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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 첫 녀성 당지부 서기 홍혜순과 남편 소성규
조글로미디어(ZOGLO) 2021년11월15일 09시33분    조회: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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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기 30년대 항일의 봉화가 드세게 타오른 연변 화룡땅에는 연변의 첫 녀성 당지부 서기이며 동북 경내의 첫 녀성 당지부 서기인 홍혜순과 이름난 혁명가인 그의 남편 소성규가 활동하고 있었다. 소성규는 물론 홍혜순의 최후와 희생이 그 시절 《동아일보》에 실리기도 했다.

1931년 1월 14일자 《동아일보》 제7면 사회면에 발표된 <공산당과 륙군교화(交火) 오명피살팔명피체> 기사에서 홍혜순을 언급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기사는 “지난 2일에는 두도구 륙군3련대 서련부(徐連附)가 리수구(梨樹沟)방면에 출동하야 익3일 오전 7시경에 공산당 20여명과 장시간 교전하다가 현장에서 공당 한명이 피살되고 방년 20내외 꼿가튼 처녀 홍혜순 외 1명이 중상을 당하야 검거되엇든바 지난 6일에 전긔 홍혜순이는 드듸어 절명되엇다 한다.”(동아일보 신문기사 원문)로 되여있다.

이 기사는 홍혜순의 총상과 체포, 희생을 알리면서 그 시절 연길현 장인강 리수구에 출동한 중국 륙군대는 ‘두도구주둔 륙군3련대 서련부’이고 체포된 시간 1931년 1월 3일, 희생된 시간 1월 6일임을 알리고 있다. 그 시절 두도구주둔 중국 륙군대가 ‘륙군3련대(퇀) 서련부’라는 건 여직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이고 체포 및 희생시간은 관련 자료와 가족 증실 시간 1930년 음력 11월 28일 사망과 조금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것이 당년 《동아일보》를 통한 녀성혁명가 홍혜순 최후소식이라면 당년 《조선일보》는 우리가 여태껏 모르던 지난 세기 20년대 후반의 홍혜순 활동상 일부를 알리여 홍혜순 렬사를 리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먼저 1928년 1월 3일자 《조선일보》 제8면 사회면 기사 <용정여청 지방순강대(龍井女青地方巡講隊>를 요약하여 보기로 하자.

이날의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룡정녀자청년동맹’에서 주최한 지방순강대 일행 4명은 1927년 12월 19일 의란구에 도착하여 20일에 의란구공회당(公會堂)에서 강연회를 가지였다. 강연회 참가자가 400~500명이고 강연자들인 전영자와 윤철순, 김순림이 각기 자기의 주제제목을 가지고 강연에 나섰다면 홍혜순의 강연제목은 <대중을 위하야 싸우자>였다. 홍혜순의 룡정대성중학교 재학시절로서 강연제목부터가 일본침략자에 의해 짓밟히는 무산대중을 위해 싸우려는 장한 기개를 잘 보여주었다.

1928년 1월 5일자 《조선일보》 제5면 기사 <용정여자청년 순강대소식>(원문제목 그대로)에서는 며칠 후인 1927년 12월 23일에 의란구 현립소학교 강당에서 또 남녀청중 500~600명이 참가한 강연회를 가지고 연사(演士) 5명이 강연에 나섰다. 홍혜순은 또 연사 5명중 하나로 강연무대에 오르면서 <대중을 위하야 싸우자> 제목(원문 그대로)으로 열변을 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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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1928년 3월 6일자 《조선일보》 제4면 기사 <용정여청동맹 상무위원회>(원문 그대로)는 지난 2월 27일 오전 11시에 녀청동맹사무소에서 제1회 상무집행위원회를 가지고 3월 1일 오후 7시에 룡정공회당(公會堂)에서 공개강연회를 가지기로 결의하였다. 연사는 6명으로 하기로 하였는데 6명중 하나가 홍혜순이고 제목은 <여성해방은 이러케>(원문 그대로)로 밝혀졌다.

1928년 1월과 3월의 《조선일보》 관련 기사를 통해 당년 룡정대성중학교 재학시절 홍혜순이 련속 세차례 공개대중강연에 나선 소식을 접하였다. 필자가 홍혜순 전기부분 앞머리에서 강연소식을 련속 소개한 것은 처음 발굴한 소식인 것도 있지만 룡정대성중학교와 룡정녀자청년동맹 그 많은 녀학생들과 녀자청년들 가운데서 홍혜순이 련속 강연자로 뽑히여 강연무대에 나선 것은 홍혜순이 일찍부터 혁명의 장도에 올랐다는 점을 널리 알리자는 데 있다.

지난 세기 20년대 후반의 홍혜순이 이러하다면 녀성혁명가이고 연변의 첫 녀성 당지부 서기인 홍혜순의 생애와 발자취는 어떠했을가, 이름난 혁명가인 홍혜순의 남편 소성규의 사적과 함께 펼쳐보고저 한다.

지난 80년대 초반 필자는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졸업하고 화룡현위 당사연구실에 근무하면서 홍혜순 관련 많은 기성자료를 찾아보았다. 렬사의 고향인 룡정시 광개향 광소촌(오늘의 룡정시 개산툰진 광소촌)으로 가서 항일투사들인 김창렬, 홍춘산 등 분들을 수차 취재하였다. 연길과 룡정, 서성 등지에서 당년의 항일투사들인 차정희, 장은희, 황옥순, 리찬덕 등 분들도 거듭 취재하였다.

취재중에서 렬사의 녀동생 홍인순에 대한 단서를 잡고 연길, 도문으로 다니다가 도문의 한 가두에서 홍인순(1983년 67세) 할머니를 찾아냈다. 이는 1983년 2월 8일의 일이다.

그 후 두번째, 세번째로 홍인순 할머니를 만난 것은 3월 9일과 3월 20일이다. 할머니는 손자 리검이 한족학교인 조양천2중에서 영어교원으로 근무하기에 2중 울안에 있는 기숙사에서 거처하며 손자의 시중을 들어주고 있었다. 도문과 조양천에서의 수차의 취재를 통해 홍혜순 렬사의 모습이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듯 필자에게로 다가왔다. 렬사의 남편 소성규 렬사도 필자의 마음속에 우렷이 솟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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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혜순(洪慧顺)은 1908년생으로서 몽기동이라 불리우는 화룡현 사광사 웃천평(오늘의 룡정시 개산툰진 광소촌)의 한 청빈한 의사의 집에서 맏딸로 태여났다. 여덟살이 되자 집 근처에 있는 현립2교에 입학하였는데 이쁘고 해맑은 얼굴에 웃을 때면 볼우물이 곱게 패이는 그녀는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하였다. 12살에 4년제 현립2교를 졸업하고 본고장에 있는 보통학교 1학년에서 계속 공부하였다.

그러던 어느 해 7월 보통학교를 다니던 손아래 동생이 병으로 죽고 10월에는 또 3년 철을 신염으로 시름시름 앓던 아버지가 세상을 떴다. 액운이 련달아 들이닥치다 보니 집에는 할아버지와 어머니, 셋째 녀동생밖에 남지 않았다. 가정살림을 떠인 어머니는 매일 팽이처럼 돌며 바삐 보냈지만 셈평은 도시 펴일 줄 몰랐다. 나어린 혜순의 가슴 속에서는 부익부빈익빈의 불공평한 사회에 대한 불만의 싹이 마음속에서 트기 시작하였다.

마을의 혁명적 청년들과 접촉하는 가운데서 홍혜순은 맑스와 레닌을 알았고 로씨야 10월혁명을 알았다. 그는 낮이면 보통학교에 나가 글을 익히고 밤이면 자기 집 안방에서 늘 밤새도록 진보적 서적들을 읽었다. 특히 그에게 깊은 인상을 준 사람은 홍군에 참가하였고 위대한 로씨야 10월혁명에서 영용히 희생된 삼촌이였다. “삼촌이 걸은 길을 걷자!” 이는 혜순의 드팀없는 신조로 자리잡아갔다.

1925년 18살 되던 해에 홍혜순은 본고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했고 평강벌의 ‘군중수령’으로 불리운 조기조선인공산주의자 소성규와 자유약혼을 하였다. 평강벌은 오늘날 화룡시에 속하지만 그제날은 연길현 수신향 범위였다. 봉건적인 혼인제도의 쇠사슬을 짓부신 혜순이와 소성규의 자유약혼은 개산툰 몽기동을 들썩 뒤흔들어놓았다.

소성규(苏成奎, 1908ㅡ1937)는 중공당원이고 후날의 연변 5.30폭동의 주요지도자의 한 사람으로서 연길현 수신향 수성촌의 소씨라고 하는 조선족반일지사의 가정에서 태여났다. 수성촌은 력사 속에  사라졌지만 오늘의 화룡시 서성진 진달래촌에서 서쪽으로 와룡 쪽 골안을 따라 몇리 떨어진 봉밀하 남안 산 아래 평지에 자리한 명암일대의 유명한 중심마을이였다.

소성규의 아버지는 소승호라고 부른다. 그는 항렬에서 맏이고 그 아래에 세 남동생을 두었다. 한때 독립군에 참가하여 활동한 적이 있었는데 워낙 천성이 강직하고 반일사상이 농후하여 세 동생은 물론 온 가정을 반일사상으로 이끌기에 힘을 다했다. 이런 가정에서 태여난 소성규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성품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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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기 30년대 초반 간도일본총령사관 건물과 룡정 시가지 모습. 1931년 9월 5일자 《동아일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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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규의 어린시절, 서당을 다니던 그 시절에 남자들은 모두 머리태를 땄다. 그러던 어느날 서당을 다니던 성규가 잃어져 집안에서는 란리가 났다. 아홉살짜리가 없어졌으니 놀랄 만도 하였다. 며칠 후에 성규가 자기절로 집에 들어섰다. 보니 머리태를 잘라버린 것이였다. 투도구에 가서 깎았다면서 10리가량 떨어진 이도구부터는 저절로 걸어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서당에는 안 다닌다면서 이도구에 가서 신식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는 성규가 아홉살 때의 일이다. 성규의 아버지는 “그 놈이 앞으로 큰일을 해낼 놈!”이라고 대견스러워 하였다.

1922년경에 성규는 수성촌 사립보진학교를 졸업하였다. 이 해 그는 아버지의 지지하에 룡정으로 가서 그 전해에 세워진 사립동흥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니 동흥중학교의 제2기생이 되는데 학교의 학생들은 거개가 연변 각지와 쏘련 연해주, 남만, 북만에서 온 학생들이였다. 하기에 학생들은 물론 선생들까지도 신식 사상에 푹 빠져있었다. 맑스주의전파와 사회주의사상의 영향은 성규를 혁명의 한길로 이끌어주었다.

그 시절 조선 본토나 연변에서는 중소학교 학생들과 사회청년들 속에서 여러가지 류형의 강연회와 현상 웅변대회가 활발히 벌어졌다. 그럴 때면 중소학교나 사회 여러 단체들에서 뽑힌 강연자들이 연단에 올랐는데 홍혜순은 물론 소성규도 례외가 아니였다. 1925년 6월 13일자 《동아일보》 제3면 기사 <현상웅변대회 양일간 대성황>을 보면, 이해 6월 5일과 6일 룡정 공회당(公会堂)내에서 ‘전간도청년남녀웅변대회’가 개최되였는데 룡정 은진중학교 출신 소성규는 <조선청년아힘써싸호자>라는 제목으로 연단에 나섰다.

소성규는 동흥중학교 제2기 졸업생으로 사회에 진출하였다. 그의 주요활동무대가 화룡현 평강구였기에 20년대 중기에 그는 벌써 ‘평강벌의 군중수령’으로 널리 소문이 났다. 1925년에는 신식사상으로 무장한 화룡현 사광사 웃천평(오늘의 룡정시 개산툰진 광소촌)의 홍혜순과 자유약혼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봉건의 쇠사슬에 얽매이던 그 시절로 보면 놀라운 혁명이였다. 한때 웃천평은 온통 그들 남녀에 대한 이야기로 차고 넘쳤다.

1925년 이해 홍혜순은 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보통학교의 선생은 공부가 월등한 혜순을 룡정의 광명녀교에 입학하라고 하였다. 하지만 곧 남편이 될 소성규의 생각은 달랐다. 소성규의 주장은 대성중학교였다. 혜순의 어머니가 학비를 대기 어려워 주저하자 소성규는 자기가 대겠으니 근심하지 말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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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순이는 룡정 대성중학교에 입학한 후 하숙집을 잡았다. 어느날 그의 어머니가 혜순의 손아래 녀동생 인순이를 끌고 쌀주머니를 이고 하숙집으로 찾아갔는데 저녁에 소성규가 찾아왔다. 그는 가시어머니 될 분에게 깍듯이 인사를 올리더니 오늘 저녁 어느 극장에서 조선말 <장화홍련전> 극이 있다면서 표 넉장을 내밀었다. 룡정에서도 조선 내지에서 찾아오는 <춘향전>, <심청전> 등 시대극을 볼 수 있던 시절이였다.

그때의 인상이 하도나 깊은 홍인순이다. 1983년 3월 조양천진에 가서 홍인순 할머니를 취재했을 때 인순할머니는 70살이 곧 되여오는 오늘에도 그때 일을 잊을 수 없다고 필자와 말하였다. 극 구경 마치고 돌아온 후 성규와 혜순이는 웃방의 혜순의 낮은 책상우에 걸터앉아 서로 팔을 끼고 책을 보았는데 혜순이 어머니는 방문을 빠끔히 열고 들여보다가 자기가 부끄러워 도리여 제꺽 방문을 닫아버렸다고 한다.

1926년 혜순의 집은 화룡현 룡두산으로 이사하였다. 소성규의 뜻이였다. 그때 성규의 집은 이미 수성촌서 룡수평 룡두산 장경촌에 이주하여 생활하고 있었고 1926년 이해 소성규는 조선공산당 동만도(엠엘파)당원으로 활동하다가 인차 조선공산당 동만도 공청책임자로 승격하였다. 혜순이는 중학교를 중퇴하고 룡두산에 가서 소성규를 도와 지하혁명투쟁에 나섰다. 그때 성규는 낮과밤이 따로없이 룡정 등지에서 맹활동하고 있었다.

소성규는 혜순이네가 룡두산으로 이사하였다는 말을 듣고 인차 혜순이네 집에 나타났다. 그는 양복차림에 넥타이까지 매였는데 손에 개화장까지 척 잡으니 제법 신사 같았다. 이런 차림이면 적들이 감히 범접하지 못한다고 하는 소성규이다. 그날 저녁 성규는 뒤방 혜순이 칸에서 오랜만에 만난 혜순이를 꼬옥 품에 안았는데 둘이 학교 시절 얘기 등으로 웃고 떠들며 춤추며 상봉을 즐기는데 어린 인순이는 그 장면을 깰가봐 감히 뒤방문을 열지 못하였다 한다. 그후에도 올 때면 언제나 조용히 바깥 뒤방문을 ‘똑똑’ 노크하고 들어섰다는 성규이다.

그 무렵에 소성규는 결혼식을 선포했다. 결혼식이라야 밤중에 동지 몇을 청하여 간단히 술상을 나누고 동지들은 과자 약간으로 축하하니 끝이였다. 혁명가만이 할 수 있는 신식결혼식, 소성규와 홍혜순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였다.

1928년 9월 3일, 조선공산당 동만도 엠엘계통에서는 국제무산청년절을 맞으며 룡정, 국자가를 중심으로 수천명 청년학생들이 참가한 반일대시위를 단행하였다. 소성규는 반일대시위의 주요획책자와 지도자의 한 사람이였다.

“일제침략세력을 몰아내자!”

“조선의 절대적 독립을 이룩하자!”

연변땅에 울려퍼진 구호소리는 하늘땅을 진감하였다. 간도일본총령사관의 군경들이 동원되여 시위참가자 72명을 체포하였는데 이것이 세칭 ‘제2차 간도공산당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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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이 소성규 등 지도자들에게 주는 교훈은 심각했다. 단지 피타는 시위만으로 풀 수 없는 사회현실이 아니던가. 이에 소성규는 이 해 (1928)겨울에 룡정에서 동지들인 김철, 강학제, 황기범, 김광진 등과 함께 7명으로 구성된 무장단체 ‘철혈단(铁血团)’을 꾸리고 자금을 준비하여 반일무장을 조직하며 특무와 주구를 숙청하며 무장투쟁을 진행하는 것을 주요과업으로 내세웠다.

1929년 봄에 강학제 등은 북만의 녕안에 가서 강습반을 꾸리고 수백명 남녀투사를 키우는 일에 나섰다. 소성규는 1926년 이후부터 조선공산당 엠엘계통의 뿌리를 박아가던 화룡현 평강벌을 자주 찾았다. 소성규는 안해 홍혜순과 아버지, 삼촌들 그리고 여러 동지들과 손잡고 평강벌 각지에서 조선공산당 건당사업을 활발히 벌리였다. 하여 1926년부터 1928년 사이 20년대 후기에 이르러 수성촌과 룡두산을 중심으로 한 약수동, 어랑촌, 쟈피거우, 중평리, 대동구, 초남구, 청지허 등 해란강량안에 조선공산 동만도 엠엘계통의 세포조직들이 륙속 뿌리를 내리였다.

소성규의 안해 홍혜순은 조선공산당 화룡현 룡두산세포조직 책임자로 나섰다. 이 세포엔 성규의 둘째 삼촌 소승언, 셋째삼촌 소승범, 넷째 삼촌 등도 망라되였는데 혜순은 회의 때 마다 시삼촌들을 “소동무, 소동무!”하고 불렀다. 혜순이 친정어머니가 시삼촌들을 어찌 동무, 동무 하는가고 나무라자 혜순이는 “회의 할 때면 동무라 해야지, 삼촌이라 하겠는가”며 저도 우습다고 깔깔 웃었다. 성규는 당내에서는 나이 관계, 친척 관계에 구애되지 말아야 한다면서 안해 혜순의 ‘동무’란 부름을 견결히 지지하여나섰다.

홍혜순은 룡두산일대에서 반일계몽사업을 활기차게 벌리였다. 당시 봉건사상에 물젖은 사람들은 녀자들이 공부하는 걸 한사코 반대하였다.

“공부를 해야지요. 공부를 해야 자유를 찾을 수 있고 지식이 있어야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요. 수레가 외바퀴로 구을 수는 없잖아요. 사회문제도 마찬가지예요. 남성들의 힘만으로는 모자라지요…”

  혜순이는 마을에서 덕망이 높은 년장자들을 찾아 많이 이야기함으로써 그들의 역할을 효과적으로 발휘시켰다. 그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녀성야학생은 수십명으로 늘어나고 사립학교가 활기를 띠였다. 한편 혜순은 학생들에게 혁명사상을 고취하는 한편 룡두산, 약수동, 장인강, 투도구를 망라한 평강일대의 산과 들을 주름잡으며 항쟁의 불길을 곳곳에 지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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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10월 2일, ‘제2차 간도공산당사건’을 거치면서 사립룡산학교가 문을 닫고 성규의 아버지와 셋째 삼촌이 군벌군대에 체포되여 연길감옥으로 압송되였다. 그들은 3년 징역살이를 해야만 했다. 했으나 소성규는 그로하여 질겁하지 않았으며 온 평강벌을 혁명의 불도가니로 펄펄 끓게 하였다.

그 바쁜 나날에도 소성규는 안해의 해산달을 잊지 않았다. 1929년 정월에 다부산자 차림에 손에 부채를 쥔 성규가 집문을 열고 들어섰다. 마침 안해 혜순이는 난산이여서 집안사람들은 쩔쩔 매고 있었다.

“이걸 어쩌나?”

그 시각 소성규는 차분함을 잃고 의사를 데려오겠다며 두도구로 내달렸다.

“이거 야단났구나. 도처에서 성규를 잡느라고 아우성인데.”

성규 장모가 발을 동동 굴렀다. 재빠른 인순이가 달려나가며 아저씨를 불렀다. 그제야 성규는 제정신이 들었다. 다행히 혈육들이 만사 불구하고 마을의 민간의사를 청해와 새 생명은 드디여 어머니의 모진 진통 속에서 이 세상에 광림하였다.

산모도 무사하고 성규도 무사하였다. 량심 있는 민간의사는 성규의 출현을 눈감아주었다. 밀고하지 않았다. 성규는 새 생명이 딸애라고 경자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리곤 다시 피어린 일제와의 싸움터로 달려갔다. 연변을 들썽케 한 1929년말과 1930년초의 조선 광주학생 성원 반일시위를 성규는 동지들과 더불어 성공적으로 지도하였다.

1930년 4월, 중공만주성위에서는 중공동만특별지부를 도와 ‘붉은 5월투쟁’을 발동하여 투쟁 가운데서 원  조선공산당 당원들을 검열하고 당조직에 받아들이게 하기 위하여 조선족 박윤서를 연변에 파견하였다. 박윤서는 원 조선공산당 엠엘파 만주총국의 수령인물이였다. 이때의 박윤서는 이미 중공당원(1930년 3월에 입당)이였다.  같은 해 4월에 그는 동지들인 김철, 강학제, 소성규 등을 중국공산당에 받아들이고 이들을 주체로 ‘5.1투쟁행동위원회’를 조직하였다.

5.1투쟁행동위원회는 만주성위의 지시에 근거하여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토지혁명을 실시하고 쏘베트정부를 수립하자!” 등 구호를 제기하고 투쟁책략을 확정하였다. 김철이 5.1투쟁의 총지휘를 맡고 강학제가 폭동지휘를 맡았으며 소성규는 평강구 쪽에 파견되여 그 지구의 민중을 발동하기로 하였다. 소성규는 또 중공당원이며 황포군관학교 출신인 동지 신춘을 약수동에 보내여 호응하게 하였다.

5월 1일, 룡정의 200여명 로동자들이 동맹파업을 단행하여 ‘붉은 5월 투쟁’의 서막을 열어놓았다. 소성규는 신춘 등을 지도하여 그들이 약수동의 수백명 농민군중들을 지휘하여 즉시 반제반봉건시위를 단행케 하였다. 소성규의 지도하에 약수동과 그 일대의 투쟁은 5월 하순에 이르러 토지혁명단계에로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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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소성규는 박윤서를 안내하여 직접 약수동에 가 구체적으로 지도하면서 쏘베트정권 수립 사업을 힘있게 추진하였다. 5월 27일, 약수동 상촌의 팔간집 마당에서 끝내 약수동쏘베트정부가 수립되였다.

수백명 군중들은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빈고농민들에게 나누어주자!”, “쏘베트수립을 옹호한다!” 등 구호를 높이 부르며 련속 사흘 동안 시위투쟁을 가지였다. 이 기간 일제주구 몇이 처단되고 지주와 고리대금업자들의 재산이 몰수되여 빈고농민들에게 분배되였으며 그자들의 고리대문서와 소작료계약서 등이 소각되였다.

약수동쏘베트정부의 수립은 연변 5월투쟁의 고조를 상징한다. 이 쏘베트정부는 연변 뿐만 아니라 전 동북에서도 첫번째로 세워진 인민의 정권이였다.

5월 30일, 망국의 비운이 짙게 덮였던 연변땅에는 봄우뢰마냥 천지를 진감한 5.30폭동이 일어났다. 이에 앞서 중공동만특별지부에서는 상해의 5.30사건 5돐을 계기로 이 농민폭동을 기획하였는데 소성규가 또 평강구에 파견되였다. 그는 연길현 상의향 세린하의 와룡동 김윤봉의 집에서 리주현(중평리), 장룡석, 손철운(약수동), 김윤봉(세린하), 박태진(강성촌), 서명화(룡수평), 김갑(강성촌), 리영근(소오도구) 등 각지 대표들이 참가한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폭동지시를 전달하고 토의하였다.

회의에서는 두도구의 일본령사분관, 조선인거류민회, 일제보통학교, 상부국, 중국륙군병영, 공안국과 친일주구를 폭동의 주요공격목표로 정했으며 폭동시간을 결정한 다음 폭동대를 파괴, 방화, 응원 3개 대로 나누고 행동부서를 구체적으로 짰다. 폭동대는 해란강을 계선으로 수남, 수북대로 나누었다. 소성규는 또 안해 홍혜순과 련계를 가지고 수남폭동대의 준비와 지휘를 빈틈없이 짜고들 것을 부탁하였다.

폭동준비가 비밀리에 긴장하게 진척되였다. 해란강 이남의 대동구(화수), 수평동, 소오도구 등지의 혁명군중들은 홍혜순, 오창길 등의 지도하에 여러 마을에 있는 렵총들을 새잡이를 한다는 명의로 거두어들였으며 폭죽을 준비하고 작탄을 만들었다. 해란강 이북의 약수동, 장인강, 세린하 등 일대의 혁명군중들은 박세진 등의 지도하에 렵총 18자루와 석유, 솜 등을 장만하였다.

5월 30일 밤, 해란강 이남의 폭동대는 홍혜순(렬사), 오창길(렬사), 김응수(렬사) 등의 지휘하에 두도구 남쪽 해란강 다리목 버들방천에 와 매복하였다. 해란강 이북의 폭동대는 박세진(렬사), 박상활(렬사), 리경천(렬사) 등의 지휘하에 약수동과 그 주위의 산등성이에 보초를 세우고 두도구 신흥소학교 뒤 북산언덕에 대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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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밤 11시, 민회사무실에 불이 일자 수남, 수북 폭동대들은 각자의 분공에 따라 일시에 행동을 개시하였다. 응원대들은 렵총을 쏘았고 폭죽에 불을 달아 석유통에 넣었다. 총소리, 폭죽소리에 놀란 두도구 일본령사분관의 경찰들은 겁에 질려 시내에 나오지도 못하고 령사분관 벽돌담장에 숨어 눈먼 총질만 하였고 중국 상부국 경찰들도 집안에 처박혀서 머리도 내들지 못했다.

수북, 수남 폭동대들은 두도구시내의 조선인민회 사무실과 몇몇 친일주구의 집에 불을 달고 곳곳에 작탄을 던지고 일본령사분관에 대고 총질을 하였다. 령사분관 담벽에 탄알자욱이 어수선했다. 방화와 파괴 임무를 완수한 폭동대는 “만세!”를 부르고 반일구호를 웨치면서 시내에서 철수하여 귀로에 올랐다. 이날 새벽 사도구(룡호촌)의 일본보조서당도 홍혜순이 이끄는 수남폭동대에 의해 타버렸다.

이도구의 혁명군중은 이날 밤 구산장(서성진)에 있는 보조서당과 조선인민회 사무실을 태워버리고 삼도구ㅡ투도구, 구산장ㅡ와룡호, 장인강으로 통하는 전화선을 끊어버렸으며 몇몇 주구들 집에 불을 질렀다.

소성규가 면밀히 짜고들며 전면 지도한, 두도구를 중심으로 한 평강벌 해란강 량안의 5.30폭동은 원 조선공산당 엠엘계통과 화요계통이 힘을 합쳤기에 비교적 원만한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지난 반일 군중투쟁에서 종래로 있어본 적이 없는 일로 원 조선공산당의 파벌에서 벗어난, 중공당원으로서의 소성규의 넓은 도량과 투쟁예술을 보여준다.

일제놈들은 당황해났다. 5.30폭동이 룡정, 두도구, 이도구, 삼도구와 천도철도연선을 중심으로 하여 넓은 범위내에서 일제히 터졌으니 그럴만도 하였다. 간도일본총령사관 총령사는 간담이 서늘해서 일본 척무성과 외무성에 급전을 쳐 증원병력을 요구하였는데 조선총독부는 일본경찰 200여 명을 출동시키기로 하였다.

  1930년 5.30폭동 직후 룡정은 말 그대로 살풍경을 이루었다. 1932년 4월 22일자 《동아일보》 제2면 관련 기사에 따르면 간도일본총령사관에서 소속 경찰들을 풀어 온 시내를 샅샅이 누비며 검거선풍을 일으키는 바람에 폭동사건 관련자 1000여명이 련이어 체포되였다. 그중 600여명이 룡정의 간도일본총령사관을 거쳐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압송되였다.

연변일보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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