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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철령시조선족인민들의 초기의 반일투쟁 댓글:  조회:1258  추천:0  2015-10-07
•      철령시조선족인민들의 초기의 반일투쟁                           박병대수집정리 시월혁명과 조선의 3.1운동의 영향으로 20세기 20년대초에 울라지보스토크와 상해 등지에서 항일구국운동을 벌이던 조선의 일부 지식분자들은 맑스주의를 접수하여 민족독립을 쟁취하려는 애국주의자로부터 점차 공산주의자로 전변하였다. 1925년 4월, 조선공산당이 서울에서 성립되고 이듬해에 조선공산당이 공산국제에 가입하였다. 1927년, 조공(朝共: 조선공산당의 략칭)은 우리나라 동북경내에 조공만주총국을 성립하였는데 만주에서의 민족독립운동을 령도하는 총기관으로서 각지의 혁명투쟁을 통일적으로 령도하였다. 조공만주총국의 조직령도하에서 조공은 끊임없이 동만, 남만,북만으로 간부를 파견하여 조선족들이 비교적으로 집중된 지구에서 맑스주의를 전파하고 조공의 지방성 당조직을 건립하였다. “이런 조공의 지방조직은 향촌에서 공개적으로 활동하였는바 거의 모든 촌에 조공의 지방성 당적, 정권적,청년단적 부녀와 아동단조직이 있었다.” 1930년초에 이르러 만주경내의 조공당원수는 재빨리 발전하여 1700여명에 이르렀다.   철령시동부산지인 채하골(柴河沟),청하골(清河沟)은 조선족들이 비교적으로 집중된 지구이였다. 절대다수의 조선족백성들은 논농사를 위주로 하는 가난한 농민들이였다. 당시 이 지구는 정치,경제,문화가 매우 락후하였다. 지주렬신들이 지방의 모든 대권을 휘둘렀고 대량의 토지를 점유하였다. 농민들은 일년내내 일했지만 소득의 대부분은 지주들이 점유하였다.  명목이 번다한 가렴잡세로 인해  부담이 심중한 농민들의 생활은 극도로 빈곤하였다. 조공당원 안일상(安日相),리판상(李判相) 등은  조공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상비지(上肥地),리가대(李家台),상청하(上清河),중청하(中请河) 등지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모아놓고 회의를 소집하여 가난한 사람들이 단결하여 일제의 침략을 반대하고  똘똘뭉쳐 지주렬신들의 압박착취를 반대해야한다는 혁명도리를 선전하고  공산주의사상을 널리 전파한 동시에 가난한 농민들가운데서 비밀리에 당원을 발전시켜 당원대오를 확대하였다.1927년 10월,그들은 조공 채하골구위와 조공 상비지(上肥地)당지부를 건립하고 지부서기는 구위책임자인 차세창(车世昌)이 겸임하였다.지부아래에 조공 상비지,파차골(破车沟:현재의 개원현상비지향동승촌),하남가(河南街),동지(东地:현재의 하비지만족향)등 4개 당소조를 건립하였다.1 929년8월에 또조공청하골구위를 건립하고 아래에 상청하(上清河)당지부,흥륭대(兴隆台:현재 청원현소속)당지부와 서풍현로영장(西丰县老营厂)당소조를 두었다. 조공채하골,청하골구위의 조직과 령도밑에서 일부 촌에서는 농민협회를 꾸리였다.농민협회는 청년단,소선대, 부녀회 등 군중조직을 포함하였다.그들은 또 유격대,적위대 등 무장조직을 건립하여 개원 동부산지에 빈번히 출현하여 반동세력을 타격하였다. 가난한 조선족농민들은 처음으로 조직이 있고 령도가 있게 일본제국주의 및 반동세력과 영용완강하게 투쟁하였다. 。   1930년 8월,중공만주성위에서는 순시원 강산(姜山) 등 동지들을 청원현에 파견하여 건당공작을 전개하여  중공당원의 조건에 부합되는 조공당원들을 개별적으로 입당수속을 하여 중국공산당에 입당시켰다.강산,왕일득(王一得),진광(陈光) 등은 청원에 이른 뒤 흥륭대촌 하와자(下洼子)와 채하골 홍토묘자(红土庙子)등지에서 군중대회와 비당적극분자회의를 소집하였다.하와자군중대회에는수백명의 농민군중이 참가하였다.중공만주성위련락원 진덕삼(陈德森)이 군중들에게 국제국내형세를 소개하고 쏘베트구 홍군들의 영용한 투쟁정황을 선전하면서 가난한 농민들이 적극적으로 일떠나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반대하고 봉건착취를 반대하고 군벌정부를  뒤집어엎고 지방쏘베트정권을 건립하자고 호소하였다.   미구에 진덕삼(陈德森)이 청원현 삼간방(三间房)에서 중공청원현당원대회를 소집하고 중공청원현위를 건립하였다.대표대회가 끝난 뒤 제1차집행위원회를 열고 중공청하골구위(中共请河沟区委)를 성립하고 안일상을 구위서기로 임명하였으며 그 아래 흥륭대,상비지,하청하 3개당지부와 서풍현로영장(西丰县老营厂)당소조를 두기로 했는데 당원이 도합 30여명이였다. 중공청하골구위원회 조직연혁 및 령도자명록(1930년---1931년 9월): 중공청하골구위서기 안일상(조선족 1930.8--1930.9) 리판상(李判相 조선족 1930.9--1931.9) 조직,선전 정도묵(郑祷默 조선족 1930.8~1931.9) 단서기 김상묵(金相默 조선족1930.8~1931.9)     상청하당지부(上清河党支部) 서기  리판상  (李判相 겸 1930.8~1931.9) 조직 리판상  (李判相 겸 1930.8~1931.9) 선전 정동원(郑东元 조선족 1930.8~1931.9)      흥륭대(兴隆台)당지부 서기 최학곤  (崔学坤 조선족  1930.8~1931.9)     상비지(上肥地)당지부 서기  차세창  (车世昌 조선족  1930.8~1931.9) 조직  윤대영(尹大荣 조선족  1930.8~1931.9) 선전  박만발(朴万发 조선족  1930.8~1931.9)    서풍로영장(西丰老营厂)당소조  소조장  최웅건( 崔雄健 조선족 1930.8--1931.9).   중공청하골구위가 성립된 뒤 중공청원현위의 령도하에 당의 활동지구에서는 재빨리 농민협회를 건립하였다. 농민협회는 당의 령도밑에 빈농을 중심으로 하여 중농과 단결한 농민들의 군중조직으로서 그 령도권은 농민들의 손에 있었다. 농민협회는 농민들을 대신하여 말하고 농민들의 리익을 수호하여 농민들의 열렬한 옹호와 지지를 받았다. 당시, 반동당국은 고 하였다.중공청원현위에서는 상술한 지시정신에 근거하여 대대적으로 적위대를 발전시키고 젊고 체력이 좋은 대원들로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중공청하골구위의 령도아래 유격대에는 결사대원이 30여명에 이르렀다. 그들은 당의 령도하에 청원,개원 등지에서 활약하면서 끊임없이 적을 습격하였다. 1930년 가을,중공당원 리창우(李昌雨)가 령도하는 돌격대 30여명은 중공청원현위군사부장 장재욱(张在旭)의 령솔하에 금가와붕(金家窝棚)에서 출발하여 어둠을 리용하여 귀신도 모르게 북삼가자에 있는 적의 보안대영부 부근에 이르렀다. 유격대가 보안대의 영부에 쳐들어갔을 때 적들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다. 유격대와 적위대원들이  자체로 제작한  고추수류탄을 적의 영방에 던지니 적들은 목이 막혀 숨도 못쉬고 눈물투성이가 되여 어쩔줄 몰랐다.적의 보안대우두머리가 저항하려다가 유격대원에게 격사당하자 나머지 적들은 사시나무같이 벌벌 떨면서 순순히 투항하였다.    1930년 가을 중공당원 ,대대장 김영선(金永善)과 정치위원,중공상비지지부서기 차세창(车世昌)이 이끄는 채하골적위대의 15명 대원들은 수기골(沟基沟)에 장보러 가는 농민으로 화장하였다. 수기골레 이른  적위대원들은 적 공안분대의 뜰안에 있는 가게에 들어가서 물건을 사는 척 하고 적의 영방부근에 혼입하였다. 명령소리가 나자 적위대원들은 사전에 짜놓은 분공에 의해 적의 공안분대영방에 쳐들어가는 동시에 각 문의 통로를 막았다. 이 한차례의 습격은 추호의 방비도 못한  적들로 하여금 속수무책으로 전부 생포되였다. 이 한차례의 돌연습격에서 적위대원들은 적군의 장총 15자루와 탄알 600여발을 로획하였다. 그해 가을에 청하골유격대는 팔과수(八棵树)에 있는 일본령사관의  방비가 허술하다는 소식을 입수하였다.  중공당원,대장 리청파(李晴波)의 령솔하에 30여명의 유격대원과 결사대원들은 팔과수(八棵树)의 일본령사관을 습격하여 일본령사 등본(虅本)을 사살하였다. 련속적인 몇차례 전투의 승리 로 장단총 40여자루와 대량의 전리품을 획득하고 혁명무장력량을 장대시키고 청하골 및 그 부근지구의 반동세력을 침중하게 타격함으로써 적들의 간담을 서늘케했다. 1930년겨울에 일본령사관은 부득불 개원현성으로 도망쳐갔다.   “9.18”사변후 중공청하골구위는 파괴되여  조직적인 활동이 정지되였다. “9.18”사변후 심양에서 도망쳐온 동북군의 일부 도주병들은 도처에서 살인,방화,략탈 등 몹쓸짓을 일삼았는데  조선족에게는  더욱 흉폭하였다. 청하골로 도망쳐온 한무리의 도주병들은 중공 청원현위서기 안일상동지의 거주처를 포위하였다. 안일상동지는 위기를 만나 두려움이 없이 도주병들에게 “단결하여 항일구국에 나서자!”고 웨치였다. 비적들은 그의 말을 듣기는 커녕 더욱 사나워져 안일상동지와 조선족동포들을 한줄에 세우려고 핍박하였다. 안일상동지는 즉시에 결단을 내리고 군중들을 거느리고 반항하였다. 일부 동지들이 적들의 포위를 뚫고나갔으나 안일상동지는 적이 뿌린 수류탄에 맞아 영용하게 희생되였다.안일상동지가 희생된 뒤 중공청하골구위서기 리판상동지가 중공청원현위의 책임자로 되였다. 당시 청하골은 일제의 백색공포속에 처하여 일제와 괴뢰세력은 각지에서 “치안질서회복”이라는 명의로 “3광정책(三光政策)”을 감행하여 야만적으로 대량의 마을합병을 실시하여 피비린 파시스통치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많은 공산당원들은 극히 어려운 처지에서 견정한 공산주의 신념으로 비밀리에 지하항일활동에 종사하였다.   당시 흥륭대는 당의 한 활동중심이였다. 중공지하당원 김세진(金世镇)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등사기 한대를 사서 선전삐라를 찍어 산포하고 경상적으로 서풍, 동풍,개원 등지에 가서 삐라를 뿌려 적들을 괴롭혔다. 일제와 위만괴뢰정부에서는 1000원의 현상금을 걸고 김세진을 잡으려고 날뛰였다. 공산당원 정재춘(郑在春)의 집은 서풍현 북대골(北大沟)에 있었는데 그의 집은 당의 지하활동참이였다. 일부 당원들은 경상적으로 그곳에 가서 비밀회의를 하였고 또 그곳을 통해  항일무장대오에 여러차례 무기를 운송하였다. 원 청하골구위서기 리판상은  청하골 위금융회(伪金融会) 대표의 신분으로 위장하고 숨어서 비밀리에 항일활동을 진행하였다.공산당원 김의재(金义才)는 당조직과 련계가 끊어진 뒤 고향인 개원현 팔리교자(八里桥子)하가툰(贺家屯)에 음폐해있었다. 그는 당년 청하골유격대장,공산당원 리청파와 련계하였다. 1934년 5월, 그들은  당지의 농민들을 령도하여 지주와 투쟁하여 감조감식투쟁의 승리를 거두었다.   1934년 이후, 양정우장군이 령도하는 항일대오가 청원현일대에서 활동하였다.청원현의 당조직은 백색공포가 극히 엄중한 정황에서도 항일무장과 밀접한 련계를 유지하여 정보를 보내고 길을 안내하고 병원(兵员)을 수송하였다. 리판상동지가 사는 진가골(陈家沟)일대에는 항일무장활동이 멎지 않았다. 김세진은 반라산(半拉山)마을에 살았는데 그의 집에는 항일련군의 가속이 살았다. 항일무장은 경상적으로 그의 집을 찾아와서 공작을 련계하고 경상적으로 항일무장의 정보를 전달하였다. 1934년 8월,동북인민혁명군의 대오가 대고가자서남골(大孤家子西南沟)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소식을 입수한 리판상동지는 김세진 등 당원 세명을 시켜 고무신과 수건 등 물품을 가져가서 군대를 위로하였다. 당시 청하골일대에는 특무,밀탐들이 욱실거리고 일제와 괴뢰정권의 통치가 매우 살벌하였다. 항일무장이 서남골일대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적들은 항일무장의 행방을 알려고 미쳐날뛰였다. 6월 26일 , 일본수비대와 괴뢰흥륭대경찰서에서는 어떤사람의 고발을 받고 진가골(陈家沟)를 물샐틈없이 포위하여 리판상,박만수(朴万秀),거석산(巨石山),김무(金武) 등 네명의 중공당원이 불행하게 체포되였다. 그들은 흉악무도한 적들의 갖은 고문을 다 받았지만  적들과 완강히 투쟁하였다. 약 일주일동안 고문해도 아무런 성과가 없자 적들은 그들을 현으로 압송하였다. 미구에 리판상,박만수, 거석산 등 세동지는 적들에게 잔혹하게 살해되였다. 중공청하골구위는 성립되서부터 활동을 정지할 때까지 비록 일년 남짓한 시간밖에 안되지만 그들은 개원,청하골의 빈고농민군중을 령도하여 불요불굴의 투쟁을 진행하였다. 철령시조선족인민들의 초기의 반일투쟁은  료북인민들의 혁명투쟁사에서   눈물겹고 장려한 한페지를 남기였다. (철령시의 당사재료에 근거하여 정리하였음) ——————————————————————————————————
1    "실종자"가족의 일기 댓글:  조회:1327  추천:2  2014-12-17
   단편소설                          " 실 종 자"의 가족일기                                             박병대         사전에서 실종자란 단어의 의미를 찾아보면 종적을 알수없게 된 사람을 가리키는데 그들은 대개 전쟁터나 참사에서 사망이 확인되지 않은 사람들이다. 한차례의 대형 참사에서 소중한 목숨을 건져낸것은 가히 천행이라 할수 있고 비록 목숨은 못건졌지만 시신이라도 찾아 안장할수 있는것은 그래도 불행중 다행이라 할수있고 끝끝내 실종자명부에서  이름을 지우지 못한 사람은 불행중 불행이라 할수있다. 실종자가족에 속하는 경호네는 이로하여 수십년동안 웃지도 울지도 못할 고통에 시달려야했다. 아래에 덕구령감네 조손3대가 쓴  일기 세편을 소개한다.                                          1. 덕구령감의 일기      부대에서 제대한 우리 원길이는 장가든지 사흘밖에 안되였지만 전쟁의 불길이 압록강에 미치자 지원군에 용약 가입하여 항미원조전선에 뛰여들었다. 나는  원길이가  참전한 후  통일된 조선, 해방된 고향에 돌아갈 그날을 그리며 날마다 신문에 실린 에 눈길을 모았다.      중국인민지원군과 조선인민군은 협력작전하여 전쟁초반에는 승승장구를 거듭하여 불과 몇달만에  삼팔선일대까지 밀고나갔지만 적군의 필사적 반격에 부딪쳐 진군속도가 점차 느려지더니 급기야 진공과 후퇴가 수없이 반복하였다.     3년간의 피비린 전쟁에서 지칠대로  지친 적아쌍방은 급기야  휴전협정을 체결하였다.  잔혹한 전쟁은 삼천리강산을 페허로 만들고 무수한 사상자를 낳았다.  뒤이어 전선에 나갔던 군인들이 대거 귀국하여 혈육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들속에는 맨손으로 범을 때려잡을 씩씩한 군인도 많았지만 손발을 잃어버린  영예군인도 부지기수였다.      나는 우리 원길이가 가슴에 훈장을  번쩍이며 무사귀환하길 눈빠지게 기다렸다. 한달이 지나고 두달이 지나자  참전용사들을 맞이하지 못한 대부분 군인가속들은 그리던 혈육 대신  렬사증을 받았지만 나한테는 그 흔한 렬사증마저 찾아오지 않았다.     내아들 원길이는 도대체 어떻게 되였나? 나는 바늘방석에 앉은 것만 같아  더는 집에서 한가히 소식오기를  기다릴순 없었다. 정부기관을 찾아가보고 아들과 한부대에 있었다는  전우들의 주소도 수소문해 찾아가봤지만 어느누구한테서도 신통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남몰래 눈물을 짜는 새아기를 보면 가슴은 칼로 에이는듯 아팠다.      피말리는 몇해가 지난 어느날,  나는 정부로부터 원길이가 전쟁터에서 실종되였다는 통지를 받았다.     내아들이 전쟁판에서 실종되다니? 그건  말도 안돼. 산사태에 매몰되여 시신을 찾지 못했거나 특대홍수에 휩쓸려내려갔거나 하면 몰라도 이국땅에서 치르는 필사적 전투에서 참전군인이 실종된다는게 말이 되나? 만약  외진곳에서 혼자 전투임무를 수행하다가  희생되였다면 누구도 신원을 모를게 아닌가? 마음속엔 도리가 굴뚝같았지만 나는 어느 누구와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시비를  따질수 없는 처지라 가슴이 터지고 피가 머리우로 마구 치솟았다...   "새아가, 나는 니가 우리집에서 아까운 청춘을  썩이는걸 차마 볼수가 없구나. 늦었지만 이제라도 좋은 신랑을 만나 잘살거라. 정말 미안하다...." 나는   며느리한테 눈물어린 내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고개를 돌리고 그애를 친정에 돌려보냈다...                                              2. 둘째아들 원식이의 일기    세월은 흐르고 흘러 1950년대가 저물더니 1960년대에 들어섰다.다재다난에 이은 전례없이 희박한 정치공기가 사람들의 심신을 괴롭혔다. 편견과 비뚤어진 상상과 억측은 우리 "실종자"가족의 마음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였다. 우리 초가집 문가에 걸렸던 "광영가속"이란 나무패쪽도 사라진지 오래였다.  예전에는 설명절이나 8.1건군절이면 생산대대에서 우리집에 위문을 왔지만 실종자가족으로 전락한 뒤에는 간부들의 그림자도 얼씬하지 않았다.     (항미원조에 압장서 나간 우리 원길이가 그래 전쟁판에서 도망이라도 쳤단말인가? 부대에서 우리 원길이의 행방을 모른다고 자식을 나라에 바친 내게 무슨 불찰이라도 있단말인가?) 아버지는 실로 입이 열개라도 억울함을 토로할곳이 없었다.     "자식을 참군시켜 잃어버린게 무신 죄가 되는겨? "아버진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무등 애썼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로인들 모임에서  좌상대접받던 아버지의 말씀은  무게를 잃어 회의때 아버지가 입을 열면 어떤 젊은이들은  어디 개가 짖나 하고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외기러기신세로 된 아버지는  화김에 두문불출하고 날마다 집에서  강술만 마시였다. 치솟는 울분을 토로할 길 없는 그의 유일한 동반자는 술뿐이였다. 점차 술중독에 빠진 아버지는 손을 사시나무같이 떨었고 술을 마시지 않으면 정신이 흐릿해지는   페인으로 변하였다.    아버지는 당신이 이 세상에  머물 날이 며칠 없음을  짐작하고 나를 곁에 불러 눈물 머금은 유언을 남기셨다.      "원식아, 나는 평생 나랄 위해 모든걸 다 바쳤으이깨  저 하늘을 봐도  한점의 부끄럼도 없단다.. 글치만 니 형 누명을 못뱃기고 죽는는 한이구나. 니가 그것만 뱃개주문 난 구천 에서도 훨훨 춤을 추마. 하늘이 무심찮으문 밝혀질날이 있을게다만 후유! 그날이 은제나 올지...."    나는 아버지의 한맺힌 유언을 실현하는것이 하늘의 별따긴듯 싶어   하염없는 눈물만 흘리였다.                                            3. 손자 경호의 일기      " 4인방"이 무너지고 개혁개방의 봄바람이 중화대지에 불어왔다. 한때 적국이던 고국 친지들과의 서신왕래가 허용되고 "손에 손잡고..." 노래전후로 고국행 길이 트였다.  아버지는 남먼저 고향에 가서 친척들을 만나보고 "행여나"에 실오리같은 희망을 걸고 이르는 곳마다 큰아버지의 행방을 탐문했으나 어느 누구도  한결같이 고개만 가로저었다. 그러니 큰아버진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어느 심산속의 무주고혼이 된게  틀림없었다.  (그까짓 손바닥만한 한국땅인데 마음먹고 빗질하면사  못찾아낼가? ) 하지만  선산에 성묘가셨던 아버지는 수림이 하늘을 가리운 마을뒤산에서조차 동서남북을 가리지 못하였다. 아버지는 어디 있을지도 모를 묘비도 봉분도 없을 큰아버지의 유해를 찾는다는건 바다속에서 바늘찾기보다 어렵구나 하며  땅이 꺼지게 후유- 한숨만 쉬셨다.      다시 2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팔순을 넘긴 아버지도 대를 이은 유언을 남기고   하늘나라에  등록하셨다. 이젠 나의 두어깨에 가문의 사명이 얹혀졌다. 몇년동안은 무장부와 민정국을  뻔질나게 드나들었지만 관원들은  반세기도 넘는  옛일이니  자기네는 속수무책이라고 한목소리같이 대답하였다. 대를 이은 유언을 받들기란 세월이 흐를수록 더 막막하였다. 나는  큰아버지의 행방을 찾는 일은 인력으로 될수 없는 부질없는 짓이라 생각하고 이를 악물고 단념하였다. 그런데 창상지변이란 말이 있듯 세상사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일이였다.       어느날 나는 시 무장부의 령도가 우리집에 60여년전에 받아야할 큰아버지의 렬사증을 가져왔다. 렬사증을 손수 받으셔야 하실  할아버지,할머니가 안계시니 자격도 없는 내가 대신  받아야했다. 나는 렬사증을 들고 허둥지둥 할아버지,할머니와 부모님의  유상을 모신 "침실"로 달려갔다. 나는 유상앞에 향불을 피워놓고 샘물같이 콸콸 쏟아지는 눈물을 아랑곳 않고 목메인 소리로 고하였다.     "할아버지,아버지, 큰아버지의 렬사증이 왔어요. 흑흑..."  아,아,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선 구천에서 나의  목소리를 듣고나 계시는지?     "도대체 어인 일인가요?" 그렇게도 그렇게도 애차게 그리던 큰아버지가 60년이란 세월의 강을 건너 한장의 렬사증으로 되여 가족의 품에 왔다는게 꿈만 같았다.     "사실은 이렇게 된것이오" 무장부의 령도는 큰아버지의 행방을 찾은 경과를 알려주었다.      얼마전 우리나라정부에서는  한국 어디에  묻혀있는  지원군렬사들의 유해를  봉환하겠다는 한국정부의 통지를 받았는데  묘지에 묻힌 사람의 명부에 기존렬사명단밖의 이름이 몇몇 들어있었단다.  그들이 누구일가? 유관부문에서는 당시 그곳에서 렬사가 많이 나온 련의 군인명부를 찾아보았는데 그중 원길이란 이름이 들어있었고 또 희생된 련장의 유물인 수첩에서 원길이와 다른  전사 둘을 당일새벽에 비밀리에  정찰보냈다는  기록이 있었다. 그러니 큰아버지와 수행전사들은 정찰도중 뜻밖에 나타난 적들과의 조우끝에 전우들과 조금 떨어진 골짜기에서  희생였으나 그 상황을 소속 련의 생존자들과 영부에서 감쪽같이 몰랐다는것이였다...   이제 며칠뒤면 사진으로만 본 큰아버지의 유해를 맞을날이 다가온다. 큰아버지는 "실종자"란 루명을 반세기를 훨씬 넘긴 오늘에야 끝내 벗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너무도 참혹했다.      아직 우리 큰아버지처럼 이국의 심심산골에 외롭게 버려진 "실종자"들은 얼마나 있을가? 그 혈육들은 이 기나긴 악몽의 세월을  어떻게 보냈을가? 나는 시대가 변한 오늘날,  이역의 원혼으로 해매는  영령들의 모든 무덤에 훈풍이 불기를 애타게 기다린다. 그리고 그날은 반드시 찾아오리라 믿어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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