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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욕구와 아침이슬 같은 우리의 실존의 모순, “100세도 못사는 인생에 1000년을 우려한다‘人生不满百,常怀千年忧’”고, 중국 고대문학사의 고시 19수 첫 수의 시구, “인생은 아침이슬과 같다‘人生譬如朝露’”고 한다, 조조의 유명한 시구—백년도 못사는 인생, 아침 이슬 같은 인생… 결국 죽는다는 실존은 우리를 인생허무에 빠뜨리기에 족하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그래도 항상 영생, 영생에 가있다—인간의 비원. 그래서 생겨나는것이 영생콤플렉스.
우리는 평시에 죽음을 떠 올리기조차 싫고 주검을 보기조차 싫다. 죽음이나 주검을 떠올리거나 보게 되는 병원이나 화장터 가기도 꺼림직하다. 이것들은 우리의 영생콤플렉스만 자극하기때문이다. 우리는 제 명을 제대로 못살고 죽은 요절을 가장 불쌍히 여긴다. 그런데 인간은 리성적인 존재—똑똑하다. 그래서 안다—사실 영생하기 힘들다는것을. 그래서 차선책으로 불로장생을 추구한다. 불로초, 웅담—보신약 열심히 집어먹기다. 진시황이 서복더러 3000 선남선녀를 데리고 동해 삼선산에 가 불로초를 구해오게 한 이야기 아직 삼삼하다. 십장생이 부럽다. 우리는 십장생에 주술을 걸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위대한… 만세!’, ‘위대한… 영원하라!’”라고 주술을 외운다, 건다. 우리는 현실생명의 연장선상에서 실제로 미이라를 만들기도 한다. 고대 애급 왕들의 미이라, 현대 위대한분들의 미이라…
그런데 현실은 “십중팔구는 뜻대로 되지 않는다‘十有八九不如意’”, 영생은 그림의 떡—쌓여가는것이 영생콤플렉스. 이로부터 종교의 존재리유가 생겨난다. 종교는 우리의 영생콤플렉스를 발산시켜준다. 우리의 삶은 현세로 끝나는것이 아니다. 이승과 저승, 영원한 불교의 극락과 기독교의 천당이 우리를 기다리지 않던가. 그런데 저승—극락이요, 천당이요 하는 것들이 허무맹랑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그래서인지 도교에서는 아예 현세적인 영생을 만들어낸다. 신선이 바로 영생적인 존재. 신선은 현세에서 수양과 수련을 하거나령단묘약을 고아먹으면 된단다. 그래서 더 매달리고싶은것이 신선.
사실 우리가 현실에서 잘 먹고 잘 입고 좋은 집에서 잘 살려는것도 영생콤플렉스를 달래는데 있다. 그래 영양가 있는 음식, 웰빙식단, 건강식품에 항상 신경이 쓰이지 않던가. 한국 KBS TV방송국의 “생로병사의 비밀”프로는 영원히 인기만점. 우리가 열심히 등산을 하고 헬스클럽에 다니며 건강을 챙기는것도 사실 영생콤플렉스를 기저에 깔고있다.
그럼 어떻게 이 영생콤플렉스를 발산하지? 우리의 선인들은 “공을 세워 나라와 가정의 태평을 도모한다‘立功—修 身齐家治国平天下’”적인 “풍공립업‘丰功伟业’”, “덕을 쌓고 의리를 취한다‘立德—舍生取义’”적인 “뭇사람들의 본보기가 되는 ‘为人师表,立言—著作等身’”적인 저서로 영생콤플렉스를 날린다. 바꾸어 말하면 “립공, 립덕, 립언 ‘立功, 立德, 立言’”적인 대상화로 영생을 추구한다. 미술, 조각, 사진… 등 문학예술도 결국 따져보면 내 삶의 흔적을 남김으로써 영생콤플렉스를 발산하는것에 다름 아니다.
몸과 육체는 가도 정신과 령혼은 영원히 남는 그런 경지를 창출해야 한다. 결국 정신적인 영생, 이른바 “구비‘口碑’” 즉 구구전승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는 기념비를 세워야 한다. 초유록, 뢰봉, 장지신… 같이 되여보는거다!
(연변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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