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약수동적위대 대장 손태익과 항일녀영웅 김순희 (2)
조글로미디어(ZOGLO) 2021년12월13일 10시05분    조회:415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4

알고 보면 김순희는 룡정 동흥중학교 재학시절에 연해주에서 온 안정로를 알고 있었다. 1932년 봄 안정로는 공청단평강구위 서기직을 맡고 룡정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김순희는 안정로를 통하여 약수동이 중공평강구위와 중공화룡현위의 소재지이며 동북에서 첫 인민정권 쏘베트가 선 고장이란 것을 알게 되였다. 또한 약수동적위대 부대장이며 당지부 서기인 손태익의 9살 되는 아들과 7살 되는 딸애가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의 슬하에서 자라며 모성애를 바란다는 것도 알았다.

약수동이 김순희를 수요했으며 두 어린이가 어머니를 바라고 있었다. 김순희는 안정로의 뜻을 알아차리고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1932년 2월과 3월에 두차례에 걸쳐 비밀리에 약수동에 가서 손태익을 만나보았고 약수동의 투쟁형편을 다소 헤아리게 되였다. 그때 김순희는 이미 중공당원이였다.

손태익 전처의 아들인 손성찬도 후어머니인 김순희의 래력을 알지 못한다고 필자와 터놓았다. 손성찬과 만난 날은 1981년 8월 3일, 장소는 손성찬이 살고 있는 연길현 세린하공사 일신대대 1대 대회동(大灰洞)마을이였다.

“나는 1947년에 참군해서 후에는 항미원조에도 나섰다. 7~8년 부대생활을 하고 돌아와서 대대 주임, 당지부 부서기 등 책임을 맡았다. 나도 어머니 김순희 래력을 알기 위해 여러 면으로 힘써 보았지만 지금껏 알아내지 못하였다. 해방 후 항일련군 출신 강위룡도 만나보았다. 할빈에서도 다녀가고 연변박물관에서도 다녀갔다. 투도의 중학교 학생들도 다녀가면서 왜서 어머니에 대해 잘 모르는가며 캐여묻기도 하였다.”

안타깝지만 정말 그럴 수밖에 없은 손성찬이다. 9살 때의 일이여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조직의 비밀이라 누구도 모른다는 데서 기인된 듯싶다. 아버지 손태익에 대해서도 거의 잘 알지 못한다. 필자도 혁명활동에 참가하기 전 손태익을 잘 모르는 실정이다.

관련 자료에 따르면 1932년 봄 공청단평강구위 아동국장으로 활동한 황순옥은 1970년 11월 15일 인터뷰에서 손태익은 약수동 중촌사람이라고 말하였다. 약수동 출신 항일투사 원희숙(元姬淑)은 화룡현 관련 자료(1970년 11월 8일)에서 “나는 약수동에서 살면서 손태익을 알게 되였는데 그는 1930년 5.30폭동 이전부터 혁명사업을 하였다. 내가 1930년 7월분에 농민협회에 참가하여 보초를 서는 임무를 집행할 때 손태익은 적위대 책임(적위대 부대장임)을 지고 있었다.”고 밝히였다.

 

5

1984년 2월 23일, 중공화룡현위 당사연구실 시절 화룡현성에서 약수동 출신 손경하(孙京夏) 로인을 취재할 때 들은 이야기이다.

“손태익은 나의 9촌 조카이고 손태익과 손철운(항일렬사)은 사촌간이다. 손태익의 아버지는 손영세(孙永世)이고 손철운의 아버지는 손영준(孙永俊)으로 통한다. 아버지는 손철운이 15살쯤 될 때 병으로 사망해 생활이 아주 구차하였다. 손철운의 어머니는 홀몸으로 손철운과 손경숙 오누이를 데리고 근근득식 살았다.

손철운에게 있어서 손태익은 여러살 터울의 형님이였다. 둘은 사촌형제답게 시도 때도 없이 잘 어울리였다. 손태익은 커서 장가들면서 약수동 녀성인 정명화의 녀동생 정응화(?)를 안해로 맞아들이였다. 그들 사이에 성찬이와 금순 두 오누이가 태여났지만 이들 오누이가 아직 어릴 때 정응화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손철운도 장가를 갔다. 장인은 성이 조씨이다. 손철운의 어머니는 농사일을 잘 몰랐기에 식량이 늘 딸리였다. 우리 아버지는 농사를 잘했기에 식량이 넉넉했고 철운이네 쌀이 떨어지면 늘 갖다주군 하였다. 손태익도 가끔 도와주군 하였다.

그 세월 5월 단오날이면 약수학교를 중심으로 한 주변 사립학교들에서는 약수동 뒤의 관지팡 중촌에서 운동회를 가지였다. 약수동 주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다 보니 운동회는 번마다 흥성흥성하였다. 부근의 여러 마을 중국인들이 타래떡이랑 가지고 와서 팔았다. 운동은 달리기 등 륙상경기와 그네, 널뛰기 등이 인기종목을 이루었고 축구도 신바람이 났다.

1930년 그 시절에도 운동회는 성수가 났다. 그때 약수동 중촌에 사는 손철운이 관지팡에서 사는 나보고 소선대에 가입하라고 하였다. 그때 관지팡은 크게 세개 마을로 이뤄졌는데 상촌 20여호, 중촌 10여호, 하촌 약 30호를 이룬, 규모가 꽤 되는 마을이지만 혁명활동이 흥기한 약수동 다른 마을에 비해 뒤지고 있었다. 손철운에 이어 손태익도 그 권고를 잊지 않았다. 내가 손태익이랑 보고 소선대에 참가해서 뭘 하는가고 물으니 보초도 서고 통신도 하면 된다고 하였다. 통신을 우리 말로 쉽게 심부름 다닌다고 한다.”

소중한 한편의 취재기록이다. 지금 봐도 약수동과 혁명가로서의 손태익, 손철운 등의 초기 모습을 엿볼 수 있어 다행이다. 여기에 이어 화룡현당위 당사연구실 시절 손태익 관련 회고자료와 생졸년 관련 략력도 찾아 볼 수 있었다지만 어인 영문인지 근 40년 세월이 흐른 오늘날 손태익 연구자료들이 어디 갔는지 보이질 않는다. 출생년도 찾을 수가 없어서 화룡시와 룡정시에서 생활하는 손태익의 딸 손금순의 두 아들인 심일수씨와 심영수씨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6

일전 그들이 룡정시제대군인사무국에 가서 손태익 렬사 자료를 찾아본 결과 출생일이 1898년 11월로 밝혀졌다. 사촌동생 손철운은 1904년생이다. 손철운은 조선에서 태여나 어릴 때 부모를 따라 약수동 상촌으로 이사 왔다지만 손태익 출생지가 어디인지, 가족관계는 어떠한지, 어느 학교를 다녔는지 알지 못한다. 지난 세기 20년대 중반 혁명활동에 참가하면서부터는 손태익의 발자취가 비교적 잘 알려지는편이다.

손태익 렬사명부와 여러 연구자료, 취재자료를 검토하면 당년의 연길현 수신향 약수동은 지난 세기 20년대 중엽부터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산하 동만도 엠엘계통이 뿌리박히면서 혁명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손태익은 사촌동생 손철운 등과 더불어 농민협회와 반일회 등 혁명단체에 참가하면서 혁명가의 생애를 시작하였다.

먼저 1928년과 1929년을 보기로 하자.

이해 5월 1일에 약수학교와 협동학교(지금의 룡문소학교 전신)의 학생들이 반일련합시위투쟁을 벌리였다. 손태익, 손철운 등은 시위투쟁의 주력이였다. 그들은 이날 동지들과 더불어 청년들을 이끌어 시위에 가담하면서 렵총을 쏘아대는 한편 “일본제국주의를 이 땅에서 몰아내자!” 등 구호를 높이 부르며 나아갔다.

1년 남짓한 후인 1929년 11월 26일, 이날도 사립약수학교의 학생들은 원근의 룡평, 신흥 사립학교의 학생들과 함께 동맹휴학을 선포하고 약수동, 투도구, 청지허, 세린하 등지의 학생들과 더불어 투도구 토기막거리에서 출발하였다. 손태익과 손철운 등은 약수동과 그 일대의 청년들을 이끌고 시위대렬의 앞에서 진란거리를 나섰다. 시위자들은 저마다 손에 붉은 천으로 만든 작은 삼각기를 들었는데 흩날리는 삐라는 눈송이 같았다.

시위대렬이 거리를 메우며 나아갔다. 구호소리는 천지를 진감하였다. 급해맞은 투도일제령사분관의 무장경찰들이 우르르 시위대렬을 해산시키려고 날뛰였다. 그 서슬에 적지 않은 시위골간들이 끌려갔다. 손철운도 나무기둥을 촘촘히 세운 령사관 류치장에 10일간 갇히였지만 손태익은 다행히 체포되지 않은 걸로 알려진다.

  연변을 들썽한, 조선광주학생운동을 지지성원하는 학생반일시위투쟁은 룡정을 중심으로 약수동과 주변에서 세차게 번져갔다. 이 투쟁은 1929년 11월부터 이듬해 1930년 3월까지 지속되였다.

연변일보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18
  • 1966년 이른 봄 어느날, 도문시 외사과의 주동현 과장과 시인사국책임자로 기억되는 남현후씨가 나를 찾아왔다. 그때 나는 왕청현 석현진 수남대대 7대(달라자) 정치대장과 공청단 지부서기를 담임했었다.     손님들이 나를 찾아 온 사연이다.   ㅡ 우리가 달라자에 훌륭한 농업기술원을 소개 할터니...
  • 2022-05-29
  • 이는 20세기 50년대말 혹은 60년대초 음력설에 연길시에서 찍은 귀중한 사진이다. 이 사진 속 중산복 차림에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넘긴 남성은 중공연변조선족자치주 제1임 주당위 서기이며 주장인 주덕해(본명: 오기섭)이고 옆에는 그의 부인과 네 자녀이다.   오영채(뒤줄 중간), 오양청(앞줄 왼쪽 첫번째)   ...
  • 2022-05-26
  • 한진(韩震, 1900-1936)은 1900년에 서울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태여났다. 중학시절에 진보단체인 ‘반일애국기독교청년회’에 참가했고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 1928년에 반일투쟁에 참가하기 위하여 가족의 반대도 무릅쓰고 길림성 반석현에 와서 반일단체를 찾았다. 그는 반석현의 초석산소학교에서 교사로...
  • 2022-02-18
  • 리송파(李松波, 1904-1935)는 일명 최송파라고도 하며 1904년에 반석현 역마박자(驿马泊子)의 한 빈곤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1930년 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그해 8월에 중공반석중심현위에서 조직한 특무대에 가입하여 당의 주장을 선전하고 감조감식 등 투쟁에 적극 참가했으며 1931년에는 특무대 대장을 맡게...
  • 2022-02-18
  • 4 알고 보면 김순희는 룡정 동흥중학교 재학시절에 연해주에서 온 안정로를 알고 있었다. 1932년 봄 안정로는 공청단평강구위 서기직을 맡고 룡정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김순희는 안정로를 통하여 약수동이 중공평강구위와 중공화룡현위의 소재지이며 동북에서 첫 인민정권 쏘베트가 선 고장이란 것을 알게 되였다. 또한 약...
  • 2021-12-13
  • 1 지난 세기 30년대 항일의 봉화가 드세게 타오른 연변 화룡땅에는 연변의 첫 녀성 당지부 서기이며 동북 경내의 첫 녀성 당지부 서기인 홍혜순과 이름난 혁명가인 그의 남편 소성규가 활동하고 있었다. 소성규는 물론 홍혜순의 최후와 희생이 그 시절 《동아일보》에 실리기도 했다. 1931년 1월 14일자 《동아일보》 제7면...
  • 2021-11-15
  • 1 1930년 중국공산당 동만특별지부가 지도한 연변 ‘5.30’폭동의 총책임자는 김근이고 실제 총지휘자는 김철(金哲, 1902ㅡ1930)이다. 김철은 일명 김창호(金昌昊)라고도 하는데 1902년 태생이다. 유감스러운 것은 그의 고향이 어디고 가정형편은 어떠하고 어느 학교를 다녔으며 초기투쟁은 어디에서 나섰는지 ...
  • 2021-08-23
  • 한청(1912-1996), 성은 신(慎)이고 이름은 익성이다. 혁명사업의 수요에 따라 이름을 선후로 신해룡, 장원복, 고바야시 신사부로(小林慎三郎), 신억 등으로 고치였고 8.15광복후 한청(韩青)이라고 고친 후 계속 그 이름을 썼다.   한청은 1912년 12월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모동리 무월동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
  • 2021-08-11
  • 이날은 중화민족의 력사에서 휘황찬란한 날이다. 2021년 7월 1일, 위대하고 영광스럽고 정확한 중국공산당이 창건 100돐을 맞이했다! 100년 전의 7월에 중국공산당이 창건되였다. 이때부터 갖은 시련을 겪어온 중화민족은 궐기, 부흥의 길에 올랐고 이때부터 수많은 중화의 아들딸은 견정한 신앙, 앞길을 밝혀주는 등불, 전...
  • 2021-07-01
  • 중화민족 대가정의 일원으로 조선족은 중국공산당의 정확한 지도하에 항일전쟁, 해방전쟁, 항미원조전쟁을 거치며 초기 중국공산당원들인 한락연, 양림, 리홍광, 리복림, 마덕산, 배치운, 서광해 등을 필두로 수많은 렬사들이 귀중한 생명을 바쳤다. 사회주의 건설시기에도 주덕해, 조남기, 리민, 문정일, 리영태, 김인섭,...
  • 2021-05-27
  •  류옥하(한락연의 부인) 내가 보유하고 있는 락연의 유작중 한두폭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그가 1944년부터 1947년까지 서북지역에서 창작한 작품이다. 우리는 1944년에 란주에 도착했다. 그 해에 그린 그림은 란주와 란주 부근의 풍경과 인민생활이 위주다. 1945년 봄에 그는 청해 탑이사를 방문했고 탑이사에서 ...
  • 2020-11-10
  • ▨ 류옥하(한락연의 부인) 락연은 배우기를 좋아했고 그림을 좋아했다 락연은 나에게 그는 동북의 연변 룡정에서 태여났고 어릴 적에 생활이 매우 가난했다고 말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지만 아버지는 그림에서 곡식이 생기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림을 배우지 못하게 했다. 그는 할 수 없이 마을 외...
  • 2020-11-09
  • ▨ 사효명(史晓明) 세상에 둘도 없는 키질석굴은 신강 배성현 키질향 동남으로 약 8키로메터 떨어진 명옥타걸산의 깎아지른듯한 절벽에 있다. 현재 236개 동굴에 번호가 매겨져있다. 동굴내 벽면에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이른 불교벽화 예술이 약 4,000평방메터의 면적으로 보존되여있는데 그 년대는 대략 기원 3세기에서 ...
  • 2020-10-27
  • 반춘방의 아들 이종화는 전 북경 인민무장경찰부대 문공단 악대 대장으로 음악인이고 군관이다 “오막살이 우리 집에 새 아침 왔다네” 솔직히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노래를 즐겼는데 이 때문에 뜻밖에도 군복을 입게 되었던 것이다. 노래는 마치 오색구름처럼 그...
  • 2020-10-20
  • 민족의 숙망 실현, 주덕해 자치구 제1임 서기로 당선 수천만 인파 거리에 떨쳐나서 북장고 울리며 환호 국경 첫돐에 드리는 겨레의 선물 중화인민공화국의 창립이 어제 같은데 벌써 국경 첫돐을 맞이하게 되였다. 당과 정부에서는 전국의 소수민족 대표와 소수민족문공단 배우들을 북경에 초청하여 함께 명절을 쇠도록 마련...
  • 2020-09-08
  • 9월 1일, 이름난 항일민족영웅이며 동북항일련군 주요 창건자와 지도자인 양정우 장군 순국전 전투 서류가 최초로 공포되였다. 서류는 희생되기전 100여일간 양정우가 부하들을 거느리고 일본군, 위만군 경찰들과 벌린 47차의 전투 과정을 진실하게 기록함으로써 동북항일련군 연구에 참신한 자료를 제공했다. 길림성서류관...
  • 2020-09-07
  • 신문 창간 출판물 간행해 공산당 로선 방침 정책 선전 예술일군들 국경 1주년에 북경서 공연 관중들의 절찬을 도서간행물 출판 사업 1945년 8월, 쏘련홍군과 항일련군이 연변에 진주하자 괴뢰만주국의 간도성공서와 모든 기관들이 재빨리 와해되여 연변 여러 민족 인민들은 일본침략자들의 기반 밑에서 해방되였다. 우리 민...
  • 2020-08-27
  • 조선민족 유지인사들 민족대학 세우려고 동분서주 《연변일보》 연변인민방송국 민족언어로 출판 방송 연변대학 창립 동북이 해방되자 우리 민족들은 자기 민족 대학을 세우려는 열의로 들끓었다. 1948년 12월, 연변전원공서 전원 림춘추는 이러한 민족의 념원을 안고 길림성민족사업좌담회에 참가하여 연변에 조선민족대학...
  • 2020-08-03
‹처음  이전 1 2 3 4 5 6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