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어느 날, 도문시 외사과 주동현 과장과 시인사국 책임자로 기억되는 남현우씨가 나를 찾아왔다. 그때 나는 왕청현 석현진 수남대대 7대(달라자) 정치대장과 공청단 지부서기를 담임했었다.
손님들이 나를 찾은 사연이다.
“우리가 달라자에 훌륭한 농업기술원을 소개할터니 이사호로 한집(5명)을 받으시요.
이 집은 조선서 왔는데 받으면 시에서 새집을 지어줍니다.”
나는 농업기술원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하였다. 그때만도 우리 마을에 전기도 없었던 동네에 시에서 농업기술원을 보내준다니 기분이 좋았다.
나는 먼저 생산대 대무위원회서 토론한 후, 다시 사원대회를열고 토론 끝에 이사호를 받기로 하겠다고 답을 드렸다.
며칠 후, 우리 생산대는 안창하를 호주로 한 가족 5명을 받았는데 이따라 봄이 되자 시에서 투자한 자금으로 안창하네 새집을 짛었다.
안창하는 46세로 인물체격이 좋고 성질이 활달하고 웃기를 좋아하고 이야기를 구수하게 잘 하였다. 그래서 동네서는 안창하네를 좋아했고 안창하네도 내가 자기네를 받았다는 사연을 알게 되여 나를 무척 좋아하고 존중하였다.
나는 안창하게서 진달래꽃을 꿀에 담궈먹으면 무릎관절에 좋다는 것, 술을 마신 후 솔잎을 씹으면 술 냄새가 안 난다는 것, 속앓이 치료는 박속이 특효라는 것, 돼지방목사료로 뚝감자(돼지감자)가 좋고 겨울철 돼지사료로 매초사로(여름에 생풀을 썰어서 소금을 쳐가며 땅속에 저장하는 청사료)가 좋다는 것을 듣고 내가 생산대 집체양돈장 사양원을 할 때 우리 생산대에서 도문서 처음으로 매초사료를 했다.
우리 생산대에서는 안창하를 받은 첫해부터 그를 농업기술원으로 배치했는데 그는 첫 해에 벼모재배 륙상육묘법을 채용해 우리들의 전통적인 랭상모육모법에 종지부를 찍었다.
안창하의 벼 한육모농법은 한전밭에서 벼모를 자래우기에 마른 일로 노력투자를 줄이고 벼모가 건실하고 모살이가 쉽기에 산량이 높은데서 도문에서 소문을 떨치기 시작한다.
그런데 1966년에 시작된 '문화혁명' 이듬해 초봄에 도문시 해당부문에서 안창하가 조선특무라며 체포해 갔다. 그때 우리는 정말 놀랐다.
그 후 안창하가 6개월이란 격리심사를 받고 문제가 풀렸다며 시 해당 책임자들이 또 다시 안창하를 데리고 우리 마을에 왔다.
해당 일군들의 교대에 따르면 안창하의 원명은 김창하, 김창하는 조선서 어느 농업대학을 졸업하고 어느 고장의 농업기술원으로 배치받고 한창 활약할 때 이미 가정이 있는 상황에서 어느 지역에서 공공버스기사로 일하는 나어린 처녀의 미모에 반해 그녀와 결혼을 약속하였는데 가정이 있는 정황에서 조선서는 안 되니까 중국으로 가자고 계획하고 한창 마땅한 기회를 노리던 중에 중국 흑룡강성에서 왔다는 안 씨 령감을 알게 되어 그를 꼬셔 그와 함께 중국에 가자는 합의를 했단다.
조사에서 밝힌 김창하네 가족은 이러했다.
김창하는 안 씨 령감을 삼촌으로 하고 자기 이름을 안창하로, 자기 아들(김문성, 20대 초반)은 동생으로 안창남으로 개명하고 처녀(경옥매)를 부인으로 하고 로모까지 5명이 조선 남양에서 한동안 체류하며 기회를 찾다기 물이 얼어붙자 두만강을 쉽게 건너 도문에 왔다.
그때 이네들은 이외로 불행을 당하면 집단자살을 시도하고 저마다 몸에 쥐약을 휴대했단다.
그런데 이들이 두만강을 건너자 도문변방부대에 발각되어 구속되였다.
한 동안의 조사를 거쳐 변방부대에서는 이들을 북송하기로 결정하고 어느 날 도문 국경다리로 이네들을 이송하는데 호송하는 전사들의 감시가 엄격한데서 집단자살의 기회를 찾을 수 없자 혼자서라도 자살을 시도한 김창하가 불시에 국경다리 우에서 뛰어 내렸다. 그런데 김창하는 다행히도죽지 않고 다리와 기타 뼈가 골절되어 병원으로 호송, 유혈이 심하여 도문변방부대전사들의 수혈까지 받고 몇 달 간 병원치료를 받고서 신체가 호전되자 도문시정부 해당부문에서 이들을 도문의 교구인 달라자에 배치하기로 결정하였다.
김창하가 구속된 기간에 안 령감은 홍광향 수남대대 흥진툰의 어느 과부와 결혼하여 달라자를 떠났다.
몇 해 후 김창하네 일가족은 조선정부로부터 합벅적인 조선공민으로 인정받고 경옥매가 조선나들이까지 하면서 일가족이 중국서 아무런 걱정없이 정상적인 생활을 하였다.
몇 년후 달라자는 농업생산대로부터 남새생산대로 바뀌고 김창하가 계속하여 남새기술원을 맡았다.
그는 남새기술원을 맡고 몇년 사이에 남새모 영양단지재배, 비닐하우스 남새생산, 지면피복 남새생산, 대면적 비닐피복 남새생산 등 과학영농으로 아주 높은 산량을 따낸 데서 그의 사적과 이름이 연변은 물론 성내에 알리게 되였다.
그후에 나는 연변농학원입학하고 학교를 졸업하고 도문시 홍광향정부와 시정책연구소에서 사업하다가 1984년에 <<연변일보>>사에 입사하여 도문주재기자로 김창하를 취재하고 추적보도를 하였다.
감농군 김창하
필자는 대표적인 몇 편의 기사를 추려서 이 글에 올린다.
ㅡ 김창하는 74고령에 새해의 농사준비로 현금 5만원을 투자해 사람들의 화제로 되였다.
“시내 공장들이 문을 닫고 일군들이 제때에 로임을 못 타다 보니 올해의 남새가격이 형편없이 내렸는데 그나마 잘 팔리지 않아서 장사가 정말 힘들었습니다.”
“작년보다 생산량은 거의 곱절 증가했는데 수입은 기대 이하로 줄었습니다.”
“비록 수입이 적다고 해도 머리만 잘 쓰고 부지런히 일하면 한 해의 수입이 4, 5만원은 문제없지요.”
김창하 노인은 새해에 원유의 비닐하우스 3채(매 채 500평), 벅돌온실 한 채(500평)에서 비닐하우스 4채, 벅돌온실 한채(200평)를 .더 짓고저 현금 2만 4천 5백 원을 투자해 15톤의 강관, 벽돌, 비닐박막, 세멘트 등 모든 건축물자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1500원을 투자해 닭똥을 사와 새해부터 비닐박막하우스에 몽땅 닭똥을 편 남새농사를 하게 된다.
김창하는 도문서 과학영농의 전도사로 불리고 있다.
집체생산 때에 대전의 오이가 한창 수확철인데 가을배추를 심기 위해 부득불 오이넝쿨을 거두어야 하는 실정에 비추어 그는 '배추모영양단지재배'로 달라자에서 대전오이의 수확기일을 한 달이나 연장시킨데서 길림성에서 처음으로 대전오이산량을 헥타르 당 10만 킬로그램을 따낸 기적을 창조하였다.
“작물과 늘 대화하고 직접 손으로 만지며 느끼고 생각하면서 농사를 지어야만이 제일 적합한 농사법을 찾아낼 수 있다.”
이는 김창하의 반복적인 체험이였다.
김창하는 내년 남새생산계획을 올해에 값이 눅고 잘 팔리지 않던 남새품종을 선택하고 비닐하우스면적이 많은만큼 남새품종을 다양화했다.
그는 제때에 시장정보를 장악하고 해성지구에서 많이 들어오는 남새품종을 줄이였다.
“하는 사람이 자신이 있고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누가 무어라고 해도 끝까지 신념을 지키면서 늙어 죽을 때까지 하려고 합니다.”
ㅡ2006년 10월 중순이었다.
이 날도 내가 김창하와 인터뷰를 끝내고 자리를 뜨려는데 김창하가 나에게 가슴속에 품었다는 이런 말을 실토하였다.
―오대장이 노력하여 나의 생전에(그때 나이 84) 우리 희성이를 (김창하가 중국서 낳은 아들) 중국공민으로 만들어주세요.
내가 조선서 데리고 온 큰아들(김문성)은 제 노력으로 중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도문침직공장에 분배를 받아서 시름을 놓았는데 중국에서 낳은 둘째가 조교라는 데서 한창 나이에 기가 죽어 있소.(그가 중국서 낳은 1남2녀가 모두 조교)
―호금도가 주석으로 된 후 생산대에서 모든 사원들에 게 호금도 주석이 제기한 “8개 영예, 8개 수치’를 암송하도록 포치 하였는데 어느 날 사원대회에서 우리 둘째가 외울순서가 되자 대장이 “희성이는 조교니깐 안 외워도 된다.” 면서 집에 돌아가라고 하기에 희성이가 집에 돌아와 “내가 중국에서 태여났는데 왜 조교냐”며 나에게 성풀이를 하면서 온 밤을 울었다오. 이에 나는 할 말이 없었소.
오대장도 알지만 조선 탈북자를 말하면 우리가 60년대에 탈북했지요. 그래서 근년에 탈북자들을 조직하여 한국으로 보내준다는 사람들(브러커)이 수차나 우리 집을 찾아와서 우리를 한국으로 보내주겠다고 하는데 나는 번마다 “나의 몸속에는 중국인민들의 붉은 피가 흐르니까 나는 중국을 절대 배반할 수 없다”며 번번이 거절했지요.
―어떻게 해서라도 오대장이 내가 죽기 전에 나의 중국아들을 중국공민으로 꼭 만들어주오.
………
귀로에서 나의 머릿 속에는 “나의 몸 속에 중국인민의 피가 흐른다”, “나는 중국을 배반할 수 없다”는 그의 말이 맴돌아쳤다.
그래서 원고를 쓰기 먼저 주공안국 외사처 리영학 처장에게 김창하네 정황과 그의 간절한 요구를 반영하는 편지를 띄우고도 어쩐지 시름이 놓이지 않아서 며칠 후에 직접 리영학 처장을 찾아가 그로부터 돕겠다는 답복을 받아냈다.
며칠 후 리영학 처장이 해당일군을 도문에 파견하여 김창하네 가족정황을 조사 하고 구체적인 사업을 추진하는 도중에 김창하의 부인 경옥매가 불시에 세상을 뜨자 몇 달 후에 김창하도 사망하다 보니 그들의 생전에 둘째가 중국공민으로 넘었다는 희소식을 몰랐다. (선후하여 세 자식이 모두 중국공민으로 넘었음)
나로 말하면 김창하부부가 생전에 마음에 간직한 한을 풀지 못하고 사망한 것에 가슴이 아팠다
경옥매의 장사비결은 믿음을 주는 것
ㅡ 어느 해의 도문 남새가격이 10년 전의 가격으로 하락하였다.
많은 남새농들이 단 한 푼어치의 수입이라도 더 올리기 위하여 새벽 4시부터 장보러 다니느라 법석대는데 시장과 근 10킬로 떨어진 경옥매(59살)는 거의 매일 아침 7시 반이 넘어야 장마당에 도착하지만 그녀를 기다리던 손님들로 잠간 사이에 그의 채소가 와닥닥 팔린다.
그래서 장사꾼들이 “남도치 노친에게 꿀이라도 묻었는가?”며 부러워했다.
경옥매는 주머니 남새포장이든 상자남새포장이든 내용물의 품질이 겉과 속이 똑 같고 근도 확실하였다. 그러기에 남새를 사는 사람들이 남새포장을 헤쳐 볼 수도 없고 근을 달아 보지도 못했다.
경옥매는 혹시 믿음이 안 가서 기어코 저울에 달아보겠다는 손님들과는 “만약 근이 모자라면 모자라는 근량의 값을 곱절로 경옥매가 내고 근량이 넘으면 넘는 만큼 량의 값을 손님이 곱절로 내야 한다.”는 언약을 맺어야 하기에 손님들이 감히 검근을 못했다.
경옥매의 상업도덕 또한 사람들을 감복시켰다.
한번은 집에 와서 장부를 따져보니 남새 값을 50원을 더 받은 것을 발견하고 끝내 임자를 찾아서 더 받은 돈을 돌려주었다. 이에 돈을 더 준 것을 모르고 있던 젊은 여성이 과실까지 사가지고 그를 찾아와서 “내가 앞으로 잘 살면 꼭 보답해 드리겠습니다.”며 감사를 올렸단다.
이 몇 년래 경옥매네 량주가 장삿길에서 주은 돈 만원과
1000원을 주인을 찾아 준 미담이 사람들의 구전으로 되고 있단다.
고추농사도 다이어트다
김창하의 아들 김희성은 20여 년간의 과학영농으로 외국나들이 못지 않은 돈을 번다고 한다.
김희성은 “적지 않은 농민들은 실패가 두려워 남의 뒤를 따라서 농사를 짓지만 나는 실패를 보더라도 모험을 무릅쓰고 앞선 과학농사를 하기에 다른 집들보다 돈을 먼저 더 많이 벌수 있다”고 한다.
김희성의 과학농사비법은 “남새농사의 핵심기술은 식물의 광합작용을 잘 터득하여 규모화농사에 실용하는 것이다.”이다.
그에 따르면 핵심기술을 장악하기 위해 10년 이상을 탐구했고 또 시험 후 보급을 대면적 규모로 하였다.
어떤 때는 몇 만 원씩 손해를 보기도 했지만 일단 성공할 땐 노력은 곱절 절약하고 생산속도와 수입을 배 이상을 올렸다.
“사람의 노력으로 온도는 올릴 수 있으나 햇빛은 만들지 못합니다.”
그에 따르면 그의 남새농사의 노하우가 “햇빛을 충분히 활용해 식물의 광합작용을 과학적으로 이용하는 것.”으로 식물의 광합작용을 빌어 물, 비료 등 모든 영양가를 랑비 없이 열매를 결과하는 식물의 기관에만 공급 하는 것이다.
그가 터득해낸 고추 다이어트농사는 고추나무의 크기와 풍채는 원래의 반으로 줄었지만 달리는 고추개수는 전보다 곱절로 달렸다.
다이어트농사로 시장의 남새 값이 눅을 때는 고추가 적게 달리게 하여 인력과 물력을 절약하고 시장 값이 비쌀 때는 많이 달리게 하여 수입을 올렸다.
그의 고추밭은 4년이나 닭똥비료를 내지 않았지만 닭똥비료를 낸 밭들보다 고추대가 튼실했고 고추산량이 훨씬 높았다.
과학영농으로 그는 자기네보다 15일 먼저 고추모를 낸 집들과 첫 수확기일 같았다.
어느 날, 그가 안산촌의 한 녀성이 남보다 1원식 더 비싼 값으로 고추를 도매하는 것을 발견했다.
바로 이튿날 그는 그 녀성을 찾아가 고추종자 출처를 물었더니 감사하게도 고추종자 포장지를 주었다.
그는 이듬해에 그 종자를 인입해 3년간에 “저온에 강하고 맛이 매운”고추종자를 배육해냈다.
그리고 네 번째 해에 자기가 배육한 고추종자를 대면적에 보급 하였는데 연길, 왕청, 훈춘에서까지 찾아와 전부 도매해갔다.
“농사는 책대로만 해도 안됩니다. 많이 보고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며 작물과 대화하고 손으로 느끼면서 자기만의 농법을 부단히 창신해야 합니다.’
이는 그가 '머리농사법'으로 찾은 또 하나의 과학영농철학이다. 문화가 남새 농을 살찌웠다
김창하네 가정은 신문잡지가 오면 서로 빼앗는 '싸움'이 습관화 되었다.
한번은 필자가《길림신문》을 내놓자 김창하(84세)와 경옥매(67세)가 문턱을 사이 두고 '신문뺏기'를 벌였다.
이 가정의 신문독서열이 오죽했으면 다섯 살짜리 손자가 떼질을 쓰다가도 어른들이 신문을 보면 떼질을 멎는다고 한다.
김창하로인은 대부금을 맡아서라도 책을 사서 본다며 해마다 신문잡지 주문에만 4, 5백원을 투자, 몇 년 전에 한 마대나 되는 책을 도적을 맞힌 것이 생각만 해도 아깝단다.
그는 부지런히 읽고 생각하면서 <모살이와 보식이 필요 없는> 남새모내기법을 터득하였다고 자랑했다.
그는 남들이 '버리는 농사'를 주어서 남들과의 경쟁을 피하며 “남이 없으면 내가 있고 남이 많으면 나는 줄인다.”는 전략과 전 술을 신문잡지에서 배웠다고 한다.
“새해에 신문에서 다시 만납시다!”
이는 김창하 량주가 필자를 바래는 새해의 약속이다. 역시“신문이 없으면 못산다.”는 량주이다.
지금 김창하가 중국서 낳은 세 자식은 모두 중국공민으로 국적을 바꾸고 한국 나들이를 하고 있다.
필자는 김창하네 가족으로부터 사랑은 국적도 년령차도 없는 삶의 추구이자 일종의 모험이라는 것, 문화가 농사를 살찌운다는 철학적 도리를 심심히 터득하였다
이 시각 필자는 연변의 농업발전에 막강한 기여를 한 농업기술자 김창하, “나의 몸에는 중국인민의 피가 슴배여 있다며 탈중국을 포기한 인간맛이 풍기는 김창하, “신문잡지가 없이는 못산다”는 학습형 농민가족 김창하네가 무척 그립다.
/오기활 2024년 9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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