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31일 저녁 6시, 필자는 곡수ㅡ도문행 택시를 탔다. 60대 기사(한족)가 손전화로 한참 동안이나 누구와의 통화를 끝내고 나서 한심한 세상일에 원망을 표하였다.
인사말 얘기중 필자의 "…그렇다면 기사분이 곡수촌 사람인가?"는 물음에 자기는 한평생 곡수촌의 농민이란다.
지난 70ㅡ80년대에 필자가 도문시 홍광공사(지금의 향)기관에서 사업했던 인연으로 당년의 곡수촌(그때는 행정구역이 홍위대대, 홍위남새대대(한족대대), 곡수남새대대로 나뉘였음)사람들의 현황을 물어 보니… 자기 성이 주씨로 80년대 홍위남새대대 민병련장이라며 "지금까지도 그때 공사당위의 오기활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며 지난 일을 회포 하였다.
그야말로 인연이라 할가?
내가 바로 오기활이라고 답하니 기사는 놀라는 모습으로 필자를 쳐다 보더니 "그렇다면 손님이 30여 년 전에 참관 유람바람을 막아 달라는 글을 신문에 냈습니까?"며 반문했다.
지금부터35년 전의 일이다.
1982년 8월, 필자는 당년에 날 따라 세차게 불어 치는 참관유람바람을 제지 하고저 <<연변일보>>편집부에 "참관유람바람을 막아주시오"라는 제목으로 래신을 보냈더니 두 달 후인 10월 19일 조문판 <<연변일보>> 1면에 편집자의 말과 함께 필자의 편지를 실었다.
"참관유람바람을 막아주시오"가 신문에 발표되자 많은 독자들로부터 큰 반향을 일으켰다.
10월 24일, <<연변일보>>는 편자의 말로 주당위와 주인민정부에서 "전 주범위에서 근검절약, 간고분투 교양을 전개할 데 대한 통지"를 발부 했다는 소식과 함께 "참관유람바람을 견결히 막아버리자"는 "독자래신"전란으로 "우리 마음속의 말을 하였다", "가슴 아픈 일", "유람경비는 자부담을 해야 한다", "어디에서 앞장을 다툴 것인가?" 는 제목의 여러편의 기사와 함께 "신문의 비판에 근거하여 참관유람풍을 막을 대책 강구"라는 제목의 중공도문시위 판공실의 태도표시 글까지 실었다.
이날 택시기사는 그때 조문판신문을 읽지는 못하고도 사람들을 통해 알게 된 기억속의 사람을 생각에 만나니 정말 반갑다고, 백성을 위하는 일은 잊을 수 없다며 오늘 택시비를 절반만 (5원) 받겠다며 기뻐하였다.
필자는 택시기사의 "백성을 위하는 일은 잊을 수 없다"에서 "백성은 언제나 옳다"를 다시금 실감하면서 "기자는 사회의 병을 진맥하는 의사이다."의 사명을 명기, 또 명기하게 된다.
오기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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