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세 사람이 있습니까?”
눈을 감고 지나온 삶을 떠올려 본다. 괜히 가슴 시리게 외로운 날, 몇백 명의 전화번호가 담긴 핸드폰 전화번호부를 아무리 뒤져도 딱히 불러낼 사람이 없는 것처럼 막막한 기분이다. ‘진심으로’라는 말에 담긴 무게가 무섭게 다가온다.
여기 한 여자가 있다. 스물일곱 살 그녀는 부잣집의 철부지 외동딸로 태어나 그저 세상을 밝게만 보며 자라왔다. 부유하고 다정한 부모님, 덜렁대고 어리광쟁이인 그녀를 밀어주고 끌어주는 소중한 친구들, 능력 있고 세심한 약혼자의 울타리 속에서 삶을 사랑하며 행복했다.
그런 그녀가 결혼식을 일주일 앞두고 교통사고를 당해 뇌사상태에 빠진다. 사실 그녀는 사고를 당할 운명이 아니었는데, 어떤 여자의 자살 시도로 인해 봉변을 당했다. 충격으로 몸에서 튕겨져 나온 영혼이 어찌할 바를 몰라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 저승사자(스케줄러)가 난감하고 귀찮다는 얼굴로 그녀 앞에 나타나 “운전 똑바로 못하냐!” 호통부터 친다. 그러곤 때가 아닌데 죽게 됐으니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며, 49일의 유예기간 동안 그녀를 위해 진심으로 울어주는 세 사람의 눈물을 모아오라고 한다. 단, 혈육은 제외하고.
SBS 수목 드라마 ‘49일’은 이렇듯 행복의 정점에서 순식간에 죽음의 문 앞으로 내팽개쳐진 주인공 신지현을 통해 우리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사랑과 오해, 우정, 자기애, 자존심, 애증, 돈, 집착 등 인간의 순수하고 추한 본성을 여실히 드러낸 드라마 ‘49일’에서 데이터뉴스는 세 가지 통계 키워드를 찾았다. 친구, 자살, 빈부격차다.
친구 - 함께 있을 때 즐거운 존재
신지현에게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절친하게 지낸 두 친구 신인정과 박서우가 있다. 자신의 결혼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축하해줄 신부 들러리는 생각할 필요도 없이 이 둘의 몫이다. 셋이 드레스를 입고 서 있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문득 ‘만약 우리 셋이 모두 똑같은 드레스를 입고 결혼한다면 얼마나 멋질까?’ 하고 생각한 지현은 상기된 얼굴로 친구들에게 “이 드레스 너희도 입어라. 우리 셋이 다 똑같은 드레스를 입고 결혼하는 거야”라며 흥분해 소리친다. 지현은 인정, 서우와 함께하는 매일이 즐겁기만 하다. 자신을 단순여왕 긍정공주라 핀잔하면서도 이해하고 사랑해주는 이 친구들에게라면 무엇을 줘도 아깝지 않다. 그렇기에 진심이 담긴 세 사람의 눈물을 모아오라는 스케줄러의 말을 듣고 지현은 곧바로 두 친구를 떠올린다. 세 사람의 눈물 정도야 금세 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솟아오른다.
함께 있으면 즐거운 것. 우리나라 청소년이 친구를 고르는 첫 번째 기준이다. 친구 선택의 기준을 묻는 여성가족부 조사(2011년3월)에서 28.6%의 청소년이 친구는 함께 있을 때 즐거워야 한다고 답했다. 다음으로는 나를 잘 이해해주고(26.1%) 성격이 좋아야 한다(20.3%)는 답변이 이어졌다. 그 밖에 ▲친구들과 잘 어울려야 한다(8.3%) ▲취미가 비슷해야 한다(6.5%) ▲재주가 있어야 한다(2.6%) 등이었다.
자살 - 이제 그만 끝내고 싶어
영혼 상태인 지현은 49일간 송이경이라는 여자의 몸을 빌려 살게 된다. 이경은 새벽 2시부터 아침 9시까지 편의점에서 야간아르바이트를 하므로 그녀가 잠을 자는 낮 시간에 지현이 이경의 몸을 입고 활동하는 것이다. 이경은 5년 전 사랑했던 연인이 오토바이 사고로 죽은 뒤 세상에 마음을 닫고 죽은 듯이 살아왔다. 괜찮은 호텔 일자리를 그만두고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고, 끼니는 컵라면으로 때운다. 편의점을 덮친 강도가 목덜미에 칼을 들이대며 위협해도 이경의 무표정한 눈은 흔들림조차 없다. 이경의 방 벽에 걸린 달력은 연인이 죽은 2006년 3월에 멈춰 있다. 다섯 번째 돌아온 그의 기일에 이경은 검은 원피스를 꺼내 입고 장미꽃 한 송이를 챙겨 그가 죽은 장소를 찾는다. 5년 전 그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던 그곳을 한참 동안 무심히 바라보던 이경의 눈에 눈물이 맺힌다. 굳은 결심을 한 듯 일어난 이경은 차도 한복판으로 뛰어 들어가 두 눈을 꼭 감고 선다. 지켜보고 있던 한 남자의 도움으로 이경은 목숨을 건지지만, 이경을 향해 돌진하던 트럭이 사고를 피하기 위해 핸들을 크게 꺾으면서 중앙선을 침범해 현장은 아수라장이 된다.
통계청에 따르면 2009년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인구 10만명당 31명이다. 1992년 8.3명 수준이었던 자살률은 IMF 경제위기를 겪은 1998년 18.4명으로 121.7% 늘었고, 이후 10년 새 또 68.5% 증가했다. 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질병관리본부와 이화여대의대 응급의학과 정구영 교수팀이 2006년부터 2008년까지 응급실로 후송돼 치료를 받고 회복된 자살시도자 1,599명을 심층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가족구성원 및 연인 등 가까운 사람과의 갈등 때문에 자살하려 했다는 응답이 46.5%로 가장 많았다. 그중 절반은 배우자와의 갈등을 이유로 들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배우자와의 갈등이 22.9%였고, ▲연인과의 갈등(8.6%) ▲부모와의 갈등(6.5%) ▲자녀와의 갈등(4.1%) 순이었다. 우울증 등 정신건강 문제로 자살을 시도했다는 응답은 전체의 14.1%로 나타났다. 그 밖에 건강문제와 경제적 문제는 각각 7.5%, 5.7%로 집계됐다.
빈부격차 - 돈, 친구 사이를 가로막는 벽
이경의 몸을 입은 지현은 순도 100%의 눈물 세 방울을 얻기 위해 생전 처음 레스토랑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하고, 신지현의 친구로 행세하며 예전에 친했던 친구들을 찾아다닌다. 그러던 중 누구보다 믿었던 인정이가 자신의 약혼자 강민호와 함께 호텔방에 들어가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하고는 충격을 감당하지 못해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알고 보니 인정과 민호는 이미 5년 전부터 사귀어온 연인 사이였다. 산에서 길을 잃고 빗속에 떨고 있는 지현을 강민호가 구해준 일부터 두 사람이 영화관에서 마주쳐 인연을 만들어가게 되는 것까지 모두 신지현의 재산을 노린 음모 속에 이루어진 계획이었다. 민호와 지현이 사귀던 2년간 인정은 지현 아버지 회사의 비서로 일하며 각종 기밀을 빼낸다. 지현(송이경)은 아무래도 인정의 행동이 납득되지 않아 왜 지현이한테 이런 짓을 하느냐고 인정에게 따져 묻는다. 인정은 작심한 듯 지난 이야기를 하나하나 풀어놓는다. “대학 때 지현이네 집에 얹혀살았어요. 고3 때 아버지가 무면허 교통사고를 내서 도저히 서울로 대학 올 형편이 안됐었거든요. 너무 속상해서 지현이네 놀러 와서 하소연을 했죠. 그랬더니 지현이가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저녁식탁에서 인정이 우리 집에서 살게 해달라고 엄마아빠를 졸라요. 그땐 정말 눈물 나게 고마웠죠. 새 옷 사면 입고 내 방에 와서 물어봐요. ‘이 옷 어때?’ ‘응, 예뻐’ ‘그럼 너 입을래? 야! 신인정! 난 또 사면 돼. 너 줘도 하나도 안 아까워. 난 욕심이 없잖아.’”자존심 강한 인정은 지현의 그 대책 없는 선심이 자신을 너무 비참하게 만들었다며, 지현이가 가진 게 없어도 계속 지금처럼 착하고 순수할 수 있을지 보고 싶어서 자신의 남자친구더러 지현이를 자신과 똑같은 상황으로 내려놔달라고 부탁했다고 쏘아붙인다. 지현은 정말 무엇이든 인정에게 다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또 친구가 힘든 게 싫어서 잘해준다고 신경 썼던 말과 행동이 인정에게는 오히려 커다란 상처가 됐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곁에 있었지만, 그들 사이에는 경제력의 차이라는 높다란 벽이 있었던 셈이다.
실제 대학생의 87.7%가 친구에게 빈부격차를 느껴본 적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커리어, 2008년3월). 특히 친구가 부담 없이 해외연수를 떠나는 모습을 볼 때 빈부격차를 느낀다는 답변(복수응답)이 69.8%로 가장 많았다. 이어 ▲등록금 걱정 없이 학교 다닐 때(57.3%) ▲택시를 자주 타거나 자가용을 몰고 다닐 때(49.0%) ▲비싼 취미생활을 할 때(39.9%) ▲용돈 액수가 나보다 많을 때(39.3%) ▲명품만 걸치고 다닐 때(35.9%) ▲고가의 최신형 디지털 제품을 가지고 다닐 때(33.6%) ▲친구들한테 밥을 잘 살 때(21.9%) 등의 순이었다.또 전체의 38.9%는 빈부격차를 느낀 후 친구관계에 변화가 있었다고 답했다. 변화는 ▲관계를 단절하지는 않았지만 거리를 두게 됐다(63.1%) ▲아예 어울리지 않는다(13.4%) ▲더욱 친해지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했다(12.6%) 등이었다. 이는 선의에서 나온, 때로는 의식조차 하지 못했던 나의 행동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상처, 심지어 모욕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극 중 신지현과 같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진심이란 내 입장에서가 먼저일까 상대방 입장에서 먼저일까?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을 어떻게 전해야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