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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이 지구에 갓 왔을 때 지지리도 못 났다. 한 없이 가난했다. 전 인류적인 가난콤플렉스는 이로부터 쌓였다. 가난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채집문화, 수렵문화, 유목문화, 농업문화, 공업문화... 인간은 줄기차게 가난정복의 문화를 개발해왔다. 사실 종교라는 것도, 욕망을 죽이는 문화로서 이 가난콤플렉스를 떨쳐버리는 다른 한 방편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오늘날 가난콤플렉스를 상당히 떨쳐버린 듯하다. 그러나 사실 가난의 문제, 가난콤플렉스는 여전히 남아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무의식의 문제로 남아있다. 흉년 세월에 공것 먹다가 배 터져 죽었다는 이야기, 지금 먹을 것이 흔한 세월이건만 공것을 먹을 때면 나도 모르게 많이 먹게 되는 것, 못 다 먹으면서도 버젖하게 차려야만이 직성이 풀리는 것, 뷔페에 가면 모조건 많이 먹기... 이것이 우리 가난콤플렉스의 거지근성 자화상 百態.
가난콤플렉스는 인간의 허욕을 기껏 자극하고 인간을 아이러니에 빠뜨린다. 모택동은 일거에 사회주의혁명을 하여 가난문제를 해결한듯하다. 모택동시대 사회주의는 너나나나 피장파장 엇비슷하게 고만고만 살았었다. 餓不死, 撑不死의 평균주의, 가난콤플렉스가 그리 싹트지 않는다. 그러나 개혁개방 후 ‘讓一部分人先富起來’의 등소평시대 사회주의, 가난콤플랙스가 살아난다. ‘先富起來’한 ‘一部分人’, 우리의 가난콤플렉스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우리는 선망 내지는 질투의 눈길로 그 ‘一部分人’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 ‘一部分人’을 따라 잡기에 아글타글하였다. 요행 따라잡았다싶은데 마음이 개운하지 않다. 우리보다 잘 사는 또 다른 ‘一部分人’이 눈에 띈다. 그래서 또 아글타글. 요행 따라잡았다싶은데 또 다른 ‘一部分人’... 그래서 결과적으로 우리는 삶의 질보다는 양에 엎어져 저 사람 수입이 얼마요, 저 나라 GNP, GDP 얼마요 하며 수자만 따지는 무깍지가 되고 말았다. 우리는 현재 바로 이 상대적 가난콤플렉스라는 현대적 질병에 빠져 다람쥐 채바퀴 돌듯 돈을 좇아 돌고 돈다. 그래서 먹고 살만 하건만 우리는 너무 피곤하다.
가난콤플렉스는 과대망상증의 과시욕에 놀아나게 한다. 한국은 지난세기 중반까지도 눈물젖은 보릿고개에 잠겨 있었다. 보편적인 가난콤플렉스가 팽배했다. 그러다가 ‘우리도 하면 된다’는 민족적 결집점에 신바람을 피워 유럽인들이 몇 백 년 간 한 근대화를 30여년 만에 해제껴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 가난콤플렉스를 떨쳐버린다. 이로부터 한국사람들에게 한국이 세상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로 된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하는 듯도 하다. 그래서 이런 해프닝도 벌어지는 줄로 안다. 필자가 1993년 한국에 유학갔을 때다. 하루는 학교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한국 국내생 하나가 나보고 한다는 소리가 중국에도 겨울에 오이를 먹을 수 있어요였다. 마침 그날 식사메뉴에 오이채가 나와 있는지라 順手牽羊식으로 물어온다. 이런 겨울철에 중국에서는 오이를 먹을 수 없겠지하는 소리다. 박사생 꼬라지치고는 너무 수준이하의 물음이다. 사실 그때 중국에서도 오이쯤은 겨울 음식메뉴로 얼마든지 나왔으니깐. 그래서 내가 대답한다는 소리가 역시 박사생치고는 너무 수준이하의 소리-중국에서는 오이가 썩어나 돼지들이 먹고 있다고. 한국 얘기가 나온 김에 한 마디 더-강남 졸부이야기. 서울의 강남은 원래 촌구석이란다. 그런데 개발붐으로 땅값이 천정부지로 뛰어오르며 가난콤플렉스에 쌓여있던 ‘촌놈’들이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되었단다. 그래서 이른바 졸부양산. 하이칼라 양복에 삐까삐까 구두에 빈둥빈둥 무조건 거들먹거리기...
사실 졸부는 한국만의 얘기가 아니고 중국에도 수두룩했었다. 어쩌면 현재진행형으로 지금도 양산되고 있다. 개혁개방 초기 가난콤플렉스에 풀 죽어 있던 ‘촌놈’이 어쩌다가 하루아침에 ‘萬元戶’가 되면서 머리가 휙 돈다. 제정신이 아니다. 돈 많음을 자랑하고 싶다. 그래서 빌딩 꼭대기에 올라가서 돈을 뿌리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누가 돈 많은가하는 시합을 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니가 한 장 찢으면 나도 한 장 찢고... 꼴볼견! 사실 나도 이 가난콤플렉스의 과시욕에 놀아난 적이 있다. 우리가 대학교에 다닐 때에는 중국의 개혁개방 초기. 절대적인 물질적 빈곤에 가난콤플렉스는 우리를 감싸고 돌았다. 나는 그때까지도 국방색 군복옷을 많이 입었다. 대학교 3-4학년 졸업 학년이 가까이 오면서 우리 반에는 가물에 콩나듯 양복쟁이들이 한둘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 그 양복이 얼마나 입고 싶었는지 몰랐다. 그래 내가 대학교를 졸업해서였다. 월급을 받기 시작했다. 나는 월급을 받는대로 눈을 찔끔 감고 고급양복 한 벌을 샀다. 그때 별로 브랜드의식도 없건만 브랜드의식도 살려 브랜드로 골라 잡았다. 그 브랜드라는 것이 알고도 모를 영어문자 몇 개를 박은 네모난 천쪼각으로 초라하게 오른쪽 소매 끝부분에 붙어있었다. 나는 양복을 입을 때는 항상 이 브랜드를 유표하게 보이느라고 오른팔에 신경을 많이 썼다. 사람들 눈에 잘 띠이도록 나도 모르게 항상 오른 팔을 앞으로 가져오곤 했다. 사실 그때 진짜 신사들은 이런 브랜드를 떼고 입는다던데... 개혁개방 초기 우리 조선족은 요란스럽게 설친 것 같은데 별로 잘 산 것 같지 않다. 개혁개방의 막차를 탄 듯한 아이러니. 漢族들은 잘 사는데, 우리는... 가난콤플렉스가 엄습한다. 그러다가 한국의 문이 열리면서 노다지판을 만난 듯 너도나도 한국행. 돈을 많이 번 것 같다. 가난콤플렉스를 날릴 것 같다. 그래서 모두들 ‘금의환향’에 흔전만전 돈 뿌리기. 현재 진행형이라니 더 없이 서글퍼난다.
가난콤플렉스는 변태의 온상이기도 하다. 우리 아버지는 한평생 가난 속에서 살아오신 분이다. 그 어려운 세월에 6형제를 키우자니 잘 살 수 있었겠는가? 그래도 우리 아버지는 한평생 잘 살기 위해 노력해온 분이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는 가난콤플렉스가 몸에 배인 분이다. 우리 6형제는 그래도 껄껄하게 잘 자라 현재 살만하다. 그런 만큼 우리 아버지도 잘 모신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께 소비돈도 잘 드리고 먹을 것, 입을 것도 잘 해드린다.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이 모든 것을 잘 챙겨만 둔다. 소비할 줄 모른다. 소비가 일종 사치 같고 죄악 같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는 어린 손자손녀들이 흘린 밥알들을 밥그릇의 밥알보다 더 맛있게 드신다. 가난콤플렉스가 우리 아버지를 ‘자린고비’로 만든 줄로 안다. 사실 우리 아버지만의 얘기가 아니고 어렵게 자란 사람이 성공하여 경제적 부를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변태적인 수전노가 되는 것도 대개 무의식적으로 굳어진 이 가난콤플렉스의 작간인 줄로 안다.
과대망상증의 과시욕과 변태적인 ‘자린고비’ 내지 수전노, 가난콤플렉스의 아이러니한 두 양상-우리에게 무의식화되어 있다. 자기도 모르게 발동된다. 여기에 절대적 빈곤이나 상대적 빈곤이 아직도 우리의 가난콤플렉스를 안받침해주고 있다. 그만큼 떨쳐버리기 힘들다는 말이 되겠다. 그러나 가난콤플렉스는 떨쳐버려야 한다. 그래야 정녕 ‘촌놈’티를 벗고 멋진 신사가 될 수 있다. 삶의 양보다는 질을 추구하고, 허욕에 들뜨기보다는 내실을 기하고, 적재적소의 소비를 할 줄 아는 삶의 자세를 굳혀야 한다. 그리고 適可而止, 知足者常樂의 道적인 경지도 추구해봄직하다.
2009. 설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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