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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시인이 될수 없다?... 있다!...
2017년 11월 18일 23시 38분  조회:2657  추천:0  작성자: 죽림

시창작 강의 / 박진환

시 창작 강의를 듣기 위해 찾아온 분들을 대상으로 어떻게 해서 이 강의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물으면 세 가지 유형의 대답을 한다.
첫째는 시를 좋아해서
둘째는 시를 써 보고 싶어서
셋째는 시를 잘 쓸 수 있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 대답을 거꾸로 바꿔보면 이런 질문이 성립된다.
어떻게 하면 시를 잘 이해 할 수 있는가, 어떻게 써야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시를 잘 쓸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럴 때 당혹스러운 것은 마치 시란 무엇인가를 물어왔을 때 어떻게 대답해 줘야 그들의 궁금증을 풀어줄 것인가 하고 고심하는 것과 같은 답변의 궁색함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 어느 질문에도 한 마디로 속 시원하게 대답해 줄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대답 해 줄 수 없다는 것은 수강자 입장에서 보면 답답한 일이겠으나 정작 답답한 쪽은 한 마디로 궁금증을 풀어줄 수 없는 쪽이다.
부득이 역설적으로 대답해 줄 수밖에 없는데 이럴 때 흔히 다음 네 가지로 대답해 주곤 한다.
첫째, 시에 미쳐라.
둘째, 시를 많이 읽어라.
셋째, 시 이론을 이해하라.
넷째, 시 쓰는 이론을 지속적으로 하라.
이 네 가지는 단순한 해답이 아니라 시를 알고자 하고 시를 쓰고자 하는 분에게, 특히 시를 
잘 쓰고자 하는 분에게는 시를 쓰기 이전에 거처야 할 필 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 필수 과정을 거친 다음 그래도 시를 쓸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면 그때 비로소 시 창작이라는 싸움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

이 말은 시에 대한 관심이 막연한 낭만이나 취향, 멋, 사치로서가 아니라, 절실하고도 필수적인 자기표현 욕구의 충족을 위한 문화적 행위임을 자각하고 필생의 작업으로 받아들여 전 생애를 투자해야 한다는 뜻이다.

대 부분의 경우, 시집 몇 권울 읽고 또 몇 편의 습작 체험을 통해 시란 시시한 것이 구나 한다든지, 이와는 반대로 자신은 시적 자질이나 재능이 없다고 판단한 나머지 헌신짝 버리듯 시를 외면하는 분들이 상당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가 예술인 아상 시적 자질이나 재능이 요구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특수한 시적 재능의 소유자만이 시인이 될 수 있다고 그릇된 판단을 내리는 사람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시인은 특별한 재능이나 자질을 타고난 것이 아니다. 즉, 시적 천성을 타고난 사람은 달리 없다는 뜻이다. 
누구나 노력하면 시를 쓸 수 있고 또 훌륭한 시인이 될 수 있다. ㅡ 계속


...
 

일찍이 C. D. 루이스는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시인이었다고 피력한 바 있고, R∙M 릴케는 시인 아닌 사람은 없다고 진술한 바 있다. 
이 말은 누구나 시적 자질이나 재능을 천부적으로 타고 났다는 뜻이 되고, 이는 젊은 사람은 시적 감성, 시적 정서, 시적 상상력이 그 어느 때 보다도 풍부하다는 뜻이 된다.

시인이 될 재능이나 재질은 타고난 것이 아니며, 더구나 특별한 시적 재능이란 있을 수 없다.
과거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는 시를 천성(天性)의 미학이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남달리 시적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 시적 재능의 소유자라고 보았던 것이다.
누구나 꽃을 보면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기쁜 일이 있으면 기뻐하고 슬픈 일을 당하면 슬퍼한다. 이것은 조물주가 인간에게 천부적인 감성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희로애락의 정서 반응을 하고 또 정서에 의탁하여 감정을 표현하게 마련이다.

시인이라 해서 달리 특별한 감성을 가지고 태어나고, 남보다 다른 정서 반응을 환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잘못이다.
다만 시적 감성이 깊다보면 정서 반응을 남과 달리 하게 되어 특수한 정서를 표출 할 수 있게 되는 경우가 있을 뿐이다.
더구나 요즘 시는 정서 반응이나 정서의 환기가 아니라 이를 이미지로 대체하는 의도적 제작을 요구한다.
의도적 제작이란 언어를 조형하고 정서를 형상화하는 일종의 기술적 제작을 뜻한다.
기술은 연마하고 ,수련하기에 따라 개발되며 세련되고 특수한 기법으로 발전한다.
이 말은 시도 수련하고 연마하면 얼마든지 기술적으로 좋은 시를 풀 수 있다는 해석과 통한다.

기술은 부단한 노력과 집념 그리고 하면 된다는 신념에 의하여 얼마든지 획득되고 실현될 수 있다. 여기서 재능이니, 자질이니, 천부적 천성이니 하는 따위의 시인에 대한 특수성 논급은 무의미한 것이 된다.
대신 시에 집착하고 도전하며 무단히 습작하는 노력만이 시인을 탄생시키는 조건이라는 것을 염두 해 두어야 할 것이다.
이 조건을 충족하고 실천함으로써 시인이 되고자 하는 뜻을 실현시킬 수 있을 것이다.
기러기 위한 첫째 조건인 ‘시에 미쳐라“다. ㅡ 계속


...

시에 미쳐라.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라 넉넉잡고 한 10년쯤 미쳐라.
그도 아니라면 한 3년쯤 그렇게 된다면 시인은 안 될지라도 적어도 시란 무엇인가, 시를 어떻게 스는 것인가에 대한 해답은 스스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보너스로 어떻게 하면 서로 보다 더 잘 쓸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자기 진단까지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시에 미친다는 것은 한마디로 시적 광기가 아니라 시만이 유일한 벗이요, 희망이요, 보람이요, 삶이며 생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일종의 믿음이다.
이 믿음은 진실에 대한 시적 약속이고 또 시에 대한 약속의 이행으로서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견고한 시 정신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일찍이 프랑스의 비평가 R. M. 알베레스는 시인은 믿어야 한다.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고 강조 하면서 시인은 일종의 신앙 앞에 서 있어야 한다고 피력한 바 있다.
이 말은 시인이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는 뜻인데, 이때의 신앙은 내세를 믿고 천당이나 극락의 세계를 믿듯이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믿어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새로운 세계란 지상 밖의 별개의 세계가 아니라 시인이 상상력을 통해 만들어낸 창조적 세계를 의미한다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이런 믿음 없이 시인이 존재한다면 항용의 존재 이상일 수 없게 된다. 항용의 존재는 주어진 삶을, 주어진 세계를 충실히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시적 삶이란 이 항용의 삶을 보다 새로운 삶으로 전이시키거나 치환, 변용함으로서 기존의 삶을 극복하고 지향하며 승화, 초월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삶은 상상력을 빌어 창출한 세계가 전제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여기에서 믿음은 앞서 지적한 미친다는 것과 같은 맥락을 갖게 된다. 시적 세계에 대한 탐구나 투구가 광기와 같은 맥락의 해석을 성립시키기 때문이다. 
새로운 세계가 있다고 믿지 않는다면 굳이 새로운 세계를 추구할 필요가 없고, 또 추구하고 실현한다고 해도 믿지 않는다면 한낱 가공의 세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보자.
미쳐라. 미쳐도 최소한 한3년쯤 미쳐라. 그러다 보면 시가 무엇이고, 시인의 길이 무엇이며, 또 어떻게 쓰고, 어떻게 써야 보다 잘 쓸 수 있는가의 실제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이 체험이야말로 신앙에 값하는 거시이며 더구나 체험 적 신념이란 점에서 단순한 의지 지향과는 다른 차원의 신념이 된다.

그러나 미쳐도 곱게 미쳐야 되는데 무작정 시 만이 최고, 시는 내 인생, 시 이외의 것은 의미가 없다는 식의 맹목적 광기는 인간으로서 의 삶이 불가능한 상황을 불러온다.
시에 미친다는 것은 오직 시에만 경도되는 절대 집념을 의미한다.
시 외적인 것은 외면하고 오직 시에만 빠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 삶을 시적으로, 미적 세계를 빌어 보다 고상한 세계로 이끌어 올린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시적 관심이나 시적 생활이 없이는 시에 접근할 수 없으며, 시에 경도 되었을 때에만 시에 접근하게 되고, 시를 만나게 된다는 뜻이다.
이런 미칠만한 접근방식 없이 시를 이해하기란 힘들다.
더구나 시인이 된다 해도 별 볼일 없는 시인 밖에 될 수 없을 것이다.

보다 철저히 미치기 위한 노력만이 보다 빨리 시의 길에 들어서는 첩경이 된다. 
음악에 심취하려면 음악 외의 소리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 그렇게 해야 음악의 가장 깊은 곳에 투신하고 익사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철저히 음악과 하나가 될 수 있다.
이와 같이 시에 미치기 위해서는 시를 쓰는 일에 미쳐야 하고, 시라는 영혼의 깊은 늪에 빠져들어야 한다. ㅡ 계속

...
 

시를 많이 읽어라.

시를 많이 읽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루에도 몇 권의 시집을 독파할 수 있는 독해력을 갖추고 있어야만 시를 많이 읽는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요구하는 시집 읽기는 단순한 독서로서가 아니라 올바른 시에 접근하는 좋은 시와의 만남을 위한 독서이다.
그 때문에 단순히 읽고 끝나는 항용의 독서와는 다르다.

그렇다면 시와 만나기 위한 시집 읽기는 어떤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을 대신해서 다음과 같이 권하고 싶다.

첫째. 시집을 정독하라.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을 위한 것. 심심풀이를 위한 것 등 여러 가지 목적을 갖는다. 시집을 읽는 것도 멋으로 심심 하니까, 우연히 손에 잡혔으니까, 하는 식의 진정 독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건성으로 읽기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시는 의미의 전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시속에 함축된 암시나 상징 그리고 늬미의 변용이나 치환을 통한 정서적이고도 감각적인 미적 감동을 전달하는 일종의 변용, 치환, 전이의 미학이다.
그래서 시집을 읽는 것은 시인의 미적이고 감동적인 체험을 빌어 시인이 체험했던 감동을 간접 체험을 통해 획득하는 행위이다.

시는 내포적(內包的) 언어미학에 의존한다. 
다시 말하면 시는 사물의 해석이나 사실을 밖으로 드러내 설명하는 과학적 진술과는 달리 사실이나 진실을 안으로 감추어 암시나 상징으로 드러내는 의사진실이다. 
그 때문에 시는 의미로 해석 되는 것을 거부하고 논리로서 증명되는 것을 초월한다. 
그것은 시가 메타언어를 동원하고 있기 때문인데, 메타언어는 어떤 사물을 지시하고자 했을 때 밖으로 드러나는 의미를 버리고 그 뒤에 감추어진 뜻, 즉 숨은 비의(非意)를 빌어 나타내는 언어다.
그뿐만이 아니라 약속된 의미망을 벗어나 초월적 의미를 동원하거나 차용한다. 그래서 시는 좀처럼 감춘 뜻을 드러내지 않고 함축된 암시나 상징으로 드러낸다.

산문이 사실을 보다 사실적으로 명중하기위해 설명하고 또 설명해서 논리를 성립시키고자 한다면 시는 논리를 버리거나 초월한다.
그 때문에 시를 읽고 밖으로 드러난 의미에만 접근하려 한다면 십중팔구는 실패한다. 
여기서 정독이 요구된다. ㅡ 계속

...
 

시를 이해하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속에 감춰진 함축적 의미를 발견하여 짐짓 시인이 드러내고자 한 것이 무엇이었던가를 발견해 보라. 
그것은 시의 이해가 아니라 시가 주는 충격적 감명을 체험하게 해 줄 것이다. 
한 편의 시가 의미로 드러나지 않고 사물로 진열되어 변용의 미학을 보여 주었을 때, 이를 발견 해 느끼는 감동은 충격적인 것이다.
이러한 충격적 감동은 시를 읽고 또 읽으며 음미하는 과정에서 하나씩 터득되는 것으로서 정독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두 번째, 감동을 준 부분을 다시 읽고 재해석 해 보라.
시집을 읽다보면 그 몇 편에 유독 친근감이 가고 또 감동을 받는 시가 있다. 
왜 이 시가 내게 감동을 주고 마치 내가 쓴 것 같은 친근감을 주는 것인가 하고 사람들은 생각하게 된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무엇인가 그럴만한 이유가 발견되게 마련이다.
그것은 분명 그 시적 체험을 스스로 체험했던 적이 있었다는 것에 연계된다.
달리 말하면 그 시를 쓴 시인의 체험과 읽는 이의 체험이 유사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독자는 곰곰이 생각 할 것이다.
“그래 이와 유사한 체험을 나도 한 적이 있었지. 그 때문에 친숙한 정감을 불러일으키는 거야.” 하는 말을 자기도 모르게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체험의 유사성을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시인이 이 체험을 시로 승화시켰는가 하는 것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이 관심으로 한 편의 시를 akc; 스스로가 쓴 듯이 뜯어보고 분석해 보며 다시 재조립해 보아야 한다. 이때 “아 나는 왜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왜 이런 상상력을 동원하지 못 했을까, 왜 이런 사물을 동원하지 못했을까, 왜 이런 의미로 전환하고 이동시켜 보지 못했을까.”하는 아쉬움이 생길 것이다.
이 아쉬움은 곧 깨닫게 하여 자신감을 상실하게 자기의 무능력함을 깨닫게 하여 자신감을 상실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면 “나는 자질이 없어, 글렀어.” 하고 괴로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자신의 무능력함을 깨달았다는 것은 그 만한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미처 개발하지 못했다는 뜻인데, 이는 자신의 잠재력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잠재력을 개발하지 못했던 것은 재능이나 능력 부족이 아니라 이를 자기화 하는 능력부족, 훈련의 부족이었던 것이다.
이 부족한 훈련을 남의 시를 통해 체험함으로써 이미 독자는 훈련의 한 과정을 겪은 것이 된다. 이것이 시를 재해석하는 데서 얻는 창작 체험이다.

셋째로는, 좋은 부분, 즉 마음에 드는 행위나 연이 있으면 그냥 좋다고 하지 말고 노트에 옮겨 써 보는 일이다.
홂겨 쓰는 과정에서 문득 새로운 시어를 동원하여 가필 한다든지, 몇 단어를 생략 해 본다든지, 혹은 새로운 이미지를 첨가 해 본다든지 하는 식으로 자기 나름의 창작 연습을 해 보는 것도 매우 유익하다.
혹은 좋다고 여겨지는 부분에 유사한 체험을 동원해서 나름대로 재구성해 보면 필시 ‘아, 이렇게도 형상화가 가능 하구나.’ 하는 자신감이 생길 것이다.
이 자신감을 살려 내친걸음에 시 한편을 써 보라. 그러면 그것이 오작이었건 창작 이었건 간에 시를 쓰는 행위가 되고, 이 시는 시를 창작하는 경험으로 이어질 것이다. ㅡ 계속

...
 

넷째로는 시집을 읽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 시와 만나면 그냥 던져 버리거나 넘어갈 것이 아니라 어느 한 부분이라도 관심을 갖고 곰곰이 생각하고 이해하고자 노력 해 보라. 
그러면 어떤 현태의 해석이든 자신의 접근 방식이 나타날 것이다.

이 해석은 다른 모호한 부분을 해석하는 단서가 되어 영 흥미 없던 시가 흥미의 대상으로 전환될 것이다. 
이러한 꾸준한 노력과 인내는 시를 이해하는 차원을 넘어 시를 해석하고 분석하는 능력을 개발 시키고 동시에 좋고 나쁘다는 분석의 안목을 길러 자신의 시의 적용시키는 간접적 효과로 시 창작을 도울 것이다.

한 권의 시집을 읽는다는 것은 이와 같이 여러 시적 간접체험을 갖게 한다. 어떤 시집을 막론하고 그 중에는 가작에 속하는 좋은 시가 있게 마련이다. 이 가작만을 대상으로 이 시는 어떤 체험을 어떻게 어떤 기법으로 형상화 했는가를 익혀 든다면 시를 이해하고 쓰는 데 절대적으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시 이론을 이해하라

시의 이론을 이해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 이유는 이론을 통해 알 수 있음은 물론이고 시가 어떤 경로를 통해 오늘 날에 이르렀는가를 조감 해 볼 수 있는 안 목을 길러 주기 때문이다.
이론에는 시의 본질론, 방법론을 비롯해서 시 해석론, 감상론, 비평론 등 실로 다양하다. 
특히 시 창작 론을 빠뜨릴 수가 없는데, 이는 이 글이 시를 쓰고자 하는 분들을 대상으로 하기 있기 때문이다.

시 창작 론은 각 장을 거듭하면서 하나하나 밝히겠지만, 이 중에서도 중요할 부분은 시가 어떤 경로를 통해 이르렀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시사(詩史)를 통해 오늘의 시가 어떻게 발전. 전개 되어 왔는가를 조감 할 수 있어야만 현대시가 무엇을 요구하고 있고, 또 어떻게 표현되기를 희망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부분은 시 창작에 매우 유익한 이론을 제시해 줄 것이다.
흔히 오늘에 살면서 19세기적 낭만주의시를 쓰고 있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솔직히 말한다면 시를 쓰기를 희망하는 분들의 대 부분은 낭만주의 발상에서 시를 출발시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말은 시를 쓰고자 하는 사람들 대 부분이 시적 발상으로 정서를 빌어 시를 쓰고 있다는 것을 의미 한다.

오늘의 시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수긍이 가고 납득이 가게 된다. 납득하고 수긍하기 전까지는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구시대적 발상을 고집하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이는 현 시대가 무엇이며 어떻게 표현되기를 희망하는가 하는 현시의 요구를 모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시의 전개 과정을 조감 해 보는 시사의 이해는 시 창작에 매우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본다. ㅡ 계속

...
 

시의 본질이 변한 적은 없다.
그러나 주어진 시대마다 표현의 방법을 각기 달리 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마치 각 시대마다 인생관, 세계관이 달랐듯이 시에 대한 요구도 시대마다 달랐기 때문이다.

쉬운 예로 사랑을 예시 해 보자.
우리 조선 시대의 사랑은 사랑의 감정을 안으로 감추어 드러내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알았다.
그래서 사랑하는 임을 만나도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소를 흘리는 것으로 입가에 사랑을 표현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랑 표현은 어떠한가. 만나자 마자 주변에 누가 있건 없건 껴안고 뽀뽀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이는 사랑의 본질이 변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 다름을 말해준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도 시대를 거듭 하면서 시 자체가 변한 것이 아니라 시법에 따라 표현하는 방법을 달리 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시가 어떤 경로를 어떻게 각기 달리 표현되어 왔는가 하는 점을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오늘의 시가 이렇게 표현될 수밖에 없다는 필성을 깨닫게 되고, 또 이 깨달음을 통해 오늘의 시 작법에 신뢰를 갖게 될 것이다.

간략히 시사를 정리해 보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그러나 시사를 정리 한다는 것은 엄청난 작업이기 때문에 그 방대함을 수용한다는 것은 본 장으로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 시대마다 무엇을 주체로 무엇을 어떻게 해석하고 진술 하고자 했는가 하는 발췌, 진열함으로써 시 흐름의 역사 적 경로를 밝히는 것으로 대신 하고자 한다.

시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 로마 시대의 시는 한마디로 미, 질서, 지혜의 미학 이었다.
이 시대의 세계관이나 인생관은 인간의 운명을 신탁에 의해 결정하는 운명론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 때문에 산과 같은 밝은 지혜를 갈망하고 현세적 삶을 중시하는 정치와 연애와 술을 즐겨 주제화 했다.
또 미를 사랑하고 질서를 존중하는 삶을 중시했다. 그래서 그리스 문학은 미. 질서. 지혜를 발상 근저로 했다고 할 수 있다. 또
그들은 인간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으로 인간의 힘이나 지혜로써는 도저히 극복 할 수 없는 또 다른 힘이 있다고 믿었는데, 그것이 곧 신의 존재였다. 
그 신은 제우스로 대표되는 다산주의로서 신은 제각기 인간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운명에의 의탁은 필연적으로 현세적 삶을 즐기려는 정치, 연애, 술과 같은 쾌락 원리로 작용했다. 
이 시대를 표현한 시도 예외 없이 이런 삶들을 주체화함으로써 이성의 통제보다는 열정적 표출을 필연 화할 수밖에 없었다. ㅡ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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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에 오면 상황은 변한다.
그리스 로마의 다산주의가 유일신으로 대체되고 신과 공존하던 그리스 로마 시대의 생활 방식이 신과 인간을 종속 관계로 주종 화함으로써 신의 절대 권력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찬양이나 사제의 행적을 중시하는 그리스 로마의 개인적 정서에서 종교적 교권주의의 틀에 얽매이게 된다. 
모든 삶의 가치는 신을 위해서, 신에 의해서 부여받게 되고 인간의 지혜나 감정의 허용이 통제된다. 필연적으로 교권 사상이 시의 발상이 될 수밖에 없게 된다.

신과 인간의 이러한 종속 관계는 다시 유마니즘에 의해 종속관계의 철회를 통한 인간의 평등한 행복을 추구 하는 인간정신주의로 전환된다.
인간과 인간의 본성에 눈 뜨고 인간을 존중하며 인간의 자유와 평등의 발전에 기여 하고자 하는 인간의 해방을 구하기기에 이른다.
이른바 르네상스이다.
르네상스는 신 만능의 중세를 거부하고 인간의 자유, 인간의 해방, 인간의 군위를 주장하는 운동으로서 비로소 인간에 의한 인간의 구가라는 주제를 설정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자유 만능의 사상, 인간의 자유분방한 해방은 이를 질서화 하기 위한 새로운 질서를 요구하기에 이르는데, 그것이 고전주의 체제이다.

고전주의는 일종의 이성 우월주의로서 의해 통제의 질서가 요구된 시대 적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자유와 해방의 방종을 질서화 하기 위한 통제의 원리를 이성으로 보았던 데서 제기된 질서의 원리라 할 수 있다. 그리스 로마와 같은 질서의 원리를 중시하기 때문에 그들의 세계관이나 인생관은 이성적 해석에 의존하게 된다.
역시 문학도 이성의 원리가 발상 차원으로 작용된다. 달리 말하면 인간이 인간에 의해 해석되는 해석의 기준이 이성에 의탁 된 셈이다.
이로써 고전주의는 이성이 지배하고 이성에 의해 세계를 해석하는 이성 중시의 문학이 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이성주의는 다음 시대인 낭만주의에 거부된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인간은 이성과 함께 감성을 천성으로 부여 받고 있다. 달리 말하면 이성과 감성의 공존 적 관계, 이의 조화로운 화해의 원리에 의해 해석되기를 희망한다는 뜻이다.

이성중심의 경향이 감성주의로 전환되면서 인간의 자연성 회복을 부르짖는 낭만주의 시대를 열기에 이른다.
낭만주의는 이성에 의해 억압 된 감정의 해방을 통해 인생을 해석 하고자 하는 19세기를 지배한 문학의 원리이다. ㅡ 계속

...
 

이 원리는 이성의 통제를 벗어만 자유분방한 감정이 이상향으로 설정된 동경의 미학에 바탕하고 있다.
동경은 영원한 이상향인 미래치인 통시적 동경과 이국 취향의 국제주의가 주축이 죈 수평적 동경으로 교직되고 여기에 내적 동경인 사랑이 대별된다.
이러한 동경은 일종의 고정을 거부한 유동의 미학으로서 낭만적 아이러니를 본질로 한다.
낭만적 아이러니는 성취한 꿈의 세계를 파괴하고 보다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이율 성을 발상 차원으로 하면서 동시에 양극화 현상을 부단히 하나로 합일하고자 하는 극성(極性)의 미학을 근간으로 한다.

이러한 유동이 수반하는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고정화가 요구 되는데, 그것이 20세기 시를 대표하는 모더니즘 시학의 요체이다.
견고한 이미지를 빌어 모호한 관념을 구상화 하고자 하는 회화적 이미지즘 시이다.

모더니즘은 정신적 광원(光源)을 지성에서 찾으면서 기계문명에 마멸되고 황폐화해가는 인간의 정신의 어둠, 즉 삶 속의 죽음을 밝혀 줌으로써 정신적 사양화(斜陽化)를 극복하고자 하는 일종의 광원의 시학이다.
이러한 정신 본질과 함께 모더니즘이 추구한 시는 관념과 정서의 회화화라는 시각 미학을 추구했고, 이는 강렬하고도 투명하여 견고한 이미지를 중시하는 이미지즘을 표현 본질로 하고 있다. 일종의 정서의 감각화라고 할 수 있는데, 정서의 감각화는 체험시론으로 연계된다.

체험시론은 감각 기능을 동원한 실념주의를 바탕으로 한 존대의 탐구나 발견이고자 한다.
즉, 체험시론은 일종의 물화(物化)를 근간으로 한다.
물화는 존재의 확인이며, 존재의 변용이며, 존재의 탐색을 통한 새로운 재현이다.

감각에 의해 체험한 사상(事象)은 우리의 뇌리에 인화되기 마련이다.
이러한 인화는 언제이고 재생이 가능한 이미지를 성립 시킨다.
이미지가 그림으로 그린 그림이라는 해석은 이미지의 발원이 체험에 잇대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시를 이미지로 규정 하고자 하는 것은 곧 현대시를 체험시론으로 해석하게 하는 근거를 제공하게 준다. 
체험은 관념에 대한 실념이고, 가공에 대한 실제이며, 즉자적 해석이 아닌 대자적 시각에 의존하는 생 체험을 바탕으로 한다.
그 때문에 체험은 시를 견고한 이미지로 결구시키는 역할을 하며 투명한 사물화로 구상화 하는 존재에서의 해석을 용이하게 해 준다.

따라서 시란 정서는 물론 사상이나 감정, 심지어는 의식까지도 사물로 대체하는 철저한 즉물 적 표현 이라는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
여기에서 현대시는 두 경로의 또 다른 방법론을 요구 하는데, 그 하나는 메타화이고 다른 하나는 메타피지컬 포위트리다. ㅡ 계속

...
 

흔히 현대시를 메타언어라고 규정하는데, 메타란 두 의미론적 해석을 요구한다.
하나는 언어의 초월적 의미로 해석할 수 있고, 다른 하나는 뒤에 감추어진 비의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언어의 초월적 기능은 의미의 확장이자 의미의 고정화를 거부하는 일종의 암시나 상징적 기능에 의탁한다. 그리고 비의는 드러나지 않는 것을 포착 해 내는 일종의 새로운 의미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자의 속성을 우리는 병치적 메타라고 하고, 후자적 속성을 치환적 메타로 규정한다.

구체적으로 풀이하면 이질성 속의 동질성을 찾아 결합한다. 동질성 속의 이질성으로 이동한다든지 하는 일종의 변증법적 결합이다.
이러한 결합은 의미로는 도저히 불가능하고 대신 의미의 초월이나 의미의 암시에 의존 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의미의 물화나 의미의 이동이라고도 할 수 있다.

메타피지컬 포위트리는 시적 변증법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관념이나 사상을 중시하면서도 표현은 메타화에 의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이상 시는 리얼리즘의 현상학적 권태로움을 초월성이나 신비로 대체하고 여기에서 고도화한 상상력을 요구한다. 동시에 상상력은 기발한 착상의 컨시트를 창출해 낼 수 있게 한다.

컨시트는 상대성을 초월하여 초자연적인 대자적 시각을 극복함으로써 형이상적 속성을 지니게 된다. 또 이러한 상상력은 기존의 물화를 빚어 형상화한 이미지의 단조로움을 극복, 아이러니, 풍자, 패러독스, 도착적 표현 등으로 종합적 효과를 획득하는 기법상의 진보도 가져다주었다. 또한 현대시를 아이러니 생각하는 엘리엇의 견해를 진일보시킨 풍자에까지 이르게 하고 있다.

이러한 형이상 시는 단순한 기법상의 문제가 아니고 현대의 복잡다기한 분열상, 정치와 과학의 분화, 복잡한 문화 현상 등을 반영하기 위한 복합적 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이상의 개관에서 볼 수 있듯이 시는 그 본질의 변화가 아닌 시대가 요구하는 것에 따라 그 표현 방법을 달리 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현대에 살면서 19세기적 낭만주의 시를 쓰고자 한다거나 이미지즘을 신봉하는 외고집을 부리고자 한다는 것은 참으로 넌 센스다.

우리에게 당면으로 주어진 시학은 시의 메타화이거나 컨시트와 아이러니, 풍자와 같은 형이상적 시에의 접근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오늘에 살고 있는 이상 오늘의 시가 요구하는 시법에 충실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지각 있는 독자라면 이러한 당면을 외면 할 수 없을 것이고 현대시에 동참할 것으로 믿는다.
이상의 여러 조건들은 시를 쓰고자 하는 이들이 시를 쓰기 전에 갖추거나 터득해야 할 기초적 정석이란 점을 강조해 두고 싶다. ㅡ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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