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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자"가족의 일기
2014년 12월 17일 10시 35분  조회:1327  추천:2  작성자: 옛날옛적
   단편소설                          " 실 종 자"의 가족일기
                                            박병대
 
      사전에서 실종자란 단어의 의미를 찾아보면 종적을 알수없게 된 사람을 가리키는데 그들은 대개 전쟁터나 참사에서 사망이 확인되지 않은 사람들이다. 한차례의 대형 참사에서 소중한 목숨을 건져낸것은 가히 천행이라 할수 있고 비록 목숨은 못건졌지만 시신이라도 찾아 안장할수 있는것은 그래도 불행중 다행이라 할수있고 끝끝내 실종자명부에서  이름을 지우지 못한 사람은 불행중 불행이라 할수있다. 실종자가족에 속하는 경호네는 이로하여 수십년동안 웃지도 울지도 못할 고통에 시달려야했다. 아래에 덕구령감네 조손3대가 쓴  일기 세편을 소개한다.
 
                                       1. 덕구령감의 일기
 
   부대에서 제대한 우리 원길이는 장가든지 사흘밖에 안되였지만 전쟁의 불길이 압록강에 미치자 지원군에 용약 가입하여 항미원조전선에 뛰여들었다. 나는  원길이가  참전한 후  통일된 조선, 해방된 고향에 돌아갈 그날을 그리며 날마다 신문에 실린 <조선통신란>에 눈길을 모았다.
     중국인민지원군과 조선인민군은 협력작전하여 전쟁초반에는 승승장구를 거듭하여 불과 몇달만에  삼팔선일대까지 밀고나갔지만 적군의 필사적 반격에 부딪쳐 진군속도가 점차 느려지더니 급기야 진공과 후퇴가 수없이 반복하였다.
    3년간의 피비린 전쟁에서 지칠대로  지친 적아쌍방은 급기야  휴전협정을 체결하였다.  잔혹한 전쟁은 삼천리강산을 페허로 만들고 무수한 사상자를 낳았다.  뒤이어 전선에 나갔던 군인들이 대거 귀국하여 혈육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들속에는 맨손으로 범을 때려잡을 씩씩한 군인도 많았지만 손발을 잃어버린  영예군인도 부지기수였다.
     나는 우리 원길이가 가슴에 훈장을  번쩍이며 무사귀환하길 눈빠지게 기다렸다. 한달이 지나고 두달이 지나자  참전용사들을 맞이하지 못한 대부분 군인가속들은 그리던 혈육 대신  렬사증을 받았지만 나한테는 그 흔한 렬사증마저 찾아오지 않았다.
    내아들 원길이는 도대체 어떻게 되였나? 나는 바늘방석에 앉은 것만 같아  더는 집에서 한가히 소식오기를  기다릴순 없었다. 정부기관을 찾아가보고 아들과 한부대에 있었다는  전우들의 주소도 수소문해 찾아가봤지만 어느누구한테서도 신통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남몰래 눈물을 짜는 새아기를 보면 가슴은 칼로 에이는듯 아팠다.
     피말리는 몇해가 지난 어느날,  나는 정부로부터 원길이가 전쟁터에서 실종되였다는 통지를 받았다.
    내아들이 전쟁판에서 실종되다니? 그건  말도 안돼. 산사태에 매몰되여 시신을 찾지 못했거나 특대홍수에 휩쓸려내려갔거나 하면 몰라도 이국땅에서 치르는 필사적 전투에서 참전군인이 실종된다는게 말이 되나? 만약  외진곳에서 혼자 전투임무를 수행하다가  희생되였다면 누구도 신원을 모를게 아닌가? 마음속엔 도리가 굴뚝같았지만 나는 어느 누구와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시비를  따질수 없는 처지라 가슴이 터지고 피가 머리우로 마구 치솟았다...
  "새아가, 나는 니가 우리집에서 아까운 청춘을  썩이는걸 차마 볼수가 없구나. 늦었지만 이제라도 좋은 신랑을 만나 잘살거라. 정말 미안하다...." 나는   며느리한테 눈물어린 내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고개를 돌리고 그애를 친정에 돌려보냈다...
 
                                           2. 둘째아들 원식이의 일기
   세월은 흐르고 흘러 1950년대가 저물더니 1960년대에 들어섰다.다재다난에 이은 전례없이 희박한 정치공기가 사람들의 심신을 괴롭혔다. 편견과 비뚤어진 상상과 억측은 우리 "실종자"가족의 마음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였다. 우리 초가집 문가에 걸렸던 "광영가속"이란 나무패쪽도 사라진지 오래였다.  예전에는 설명절이나 8.1건군절이면 생산대대에서 우리집에 위문을 왔지만 실종자가족으로 전락한 뒤에는 간부들의 그림자도 얼씬하지 않았다.
    (항미원조에 압장서 나간 우리 원길이가 그래 전쟁판에서 도망이라도 쳤단말인가? 부대에서 우리 원길이의 행방을 모른다고 자식을 나라에 바친 내게 무슨 불찰이라도 있단말인가?) 아버지는 실로 입이 열개라도 억울함을 토로할곳이 없었다.
    "자식을 참군시켜 잃어버린게 무신 죄가 되는겨? "아버진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무등 애썼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로인들 모임에서  좌상대접받던 아버지의 말씀은  무게를 잃어 회의때 아버지가 입을 열면 어떤 젊은이들은  어디 개가 짖나 하고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외기러기신세로 된 아버지는  화김에 두문불출하고 날마다 집에서  강술만 마시였다. 치솟는 울분을 토로할 길 없는 그의 유일한 동반자는 술뿐이였다. 점차 술중독에 빠진 아버지는 손을 사시나무같이 떨었고 술을 마시지 않으면 정신이 흐릿해지는   페인으로 변하였다.
   아버지는 당신이 이 세상에  머물 날이 며칠 없음을  짐작하고 나를 곁에 불러 눈물 머금은 유언을 남기셨다.
     "원식아, 나는 평생 나랄 위해 모든걸 다 바쳤으이깨  저 하늘을 봐도  한점의 부끄럼도 없단다.. 글치만 니 형 누명을 못뱃기고 죽는는 한이구나. 니가 그것만 뱃개주문 난 구천 에서도 훨훨 춤을 추마. 하늘이 무심찮으문 밝혀질날이 있을게다만 후유! 그날이 은제나 올지...."
   나는 아버지의 한맺힌 유언을 실현하는것이 하늘의 별따긴듯 싶어   하염없는 눈물만 흘리였다.
 
                                         3. 손자 경호의 일기
     " 4인방"이 무너지고 개혁개방의 봄바람이 중화대지에 불어왔다. 한때 적국이던 고국 친지들과의 서신왕래가 허용되고 "손에 손잡고..." 노래전후로 고국행 길이 트였다.  아버지는 남먼저 고향에 가서 친척들을 만나보고 "행여나"에 실오리같은 희망을 걸고 이르는 곳마다 큰아버지의 행방을 탐문했으나 어느 누구도  한결같이 고개만 가로저었다. 그러니 큰아버진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어느 심산속의 무주고혼이 된게  틀림없었다.
 (그까짓 손바닥만한 한국땅인데 마음먹고 빗질하면사  못찾아낼가? ) 하지만  선산에 성묘가셨던 아버지는 수림이 하늘을 가리운 마을뒤산에서조차 동서남북을 가리지 못하였다. 아버지는 어디 있을지도 모를 묘비도 봉분도 없을 큰아버지의 유해를 찾는다는건 바다속에서 바늘찾기보다 어렵구나 하며  땅이 꺼지게 후유- 한숨만 쉬셨다. 
    다시 2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팔순을 넘긴 아버지도 대를 이은 유언을 남기고   하늘나라에  등록하셨다. 이젠 나의 두어깨에 가문의 사명이 얹혀졌다. 몇년동안은 무장부와 민정국을  뻔질나게 드나들었지만 관원들은  반세기도 넘는  옛일이니  자기네는 속수무책이라고 한목소리같이 대답하였다. 대를 이은 유언을 받들기란 세월이 흐를수록 더 막막하였다. 나는  큰아버지의 행방을 찾는 일은 인력으로 될수 없는 부질없는 짓이라 생각하고 이를 악물고 단념하였다. 그런데 창상지변이란 말이 있듯 세상사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일이였다.
      어느날 나는 시 무장부의 령도가 우리집에 60여년전에 받아야할 큰아버지의 렬사증을 가져왔다. 렬사증을 손수 받으셔야 하실  할아버지,할머니가 안계시니 자격도 없는 내가 대신  받아야했다. 나는 렬사증을 들고 허둥지둥 할아버지,할머니와 부모님의  유상을 모신 "침실"로 달려갔다. 나는 유상앞에 향불을 피워놓고 샘물같이 콸콸 쏟아지는 눈물을 아랑곳 않고 목메인 소리로 고하였다.
    "할아버지,아버지, 큰아버지의 렬사증이 왔어요. 흑흑..."  아,아,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선 구천에서 나의  목소리를 듣고나 계시는지?
    "도대체 어인 일인가요?" 그렇게도 그렇게도 애차게 그리던 큰아버지가 60년이란 세월의 강을 건너 한장의 렬사증으로 되여 가족의 품에 왔다는게 꿈만 같았다.
    "사실은 이렇게 된것이오" 무장부의 령도는 큰아버지의 행방을 찾은 경과를 알려주었다. 
    얼마전 우리나라정부에서는  한국 어디에  묻혀있는  지원군렬사들의 유해를  봉환하겠다는 한국정부의 통지를 받았는데  묘지에 묻힌 사람의 명부에 기존렬사명단밖의 이름이 몇몇 들어있었단다.  그들이 누구일가? 유관부문에서는 당시 그곳에서 렬사가 많이 나온 련의 군인명부를 찾아보았는데 그중 원길이란 이름이 들어있었고 또 희생된 련장의 유물인 수첩에서 원길이와 다른  전사 둘을 당일새벽에 비밀리에  정찰보냈다는  기록이 있었다. 그러니 큰아버지와 수행전사들은 정찰도중 뜻밖에 나타난 적들과의 조우끝에 전우들과 조금 떨어진 골짜기에서  희생였으나 그 상황을 소속 련의 생존자들과 영부에서 감쪽같이 몰랐다는것이였다...
  이제 며칠뒤면 사진으로만 본 큰아버지의 유해를 맞을날이 다가온다. 큰아버지는 "실종자"란 루명을 반세기를 훨씬 넘긴 오늘에야 끝내 벗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너무도 참혹했다.
     아직 우리 큰아버지처럼 이국의 심심산골에 외롭게 버려진 "실종자"들은 얼마나 있을가? 그 혈육들은 이 기나긴 악몽의 세월을  어떻게 보냈을가? 나는 시대가 변한 오늘날,  이역의 원혼으로 해매는  영령들의 모든 무덤에 훈풍이 불기를 애타게 기다린다. 그리고 그날은 반드시 찾아오리라 믿어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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