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알고싶다] - 맑스는 워낙 기자였다...
///중앙일보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고학력자·기자·애주가 마르크스의 개인사
영국 망명 미국신문 유럽특파원으로 일해
경제사정·질병 7자녀 중 4명 어려서 잃어
카를 마르크스(뒷줄 오른쪽)가 후원자 프리드리히 엥겔스(뒷줄 왼쪽) 및 세 딸과 함께 망명지인 영국 런던에서 찍은 사진.
5일로 탄생 200주년을 맞은 마르크스주의 창시자 카를 마르크스(1818~1883)는 철학자·경제학자·정치이론가·역사학자·사회학자로 과학적 사회주의의 문을 열었다. 블라디미르 레닌과 마오쩌둥 등이 그의 사상을 차용하면서 20세기를 뒤흔들었다. 세계 최대의 영토를 가진 소련과 가장 많은 인구를 보유한 중화인민공화국이 마르크스 사상을 이념적 토대로 삼았다.
마르크스에게 유럽 특파원 자리를 주고 생활비를 벌게 해준 미국 신문 뉴욕 데일리 트리뷴의 지면. 당시 20만 부를 발행해 세계 최대 부수를 자랑했다. 마르크스는 미국 독자를 위해 영어로 기사를 써서 보냈다.
마르크스는 혁명의 시대가 오기 전인 1883년 세상을 떠났다. 그는 거의 일평생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삶을 살았다. 일부 혁명 조직의 설립에 관여했지만 아무래도 그의 주 임무는 글쓰기였다. 1849년 6월 영국 런던으로 망명했던 마르크스는 미국 신문인 뉴욕 데일리 트리뷴의 유럽 특파원으로 근무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30세이던 1848년부터 1862년까지 14년 동안 영어로 기사를 써서 보냈다. 그 사이 마르크스는 독일 쾰른에서 영국 런던으로 주거를 옮겼다.
이 신문은 당시 20만의 독자를 거느린 세계 최대 매체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유럽 특파원 마르크스에게 섭섭하지 않을 정도의 원고료를 줄 수 있었다. 마르크스가 런던 망명 생활 초기에 그나마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신문에서 받는 원고료가 있었기 때문이다. '기자' 마르크스가 가장 많은 기사를 쓴 매체도 이 미국 신문이다. 이 기간에 마르크스는 자신의 이름으로 된 기명 기사 350건, 엥겔스 명의 기사 125건, 공동 집필 12건 등 모두 487건의 기사를 이 신문에 실었다. 주제도 노예제도, 제국주의, 혁명과 전쟁, 세계의 사회와 정치, 세계 경제와 금융 등 폭이 넓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 등을 쓴 학자이자 저술가이면서 동시에 기자였다.
마르크스의 큰딸 예니 카롤리네(왼쪽)와 둘째딸 예니 라우라의 1865년 모습.
마르크스의 원고료 수입은 상당액이 가족 부양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마르크스는 부인 예니와 사이에 일곱 자녀를 뒀다. 가정적으로는 힘들고 불행한 삶을 살았다. 온갖 고난이 계속돼 살아서 살아서 '무간도(불교에서 말하는 지옥의 하나로 괴로움이 한 순간도 쉬지 않고 계속되는 곳)'를 경험했을 가능성이 크다. 자녀 중 넷을 어려서 잃었고 세 딸만 성인까지 성장했다. 당시 높은 영아사망률을 생각하면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 19세기에만 해도 출산한 모든 자녀가 살아남는 경우는 드물었다. 하지만 수중에 돈이 부족해 의사도 부르지 못하고 아이를 떠나보낸 일도 있었으니 부모로서 가슴이 찢어졌을 것이다.
게다가 생전에 부인 및 딸 중 한 명을 자신보다 먼저 저 세상으로 보냈다. 마르크스의 부인 예니는 간암으로 투병하다 1881년 12월 숨졌다. 큰딸은 아버지 마르크스가 숨지기 두 달 전에 방광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이런 불행을 연속으로 당하면서 마르크스는 심신이 쇠약해졌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담배와 술도 육체가 허물어지는 데 한몫했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1883년 3월 감기 등으로 코와 목의 점막에 염증이 생기는 카타르가 악화해 기관지염과 늑막염으로 번지면서 숨졌다. 마르크스의 장례식에는 둘째와 막내 딸, 그리고 평생 친구 엥겔스, 첫째와 둘째 사위, 독일 혁명가 빌헬름 리프크네히트 등 9~12명이 참석한 것으로 추정된다. 외로운 최후였다.
자식은 누구에게도 살가운 존재다. 마르크스는 어려서 숨진 네 자녀 때문에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딸 세 사람만 성인까지 살아남았다. 이들은 모두 혁명 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모든 딸에게 부인의 이름인 예니(영어로 제니)를 붙였다. 첫째인 예니 카롤리네(영어 제니 캐롤라인, 1844~1883)는 파리에서 태어났다. 성인까지 성장해 1872년 프랑스 혁명가 샤를 롱게(1839~1903)와 결혼했다. 아버지의 글을 프랑스어로 옮기는 등 활동을 하다 간암으로 추정되는 병으로 38세로 세상을 떠났다. 성인까지 성장한 마르크스의 세 딸 중 유일하게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딸이자 병으로 숨진 유일한 딸이다.
마르크스의 부인 예니의 1830년대 모습. 마르크스는 부인을 고향 트리어 최고의 미인이라고 말했다.
둘째 예니 라우라(영어 제니 로라, 1845~1911)는 브뤼셀에서 태어났다. 성인까지 성장해 프랑스 혁명가이자 의사인 파울 라파르그(1842~1911)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해 활동하다가 1911년 부부 동반으로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자 마르크스의 외손자인 장 롱게(1876~1938)는 프랑스 사회당원으로 활동하다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넷째 딸이자 여섯째 자녀인 예니 율리아 엘라아노르(제니 줄리아 엘레노어, 1855~1898)는 혁명가로 활동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엘레노어는 사회주의 활동가로 일하면서 동료 마르크스주의자이자 영국인 생물학자인 에드워드 애블링(1849~1898)과 사귀었다. 하지만 애블링은 1897년 6월 엘레노어와 헤어지고 여배우 에바 프라이와 몰래 결혼했다. 그런데 자신에게 신장병이 발병하자 엘레노어에게 돌아갔다. 엘레노어는 애블링을 간호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4개월 뒤 애블링도 숨졌다. 애블링의 장례식에 동료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
나머지 자녀는 성년까지 성장하지 못했다. 마르크스의 첫아들인 셋째 에드가(1847~1855)는 브뤼셀에서 태어났는데 8살 때 런던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마르크스가 제대로 의사를 구할 수 없어 숨졌다는 주장이 있다. 마르크스의 처남 에드가의 이름을 땄다.
둘째 아들이자 넷째인 헨리 에드워드 가이(1849~1850)는 런던에서 태어나 유아 때 숨졌다. 집에서는 ‘귀도’라는 독일 이름으로 불렸다. 이후 모든 자녀는 런던에서 태어났다. 셋째 딸이자 다섯째인 예니 에벨리네 프란치스카(영어 제니 에블린 프랜시스, 1851~1852)도 유아 시절에 사망했다. 우유값도 부족하던 시절이었다. 굶어 죽은 게 아니냐는 추측이 나도는 이유다.
마르크스의 일곱째 아이가 1857년 태어났지만 이름도 짓기 전 유아기에 사망했다. 마르크스의 막내였다. 인간적으로 이렇게 어려운 삶은 살면서 세상에 대한 증오가 생긴 게 아니냐는 일부의 주장도 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이런 개인적인 처지와 무관하게 오래 전부터 철학·경제학을 연구하며 자신의 사상 체계를 닦아왔다.
마르크스의 가정부 헬레네 데무트. 그가 1851년 낳은 아들 프레데릭이 마르크스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는데 후견인 엥겔스는 자신의 자식이라고 주장하며 마르크스를 감쌌다. 진위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엥겔스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마르크스의 독일 출신 가정부 헬레네 데무트(1820~1890)가 1851년 출산한 프레데릭 루이스 데무트(1851~1929)가 마르크스의 자식이라는 주장도 있다. 당시 독신이던 엥겔스는 이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고 주장하면서 친구인 마르크스를 감쌌다. 진위는 지금도 알 수 없다. 프레데릭은 야금공으로 살다 런던에서 사망했다. 평생 '예언자의 아들' 소리를 들었다.
마르크스의 일생을 학자이자 저술가이자 기자였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삶을 살지는 않았다. 풍족하지는 못해도 기자로서의 수입과 엥겔스의 도움으로 어느 정도 품위는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포도주와 맥주를 좋아했고 친구들과 한잔 마시며 토론하기를 즐겼다. 아버지의 유산을 탐내기도 했다. 19세기에 흔히 볼 수 있었던 중산층 남성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저서는 그렇게 평범하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그의 사생활이 아닌 저서와 주장으로 평가돼야 한다. 그의 저서와 주장을 입맛대로 해석하고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을 위해 멋대로 도용한 수많은 후세인들이 있다. 마르크스의 사상에서 불순물을 빼는 작업이 필요한 이유다.
독일 베를린에 있는 마르크스(왼쪽)와 엥겔스의 동상.
마르크스의 삶을 이해하는 또 다른 키워드는 ‘고학력자’다. 마르크스는 지금 기준으로 봐도 가방끈이 무척이나 길다. 17세에 대학에 들어가 23세에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독일 서부 트리어 출신이다. 당시 프로이센 왕국의 영토였던 트리어는 프로이센, 그리고 독일의 서쪽 끝이었다. 룩셈부르크와의 국경에서 10㎞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는 1835년 트리어에서 110㎞쯤 떨어진 도시인 본의 본 대학에 입학했으며 이듬해 당시 프로이센 수도 베를린의 베를린 대학 법학부로 옮겼다. 마르크스가 법학을 전공하게 된 것은 아버지인 하인리히 마르크스(1777~1838년)의 영향 또는 요구 때문으로 보인다. 하인리히는 헤르셸 레비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유대인이었다. 마르크스의 할아버지인 마르크스 레비 모르데차이(1743~1804)는 유대인 성직자인 랍비였다. 할아버지의 랍비 자리는 마르크스의 백부에게 대물림됐다. 결혼 전 이름이 에바 리보프(1753~1823)였던 마르크스의 할머니는 결혼 전 이름으로 볼 때 우크라이나의 리보프에서 독일로 이주한 유대인의 후손으로 짐작할 수 있다.
헤르셸은 1814년 변호사 자격을 얻었지만, 이듬해 이 지역을 통치하게 된 프로이센의 절대 왕정은 유대인이 법률가를 맡지 못하도록 했다. 프로이센 왕국은 1812년 3월 13일 칙령을 내려 유대인에게도 국적과 시민으로서 권리와 지위를 부여했다. 하지만 법률가는 유대인에게 한동안 허용하지 않았다. 동료들은 그에게 예외를 인정해달라고 정부에 요청했지만, 프로이센 법무부는 이를 기각했다. 그러자 헤르셸은 1817~1818년 무렵에 이름을 독일식인 하인리히 마르크스로 바꾸고 종교도 유대교에서 개신교인 루터교로 개종했다. 그의 부인과 자녀들은 1824~1825쯤 세례를 받고 개종한 것으로 여겨진다. 마르크스도 유대인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에 부친의 뜻에 따라 기독교 세례를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독일 서부 트리어의 브뤼켄 슈트라세 10번지에 있는 마르크스의 생가. 중산층 변호사였던 마르크스의 아버지는 1층의 방 2개와 2층의 방 3개를 사용했다. 부친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마르크스는 23세 때 철학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법률가가 되기를 바라는 부친의 뜻과 달리 철학에 관심을 쏟았다. 결국 1841년 베를린에서 남서쪽으로 210㎞ 떨어진 예나의 예나 대학에서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 차이’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23세 때의 일이다.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본에서 25㎞쯤 떨어진 쾰른에서 창간된 라인 신문에 기고하다 이 신문에서 일하게 됐으며 편집국장을 맡았다. 하지만 지역 주민의 여론에 맞춰 베를린의 중앙정부를 비난하는 논조를 유지하던 라인 신문은 1843년 3월 프로이센 당국의 검열과 탄압으로 폐간됐다. 마르크스는 라인 신문 폐간을 맞아 자신을 프로메테우스로 묘사한 시사만평을 신문에 실었다.
프로이센 왕국의 가혹한 언론 탄압을 계기로 마르크스는 혁명 없이도 전제군주제를 입헌군주제로 개혁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마지막 희망을 버린 것으로 분석된다. 그 뒤 그는 전제군주제를 타도할 수단은 혁명밖에 없다는 입장을 유지하게 된다.
독일 쾰른에서 발행하던 라인 신문이 프로이센 왕국의 언론 탄압으로 발행이 중지될 처지가 되자 편집장인 마르크스는 이런 만평을 지면에 게재하게 했다. 마르크스 자신을 인간에게 불을 넘겨준 죄로 독수리에 심장을 쪼이는 고통을 당하는 그리스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로 묘사한 내용이다. 그전까지 개혁으로 입헌군주제 국가를 꿈꿨던 마르크스는 이를 계기로 혁명만이 전제군주제를 극복할 유일한 수단이라고 믿게된 것으로 보인다.
신문이 폐간되자 마르크스는 고향으로 돌아가 결혼했다. 1843년 6월 19일 고향 트리어 출신으로 네 살 연상인 약혼녀 예니 폰 베스트팔렌(1814~1881)이 상대였다. 예니는 마르크스의 학교 동급생인 에드가 폰 베스트팔렌(1819~1890)의 누나였다. 마르크스는 아버지 친구의 딸이자, 자신의 친구 누나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1836년 부모 몰래 약혼했으며 이듬해 예니의 아버지 루트비히 폰 베스트팔렌(1770~1842)으로부터 허락을 받았다.
마르크스의 장인인 루트비히 폰 베스트팔렌은 남작에 해당하는 프로이센의 귀족으로 공직자였다. 자유주의적인 성향이던 루트비히는 마르크스의 아버지인 하인리히의 친구였다. 루트비히는 마르크스가 사위가 되기 한 해 전에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어렸을 때부터 서로 잘 알았으며, 청소년 시기의 마르크스와 산책하며 철학과 영국 시를 주제로 대화하기를 즐겼다고 한다.
루트비히의 아버지이자 예니의 할아버지, 즉 마르크스의 처할아버지인 크리스티안 필립 하인리히 폰 베스트팔렌(1723~1792)은 프로이센이 강대국으로 부상한 7년전쟁 기간 동안 프로이센 육군원수였던 페르디난트 폰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1721~1792)의 측근이었다. 페르디난트 폰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은 당시 프로이센 국왕인 프리드리히 2세(프리드리히 대왕으로 불림. 1712~1786년, 재위 1740~1786년)의 매제로 정부와 군대의 실세였다. 마르크스의 처할머니인 지니 위샤트(1742~1811)는 종교 문제로 독일로 망명한 스코틀랜드 귀족의 후손이다.
마르크스는 결혼 직후 부인을 데리고 프랑스 파리로 이주했다. 사실상 망명이었다. 마르크스는 1844년 2월 파리에서 독불연보(Deutsch–Französische Jahrbücher)라는 매체를 창간했지만 단 1회만 내고 더는 발행하지 못했다. 독일로 몰래 들여가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한다. 1845년 2월 벨기에 브뤼셀로 이주한 마르크스는 1845년 7월 중순 영국 사회주의 활동가들인 차티스트 운동가들을 만나기 위해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함께 영국을 방문했다. 엥겔스는 독일 방직 공장주의 아들로 아버지가 지분을 보유한 영국 맨체스터의 방직 공장에서 2년간 일한 적이 있어 영어가 가능했고 영국 사정에 밝았다.
마르크스는 독일을 비롯한 유럽 전역이 혁명의 열기에 사로잡혔던 1848년 4월 독일로 돌아가 쾰른으로 향했다. 그는 과거 일했던 라인 신문이라는 제호에 애정과 애착을 보였다. 그래서 1848년 6월 1일 라인 신문의 맥을 잇는 신라인신문(Neue Rheinische Zeitung)을 재창간했다. 급진적인 내용의 기사를 게재하면서 1849년 5월 19일까지 계속 발행했다. 하지만 혁명의 열기는 이내 반동적인 분위기로 돌아섰다.
마르크스는 1849년 6월 브뤼셀을 떠나 영국 런던으로 향했다. 영국에 망명한 마르크스는 1850년 1월 ‘신라인 신문-정치경제 리뷰(Neue Rheinische Zeitung: Politsch-ökonomische Revue)’라는 이름의 월간지를 창간했다. 영국 런던에서 편집하고 독일 함부르크에서 인쇄하는 형식이었다. 이 월간지는 6호를 내고 폐간했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스스로 운영한 마지막 매체다. 이후 그는 미국 신문 특파원으로서 기사를 쓰면서 자신만의 저서를 쓰는 저술 작업에 몰두했다. 무간도에 살면서 쓴 마르크스의 저서들은 21세기까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출처: 중앙일보] 『자본론』남긴 마르크스, 사생활은 거의 ‘무간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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