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우스훈하 강반의 영원한 기념비-안순복
조글로미디어(ZOGLO) 2021년5월27일 09시33분    조회:238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중화민족 대가정의 일원으로 조선족은 중국공산당의 정확한 지도하에 항일전쟁, 해방전쟁, 항미원조전쟁을 거치며 초기 중국공산당원들인 한락연, 양림, 리홍광, 리복림, 마덕산, 배치운, 서광해 등을 필두로 수많은 렬사들이 귀중한 생명을 바쳤다. 사회주의 건설시기에도 주덕해, 조남기, 리민, 문정일, 리영태, 김인섭, 최채 등 우수한 당원간부들을 배출했으며 현시기에도 습근평 새시대 중국특색사회주의사상의 지도하에 수많은 조선족 당원간부들이 자신의 일터에서 혼신의 노력을 다하며 기여를 하고 있다. 본지는 창당 100주년을 맞이하여 초심을 잊지않고 사명을 명기하자는 취지에서 조선족당원간부들의 선진사적을 조명하는 기획보도 '당을 따라 달려온 영광의 세월'을 펴낸다. 이번 기획보도를 위해 밀산시에서 배출한 우수한 조선족당원간부들의 사적을 집필하여 보내준 밀산시 맹고군 전 부시장, 밀산시조선족문화관 피금련 당지부서기에게 뜨거운 감사를 드리면서 독자여러분의 지지와 성원을 기대한다.
                                                                                    -편집자
 
 
'8녀투강'조선족렬사 안순복 
 
안순복은 1915년 목릉현 목릉진 신안툰의 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그녀는 13세부터 항일구국활동에 참가하기 시작하였는데 1934년에는 밀산항일구국 유격군에 참가하여 밀영에서 피복공장 공장장으로 활약하였고 그해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4년 봄에 세워진 항일련군제4군 피복공장은 방정현 대라밀진 가량자일대에 있었는데 주로 4군의 군복, 군모, 탄띠, 군기, 탠트(帐篷) 등 을 만들었다. 하지만 가장 큰 곤란은 원료를 구하기가 어려운 문제였다. 19세밖에 안되는 안순복은 공장장임무를 맡은후 갖은 방법을 다해 생산 물자를 구해들였는데 하나는 주동적으로 전방부대와 련계하여 부대가 도시 나 적들의 거점을 공략할때 로획한 포목들을 적시적으로 후방기지의 련락 점에 보내오도록 하는것이였고 다른 하나는 도회지 우리 지하당의 관계를 통해 비밀련락점을 건립하여 지정된 점포에서 비밀리에 포목을 구입하는 것이며 항일구국회나 부녀회 등 조직을 통해 구입하기도 했다. 구입한 포목들의 색갈도 오가잡색이였으므로 흰천같은것은 산에서 나무껍질을 달여 염색한후 발로 밟거나 판자로 눌러 주름을 편후 사용하였다. 재봉침의 고장도 빈번했다. 한번은 기계가 고장났으나 기술원이 없었으므로 안순복은 조급한 나머지 자기 손으로 재봉침을 해체키로 결심했다. 그녀는 조심스레 부속품들을 하나하나 뜯어내면서 선후순서대로 번호를 매겼는데 결국 고장원인은 장기간 실밥들을 정리하지 않고 기름을 치지 않아 실이 자주 끊기였던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공장의 기술원역도 담당했다. 
 
적들의 봉쇄와 토벌로 피복공장의 업무조건은 매우 간고했다. 고정적인 지점이 없이 경상적으로 이동했고 상병원들이 들어오면 호리도 맡아해야 했다. 환절기에는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며칠 밤이고 새워야 했다. 졸음에 견디기 어려울때마다 자매들은 바늘로 자기의 팔을 찌르거나 개울가에 나가 찬물로 머리를 적신후 또다시 작업에 달라붙었다.
 
1934년 10월, 항일구국유격군은 동북항일동맹 제4군으로 개편되였다. 일본괴뢰군의 동기소탕에 대처하기 위해 부대는 부득불 양강북골밀영으로 전략적인 전이를 해야 했다. 당시 밀영에는 8명의 조선인 어린애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안순복의 한살밖에 안되는 딸도 있었다. 군부에서는 사정상 애들을 백성들에게 입양시킬것을 결정했다. 어린애들의 부모들은 처음에는 물론 애들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애들을 떠나보내려 하지 않았다. 안순복이 선참으로 눈물을 삼키며 애를 내놓자 다른 자매들도 모두 그녀를 따라 조직의 수요에 복종했다.
 
1938년 여름, 일본관동군은 송화강하류에서 “삼강대토벌”을 벌렸다. 극히 위험한 상황에 처한 항일련군은 적들의 토벌과 경제봉쇄를 분쇄하고 하동(哈东), 남만의 항일부대와의 련계통로를 개척하기 위해 제4, 5군의 주력으로 서정(西征)을 결정했다. 서정부대는 보청에서 출발해 목단강하류의 조령진에 집중했다. 그번 서정에 참가한 대오중에 적지 않은 녀전사들이 있었는데 안순복도 그중의 한사람이 였다. 안순복은 전투시에는 전투원으로, 적의 거점을 공략할때는 선전원으로, 숙영시에는 복무원으로 활약했다. 안순복이 속한 서정부대는 루산진공략전투에서 승리했으며 4군의 녀전사들은 5군녀전사들과 합병되여 5군을 따라 행동하게 되였다.
 
1938년 8월, 5군서정부대는 오상현경내에 진입했는데 오상산구에서 활동중 목표가 폭로되여 적들의 수차의 포위공격을 당해 엄중한 손실을 입었다. 4군 녀전사들은 5군과 합병후 1사를 따라 목단강연안에 돌아와 정돈할때 겨우 8명밖에 남지 않았다. 안순복은 그렇듯 가렬처절한 행군과 격전중에서도 시종 완강한 의지와 혁명적락관주의정신을 나타냈으며 준엄한 고험을 겪어냈다.
 
안순복의 남편 박덕산은 동북항일련군 제4군 4사정치부주임이였다. 간고한 전쟁의 나날에 그들 부부는 서로 떨어져 싸우다보니 웬만해서는 만날 수가 없었다. 몇달간 종무소식일 때도 많았다. 1938년 여름, 박덕산은 부대를 따라 의란현경내에서 대합탕(大哈塘)전투에 참가했는데 전투는 매우 치렬했다. 부대는 임무를 수행한후 원계획대로 철퇴하기로 했다. 박덕산은 정치부주임으로서 안전하게 후퇴할수 있었으나 주동적으로 부대의 엄호임 무를 맡았다. 적들을 저격하는 전투중에서 박덕산은 불행하게 적탄에 맞아 장렬히 희생되였다.
 
1938년 10월초, 안순복은 부녀퇀의 7명 전사들과 함께 불탑밀(佛塔密) 북에서 두도하자를 건너 해림의 반라자에서 적위군산림무장경찰채벌대의 3척의 나무배를 로획하여 목단강을 건넜다. 그들은 배를 버리고 산길 로 망천령을 넘어 지금의 림구현의 동유수하자북골에 진입한후 또다시 몇개의 대령을 넘어 조령의 삼가자촌을 돌아 우스훈하(乌斯浑河)가에 이 르렀다. 저녁, 항일련군 남전사들은 강상류에 숙영하고 8명의 녀전사들은 하류에 숙영했다. 부대는 하루저녁 휴식한후, 이튿날 목단강입구로부터 7~8리 떨어진 나루터에서 도강한후 길을 돌아 극상극밀영의 5군 군부를 찾아가려 했다.
 
동북의 늦가을은 추위가 만만치 않았다. 추위를 극복하기 위해 100여 명 대오는 우스훈하강안을 따라 10개의 모닥불을 지폈다. 장거리행군과 전투에 지친 전사들은 모닥불가에 등을 맞대고 앉아 깊은 잠에 빠져들어갔 다. 하지만 전사들의 몸을 녹여주는 그 모닥불이 전사들에게 재난을 가져 다 줄 줄이야?! 양자골에 있던 특무 갈해록이 불을 발견하고 즉시 당지 일본수비대에 보고했다. 조령지구에 주재해 있던 일본군은 1400여명의 병력 을 집중해 밤을 타 서정군대오의 숙영지를  포위했다.
 
이튿날 아침, 대오는 강을 건널 준비를 했다. 당시 우스훈하는 물이 크게 불어 원래의 하상이 넓어지고 물살이 급했으며 원래의 나루터도 물에 잠겨 버렸 다. 부대는 의외를 방지하기 위해 물에 익숙한 김세봉참모로 하여금 안순 복 등 8명 녀전사들을 데리고 먼저 강을 건너게 했다. 강변에 도착하여 김 참모는 먼저 물에 들어가 물깊이를 시탐하면서 대안에 헤염쳐 건너갔다. 하지만 그때 갑자기 주위에서 총성이 요란스레 일어났다. 적들이 진공을 시작한 것이였다. 적아력량이 너무나 현저한 뜻밖의 조우전에 대처해 부대 지휘원은 즉시 대부대를 조직하여 반격을 가하는 한편 대오를 지휘하여 자목강산(柞木岗山)으로 철퇴했다.
 
강을 건너지 못하고 김참모와 떨어진 8명 녀전사들은 즉시 전투에 뛰여들 었다. 그들은 3조로 나뉘여 각각 버들방천뒤에 은페했다. 지도원 랭운은 대부대가 산으로 철퇴하려는 의도를 알아차리고 자매들에게 사격명령을 내 려 적들의 화력을 자기들쪽으로 분산시키려 했다. 
 
안순복은 제일 먼저 지도원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들은 화력을 집중해 일제히 적들에게 사격을 가하였다. 적들은 뒤에서 불의의 공격을 당하 자 즉시 부분 병력을 조직해 총뿌리를 돌려 녀전사들을 향해 덮쳤다. 대 부대는 그틈에 포위를 돌파했다. 하지만 녀전사들이 강변에 포위된것을 알자 즉시 되돌아 공격하여 그들을 구하려 했으나 적들의 화력이 이미 산 구를 봉쇄하여 사상자만 늘어났다. 대부대는 유생력량을 보존하기 위해 하 는수없이 밀림으로 철퇴했다.
 
적들은 대부대를 더 쫓을수 없게 되자 병력을 집중하여 녀전사들을 사로잡으려 시도했다. 녀전사들은 적들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수류 탄으로 불벼락을 안겼다.
 
드디어 탄알이 떨어졌고 수류탄도 마직막 3개가 남았다. 정면과 좌우 량면은 모두 적들이고 뒤에는 사품치는 강물이였다. 그들은 모두 헤염칠줄 몰랐고 이미 2명 전사는 부상을 입었다. 지도원 랭운과 안순복은 “우리는 공산당원이며 항일련군 전사들이다. 물에 빠져 죽을지언정 포로는 될수 없 다. 조국의 해방사업을 위해 싸우다 죽는것은 우리의 최대의 영광이다”고 자매들을 격려하면서 “사로잡아라! 사로잡아라!”고 고아대며 달려드는 적들에게 마지막 3개의 수류탄을 날린후, 의연히 강물에 뛰여들었다. 그렇게 꽃같은 나젊은 녀전사들은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이틀후 안순복의 유체는 순난지에서 2리 떨어진 목단강과 합수하는 우스훈하하구에서 발견됐다. 그때 그의 나이는 겨우 23세였다. 안순복은   “8녀투강” 영웅중의 일원으로 우리 민족의 자랑이다. 그녀의 혁명정신과 숭고한 민족절개는 일월과 함께 영원히 청사에 남아 길이 빛날것이다.
 
맹고군 저, 피금련 역/흑룡강신문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18
  • 1966년 이른 봄 어느날, 도문시 외사과의 주동현 과장과 시인사국책임자로 기억되는 남현후씨가 나를 찾아왔다. 그때 나는 왕청현 석현진 수남대대 7대(달라자) 정치대장과 공청단 지부서기를 담임했었다.     손님들이 나를 찾아 온 사연이다.   ㅡ 우리가 달라자에 훌륭한 농업기술원을 소개 할터니...
  • 2022-05-29
  • 이는 20세기 50년대말 혹은 60년대초 음력설에 연길시에서 찍은 귀중한 사진이다. 이 사진 속 중산복 차림에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넘긴 남성은 중공연변조선족자치주 제1임 주당위 서기이며 주장인 주덕해(본명: 오기섭)이고 옆에는 그의 부인과 네 자녀이다.   오영채(뒤줄 중간), 오양청(앞줄 왼쪽 첫번째)   ...
  • 2022-05-26
  • 한진(韩震, 1900-1936)은 1900년에 서울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태여났다. 중학시절에 진보단체인 ‘반일애국기독교청년회’에 참가했고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 1928년에 반일투쟁에 참가하기 위하여 가족의 반대도 무릅쓰고 길림성 반석현에 와서 반일단체를 찾았다. 그는 반석현의 초석산소학교에서 교사로...
  • 2022-02-18
  • 리송파(李松波, 1904-1935)는 일명 최송파라고도 하며 1904년에 반석현 역마박자(驿马泊子)의 한 빈곤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1930년 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그해 8월에 중공반석중심현위에서 조직한 특무대에 가입하여 당의 주장을 선전하고 감조감식 등 투쟁에 적극 참가했으며 1931년에는 특무대 대장을 맡게...
  • 2022-02-18
  • 4 알고 보면 김순희는 룡정 동흥중학교 재학시절에 연해주에서 온 안정로를 알고 있었다. 1932년 봄 안정로는 공청단평강구위 서기직을 맡고 룡정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김순희는 안정로를 통하여 약수동이 중공평강구위와 중공화룡현위의 소재지이며 동북에서 첫 인민정권 쏘베트가 선 고장이란 것을 알게 되였다. 또한 약...
  • 2021-12-13
  • 1 지난 세기 30년대 항일의 봉화가 드세게 타오른 연변 화룡땅에는 연변의 첫 녀성 당지부 서기이며 동북 경내의 첫 녀성 당지부 서기인 홍혜순과 이름난 혁명가인 그의 남편 소성규가 활동하고 있었다. 소성규는 물론 홍혜순의 최후와 희생이 그 시절 《동아일보》에 실리기도 했다. 1931년 1월 14일자 《동아일보》 제7면...
  • 2021-11-15
  • 1 1930년 중국공산당 동만특별지부가 지도한 연변 ‘5.30’폭동의 총책임자는 김근이고 실제 총지휘자는 김철(金哲, 1902ㅡ1930)이다. 김철은 일명 김창호(金昌昊)라고도 하는데 1902년 태생이다. 유감스러운 것은 그의 고향이 어디고 가정형편은 어떠하고 어느 학교를 다녔으며 초기투쟁은 어디에서 나섰는지 ...
  • 2021-08-23
  • 한청(1912-1996), 성은 신(慎)이고 이름은 익성이다. 혁명사업의 수요에 따라 이름을 선후로 신해룡, 장원복, 고바야시 신사부로(小林慎三郎), 신억 등으로 고치였고 8.15광복후 한청(韩青)이라고 고친 후 계속 그 이름을 썼다.   한청은 1912년 12월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모동리 무월동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
  • 2021-08-11
  • 이날은 중화민족의 력사에서 휘황찬란한 날이다. 2021년 7월 1일, 위대하고 영광스럽고 정확한 중국공산당이 창건 100돐을 맞이했다! 100년 전의 7월에 중국공산당이 창건되였다. 이때부터 갖은 시련을 겪어온 중화민족은 궐기, 부흥의 길에 올랐고 이때부터 수많은 중화의 아들딸은 견정한 신앙, 앞길을 밝혀주는 등불, 전...
  • 2021-07-01
  • 중화민족 대가정의 일원으로 조선족은 중국공산당의 정확한 지도하에 항일전쟁, 해방전쟁, 항미원조전쟁을 거치며 초기 중국공산당원들인 한락연, 양림, 리홍광, 리복림, 마덕산, 배치운, 서광해 등을 필두로 수많은 렬사들이 귀중한 생명을 바쳤다. 사회주의 건설시기에도 주덕해, 조남기, 리민, 문정일, 리영태, 김인섭,...
  • 2021-05-27
  •  류옥하(한락연의 부인) 내가 보유하고 있는 락연의 유작중 한두폭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그가 1944년부터 1947년까지 서북지역에서 창작한 작품이다. 우리는 1944년에 란주에 도착했다. 그 해에 그린 그림은 란주와 란주 부근의 풍경과 인민생활이 위주다. 1945년 봄에 그는 청해 탑이사를 방문했고 탑이사에서 ...
  • 2020-11-10
  • ▨ 류옥하(한락연의 부인) 락연은 배우기를 좋아했고 그림을 좋아했다 락연은 나에게 그는 동북의 연변 룡정에서 태여났고 어릴 적에 생활이 매우 가난했다고 말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지만 아버지는 그림에서 곡식이 생기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림을 배우지 못하게 했다. 그는 할 수 없이 마을 외...
  • 2020-11-09
  • ▨ 사효명(史晓明) 세상에 둘도 없는 키질석굴은 신강 배성현 키질향 동남으로 약 8키로메터 떨어진 명옥타걸산의 깎아지른듯한 절벽에 있다. 현재 236개 동굴에 번호가 매겨져있다. 동굴내 벽면에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이른 불교벽화 예술이 약 4,000평방메터의 면적으로 보존되여있는데 그 년대는 대략 기원 3세기에서 ...
  • 2020-10-27
  • 반춘방의 아들 이종화는 전 북경 인민무장경찰부대 문공단 악대 대장으로 음악인이고 군관이다 “오막살이 우리 집에 새 아침 왔다네” 솔직히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노래를 즐겼는데 이 때문에 뜻밖에도 군복을 입게 되었던 것이다. 노래는 마치 오색구름처럼 그...
  • 2020-10-20
  • 민족의 숙망 실현, 주덕해 자치구 제1임 서기로 당선 수천만 인파 거리에 떨쳐나서 북장고 울리며 환호 국경 첫돐에 드리는 겨레의 선물 중화인민공화국의 창립이 어제 같은데 벌써 국경 첫돐을 맞이하게 되였다. 당과 정부에서는 전국의 소수민족 대표와 소수민족문공단 배우들을 북경에 초청하여 함께 명절을 쇠도록 마련...
  • 2020-09-08
  • 9월 1일, 이름난 항일민족영웅이며 동북항일련군 주요 창건자와 지도자인 양정우 장군 순국전 전투 서류가 최초로 공포되였다. 서류는 희생되기전 100여일간 양정우가 부하들을 거느리고 일본군, 위만군 경찰들과 벌린 47차의 전투 과정을 진실하게 기록함으로써 동북항일련군 연구에 참신한 자료를 제공했다. 길림성서류관...
  • 2020-09-07
  • 신문 창간 출판물 간행해 공산당 로선 방침 정책 선전 예술일군들 국경 1주년에 북경서 공연 관중들의 절찬을 도서간행물 출판 사업 1945년 8월, 쏘련홍군과 항일련군이 연변에 진주하자 괴뢰만주국의 간도성공서와 모든 기관들이 재빨리 와해되여 연변 여러 민족 인민들은 일본침략자들의 기반 밑에서 해방되였다. 우리 민...
  • 2020-08-27
  • 조선민족 유지인사들 민족대학 세우려고 동분서주 《연변일보》 연변인민방송국 민족언어로 출판 방송 연변대학 창립 동북이 해방되자 우리 민족들은 자기 민족 대학을 세우려는 열의로 들끓었다. 1948년 12월, 연변전원공서 전원 림춘추는 이러한 민족의 념원을 안고 길림성민족사업좌담회에 참가하여 연변에 조선민족대학...
  • 2020-08-03
‹처음  이전 1 2 3 4 5 6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