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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전통민족악기 저대 그리고 전승인 리금호
2021년 04월 23일 08시 12분  조회:846  추천:0  작성자: 예술세계
     조선족 전통민족악기 저대 그리고 전승인 리금호
     □ 리아

     조선족 전통민족악기라고 하면 흔히 가야금이나 해금, 퉁소 등이 제일 먼저 떠오르게 된다. 소수민족중에서 조선족이 보유하고 있는 민족악기가 가장 많다지만 대표적인 몇가지 악기를 제외하면 많이 생소하게만 와닿는다. 최근 몇년래 전통민족악기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데 그중 성급 무형문화유산에 등록된 저대(大笒, 대금이라고도 불림)라는 악기가 주목할 만하다. 이는 그 전승인인 리금호의 저대에 대한 애정과 갈라놓을 수 없다. 

  
 
    어린시절, 리금호는 악기연주에 능했던 아버지의 영향하에 희미하게나마 예술가의 꿈을 꾸게 되였다. 특히 손풍금을 연주하는 아버지가 멋져보여 어린 나이에 손풍금연주가로 되고 싶은 꿈을 가졌지만 당시 가정형편에 손풍금을 배운다는 건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이 막연하였다. 쪼들리는 살림 앞에서 아버지는 눈물을 머금고 20전짜리 아동용 피리를 사서 어린 아들의 손에 쥐여줄 수밖에 없었다. 바라던 손풍금은 아니더라도 피리에서 흘러나오는 선률은 그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다보니 그는 혼자 장난감 삼아 피리를 불군 하였다. 어린아이의 한낱 단순한 놀이처럼 보였던 이 과정이 될성부를 나무의 떡잎이 자라나는 순간임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녕안현조선족중학교(현재 녕안시조선족중학교)에 재학시, 학교 음악행사에서 학생들이 장기자랑하는 자리가 생기자 리금호는 피리를 들고 무대에 올랐다.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고 장난감 같은 피리로 한 연주는 엄청난 박수갈채를 받았고 음악선생님은 바로 그를 학교 악대에 받아들였다. 음악선생님은 그에게 플류트를 쥐여주며 전문적으로 배울 것을 건의하였다. 그 때로부터 막연하기만 했던 음악꿈이 또렷한 초점으로 자리 잡게 되였다. 
    18살 되던 해, 도문시가무단(현 도문시문화관) 악대가 마을에 위문공연을 왔는데 구경하던 리금호는 한 악사가 플류트와 아주 흡사한 악기를 연주하는 것을 보게 되였다. 자신이 배우고 있는 플류트와 비슷했지만 서양의 고급스러운 느낌이 묻어나는 플류트의 선률과 달리 동방 특히 우리 민족의 정서가 담겨있는 듯한 선률에 그는 바로 매료되였고 큰 호기심을 품게 되였다. 그 악사와 안면을 트고 이야기도 나누고 싶었는데 악대는 공연이 끝나자마자 다음 공연장소로 옮길 차비를 하고 있었다. 리금호는 악대 성원들이 악기나 무대설비를 옮기는 작업을 거들어주면서 그 악사와 가까워지려고 의식적으로 다가갔다. 악사의 이름은 김두일, 그가 연주하던 악기는 조선족 전통민족악기인 저대였다. 조선족의 전통악기란 말에 저대의 매력이 더한층 크게 느껴졌다. 리금호는 기회를 놓칠세라 김두일선생에게 저대를 배우고 싶은 의도를 밝히고 제자로 받아달라고 간청했다. 젊은이의 뜨거운 열정에 감복된 김두일선생은 흔쾌히 승낙했다. 그렇게 리금호는 첫 계몽스승의 밑에서 후날 그의 음악인생의 동반자가 될 저대를 배우게 되였다. 
    리금호에게 저대를 가르치면서 김두일선생은 그의 악기 연주소질을 아주 높게 보고 그의 음악인생이 좀더 광활한 곳에서 펼쳐지기를 바랐다. 음악에 대한 전문지식도 필요하다고 판단한 김두일선생은 리금호가 연변예술학교에 가서 전문적으로 배우도록 적극 부추겨주었다. 스승의 지지하에 리금호는 연변예술학교에서 2년 동안 연수과정을 거치며 음악지식을 습득하였고 그 곳에서 그의 두번째 스승인 신용춘선생을 만나게 되였다. 뛰여난 연주가인 신용춘선생한테서 3년 가까이 저대연주를 배우고 난 리금호는 그 연주실력을 인정 받아 1985년에 안도현문공단 저대연주자로 되였다. 
    그래도 리금호는 여전히 자신의 실력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이 무렵, 당시 연변가무단 악대 대장이였던 김동설선생의 저대 연주실력이 대단하다는 소문을 듣고 그의 문하에서 실력을 한층 다지기로 마음 먹었다. 그렇더라도 안도현문공단 저대연주자 자리를 놓자니 너무 아쉬웠다. 고민 끝에 두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 뒤로 그는 안도와 연길을 오가면서 저대연주자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한편 배움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리금호의 저대 연주실력은 나날이 향상해갔고 1993년에 연변가무단의 저대연주자 자리를 얻게 되였으며 2012년에는 길림성문화청에서 주최한 제5회 길림성중청년배우평의콩쿠르에서 민족관현악 중년조 2등상을 수상하는 등 여러 성과들을 수확하게 되였다. 그럼에도 그는 배움의 길에서의 질주를 멈추지 않았다. 이토록 저대에 쏟아부은 리금호의 수많은 피땀은 2015년, 성급 무형문화유산 민족악기 저대의 대표전승인이란 영예로 꽃펴날 수 있게 되였다. 
    21세기에 들어서 많은 조선족 전통민족악기가 사회 각계층의 관심과 중시를 받으면서 주급, 성급, 국가급 무형문화유산 명부에 이름을 올리게 되였다. 그중 저대가 2009년, 2012년에 선후로 주급, 성급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였다. 영광스럽게 저대전승인으로 된 리금호는 드높은 책임감과 사명감을 지니고 저대의 전승, 보급 작업에 심혈을 쏟아부었다. 

  
 
    2012년, 연길시 흥안소학교가 ‘연길시조선족전통악기기지학교’로 지정되여 리금호는 전교 학생들을 상대로 전통고음저대(소금)를 가르쳤다. 그리고   연길시조선족무형문화유산보호중심의 단소연주자 렴영식과 함께 학교 악대의 70여명 학생들을 맡아 가르쳤는데 리금호는 저대, 중음저대, 고음저대를, 렴영식은 단소와 퉁소를 가르쳤다. 그는 공연활동이 많을 때면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삐 보냈지만 학생들을 가르치러 가는 길이라면 언제나 열정으로 부풀어있었다. 학교교문에 들어서면 “저대선생님께서 오셨다!” 하며 저 멀리서부터 달려와 주위에 옹기종기 몰려드는 아이들은 그의 활력소가 되기에 충분했다. 생전 처음 보는 악기라며 저대를 조심스레 만져보던 아이가 어느덧 무대공연에 나설 정도로 실력이 쑥쑥 향상되여 멋들어진 곡을 뽑아내는 것을 볼 때마다 그는 안 먹어도 배 부르다는 즐거움이라는 게 어떠한 건지 잘 알 것 같았다. 
    너무나 보람찬 일을 하면서도 리금호는 가끔 현실 앞에서 막막함을 느낄 때가 있었다. 저대는 다른 민족악기에 비해 보급과 후대 양성 과정에 많은 애로사항이 놓여있어서이다. 우선 저대는 배움에서 난이도가 아주 높은 악기다. 숙련되게 연주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려면 많은 시간과 품을 들여야 하니 배우려는 사람들이 드물다. 또한 천명 동시 연주로 기네스기록을 세운 가야금, 국가급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퉁소 등 명성 높은 쟁쟁한 악기들에 비해 대중성이나 사회적 인지도에서 다소 밀리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과거 악대에서 홀로 저대 연주를 담당하고 있던 시절에 비하면 현재 저대가 기대 이상으로 널리 보급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리금호는 자신한다. 아직 갈길이 멀 뿐이지 가야 할 방향은 명확하다고. 앞으로 보다 더 많은 어린 후대들에게 저대를 전수하고 또 저대가 국가급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될 수 있도록 노력을 경주한다면 멀지 않아 저대도 가야금, 해금 못지 않게 조선족 대표악기로 자리매김하게 되리라고. 
 
 
 
    이제 몇년 뒤면 퇴직할 나이지만 저대를 보급, 전승하는 일에서 리금호의 열정은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현재 연길시조선족무형문화유산보호중심에 있는 동년배 조선족 전통악기 연주자들과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 늘 토론한다. 그리고 다양한 전통악기를 체험할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학원을 꾸려 전문적으로 후대양성에 뛰여들 계획을 세우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어쩔 수 없이 2020년은 공백으로 되였지만 해마다 책임지고 조직하는 ‘무형문화의 메아리’ 음악연주회도 꾸준히 이어나갈 계획이다. 
    갓 저대를 손에 쥐게 된 18살 때만 해도 리금호는 이 악기를 반평생 넘게 손에서 놓지 않게 될 줄은, 또 성급 무형문화유산 전승인이란 자리까지 오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스스로 기술을 배우는 것에 만족하던 데로부터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저대를 알리고 전승, 보급시키는 과정에 그는 저대에 대한 사랑이 더한층 숭고한 경지로 승화되였음을 페부로 느끼고 있다. 훌륭한 저대연주가로 되고 싶었던 젊은 시절의 꿈을 이루고 나니 그 뒤에는 민족악기—저대의 전승과 보급이라는 더 큰 그림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자신의 인생에서 너무 큰 한자리를 차지해버린 저대를 향한 리금호의 발걸음은 오늘도 여전히 힘차고 씩씩하다.  
           
《예술세계》 2021년 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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