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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중국공산당 동만특별지부가 지도한 연변 ‘5.30’폭동의 총책임자는 김근이고 실제 총지휘자는 김철(金哲, 1902ㅡ1930)이다. 김철은 일명 김창호(金昌昊)라고도 하는데 1902년 태생이다. 유감스러운 것은 그의 고향이 어디고 가정형편은 어떠하고 어느 학교를 다녔으며 초기투쟁은 어디에서 나섰는지 지금 알 방법이 없다. 알려진 것은 그가 화룡현 개산툰 자동 채수골 태생이고 룡정에서 중학교를 졸업했으며 화룡현 평강벌의 최서단인 수성촌의 사립영동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는 것 뿐이다. 또 이름만 걸어놓았고 늘 외지에 나가있었다고 한다.
20세기 20년대 중기부터 김철은 직업혁명가의 생애를 시작하였다. 그의 주요동지들로는 박윤서, 강학제, 김근, 소성규 등이고 주요활동구역은 룡정과 평강벌, 개산툰의 천평벌이였다. 그는 20년대 중기에 벌써 이름난 혁명가로, 공산주의자로 널리 알려졌다.
1926년 5월 16일에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탄생을 고하였다. 만주총국은 북만의 녕고탑에 본부를 설치하고 그 아래에 동만, 북만, 남만 등 3개 구역국을 두였다. 동만구역국은 1926년 10월 28일에 룡정에서 정식 설립(그 뒤 1927년 10월 3일에 ‘동만도위’로 개칭)되였는데 이 시기에 조공당 만주총국 군사부장 박윤서가 룡정에 왔다.
박윤서는 조공당엠엘파의 수령인물이였다. 그는 룡정에 오자 선참으로 김철 등을 찾아 그들을 조공당 당원(엠엘파)으로 받아들이였다. 때는 1926년이였다. 그때부터 김철은 조공당 동만도 엠엘계통의 주요지도자로 활동하면서 직업혁명가로 나섰고 동만에서의 박윤서의 유력한 조수와 믿음직한 동지로 되였다.
조공당엠엘파는 1926년 4월에 ‘서울파’의 일부분 성원과 ‘1월회’의 성원들로 무어진 조선공산당내의 한 파벌인데 연변에서의 조공당 동만도 엠엘계통의 주요간부로는 김근, 김철, 강학제, 소성규, 고하경 등이였다.
1926년 봄부터 김철 등은 박윤서와 함께 화룡현 평강벌을 주요활동지대로 하고 소성규를 그 진두에 내세웠다. 그들은 힘을 합쳐 평강벌의 룡두산, 대동구, 약수동, 중평리, 어랑촌, 수성촌, 쟈피거우 등지에 륙속 조공당 엠엘세포(지부)를 조직하였다. 잇달아 평강벌 각지에 야학이 일어서고 반일계몽운동이 시작되면서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상이 널리 침투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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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봄에 김철 등은 활동지대를 개산툰지구로 옮기였다. 그들은 화룡현 삼개사 자동(오늘의 룡정에 개산툰진 자동촌)에 가 비밀리에 장자관을 만나 그를 선참 엠엘파 조공당원으로 받아들였다. 장자관은 1926년 봄경에 자동의 박의정, 한영섭, 김영식 등 4명과 함께 광주로 달려가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한 사람으로서 중국의 북벌전쟁과 광주봉기에 참가하였다가 금방 돌아와 사립정동소학교 교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자동은 상촌(40여세대), 중촌(6여 세대), 하촌(50여세대) 등 3개 마을로 이루어진 고장으로서 100여세대의 인가가 말짱 조선이주민들이였다. 1926년에 원적이 조선 강원도인 안씨라는 사람이 자동의 사립정동소학교에 와 교원으로 있으며 조공계통을 발전시켰으나 1927년 10월의 ‘제1차 간도공산당사건’에서 파괴되고 말았다. 1927년 10월 이후 박윤서가 자동에 와 활동하면서 조공당 엠엘기층지부가 다시 조직되였다.
김철은 박윤서의 지시 대로 자동을 중심으로 한 개산툰지구를 그의 주요활동지대로 하였다. 그는 장자관을 도와 정동소학교에 보습반을 설치하고 자동, 절골, 문암동, 개산툰, 학성 등 5개 마을의 청년들을 보습반에 받아들였다. 그 후 이들중의 선진청년들을 고려공청조직에 받아들이고 박성춘을 서기로 한 고려공산청년회 엠엘세포를 조직하였다. 한편 김철은 절골(애민)의 사립근동소학교 교장 정룡수와도 손을 잡았다. 정룡수는 일찍 연해주를 다니면서 맑스주의를 접수하고 혁명에 투신한 사람이였다.
김철은 조공당 엠엘세포조직을 절골, 천평(광소), 후동 등지로 넓혀갔다. 하여 개산툰지구는 조공당엠엘파가 우세를 차지하였고 김철은 공인하는 개산툰지구의 지도자로 되였다. 세포가 뿌리박은 후 김철은 사회주의계몽운동, 정권탈취에 대한 투쟁을 드세게 벌리였다.
그때 개산툰지구에는 삼개사, 사광사 2개 기층행정조직이 있었다. 삼개사의 관할구는 개산툰, 석문자, 회경, 자동, 사동, 대산 등이고 사광사의 관할구는 제동, 광소, 광종, 후동, 선구, 장동 등이였다. 사는 현 아래의 행정단위로서 토지세 징수와 행정사무 등을 처리했는데 지방에서는 절대적인 권리를 갖고 있었다. 1928년 이전까지만 해도 사장 등 사의 주요직원은 현에서 직접 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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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은 세포조직을 핵심으로 군중을 널리 발동하여 사장과 사의 사무원을 중심으로 한 지방행정권을 민중이 쟁취하기 위한 투쟁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그들의 목표는 관선(官选)이 아닌 민선(民选) 즉 사기관의 사장과 사의 사무원을 군중이 직접 선거하는 것이다. 그 실질은 혁명을 지지, 성원하는 사람을 밀어넣어 지방행정권을 우리의 수중에 장악하자는 데 있었다. 군중의 압력에 의하여 현에서는 민선의 방법을 동의하는 수밖에 없었다.
1928년말에 삼개사와 사광사에서는 전 사 군중대표회의를 열고 직접 투표의 방식으로 사장과 사의 서기(书记)를 선거하였다. 현정부에서 강압적인 초치를 댄 데서 삼개사 사장은 윤길현이 그대로 류임되고 사 서기는 군중이 선거한 한영섭이 맡았다. 사광사에서는 군중의 뜻대로 최명신이 서기로 선출되였다.
김철이 직접 지도한 삼개사, 사광사에서의 지방행정권쟁취투쟁은 초보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2개 사의 서기는 혁명을 지지, 성원하는 사람으로서 군중의 요구와 념원에 따라 사의 일상사무를 처리하였다. 혁명조직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조공당 동만도 세포조직이 2개 사의 범위내에 깊이 뿌리를 내릴 수 있은 것은 그들의 지지와도 갈라놓을 수 없다. 이는 그 후의 대중적 투쟁에 튼튼한 조직적토대를 닦아주었다.
1928년 겨울에 조공당 만주총국 군사부에서는 일본제국주의와 싸우자면 손에 무장이 있어야 한다면서 동만에서 김철, 강학제 등을 중심으로 반일무장단체를 무으라고 지시하였다. 김철은 강학제 등과 함께 즉각 긴장한 준비사업에 뛰여 들었다.
드디여 이해 겨울 룡정에서 김철을 단장으로 하고 강학제, 김근, 김광진, 황기범 등 7명을 단원으로 하는 ‘철혈단(铁血团)’이 조직되였다. 그들은 만주총국 군사부의 직접적인 지도하에 자금을 준비하여 반일무장조직을 내오며 일제 특무, 주구를 단호히 숙청하며 장기적인 무장투쟁을 진행하는 것을 주요과업으로 내세웠다. 김철 등은 군사인재훈련소를 녕안 등 지구에 세우기 위하여 의연금모집에 나서면서 동만과 북만의 넓은 지역에서 친일대지주의 장원을 습격하는 투쟁도 자주 벌리였다.
1929년 봄에 김철은 강학제 등과 함께 녕안으로 갔다. 그들은 녕안의 모 지구에 동만과 동북만의 엠엘계통동지들의 강습반을 수차 꾸리여 많은 반일투사들을 키워냈다. 이들 반일투사들은 김철 등의 지도하에서 자기 고장을 중심으로 친일주구를 숙청하는 한편 10만여원에 달하는 고리대문서를 빼앗아 소각해버리였고 부호의 곡물 300여석을 헤치여 빈고농민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연변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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