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전 몇십년전 몇글자 모르는 우리농민들은 그어떤 주의나 진리같은 깊은 도리를 잘 몰랐다.하지만 그들은 누가 자신들을 잘대해주며 살아가게하는가는 실감으로 느끼고 잘 알아준다.역사는 생생하게 증명하고 있다.
차르러시아(제정러시아)가 청나라때 중국동북을 침략하며 노략질을 일삼을때 동북의 농민들은 생사를 불문하며 싸웠다한다.마찬가지로 일본제국주의가 중국과 조선반도를 침략했을때 농민들은 너도나도 독립군과 항일련군에 참가해 용감하게 싸웠다.
이웃집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이다.그는 어릴적 연변에서 살았는데 하루는 일본군인들이 스무살되는 조선족처녀를 공산당이라며 잔혹하게 살해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한다.그처녀가 추호도 죽음을 두려워하지않고 무어라 고함치고 있었지만 너무 어려서 알아는 듣지 못했다 한다.하지만 전마을 농민들은 우리민족 어린처녀를 잔혹하게 살해하는 일본놈들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한다.그래서 동북지역 중국공산당원의 대부분, 동북항일련군장병의 약 60%는 조선족 농민들이라는 연구보고도 있다.지금 살아계시는 90세 넘는 항일련군노전사들가운데 조선족이 많다 한다.
그당시 정통인 국민정부가 좋은지 후에 온 공산당이 좋은지 농민들은 잘모른다.하지만 장개석위원장님은 원 만주에살고있는 한인(조선인)들의 재산을 몰수했고 일본에 투항한 항일부대 사문동 리화당등 토비들을 국민당군대에 끌어들여 장군으로 임명했다.이 토비들은 밤낮헤아리지않고 빈부를 가리지않고 마을들을 습격하고 재물을 빼앗고 촌민들을 살해하여 농민들은 밤에도 자지못하고 서로 부등켜안고 울었다한다.몇몇청장년농민들은 아예 죽을판엔 일본군이 버린 총몇자루를 숨겨다 마을 자위대를 세우고 토비가 습격하면 총을 놓아 쫓아버렸다 한다.후에 그들은 너무 용감했기에 중국인민해방군독립영퇀사단으로까지 성장했고 요녕성흑산저격전에 참가했던 국민당청년군소좌부련장은 이홍광부대를 만나 혼비백산했다는 증언을 집적 방송에서 목격했다. 이 농민군대는 관내에 들어가 북경 천진을 해방시켰고 양자강을 넘어 호북 무한 호남 광서 광동 해남도까지 해방시켰다 한다.
이웃 이씨 할아버지는 마을의 훈장님이라하며 하나뿐인 아들을 군에 보냈으며 하루는 부대가 마을 지날때 부모를 보러 집에 들렸는데 어머니!하고 한마디 웨치고는 쓸어졌다 한다.유심한 어머니가 입은 솜옷을 들여다보니 이가 무리로 군데군데 모여있어 하는 수 없이 비자루로 쓸어주었다 한다.좀 지나니 아들은 깨여났고 인차 부대가 출발한다하며 관내로 재출발했고 그후 부대에서 전사했다는 통지문을 보내왔다 한다.그만큼 가목사 목단강 연변은 중국의 제일 먼저 제일큰 해방구라 한다.남자라생긴 아이들은 18살부터 몽땅 해방군에 입대했으니 우리부모들은 모두다 1945년전후 즉 1949년 전중국해방전 입대한 군인인 셈이다.
글몇자 모르지만 생사를 불문하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까지 군에보내는 원인은 바로 부자와 지주들의 아들로 결성된 쟁개석국민당이 아니라 공산당이 와 토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해주었고 소수민족인 조선족농민들을 보호해주었기때문이라 한다.
그후엔 공산당과 인민정부를 더없이 신임했고 동족상잔의 전쟁에도 참여했지만 농민들이 알고 그랬다는 것은 오판일것이다.
1978년 일본나카소네총리와 등소평의 배려,그리고 한국 KBS의 끊임없는 노력과 도움으로 우리마을 농민들은 한국의 친척을 찾았고 촌지서의 집에도 한국친척이 홍콩을 거쳐 보내온 편지를 보고 온마을 사람들은 술렁이었다.그후 중국의 개방개혁의 좋은 정책으로 중한우호친선과 합작관계의 혜택을 입어 마을농민들은 너도나도 한국에 노무수출에나가 돈을 벌어들여 자식을 공부시키고 새집을 짓고 지역경제 문화 사회도 되살아 났다.
어떻게 보면 우리 말공부 말잔치를 잘하는 지식인 작가선생님 간부들보다 소박한 우리농민들의 판단과 선택이 제일 정확했고 확고부동했다.그러므로 앞으로도 우리인민정부도 공산당이 잘했던 역사와 국민당장개석이 망한 역사 공부를 더 잘해야할것 같다.201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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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3 ]
3 작성자 : v
날자:2015-09-20 15:23:29
등소평의 배려
2 작성자 : 농민들의 선택
날자:2015-09-14 10:31:02
해방후 토지를 분배받아 좀 허리를 폈던 농민들은 다시 합작화 인민공사란 명목하에 거의 농지주도권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1978년후 등소평의 개방개혁으로 토지경영권이 다시 농민들의 손에 돌아왔지만 3년이 멀다하게 자주 반복하며 도급 경영권이 소실되군 했고 소유권이 없으니 토지양도비로 가정생계유지가 거의 안되는 상태이다.그러니 부득불 그들은 모두다 한국노무행을 택했다.처음엔 자녀교육 생계유지 새집장만등 생계유지형이었지만 지금은 한국에 거의 정착하고있어 민족지역에 남은건 노인 불구자 병환자와 현향촌간부 농촌학교교원 그마저 아이들이 줄고 학교가 페교되면서 농촌교원들도 앞으로 없어지기 마련이다.
극소수 민족간부 지식인들만 남을 조선족 중국동포사회의 앞날이 걱정되지않을수없다.
1 작성자 : 대만의 농지개혁은 높은평가
날자:2015-09-05 17:27:14
기득권으로 하여 대륙에서 늘 농지개혁을 거부하며 미루어왔던 국민당쟁개석은 대만에 밀려난후 그교훈을 거울로 삼아 대만에서 큰 거부감없이 농지개혁을 했다한다.대륙에서의 많은 사람이 상하거나 죽은것과 대조로 대만에선 한사람도 죽지않고 지주들에게 도시에 진출해 기업을경영하고 공장을 꾸리게끔 융자도 해주며 지원해주었으므로 농지개혁을 순조롭게 잘 완성했다는 대륙업계의 평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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