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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의 따사로움 연변을 비추네
조글로미디어(ZOGLO) 2021년7월1일 09시18분    조회: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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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은 중화민족의 력사에서 휘황찬란한 날이다.

2021년 7월 1일, 위대하고 영광스럽고 정확한 중국공산당이 창건 100돐을 맞이했다!

100년 전의 7월에 중국공산당이 창건되였다. 이때부터 갖은 시련을 겪어온 중화민족은 궐기, 부흥의 길에 올랐고 이때부터 수많은 중화의 아들딸은 견정한 신앙, 앞길을 밝혀주는 등불, 전진하는 방향이 생겼으며 이때부터 중화대지에는 희망의 씨앗이 뿌려졌다. 국가독립! 민족해방! 경제 번영, 발전! 인민 행복, 건강!

100년의 려정은 파란만장하고 100년의 초심은 변함이 없으며 100년의 분발노력은 장려하고 휘황하다!

우리는 중국공산당의 100년의 분투려정에 긍지를 느끼고 연변이 당의 령도하에 부단히 번영, 발전한 데 대해 희열과 고무를 느낀다.

공산당이 없으면 새 중국이 없고 공산당이 없으면 오늘의 행복한 연변이 없다. 이 특수한 날에 우리 모두 진흥발전하는 연변이 어떻게 세월의 흐름에서 다시 태여나고 커다란 변화를 이룩했는지 되돌아보자.

 

작은 불꽃이 료원의 불길로 타올라

 

100년간, 중국공산당이 연변대지에 뿌린 불씨는 연변의 여러 민족 인민의 반제국주의, 반봉건의 맹렬한 혁명의 불길을 지폈고 당이 연변에서 발전, 장대하는 휘황한 려정을 시작했다.

시간을 20세기초로 되돌려보자.

일본제국주의가 연변에 침입하여 강제로 식민통치기구를 설립했다. 연변의 여러 민족 인민은 일본제국주의와 봉건군벌의 이중압박을 받았고 고난의 생활은 끝이 보이질 않았다.

중국공산당의 창건은 갖은 압박하에 광명을 갈망하는 연변인민에게 희망의 빛을 가져왔다.

1927년 10월, 중공만주성림시위원회가 설립되고 동북3성의 당사무를 령도했다. 1928년, 중공만주성림시위원회의 비준하에 중공연변구위가 설립되였고 중국공산당이 연변의 여러 민족 인민을 령도하여 혁명투쟁을 하는 휘황한 력사를 시작했다.

1930년 2월, 중공연변특별지부가 화룡현 달라자에서 설립되였고 이어 연변의 각지에서는 기세 드높은 ‘붉은 5월 투쟁’을 했으며 화룡현 약수동에서 동북의 첫 쏘베트정권인 약수동쏘베트정부를 설립했다.

1930년 8월 13일, 동만 제1차 당원대표대회가 화룡현 약수동에서 소집되고 중공연화중심현위가 설립되였다.

1930년 10월, 연화중심현위의 토대에 중공동만특별위원회(동만특위로 략칭)가 설립되였고 연화, 왕청, 훈춘, 안도, 돈화 등 현위도 선후하여 설립되였다. 이로써 연변대지에는 특위, 현위, 구위, 지부의 완전한 당의 조직체계가 형성되였다.

혁명투쟁은 격렬하고도 잔혹했다.

1931년 1월, 중공왕청현위 제1임 서기 김훈이 붙잡혀 살해되였고 시체는 부르하통하의 얼음구멍에 던져졌다.

1931년 2월 1일, 중공왕청현위 제2임 서기 김상화가 붙잡혔고 당의 기밀을 지키기 위해 귀중한 생명을 바쳤으며 그때 나이는 31세였다.

1933년 2월 12일, 중공화룡현위 서기 최상동, 유격중대 대장 김세 등 13명의 유격대원은 일본군, 괴뢰군과의 전투에서 장렬하게 희생했다.

1934년 3월 21일, 중공만주특위 서기 동장영이 동광진 묘구 일대에서 적에게 포위당했고 총알에 맞아 27세의 나이에 희생했다.

적의 광기는 공산주의자의 견강한 의지와 견정한 신념을 무너뜨릴 수 없었다. 위증민, 왕덕태, 동장영, 조아범, 주수동, 진한장…이러한 연변 당조직의 우수한 지도자, 동북항일련군의 고급장교들은 중화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백산흑수 사이에서 일본 침략자들과 지극히 힘들고 어려운 투쟁을 했고 생명의 최후까지 용맹하게 싸웠다.

렬사들의 선혈은 헛되이 흐르지 않았다. 피어린 전투 끝에 연변의 여러 민족 인민은 전국인민과 함께 항일전쟁의 위대한 승리를 맞이했다. 이날을 위해 3000여명의 렬사들은 연변대지를 피로 물들였다.

1945년 11월 15일, 중공연변지위가 설립되였다. 옹문도, 공원, 류준수, 주덕해가 선후하여 지위서기를 담임하면서 당, 군대, 정부를 건설하고 동만근거지를 창건하는 사업을 전개했다. 5만여명의 연변의 아들딸이 참군, 참전하여 전국해방전쟁을 지원했고 새 중국의 탄생을 맞이했다.

1950년 10월, 수만명의 연변의 아들딸은 또 한번 당과 국가의 항미원조의 호소에 호응하여 중국인민지원군에 적극 가입했으며 새 중국, 고향을 보위하는 데 거대한 공헌과 희생을 했다.

1952년 9월 3일, 연변조선족자치구가 설립되고 1955년 12월에 연변조선족자치주로 변경되였다. 1956년 12월 8일, 중공길림성위는 중공연변지위를 중공연변주위로 변경하기로 결정했다.

중공연변주위의 령도하에 연변의 여러 민족 인민은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새로운 려정을 시작했다. 중공연변구위의 9개 지부, 22명의 당원으로부터 오늘날의 견강하고 힘있는 중공연변주위가 령도하는 7000여개의 기층당조직, 17만 6000여명의 공산당원으로 발전하기까지, 후세들은 새 중국의 창건과 중화민족의 해방사업을 위해 희생한 렬사들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고 신념을 더욱 견정히 할 것이며 기치를 높이 추켜들고 당을 따라가고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이룩하는 중국의 꿈의 실현을 위해 끊임없이 분투할 것이다! 

    

개선가를 높이 부르며 새로운 장을 써내려가

    

한갈래의 철도, 몇구역의 삼림, 얼마 안되는 공방, 7000만원이 안되는 공업총생산액…새 중국 창건 초기에 연변의 밑천은 ‘손꼽아 셀 수 있을 정도’였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생활하는 것이 일상적인 상황이였다.

자치주를 창립한 후, 당의 민족정책의 따사로움하에 주당위, 주정부는 전 주 여러 민족 인민을 거느리고 개혁개방의 동풍, 서부대개발, 동북로공업기지 진흥, ‘일대일로’ 전략 실시 등 국가의 혜택정책을 다잡고 곤난을 극복하고 분발전진하면서 하나 또 하나의 자랑스러운 ‘첫번째’를 창조했으며 한번 또 한번의 괄목할 만한 력사적인 도약을 실현했다.

1953년, 연변의 첫번째 인공 불기로 만든 유리병이 출고되면서 연변의 유리제품이 일약 전국 동업종의 선두주자로 올라섰다.

1958년, 첫번째 맥주병이 출시되고 연변 유일의 맥주기업 향기가 만방에 넘실거렸다.

1974년, 첫번째 권연이 생산되고 ‘장백산’ 브랜드가 우뚝 서게 되였다.

1981년, 오동제약이 돈화에서 탄생되고 ‘안신보뇌액’ 등 일련의 브랜드 제품들이 그 후의 40년간 시들지 않는 인기를 누렸다.

1986년, 첫번째 ‘장백산’ 려객뻐스가 출고되고 시장점유률이 대번에 전국 뻐스시장의 3%와 전 성 뻐스시장의 90%를 넘어섰다.

1999년, ‘춘묘’표 이앙기가 출고되여 연변 농기계장비 제조의 새로운 려정을 열어제꼈다.

2009년, ‘중국 두만강지역합작 전망계획 요강-장길도를 개발개방선도구로’가 반포되여 연변은 대외개방의 력사적 새 기원에 진입했다.

2015년 9월 20일,‘동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속철도’로 불리우는 장춘-훈춘 도시간 철도려객운송 전문선로가 정식으로 개통, 운영되여 연변은 고속철을 타고 경제, 사회 발전의 ‘고속시대’로 들어섰다.

2019년 9월 28일, 연변 국태신에너지의 첫번째 수소에너지 자동차가 출고되여 연변은 록색전환 발전의 길에서 씩씩한 한걸음을 내디뎠다.

2021년 6월 4일, 길림성 ‘12.5’전망계획 건설의 중점대상으로 우리 주 사상 투자규모가 가장 큰 단일공사인 총투자 77.89억원의 국가전력망  신에너지 길림 돈화 양수 에너지축적 발전소 대상 1호 설비세트가 정식으로 가동, 발전하기 시작, 각항 관건지표가 국내 앞자리, 세계 일류에 도달했다.

인심을 고무하는 한번 또 한번의 부분적 돌파, 하나 또 하나의 거대한 성취들은 연변이 기나긴 력사 속에서 이룩한 개혁발전 성과의 물방울, 잎사귀에 지나지 않는다. 부동한 력사시기의 또렷한 발자취를 따라 연변 중점경제수치들을 점검해보노라면 우리는 연변 경제, 사회 발전의 거세찬 맥박을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다.

‘13.5’기간, 연변에서는 도합 291개의 공업대상을 실행하고 72억원의 투자를 완수했는데 이는‘7.5’, ‘8.5’, ‘9.5’ 기간 공업투자의 총수에 맞먹는다. 17개의 중점대상이 국책와 ‘두가지 높음과 한가지 량질’(높은 생산량과 효익, 량질의 농업신기술) 계획에 들어가고 8개의 대상이 동북 로공업기지 진흥 대상계획에 들어갔다.

‘11.5’기간, 연변에는 투자가 3000만원 이상 되는 대상이 2630개이고 1억원이 넘는 대상이 431개 되였으며 연길담배공장 이전개조, 대당훈춘발전소 2기 등 일련의 중점공업대상이 가동되고 효익을 거두었다. 2010년말까지 전 주 민영경제 중점경영 업무수입은 처음으로 1000억원 관문을 돌파했다. 에너지와 광산업에서 증가액 50억원을 실현한 것은 ‘10.5’기간말의 6.5배에 달해 년평균 29%의 증가세를 보였다. 

‘12.5’기간, 2015년 전 주 지역총생산액은 635.43억원을 실현해 년평균 9.3% 증가했다. 2015년 도시 주민 가처분수입은 인당 2만 1734원에 달해 년평균 8.1% 성장했다. 농민 인당 순수입은 8965에 달해 년평균 10.6% 성장했다. 5년간 루계로 완수한 전사회 고정자산 투자는 3400억원으로 년평균 16.3% 성장했다. 인삼, 광천수 등 12개 중대산업이 초보적으로 규모를 갖추고 야금, 림산, 의약, 식품 등 8대 100억급 산업기지 건설이 다그쳐 실시되였다.

‘13.5’기간, 규모이상 공업 총생산액이 년평균 3.6% 성장했다. 전 주 대외무역 수출입 총액이 루계로 685억원을 완수해 년평균 137억원을 실현했다. 의약, 광천수 등 중점산업 대상이 다그쳐 군체를 형성하고 교통, 에너지, 수리 등 중대기초시설 대상이 선후하여 실시되였다. 이 5년간 우리 주는 록색전환발전의 진통, ‘3대 공략전’의 시련, 중대자연재해와 코로나19의 충격을 이겨내고 초요사회 전면적 실현의 결정적 승리를 이룩했다.

2021년, ‘14.5’전망계획을 실시하는 첫해에 연변은 재차 방향을 명확히 하고 목표를 확정했다. 지역총생산액을 7% 좌우 성장시키고 규모이상 공업 증가액을 7% 성장시키며 일반공공예산 수입은 3% 성장시킨다. 고정자산투자를 8% 늘이고 사회소비품 소매총액 9.5% 성장시키며 대외무역 수출입총액을 8% 성장시킨다. 도시와 농촌 상주 주민 인당 가처분 수입이 경제발전 장성속도에 뒤처지지 않게 한다…

시작이 곧 결전이고 시작부터 전력투구해야 한다. 부단히 새로운 발전을 이룩해가는 새 연변은 씩씩한 발걸음을 내디디면서 새로운 발전국면에서 기회를 찾고 새로운 국면을 개척하며 하루속히 새로운 도약발전을 실현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인민과 혈육처럼 끈끈하게 이어져

    

평화시대에는 민족의 부흥과 인민의 행복을 위해 또 무수한 공산당인들이 정열을 불사르며 용기를 내여 전진했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해도 전쟁의 초연이나 그 어떤 위험과 어려움도 당과 인민군중의 혈육처럼 끈끈한 관계를 갈라놓을 수 없다. ‘인민의 행복을 도모한다.’ 이는 각급 당조직의 기치이고 핵심이며 중심이다.

연변은 생태가 잘 보존되여있고 물산이 풍부하다. 하지만 산이 많고 경작지가 적으며 농업을 위주로 하지만 우세를 띠지는 못했다. 자치주 창립 초기에 연변 농민들의 인당 년수입은 100원 좌우밖에 안되였고 ‘빈곤’이란 두글자가 당시 상황에 대한 가장 진실한 묘사였다.

빈곤 면모를 개변하기 위해 수십년간 한세대 또 한세대의 연변인민들은 분발개척하고 용감하게 전진하면서 빈곤해탈 난관공략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풍성한 성과를 거두었다.

2015년 7월 16일, 이날은 연변인민들이 영원히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할 날이다.

이날 습근평 총서기가 ‘약속 대로’ 연변에 찾아왔다. ‘화장실 혁명’을 해야 한다, “초요사회를 실현하는 데서 누구도 뒤떨어져서는 안되며 어느 소수민족도 빠져서는 안된다.”… 마디마디 친절한 당부는 산과 들에 메아리치며 곤난군중들에게 봄날 같은 따스함을 안겨주고 우리 주가 빈곤해탈 난관공략전의 결정적 승리를 이룩하는 데 행동지침을 제시했다.

5년 남짓한 시간이 흘렀지만 교시는 여전히 마음에 간직되여있다. 로혁명근거지이고 민족지역이며 변경 미발달지역이던 연변은 진작 새로운 모습으로 변했다.

전 주 5개 빈곤 현, 시가 전부 빈곤의 모자를 벗어던졌다. 304개 빈곤촌이 전부 빈곤대렬에서 벗어났다. 현행 표준의 농촌빈곤인구 4만 7300명이 전부 빈곤에서 해탈되고 빈곤 발생률은 2015년말의 12.2%에서 0으로 내려갔다. 서류에 올랐던 빈곤가정 인당 순수입은 2015년의 3436원에서 1만 3024원으로 늘어났다…

연변인민이 빈곤에서 벗어났다!

전 주 8개 현, 시에 모두 2급 혹은 그 이상의 공립 의료기구가 건설되고 66개 향진에 향진위생원 72개가 세워졌으며 1049개 행정촌에 909개의 표준화 위생소가 기획, 설립되고 기본의료봉사가 전부 실현되였다. 전 주적으로 38개의 농촌복리쎈터를 건설,개조하고  농촌 재택양로봉사뜨락이 전 주의 모든 행정촌에 보급되였으며 도시 양로, 의료, 산업재해, 생육, 실업 보험을 기본적으로 실현했다.

전 주 향촌도로는 루계로 14억 4900만원을 투입해 농촌도로 1324.6킬로메터를 보수하고 농촌도로 위험교량 76개를 개조했으며 안전방호공사 989킬로메터를 실시했고 전 주 1051개 건제촌에 포장도로를 전면 닦았으며 자연툰 포장도로률이 93%에 달했다. 농촌 안전식수 공고, 제고 공사를 깊이 실시했고 루계로 7억 1500만원을 투입했으며 70만 8700명 농촌주민들의 식수 질을 절실히 제고했고 농촌 집중물공급률을 98.2%에 도달시켜 전국 평균수준을 훨씬 초과했다.

먹고 입는 생활필수품으로부터 식수, 화장실 개조까지, 의무교육으로부터 의료보장까지, 주택안전으로부터 취업, 증수까지, 물질생활로부터 정신문화까지 총서기가 늘 걱정했던 것은 모두 전 주 상하가 힘과 마음을 모아 난관을 공략하는 출발점과 락착점이 되였고 연변의 각급 당조직이 ‘인민이 아름다운 생활을 누리게끔 하겠다’는 장엄한 승낙을 실현하는 생동한 주해가 되였다.

민생은 민심과 이어졌고 민생은 민력을 결집했으며 민생은 발전과 관련된다.

몇년간 주당위, 주정부는 군중들이 가장 관심하고 가장 직접적이며 가장 현실적인 난제에 직면해 조기에 실시했던 ‘여섯가지 민생프로젝트’에서 오늘의 ‘열가지 민생프로젝트’, ‘백가지 혜민실사’는 수자의 비약으로 연변이 전력으로 민생복지를 증진하는 실제적인 조치를 전면 보여주었다.

2020년만해도 연변은 73억 8000만원을 투입해 ‘열가지 민생프로젝트’ , ‘백가지 혜민실사’ 를 실시했고 도시, 도로 85만 6000평방메터를 개조, 확장 건설했으며 시정도관망 201킬로메터를 개조했고 새로 40.2헥타르의 록지를 증가시켰다. 로후 아빠트단지 345만 3000평방메터와 단층집 1166채를 개조했고 1만 2378가구의 ‘무부동산소유등록주택’의 등록을 완수했다. 219명 사실적 무인부양 아동을 보장범위에 편입시켰고 장애인 두가지 보조금 6747만원을 지급했다.

매 한건의 좋은 일, 실제적인 일은 모두 군중들의 신임을 받았고 전 주 여러 민족 인민들로 하여금 중국공산당은 인민에 뿌리를 밖고 인민군중과 함께 호흡하고 운명을 같이하며 마음이 이어졌음을 더욱 굳게 믿도록 했다.

    

단결하여 평화로운 음률을 울려

    

연변에서 민족단결은 풍부한 력사적 내함을 가지고 있다.

전쟁시대, 연변의 여러 민족 인민들은 서로에게 의거하고 어깨 나란히 투쟁했으며 민족의 정의는 전쟁의 세례 속에서 부단히 결집되고 승화되였다. 평화시대, 여러 민족 인민들은 문화 면에서 서로 받아들이고 경제 면에서 서로 의거하고 정감 면에서 서로 가까이 하면서 서로 어우러진 민족공동체로 거듭났다. 습근평 총서기가 말한 바와 같이 “자신의 눈을 사랑하듯이 민족단결을 옹호하고 자신의 생명을 아끼 듯이 민족단결을 소중이 여기며 석류씨마냥 한데 뭉쳐야 한다”. 민족단결은 이미 연변의 여러 민족 군중들의 공동된 인식으로 되였고 연변이 장기적인 안정을 유지하고 진흥발전을 실현하는 생명선으로 자리매김 되였다.

자치주 창립 이래 연변의 민족단결진보 창조 사업은 시종 전국의 앞자리를 차지했고 일련의 ‘전국 최고’를 창조했다.

1953년 3월, 연변은 제1차 민족단결모범대표대회를 소집해 전국에서 가장 일찌기 민족단결진보 창조 활동을 전개했다.

1953년 8월, 연변은 매년 9월을 ‘민족단결선전월’로 확정했다.

1954년, 연변은 ‘민족단결 선진집단, 선진개인 표창’ 활동을 전개해 전국 30개 소수민족자치주에서 시작을 열였다.

1958년, 연변은 전국에서 솔선적으로 초등교육을 보급하고 선후로 전국 소수민족교육에서 다섯가지 ‘제일’을 창조했다.

1985년, 연변은 솔선적으로 자치조례를 제정하고 같은 해에 주민족사무위원회에서 조직, 편찬한 《민족정책상식》 <사상교양-민족단결부분>을 출판, 발행했으며 동시에 중소학교 정치과 수업계획에 편입시켜 체계적인 민족교양을 전개했는데 각 소수민족 지역의 앞에서 달렸다.

자치주 창립 이래 우리 주는 15차의 민족단결진보 표창대회를 소집해 3832명의 모범집단과 모범개인을 표창했고 5차의 청소년 민족단결 표창대회를 소집해 220개 선진집단과 선진개인을 표창했다. 련속 5차례나 국무원으로부터 ‘전국 민족단결진보 모범집단’으로 평의되였고 국가민족사무위원회로부터 ‘전국민족단결진보창건활동시범주’로 확정되였으며 관할 8개 현(시)은 전부 국가민족사무위원회로부터 민족단결진보창건 시범단위로 평의되였다. 연변의 민족단결진보선전월, 민족단결진보표창 등 활동경험은 전국 각지에서 광범위하게 보급되여 전국 민족단결진보의 기치로 우뚝 솟았다.

연변에서 민족단결은 더욱 깊은 현실적 의의가 있다.

사소한 것으로부터 중요한 것까지, 도시로부터 농촌까지, 안으로부터 밖까지, 우로부터 아래까지 단결의 모범은 바로 우리들의 신변에 있고 단결의 혈액은 이 땅에 침투퇴여 매 사람, 매 집단의 사상자각과 행동자각으로 되여있었다.

연길시중앙소학교는 민족단결 발전의 길을 견지했고 ‘10월 애국월, 민족문화일’ 활동을 혁신적으로 전개했으며 새세대 아이들이 ‘기타 민족 가요 한곡을 부르고 기타 민족 무용 하나를 배우며 기타 민족 언어를 한마디 배우고 한개 소수민족 인물 혹은 소수민족 지역 풍정을 장악하며 한개 소수민족 풍속습관을 료해하고 한명의 한족친구를 사귀는’ 과정에서 조국, 민족, 고향을 열애하는 감정이 더욱 짙도록 했다.

룡정시 개산툰진 광소촌변방파출소 경찰인 리범은 경무실내의 민족단결사업소를 리용해 정기적으로 촌민들에게 민족정책 법규를 선전, 강연하고 독거로인과 결손가정 자녀들을 돌보면서 군경민이 민족단결을 함께 건설하는 량호한 국면을 형성했다.

도문시 석현진 수남촌당지부 서기인 라철룡은 홍색교양문화기지를 구축하고 조선족 특색 향촌관광을 발전시켰으며 빈곤해탈 난관공략, 민족단결, 산업발전, 민속문화를 공동으로 추진하고 번영시켜 여러 민족 촌민들이 행복한 가원에서 생활하도록 했다.

안도현새세대관심사업위원회 원 주임이며 로당원인 김만춘은 홍색교양을 민족단결의 ‘뿌리’로 간주하고 홍색문화 연구와 선전의 대오에 적극 뛰여들어 민족단결의 정신이 진달래꽃처럼 안도 내지 연변에 활짝 피도록 했다.

연변에 이러한 본보기는 수없이 많고 이러한 감동은 시시각각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단결은 뼈속까지 깊이 스며들었고 모든 곤난을 이겨내는 방대한 힘을 결집했으며 이러한 단결은 태산마냥 무거워 안정과 조화의 량호한 국면을 구축했고 이러한 단결은 구름 걷힌 뒤 해살마냥 전 주 여러 민족 인민들로 하여금 공동 번영발전의 동력원천을 찾아내게 했다.

새로운 력사적 기점에서 우리는 영광스러운 혁명전통, 견정한 신념을 가진 연변인민이 반드시 습근평 동지를 핵심으로 한 당중앙의 두리에 긴밀히 뭉쳐 성당위와 주당위의 견강한 지도하에 더욱 휘황찬란한 래일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을 굳게 믿는다!

갈위 기자/연변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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