사서 짐까지 부쳐놓고 출발직전에 경찰에 잡혔던 것입니다. 교또대학에 있던 몽규형도 함께 잡혔습니다.
압천서(鸭川署)에 미결로 있는 동안 당시 동경에 계시던 당숙 영춘선생이 면회했을 때는 『고오로기』란 형사의 담당으로 일기와 원고를 번역하고 있었으며 매일 산책이 허락된다고 하더랍니다. 곧 나갈 것이니 안심하라고 하던 형사의 말은 결국 거짓이 되고 말았습니다.
동주와 몽규 두 형이 각 2년 언도를 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투옥된 1944년 6월 이래, 한달에 한 장씩만 허락되는 엽서로는 그의 자세한 옥중생활은 알길이 없었으나, 『영화대조 신약성서(英和对照新约聖書)』을 보내라고 하여 보내 드린 일과 『붓끝을 따라온 귀뚜라미 소리에도 벌써 가을을 느낍니다』”라고 한 나의 글월에 『너의 귀뚜라미는 홀로 있는 내 감방에서도 울어준다. 고마운 일이다』라고 답장을 주신 일이 기억됩니다.
매달 초순이면 꼭 오던 엽서 대신 1945년 2월에는 중순이 다 가서야 상기한 전보로 집안사람들의 가슴에 못을 박고 말았습니다.
유해나마 찾으러 갔던 아버지와 당숙은 우선 살아있는 몽규형부터 면회하니 『동주!』 하며 눈물을 쏟고, 매일같이 이름 모를 주사를 맞노라는 그는 피골이 상접하였더랍니다.
『동주선생은 무슨 뜻인지 모르나 큰소리를 웨치고 운명했습니다』 이것은 일본인 간수의 말이었습니다.
아버지가 후쿠오카에 가신 동안에 집에는 한 장의 인쇄물이 배달되었으니 그 내용인즉 『동주 위독하니 보석할 수 있음. 만일 사망시에는 시체는 가져가거나 不然(불연)이면 九州帝大(큐슈제국대학)에 해부용으로 제공함. 속답하시압』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사망전보보다 10일이나 늦게 온 이것을 본 집안사람들의 원통함은 이를 갈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백골 몰래 또 다른 고향에』 가신 나의 형 윤동주는 한줌의 재가 된채 아버지의 품에 안겨 고향땅 간도에 돌아왔습니다. 약 20일후에 몽규형도 같은 절차로 옥사하였으니 그 유해도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동주형의 장례는 3월 초순, 눈보라치는 날이었습니다. 자랑스럽던 풀이 메마른 그의 무덤 위에 지금도 흰 눈이 내리는지-
10년이 흘러간 이제 그의 유고를 上梓(상재)함에 있어 사제로서 부끄러움을 금할 길이 없으며, 시집 앞뒤에 군것이 붙는 것을 퍽 싫어하던 그였음을 생각할 때, 졸문을 주저하였으나 생전에 무명하였던 고인의 사생활을 전할 책임을 홀로 느끼어 감히 붓을 들었습니다. 이로 하여 거짓 없는 고인의 편모나마 전해지면 다행이겠습니다.
1955년 2월 舍第(사제) 一柱(일주) 謹識(근지)
(정음사 1955년 2월 16일 발행 – 2016년 3월 1일 발행) |
글 |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다음 정류장은 도시샤(同志社) 대학 앞입니다."
교토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이동 중이던 필자는 안내 멘트에 귀가 번쩍 뜨였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도시샤(同志社) 대학은 시인 윤동주(1917-1945)가 다녔던 학교였기 때문이다. 필자가 재차 확인하자 운전사는 ‘내려서 뒤쪽으로 조금 돌아가야 한다’고 친절하게 답변했다.
서정문에서 바라본 도시샤 대학 |
도시샤 대학에 들어서자 붉은 벽돌에서부터 역사의 숨결이 느껴졌다. 이 대학은 한 청년의 뜻(志)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는 쇄국의 일본을 개방하려는 의지로 미국에 건너가서 ‘일본인 최초의 미국대학 졸업자’가 됐다. 청년의 이름은 니지마 조(新島 襄, 1843-1890). 그가 1875년 도시샤 대학(同志社英學校)을 설립했던 것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 학교가 내걸고 있는 슬로건이다. 때마침 토요일 오후라서 캠퍼스는 고즈넉했다. 갑자기 이방인(異邦人)이 된 필자는 두리번거리다가 어쩔 수 없이 경비원 신세를 졌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 윤동주 시비(詩碑)가 어디 쯤 있나요?”
“똑바로 가시다가 우측으로 돌아가세요. 저기 지붕 끝이 뾰족한 건물 앞에 있습니다.”
정지용과 윤동주의 시비 나란히 있어
경비원의 말대로 건물사이로 들어가자 나무아래 정지용(1902-1950)과 윤동주(1917-1945)의 시비가 나란히 있었다. 비(碑)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일본어와 한글로 쓰여 있었다.
<정지용 시인은 1902년 충청북도 옥천에서 태어났다. 서울 휘문고보를 거쳐 1923년 도시샤(同志社) 대학 예과에 입학하였다. 1929년 영문학과를 졸업하기까지의 6년 동안 이 캠퍼스를 무대로 영문학 공부와 함께 주옥같은 시를 발표하여 시인으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1930년대 휘문고보의 영어교사로 교편을 잡으면서 문단의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정지용 시집>과 <백록담>을 간행하여 현대시의 확립에 기여하였으며, 유능한 시인을 문단에 등용시키기도 하였다. 1945년 이후, 이화여자전문학교 (현, 이화여자대학)의 교수와 경향신문의 주간을 역임하였고, <지용시선>을 비롯한 산문집을 간행하였다. 1950년의 한국전쟁 이후 행방불명되었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한국 현대시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옥천군, 옥천문화원, 정지용 기념사업회는 그를 기리기 위하여 이곳 모교에 시비를 세웠다. 조각된 시는 교토를 노래한 대표작 <압천>이다.>
정지용 시비 |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 윤동주
윤동주 시비의 글 |
<윤동주는 코리아의 민족시인 이자 독실한 크리스천 시인이기도 하다. 그는 1917년 12월 30일에 북간도의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어났는데, 그가 처음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용정에 있는 은진중학교에 재학 중인 1934년경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시작에 손을 댄 것은 평양의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연희전문학교(지금의 연세대학교)에 진학한 다음부터이다.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1942년에 도일(渡日)하여 도시샤(同志社) 대학의 문학부에 입학한다. 그는 도시샤 대학에 재학 중이던 1943년 7월 14일에 한글로 시를 쓰고 있었다는 이유로 독립운동의 혐의를 입어 체포되었다. 재판 결과 그는 ‘치안유지법을 위반했다’는 죄목으로 징역형을 선고 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1945년 2월 16일에 옥사했다. 이 시비는 도시샤 교우회 코리아 클럽의 발의에 의해 그의 영면 50돌인 1995년 2월 16일에 건립, 제막되었다. 한글로 된 서시는 그의 자필 원고 그대로이며, 일본어 번역은 이부키 고(伊吹鄕)씨의 것이다.>
다소 어눌한 한글 표현이지만, 이해하는데 있어서 문제는 없었다. 필자는 혼자서 시비에 새겨진 빛바랜 서시(序詩)를 읽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시비 |
필자는 읽고 또 읽었다.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시(詩)였기 때문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필자는 ‘주변을 살피고, 뒤를 돌아보면서 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교정의 벤치에 앉았다. 오래 전에 필자가 <월간조선>에 썼던 글이 떠올랐다.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와 윤동주
“인간의 얼굴은 하나의 줄기위에 핀 일 순간의 꽃이다./ 바람과 새가 날라다 준 종자처럼/ 여기저기 흩어지고, 피고 지는 존재/ 인간도 식물과 별로 다를 게 없느니….”
일본의 유명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茨木則子, 1926~2006)가 쓴 <하나의 줄기 위에>라는 수필에 담긴 내용이다. 그 책에도 ‘윤동주에 대하여’라는 글이 있다.
<‘청춘의 시인’ 윤동주―한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인기 있는 시인. 수난의 심벌, 순결의 심벌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장본인. 일본유학 중 독립운동의 혐의로 체포되어 1945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7세의 나이로 옥사(獄死)한 사람. 옥사의 진상도 의문이 많다. 일본의 젊은 간수는 윤동주가 사망 당시,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고 했다.>
누군가가 그린 윤동주의 작은 액자 |
이바라기(茨木) 시인은 1990년 윤동주의 조카 윤인석 씨를 도쿄에서 만났다고 한다. 시인은 윤인석 씨가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 씨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함께 ‘아우의 인상화(印象畵)’란 시를 소개했다.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발걸음을 멈추어/살그머니 작은 손을 잡으며/ ‘너는 자라서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슬픈, 진정코 슬픈 대답이다...”
이바라기(茨木) 시인은 “윤인석 씨가 큰 아버님은 돌아가셨지만,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고 말했다며 “자신도 이에 공감한다”고 했다.
윤동주의 시비(詩碑)는 한국산과 교토(京都)산의 돌로 세워졌다. 양국화합의 의미를 두기 위해서다. 그런데도 한일 간의 간극(間隙)은 아직도 좁혀지지 않고 있다.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을 윤동주를 추모하면서 뚜벅뚜벅 도시샤 대학 교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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