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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와 세월과 력사과 시간과 그리고 세월이 약,ㅡ 그리고 ...
2018년 11월 13일 00시 06분  조회:4164  추천:0  작성자: 죽림
/독립운동 현장 中 만주를 가다
/ 내년 3·1운동, 임정수립 1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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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중국 지린성 룽징시에 중국 정부가 복원한 윤동주 시인 생가.
1920년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 부대는 봉오동 골짜기로 일본군을 유인해 급습했다. 봉오동에 매복한 독립군 900명은 일본군 제19사단 월강추격대대 1200명과 싸웠고 157명을 사살했다. 아군 전사자는 4명에 그쳤다. `청산리 대첩`과 함께 독립군 최대 전과로 기록되는 `봉오동 전투`다.
 
봉오동 전투는 한국 독립군이 처음으로 일본 정규군과 싸워 이긴 전투다. 한민족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사건이지만 흔적은 현재 중국에 남아 있다. 봉오동 전투 전적지는 중국 투먼(圖們)시에 있다. 함경북도 온성이 보이는 곳으로 천혜의 매복지지만 현재는 저수지로 이용되고 있다. 저수지 이름은 `봉오저수지’. 봉오골이 물 아래로 잠기는 동안 `봉오`라는 문구는 저수지 이름으로만 남았다. 중국은 1982년 농업 용수를 확보하려고 펑우(風梧)댐을 건설했다. 한민족평화나눔재단(이사장 소강석 목사)과 함께 최근 찾은 봉오동 전투의 흔적은 전적비가 유일했다. 이 전적비는 중국 정부가 조성했다. 2013년 투먼시는 전적지 입구 왼편에 비석을 세웠는데, `봉오골(동)전투기념비`라는 한글 문구와 한자를 병기했다. 또한 중국은 전적비 가운데 윗부분에 혁명 열사를 상징하는 붉은 별을 함께 새겼다. 기념비 문구 또한 봉오동 전투를 중국 역사로 편입하려는 의도를 그대로 드러냈다. 중국이 봉오동 전투를 비문에서 소개한 문구는 다음과 같다. `봉오골(동) 전투는 중국 조선족 반일무장이 여러 민족 인민들의 지지하에 처음으로 일본 침략군에 맞서 싸워 승리를 거둔 규모가 비교적 큰 전투로서 력사적으로 봉오골(동) 대첩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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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중국 지린성 투먼시의 봉오동 전투 전적지에 기념비 두 개가 서 있다. 1993년 세운 기념비 뒤로 중국 정부가 2013년 새로 건립한 기념비가 위치한다.
중국은 전적지 곳곳에 전사자를 추념해 세운 비석에 어김없이 붉은 별을 새겨 기념했다. 새로운 전적비를 세우기 전 봉오동 전투를 기념하는 비석은 1993년 세운 작은 기념비뿐이었다. 현재 이 비석은 새롭게 세운 전적비 왼쪽 100m 지점에 있다. 흙에 파묻혀 글씨조차 또렷하지 않은 이 비석은 중국이 그동안 봉오동 전투를 어떻게 봤는지 알린다. 뒤늦게 중국 역사로 편입하려 2013년 새롭게 기념비를 세운 저의가 무엇인지 짐작할 만하다. 반면 한국은 물론 북한이 봉오동 전투를 기념한 흔적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간간이 봉오동 전투 전적지를 찾는 관광객이 태극기를 흔들 때만 한민족 역사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홍범도 장군(1868~1943)을 기억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그의 독립 투쟁이 경계선에 놓인 까닭이 크다. 홍범도 장군은 러시아 공산당원이었고 카자흐스탄에서 세상을 떠났다. 한국은 이념 때문에 오래도록 홍범도 장군을 기억하지 않았고, 북한은 그를 중국 역사로 편입하려는 시도에 저항하지 않았다. 남북한이 모두 외면하고 방치하면서 홍범도 장군은 중국의 혁명 열사로 둔갑하고 있다. 

중국의 집요한 역사 편입 시도는 비단 항일 무장 투쟁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윤동주 시인(1917~1945)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민족 시인이지만, 그조차도 중국은 조선족 민족 시인으로 기록하고 있다. 중국 지린성 옌볜조선족자치주 주도 옌지(延吉)에서 자동차를 타고 30분을 이동하면 윤동주 고향 룽징시(龍井市) 명동촌(明東村)이 나온다. 전체 가구 수가 20~30가구에 불과한 작은 농촌 마을이지만, 이곳은 윤동주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윤동주가 언급하는 고향 간도는 바로 이 지역을 말한다. 중국은 한동안 방치되던 명동촌에 윤동주 생가를 복원했고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명동학교 또한 복원했다. 송길연 전 명동촌장(63)은 "명동학교는 일본군이 세 차례 불을 질러 사라졌던 곳"이라며 "옛날 사진을 토대로 네 번째로 복원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명동학교는 윤동주와 사촌 송몽규뿐만 아니라 김창걸, 라운규와 같은 예술인을 다수 배출한 학교다. 철저히 민족 정신을 교육했고 1929년 폐교할 때까지 졸업생 610명을 배출했다. 송 전 촌장은 "명동학교 졸업생 99%는 독립운동에 투신했다"면서 "역사는 흘러가지만 알아야 할 것은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찾은 명동학교는 옛 모습을 그대로 재현했다. 다만 다소 위화감이 느껴졌다. 명동학교 마당에 펄럭이는 중국 국기 오성홍기는 명동촌이 중국 땅이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명동학교가 배출한 인물들을 중국은 조선족으로 규정하고 있다. 명동학교 왼편에 위치한 윤동주 생가 또한 마찬가지다. 윤동주 생가 입구에 세운 안내판에는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 생가`라고 표기돼 있었다. 윤동주 생가 곳곳에 한글과 한자를 병기한 시비를 배치했는데, 마치 한글조차도 중국 문자 가운데 하나로 보는 듯했다. 중국 정부가 투자해 명동촌 옛모습을 복원했지만, 한민족 역사로 복원한 것은 아니었다. 마치 한글 설명을 곳곳에 세운 것은 한국인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안내판 같았다.중국이 한국 역사를 자국 역사로 편입하는 과정은 꾸준하고 집요하게 계속되고 있다. 2002년 중국 정부는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추진하면서 만주 지역에 위치한 동북3성 역사와 연구를 편입하기 시작했다.
 

 고구려와 발해 역사 또한 중국사 일부로 규정한 것도 이때부터다. 한국은 강력히 저항했지만 중국 영토 안에 있는 유적지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언젠가 시간이 흘러 홍범도 장군과 윤동주 시인이 중국인이 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어쩌면 1910년 일본에 주권을 빼앗긴 경술국치보다 더 큰 시련이 목전에 닥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투먼·룽징 = 김규식 기자]ⓒ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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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3·1운동 100주년…항일투쟁 자취를 찾아서...

'간도대통령' 김약연 선생
유학자였으나 기독교 수용해
교육·독립운동의 토대 삼아
학교 옛터엔 기념관·기념비 뿐

중국으로 포장된 '윤동주 생가'
평생 한글로만 詩를 썼는데 
'중국 조선족 시인' 표지석
관광테마공원처럼 꾸며 씁쓸

중국 룽징의 명동학교 옛터 기념관에서 전 명동촌 서기 송길연 씨가 책상 앞에 앉은 윤동주 시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서울에서 시작된 3·1만세운동의 불길은 시차를 두고 전국 각지는 물론 국외로도 번졌다. 두만강 건너 북간도 룽징(龍井·중국 지린성)의 드넓은 들판인 서전대야(瑞甸大野)에서 만세 소리가 울려 퍼진 건 1919년 3월13일. ‘조선독립선언서 발표 축하회’에 모여든 3만여 명이 들판을 가득 메웠다. 독립선언서 낭독이 끝나자 “대한독립 만세!” 소리가 천지를 울렸다.
 

행사가 끝난 후 룽징의 일본영사관으로 향하던 만세 시위대 중 17명이 일본 무장경찰 발포로 순국하고 30여 명이 다쳤다. 이에 분노한 동포들은 그해 5월 말까지 만주 전역에서 50차례 이상 만세 시위를 벌였다. 또한 무장 투쟁론이 확산하면서 이듬해 봉오동 및 청산리전투의 대승으로 이어졌다. 이 같은 북간도 독립운동의 중심은 명동촌과 명동학교였다.

옌지(延吉)에서 룽징을 지나 북·중 접경 지역인 두만강변 싼허(三合) 방향으로 20㎞쯤 가다 보면 명동촌이 있다. ‘명동’ ‘윤동주 생가’라고 크게 새긴 표지석을 지나 마을로 내려가다 맨 처음 만나는 게 윤동주 시인의 생가다. 높다란 담장을 두르고 ‘중국 조선족 시인 윤동주 생가’라고 한글과 한자로 새겨 놓은 모양이 왠지 낯설다. 평생 한글로만 시를 쓴 윤동주가 ‘중국 시인’이라니….


김약연 선생 흉상

오랜 세월 허름한 시골에 불과했던 명동촌은 깔끔하게 단장한 관광지로 변모했다. 윤동주 생가 구역에 들어서자 크고 작은 시비들이 즐비하다. 윤동주의 반신상을 부조하고 ‘서시(序詩)’를 한글과 한자로 새겨 놓은 시비는 사람 키보다 크다. 조경도 공원처럼 깔끔하게 정비해 놓았다.

시비를 지나 생가로 가는 길목 오른편에 허름한 비각(碑閣)이 눈에 띈다. 비석에 한자로 새겨진 글자는 ‘김약연 목사 기념비’. 비석 윗부분이 깨져 ‘金’자는 온전치 않다. 비석 가장자리도 상처 투성이다. 1944년 세워진 기념비는 중국 공산화와 문화혁명을 거치며 마을 앞 개울의 징검다리로 사용되고, 밭에 묻히는 등 수난을 겪다가 1980년대에 와서야 복원됐다고 한다.

특이한 건 비석을 받치고 있는 책 모양의 조형물. 성경이다. ‘간도 대통령’으로 불린 김약연 선생(1868~1942)은 1899년 함경북도 종성·회령에서 김하규, 문병규, 남종구 등 다른 유학자 네 명과 함께 두만강을 넘어와 명동촌을 일궜다. 이듬해엔 윤하현이 가솔을 이끌고 합류했다. 김약연은 윤동주의 외숙, 문병규는 문익환 목사의 조부, 윤하현은 윤동주의 조부다. 다섯 집안의 일가 160여 명은 불과 5~6년 만에 약 20㎢의 토지를 개간했고 10여 개 마을이 잇따라 형성됐다.
이상설이 북간도에 세운 첫 학교인 서전서숙이 그가 헤이그 특사로 떠난 뒤 문을 닫자 김약연은 1908년 명동학교를 열었다. 특히 신민회 회원인 정재면을 통해 받아들인 기독교 신앙은 명동촌과 명동학교 발전의 원동력이 됐다. 기독교를 바탕으로 한 공동체가 형성되면서 신앙과 삶, 교육, 독립운동이 한몸으로 움직였던 것. 김약연은 명동교회를 세웠고, 1929년에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명동교회 목사로 부임했다. 훗날 사회주의자가 된 이동휘도 전도사로 활약했다.
1929년 인민학교로 넘어가기 전까지 명동학교는 12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윤동주와 송몽규, 나운규와 문익환 목사가 이 학교 출신이다. 명동촌에서 서기를 지낸 송길연 씨(63)는 “명동학교 졸업생의 99%는 독립운동에 투신했고 3·13만세운동에 앞장선 것도 명동학교 학생들”이라고 설명했다.

평일이라 그런지 윤동주 생가는 찾는 이가 별로 없이 고즈넉하다. 10칸짜리 기와집인데 부엌과 아궁이가 실내에 있는 구조다. 어린 윤동주와 송몽규, 문익환이 여기서 크고 어울렸겠구나 싶어 감회가 새롭다. 윤동주 생가에서 명동학교로 가는 길목에는 송몽규의 옛집도 깔끔하게 단장돼 있다. 하지만 커다란 철문이 굳게 잠겨 있어 들어갈 수 없었다.

명동학교 옛터에는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명동학교의 역사와 김약연을 비롯한 주요 인물들의 생애와 사진, 친필 원고, 주요 사건과 관련 사진, 당시 공부했던 교과서 등을 전시해 놓았다. 교실 하나에는 한복 차림으로 공부하고 있는 윤동주 모습을 재현해 당시 분위기를 짐작하게 한다.
지금의 명동촌은 말끔하게 단장돼 있지만 느낌이 씁쓸하다. ‘중국조선족 교육 제1촌(村)’이라는 명동학교 입구의 현판이 말해주듯 모든 것이 ‘중국’이라는 외피로 덮여 있어서다. 기념관 바로 옆에 김약연 흉상이 서 있다. 짧은 머리에 팔(八)자 수염을 기른 선생의 꼿꼿한 모습을 대하니 그의 유언이 떠오른다. “나의 행동이 나의 유언이다.”

룽징=서화동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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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동북 3성 항일 유적지 한민족순례]
지워져 가는 역사의 현장들
러시아 크라스키노에서 중국 옌볜조선족자치주 훈춘시로 가려면 러시아, 중국 세관을 차례로 거쳐야 한다. 수백여m를 사이에 두고 두 곳은 극명히 비교된다. 낡고 허름한 러시아 세관에 비해 중국 세관은 최신 지문 인식 기계를 도입했고, 규모 역시 수십 배나 된다. 비포장도로도 중국으로 들어서면 매끈한 아스팔트로 바뀐다. 달라진 중국의 모습을 새삼 느낀다.
중국 옌볜조선족자치주 왕칭현 봉오동전투 전적지의 흙바닥에 1993년 제작한 낡은 기념비가 방치된 채 놓여 있다. 오른편 너머로 2013년 새로 세운 기념비(원 안)가 보인다. 새 기념비에는 중국을 상징하는 붉은 별 문양과 함께 ‘중국 조선족 반일무장이 여러 민족 인민들의 지지하에 승리를 거뒀다’는 내용의 문구가 포함됐다.

▲ 중국 옌볜조선족자치주 왕칭현 봉오동전투 전적지의 흙바닥에 1993년 제작한 낡은 기념비가 방치된 채 놓여 있다. 오른편 너머로 2013년 새로 세운 기념비(원 안)가 보인다. 새 기념비에는 중국을 상징하는 붉은 별 문양과 함께 ‘중국 조선족 반일무장이 여러 민족 인민들의 지지하에 승리를 거뒀다’는 내용의 문구가 포함됐다.

지난 24일 훈춘시에서 하루를 보내고 투먼시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1시간 정도 더 가면 왕칭현 봉오동이다. ‘봉오저수지’라는 한글과 한자를 함께 적은 간판을 지나 10여분을 더 걸어가니 매끈한 화강암으로 만든 ‘봉오동 기념비´가 나온다. 2013년 투먼시 인민정부가 세운 것으로, 글씨 윗부분에 중국을 상징하는 붉은 별 문양이 붙었다. 그 뒤로 100m 정도 떨어진 흙바닥에 1993년 만든 낡은 기념비가 적벽돌 주춧돌을 그대로 드러낸 채 방치돼 있다.
김성호 명예교수

▲ 김성호 명예교수

두 기념비는 문구가 조금 다르다. 새 기념비는 봉오동전투에 관해 “중국 조선족 반일무장이 여러 민족 인민들의 지지하에 처음으로 일본 침략군과 맞서 싸워 중대한 승리를 거둔 규모가 비교적 큰 전투”라는 부분을 추가했다. 두 개의 기념비에서 중국의 역사관을 어렴풋이 느낄수 있다.

기념비 왼편 계단을 올라 비탈길을 10분 정도 더 가면 봉오동 전적지를 볼 수 있다. 1970년대 후반에 댐을 만들며 많은 지역이 수몰됐지만, 그나마 저수지 너머로 당시 전투지가 남아 있다. 1919년 3·1 만세운동 이후 연해주를 비롯해 간도와 만주에서 수많은 독립군 부대가 일어났다. 이들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나들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일본 정규군과 싸워 최초로 승리한 전투가 바로 봉오동 전투다.

‘나는 홍범도´로 불리는 의병장 홍범도가 이끄는 부대와 난무의 대한국민회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가 연합한 ‘대한북로독군부’가 산에서 매복하다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추격한 야스가와 지로 소좌가 이끄는 일본군 19사단의 ‘월강 추격대대’를 격파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본군 전사 157명, 중상 200여명 독립군 전사 4명, 부상 2명이라고 발표했다. 다만 이 숫자에 관해서는 의견이 여전히 갈린다.

버스를 타고 80㎞를 달려 옌지시로 향했다. 한 식당에서 옌볜에서 가장 유명한 역사학자로 꼽히는 김성호(67·전 조선력사연구소장) 옌볜대 명예교수를 만났다. 그는 1980년대 평양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에서 근현대사를, 1990년대는 인하대에서 조선근현대사를 공부해 박사 학위를 받은 독특한 이력이 있다. 그에게 봉오동전투 일본군 사상자 수가 왜 불명확한지 묻자 “하나의 역사를 두고 조선, 미국, 중국, 일본이 다 다르게 말했다. 자기 나라에 맞게 부풀리거나 줄이는 사례가 당시에는 흔했다”는 답이 돌아온다. 그는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전투’에 관해서도 “당시 독립신문이 일본군 2000명이 죽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장소에 직접 가 봤나. 2000명이 누울 자리 있던가”라고 되물었다. 그러면서 “과거와 달리 지금도 정권이 앞장서서 그런 식으로 주장하면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 “남북이 갈라진 지금 역사 인식을 통해 분단 사관을 극복해야 한다”며 “안중근 의사, 일본군 위안부, 항일투쟁 등 남북 역사학계가 함께할 수 있는 주제부터 다뤄야 한다”고 충고했다.
룽징시 명동학교에 있는 윤동주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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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룽징시 명동학교에 있는 윤동주 생가.

명동학교 교실 내에 윤동주 실물 인형을 두어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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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동학교 교실 내에 윤동주 실물 인형을 두어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했다.

옌지시에서 룽징시를 향해 1시간 정도 더 달리면 명동학교가 나온다. 명동학교는 ‘간도 대통령’으로 불린 민족운동가 김약연이 세운 학교다. 그는 1908년 간도 명동으로 이주해 한인 집단 촌락을 건설하고, 명동학교를 세워 인재를 길렀다. 윤동주를 비롯해 문익환, 나운규, 송몽규 등이 이곳에서 공부했다. 1929년까지 모두 1200여명의 졸업생이 나왔다.

 


















졸업생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는 윤동주다. ‘명동’, ‘윤동주 생가’라고 쓰인 큰 안내돌을 돌아 마을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윤동주 생가와 마주한다. 1932년 윤동주가 용정 은진학교에 진학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팔려 허물어졌던 것을 1994년 복원했다. 윤동주는 명동소학교, 은진중학교를 거쳐 평양의 숭실중학교에 편입해 공부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자퇴해 1941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했다. 이후 일본 도쿄 릿쿄대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교토 도시샤대 문학부로 전학했다.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까지 했지만, 항일독립운동으로 1943년 일본 경찰에 체포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체실험을 당하다 옥사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게 살기를 바랐던 민족시인의 향취를 이곳에서 느끼긴 어려웠다. 명동촌은 봉오동 전적지와 마찬가지로 ‘연변조선족자치주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돼 관리 중이다. 집 인근에 윤동주의 시가 적힌 금색 조형물이 군데군데 박혀 있었다. 이곳에서 200여m 정도 떨어진 명동학교는 너무 번듯하게 새로 지어놔 어색하기까지 했다.

명동학교에 들어가니 교실에 윤동주 인형을 만들어 사진 촬영용으로 쓰고 있었다. 준수한 얼굴의 인형을 바라보며 실소가 났다. 명동학교의 옛 모습은 간데없고 인공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값싼 관광지를 찾은 느낌만 들었다. 현지 가이드가 ‘중국은 돈 되는 것이라면 뭐든 한다’며 농담을 건넸지만 웃을 수가 없었다.
가곡 ‘선구자’의 배경이 됐던 룽징시 비암산 일송정 역시 관광지로 탈바꿈했다.

▲ 가곡 ‘선구자’의 배경이 됐던 룽징시 비암산 일송정 역시 관광지로 탈바꿈했다.

명동학교를 나와 가곡 ‘선구자’의 배경이 된 룽징시 비암산의 일송정으로 향한다. 버스를 타고 산 정상까지 오르며 조잡한 관광물을 계속 마주쳐야 했다. 일송정 역시 울긋불긋한 정자로 탈바꿈한 지 오래다. 독립운동가들이 바라보며 울분을 달래고 마음을 다잡았던 해란강이 시야에 들어온다.

흔적만 남은 러시아의 항일독립운동 유적지, 중국풍으로 바뀐 중국의 항일독립운동 유적지를 돌아보니 가슴이 답답해진다. 해를 등지고 산에서 내려오며 ‘우리는 그동안 무얼 했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글 투먼·룽징(중국) 김기중 기자

///서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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