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카테고리 : 두만강수석회
【시조와 수석】(3)
내가 아는 한사장
한사장(韓社長)이란 그가 여러 해 전에 연변인민방송국 소속의 <생활안내>신문을 책임지고 꾸린 일이 있어, 다들 나이구분을 떠나서 듣기 좋게 또는 부르기 좋게 쓰는 호칭이다. <수호전>에서 요용이 학구로 있었다고 다들 오학구라 부른 것이나 <삼국연의>에서 류비가 헌제의 삼촌벌이 되니 다들 류황숙이라 부른 것과 일맥상통하는 호칭이다.
한사장의 명함은 한태익(韓太益), 시인이고 수필가이다.
지금은 50고개에 오른지도 이슥하니 행정직을 죄다 털어버리고 평기자로 근무하지만 위인이 원체 선량하기로 동곽선생(東郭先生)의 선생이라, 사회적으로는 그냥 변함없이 인정을 받아서 한때 백두산문인산악회 회장을 맡기도 하였고 지금은 두만강수석회 총무장을 맡고 불철주야하고 있으니 차후에는 아마도 호칭을 한회장으로 바꿔야 할 것 같다.
1. 첫만남
필자가 한사장과 처음 상면했던 때는 지금으로부터 20년이 넘는 1986년 9월이다. 그 무렵에 필자는 대학교 졸업학년이라 연변인민방송국에 자원하여가서 실습기자로 있었는데, 매양 당치 않게 이도 아니 나서 콩밥을 씹는 격으로 어떻게 하나 단독취재를 하고 훌륭한 기사를 써서 일약 이름을 날릴 궁리만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그때 화룡시 남쪽 교외에 돌배즙가공공장이 새로 서서 개업식을 하게 되었는데 방송국에서는 화룡으로 보낼 기자를 불시에 배치할 수 없어 꿩대신 닭으로 필자를 보내게 되었다. 실상 실습기자만을 달랑 보낸다는 것이 어찌 보면 도리에 어긋나는 일일지라도 필자에게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행운이였다. 집이 화룡시내에 있으니 취재도 할겸 집에도 가볼겸 내게는 님도 보고 뽕도 따는 일거량득이였다.
취재는 아침에 일찍 찾아갔던 관계로 쉽게 이루어졌다. 점심때가 되어 공장측에서 행사참가자들을 륭숭하게 대접하는데를 따라가서 현정부 간부들과 한 술상에 앉았댔는데, 그때 곁에 앉았던 한사장과 초면인사를 나누었다. 한사장은 당시 화룡현방송국 기자였는데 여러 상에 앉은 하객들 속에 류행도 아니게 캡을 쓴 사람은 그와 나 딱 두사람이였다.
한사장을 처음 보는 순간 법이 없이도 살 사람일것 같다는 인상을 깊이 받았다. 굳이 초상묘사를 한다면 뭐라고 할까? 어려서 본 영화 <우리마을 젊은이들>의 조무림이나 <폭풍취우>의 조옥림 또는 조선영화 <남강마을 녀성들>의 덕수-털보전사같은 모습들의 복합형이라고 할까? 여하튼 수더분하기를 이르데 없는 모습이였다.
한사장은 말수가 적었다. 남자들만 앉은 술상이라 술이 둬순배 도니 고담준론들이 터져나오는데 한사장은 고개를 갸울이고 듣기만 하였다. 배갈 몇잔에 기분이 붕 뜬 필자도 입건사를 못하고 가리산지라산을 헤맸는데 한참 년상인 한사장에게 본새가 나쁘게 감히 하오체를 들먹이며 팔을 마구 내흔들었건만 한사장은 “예, ”하고 오히려 존칭을 쓰며 들어주기만 하였다. 지금 생각하여도 참으로 막돼먹은 짓을 했구나 하는 후회에 깊숙하게 빠진다.
필자가 6년간 잡았던 교편을 동댕이치고 1993년 7월에 평생의 직업으로 갈망했던 연변TV방송국 기자로 전근하고 보니 한사장은 진작 화룡에서 전근하여 연변라디오TV신문사 기자로 와있었고 같은 분야이다 보니 가끔가끔 함께 취재도 나가게 되었다. 1995년도에 연변에서 “제1차 두만강하류국제무역투자상담회”를 조직하였는데 둘 다 열심히 뛰면서 취재하고 같은 특집프로를 만들어 각각 상을 탄 일이 있었다.
2. 여드레에 팔십리
중국 당대문학사에서 마봉(馬烽)은 조수리와 비견하는 유명한 작가이다.
그의 대표작 단편소설 <나의 첫 상급>에는 성이 전(田)씨인 농업건설국 부국장이 나오는데, 평소에는 남달리 느리다가도 관건적일 때에는 무비의 침착성과 결단력을 발휘하는 참으로 재미있는 사람이다. 이 전국장이 하루는 농촌에 내려가 사무를 보고 그곳에서 홀로 자는데 밤중에 큰 바람이 휘몰아치였다. 와지끈 하는 무서운 소리가 천정에서 울려 눈을 떴지만 그는 일어날 대신 이불밑에 꼼짝도 아니하고 누운채로 태연하게 손전지를 켜들고 천정을 비춰보았다. 대들보가 거의 끊어져 곧바로 무너져 내릴 지경이였다.
“래일까지는 별 일이 없어.”
그는 혼자 중얼거리고는 돌아누워 그냥 잠들었다.
필자는 한사장을 만날 적마다 이 전국장을 떠올리군 한다. 한사장은 행동이나 말이나 다들 느린 “천천히파”이다.
1995년도 12월에 백두산빙설제 취재차로 이도백화에 갔댔는데, 저녁식사후에 기자들은밖이 엄청 추운데다가 짐을 푼 려관이 동떨어진 곳이다보니 끼리끼리 갈데가 없어 방에 모여서 트럼프판을 벌렸다. TV기자들은 평소 자주 어울려 놀다보니 눈치만으로도 편을 척척 알아맞히는데 그 속에 한사장이 홍일점으로 끼여들어 다른 사람의 눈치에 전혀 맞지 않는 전술을 혼자 펼치니 같이 판을 벌린 셋은 속이 곪아터질 지경이였다.
트럼프 한장을 내리는 것도 머리를 몇번씩 긁적이고 내리는가하면 판국이 다 글렀는데도 손을 드는 기미를 좀처럼 보여주지 않아서 성질이 급한 다른 친구들은 하품을 쩍쩍 할 지경이였다. 그러다 보니 가끔 원인도 모르게 셋의 집중폭격을 맞기도 하였고 수입보다 지출이 많았다. 남들은 수지가 조금만 탈려도 거무락푸르락인데 그는 안색이 변하는 일이 없었다. 끝날 때면 그저 머리를 둬번 긁적거릴뿐 항상 시작할 때의 태연한 모습이였다.
“잘못 앉아서 오늘 지출이 꽤 컸겠습니다?”
“오늘 잃으면 래일에 얻고…….”
대답은 묻는 말보다 짧았으나 마디마디의 휴지는 꽤 길었다.
2002도에 필자는 대학교 교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동분서주를 직업으로 하던 것이 조용히 앉아만 있자니 사지에 좀이 쑤시는 것을 당초 참을 수가 없어서 2003년 초봄에 백두산문인산악회에 참가하였다. 동갑이지만 두학년 선배라고 언제나 형님을 앞세우는 우상렬교수에게 산악회 성원들을 일일이 물었다.
“니가 거지반 아는 사람일거야. 우선 김관웅교수와 김호웅교수, 그리고 가무단의 김학송시인, 방송국의 채선애와 한태익기자, 교통은행의 류광철, 문련의 신영애가수, 로인아파트의 이정옥원장…….”
그가 념불하듯 줄줄 섬기는 명단 속에 한사장이 있었는데 그때 방송국 소속의 “생활안내”신문사 사장을 맡고있었다. 아니게 아니라 20여명되는 성원중에 절반은 아는 사람들이거나 알만한 사람들이여서 첫날부터 제법 정이 들어 서슴없이 육담판에 끼여들기도 하였다.
한사장은 필자보다 키도 훨씬 컸고 체력도 좋았다. 필자는 산골에 태를 묻은 경력을 믿고 항상 일행의 앞장에 서서 길안내행세를 했지만 한사장은 불쑥불쑥 앞지르는 일도 없었고 그렇다고 또 한참 뒤에 처지는 일도 없었다. 항상 가운데쯤에 서서 김관웅교수의 수필창작에 관련한 무료강좌를 말없이 귀담아 듣군 하였다. 김관웅교수는 학부생들의 교수평의에서 최고점수를 따는 분이라 아무 때나 시작되는 통속적인 무료강좌에 푹푹 빠지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걸음들이 늦기로 여드레에 팔십리다보니 밖에서는 우리를 “산보팀”라고 부르고 있다. 평지길을 걸으나 비탈길을 걸으나 한사장은 속도가 균일하여 “산보팀”의 대표자이고 팔자걸음의 일인자이다. 아무튼 뒤에서 호랑이가 쫓아온다고 해도
“그놈이 십분전에는 안올거야.”
하며 그냥 바지호주머니에 두손을 지른 채로 유유히 걸어갈 사람이다.
한사장은 2006년도 년말총화모임에서 만장일치의 박수가결로 2007년도 백두산문인산악회 회장으로 선거되었다. 말씀을 열흘에 한마디나 하는 분이라 취임사는 아주 짧았다.
“일년간 열심히 하겠습니다. 대신 류광철전임회장께서 부회장이 되어 도와주십시오.”
우스개을 전담하는 김익교수가 그 취임사에 꽃을 큼직하게 달아줬다.
“명년에도 막걸리를 10근씩 그냥 메고 오면 련임은 문제없습니다.”
3. 갓마흔에 첫 버선
2004년도 여름에 백두산문인산악회에서는 력사가 유구한 성자산성에서 야유회 겸 문학작품집 발간식을 가졌다. 작품집 제목은 산악회라는 특징을 살려서 <저 높은 산에 푸른 꿈을 안고>라고 달았다.
이 출간식에, 후일 발족한 두만강수석회 제2임 회장 리광인선생이 참가하였는데 그는 그때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에서 대외사무를 관장하고있었다. 김학송시인(당시 산악회 회장이였음)과 리광인선생은 원체 구면인데다가 다들 연변의 수석문화을 개척한 원로급들인지라 만나자마자 의기상투하여 오가는 말씀들이 문학과는 숫제 거리가 먼 수석이야기들이였다.
“장마철이 오래지 않는데 큰비가 몇축 내렸으면 좋겠소.”
“86년도 경신란리때처럼 말이가?”
“장마야 크게 지면 질수록 좋지만 자금자금하게 여러번 터지는것도 좋소.”
“두만강과 가야하의 물때가 일년에 서너축씩 벗겨져야 하는데 말이요.”
경신란리란, 1986년도 여름에 류례없었던 장마가 져서 훈춘 경신벌이 온통 물바다로 변해버린 재해를 민간에서 이름하여 부르는 말이다. 두 어른은 장마니 란리니 하며 농민들이 들었다가는 대번에 주먹을 불끈 쥐고 달려들 말씀들을 서슴없이 “람용”하고있었는데 이들의 말에 귀가 솔깃해진 사람은 일행중에서 한사장과 필자였다. 한사장은 잠자코 듣기만 하였고 필자는 입건사가 허술한것이 문제이다보니 아 대화속에 무작정 빠져들었다. 그래서 이광인선생과 초면인사가 이뤄졌는데 신정이 여구해져 지금까지 끈끈한 수석인연을 엮어가고 있다. 남녀사이라면 첫눈에 정이 들어 어쩌고저쩌고 하겠는데 말이다.
출간식이 끝난 한주일 후, 약속대로 우리 네 사람과 연변병원의 김봉세선생, 방송국의 전임 부주필 김대현선생 등이 도문시 신기동에 가서 탐석을 하며 하루해를 보냈다. 함께 즐기는 즐거움이라 조직의 필요성도 제기되어서 이듬해 여름에 현임 주당위 선전부 리흥국부장(당시에는 연변라디오TV방송총국 국장. 서예가)을 초대회장으로 하는 연변두만강수석회를 성립하였고 2006년 6월에 연변박물관에서 제1차두만강수석전시회를 가지기도 하였다.
그런데 사람일이란 참으로 모를 일이였다. 등산에서는 여드레에 팔십리를 가는 한사장이 돌밭에 들어서서는 아주 신행태보였다. 직업적 성향이라고 할까? 같은 방송국출신인 김대현고문님(두만강수석회 초대고문. 골동품수집가. 장서가)은 한사장보다 한수 앞선 신행태보였다.
탐석(探石)에서는 뭐니뭐니 해도 끈기와 인내력이 기본이여서 조밭 초벌기음을 매는 자세로 열심히 주위를 차근차근 살피고 조심조심 뒤져야 하는데 한사장은 전혀 그러지를 않고 두손을 호주머니에 지른채 동에 가서 번쩍 서에 가서 번쩍하며 돌밭을 휩쓸고 다녔다. 그러다보니 이미 탐석경력만도 10년을 넘나드는 김봉세, 김학송, 리광인 등 선생들은 이미 발에 익고 눈에 익어서 매번 탐석때마다 수확이 있었건만 한사장만은 도로무공이라 올 때의 배낭보다 돌아갈 때의 배낭이 항상 더 가벼웠다.
일이란 생각대로 안되면 투정이 많기마련인데 한사장은 투정도 없었다. 훌쭉한 배낭을 메고 귀가할 때면 락망도 어지간히 크련만 내색을 근본 보이지 않았다. 2004년부터 2005년까지 1년반 되는 사이에 열 번도 더되는 탐석활동이 있었건만 한사장은 개근에서 보여주는 열성과 정반대로 성과는 거의 없었다. 완전히 공수거(空手去)하고 공수래(空手來)했다.
그러나 아무리 신행태보로 돌밭은 휘젓고 다니다 해도 그냥 헛물만 켜라는 법은 없다. 일생일석(一生一石)이란 일생에 명석 하나만 갖고 있어도 만족이라는 말인데 한사장에게 일생일석 감을 선사하려고 하느님이 의식적으로 한사장을 자꾸 헛걸음시켰는지 누가 알랴?
드디어 기회가 왔다. 갓 마흔에 첫 버선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2006년 5월 1일에 또 한번의 합동탐석이 도문시의 신기동에서 이루어졌는데 한사장의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습성이 아침부터 오후까지 변함이 없이 표현되였다. 신기동 돌밭은 연변에서 가장 큰 탐석지의 하나이지만 교통이 편리하여 수석인들이 날을 가리지 않고 찾아드는 통에 자원이 거의 고갈된 상태이다. 그래서 다들 이날 소품석들을 얻은 것에 그쳤고 한사장은 역시 종전대로 빈손으로 돌아섰다.
그런데 마을 입구에 거의 왔을 때, 올적 갈적 그냥 생각 없이 지나쳐버리던 돌무지(집을 짓자고 모여놓은 돌무지)에 이르러 한사장이 우리 모두가 난생 처음 들어보는 이상한 고함소리를 질렀다.
“야. 메주다. 메주!”
모두 고개를 돌려보니 뒤처져 오던 한사장이 과연 메주처럼 생긴 돌을 안고 흥분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보통 화강암이지만 금 하나 없이 둥글둥글 륜곽이 자연스럽게 생긴데다가 밑둥치를 칼로 벤듯 잘려진 것이 흡사 알뜰한 새색시의 손에 잘 다듬어진 메주같았다. 김학송시인이 연신 감탄하면서 물을 뿜으니 노오란 색상이 돋아나는 것이 구미도 당겼다.
“명석이야. 물형석으로는 제격이야. 그리고 흠이라고는 하나도 없지 않는가?”
“밑둥치가 딱 비례에 맞게 잘려진것이 신기하오.”
“오늘밤에는 사모님을 객실에 내보내고 이 메주석을 안고 자는게 좋겠습니다.”
남들이 중구난방으로 칭찬을 하는데 한사장의 생각은 벌써 한달후의 일로 가 있었다.
“내게는 이것밖에 없는데 전시회에 내놓으면 어떻겠습니까?”
“당연하지. 관상석으로는 일품인데.”
김대현고문은 적극적으로 전시를 주장하였다.
2006년도 년말에 리광인선생이 절강성 월수 외국어대학 초빙교수로 가게 되면서 두만강수석회는 인사변동을 하였다. 김대현선생은 종신고문으로 되고 김봉세선생이 제3임회장으로, 한태익선생이 총무장으로 되었다. 필자는 2007년 3월에 늦깍이 공부를 하느라 한국행을 하다보니 지금껏 탐석을 못하고있다. 그러다보니 거의 2년이 되는 사이에 한사장이 어떤 성과를 거두었는지 감감 모르고있지만, 기왕 메주석이 큰 행운을 얻는 길을 열어주었으니 필경 좋은 성과를 거뒀으리라 또 거두고있으리라 믿는다.
4. 다만지 손이 성하니
송인(宋寅,1516~1584)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고 해서(楷書)에 능한 서예가이다. 학식이 뛰여나고 성품이 고결하여 퇴계 리황(李滉)과 율곡 리이(李珥), 남명 조식(曺植), 우계 성혼(成渾) 등과 친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리황에게 비문을 써달라고 부탁하자 리황이 "비문은 제일 잘 쓰는 사람에게서 받아야 하는데 송인과 성수침(成守琛.즉 성혼의 부친)보다 나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성수침의 글씨는 힘은 있으나 허술한 곳이 있으므로 송인이 가장 좋을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 송인이 쓴 시조 중에 <들은 말 즉시 잊고>가 있는데 가히 한사장에게 어울릴 것 같아서 적어둔다.
들은 말 즉시 잊고 본 일도 못 본듯이
내 인사 이러함에 남의 시비 모르노라
다만지 손이 성하니 잔 잡기만 하노라
한사장은 열흘에 한마디 할 정도로 말문이 무거운 사람이다. 시도 쓰고 가사도 쓰고 수필도 쓰지만 술을 반겨 흥분하는 일이 없다. 그러니 그의 입에서 누구는 어떻고 누구의 작품은 어떻고 하는 “평론”을 듣는다는 것이 하늘에서 별을 따는 일이다. 확실히 들은 말을 즉시 잊고 본 일도 못 본듯 하는 사람이다. “다만지” “손이 성하니” 글을 열심히 쓰고 “다리가 성하니” 등산과 탐석에 여가를 모두 바치는 사람이다.
새해에도 메주석과 같은 행운이 깃들기를 바란다.
파일 [ 2 ]
전체 [ 2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