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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첼란(Paul Celan, 1920년~1970년)은 루마니아 출생의 독일어 시인이다.
처음에는 의학을 공부하였으나 전쟁으로 중단하고 소련군 점령 후에는 빈으로 피신하여, 그 곳에서 최초의 시집을 발표하였다(1947). 1948년에 프랑스 시민권을 얻어 파리에서 살면서 프랑스어·러시아어(語) 어학교사 겸 번역가로 일하면서 시인으로 활약하였다.
그의 시는 시선(視線)이 포착(捕捉)한 사물을 금욕적이라 할 만큼 응축된 시어에 정착케 하는 투명함과 순수함을 갖는 것으로 독일 현대시 가운데 이채를 발하는 존재이다. 주저(主著)로는 시집 <기이함과 기억>(1952), <문지방에서 문지방으로>(1955), <말의 울타리>(1959) 등이 있다. 아우슈비츠 이후 프랑스 시인 에드몽 자베스와 더불어 가장 돋보인 유대계 시인으로 손꼽힌다.
요약 루마니아 태생 독일의 시인.
본명은 Paul Antschel.
독일에 거주한 적은 없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 문학의 매우 강력한 혁신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문체상으로는 프랑스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유대인으로서의 비통함을 주된 주제로 삼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루마니아가 실질적으로 나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자 첼란은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고 그의 부모는 살해되었다.
1945~47년 부쿠레슈티에서 번역 및 교정 일을 했고, 이후 빈으로 건너가 첫 시집 〈납골함의 모래 Der Sand aus den Urnen〉(1948)를 발표했다. 그의 시는 초기부터 현실의 공포와 상해에 대한 주마등 같은 지각방식, 확실한 심상과 작시법이 그 특징이었다. 1948년 전쟁 전 잠시 의학공부를 했던 파리에 정착하여 사범학교에서 어학을 강의하는 한편 셰익스피어와 프랑스·이탈리아·러시아의 시를 독일어로 번역했다.
2번째 시집 〈양귀비와 기억 Mohn und Gedächtnis〉(1952)으로 독일에서 명성을 굳혔고, 1958년 브레멘 시(市) 문학상을, 1960년 모더니즘의 원조인 독일의 극작가 게오르크 뷔히너 상을 수상했다. 그후 〈빛의 강박 Lichtzwang〉(1970)을 비롯하여 7권의 시집이 출판되었다. 가장 충실한 영역본은 〈Speech-Grille and Selected Poems〉(1971)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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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에서 파울 첼란
이방 여인의 눈에다 이렇게 말하라. 물이 있으라! 이방 여인의 눈 속에 네가 아는 물속의 여인들을 찾으라. 룻! 노에미! 미르얌! 그녀들을 물 밖으로 불러내라. 네가 이방 여인 곁에 누울 때 그녀들을 치장해 주라. 이방 여인의 구름머리카락으로 그녀들을 치장해 주라. 룻, 미르얌, 노에미에게 이렇게 말하라. 보라, 내가 이방 여인과 동침하노라! 네 곁의 이방 여인을 가장 아름답게 치장해 주라. 룻, 미르암, 노에미로 인한 고통으로 그녀를 치장해 주라. 이방 여인에게 말하라. 보라, 내가 그녀들과 동침했노라고!
* 동침: 마지막 문장에 이르기까지 아홉 문장이 '동침'이라는 가장 밀착된 인관관계에 동족의 기억이 스며들어 있다.
최근 연구와 시간집 출간을 통해 두 사람은 서로의 작품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음이 밝혀졌다. 첼란의 시 <코로나>, <애급에서>와 바하만의 소설 <말리나>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 전영애
코로나
가을이 내 손에서 이파리를 받아먹는다. 가을과 나는 친구. 우리는 시간을 호두에서 까 내어 걸음마를 가르친다. 시간은 껍질 속으로 되돌아가기에.
거울 속은 일요일이고, 꿈속에서는 잠을 자고, 입은 진실을 이야기한다.
내 눈은 연인의 음부로 내려간다. 우리는 서로 바라본다. 우리는 서로 어두운 것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서로 양귀비와 기억처럼 사랑한다. 우리는 잠을 잔다, 조개에 담긴 포도주처럼, 달의 핏빛 빛줄기에 잠긴 바다처럼.
우리는 서로 껴안은 채 창가에 서 있고, 사람들은 길에서 우리를 본다. 알아야 할 때가 되었다. 때가 되었다. 돌이 꽃피어 줄 때, 그침 없는 불안으로 가슴이 뛸 때가. 때가 되었다, 때가 될 때가.
때가 되었다.
*코로나: 태양이 완전히 가려졌을 때 시간의 어두운 원점에 선 연인들의 모습을 그린 연가이다.
무적(霧笛) 속으로
감춰진 거울 속의 입, 자부심의 기둥 앞에 꿇은 무릎, 창살을 거머쥔 손이여.
너희에게 어둠이 다다르거든, 내 이름을 불러라, 나를 내 이름 앞으로 끌어가라.
화인(火印)
더는 잠들지 못했다. 우울의 시계 장치 속에 누워 있었기에, 우리, 시계바늘은 채찍처럼 휘었고, 도로 다시 튕겨져 피 맺히도록 시간을 후려쳤고, 너는 짙어 가는 어스름을 이야기했고, 열 두번 나는 네말의 밤에 대고 너를 불렀고, 하여 밤이 열렸고, 그대로 열린 채로 있었고, 나는 눈 하나를 그 품 안에 넣고 또 하나는 네 머리카락에 넣어 땋아 주었고, 두 눈을 도화선으로, 열린 정맥으로 읽었고- 갓 번뜩인 번개가 헤엄쳐 다가왔고.
누군가
누군가 심장을 가슴에서 뜯어내 밤으로 건네는 이, 장미를 향 해 손을 뻗는다. 그 잎과 가시는 그의 것이니, 장미는 그의 접시에 빛을 놓고, 그의 유리잔을 숨결로 채우니, 그에게서는 사랑의 그림자가 술렁인다.
누군가 심장을 가슴에서 뜯어내 밤으로 건네며 울리는 이, 그는 헛맞추지 않고, 돌을 돌로 치며, 그의 시계에서는 피가 울리고, 그의 시계에서는 그의 시각이 시간을 친다. 그이, 보다 아름다운 공을 가지고 놀아도 좋다. 너에 대해, 나에 대해 이야기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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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골항아리에서 나온 모래 ㅡ파울 첼란.
망각의 집은 곰팡이 슨 초록빛.
나부끼는 문마다 너의 머리 없는 악사가 푸르러진다.
그는 너를 위해 이끼와 쓰라린 치모恥毛로 만든 북을 울려 주고
곪은 발가락으로 모래에다 너의 눈썹을 그린다.
그것이 달려 있었던 것보다 더 길게 그린다. 또 네 입술의 붉음도.
너는 여기서 유골 항아리를 채우고 네 심장을 먹는다.
/파울 첼란시집 ‘죽음의 푸가’ / 민음사
♣ 아무리 읽어도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는 시를 먹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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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감상평) 세상이 따뜻해지리 파울 첼란‘죽음의 푸가’를 읽고
윤선미
빗살문학아카데미 상반기 주제는 5.18정신에 대해 깊이 있게 책을 읽고 글쓰기이다. 그중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파울 첼란의‘죽음의 푸가'시선집도 있었다.파울 첼란은 1920년 루마니아 북부 부코비나의 체르노비츠에서 유대인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21세때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첼란의 부모는 수용소에서 죽었고, 첼란 자신은 처형 직전 우연히 가스실행을 피하였다. 1970년 센강에 몸을 던져 자살하기까지 꾸준히 시작활동을 해, 모두 7권의 독일어 시집을 남겼다. 1958년 브레멘 시 문학상을, 1960년 게오르크 뷔히너 상을 수상했다. 그의 시는 읽어도 읽어도 난독증이 있는 것처럼 난해하다. 그나마 내 감성을 자극한 시 몇 편을 감상해 본다.
“이건 시간의 눈/일곱 빛깔 눈썹 아래서 /곁눈질을 한다/그 눈꺼풀은 불로 씻기고 /그 눈물은 김이다//눈먼 별이 날아와 닿아/뜨거운 속눈썹에서 녹으니 /세상이 따뜻해지리/죽은 이들이 /봉오리 틔우고 꽃 피우리”-「시간의 눈」 전문
*시가 마치 꽃의 전설처럼 슬프고 가슴이 뜨거워진다. 시간의 눈은 억압과 암울한 시간을‘눈먼 별이 날아와 닿아 세상이 따뜻하다'라고 말하고 있으며‘죽은 이들이 봉오리 틔우고 꽃 피우리' 역설적으로 표현되어 그 시간의 먹먹함이 극에 달해 속울음을 울게 만든다.
“꽃을 뿌리라, 낯선 이여, 마음 놓고 뿌리라./그대 저 아래 깊은 곳에 /정원들에 꽃을 건넨다.//여기 누웠어야 할 사람은, 그 어디에도/ 누워 있지 않다. 그렇지만 세계가 그의 곁에 누워 있다./세계, 그것이 갖가지 꽃들 앞에서/눈을 떴다.//그러나 그는 붙들었다. 많은 것을 보았기에,/ 눈먼 사람들과 함께,/그는 갔다, 그리고 너무 많이 꺾었다./향기를 꺾었다-/그리고 그걸 본 사람들이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이제 그는 갔다, 낯선 물 한 방울을 마셨다,/바다를,/물고기들-/물고기들이 그 몸에 와 부딪힐까?” -「가묘」-전문
" 바람의 장례는 엄숙했다/평생 바다 내음 맡으며 살아간/ 죽기 직전 눈물 한 방울 남기고 간 그녀/삼베적삼 고이 입혀 돌을 비잉 둘러줬다/ 얽매이지 말라고/바다 바람이 무덤이다/바다가 웅웅 울었다/바람이 휭휭 떨었다/까마귀 바람 타고 찔레 곁 맴돈다/땅을 파서 묻어주고 싶었다/돌멩이 하나 더 둘러주고/ 자꾸 뒤를 돌아다본다/ 까옥깍 소리에 잠을 자지 못했다/몇 년 후/ 뼈마디만 나뒹굴었다/한창 찔레꽃 향기 쫓게하고/사랑, 세월 지나 바람에 삭아" -졸시「풍장」 전문
*‘가묘'를 읽는 동안 내가 쓴‘풍장'이 자꾸 떠올랐다. 가묘는 1연에서 보듯 꽃으로 묘를 장식하고, 풍장에서는 섬의 장례가 돌을 비잉 돌려주고 바람에 맡긴다. 죽음의 세계가 펼쳐진 슬프고도 참혹한 시다.'세계가 눈을 뜨고 향기를 꺾어버린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그는 누구인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다시 한 번 고민하게 하는 시다.
“저 많은 성좌들, 우리 앞에/ 내밀어져 있는. 나는,/언제였던가? 너를 보았을 때/저 바깥/ 또 다른 세계들 곁에 있었다.//은하계의, 오, 이 길들./우리들에게로/우리들 이름의 짐 안으로/밤들을 흔들어 보내오는/이 시각,/나 이제 알겠네, 우리가 살았다는 건/틀린 말,/숨결 하나가 '저기' 와 '거기 없음' 과 '이따금씩' 사이를/눈먼 채 지나갔을 뿐./혜성처럼 눈 하나가/불 꺼져 버린 것을 향하여 휘익 날았을 뿐, 골짜기들 속에서,/거기, 그 작열이 스러진 곳/유두(乳頭)처럼 화사하게 시간이 멈추어 있다./거기서 이미 위로, 아래로/그 너머로 자랐다./있는 것, 있었던 것, 있을 것이-/나 알겠네./내가 알고 당신이 알고, 우리가 알았네,/알지 못했네, 우리는/있었지만, 거기에는 없었지. 그리고 이따금씩/오직 무(無)가 우리 사이에 서 있을 때라야/우리는 서로를 온전히 마주하였지.”-‘저 많은 성좌들’전문
*마지막 두 행이 맘에 들어 이 시를 골랐다. 가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였을 때 온전하지 않을까 생각하곤 하였다.'알고 알지 못함이 무엇이고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인가? 숨결 하나가 눈먼 채 지나갔을 뿐 알지 못했네 우리는 있었지만 거기에는 없었지... ’
“당신의/ 저 건너에 있음, 오늘 밤 /말[言]로써 내 당신을 다시 데려왔다, 여기 당신이 있다/모든 것이 진실하고 진실에의/한 가닥 기다림도 진실하다.//우리 창(窓) 앞을/콩 넝쿨이 기어 오른다, 생각하라/누가 우리 곁에서 자라며/그것을 바라보는가를.//신(神)은, 우리는 그리 읽었다,/하나의 조각이며 또 하나의, 흩어진 조각이라고./모든 베어진 이들의/죽음 가운데서/ 그이는 자신에게로 자라 간다./그곳으로/시선이 우리를 이끌어 간다./그/반쪽과/우리는 오가며 지내는 것.”-‘당신의 저 건너에 있음 ’전문
* '모든 것이 진실하고 진실에의 한 가닥 기다림도 진실하다'세월호의 진실이 생각나는 시다. 하루 빨리 진실이 밝혀지기를 소원한다.‘신이 죽음 가운데서 그이는 자신에게로 자라 간다'한 것처럼 세월호 희생자 모두 좋은 곳으로 가서 잘 지내길 바란다.'그곳으로 시선이 우리를 이끌어 간다 그 반쪽과 우리는 오가며 지내는 것' 남은 유가족들도 힘을 내 '한가닥 기다림도 진실하다' 생각하는 날이 오길 바란다. 밝혀지는 그 날까지 모두 건강하길 바래본다. 파울 첼란 시는 그 때나 지금이나 가슴을 울리는 시임에 분명하다.
‘아우슈비츠 이후에는 어떠한 서정시도 쓰일수 없다'라고 테오도어 아도르노가 말했다. 하지만 파울 첼란은 인간의 역사속 극한에 이른 서사를 상징적,초현실적 언어로 서정시를 쓰는데 성공했다.‘음지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진실을 말하는 자이다'라고 말한 첼란은 아우슈비츠의 참혹한 시대를 침묵을 통해 극도의 경악을 말하고자 했다. 그리고 가장 진실을 말하는 시인이 되었다. 우리는 ... 지난 역사적 진실을 외면하지 말고 당당히 말할 수 있게 더 공부를 해야겠다. 파울 첼란 시선집을 읽는 동안 어려웠지만 부족한 나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촛불집회 때처럼 국민들의 참여와 힘으로 왜곡된 역사가 바로 잡혔으면 한다.‘세상이 따뜻해지리/죽은 이들이/봉오리 틔우고 꽃 피우리’
==================================덤으로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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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 당시 찍은 여권사진. /출처; 독어 위키)
- 당시 루마니아,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체르니우치, 1920년 11월 23일 출생.
파리에서 1970년 4월 20일 사망한 것으로 추정.
- 독일어 서정시인, 원래 이름은 Paul Antschel이었지만 훗날 루마니아어인 Ancel로 이름을 바꿨고, 여기서 철자를 바꿔 Celan이라는 이름이 나왔다.
- 삶
파울 첼란은 북부 루마니아의 부코비나(Bucovina)지역의 수도였던 체르니우치(독일어로는 Czernowitz : 체르노비츠)출생으로, 독일어를 쓰는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레오 안첼 타이틀러(Leo Antschel Teitler)와 그의 부인 프레데리케(Frederike)의 유일한 아들이었다. 가족의 집은 체르니우치 사다고라 구역의 바실코거리에 있는 첫번째 집이었다.
첼란은 우선 독일어 학교와 헤브라이어 학교를 다녔고, 5년을 루마니아어 공립김나지움(한국으로 치면 공립고등학교)을, 그리고 1938년 6월 3일 대입자격시험(Abitur: 아비투어)을 볼 때까지 우크라이나어 공립김나지움을 다녔다. 1938년 프랑스 투르에서 의학공부를 시작했으나, 1년 후에 로망스어학(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어 등 로망스어권의 어학과 문학에 대한 학문)을 공부하기 위해 루마니아로 돌아왔다. 1940년 북부 부코비나지역과 첼란의 고향인 체르니우치가 소비에트 연방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첼란은 학업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다 1941년 독일군과 루마니아군이 체르니우치를 점령했고 유대인들은 해당 지역의 게토에 수용되었다. 1942년 첼란의 부모는 게토에서 트란스니스트리아(현 루마니아 동-남부와 몰도바지역에 걸쳐있는 지역)에 있는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수용소에서 아버지는 발진티푸스로 사망하고 어머니는 사살되었다. 부모의 수용소행과 죽음은 첼란에게 깊은 흔적을 남겼다. 그는 살아있는 내내 부모를 고통 속에 방치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의 시들 속에서 이런 트라우마의 흔적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1942년부터 43년까지 첼란은 루마니아지역 곳곳의 강제노동수용소들에 수용되었고, 몰도바지역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을 했다. 체르니우치는 1944년 8월 적군에 의해 점령되었고, 수용소에서 풀려난 후에 첼란은 1944년 12월 체르니우치로 돌아와 학업을 다시 시작했다. 1945년 그는 부쿠레슈티(현 루마니아의 수도)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학업을 계속 했다. 이곳에서 첼란은 번역가와 대학 강사로 일했다. 1947년 그는 헝가리를 거쳐 빈으로 도피했고 1948년 파리로 이주했다. 빈에 있던 1948년에 첫번째 시집 "유골 항아리에서 나온 모래"(Der Sand aus den Urnen)를 발표했지만 주목받지 못했다.
1948년 5월 빈, 첼란은 40년대 말부터 50년대 초까지 연인관계를 유지하게 되는 잉게보르크 바하만(Ingeborg Bachmann)을 만난다.(둘은 1957년 10월부터 1958년 5월까지 파리에서 다시 연인관계를 맺는다.) 둘의 관계는 첼란의 일기와 유고로 출판된 두 사람 사이의 편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두 사람의 편지는 독일현대문학박물관(Deutsches Literaturarchiv)과 오스트리아국립도서관(Österreichische Nationalbibliothek)에 보관되어있다. 2008년 8월 주어캄프 출판사(Suhrkamp Verlag)는 'Herzzeit'라는 제목으로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를 출간했다. 파울 첼란의 시 '코로나'(Corona)와 시집 '양귀비와 기억'(Mohn und Gedächtnis)에 나오는 많은 시들은 그녀를 염두에 두고 쓴 것들이다.
1951년 11월 첼란은 파리에서 화가 기젤 레스트랑주(Gisèle Lestrange)를 알게 되고, 일년 후 그녀와 결혼한다. 두 사람은 때때로 함께 작업하기도 했다.(대표적인 예가 1965년 시 "Atemkristall"의 부식동판화 작업). 1952년 슈튜트가르트의 도이췌 페어락스 안슈탈트(Deutsche Verlags-Anstalt) 출판사에서 많은 주목을 받은 시 "죽음의 푸가"(Todesfuge)(나치로 인한 수많은 유대인들의 죽음을 주제로 삼은 시)와 함께 시집 '양귀비와 기억'을 출판했다. 1955년 첼란은 프랑스 시민권을 취득했다. 그리고 아들 에릭(Eric)이 태어났다.(Eric은 프랑스어로 '써라!''écris!'의 철자를 바꿔쓴 이름이다. 또 그의 아내는 2년 전 유산한 적이 있다.)
1960년, 첼란은 표절의혹에 휩싸인다. 첼란과 친하게 지냈으며 첼란이 시를 번역까지도 했던 유대인 시인 이반 골(Yvan Goll)의 미망인인 클레르 골(Claire Goll)이 표절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골 사건"(Goll-Affäre)으로 잘 알려진 표절의혹은 첼란이 죽을 때까지도 가라앉지 않았다.
첼란은 수차례 정신병원을 드나들었다. 그중 한번은 착란상태에서 아내를 칼로 살해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1967년 두 사람은 별거하기로 결정했지만, 계속해서 부부로 남았다.
(파울 첼란과 기젤 레스트랑주, 출처)
그가 죽기 몇달 전인 1969년 10월, 첼란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는 게르숌 숄렘(Gershom Scholem)외에도 낭송회에서 부코비나 출신의 옛친구들과 예후다 아미차이(Jehuda Amichai)와 다비드 로케아(David Rokeah) 같은 이스라엘 시인들을 만났다. 첼란과 고향이 같았던 소꿉친구 일라나 시뮤엘리(Ilana Shmueli)와의 재회도 있었다.
유대인들의 예루살렘시적 전통 속에서 써진 그의 당시 시들에는 수많은 성경의 암시들이 사용되었는데, 그의 예루살렘행이 애인에 대한 성적인 찬사로 그려진다.
* 원문 : (Getragen von zahlreichen biblischen Anspielungen, verbindet sich in den dabei in der Tradition jüdischer Jerusalemdichtungen entstandenen Gedichten das Werben um Jerusalem mit erotischen Elogen auf seine Geliebte.) -> 뜻이 정확하게 파악이 안 되서 의역한 부분.
그들이 주고받은 편지, 시뮤엘리의 회상록 "예루살렘이 있다고 말해."(Sag, dass Jerusalem ist), 첼란의 유고시집 "시간의 뜨락"(Zeitgehöft)의 시들이 이런 만남들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런 자료들은 첼란이 유대교를 어떻게 생각했는가라는 까다로운 논쟁에서 증거자료로 여겨진다.
첼란이 언제 어떻게 죽었는가는 밝혀진 바가 없다. 1970년 4월 20일, 첼란이 미라보 다리에서 세느강에 뛰어들어 자살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시신은 1970년 5월 1일 세느강을 따라 파리에서 10km 떨어진 꾸흐브부와에서 발견되었다. 1970년 5월 12일 그의 시신은 발드마른 주의 띠에에 있는 파리인 공동묘지에 묻혔다. 이날은 그와 친했던 넬리 작스(Nelly Sachs, 독일 출신 유대인 여성작가로, 스웨덴에서 주로 독일어로 시와 극을 썼다.)가 사망한 날이기도 하다.
문학작품의 번역을 장려하기위해, 독일문학기금은 1988년부터 뛰어난 문학번역가에게 파울첼란상을 수여하고 있다.
- 첼란과 47그룹(Die Gruppe 47)
47그룹이 니엔도르프에서 1952년 5월 모임을 가질 때, 당시 유명하지 않았던 첼란은 공식적으로 첫낭송을 하게 되었다. 잉게보르크 바하만, 밀로 도르(Milo Dor), 라인하르트 페더만(Reinhard Federmann)의 중개로 낭송을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실패로 끝났다."당신이 그의 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압니다. 하지만 그 사람 만큼의 음악성과 짜임새를 갖춘 시인은 정말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1951년 밀로 도르가 한스 베르너 리히터에게 '첼란이 꼭 참석해야한다'며 이와 같이 보낸 편지에서 그룹 창립멤버들과 확고한 사실주의자 리히터의 부정적인 태도를 알 수 있다.
발터 옌스(Walter Jens)는 1976년 하인츠 루드비히 아놀드(Heinz Ludwig Arnold)와의 인터뷰에서 첼란의 낭송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첼란이 처음 무대에 설 때, 사람들이 말하더군요. '정말 들어줄 수가 없어!' 첼란은 너무 격정적으로 읊었어요. 우린 그걸 비웃었고, 누군가는 "괴벨스처럼 읊는구만.' 하더군요.... '죽음의 푸가'는 그룹에서 완전 실패작이었죠! 신사실주의 시인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던, 정말 다른 세계였어요." 한스 바이겔(Hans Weigel)이 덧붙여 말했다. "나중에 몇몇 동료들은 비웃으면서 앞에서 읊더군요. 'Schwarze Milch der Fruehe...' 그리고 한스 베르너 리히터는 그가 유대교 회당에서 읊는 것처럼 낭송한다고 생각했어요." 첼란 자신은 아내 기젤에게 편지에서 다음처럼 언급했다.
"시를 싫어한 사람이 다수였는데, 반발하더라고."
토니 리히터(Toni Richter)는 이때의 사건을 회상하면서 자신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파울 첼란의 낭송이 가장 비극적인 일이었다. 그의 낭송 기법에 대한 오해가 있었다. 그룹에서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 누구도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고 파울 첼란의 운명을 몰랐다. 또 그룹사람들은 높은 톤의 리듬으로 시를 낭송하는 유대-루마니아의 전통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순수문학이냐 참여문학이냐 하는 스타일상의 문제도 거기선 의미가 없었다. 첼란은 랭보(프랑스의 시인 아르튀르 랭보)가 여기서는 알려지지 않았냐고, 음악적인 율동으로 느슨해진 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냐고 물었다." 그러나 도이체 페어락스 안슈탈트사의 편집장은 이 낭송에서 첼란을 주목했고, 출판사는 그해 12월에 '양귀비와 기억'을 출판했다. 에른스트 슈나벨(Ernst Schnabel)은 그룹의 모임 후에 NWDR(Nordwestdeutscher Rundfunk)에서 '죽음의 푸가' 낭송을 방송하기도 했다. 훗날 수차례 초대를 받았음에도, 첼란은 47 그룹의 모임에는 더이상 참석하지 않았다.
* 파울 첼란과 마틴 하이데거의 만남, 그리고 하이데거와의 만남 후 쓰여진 시 "Todtnauberg"에 대한 부분은 영문 위키에만 있다. 파울 첼란의 애인이었던 잉게보르크 바하만이 빈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며 하이데거에 대한 논문을 썼다는 걸 생각하면,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대인 시인 첼란 - 전쟁 후 독일에서 새로운 시인으로 주목받은 바하만 - 나치 옹호로 비판받던 하이데거. 세 사람이 책과 시를 통해 어떤 생각들을 주고받았을지가 참 흥미로운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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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첼란(Paul Celan)은 누구인가?
그의 고향은 한 때 오스트리아에 속해있었기 때문에, 당시 교양 있는 집안에서는 독일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첼란은 어려서부터 집에서는 독일어를, 학교에서는 루마니아어를 말하며 자랐다. 어머니와의 관계는 모국어인 독일어를 통해 더 밀접하게 연결된다. 부코비나 사람들은 우크라이나어, 루마니아어, 표준 독일어, 슈바벤 사투리어 그리고 히브리어, 이외에도 여러 언어와 사투리들을 사용하였다. 첼란은 독일어와 함께 자랐는데 이는 아버지가 유대교육을 중시한 반면, 어머니는 독일어를 더 중요시하였으며, 첼란이 정확한 표준 독일어를 쓰도록 하였다. 언어적 자질이 뛰어난 그는 루마니아어, 불어, 러시아어, 영어, 히브리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하였지만 시는 모국어로 써야한다고 생각하였고, 그의 아픔과 시대적 고통을 그의 모국어이며 동시에 살인자의 언어인 독일어로 써간다. 그는 여러 언어들을 능숙히 말하고 새로운 언어를 쉽게 배우는 언어적 소질이 있음에도 모국어 외의 어떤 언어로도 결코 시를 쓰지 않을 것이라고 친구 룻 Ruth에게 늘 말하고는 하였다. 체르노비츠에서 김나지움을 마친 첼란은 프랑스의 뚜르에서 의학을 전공하지만 한 학기 후인 1939년 체르노비츠로 귀향하여 그곳 대학에서 로만스 어문학을 공부하였다. 1939년은 유럽에서 영, 불, 독, 소간의 주도권 쟁탈전이 시작되고 나치(Nationalsozialismus)의 반유태주의가 그 윤곽을 드러내던 시기였다. 체르노비츠를 포함한 부코니바의 북부가 1940년 소련령이 되었다. 그러나 그곳은 일년 후 독일과 루마니아군에 점령되어 유태인 거주지역 게토(Ghetto)가 되었다. 1942년 첼란의 가족은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그의 부모는 그 수용소에서 살해당하고 첼란은 극적으로 도망쳐 나왔다. 요코스트라는 사람이 첼란에 대해 쓴 글에는 다음 같이 소개되어 있다:
첼란의 시 『죽음의 푸가』는 1952년에 출간된 『양귀비와 기억, Mohn und Ged?chtnis』에 수록되어 있다. 시집 제목에서 양귀비는 죽음을 상징하며, 기억은 과거의 시간과 연결된다. 이 시의 주제는 죽음과 기억이다. 이 시에서는 죽음과 기억이라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언어사용이 창살처럼 교차" 배열되어 있다. 시의 제목에서 나오는 푸가(fuge)는 라틴어 fuga에서 나온 말로 '도주'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 음악 형식은 하나의 주제가 한 가락으로부터 다른 가락으로 달아나듯 음이 조정되는 데서 생겨났다. 푸가의 다양성은 모두 이 하나의 주제를 조바꿈하거나 변조시키면서 생겨나는 대위법상의 변화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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