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 마산조각공원에 가보면 정자가 하나 서있다. 일송정(一松亭)이다. 가곡 <선구자> 가사에 나오는 중국 길림성 용정에 있는 일송정을 본떠 세워놓은 것이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 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 지금은 어느곳에 거친꿈이 깊었나” (선구자 1절 가사)
그런데 일송정 정자 옆에는 아무것도 쓰여지지 않은 흰 화강암 비석이 하나 서있다. 자세히 보면 무언가를 지운 자국이 있다. 원래는 <선구자> 노래비였다. 10여년전 가곡 <선구자>가 작사 작곡자의 친일 시비에 휘말리면서 그 모양이 된 것이라고 했다.
<선구자>의 작곡자는 젊은 시절 일찌기 만주에서 작곡활동을 하다가 해방후 마산에 터를 잡았던 조두남(1912~1984)이다. 작사자는 윤해영이라는 만주에서 활동하던 시인인데, 해방후에 북한에 들어가 살다가 1950년대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조두남이 윤해영의 시를 받아 <선구자>를 작곡한 시기는 1932년경으로 알려져있다. 친일 논란은 조두남 사후 20년쯤 후인 2천년대 초반의 일이다.
일제 때의 예술가 치고 친일 논란의 대상이 안된 사람을 몇이나 찾을 수 있을까? 부수기로 말한다면 창원의 용지공원에 우뚝 서있는 <고향의 봄> 노래비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것도 다 부숴야 하나? 친일 논란이 있기는 <고향의 봄> 작사자인 시인 이원수(1911-1981)나 작곡자인 홍난파(1897~1941)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시대에 활동하여 친일 행적을 의심받고 있는 안익태, 현제명, 김동진 작곡가 등과 이들의 작품인 <애국가> <고향생각> <가고파>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일부의 친일 주장과 달리 ‘<선구자>의 작사자인 시인 윤해영은 친일시인이 아니라 민족시인이며 저항시인이었다’는 내용의 <몽상시인 윤해영>(2005) 이란 책을 쓴 김영수는 그의 책 속에 연세대 음대 학장을 지낸 이인범(1914~1978)과 조두남의 다음과 같은 대화의 기억을 실어놓았다.
“1970년대 초 조두남이 성악가 이인범의 병문안을 갔을 때 그 집 근처까지 필자(김영수)가 동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필자는 이인범이 일제 말기에 일본 군가를 부르며 순회공연을 한 사실을 말하면서 조두남에게 당신도 만주에서 음악활동을 했다면 일본을 찬양한 곡들을 작곡했을 터인데 이실직고하시오라고 웃으면서 물은 기억이 납니다.
그러자 (조두남은) 너털웃음을 웃으면서 악극단을 위해서 하루 밤에 1,2곡 후딱 작곡을 해치웠지, 그러면서 반드시 당국을 지지하는 노래를 두 세곡 부르지 않으면 악극단 공연허가를 받을 수 없었다라고 하던 말이 기억이 났습니다. (<몽상의 시인 윤해영>, 173쪽)
친일의 문제와 관련하여, 당시의 음악인들은 누구나 같은 처지였기 때문에 숨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목숨 바쳐 조국을 찾겠노라 독립투쟁을 한 선열들을 생각하면 사소한 생계형 친일이라 한들 어찌 옹호하거나 변명하겠는가? 그러나 예술 작품은 탄생한 그 당시 상황에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는 일리가 있다.
예술 작품은 아니지만 1919년 3.1운동 당시 기미독립선언서를 보자. 이를 기초한 육당 최남선(1890~1957)은 일제 말기 변명하기 어려운 짙은 친일의 흔적을 남겼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민족대표 33인 가운에 끝까지 친일로 돌아서지 않은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하지만 해마다 광복절에 낭독되는 기미독립선언문의 의미나 가치가 변하지 않듯 문학, 예술 작품도 그러한 관점에서 보는 것이 어떨까 한다.
그러므로 오랜 세월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어 온 가곡 <선구자>도 귀중한 음악적 자산으로 존중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지워진 노래비에도 가사를 다시 새겨넣기 바란다.
일제 강점기, 우리민족에게 슬프고 잔인했던 그 시절의 이야기는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도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늘 아프게 한다. (광화문문화포럼 2015년 5월호, 글 : 이정식, 가곡 에세이 <사랑의 시, 이별의 노래> 저자)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