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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면 김순희는 룡정 동흥중학교 재학시절에 연해주에서 온 안정로를 알고 있었다. 1932년 봄 안정로는 공청단평강구위 서기직을 맡고 룡정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김순희는 안정로를 통하여 약수동이 중공평강구위와 중공화룡현위의 소재지이며 동북에서 첫 인민정권 쏘베트가 선 고장이란 것을 알게 되였다. 또한 약수동적위대 부대장이며 당지부 서기인 손태익의 9살 되는 아들과 7살 되는 딸애가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의 슬하에서 자라며 모성애를 바란다는 것도 알았다.
약수동이 김순희를 수요했으며 두 어린이가 어머니를 바라고 있었다. 김순희는 안정로의 뜻을 알아차리고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1932년 2월과 3월에 두차례에 걸쳐 비밀리에 약수동에 가서 손태익을 만나보았고 약수동의 투쟁형편을 다소 헤아리게 되였다. 그때 김순희는 이미 중공당원이였다.
손태익 전처의 아들인 손성찬도 후어머니인 김순희의 래력을 알지 못한다고 필자와 터놓았다. 손성찬과 만난 날은 1981년 8월 3일, 장소는 손성찬이 살고 있는 연길현 세린하공사 일신대대 1대 대회동(大灰洞)마을이였다.
“나는 1947년에 참군해서 후에는 항미원조에도 나섰다. 7~8년 부대생활을 하고 돌아와서 대대 주임, 당지부 부서기 등 책임을 맡았다. 나도 어머니 김순희 래력을 알기 위해 여러 면으로 힘써 보았지만 지금껏 알아내지 못하였다. 해방 후 항일련군 출신 강위룡도 만나보았다. 할빈에서도 다녀가고 연변박물관에서도 다녀갔다. 투도의 중학교 학생들도 다녀가면서 왜서 어머니에 대해 잘 모르는가며 캐여묻기도 하였다.”
안타깝지만 정말 그럴 수밖에 없은 손성찬이다. 9살 때의 일이여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조직의 비밀이라 누구도 모른다는 데서 기인된 듯싶다. 아버지 손태익에 대해서도 거의 잘 알지 못한다. 필자도 혁명활동에 참가하기 전 손태익을 잘 모르는 실정이다.
관련 자료에 따르면 1932년 봄 공청단평강구위 아동국장으로 활동한 황순옥은 1970년 11월 15일 인터뷰에서 손태익은 약수동 중촌사람이라고 말하였다. 약수동 출신 항일투사 원희숙(元姬淑)은 화룡현 관련 자료(1970년 11월 8일)에서 “나는 약수동에서 살면서 손태익을 알게 되였는데 그는 1930년 5.30폭동 이전부터 혁명사업을 하였다. 내가 1930년 7월분에 농민협회에 참가하여 보초를 서는 임무를 집행할 때 손태익은 적위대 책임(적위대 부대장임)을 지고 있었다.”고 밝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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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2월 23일, 중공화룡현위 당사연구실 시절 화룡현성에서 약수동 출신 손경하(孙京夏) 로인을 취재할 때 들은 이야기이다.
“손태익은 나의 9촌 조카이고 손태익과 손철운(항일렬사)은 사촌간이다. 손태익의 아버지는 손영세(孙永世)이고 손철운의 아버지는 손영준(孙永俊)으로 통한다. 아버지는 손철운이 15살쯤 될 때 병으로 사망해 생활이 아주 구차하였다. 손철운의 어머니는 홀몸으로 손철운과 손경숙 오누이를 데리고 근근득식 살았다.
손철운에게 있어서 손태익은 여러살 터울의 형님이였다. 둘은 사촌형제답게 시도 때도 없이 잘 어울리였다. 손태익은 커서 장가들면서 약수동 녀성인 정명화의 녀동생 정응화(?)를 안해로 맞아들이였다. 그들 사이에 성찬이와 금순 두 오누이가 태여났지만 이들 오누이가 아직 어릴 때 정응화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손철운도 장가를 갔다. 장인은 성이 조씨이다. 손철운의 어머니는 농사일을 잘 몰랐기에 식량이 늘 딸리였다. 우리 아버지는 농사를 잘했기에 식량이 넉넉했고 철운이네 쌀이 떨어지면 늘 갖다주군 하였다. 손태익도 가끔 도와주군 하였다.
그 세월 5월 단오날이면 약수학교를 중심으로 한 주변 사립학교들에서는 약수동 뒤의 관지팡 중촌에서 운동회를 가지였다. 약수동 주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다 보니 운동회는 번마다 흥성흥성하였다. 부근의 여러 마을 중국인들이 타래떡이랑 가지고 와서 팔았다. 운동은 달리기 등 륙상경기와 그네, 널뛰기 등이 인기종목을 이루었고 축구도 신바람이 났다.
1930년 그 시절에도 운동회는 성수가 났다. 그때 약수동 중촌에 사는 손철운이 관지팡에서 사는 나보고 소선대에 가입하라고 하였다. 그때 관지팡은 크게 세개 마을로 이뤄졌는데 상촌 20여호, 중촌 10여호, 하촌 약 30호를 이룬, 규모가 꽤 되는 마을이지만 혁명활동이 흥기한 약수동 다른 마을에 비해 뒤지고 있었다. 손철운에 이어 손태익도 그 권고를 잊지 않았다. 내가 손태익이랑 보고 소선대에 참가해서 뭘 하는가고 물으니 보초도 서고 통신도 하면 된다고 하였다. 통신을 우리 말로 쉽게 심부름 다닌다고 한다.”
소중한 한편의 취재기록이다. 지금 봐도 약수동과 혁명가로서의 손태익, 손철운 등의 초기 모습을 엿볼 수 있어 다행이다. 여기에 이어 화룡현당위 당사연구실 시절 손태익 관련 회고자료와 생졸년 관련 략력도 찾아 볼 수 있었다지만 어인 영문인지 근 40년 세월이 흐른 오늘날 손태익 연구자료들이 어디 갔는지 보이질 않는다. 출생년도 찾을 수가 없어서 화룡시와 룡정시에서 생활하는 손태익의 딸 손금순의 두 아들인 심일수씨와 심영수씨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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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 그들이 룡정시제대군인사무국에 가서 손태익 렬사 자료를 찾아본 결과 출생일이 1898년 11월로 밝혀졌다. 사촌동생 손철운은 1904년생이다. 손철운은 조선에서 태여나 어릴 때 부모를 따라 약수동 상촌으로 이사 왔다지만 손태익 출생지가 어디인지, 가족관계는 어떠한지, 어느 학교를 다녔는지 알지 못한다. 지난 세기 20년대 중반 혁명활동에 참가하면서부터는 손태익의 발자취가 비교적 잘 알려지는편이다.
손태익 렬사명부와 여러 연구자료, 취재자료를 검토하면 당년의 연길현 수신향 약수동은 지난 세기 20년대 중엽부터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산하 동만도 엠엘계통이 뿌리박히면서 혁명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손태익은 사촌동생 손철운 등과 더불어 농민협회와 반일회 등 혁명단체에 참가하면서 혁명가의 생애를 시작하였다.
먼저 1928년과 1929년을 보기로 하자.
이해 5월 1일에 약수학교와 협동학교(지금의 룡문소학교 전신)의 학생들이 반일련합시위투쟁을 벌리였다. 손태익, 손철운 등은 시위투쟁의 주력이였다. 그들은 이날 동지들과 더불어 청년들을 이끌어 시위에 가담하면서 렵총을 쏘아대는 한편 “일본제국주의를 이 땅에서 몰아내자!” 등 구호를 높이 부르며 나아갔다.
1년 남짓한 후인 1929년 11월 26일, 이날도 사립약수학교의 학생들은 원근의 룡평, 신흥 사립학교의 학생들과 함께 동맹휴학을 선포하고 약수동, 투도구, 청지허, 세린하 등지의 학생들과 더불어 투도구 토기막거리에서 출발하였다. 손태익과 손철운 등은 약수동과 그 일대의 청년들을 이끌고 시위대렬의 앞에서 진란거리를 나섰다. 시위자들은 저마다 손에 붉은 천으로 만든 작은 삼각기를 들었는데 흩날리는 삐라는 눈송이 같았다.
시위대렬이 거리를 메우며 나아갔다. 구호소리는 천지를 진감하였다. 급해맞은 투도일제령사분관의 무장경찰들이 우르르 시위대렬을 해산시키려고 날뛰였다. 그 서슬에 적지 않은 시위골간들이 끌려갔다. 손철운도 나무기둥을 촘촘히 세운 령사관 류치장에 10일간 갇히였지만 손태익은 다행히 체포되지 않은 걸로 알려진다.
연변을 들썽한, 조선광주학생운동을 지지성원하는 학생반일시위투쟁은 룡정을 중심으로 약수동과 주변에서 세차게 번져갔다. 이 투쟁은 1929년 11월부터 이듬해 1930년 3월까지 지속되였다.
연변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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