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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내 조선족 여성들 혼인관 변화 기형적
기형적 혼인관, 민족사회발전에 부작용
(흑룡강신문=하얼빈) = 조선족 여성들의 혼인관 즉 배우자 선택이 특정된 시기에 따라 완연히 다르게 나오고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회고 할 때가 왔다고 본다.
필자는 중국에서 가장 특정된 정치운동 즉 문화대혁명 시기부터 청춘기에 들어서기 시작했기에 그 이후부터의 조선족 여성들의 배우자 선택에서의 경향성을 돌이켜 보면 웃지도 울지도 못할 유치함을 느끼게 된다.
문화대혁명이란 이 정치운동시기 제반 중국사회는 물론 조선족 젊은이들의 혼인관에 엄청난 기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당시 이른바 지주, 역사 반혁명, 위만간첩(당시 특무라 했음)혹은 위만경찰, 자본주의 길로 나가는 당권파, 현행 반혁명, 고린내 나는 아홉째(지식인) 등을 통 털어 "오류분자"라 했다. 즉 잡귀신이라고 딱지가 붙혀 졌는데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인간취급을 받지 못한 것은 물론 자녀들도 무릇 그 총명과 재질 여하를 불문하고 인간취급을 받지 못했다. 하여 이런 부류 가정의 아들은 아예 장가를 갈 엄두도 못냈고 또 빈하중농 집의 딸들은 그런 집을 왼눈으로도 보지 않았을 뿐만아니라 이른바 "잡귀신 가문"에 시집 갈려고도 하지 않는 경향성이 짙었다 .아울러 이른바 “잡귀신 가문”의 딸들도 시집이란 것은 엄두도 못냈다. 그러나 시집은 가야 할 것이어서 일부 처녀들은 한평생 장가가지 못한 한족에게 시집가는 경우도 많았다.
당시의 조선족 여성들의 혼인관은 대체로 가정배경 즉 무산계급 가정이냐, 자산계급 가정이냐 하는 이 정치적 시금석에 의해 결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문화대혁명이란 이 정치운동이 서서히 막을 내리면서 조선족 여성들이 가장 선호하는 대상은 바로 군인이었는데 군인을 배우자로 선택하는 것을 큰 영광으로 여겼다. 그 주요 배경은 군인은 무산계급정권 수호자라는 데서이고 또 일단 제대되면 국가적으로 직업 배치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첫째 순위고 버금으로는 노동자(당시는 공인이라 했음)였다. 일단 노동자에게 시집가는 것을 군인 외의 최고 선택으로 여기는 경향성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배경이 지난 뒤에 얼마 되지 않아 공농병대학생 모집에 이어 77년도부터 본격적인 대학생 모집이 있었는데 그 시기의 조선족여성들은 점차적으로 군인 혹은 노동자를 제쳐놓고 대학졸업생들에게 시집가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개혁개방을 맞이하면서 조선족 여성들에게 또 다른 혼인 가치관이 생겼다. 즉 돈을 많이 버는 총각 혹은 많이 벌수 있다고 판단되는 총각을 선택하는 경향성이 짙었다.
특히 중한수교가 이루어 지면서 수많은 조선족 여성들이 한국인을 선호하는 경향성이 매우 짙었는데 그 내면에는 한국인은 모두 잘 사는 사람으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마치 한국인에게 시집가면 길바닥에 달러가 깔려있어 허리아파 줏지 못할 정도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런 경향성으로 인해 조선족 여성들이 대거 이른바 위장결혼이라는 결혼을 선택해 한국행을 택하기에 서슴치 않았는데 이로 인해 오늘까지 각종 사건들이 비일비재로 터져 나오고 있는 것 또한 오늘의 현실이다.
한국행을 위해 남편과 이른바 가짜이혼(법률상에서는 사실상 이혼)이 조선족사회에서 성행했고 그에 따라 가정이 파탄되고 또 자식의 미래가 암담한 등 불안정 요소가 오늘날까지 대두되고 있다.
물론 이는 부동한 역사시기에 있어서의 경향성이지 결코 모든 조선족여성들의 사고방식은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싶다.
이런 조선족혼인 경향성을 결코 나무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왜냐 하면 역사가 이렇게 조선족 여성들의 혼인관에 먹구름을 던져 줬기 때문이다.
조선족 여성들의 혼인관 경향성을 세심하게 관찰하면 궁극적으로 이런 결론을 내리고 싶다. 즉 그젯날 계획경제시대에서 자란 조선족 여성들은 경제적 면역력과 성 면역력이 결핍하다는 것이다.
사랑은 아름답다. 이런 사랑이 경제적 가치관과 성 가치관의 혼돈으로 기형적으로 나간다면 과연 조선족사회의 건전한 가정관이 어떻게, 또 고유의 민족전통이 어떻게 세세대대로 이어나가겠는가? 심히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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