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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실크로드의 연결 운하. 지중해와 홍해, 인도양을 연결하는 수에즈 운하는 유라시아의 해상실크로드를 연결하고 거리를 단축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항로의 단축을 위해 수에즈 지협(地峽)을 운하로 항해하려는 시도는 오래 전부터 있었다. 기원전 1380년경 나일강과 홍해를 잇는 운하가 개굴(開掘)된 후 운하는 천재와 전쟁 등으로 인해 매몰되었지만, 로마시대에 항해가 재개되었다. 그러나 아직은 수에즈 지협을 항해하는 운하는 아니어서 불편이 많았다.
대항해시대에 접어든 16세기에 지중해 연안에서 베네치아 상인들은 수에즈 지협에 운하를 파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의 해상 패권에 대응하려고 했으며, 17~18세기에는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독일 황제 라이프니츠는 수에즈 운하를 만들어 네덜란드나 영국의 아시아 무역을 제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아직은 토목기술의 부족으로 성사될 수가 없었다.
이집트에 진출한 나폴레옹도 영국의 인도 무역에 타격을 안기기 위해 운하 개설을 위한 조사를 했으나 지중해와 홍해의 수심차가 10m나 되었기 때문에 개설 계획을 포기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1846년 프랑스의 시몬주의자(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주도로 프랑스와 영국 · 오스트리아의 지식인들이 참여한 이른바 ‘수에즈운하연구협회’가 결성되고 국제적 기업에 의한 운하 개설 계획이 세워졌다. 영국은 자국 이익에 배치된다는 구실하에 이 계획을 반대하였다.
1854년 이집트의 아미르(통치자, 수장)가 된 무함마드 사이드 파샤(Sa’id Pasha)는 프랑스인 페르디낭 마리 드 레셉스에게 운하개설 특허권과 수에즈 지협 조차권(租借權)을 양도했으며, 1856년 이집트의 종주국인 오스만 투르크도 이를 승인하였다. 레셉스는 2억 프랑(800만 파운드)의 자본금으로 1858년에 ‘만국수에즈해양운하회사’(Compagnie Universelle du CanalMaritime de Suez)를 이집트 법인으로 설립하였다.
자본금 중 20만 7천주는 프랑스가, 17만 7천주는 이집트 아미르가 소유하게 되었다. 공사는 1859년 4월에 시작해 10년 만인 1869년 11월 17일에 마쳤다. 이 총 길이 162.5km 운하의 개통으로 런던과 싱가포르 간의 항로는 케이프타운 경유의 2만 4,500km에서 1만 5,025km로 줄어들고, 런던과 봄베이 간은 2만 1,400km에서 1만 1,472km로 단축되었다.
1964년의 확장공사를 거쳐 수심은 원래의 7.9m에서 14.5m로, 수면의 폭은 60~100m에서 160~200m로 확장되었다. 통과 소요시간은 15시간으로 단축되었다. 영국은 1875년에 이집트의 주를 매입하고 1914년에는 이집트를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수에즈 운하의 실질적 소유권은 프랑스와 영국이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1956년 7월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가 운하의 국유화를 선포함으로써 운하의 소유권은 이집트로 넘어갔다.
최초의 운하는 기원전 7~6세기에 활동한 이집트 제26왕조의 왕인 네코 2세에 의해 시도되었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os)에 따르면, 네코는 이집트 삼각주 유역에서 교역이 늘어나자 나일 강과 홍해를 잇는 운하 건설을 시작했지만 예언자들의 반대로 중단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 후 기원전 500년경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가 홍해를 거쳐 나일 강 인근의 도시인 부바스티스(Bubastis)까지 수로를 연결하는 데 성공했다. 이 수로는 한때 이집트의 농산물을 실어 나르는 중요한 교통로였으나 이슬람교 내분으로 폐쇄되었다. 그러다가 1798년 나폴레옹에 의해 유적이 발견되었고, 통상로로 이용하기 위하여 개발 공사가 이루어졌지만 얼마 되지 않아 계산 착오로 중단되고 말았다.
프랑스는 1859년 카이로 주재 프랑스 외교관이었던 레셉스(Ferdinand Marie de Lesseps)에게 수에즈 운하 건설의 임무를 맡겼다. 레셉스는 토목 기사로서 정식 교육은 받지는 않았지만 젊었을 때부터 운하 건설에 대한 집념을 불태워 온 사람이었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1869년 우여곡절 끝에 운하가 완성되었다. 그러므로 수에즈 운하는 결국 프랑스에 의해 탄생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수에즈 운하는 인도에서 영국으로 가는 뱃길을 무려 6,400㎞나 단축시켰으며, 1888년 콘스탄티노플 조약에 의해 국제화되었다.
수에즈 운하의 서쪽에는 저지대인 나일 강 삼각주가 있고, 동쪽에는 지대가 높고 지형이 험난한 불모지인 시나이 반도가 자리 잡고 있다. 운하는 개통 당시 수심 약 8m, 폭은 약 22m였으나, 공사를 계속하여 1967년에는 수심 12m, 폭 54m로 일정하게 확장되어 그 길이가 168㎞나 되었다. 운하의 건설로 인해 사람이 거의 살지 않던 이 지역에 촌락들도 생겨났다. 수에즈 운하는 1967년 6월 아랍과 이스라엘 간의 전쟁으로 일시 폐쇄되었으나 1975년 다시 개통되었으며, 1975~1980년에 다시 확장하여 지금은 흘수 16m의 선박까지도 운항할 수 있다.
공해와 공해를 연결하는 뱃길을 국제 운하 또는 국제 수로라고 한다. 국제 운하는 조약에 의해 모든 외국 선박에게 개방되어 있다. 그러므로 군함을 포함하여 세계 어떤 나라의 선박도 자유로이 통행할 수 있다. 이러한 운하는 전쟁 동안에도 자유로운 통행이 보장되며, 어떤 경우에도 폐쇄되지 않는다. 또한 운하의 양쪽 출입항으로부터 4.8㎞ 이내의 구역에서는 어떠한 적대 행위도 금지되어 있으며, 시설물 일체는 불가침 구역이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두 대륙의 경계인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 서쪽에 건설된 세계 최대의 운하로 지중해의 포트 사이드(Port Said) 항구와 홍해의 수에즈(Suez) 항구를 연결하고 있다. 수에즈 운하는 무엇보다도 아프리카 대륙을 우회하지 않고 곧바로 아시아와 유럽이 연결되는 통로라는 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수에즈 지협에 운하를 파서 항행할 수 있게 되면 지중해와 홍해의 교통 발달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착상은 고대부터 있었다. 운하를 건설하려는 최초의 시도는 이집트 파라오 왕조 제 12왕조의 세누스레트 3세(Senusret III : 재위 1878 BC~1839 BC)가 홍해 연안의 투밀라트 계곡(Wadi Tumilat)을 통해 나일강과 홍해를 연결하고자 착공했던 공사로 추정된다. 그러나 공사 결과 내륙의 푼트(Punt) 지방 까지만 나일강이 연결되었을 뿐 홍해와는 연결되지 못했다.
파라오 제 18왕조의 하셉수트 여왕(Hatshepsut : 재위 1479 BC~1458BC)이 푼트 지방에서부터 홍해로 이어지는 운하 공사를 시도했다는 흔적도 남아있으나 성공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에도 BC 1380년 경에 나일강과 홍해를 잇는 운하가 개착(開鑿)되었다. 그 후 이 운하는 천재(天災)와 전재(戰災)로 메워졌으나 여러 차례에 걸친 개수(改修)로 로마 시대와 아랍 지배하에서 중요한 수로로 존속하였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BC 600년 경 제 26왕조의 파라오 네카우 2세(Nekau II : 재위 610 BC~595 BC)에 의해 운하가 다시 개착되었으며, 그 후 이집트를 정복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Darius I : 재위 522BC~486BC)에 의해 완성되었다고도 한다. 계속해서 헤로도토스는 이집트의 프톨레미 2세(Ptolemy II)가 BC 250년경 운하를 정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아바스조 칼리프 알 만수르(al-Mansur)가 AD 767년 델타 지역으로 침입하는 반란군을 막기 위해 운하를 폐쇄할 때까지 약 1000년간 파괴와 보수가 반복되었다고 전해진다.
16세기에는 베네치아의 상인이 수에즈 지협에 해양 운하를 개착하여 포르투갈·에스파냐의 해운 무역에 대항하려고 했고, 17∼18세기에는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독일의 라이프니츠가 수에즈 운하를 건설하여 영국·네덜란드의 아시아 무역에 대항하려고 했으나 모두 토목기술이 발달하지 않아서 실현하지 못하였다.
18세기 말에 이르러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정복한 뒤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운하를 완공하고자 시도했다. 나폴레옹은 1799년에 찰스 르 페레(Charles Le Pere)에게 운하 프로젝트를 위임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홍해와 지중해의 수위 차가 10미터에 달하며, 운하 중간에 거대한 바위들이 많다는 사전조사 결과를 보고 계획을 포기했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당시의 전쟁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정확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1833년, 생-시몽주의자(Saint-Simoniens, 공상적 사회주의자) 로 알려진 프랑스 지식인 그룹이 카이로에 도착하여 운하 착공에 관심을 보였으나, 당시 이집트 태수 무하마드 알리(Muhammad Ali)는 이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운하를 개착하면 이집트의 독립유지가 불가능해진다는 이유로 프랑스인 푸르네의 신청(1834)과 오스트리아 메테르니히의 출원(1838, 1841)을 각하하였다. 이후에도 생-시몽주의자들은 1846년에 프랑스·영국·오스트리아 등의 지식인의 협력을 얻어 수에즈 운하 연구협회를 설립하고, 국제 기업에 의한 운하 개착을 구체적으로 계획하였으나 영국의 자본가와 정계는 자기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강경히 반대하였다.
1854년 이집트의 태수가 된 무함마드 사이드 파샤(Muhammad Said Pasha)는 무함마드 알리와 달리 유럽의 영향력에 개방적이었다. 그는 프랑스인 페르디낭 드 레셉스(Ferdinand deLesseps)에게 운하 개착 특허권과 수에즈 지협 조차권(租借權)을 주었고, 1856년에는 이집트의 종주국(宗主國)이던 오스만투르크제국도 이를 승인하였다. 레셉스는 1858년 ‘만국 수에즈 해양운하회사(Universal Company of the Maritime Suez Canal)’를 이집트 법인(法人)으로서 설립하였으며, 2억 프랑(800만 파운드)의 자본금에 주식(株式)을 국제적으로 공개하였다. 주식은 1주 500프랑이었으며, 프랑스인이 20만 7000주를 소화하고, 이집트 태수가 17만 7000주를 인수하였으며, 운하 개통 후 99년간 소유권을 법인이 보유했다가 그 후 이집트 정부에 소유권을 이양하는 데에 합의하였다.
이리하여 레셉스는 1859년 4월 25일 지중해안의 포트사이드에서 기공식을 거행하고 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고대의 운하를 개수(改修)하여 음료수의 공급과 수송로가 확보된 단계에서 영국이 수만 명의 이집트인을 강제 노동에 동원했다는 점과 6만 ha에 이르는 농경지 조차를 이유로 들어 이집트 정부에 항의했기 때문에 운하의 개착 공사가 일시적으로 중지되었다. 영국의 계속되는 방해로 공사가 늦어지고 이에 따른 경제적 손실이 불어나자 만국 수에즈 해양운하회사는 영국 및 오스만투르크제국과 대립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사태는 1864년 나폴레옹 3세의 중재로 해결되었으며, 1866년 ‘만국 수에즈 해양운하회사는 이집트의 회사이며, 이집트의 법과 관습에 따른다’는 내용이 포함된 새로운 협정이 조인되었고, 같은 해에 오스만투르크제국 황제의 최종공사허가서가 나왔다. 이리하여 운하는 개통되었고, 1869년 11월 17일 세계 각국의 국가원수·귀빈·명사가 초대된 성대한 개통식을 가졌다.
이 개통으로 런던-싱가포르 항로는 케이프타운 경유로 2만 4500km인 것이 1만 5027km로 줄어들고, 런던-뭄바이는 2만 1400km인 것이 1만 1472km로 단축되었다. 개착공사에는 35hp의 증기기관을 가진 버킷 준설기(浚渫機) 60대를 비롯하여 새로운 토목용 기계가 1863년부터 투입되었으며 그 후 세계 각지의 하천 공사나 운하 개착에 획기적인 영향을 주었다. 운하의 단면은 수심 7.9m, 저부(底部)의 폭원(幅員) 22m, 수면의 폭원 60∼100m의 얕은 대형(臺形)이었다. 1964년의 확장 공사 착수(미완성) 때까지에 수심 14.5m, 저부의 폭원 90m, 수면폭 160∼200m로 이미 확장되어 있었으며, 운하의 남북 3개소에 바이패스가 만들어져 5만 5000t급 선박이 지나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선단(船團)이 운하를 통과하는 평균 시간은 약 15시간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수에즈 운하 [Suez Canal]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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