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룡수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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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나물하러 다니는 재미 댓글:  조회:2734  추천:0  2016-03-10
             나물하러 다니는 재미                      박병대    산에 들에 신록이 곱게 물들 때면 이곳의 아낙네들은 앞치마를 두르고 바구니를 들고 삼삼오오 집을 나와 교외로 향한 뻐스에 오른다. 집안에서 홀로 책장을 뒤지던 나는 흐리터분한 머리를 가시려고 아내를 따라 들로 나간다.  .  나이가 지긋한 늙은이로 되였으면 점잖게 저수지나 강에 가서 낙시질이나 하며 무료한 세월을 보내는 것이 보다 품위가 있고 한결 즐겁지 않겠는가고 권하는 친구도 더러 있지만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취미가 달라서 그런지 나는 아직 낙시질에 재미를 붙이지 못하였다. 눈이 그리 밝지 못한데다 손까지 둔한 사람이 불소한 입장료를 내고  물가에 앉아서 하루종일 신경을 곤두세우고 낙시찌를 눈이 빠지게 바라본들 내 손에 잡힐 머저리 물고기가 몇마리나 되겠는가? 사람들과 생명유희를 하며 닳을대로 닳아빠진 고놈의 약삭빠른 물고기들한테 미끼나 빼앗기는 놀림을 당하면 스트레스가 풀리기는 커녕 핏줄만 굳어질것 같아 낙시질에는  맘이 내키지 않는다. 십년동안을 위수가에 앉아서 곧은 낙시질로 세월을 낚으며 은나라를 멸할  무왕을 기다려 주나라를 세운 강태공은  경천위지의 웅심과 지혜를 가졌으니 그까짓 고기야 잡히든 말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지만  평생 교정에서 애들한테 XYz나 배워주고 다른곳에는 눈길 한번 돌려지 않던 나에게는 신선놀음같은 낙시질이 그리 알맞는 것이 아니였다.  그리하여 다른 취미도  재주도 없는 내가 머리를 써서  기껏 골랐다는 심심소일이 나물캐는 일이다.       처음 아낙네들을 따라 들로 나가자니 누가 뒤에서 하고 손가락질하는것만 같아 낯이 붉어져 고개도 바로 들지 못했지만 앞뒤가 환히 트인 넓은 들에 나가서 종달새의 경쾌한 노래를 듣고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키면서 온갖 풀들이 돋아나 싱그러운 냄새가 코를 간지럽히는 벌판에 파아랗게 돋은 민들래, 미나리싹을 찾아 풀숲을 헤치며 이리저리 뛰여다니느라면 이마에 송골송골 돋아나는 땀방울에 세상살이 시름이 어느새 말끔히 씻어지고 한줌두줌씩 캔 나물이  자루에 불룩이 차오르는 것을 보면 신명이 절로나서 부를 줄 모르는 노래도  코구멍으로 흥얼흥얼 흘러나온다. 이것은  신체단련을 하느라 날마다 일부러 집근처의 야산을 오르내리기보다 훨씬 실속있고 재미가 난다.     이렇게 한번두번 다니기 시작한 것이 이젠 나물캐기에 인이 박혀서 훈풍에 언땅이 녹고 새싹이 뾰족뾰족 돋아나는 5월이나 단풍이 곱게 물드는 가을이 오면 나는 손이 근지러워서 집안에 박혀있지 못하고 들로 나가게 되는데 이젠  나물의 이름도 많이 알게 되였고 나물캐는 솜씨도 어지간히 늘어서 도회지에 사는 젊은 아낙네들은 저쪽으로 내다앉으라 할만 하다. 비가 오지 않는 날에는 거의 날마다 들에 가서 나물을 캐오니 남들은 단출한 식구에 그 많은 들나물을 해서 다 먹을 수 있는가고 묻는다. 내가  들나물을  많이 캐와서 처리하지 못할 걱정은 조금도 없다. 화학비료나 농약과 멀리하고 자연의 순수한 사랑속에 자라 티끌만한 오염도 되지 않은 이 들나물은 말 그대로 록색식품이라 시장에서 팔고사는 채소보다 영양가나 신선도가 월등하여 보기만해도 입안에서 군침이 돈다.      나는 봄에 산이나 들에 나가 나물을 캐는 재미도 좋지만 나의 땀으로 바꿔온 나물을 이웃들과 나눠먹는 재미가 더욱 좋다. 수족이 불편해서 들에 다닐수 없는 로인들이나 직장에 몸을 담고 개미 채바퀴돌듯하는 젊은이들에게 내가 손수 캐서 다듬은 들나물을 맛보라고 한웅큼씩 나눠주면 얼굴마다에 함박꽃을 피우며 기뻐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는 재미 역시 인기드라마이상이다.     세상만물이 천태만상이듯 사람들도 취미, 애호가 다 같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은 독서를 즐기고 어떤 사람은 마작을 즐기고 어떤 사람은 등산을 즐긴다. 사람들은 자기가 생활하는 환경, 소질, 건강상황, 문화정도, 사회적 지위 등등이 다름에 따라 애호가 같지 않다. 우리는 부동한 사람들의 부동한 애호를 존중해야 한다, 남이 하는 일이 설사 내눈에 쏙 들지 않더라도 그것이 사회에 해로운 일이 아니라면 비웃을것이 아니라 충분히 리해해줘야 한다. 모든 것을 자기하나의 척도로 재거나 자기의 일가견으로 남을 강요해서는 안된다. 우리에게는 남을 리해하는 아량이 있어야 하고 남의 장점을 찾아볼줄 아는 혜안이 있어야 한다. 남이 하는 일이 내눈에 거슬리면 뒤에서 손가락질을 하고 비양거리는 것은 소인의 행위이다. 그리고 남이 무엇을 한다고 무턱대고 따라하는 것도 바람직한 처사가 아니다. 중국성구에 
142    가을철 어머니 외(2수) 댓글:  조회:2707  추천:0  2016-01-22
 가을철 어머니(외2수)                  박병대   단풍잎 하나 유람객 하나 울긋불긋 고향 산엔 꽃물결이 넘실   하늘 높고 볕 따스한 유람철이지만 산아래 저 배나무댁 어머니는  산행의 정취 아는지 모르시는지?   땀뿌려 가꾼 올망졸망 기쁨들이  느닷없는 서풍에 아미타불될까 팽이같이 돌아치는 불같은 마음 굽힌 허린 그대로 새우등 되고 거칠어진 손등은 솔껍질 닮았구나.   기습하는 밤서리에  파아란 희망 삽시에 물켜버릴라 빨간고추 처마끝에 초롱불 켜고 무오래기 발에 널어 볕사랑 주며  쉼 모르는 날파람에  해도  저우네    품떠난 사랑들에  애간장 만리  간이라도  떼주고픈 애절한 모정 한평생 다함없는 거룩한 베품   진 빠진 머리칼 눈서리  덮어써도 그물 새긴 얼굴에는 해살이 찰랑   길 바쁘다 달아나는 매정한 해야  발걸음 잠시만 멈추어다오 어머니의 젖은 손  보듬어다오 무정한 가을철아  쉬엄쉬엄 떠나렴아 어머니의 고달픔  덜어드려다오. 2015.11     차례상앞에서   기다리던 명절날,  모처름 한자리에 모인 가족들 하늘나라 멀리가신 선친을    모셔와서 차례상 정성껏 차려드렸네.   “허허, 그릇마다 넘친 효성 눈요기만해도 배부르구나.” 아버님 무언의 덕담에 빙그레 웃으시는 우리어머니   큰 절 받으신 부모님 잔 넘치는 술 향기만 맡으시고 고기 한점 과일 하나 안건드리셨는데 어이하여 저렇게도 환하게 웃고계실가   식향에 취하셨나  자식들 효성에 감동되셨나 아마도 그런것만은 아닐거야,  오로지  그때문만은  아니실거야.      자손들이  오순도순 천륜을 즐기니  선친께선  함박꽃  활짝 피우신거야 게구쟁이 흙투성이 철부지때처럼  한솥밥  먹고살던 옛시절처럼 혈육의 정 강물되여 마르지 않는게 선친께서  바라시는  효도일거야              2015.10          못난 내얼굴 아버진 헌헌장부 어머니도 예뻤는데  나는  왜  그  유전자 다 못받았을가? 거울에 비쳐진   내 몰골  보노라면   눈꺼풀 스르르 무거워지고   두 어깨도 맥없이 축 쳐지네.   내가 정말 그렇게도  못났는가?  허욕 좀 팽개치고 거울앞에 다시 서니 허 참,  내 모습이 어때서? 눈에 번쩍   옥면이야  모래속 금싸락이고 나머지 인간이야 다 그나물 그밥인걸   잘생기고  못생겼다는 표준  꼭 손바닥만한 낯짝으로 가릴거냐? 가슴이 후더우면 추남도 부처같고 시샘둥이 저 계집 양귀비  닮았어도  꼭  백년 묵은 여우가 둔갑한것 같구나    용모 좀 빠진다고  서리맞은 풀되여      미용원 찾아가서  돈타작 말아 덕행의 향기로  추한 꼴  다스렸더니  세상에 어느 눈도 째려 보지 않더라     부모님 남긴 최고유전자 덕행인줄  알았네           2015.11            
141    절세기인 정치가 리항복59)대를 이은 명문 댓글:  조회:2498  추천:1  2016-01-18
      59.대를 이은 명문    백사 리항복의 후대는 조선조에서 4명의 령의정과 1명의 좌의정과 3명의 대제학 그리고 여러명의 문과급제를 배출했다. 그들의 활약은 조선 중엽이후 특별히 두드러졌다.리항복의 높은 공덕때문인지 후손들가운데서 손꼽을만한 명인들이 많이 나왔다.리항복의 증손자인 세필(世弼)과 세귀(世龟)는 당대의 명인으로 좌찬성과 령의정에 각각 증직되였다.세귀의 아들인 광좌(光佐)는 대제학과 령의정에 올라 사망한 뒤 문충공(文忠公)의 시호를 받았고 세필의 아들 태좌(台佐)는 영조왕때 좌의정에 올라 사망한 후 문정(文定)이란 시호를 받았다.     리태좌의 아들 종성(宗城) 역시 령의정에 올랐는데 후에 문충공의 시호를 받았다. 768년(영조 44)에 음덕으로 관직에 나와 온릉참봉·덕산현감을 지내고, 1775년 문과정시에 을과로 급제, 예조좌랑·사간원정언·홍문관부수찬·대사간·대사성·리조참의·황해도관찰사·리조참판 등을 력임하였다. 그 뒤 1800년(정조 24) 공조판서에 오른 다음 이어 대사헌·우참찬·형조판서·한성부판윤·좌참찬 등을 지냈다. 1804년(순조 4)에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우의정으로 있을 때, 성학(聖學)에 힘쓰고 정치기강을 바로잡을 것 등 제반시책을 건의하여 조정에서 받아들여졌으며, 1808년 나이 75세에 봉조하(奉朝賀)가 되고 오은군(鰲恩君)에 피봉되었다. 저서에는 시문을 모은 『청헌유고』가 있다. 시호는 효정(孝定)이다. 리항복의 6세손인 리경일(李敬一)도 순조왕때 좌의정에 올라 효정(孝定)이란 시호를 받았으며 구한말 고종때 리유원(李裕元 1814~1888)은 리계초의 아들로서 자는 경춘(景春)이며, 호는 귤산(橘山), 묵농(默農)이다. 영의정을 지냈으며, 1882년에 전권대신으로서 ‘제물포 조약’에 조인하였다. 저서에 《임하필기(林下筆記)》, 《가오고략(嘉梧藁略)》이 있다.) 문충공의 시호를 받았다.    백사 리항복의 11세손인 리유승(李维承) 6형제는 리항복의 둘째아들 리정남의 후손이다. 리유승의 6형제는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그해 12월 혹한에 40여명의 식솔을 이끌고 만주로 들어가서 독립운동에 뛰여들었다.그들 6형제가 처분한 가산은 당시돈으로 40만냥이였다. 네째인 우당(友堂) 리회영(李会荣)은 이들 형제들의 독립운동의 앞장에 서있었다.그는 석주 리상룡과 함께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 조선 광복을 위한 독립군 양성에 전력하였고 1913년에는 북경에 들어가 중화민국 원세개대통령을 만나 조선인들의 보호를 요청하여 승락을 받아내였다.리회영은 1932년에 일본경찰에 체포되여 가혹한 고문을 받다가 옥중에서 사망했다.     둘째인 리석영은 고종때 령의정을 지낸 리유원의 양자로 들어가서 유산을 상속받아 만석거부가 되였다.그는 가산을 몽땅 처리하여 망명하는 비용에 일부를 쓰고 나머지는 신흥무관학교 운영에 이바지했다. 그는 상해에서 대한독립운동을 하다가 사망했다.     광복후 6형제가운데서 유일하게 살아남아 본국에 돌아온 이는 성재 리시영(1869-1963)뿐이였다.5형제와 그들의 아들 등 대부분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사망하거나 실종되였다.리시영은 1919년 4월에 상해로 가서 대한민국림시정부를 조직하고 법무총장,재무총장을 력임하였다.귀국한 뒤 대한민국 초대부통령을 지내였다.그러나 리승만대통령의 독재정치에 크게 실망한 그는 부통령직을 자진 사퇴하고 인재양성을 위해 우당장학회를 설립하였다. 조선전쟁이 폭발한 뒤 부산에 피난해있던 그는 1953년 4월에 로환으로 사망하였다. .  그외에도 많은 인재들이 출현했다.독립운동가이자 광복후 제헌국회의원과 법무장관을 지낸 리인도, 신민당총재였던 리민우,국방장관을 지낸 리희성,,국방부장관을 지낸 리상훈과 국정원장과 국방부장관을 지낸 리종찬장군,건설부장관을 지낸 리한림,통일원장관 리용희,법무부장관 리종원, 세계적인 대기업인 삼성그릅의 창시자인 리병철 회장 등등이 있다. 백사 리항복은 그 자신만 조선조의 4대 명재상으로 청백리로 해학가와 문장가,시인으로 명성을 떨쳤을뿐만아니라 그 후손들도 잘 배양하여 민족의 자랑으로 되고있다.백사 리항복의 애국애민의 숭고한 사상과 무궁무진한 지혜는 세월의 강물을 거쳐 오늘날까지 우리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고있다.그의 후손들은 경주리씨의 한개 파인 백사공파를 이루고 있다.    
140    절세기인 정치가 리항복58)공적은 천추에 댓글:  조회:2497  추천:1  2016-01-12
 58.공적은 천추에 백사가 류배생활을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묵은 중풍이 다시 발작하여 병세가 날로 가중해졌다. 그러나 류배지로 떠날 때 지니고간 약간의 약재도 벌써 떨어진지 오래였고 또 주위에 용한 의원도 없었다. 밤에 잠을 청했으나 종종 잠이 오지 않았다. 새벽무렵에 일어나 앉은 그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을 보노라니 나서 자란 고향산천이 그리워지고 사랑하는 가족들이며 동료들이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시상이 떠오르자 그는 시 한수를 지어 읊고나서 벼루에 먹을 갈아 떨리는 손으로 시를 종이장에 옮기였다.                밤에 앉아 온 밤 홀로 앉아 돌아갈길 생각는데 창문으로 새벽달이 나를 엿보네.   갑자기 허공중에 울어예는 저 기러기 저 새들은 아마도 한양성을 거쳐오겠지                 夜 坐 终宵嘿坐算归程,   晓月窥人入户明. 忽有孤鸿天外过,   来时应自汉阳城.    5월 11일날 저녁 백사는 잠을 자다가 이상한 꿈을 꾸었다.  절친한 친구 한음 리덕형이 왕명을 받고 백사를 대궐로 부르는 것이였다. 백사는 의관을 정제하고 대궐로 달려가서 정전으로 들어갔다. 승하한지 여러해가 되는 선조대왕이 정전에 나와 룡상에 앉아서 리항복을 보고 빙긋이 웃으며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것이였다. 백사가 돌아보니 선조왕의 주위에는 작고한지 여러해가 되는 류성룡, 김명원, 리덕형 등 대신들이 시립하고 있었다. 얼마나 그리던 명신이자 친구들인가! 리항복은 단숨에 그들에게로 달려갔다. 꿈속에서 놀라 깨여난 리항복은 “옛친구들이 다 나타나는걸 보니 이제 내가 이승에 머물 날도 며칠 남지 않았구나!” 하고 길게 탄식하였다. 이틀이 지난 5월 13일 새벽, 닭이 울고 동이 틀무렵 백사는 몸에 열이 올라 까무러쳤는데 깨여나지 못하고 63세를 일기로 파란많은 일생을 마치였다. 조선 중세기에 하늘에 밝게 빛나던 별이 혜성처럼 소리없이 사라졌다. 비보를 접한 주위의  백성들과 관리들은 하늘이 내려앉게 통곡을 하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배웅하려고 배소를 찾아왔다. 백사의 문도이자 평생동안 그의 관심과 사랑을 받아왔고 권률장군의 작은 사위이자 백사의 손아래 동서인 금남군(锦南君) 정충신(시호는 충무공)이 그의 시신을 거두었다. 백사의 시신은 6월 17일날 북청을 떠나 선산이 있는 포천으로 향하였는데 일로에는 수백명의 백성들과 친인들이 통곡을 하며 따랐다. 상두꾼들은 행상을 메고 가며 해로가(韭露歌)를 지어서 구슬프게 불렀다. 해로가 이제 가면 언제 오나 구름 타고 오시려나 바람에 실려 오시려나.   산 첩첩 만장봉에 어찌 다시 오시려나 세상만사 꿈이로다. 허무하기 한량없네.   꿈은 자다가 깨여라도 보지마는 백사선생의 이번 꿈은 영결종천 깰수 없네.   이번 가면 못오는 길 애닲구나 백사선생 대광보국 무얼하나 숭록대부 별수 없네.   아차 한번 가는 길에 부귀영화 무소용일세 남은것은 이름일세 나라위한 이름일세.   의기를 짚은 이름일세  이제 가면 언제 오나 가면 다시 못오시네. 7월 12일 백사 리항복의 시신을 멘 상두꾼들이 백사의 선산이 있는 포천에 도착하였다. 부음을 듣고 찾아온 문상객은 꼬리에 꼬리를 이었다. 8눨 4일 장례를 하는 날이였다. 소식을 듣고 곡을 하며 달려온 고을 백성들과 관원들은 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8월 4일, 그들은 그칠줄 모르는 울음으로 일세의 호걸이요 명재상인 백사 리항복의 장례를 치르고 그의 명복을 빌었다. 함흥에 사는 전 정랑 한인록(韩仁禄),정평에 사는 사인(舍人) 장응시(张应),영흥에 사는 사인 주사룡(朱士龙), 안변에 사는 사인 장응정(张应井) 등이 제문을 써서 제를 지내고 령남의 사인 정심(郑杺) 등은 천리길에 사람을 보내 부의금을 보내왔는데 이런 사람들은 고인이 생전에 면목도 모르던 사람들이였다. 경기도 포천에 있는 백사 리항복의 묘소. 부인 권씨와 쌍분          백사 리항복이 류배소에서 병사했다는 불행한 소식이 대궐에 전해지자  광해군도 크게 놀랐다.임진왜란때 다섯번이나 병조판서에 올라 기묘한 계책으로 공을 세워 나라와 조정을 구해냈고 정승질을 하며 수많은 업적을 쌓았으며 자신이 남방에 가서 분조를 하였을 때 그를 보좌해온 백사 리항복이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나갈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그는 리이첨, 정인홍 무리들의 사촉에 넘어가 충신들을 하나둘 류배시켜 나라일을 망친 잘못을 크게 뉘우쳤다..그는 즉시 명을 내려 리항복이 생전에 력임했던 모든 관직을 회복해주었으며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내리고 깊은 애도를 표시했다.      북청 및 포천에 사는 민간인들은 백사 리항복을 기리려고 재목을 모아서 사당을    짓기 시작했다. 조정에서는 이것이 너무 과한 일이라 생각하고 막았지만 리항복을    위해 기어코 사당을 지으려는 백성들의 뜻을 꺾지 못하였다. 백성들속에 깊이    뿌리박은 백사의 거룩한 형상은 영영 지워버릴수 없었다. 광해군이 왕위에서 쫓겨나고    인조왕이 왕위에 오른 뒤에는 임금이 유사에 명해서 리항복의 제사를 지내주게 하였다.                           리항복의 묘소앞에 있는 사당     백사 리항복은 무려 39년동안 관직에 있었는데 리조판서를 한번 지내고 임진왜란때는 병조판서를 다섯번이나 지냈으며 정승질을 네번,원수를 한번, 체찰사를 두번이나 담당했다.출장입상한 20여년 동안에 그가 이룩한 공은 헤아릴수 없이 많다. 그의 후배이자 효종임금때 신풍부원군(新丰府院君)에 진봉된 장유(张维)는 리항복의 행장을 지었는데 그 가운데 이런 글이 적혀있다.    “…공훈은 사직을 보존하는데 있고 은택은 생민에 미쳤으며 청백하기는 빙옥같고 존중되기는 교악과 같았으니 국가의 주석이요 사류의 본보기였다.그리고 정사년의 한 상소에 이르러서는 륜기(伦气)를 부지하고 정기(正气)를 수립한것이 우뚝히 천지간에 드높아서 비록 일월과 빛을 겨루더라도 될것이다.그는 타고난” 자질이 고상하고 탁트여서 큰 도량이 있었다.키는 보통사람을 넘지 못했으나 외모가 걸출하고 풍채가 엄정하였다…문장을 짓는데는 뛰어난 기운이 있어 호방초탈하고 웅건민첩하여 본래의 법칙을 따르지 않았고 필적은 호방하였으며 화법도 약간 알아서 묘치가 있었으나 이윽고 그만 두고 다시 하지 않았다.”     그의 저서로는 백사집(白沙集),북천일록(北迁日录): 주소계의(奏疏启议) 2권, 4례훈몽(四礼训蒙)1권,로사령언(鲁史零言)15권 등이 있다.
139    절세기인 정치가 리항복57) 로련충의 이야기 댓글:  조회:1955  추천:0  2016-01-09
 57.로련충의 이야기  중풍이 낫지 않은  리항복은 처음에는 망우리에 류배되였다가 여섯번이나 자리를 옮겨 비로소 북청이란 산골로 류배소를 정하였다. 1628년 1월 18일, 63세의 로인인 백사 리항복은 회양의 은설이 덮인 철령(铁岭)을 넘으면서 피눈물 솟는 시조 두수를 지어 읊었다.             장사왕 가태부*야 눈물도 여릴시고             효문제 승평시에 통곡은 무삼일고             우리도 그런 때 만나시니 어이 울고 하노라.                         *가태부-중국 서한시기의 시인 가의            철령* 높은 재에 자고가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孤臣冤泪)*를 비삼아 띄워다가             님 계신 구중 심처에 뿌려본들 어떠리.                         *철령-강원도에 있는 높은 령의 이름                         *고신원루-외로운 신하의 원통한 눈물   그해 2월 류배지인 북청땅에 이른 백사는 가슴이 답답하여 견딜수가 없었다.그는 시 한수를 지어 읊으며 숨막히는 아픔을 달래였다.그 시의 마지막 두구절은 다음과 같다. 겹겹이 싸인 산이 호걸을 가두려는데             천봉우리 바라보니 갈길을 막았구나.      (群山定欲囚豪杰, 回望千峰锁前程)               리항복이 북청에서 귀양살이를 하고있을 때 린근에 사는 고을의 원님이며 선비들이 매일 그의 처소를 찾아와서 인사를 올리고 학문에 대해 묻곤하였다. 그중 한 서생은 누구보다 자주 찾아와서 문안을 올리고 말동무도 해주었다. 리항복은 이  젊은이와 사귀면서 그가 비록 살림살이가 구차하고 먹물은 별로 먹은게 없었지만 품성이 순박하여  은근히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였다. 어느날 그 서생은 백사를 찾아와서 자기의 억울한 사정을 아뢰면서 리항복에게  도움을 청하였다.백사가 젊은이의 말을 들어보니 사정은 대개 이러하였다. 전날  도사(都事)가 그 고을에 이르러 서당을 찾아와서 서생들의 학습능력을 시험을 쳐보았다. 그날 이 서생은 천자문을 옆구리에 끼고 시험장으로 들어갔다.그런데 도사가 이 서생의 앞에 대뜸 기러기 안(雁)자를 가리키면서 읽으라고 하였다.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는데다가 몹시 당황해진 서생은 머리가 벙벙해져서  일시 그 글자가 무슨 글자인지 생각나지 않아서 입을 열지 못했다. “왜 대답을 안하는고? 어서 대답을 하여라.”  도사가 어서 대답하라고  독촉하자 그 서생은 모른다는 말은 차마 할수가 없어서 이마에 진땀을 흘리면서 쩔쩔매였다. 옆에 앉아있던 한 서생이 이 정황을 보고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기러기 안”하고 가느다란 소리로 알려주었다. 그러나 긴장할대로 긴장해진 이 서생은 끝의 “안”자는 어렴뭇이 들었으나 무슨 자라고 하는지 몰라 부들부들 떨었다.그러자 “안”자를 알려줬던 서생이 화가 동해서 “정말로 로련충이네.”하고 투덜댔다.   “로련충”이란 말은 원래 무지막지한 상놈을 모욕하는데 쓰이던 말이였다.   서생은 자기의 동창이 한 “로련충”이란 말을 정답인줄 알고 목청을 높여 대답했다. “로련충 자입니다.” 그 말을 듣고난 도사는 참으로 기가 막혔다.그는 이 서생이 너무도 아둔하여 글을 배워낼 재목이 아니라 판단하고 그를 서생의 명단에서 지워버리고 장정을 뽑는 명단에  편입시키려고 했던것이였다.  “네가 그런 간단한 글자도 알지 못했으니 나인들 너를 도와줄 무슨 좋은 방도가 있겠느냐?” “대감님께선 꼭 좋은 방도를 찾으실수 있을것입니다. 제발 소생을 한번만  도와주십시오.”서생은 리항복대감에게 자기의 어려운 가정형편을 말하면서 도움을 빌고나서  돌아갔다. 다음날 도사가 백사 리항복을 찾아가서 문안을 올다. 리항복은 이 기회에 그 젊은이를 도와주려고 마음먹었다.  “대감께선 귀양살이를 하시느라 무척 옹색하실텐데 반찬은 무엇을 드십니까?” “만약에 기사(己沙)가 없었더라면 내가 어찌 고기맛을 볼수가 있겠는가?” “기사란 도대체 무슨 물건입니까?” “북녘 사투리로는 생치(生雉)를 기사라고들 하더구만.” “그럼 그밖에 다른 반찬거리는 없는지요?” “로련충이 있긴하네만 얻기가 매우 어려워 한달에 간신히 한두마리에 그칠 따름이라네.” “로련충이라고요? 로련충이 무엇입니까?” “이 고장  사람들이 쓰는 사투리는 워낙 서울말과 크게 달라서 이 지방에서는 기러기를 로련충이라 부르더군.” “아, 그렇습니까?” 도사는 가슴속에 집히는게 있어서 한동안 잠자코 있다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하관이 전날 시험장에서 로련충이란 말로 하여 한 서생을 락방시킨적이 있습니다. 하관이 기러기 자를 내놓고 물었더니 그 서생이 로련충 자라고 대답하기에 하관은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만 그 젊은이를 락방시킨적이 있습니다.이제 대감의 말씀을 듣고보니 하관이 그만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도사의 말을 듣고나서 리항복이 말했다. “허허, 그런 일이 있었는가? 청년 명관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자네는 앞날이 구만리같은 젊은이의 전도를 망쳐 그들의 평생 원망을 살 일은 삼가해야 하네.” 리항복이 시치미를 따고 이렇게 말하자 도사는 그에게 제때에 일깨워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나서 하직했다.그는 고을의 동헌에 돌아오자 그 서생의 이름을 군적에서 지워버리고 서생의 명부에 다시 올려놓았다. 기실 북도사람들이 기러기를 로련충이라고 부른다는것은 리항복이 서생을 도우려고 림시 지어낸 말이였다.  
138    절세기인 정치가 리항복 56)후배에게 넘겨준 마지막 선물 댓글:  조회:1664  추천:0  2016-01-04
  56.후배에게 넘겨준 마지막 선물 무오년(戊午年:1618년) 정월, 리항복은 머나먼 류배길에 오르게 되였다.그는 이번에 먼 북방으로 류배되여 가면 다시는 집에 돌아오지 못하리라는것을 스스로 헤아리고 있었다. 그는 집안사람들에게 명하여 의복과 이불과 죽었을 때 렴습하는데 쓸 물건을 일일이 챙기게 해서 스스로 휴대하였다.그리고 여러 자식들을 불러 앉히고나서 조용히  분부했다. “나는 나라의 대신으로서 임금을 도와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하였으니 실로 죽을 죄를 지었도다.내가 죽은 뒤에 조의(朝衣)로 렴(敛)을 하지 말고 심의(深衣예전에, 높은 선비들이 입던 웃옷,대개 흰 베로 두루마기 모양으로 만들며, 소매를 넓게 하고 검은 비단으로 가를 둘렀다)와 대대(大带)만을 사용하거라.” “아버님, 부디 몸 조심하고 잘 다녀오십시오.” 리항복이 류배길에 오르는 날, 친지들이며 문하생들이 몰려와서 눈물을 흘리면서 그를 배웅하였다. 이제 한번 가면 어느 때 돌아올지 기약없는 류배길이건만 리항복은 아주 태연자약하였다. 이때 참판직에 있다가 대북파들에 의해 파직당한 문하생 김류가 달려왔다.     백사는 자기의 후계자로 배양하던 김류를 보자 기쁨을 금치 못하였다.   “어서 오게. 나는 자네를 못만나보고 떠나게 될까봐 걱정했었네. 이걸 댁에 가지고가서 벽에다 정중하게 걸어놓게.”   김류가 스승의 선물을  받아보니 라는 족자였다. 수양버들아래에 말 한필이 매여있는 이 그림은 수준이 별로 높지 않았고 화체와     락관(落款)이 없어서 족자를 그린 사람이 어느 누구인지 알수가 없었다.   “대감, 이 족자는 어느 분의 작품입니까?”   김류의 물음에 리항복은 빙그레 웃으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난 정미년에 선대왕께서 지병으로 계실 때 나는 한음, 류영경 등과 함께 대전   약방에 갔었네. 내시와 별감이 찾아와서 전하께서 우리를 부르신다기에 올라갔   더니  의창, 인성 등 왕자들과  릉양, 릉창 등 왕손들이 병실에 둘러앉아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네. 서화를 즐기시는 선대왕께서는  왕자왕손들이 그림그리는 모습을 감상하시면서 모진 통증을 간신히 참으셨다네. 왕자왕손들이 그림을 다    그리자 선대왕께선 우리더러 맘에 드는 그림을 한장씩 골라 가지라고 하셨네. 지금 이 족자가 어느 왕자왕손의 소작인지 자네한테 알려줄 수는 없네만 사랑방에 고이 모셔두면 장차 큰 쓸모가 있을걸세.”     년로한 백사 리항복은 류배간 뒤 몇해 만에 불행히 적소에서 사망했다. 5~6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김류는  변장한 포졸들이  미행하며 그의 일거일동을 감시한다는 것을 알고 날마다 집안에서 글만 읽으며 반정할 기회를 기다렸다. 어느날 그는 시우들의 초청에 못이겨 집을 나섰는데 얼마뒤에 천둥이 울고 소나기가 쏟아졌다.     아침에 김류댁의 시녀가 이웃집에 심부름갔다가 돌아오니  상복을 입은 웬    사람이  대문처마밑에 서서 비를 끊고있었다. 시녀가 집안에 들어가서 마님에게    이 사실을 아뢰자 마님이 분부했다.   “어서  그 손님을  사랑으로 모셔오너라.”   “나으리께서 안계시는데 어떻게…”   “귀한 손님이니 어서  사랑방으로 모셔들여라.”   상복입은 사람이 시녀를 따라 사랑방으로 들어갈 때 부인은 손님의 상을   훔쳐보았다. 신통하게도 손님은 부인이 어제밤 꿈에 본 바로 그사람이였다   . (어제밤에는 룡포를 걸쳤더니 오늘은 상복을 입고계시는구나.). 간밤의 꿈이 아주 령험하다고 생각한 부인은 비록 가군이 댁에 없었지만  하인을 시켜 장에 가서   고기, 생선 등을 사와 점심상을 마련하게 하였다.    이윽고 김류가 집에 돌아왔다. 그는 내키지 않는 걸음을 했다가 소나기가 멎지 않자  집으로 돌아왔던 것이였다.   “여보, 오늘 웬  손님이 오셨소?”   “네, 아주 귀한 손님이 찾아오셨어요.” 부인 류씨는 전날밤에 자기가 꾼 이상한   꿈을 이야기하고나서 바로 그 꿈에 본 손님이 집에 찾아왔다고 아뢰였다.   의관을 정제하고 사랑방 문을 연 김류는 방안에 앉아있는  손님으을 보고 깜짝   놀랐다. 상복을 입고있는 손님은 바로 선조대왕의 손자인 릉양군(绫阳君)이였다.   “릉양군께서 어이 한사에 들렸소이까?”   사랑방에 정히 앉아서 벽에 걸린 족자에 정신을 팔던 릉양군은  김류를 보고   말하였다.   “친상을 당해 산소를 택하려고 삼청동 지술사를 찾아가던 중 비를 끊느라 잠시   댁에 들렸소. 그런데 이 족자가 어인고로 댁에 와있는고? 출처가 하도 궁금해서   떠나지 않고 당신을 기다리던 중이였소.” “아, 그렇소이까? 이 족자는 오성대감께서 류배가실 때 하관에게 선물한 것이옵니다. 대감께서는 이 족자를 사랑방 벽에 정히 모셔놓고 때를 기다리면 족자의 주인이 반드시 나타나실게라고 말씀했소이다. “   “오성대감은 실로 기인이시요. 대감께선 이 족자로 우리 두사람에게 특이한   인연을 맺어줬구료.. 선대왕께서 병상에 계실 때 하루는 우리 왕자왕손들을    불러놓고 그림을 그리라고 하셨었소. 우리들이 그린 서화가운데서 내가 그린 이    그림이 제일 보잘것 없었는데 백사께서는 나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의미있게    웃으시면서 이 그림을 택하셨는데 깊은 뜻이 숨어있었구료.”   광해군의 정권을 뒤엎을 반정을 꿈꾸며 기회를  못찾아서 가슴을 저미던 김류는   스승이신 백사가 최후로 선물한 신비한 족자와  부인이 꾼 꿈덕으로 오매에도    그리던 릉양군을 만나게 되였으니 실로 호랑이의 어께에 날개를 단 셈이였다.   김류는 리귀, 원두표, 리시백 등 반대파들의 힘을 모아 광해군을  몰아내고 릉양군을 왕위에 추대하였는데 그가 바로 조선조 제 16대왕인 인조대왕이다. 원견성이 풍부한 백사 리항복은 광해군이 왕위를 지키지 못하고 퇴위당할 것과 릉양군이 장차 보위에 오를 것까지 내다보고 자기와 뜻이 맞은 미더운 후배에게 최후로 족자를 선물했었다 한다. 
137    절세기인 정치가 리항복 55)피눈물로 쓴 상소문 댓글:  조회:1737  추천:1  2016-01-01
55.피눈물로 쓴 상소문   한번은 리항복의 장남 성남(星男)이 정인홍,리이첨일파의 무함을 받아 억울하게 옥에 갇히였다.청천벽력같은 일을 당한 집안사람들은 리항복더러 약간의 뢰물을 먹이더라도 성남이를 하루빨리  석방시키자고 통사정하였다. “그건 어림도 없는 짓이다. 우리 성남이가 진정 죄를 지었다면 국법에 의해 해당한 처벌을 받는게 마땅할것이고 만약 걔가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다면 어느때든 무죄로 풀려나올것이다. 나는 절대 그런 무모한 짓은 하지 않는다. ” 리항복은 집안사람들을 통렬하게 꾸짖었다. 리항복이 아들을 구해내기위해 뢰물을 먹이기만 하면 즉시 그에게 올가미를 들씌우려고 초조히 기다리던 정인홍일파는 리항복이 그들이 늘인 그물에 걸려들지 않자 크게 실망하였다. 그들은 리항복을 해치려고 새로운 수작을 꾸미였다.  정인홍은 량사를 충동질하여 리항복이 이전에 조정에서 인목대비를 페하는것을 반대하는 소장을 쓴 일이 있다면서 그에게 중죄를 씌울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리항복의 위대한 인격을 믿고 그를 존경하기때문에 그자들의 요구에 고개를 끄덕여주지 않았다。 병진(丙辰:1616)년에 리항복은 가족을 서울에 둔채 소실인 금성오씨부인과 함께 시골인 망우리(忘忧里)로 옮겨와서 게딱지같은 초가집을 지어놓았다. 그는 원래 살던 로원에서 그곳으로 이주하여 매우 어려운 나날을 보내였다. 문 한짝이 없어서 새끼로 짚을 엮은 발을 늘여놓은 방안에는 바람이 불면  종이장이 날렸고 겨울에 눈이 내리면 방안으로 눈송이가 날아들었다. 어느날 눈이 온 뒤 백사 리항복은 시 한수를 지었다.              눈이 온 뒤 눈온 뒤 산 사립은 늦도록 닫혀있고 시내다리 한낮인데 오가는 사람 적네. 화로에 묻은 불은 기운이 모락모락 주먹같은 산 밤알 혼자서 구워먹네               雪后 雪后山屝晚不开,   溪桥日午少人来 篝炉伏火腾腾煖,   茅栗如拳手自煨       그 이듬해 겨울에 조정에서는 또 론의가 일어났다. 리이첨, 허균(许筠) 등이 한무리의 모리배를 사촉하여 광해군에게 상소문을 올려 인목대비의 죄상을 라렬하였는데 그 언사가 극히 불손하였지만 필요한 죄증이란  아무것도 잡은것이 없었다. 그러나 인목대비를 폐출하지 않고는 후환을 깨끗히 없애지 못한다고 생각한 광해군은 리이첨 등이 써올린 상소문을 가지고 어전에서 백관을 모아놓고 회의를 소집하였다. 광해군은 신하들을 보고 서궁에 있는 대비를 페해야 하느냐 아니면 그냥 둬야하느냐 하는 것을 가지고 토론을 벌이게 하였다. 이때 백사 리항복은 몸에 중풍이 즐 집에서 누워있었는데 하늘에서 갑자기 천둥소리가 크게 울렸다. 자나깨나 조정의 일을 근심하는 리항복은 천둥소리에 크게 놀라면서 “이것은 하늘이 경계하여 고하는것이구나.”라고 말하였다. 이때 추부랑(枢府郎)이 댁을 찾아와서 리항복더러 대비를 페하는데 대해  의견을 적어달라고 하였다.병석에 누워있던 리항복은 가족들의 부축을 받으며 가까스로 일어나서 떨리는 손으로 붓을 휘둘러 계문을 써내려갔다. “…누가 전하를 위하여 이런 계책을 내놨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우순 (虞舜)은 불행하여 완악한 아비와 어리석은 어미가 항상 우순을 죽이기 위해 우물을 파게 하고 창고를 수리하게 하였으니 위태롭기가 극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우순은 부르짖어 울고 원망하면서도 사모하는 부모님의 옳지 못한 점을 보려 하지 않았습니다.참으로 아비는 비록 인자하지 않을지라도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아서는 안되기때문에 에서 자식은 어머니를 원쑤로 삼을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더구나 에 의하면 “공급(孔伋 )의 안해가 된 사람은 분명히 공백(孔白)의 어머니이다.”라고 하였으니 성효(诚孝)가 중한 곳에 어찌 간격이 있을수 있겠습니까? 이제 전하께서 효도로 국가를 다스리는 때를 당하여 온 나라안이 장차 교화될 희망이 있는데 이런 말이 어찌 전하의 귀에 들어갔단 말입니까?전하께서 지금 하실 도리를 말씀드리자면 우순의 덕을 본받아서 능히 효로써 가문을 화해시키고 차차로 다스려서 노염을 돌려 인자함으로 변화시키는것이 어리석은 신의 바랍입니다…” 이 소장이 조정에 이르자 조야에서 그 소식을 들은 선량한 신하들은 리항복을 위하여 두려운 마음에 머리털이 곤두섰고 혹은 남몰래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저리(邸吏)는 리항복의 소장을 기록할 때 손이 떨려서 종이에 붓을 댈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상소문을 받아본 광해임금은 자신의 뜻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리항복이 한없이 유감스러웠다. 임금의 눈치만을 고양이같이 살피던 간신무리들은 이때야말로 자기들의 앞길을 가로막은 산과 같은 리항복을 철저히 무너뜨릴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고 일제히 달려들었다.   임금의 총애를 받고 득세한 대북파들은  자기들의 최대의 정적인 백사 리항복을 제거할 기회를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열심히 붙는 불에 키질을 하였다.   3사에서는 리항복을 먼 변방에 위리안치(围篱安置)시킬것을 강하게 요구하였다. 광해군은 리항복에 대한 처벌을 두고 오래동안 골머리를 앓았다.일시적 감정적으로는 리항복에게 중벌을 선고하고싶었지만 그가 임진왜란때 수많은 공을 세웠고 조정과 백성들가운데 위망이 너무 높았고 사적으로 리항복은 광해군의 세자시절의 스승이요 그가 분조를 했을때 그의 뒤를 굳게 지켜준 은인이였다. 하지만 3사가 일제히 일어나 리항복을 처벌하자고 떠드는 이상 광해군도 리항복을 더 비호하다가는 자기의 왕위도 지켜내지 못할까봐 두려워졌다.그가 리항복을 그냥 조정에 놔뒀다가는 또 무슨 검은 그림자가 그에게 덮쳐들지 모를 일이였다.광해군은 리항복을 보호하려는 목적에서 최종 결단을 내렸다. “죄인 리항복을   북방으로 류배시키시오.” 광해군이 리항복을 류배시키라고 하자 간신무리들은 그 처벌이 내심 달갑지 않았지만 어명이라 집행하지 않을수 없었다. 
136    절세기인 정치가 리항복 54). 둘도없는 친구를 보내고 댓글:  조회:1922  추천:0  2015-12-30
54. 둘도없는 친구를 보내고    리항복이 억울하게 탄핵을 받고 동교에 내려가자 평생의 막역지우를 영영 잃어버리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 한음 리덕형은 슬픔을 금할수 없어 날마다 술로 아픈 가슴을 달래였다.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다음과 같은 시조를 지어 읊었다.                 큰 잔에 가득 부어 취토록 먹으면서                만고영웅을 손꼽아 헤여보니                아마도 류령(刘伶) 리백(李白)이 내 벗인가 하노라.     광해군은 그후 리덕형의 주청을 받아들여 선조왕의 적자인 영창대군을 살해하지 않고 강화도로 류배를 시켰다.그런데 이를 보고 가만히 있을 리이첨일파가 아니였다. 홍문관의 리성(李惺) 등 무리들이 리이첨의 사촉을 받고 광해군에게 리덕형이 역적을 두둔한다고 모함하였다. 그러자 3사에서도 그들의 세력에 가담하여 리덕형은 역적이니 반드시 참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광해군은 리덕형이 어떤 사람인가를 누구보다 잘알고있었다. 임진왜란때 나라를 위해 수많은 전공을 세웠고 일국의 대제학에 정승까지 지내면서 언제나 원칙을 지키고 혼신의 정력을 몰부어 공작한 그가 어찌 역적이 될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광해군은 저의 지지기반인 리이첨 등 대북파들의 요구를 거절할 힘도 용기도 없는 처지였다. 여러모로 골머리를 앓던 광해군은 맘속에서 리덕형을 은밀히 보호하려는 목적에서 그의 벼슬을 파면시키는것으로 사태를 수습했다.  탈관삭직이 된 리덕형은 광주땅 사제(莎堤)마을로 내려와서 칩거하였다. 만년에 사귄 시인 로계 박인로가 종종 댁을 찾아와서 서로 시를 지어 화답하며 외로움을 달래기도 했다.  박인로(朴仁老, 1561~1642) 조선 선조 때의 문인. 호는 노계(蘆溪). 임진왜란 때 무공을 세웠으며, ‘태평사(太平詞)’, ‘선상탄(船上嘆)’, ‘루항사(陋巷詞)’ 등 가사를 지어 송강 정철다음으로 가는 가사시인으로 꼽히는 분이였다.    하루저녁 리덕형은 술을 마시고나서 밤하늘에 떠있는 달을 보며 시조 한수를 지어읊었다. 달이 뚜렷하여 벽공에 걸렸으니 만고풍상에 떨어짐즉 하다마는 지금은 취객을 위하여 장조금준*하노라.           *장조금준(长照金樽)-술잔을 길이 비추노라. 일대 정치가요 문학의 거인인 한음 리덕형은 불치의 병을 얻어 53세의 많잖은 나이를 일기로 파란많은 일생을 마치였다.  절친한 벗 리덕형이 불행하게 별세했다는 부고가 로원에 날아왔다. 리항복에게는 실로 청천벽력이나 다름없었다. “한음이 떠났다고? 한음이?” “그러하옵니다. 대감.” “한음,한음, 자네가 먼저 떠나다니…” 리항복은 막역지우의 호를 거듭 부르면서 한동안 정신을 수습하지 못하다가 내가 이러고 있을수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곧바로 사제마을로 달려갔다. 그는 한음의 빈소를 찾아가서 친히 막역지우의 시신을 렴습해주고 유족들과 함께 슬프게 곡을 하고난 뒤 집에 돌아갔다. 그는 마지막으로 한음을 위해 묘지명(墓志铭)을 지어 그의 높은 학덕과 빛나는 일생을 진실하게 평가해주는것으로 그들의 우정을 마무리했다.  “…근세에 률곡이 돌아가시자 성균관의 학도들이나 말단 군졸들까지 모여들어 슬프게 울었고 서애 류성룡의 죽음에도 저자사람들까지 모여들어 울었으며 지금 한음공의 이름이 탄핵에 걸려 처벌하자고 빗발치는 상소가 올려지는데 한음이 죽자 꼭 같은 일이 벌어졌다.도대체 무슨 은혜를 베풀었기에 우아래 사람 모두가 그렇게 물고있단 말인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성인이 말했듯이 산 사람에게서는 뜻을 뺏을수 없듯이 죽은 사람에게서는 명성을 빼앗을수 없어서 그렇다…” 한음 리덕형이 심었다는 은행나무 두 그루와 집터임을 알려주는 유허비(오른쪽).     조선력사상에서 31살의 젊은 나이에 선비들이 가장 흠모하는 대제학이란 벼슬에 이르렀고 38세의 젊은 나이에 정승직에 올라 나라를 위해 수많은 업적을 쌓은 한음 리덕형이 53세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들은 광해군은 크게 놀랐다. 그는 즉시 명을 내려 리덕형의 모든 관작을 회복시켜주었고 깊은 애도를 표시했다.  
135    절세기인 정치가 리항복 53)호역과 호역 댓글:  조회:1791  추천:0  2015-12-29
  53.호역(户役)과 호역(护逆) 리항복은 탄핵을 받고 한 어린 종에게 말고삐를 잡히고 동교(东郊)를 나가서    강가에 오두막집을 지어놓고 우거하게 되였다.      한여름의 날은 개일때가 별로 없고 하늘에선 시도때도 없이 비가 내렸다.      가을이 되여 산과 들에 락엽이 지고 눈이 내리고 서북풍이 세차게 몰아치니 강가에서는 추워서 견딜수가 없었다.리항복은 처소를  로원(芦原)의 시골집으로 옮겨왔다.오두막집에 쑥대로 드나드는 문을 엮어 달고 지내였다. 그는 잡곡밥도 넉넉지 않아 종종 주린 배를 채울수 없었지만 언제나 마음만은 태연하였다.그는 온갖 시름을 쓸어버리고 조정에 있을 때 바빠서 읽지 못한 책을 읽었다.책속에 깊이 빠지다보면 하루해가 어느새 지나가는지도 몰랐다. 그는  한가할 때면 짚신을 신고 산과 시내를 찾아다니면서 마음속의 번뇌를 말끔히 씻었다. 어느날 리항복이 집에서 책을 읽고있는데 마을에 사는 한 농부가 그를 찾아왔다.리항복과  이런저런 농가의  이야기를 나누던 농부가 갑자기 이런 말을 꺼냈다.    “대감나으리,우리 농민들은 호역(户役)때문에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소이다.” 그 말을 듣고난 리항복은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나 역시 호역(护逆)때문에 살아가는게 이만저만  어렵지 않다네.허허허.” 해학을 즐기는 그는 농부가 빈번한 부역때문에 농민들이 편안히 살수 없다는 뜻으로 말한  호역을 그는 역적을 보호하다 탄핵을 받고있다는 동음이의의 호역이란 단어를 써서 그 농부를 웃기였다. 한번은 그가 마복차림으로 나귀를 타고 청평산(清平山)에 가서 노닐었는데 그와 안면이 없는 사람들은 그를 일개 시골농부로 알고 장난을 걸었다. “여보게 령감, 보아하니 벼슬 한자리쯤 한 늙은이같은데 글을 읽기나 했소?” “아무렴 일자무식이고야 벼슬살이를 어찌 할수 있겠소?” “당신이 글을 안다는데 우리한테 시조 한수를 지어 읊어보실수 있겠소?” “그까짓 시조따위를 지어읊는거야 식은죽먹기이지.내 시조 한수를 읊을테니 들어보시오.”   유마유금유주(有马有金有酒)하니 소비친척강위친(素非亲戚强为亲)을 일조마사황금진(一朝马死黄金尽)하니 친척환위로상인(亲戚还为路上人)이로다. 세상에 인(人)사이 변하니 그를 슬허하노라. “정말 멋진 시조입니다.지금 세상에 금전과 벼슬에 아부하여 량심을 개먹인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이 시조를 듣고나니 속이 후련합니다. 어디 한수 더 읊어주시겠습니까?”  “그게야 뭐 어려울게 있겠소?” 리항복은 농부들의 청에 못이겨 꽃과 나비라는 제목으로 시조 한수를 지어 읊었다.     꽃아 색을 믿고 오는 나비 금치 마라     춘광이 덧없는줄 넨들 어이 짐작하랴     록엽이 성음자만지(成阴子满枝)하면 어느 나비 돌아오리.   농부들은 늙은이가 읊는 시조의 깊은 뜻은 다 알리가 없었지만 이 늙은이가 학식이 대단하고 겸손한 관리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어르신님, 우리가 눈이 있어도 어르신님을 몰라봤습니다.함자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게 뭐 어려운 일인가? 내 성은 리씨이고 관명은 항복일세.”  “예?!리항복대감이시라고요?” 농부들은 너무도 놀라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 사람들, 갑자기 왜 이러나? 이 늙은이가 자네들을 해칠까봐 두려운가? 허허.어서들 일어나게.” 농부들은 리항복과 마음이 가까워져서 그에게 서울에서 보고들은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리항복은 이날따라 기분이 유달리 좋아져서 농부들에게 관청에서 벌어진 우스운 이야기를 하여 농부들의 배를 째게도 했고 그들과 서슴없이 롱을 주고받으면서 하루해를 즐기였다.  
134    절세기인 정치가 리항복 52)목숨 걸고 쓴 계 댓글:  조회:1690  추천:1  2015-12-27
  52.목숨걸고 쓴 계 계축(癸丑:1613)년에 리항복은  위성(衛聖),익사(翼社),형난(亨難) 등 세가지 공훈에 책록되였다. 공훈에 책록되는것은 결코 그가 바라던것이 아니였다.  의금부에는 강도질을 하다가 잡혀서 곧  사형을 선고받게 될  박응서라는 죄수가 있었다.박응서는 전 령의정 박순의 서자로서 시문에 능하고 학문이 연박하였으나 서자라는 죄아닌 죄로 출세의 길이 막혔었다.이에 불만을 품은 그는 명문가의 서자들인 심우영,서양갑,허홍인,박치의,리경준,김경손 등과 로 자처하고 려주의 북한강일대에서 시와 술로 벗을 만나는 활동을 벌이였다. 광해군 4년인 1612년에 그들은 조령에서 은을 매매하는 상인을 죽이고 은 수백냥을 강탈했다.이듬해 봄에 그들 강도일당은 검거되였다.이들을 심문하게된 대북파의 리이첨, 정인홍 등 간신들은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리용하려고 음모를 꾸미였다. 그들의 꼬임에 빠진 박응서일당은 김제남이 영창대군을 옹립하려고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그들을 시켜서 은상인의 은을 강탈하게 했다는 엉터리없는 거짓 자백을 하였다. 선조왕의 장인인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에게 역적이란 죄를 씌우지 못해 안달아하던 광해군은 즉시 연흥부원군에게 역모죄를 들씌웠다. 그리하여 영창대군의 외조부이자 선조대왕의 장인인 김제남은 서소문(西小门)밖 자택에서 사약을 받고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고 선조왕의 두번째 왕비이자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는 서궁에서 페출의 위기를 맞게 되였다.  .    리항복은 하찮은 일에 련루되여 조정을 나가 대죄하다가 광해군의 부름을 받고 국청에 나왔다. 이때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나이 겨우 8세였는데 3사가 그를 역적의 괴수로 지목하면서 임금에게 소장(疏章)을 올려 그를 죽이기를 주청하였다.그러나 리항복이 주도하는  의정부에서는 영창대군이 역모를 일으킨 아무런 증거도 없다면서   정정(廷廳)을 하려 하지 않았다. 이에 소인무리들이 끝없이 기세를 부려서 눈앞에 일어날 화를 예측할수가 없었다.  어느날, 두 재상이 밤에 그를 찾아와서 자칫하면 신변에 큰 화가 떨어질수 있으니 조회에 참석하지 말고  회피하라고 협박하였다. 그러나 그는 추호도 동요하지 않았다. “아버님,우리 가족의 생명안전을 지키기 위해 아버님께서 잠시 눈을 감아주십시오.”  자식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애원하였으나 그는 의연하게 수염을 뽐내면서 단호히 거절하였다. “나는 선조대왕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벼슬이 재상의 지위에 이르렀고 이제는 늙어서 곧 죽을 목숨인데 어찌 평생을 지켜오던 바른 뜻을 굽히고 선왕을 저버려서 스스로 명의를 무너뜨릴수 있겠느냐? 나의 뜻은 이미 정해졌으니 너희들은 다시 그런 말을 꺼내지 말아라.” 량사(两司)가 날마다 대신들을 침범하여 많은 대신들이 두려워 벌벌 떨면서 속심의 말을 감히  입에 올리지 못했는데 오로지 리항복과 리덕형만은  원래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런데 장령(掌令) 정조(郑造),윤인(尹訒) 등이 광해군의 뜻에 영합하여 인목대비는 어머니로서 해야 할 도리를 행하지 못했으므로 반드시 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리항복은 역적들이 아무런 죄도 없는 선조왕의 왕비이자 광해군의 이붓어미인 인목대비를 서궁에 연금시켜놓고 여덟살밖에 되지 않는 영창대군을 서인(庶人)으로 만들어 강화도(江华岛)로 끌어가 옥에 가두는 잔인무도한 행위를 감행하는것을  차마 눈뜨고 볼수가 없었다.  그는 즉시 임금에게 상소문을 썼다. 초고를 한음 리덕형에게 보였더니 한음도 매우 만족해하면서 상소문을 완성하여 함께 임금에게 올리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발생하였다.리항복이 천거한 정협(郑浹)이란 관리가 죄를 입었던 것이였다.리항복은 관리를 잘못 추천했다는 죄로 탄핵을 받고 조정을 떠나게 되였다. 그리하여 이미 써놓았던 상소문도 임금에게 올리지 못하였다.
133    절세기인 정치가 리항복 51) 이리떼들속에서 댓글:  조회:1911  추천:0  2015-12-26
  51.이리떼속에서 신해(申亥:1611)년 여름에는 정인홍이   계를 써올려 문원공(文元公) 리언적(李彦迪)과 문순공(文純公) 리황(李滉) 두사람을 문묘(文廟)에 배향하는것은 옳지 않은 처사이니 시정해야 한다고 주청했다. 정인홍이 유학의 기둥이자 대현인들인 리언적과 퇴계선생을 문묘에 배향한것을 잘못된 처사라고 주장한것은 유교에 대한 배반이나 다름없었다.태학(太学)의 선비들은 격분하여 분분히 글을 올려 시비를 가리고나서  정인홍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해버렸다.사태가 이렇게 번져지자 정인홍의 무리에 가담하고있는 지평(持平) 박여량(朴汝樑)이 이 사실을 임금에게 고자질하였다. 광해군은 유림들이 임금이 총애하는 신하인 정인홍을 유적에서 지워버렸다는 말을 듣고 노발대발하였다. 그는 정인홍을 유적에서 삭제할것을 주장한 선비들을 조사해내서 옥에 가두려고 마음먹었다. 그 소식이 전해지자 성균관의 유생들은 일제히 성균관을 비우고 떠나버렸다.자칫하면 성균관이 피비린 도살장소로 변할 위험이 있었다.  리항복은 두번이나 글을 올려 정인홍이 사악한 마음을 품고 선배현인들을 헐뜯었으므로 많은 선비들이 이를 다같이 분개한것이니 이 일로 성균관유생들에게 죄를 주어서는 절대 안된다는 뜻을 강하게 표시하였다.리항복의 글이 도리가 분명하자 광해군도 어쩔수 없어서 그의 뜻을 따르고 성균관 유생들에게 죄를 묻지 않았다. 신해년(광해 3년)에 접어들면서 궁중의 중요한 자리는 임금의 처가인 류씨들이 독차지하였다.류희분은 자기네 집안자제들을 과거에 급제시키려고 갖은 부정수단을 다썼다. 이때 거인 임숙영(任叔英)이 과거에 응시하였는데 그는 답안을 쓸 때 임금의 외척들의 부정부패가 너무도 눈에 거슬려서 시대를 개탄하는 글을 써서 바쳤다.시험관들은 임숙영의 글을 보고 깜짝 놀랐다.그의 글은 비할바 없이 훌륭하였지만 공개할수가 없었다.그리하여 임숙영은 문장을 잘쓰고도 전시(殿试)에서 억울하게 탈락되였다. 리항복은 두차례나 글을 써올려이번에 임숙영을 락방시킨것은 잘못된 처사이니 임숙영의 급제를 회복시켜야 한다면서 임금을 설복하였다. 그의 끈질긴 설복에 광해군은 끝내 분이 어지간히 풀려서 임숙영의 과방(科榜)을 회복하였다. 임자년(壬子年:1612년)에는 김직재(金直哉:1554-1612)의 옥사가 일어났다.김직재는  선조 18(1585)에 문과에 급제하고 뒤에 벼슬이 승문원의 박사에 이르렀다.광해군 4   (1612)년에 병조의 문서를 위조하다가 체포된 김경립의 발설에 의해 그는 아들 백합   과 함께 반역을 꾸민다는 혐의로 투옥되여 광해임금의 친국을 받았다.   의지가 굳지 못한 김직재는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하자 연릉부원군 리호민,좌랑    송상인,군수 정호선,관찰사 진릉군을 받들어 반란을 일으켜 리이첨 등의 대북파를 제   거하려 했다는 거짓 진술을 했다.이것은 대북파들이 바라마지 않던 진술이였다.이로    하여 조정에서는 일대 옥사가 일어났다.결국 김직재는 사형을 당하고 소북파의 백여   명이 무고히 처벌을 당하였다.   당대의 저명한 시인 권필(权韠:1569-1612)은 성품이 소탈하였다.  권필은 워낙 시재가 워낙 뛰여났다.서화와 시를 즐기는 선조왕은 그의 시 몇편을 보고 찬탄하면서 서안에 남겨두고 자주 깨내 읽었었다.그중의 시조 한수는 다음과 같다. 이 몸이 되올진대 무엇이 될고하니 곤륜산 상상두에 락락장송 되였다가 군산(群山)이 설만(雪满)하거든 혼자 우뚝하리라. 심성이 정직한 그는 리이첨이 벗을 삼자고 간청하는 것을 뿌리친 일로하여  간신배들의 미움을 사게 되였었다.  조정에서 동몽교관(童蒙校官)을 맡았던 그는 조정안이 어지럽자 벼슬을 버리고 강화도로 가서 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그는 조정안이 광해군의 외척과 처가인 류씨(柳氏)들이 대북파와 손잡고 끊임없는 부정부패를 쌓아간다는 말을 듣고 참을래야 참을수가 없어서 붓을 날려 궁류시(宫柳诗)를  한수 지어 조정을 신랄하게 풍자하였다.              궁류시 대궐 버들 청청하고 꽃은 바람에 흩날리는데 성안에 가득찬 사람들은 봄빛에 아첨 떠네. 모든 백성들이 태평성세라 희희락락하건만 위태로운 말 누가 해서 베옷입은 사람 쫓아냈느냐?                 宫柳诗   宫御青青花乱飞,  满城冠盖媚春辉. 朝家共贺昇平乐,  谁遣危言出布衣   권필의 궁류시가 집밖으로 나가자 조정안팎에는 큰 파문을 일으켰다. 시인 권필(權韠)은 시는 리이첨일파에 의해 인츰 광해군에게 전해졌다.그는 시어(詩語)로 인해 체포되여 모진 고문을 받게 되였다.  리항복은 당대에 둘도없는 시인이 광해군에게 참혹하게 고문당하는것을 보니 가슴이 찢어질것만 같았다.그는 국문장에 나가 광해군의 앞에 엎드려 울면서 권필시인을 한번만 용서해줄것을 간청하였다.그러나 성이 상투끝까지 오른 광해군의 귀에 리항복의 간절한 청은 마이동풍이였다.  결국 혹형을 받고 반주검이 다 된 권필은 경원부(庆源府)로 귀양을 떠나게 되였다. 그가 서울  동대문밖에 이르렀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배웅하였다.그를 배웅하는 사람들은 슬픔을 참지 못해 눈물을 흘리면서 그가 귀양갔다가 하루속히 석방되여 무사히 돌아올것을 천지신명에게 빌었다.그런데 온 몸에 가혹한 상처를 입은 그는 누가  동정하여 주는 술을 받아마시고 화기가 몸에 퍼져서 인츰 불행하게  사망하고 말았다. 당대의 최고시인 권필이 귀양가던 도중에 불행히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 리항복은 비통함을 금할수 없었다. 리항복이 이미 정인홍에게 거스름이 많아서 정인홍이 그를 중상하려 하며 그의 무리들이 소장(疏章)을 올려 그를 헐뜯는 자가 무려 수십명에 달하였다.  리항복은 조정을 떠날것을 강렬하게 요구하였다.리항복이 체찰부(體察府)를 개설함으로서 광해군 또한 그의 덕망을 존중하여 그를 믿고 위임해서 무릇 서북방에 파견할 수령들을 모두 그가 선발하여 지휘하도록 하였다. 리항복이 매양 사양하였지만 임금의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리항복이 국왕의 신임을 받자 소인무리들은 그를  해치려고 더욱 미쳐날뛰였다.정인홍이 또 사람을 사촉해서 상소하여 “체찰부의 병권이 너무 중하니 혁파해야 한다.” 고 주장하였다. 그들의 비루한 수작에 리항복은 참을래야 참을수가 없었다. 그는 아주 다급하고 절박한 말로 해면을 요청하였다.그러나 그가 사직서를 무려 20여차나 올렸지만 광해군은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그 뒤 술사(術士) 리의신(李懿信)이 광해군에게 요망한 상소문을 올렸다.그는 조선이 임진왜란과 여러차례의 역변(逆变)이 일어나고 또 당파싸움이 그칠줄을 모르는 것은 서울 한양의 지기(地气)가 쇠퇴한 탓이라고 말하고나서 조선국을 부흥시키려면 현재의 서울 한양을 버리고 지기가 강한 교하(交河)라는 곳으로 천도해야 한다고 꼬드기였다.  여러차례 란을 겪고 또 붕당싸움에 지칠대로 지친  광해군은 술사의 꼬임에 마음이 움직였다.그는 술사 리의신에게 감사를 표하고나서 수도를 교하로 옮기려는 생각에서 조회를 열고 대신들의 의견을 물었다.  리항복은 리의신이 제기한 론점을 조목조목 비판하였고 리정구도 선참으로 반대해나섰다.그들은  광해군이 다시는 술사의 요망한 꼬임에 빠져 무분별한 짓을 하여 나라를 망치지 않도록 방비하였다.   
132    절세기인 정치가 리항복50) 이름 한자 차이 댓글:  조회:2078  추천:0  2015-12-26
  50.이름 한자 차이 그해 4월에 리항복은 좌의정 겸 도체찰사에 임명되여 총호사(摠護使)가 되였다.선조왕의 릉인 목릉(穆陵)의 일을 마치고 나자 또 3사가 일어나서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림해군을 처벌할것을 주청하였다. 리항복은 지난날의 주장을 꺾지 않고 림해군에 대한 처벌을 견결히 반대하였다.그러자 정인홍이 글을 써올려 동기간에 화목하게 지낼것을 주장한 사람들을 거세게 공격하였다.  리항복이 두차례나  계를 올려 사직을 청했으나 광해군은 리항복의 위망과 능력을 고려하여 그의 사직을 윤허하지 않았다. 조정의 요직을 틀어진 리이첨 일당은 미친개같이 생사람을 물어뜯으며 날뛰였고 탐오와 략탈을 기탄없이 진행하였다. 양주 농촌의 한 농민은 추석을 맞아 나무를 해서 판 돈을 가지고 서울로 올라와서 제사상에 올릴 고기와 어린 딸애에게 줄 꽃신과 옷감을 샀다. 그는 장을 보고 나오다가 거리에서 술에 취한 부랑자에게 걸려들었다.  한참 언쟁을 하던 부랑자는 그 농민을 역적이라고 조정에 밀고하여 억울하게 붙잡혔다.역적이란 죄인중에 가장 큰 죄인이므로 관청에서는 그 농민을 사형수를 가두는 의금부에 가두었다.또 조정안에서 인산자리문제를 두고 큰 풍파가 일것을 우려하였다. 그는 즉시 임금에게 계를 올려 기자헌의 망령된 주장을 박박함으로써 마침내 처음에 잡았던 릉자리를 그대로 쓰게 되였다.   49.정경세를 지켜 선조왕은 왕위를 계승할 적사(適嗣:왕비의 몸에서 태여난 왕자)가 없어서 세자를 정하지 못하고 여러해를 끌다가 임진란이 발발하던 선조 25년(1592년)에 부득불 후궁인 공빈 김씨의 소생인 광해군(光海君:1575-1641)을 세자로 정하였다.선조왕이 십여년동안 세자를 지켜보니 세자가 총명하기로는 어느 왕자보다 못지 않았지만 고집이 너무 세고 실덕이 많았다.선조 39년에 인목왕비가 영창대군을 낳게 되자 광해군은 왕위를 계승할 가망이 없게 되였다. 영창대군을 낳은 뒤 선조왕은 지병으로 오래동안 병상에 누워있었는데 생명이 매우 위중하였다.이때가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대북파의 정인홍, 리이첨 등 무리들은 광해군의 비위를 맞추면서 요언을 퍼뜨리고 원로대신들을 무함하면서 반대파 제거에 박차를 가하였다. 선조왕은 조정을 롱락하여 인심을 황황하게 만든 리이첨의 직무를 해제하고 그에게 류배형을 내렸다. 그리고 대북파의 꼬임에 빠져 원로대신들을 박해한 광해군을 세자위에서 페하려고 마음먹었다.선조왕이 광해군을 세자위에서 페출시킨다는 교지를 내리기 바로 전날인 선조 41년 2월에 선조왕은 동궁이 올려보낸 약식을 먹고나서 급사하였다. 선조왕이 새로운 세자의 이름을 발표하기 바로 전날에 갑작스레 승하(昇遐)하자 위기에 직면했던 광해군은 천행으로 세자위에서 몰려나지 않고 순리롭게 조선조 제 15대 왕으로 등극하였다.  리이첨은 류배형이 집행되기 직전에 선조왕이 승하한 덕분에 새 임금의 령에 의해 류배령이 취소되였다. 광해군은 왕위에 오른 뒤 자기의 통치기반을 굳히기 위해 평소에 그를 부추겨 당파싸움을 일삼던 리이첨, 정인홍 등 간신들을 조정의 요직에 올려놓았다. 광해군은 자신이 왕위를 지키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자기의 이복형제들인 대군들이라 생각하고 그들을 하나둘 숙청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첫 숙청대상은 이복형인 림해군(临海君)이였다. 림해군은 광해군과 마찬가지로 왕비소생이 아닌데다    역적이란 말만 들어도 치를 떠는 광해군은 이번 사건을 대단히 중대한 모반사건으로 여기고 의금부에 나와서 친히 국문을 시작했다. “네놈은 어이하여 불괴죄를 지었느냐?” 광해군이 눈을 부릅뜨고 천둥같이 호통치자 무식한 농민은 그 말뜻을 알지 못해 되물었다. “상감마마, 불괴죄란 무엇이나이까?” “네놈이 왜 역모를 꾸몄는가고 묻는다.” “역모라니요?”낫놓고 기윽자도 모르는 농민은 너무도 기가차서 되물었다. 그러자 광해군은 역정을 내면서 호통을 쳤다. “이놈아, 너는 왜 상감이 되려는 못된 맘을 먹었느냐 말이다.” 임금의 질문에 농민은 너무도 억울해서 울음을 터뜨리면서 하소했다. “아이고 원통해라.날마다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팔아서 겨우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는 소인이 나라님이 되려고 했다구요? 당치도 않은 말씀이예요.흑흑…” “바로 대지 못할가? 네놈이 서울와서 무엇무엇 산돈은 어디서 났느냐? 이실직고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생각 아예 말어라.형리들은 뭘하느냐? 어서 저놈을 되게 치지 않고?” 임금의 명을 받은 형리들은 곤장을 휘둘러 농민을 사정없이 내려쳤다.농민의 정갱이에선 선지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아이고 아파라.무식하고 못난 놈이 역적이라니 어디 될 말씀이나이까? 제발 더 때리지 마옵소서.아이고 억울해라,아이고.” 농민이 너무도 억울하여 섧게 울며 발명했지만 형리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농민을 반주검이 되도록 때려 인사불성이 되자 다시 옥안으로 끌어갔다. 계축옥사때 광해군은 저의 부친인 선조대왕의 장인인 김제남과 영창대군을 동정하던 사람들을 모조리 역적으로 잡아 처단하려고 날뛰였다. 그는 리이첨 등 간신들의 말을 듣고 무릇 밀고만 들어오면 국청을 열고 혐의자를 잡아서 살점이 뚝뚝 떨어지게 주리를 틀고 곤장을 휘둘렀다. 그리하여 모진 매에 견디지 못한 자들은 매를 조금이라도 덜맞으려고 아무나 마구 물어먹었다.  어느날 옥에 갇혀 모진 형벌을 당하다 견디지 못한 사람이 자산(兹山)에 사는 리춘복이란 사람이 역모를 꾸몄다고 물어뜯었다.금부도사일행이 자산 내려가서 종적을 살펴보니 고을 경내에 리춘복이란 사람은 없고 리원복,리순복,리창복이란 사람들만 살고있었다.금부도사는 그들의 이름자가 리춘복이와 한자씩 틀리니 선뜻 잡아오지 못하고 그곳에 머물면서 조정에 장계를 올려 그들을 잡아오라는지 말라는지 하는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일을 가지고 조정에서는 어전회의가 열렸다.혹시 역적의 이름을 고발할때 이름 한자가 틀렸을수도 있으니 이름이 비슷한 사람은 다 잡아와야 한다는 주장이 절대 우세였다.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이름이 한자 다른 사람은  잡아다 문초를 하자는데로 중론이 모아졌다. 리항복은 자기들 몇사람이 반대해나섰다가는 역적을 도왔다는 죄명만 떺어쓸 판이였다.그렇다고 어전회의에 참석해서 백성들이 억울하게 횡액을 당하는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수는 없었다. 리항복은 천천히 일어서서 사모를 벗고 공석을 들고  룡상앞에 가서 임금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장면을 본 대신들은 오성대감이 갑자기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지 알수가 없어서 두눈이 화등잔같이 되였다.광해임금도 어인 영문인지 몰라 리항복을 보고  급히 물었다. “오성대감이 갑자기 대죄라니 무슨 일이오?  어서 일어나서 좌석에 가 앉으시오.” 그러자 백사가 머리를 쪼아리면서 아뢰였다. “전하, 황공하오이다. 역적을 잡는데 이름이 한자 틀리기는 이 리항복이도 마찬가지옵니다.그들을 다 잡아와서 문초하시려면 신도 그들과 함께 문초를 받아야 마땅한줄 아옵니다.” 임금이 오성대감의 말을 듣고보니 그의 말에 한점의 그릇됨도 없었다. 세상에 동성동명인 사람도  수두룩한데 이름이 한글자만 다른 사람이야 얼마나 많겠는가? 신하들의 경망한 말에 넘어가 경솔하게 일을 처리할뻔했던 광해군은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고 빙긋이 웃으면서 말하였다. “과인이 자칫하면 큰 일을 저지를뻔 했군.과인이 그 사람들을 잡아오지 말라고 명하겠으니 오성은 안심하고 올라오시오.” 리항복의 이 한 유머에 어전회의는 순리롭게 끝났고 억울하게 문초를 당할뻔한 강계의 농민들은 역적의  혐의를 벗게 되였다. 리항복은 국청을 나오면서 탄식을 하고 말하였다. “내 일찍 소나무껍질을 찧어 떡을 만든다는 말은 들었는데 이제 보니 사람을 찧어 역적도 만드는구나.참 한심한 세월이구나.”  
131    절세기인 정치가 리항복 49) 정경세를 자켜 댓글:  조회:1620  추천:0  2015-12-26
49) 정경세를 지켜   림해군은 성질이 사납고 포악하여 부왕의 신임을 받지 못하여 광해군에게 세자위를 빼앗긴 왕자였다. 림해군도 광해군과 같은 후궁소생이지만 필경은 선조왕의 장자인데다가 나이가 가장 많고 대궐과 가까운데서 살면서 집에다 무뢰한 병졸들을 많이 모아두고 있었다. 광해군은 이복형인 림해군이 어느날 변란을 일으킬지 몰라 은근히 신경을 쓰고있었다. 그는 즉위한 뒤 정예한 군사를 모아 대궐을 빈틈없이 지키게 하고 궁궐의 대문을 대낮에도 열지 못하게 한지가 한달이나 되였다. 어느날 한 언관이 리항복을 찾아와서 림해군의 일을 의논하였다.그러자 리항복이 말하였다. “림해군께서 아직까지 상중에 계시는 몸이고 또 그분이 아직 반란을 일으킬 아무런 징조도 없는데 우리가 어이 무턱대고 그분을 처벌한단 말이오?” 리항복의 설명을 듣고난 그 언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갔다. 그런데 몇달이 지났을 때  3사가 림해군이 모반을 했다고 밀고를 하는바람에 림해군은 대궐근처에 쫓겨나 교동(乔洞)에 거처를 잡고 떠돌아다니며 살게 되였다. 리항복은 사태의 발전을 면밀히 주시하면서 혹시 다른 일이 벌어질것을 념려하여 새임금에게 글을 써올려 임금께서 동기간에 화목하게 지내는 본보기로 되셔야 조정과 나라가 편안해진다는 도리를 극력으로 천술하였다. 령의정 리원익과 대사헌 정구(郑逑)도 리항복과 의견을 같이하였다.그러자 림해군을 밀고했던 자들이  역적을 비호한다고 떠들어대며 사단을 일으켜서 조정의 적잖은 대신들이 화를 입게 되였다.                                    선조왕의 인산(因山)의 자리를 이미 정한 뒤에는 기자헌(奇自献)이 그 자리에 대해 좌도(左道)를 끼고 이의를 산동하였다.리항복은 기자헌의 행동을 방임해두면 선조왕의 장례식을 언제까지 끌어갈지 몰라 경제적 손실이 가중될 뿐만아니라  며칠뒤 창원부사 정경세(郑经世)가 조정에 상소문을 올려왔다.그는 조정에서 국왕의 인척이 정권을 잡는것은 력대로 내려오던 왕궁의 법도를 어기는 일로서 왕권을 약화시키는 잘못이니 즉시 고쳐야 한다는 내용이였다.이것은 두말할것없이 나라에 충성하는 관원의 진정이였다. 광해군은 왕위에 오른 뒤 자신의 통치기반을 튼튼히 다지기 위해 왕족들을 배척하고 자기의 인척들을 대거 등용하였던것이였다.정경세의 상소문은 광해군의 급소를 찔렀다.광해군은 대노하여 벼슬이 보잘것없는 외직의 관리가 간이 배밖에 나와서 감히  임금의 조상을 비방하면서 조정의 대사를 간섭한다고 호통을 쳤다.분통이 터진 광해군은 정경세를 잡아 옥에 가두려고 하였다. 리항복은 정경세가 올바른 상소문을 올렸는데도 국왕이 채납하지 않고 도리여 그에게 죄를 씌우는것을 그냥 보고둘수가  없었다. 그는 즉시 임금에게 상소문을 써서  올렸다.그는 신하들이 나라를 사랑하는 충심에서 임금에게 상소문을 올렸다가 도리여 죄를 덮어쓰고 하옥하게 되다면 앞으로 어느 누가 감히 임금에게 상소문을 올리겠는가고 하는 내용의 계(啓)를 두차례나 써올려 임금이 정경세에 대한 처사가 극히 부당함을 지적하였다. 광해군이 리항복의 상소문을 읽고 곰곰히 생각해보니 자신의 경솔한 처사가 신하들의 신임을 잃게 될수  있다는것을  깨닫게 되였다.그는 세자때의 스승인 리항복대감의 정당한 의견을 무시할수 없었다.광해군은 리항복의 주청에 따라 정경세에게 형벌은 내리지 않았으나 임금의 체통을 지키느라 정경세의 관직만은 삭탈하고말았다. 
130    절세기인 정치가 리항복48) 난생 처음으로 해본 자기자랑 댓글:  조회:1759  추천:0  2015-12-25
  48. 난생 처음으로 해본 자기 자랑 어느날 리항복과 리덕형은 오래만에 조용히 한자리에 앉았다. “우리 나이도 이만하면 관직에서 물러날 때가 되지 않았나? 이젠 후임자를 찾고 후진에게 세상일을 부탁하는게 어떤가?” “나도 그런 생각일세.”친구의 제의에 한음도 쾌히 동의했다. 여러날이 지난 어느날,한음이 리항복을 만나자 말을 꺼냈다. “전날 한 약속을 잊지 않았지? 나는 성공했네.자네 래일 우리집에 놀러 오게.나의 후임을 자네한테 소개해주겠네.” “그렇게 하세.” 약속한 날, 리항복이 한음의 댁을 찾아가자 리덕형은 하인을 시켜서 리이첨(李尔瞻)을 데려오라고 분부하고나서 말하였다. “리이첨은 재주가 있고 글을 잘해 아무해에 소년급제를 하고 지금은 옥당에서 벼슬하고 있는데 세상사람들의 평판이 대단하다네.” 이윽고 리이첨이 사랑에 들어와서 두사람에게 인사를 하였다. 리항복은 아무런 말도 없이 방우에 가만히 앉아서 두사람이 웃고 이야기하는것을  지켜보았다.이윽고 리항복이 일어서면서 주인을 보고 말하였다. “오늘 나는 사정이 있어서 급히 돌아가야겠네. 우리집에 평양친구가 보내온 강홍로가 있으니 안주를 장만하겠네.자네 래일 잊지 말고 우리집에 놀러오게나.” 리항복은 리이첨과는 아무런 작별인사 한마디도 하지 않고 사랑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리덕형은 백사 리항복이 리이첨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것을 직감하였다.그러나 손님앞에 내색할수가 없어서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마고 대답하고 그를 대문밖까지 배웅하고 들어왔다. “오성대감께서 왜 저리 총망히 떠나십니까?” 리이첨의 묻는 말에 한음이 급히 얼버무렸다. “아마 급히 만나볼 사람이 있어서 그러시는 모양이네.” 이튿날 한음이 백사댁을 찾아갔더니 백사가 대뜸 말하였다. “대감이 어이 사람을 그렇게 몰라보는가? 나는 어제 어디서 개가 한마리 집에  뛰여들어왔나 했네.리이첨이란 자는 딱 여우나 닭의 상이더군. 그 사람의 얼굴엔 오직 살기와 독기뿐이더군.자네 각별히 조심하게.그자는 앞날에 우리나라를 망칠 장본인일세.이따가 내 문하의 사람들이 오면 한번 잘 보게.” 이윽고 김류,리시백,최명길,정충신,장유,구굉,구인후,신경진, 등 후진들이 들어와서 두사람에게 인사를 올렸다. 인사치레를 방금 마쳤을 때 당대의 명사이자 관상가인 장명복이 백사댁에 놀러오다가 사랑방안에 앉아있는 손님들을 얼핏 돌아보고나서 깜짝 놀라 발걸음을 멈추었다. “장공,참 오래만이네. 어서 사랑으로 들어오시오.” 백사가 일어서며 손님을 반겨맞는데 장명복은 급히 손을 저으면서 사양하였다. “나는 평소에 두 대감만 봐도 기가 절리는데 오늘은 방안에 장래의 일품 재상 서너분에 대제학,령의정에 일등 훈신이 되실 어른들이 가득하니 어이 자리를 함께 하겠습니까? 정말 황송하오이다. 어찌 감히 뜰엔들 머무르리오. 소인은 물러가나이다.안녕히 계십시오.” 장명복이 부랴부랴 뜰을 나가자 리항복이 빙그레 웃으면서 한음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제 장공이 한 말을 잘 들었겠지?이래야 그래도 큰소리를 칠수가 있지.장래에 리이첨이 망친 나라를 바로잡을 영웅들은 바로 이 사람들일세.” 리항복은 난생 처음 친구한테 자기자랑을 하였다.       49.정경세를 지켜 선조왕은 왕위를 계승할 적사(適嗣:왕비의 몸에서 태여난 왕자)가 없어서 세자
129    절세기인 정치가 리항복47) 가장 적절한 비유 댓글:  조회:1895  추천:0  2015-12-25
47.가장 적절한 비유 리항복이 진심으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보좌를 내놓으려 한다는것을 안 몇몇 반대파들은 이때가 리항복을 조정의 요직에서 몰아낼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선조왕을 설복하려 하였다. “전하,오성대감의 사직서를 받으십시오.예로부터 평안감사도 제 하기 싫으면 그만 둔다지 않습니까? 오성이 정승을 맡지 않아도 정승질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경들이 무엇을 안다고 큰소리를 치는가? 경들이 오성의 뒤발꿈치만 따라갈만 해도 나는 벌써 결단을 내렸겠네.” 선조왕은 리항복이 정승직을 내놓는것이 안타까워서 하루하루 뻗치였다. 리항복은 무려 여덟번이나 사직서를 올려서야  선조왕은 그의 뜻을 꺾을수 없다는것을 깨닫고 그의 사직을 허락하였다. 병오(1606)년에는 대마도의 도주 의지(義智)가 사절을 보내여 강화할것을 요청하였다.전쟁을 발동했던 동쪽 오랑캐들이 조선과 강화를 맺으려면 성의와 믿음을 보여야 했다. 이때 령의정에 오른 류영경(柳永庆)이 임금에게 건의하여 임진년에 조선 임금의 릉을 파헤치고 보물을 훔쳐간 도적놈들을 다 잡아 조선에 보내면 대마도와 강화를 하겠다는 국서를 대마도 사절에게 보내였다.   한달이 지난 어느날, 의지는 소위 조선임금의 릉을 도굴했다는 죄수 두놈을 잡아서 조선에 보내왔다. 도대체 어떤 놈이길래 간이 배밖에 나와서 그런 만인공노할 죄를 지었나?리항복은 도적놈이 어떻게 생긴 놈인가 하고 죄수들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조선임금의 릉을 도굴한 도적놈들은  나이가 스무살이 되나마나한 새파란 젊은이들이였다.이자들은 임진란이 일어나던 당시에 나이가 칠팔세밖에 되지 않겠는데 어이 이런 애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임금의 릉을 도굴한 도적이라는것인가?참으로 손바닥으로 낯을 가리고 아웅하는 수작이였다. 리항복은 즉시 두죄수 형틀에 묶어놓고 문초를 했다. 리항복이 문초를 시작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죄수들은 지은 죄를 낱낱이 불어내였다. 알고보니 그놈들은 근년에 본국에서 살인죄를 저질러 사형판결을 받은 사형수들이였다.   대마도 도주가 조선과 진정으로 강화할 성의가 없을뿐만 아니라 조선임금의 릉을 도굴한 도적놈까지 비호하고 있다는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였다.그런데도 령의정 류영경은 대마도주와 강화를 맺으면 자기의 공로를 크게 부풀릴수 있다고 생각하고 종묘에 첩보를 올린 동시에 그들을 사면하려고 시도하였다. 리항복이 조선의 국왕을 릉멸한 그놈들을 조선땅에서 죽여 왜놈 사절에게 조선국의 엄정한 태도를 보일것을 청했으나 조정의 많은 대신들은 진상을 밝히면 류영경에게 해가 미칠까봐 령의정의 주장을 따르고말았다. 어느날 김계(金稽)라는 신하가 조정에 상소를 올려 선조왕의 생부인 덕흥대원군(德兴大院君) 리초를 왕으로 추존하기를 청하였다.리초는 선조왕이 즉위한 2년후인 1569년에 대원군으로 추존되였을 뿐 대원군의 역할도 해본적이 없었다. 이것은 류영경이 선조왕의 환심을 사서 장기적으로 정승직에 남아있으려고 수하를 시켜 간계를 부린것이였다. 선조왕은 마음속으로 자신의 생부를 왕으로 추존하여 부모에게 효도하는 임금이라는 명예를 얻고싶던터인지라 생부의 추존을 반대할 리가 없었다.그러나 선조왕은 원칙을 지키는 대신들의 반발이 두려워서 감히 독단하지 못하고 형식상의 조회를 열었다.그는 조회에서 김계가 올린 상소문을 읽게 한 뒤 신하들을 돌아보면서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는가고 물었다. 임금에게 빌붙어서  높은 벼슬자리를 얻으려는 야심을 품은 무리들은 일제히 훌륭한 상소문이라느니, 진작 덕흥대원군을 왕으로 추존했어야 한다느니 하며 서로 앞다투어 덕흥대원군의 추존을 합리화시키려고 덤비였다. 성품이 대쪽같은 리항복은 임금에게 아부하기 위해 도리에 당치 않은 일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간신들의 무분별한 행위를 도저히 용납할수가 없었다.그는 성을 내지 않고 조용히 력사사실을 들어가면서 여러사람들을 경계하였다. “이런 일을 웃대에서 강행한 사람들로는 한나라의 애제(哀帝),안제(安帝),환제(桓帝),령제(灵帝) 등입니다. 아래대에 와서 이런 일이  옳은 일이 아니라고 주장한 사람들로는 송나라의 주자(周子),장자(张子),정자(程子),주자(朱子)였습니다.” 리항복은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고 직접 자신의 태도를 표명하면 많은 신하들과 목에 피대를 세우며 싸워도 결판이 잘 나오지 않는다는것을 짐작하고있었다.그리하여 그는 정면충돌을 피하고 에도는 방법을 모색하였다.그는 력사상에서 공인하는 혼군과 성인들이 이런 부당한 일을 어떻게 대하고 처리했는가 하는 실례를 일일이 라렬하면서 신하들이 리지를 잃지 밀고 력사의 죄인이 되지 않도록 인도하였다 리항복의 말을  듣고   큰 계시를 받은 많은 신하들은 무조건 임금의 눈치만 살피면서 세력에 아부했다가는 력사의 심판을 면치 못하게 된다는것을 깨닫고 자책감에 얼굴을 붉히였다. 그리하여 덕흥대원군을 왕으로 추존하려는 토론은 중지되고말았다.
     46.말한 “리항복”과 말하지 않은 “리덕형”     갑진년(甲辰年:1604년) 원단에 흰 무지개가 해를 관통한 소위 백홍관일(白虹貫日)이란 소위 변이 있었다.기실 이것은 일종의 자연현상이라 그 무슨 변이라고 말할수 없었지만 당시의 몽매한 사람들은 나라에 큰 재앙이 닥쳐올 징조라 생각하고 두려워서 벌벌 떨었다.나라의 수뇌부인 조정안도 뒤숭숭하기는 백성들과  마찬가지였다.신하들이나 임금도 이 일을 감히 입에 담지는 못했지만 속으로는 임금이 나라를 잘다스리지 못해서 생긴 변이라고 생각하고있었다.     며칠 뒤 선조왕은 일종의 압박감에 못이겨 리항복을 어전으로 불렀다.그는 리항복의 도움을 받아 당면한 곤궁에서 벗어나려고 하였다.    “이번에 일어난 변때문에 민심이 무척 소란스러운데 리공은 무슨 좋은 대책을 생각해보았소? 관원들이 맘속으로 과인이 정사를 잘못 다스려서 생긴 변이라 생각하는것 같소. 리공의 생각에 과인이 정사를 처리하는데 잘못된것이 무엇인지 잘 생각해서 계를 써올리시오.”    리항복은 일개 자연현상이 임금의 정치와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고 생각했지만 오늘 임금의 청을 받고나니 이 때가 바로 임금에게 잘못을 지적해줄 가장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는 선후로 두번이나 계를 써올려 임금의 그릇된 처사를 치르는 요해점을 찔렀다.  “…성심을 전하는것은 간언을 받아들이는데로부터 시작해야 하고 공평을 기하는것은 마땅히 인재를 등용하는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이 말은 선조왕이 평소에 신하들의 간언을 잘 받아들이지 않고 무단으로 국사를 처리하기때문에 신하들이 간언을 잘 제출하지 못하는 페단이 생겼다는것을 지적하였고 임금이  인재를 등용하는데 있어서 공정성을 한쪽에 밀어놓고 붕당싸움을 무마하기위해  심혈을 기울인 그릇된 태도를 비판한 것이였다. 그의 계를 읽어본 신하들은 오성대감의 글이 면바로 임금의 요해처를 찔렀다고 탄복하였다. 그 뒤 조정에서는 호종공신(扈从功臣)을 책록(策禄)하였다. 리항복은 당연히 호종 원훈(元勋)으로 추천을 받았다.조정에서는 선조왕의 제의에 의해   리항복에게 충근정량갈성효절협책호성공신(忠勤贞亮竭诚效节协策扈圣功臣)의 호(号)가 내려졌다. 선조 36년 6월의 어느 날,참판 류희서(柳熙绪)와 부사 황극중이 아무런 까닭없이 살해당한 중대한 안건이 발생하였다. 일국의 대신이 집에서 강도에게 무단히 살해당했다는 소식은 청천벽력과 같았다.소식을 듣고 분노한 선조왕은 즉시 안건의 수사를 잘하기로 소문난 포도대장 변량걸(边良杰)을 불러 빠른 시일내에 안건을 풀어내여 살인범을 잡아내라고 엄명을 내렸다. .변양걸이  여러방면으로 조사를 세심히 하고 범죄혐의자들을 잡아 엄히 문초한 결과 범죄자의 륜곽이 들어났는데 뜻밖에도 범인은 선조왕의 맏아들인 림해군이였다. 성질이 포악하고 방탕하여 임금과 대신들의 신임을 잃어 세자의 보좌도 이복동생인 광해군에게 빼앗긴 림해군은 우연히 참판 류희서의 첩이 천하일색이란 소문을 들었다.녀색이라 하면 오금을 못쓰는 림해군은 갖은 수단을 써서 류희서의 첩을 낚아채였다. 그는 류희서가 실종된 첩을 찾으면 자기가 저지른 죄행이 드러날것 같아 속을 앓다가 수하 망나니를 시켜 류희서와 부사 황극중을 암살했던것이였다.사건의 엄중성을 깊이 느낀 변량걸은 조사과정을 상세히 적어서 선조왕에게 보고한 뒤 조정의 처분을 기다렸다. 왕자가 죄를 지어도 서민과 같이 처리한다는것은 조선국이 세워진 이래 지켜오던 신성한 국법이건만 선조왕은 변량걸이 왕자의 죄를 감싸주지 않고 조정에 사실 그대로 보고한데 대해 크게 분노했다.게다가 류희서의 아들이 조정에 죄수를 당장 잡아 처리하라고 압격을 가하자  선조왕은 당황하였다.급기야 그는 변량걸이 류희서의 아들 류일과 공모하여 왕자인 림해군을 무함했다는 죄명을 들씌워 두사람에게 곤장을 되게 안긴 뒤 먼 곳으로 류배시켰다. 선조왕은 두사람을 류배시키고나면 림해군의 일이 마무리될 줄 알았는데 사태는 더욱 나쁘게 번져졌다.림해군이 저지른 죄의 진상은 감출래야 감출수가 없었다. 조정 안팎이 선조왕의 처사에 대해 불만을 품고있었지만 임금의 위세에 눌리워서 감히 바른 의견을 제출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모든 신하들이 다 입을 다문것은 아니였다. 령의정 리덕형이 선불을 질렀던 것이다. 그는 암살사건을 파헤치고 두려움없이 바른 말을 한 변량걸과 피해자의 아들인 류일을 류배시키는 것은 법이 허락할수 없는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라고 하면서 임금께서 이 일을 국법에 따라 공정하게 처리하라는 상소문을 써올렸던것이였다.림해군에게 살해당한 류희서가 바로 리덕형의 외삼촌의 아들이였고 류일은 그의 외조카인데 그들이 바른 말을 했다고  억울하게 죄인으로 몰렸으니 리덕형은 참을래야 참을수가  없었던것이였다. 리덕형은 지인들과 친구들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임금에게 상소문을 써서 임금의 처사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변량걸과 류일을 무죄석방할것을 강경하게  요구하였다.그러나 그의 상소가 성공하지 못할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였다. 이튿날 조회에서 선조왕은 노기가 상투끝까지 올라 리덕형을 앞에 불러낸 뒤 마구 딲아세웠다. “리덕형은 령의정이란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포도대장 변량걸에게 죄를 따져 림해군의 루명을 벗겨주고 조정의 수치를 씻자고 나서지 않고 도리여 죄인들의 립장에 서서 상소문을 써올렸으니 그 속셈이 무엇인가?” “신은 안건의 진상을 밝혀 억울한 일이 없게 하려했을 뿐입니다.전하.” 리덕형의 대답에 선조왕의 노기는 극도에 이르렀다.리지를 잃은 그는 즉석에서 리덕형의 령의정 직무를 해임한다고 선포했다. 조회에 참가한 좌의정 리항복은 절친한 친구가 억울하게 관직에서 밀려난것을 보니 분기를 참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당시의 분위기에서 그가 리덕형의 억울함을 말해야 임금이 들어줄리 없다는것을 알고 치솟는 분을 간신히 누르고있었다. 평소에 리항복이 역적을 도왔다는 죄를 씌우지 못해 발을 동동구르던 일부 관원들은 이 기회에 리항복을 탄핵하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나의 동접(同接:한 스승한테서 배운 사람)은 급제를 했는데 나는 어느때 급제를 하려나.”리항복은 집으로 돌아오면서 동행하는 관원들과 우스개소리를 해서 사람들이 밸을 끊게 했다.당시 국법에 관직을 삭탈당한 사람은 그가 비록 대신이라 할지라도 과거에 급제만 하고 관직을 얻지 못한 선비와 마찬가지로 급제라고 자칭하라는 규정이 있었던것이였다. 다음날 선조왕은 리항복더러 리덕형을 대신해 령의정에 오를것을 요구하였다.절친한 친구가 바른 말을 한 죄아닌 ‘죄”로 밀려난 그 자리에 자기가 오른다는것은 도의상으로 도저히 용납할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 리항복은 령의정에 오르는것을 견결히 사양하였다. 그러나 리항복을 너무나 신임하는 선조왕은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리항복은 부득이한 처지에 자기가 령의정을 맡을 수 없는 리유를 까밝혔다. “전하,변량걸이 좌천된 일에 대해서는 신의 마음도 리덕형과 마찬가지로 아프옵니다. 신도 다만 당시에 미처 전하께 말씀을 드리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러기에 리덕형은 곧 이미 전하께 말씀을 드린 리항복이옵고 신은 전하께 미처 말씀을 올리지 못한 리덕형일 뿐입니다.신의 죄는 비록 드러나지 않았지만  심정이야 어이 숨길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선조왕은 리항복의 그말은 들었는지 말았는지 가타부타 말이 없더니 급기야 그더러 령의정을 맡으라는 명을 내렸다. 왕명을 거역할수 없어서  령의정에 오른 리항복은 며칠이 지나자 건강이 좋지 않아서 령의정의 중책을 맡을수 없다는 핑게를 대고 사직서를 올렸다.그러나 선조왕은 그의 사직서를 깔아뭉개고 윤허하지 않았다. 죄없는 리덕형이 물러난 자리에 올라앉은것을 죄를 짓고 량심을 파는 일같이 생각한 리항복은 련거퍼 사직서를 올렸다.
127    절세기인 정치가 리항복 45) 부래산 댓글:  조회:1695  추천:1  2015-12-25
45.부래산 집으로 돌아온 리항복은 호(号)를 백사(白沙)라고 하였는데 주위의 사람들은 그를 칠운도사(弻云道士) 또는 동강(东冈)이라고 불렀다. 리항복은 오래만에 한가로움을 맞자 집안에 있으면서 찾아오는 손님들을 사절하고 오래동안 읽지 못했던 경전을 읽었다.그는 타고난 성품이 산수를 남달리   좋아하여 젊은 시절에 중흥동(重兴洞) 골짜기에 가서 많이 노닐었었다. 좋은 날씨를    만나면 한두 자식을 데리고 필마로 중흥동 골짜기를 찾아가서 노닐며 시를   읊조리다가 밤을 지새우고 올때가 많았다.            산영루 비 개인후에 백운봉(白云峰)*이 새로워라 도화(桃花) 뜬 맑은 물이 곬곬이 솟아난다 아희야 무릉*이 어디메오 나는 옌가 하노라.   *백운봉: 북한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무릉:도연명의 산문에 나오는 리상촌      하루는 그가  강가에 있는 루각에 올랐더니 해맑던 하늘이 갑자기 흐려지며 비가    내렸다.시흥이 도도해진 그는 시 한수를 지어 읊었다.            강가 루각에서 비구경하다       구름사이 해살이 푸른 잡초에 떨어지니       구름밖 령주봉이 한점되여 외롭구나.       먼 봉우리에서 오는 바람소리 들리고   몽롱한  비를 몰고 평평한 늪을 지나가네.             江阁观雨 云间日脚漏靑蕪  云外灵珠一点孤   风自远峯來有响   朦朦吹雨过平湖                         비 내릴때 읊노라      소나기 산을 울려 나그네 잠 깨우고         문지방 앞 병풍이 갑자기 푸르르다.     참새가 밤을 다투어 섬돌 앞에 흩어지고     거미는 벌을 잡으려고 그물을 늘이누나.       뛰어난 암시를 얻어 사물의 리치 생각하니       어리석고 약은 꾀로 기회를 저울질 말아 .       스스로 나의 생이 긴 줄로 알았으나          멎고 그치기 사람아닌데 하늘에 물을소냐.    雨中偶吟    急雨鳴山搅客眠, 槛前屛壁忽蒼然。   雀因斗粟翻阶散, 蛛为遮蜂結網悬   等把胜输推物理, 不將癡黠较机权。   年来自断吾生久, 行止非人況问天   선조왕은 리항복을 남달리 사랑하였기때문에 그가 관직을 내놓았어도 정승의 대우를 그대로 해주었다. 어느날 그는 마음속의 번뇌를 씻어버리려고 명산대천을 구경하러 서울을 떠났다.리시백과 정충신 등 무신들이 그와 동행했다. 나귀를 타고 길을 나선 그가 강원도 땅에 이르러 옛친구들을 만나보고 금강산에 올랐다.신선이 오르내린다는 금강산의 아름다운 경치는 그를 가만 두지 않았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헤여진 그는 소리내여 시조 한수를 읊었다. 일호주(一壶酒)로 송군봉래산(送君缝莱山)하니 봉래산이 소상영(笑相迎)이라 소상영 여군가일곡笑相迎予君歌一曲)하니 만이천봉 옥층층(玉层层)이로다 아마도 해동(海东) 풍경이 이뿐인가 하노라. 금강산을 내려와 배를 타고 소양강의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고있는데 배에 동승했던 시골의 유생들이 낯선 백발로옹을 힐끔힐끔 돌아보더니 옆에서 손가락질 하며 무엇이라 소근거리는것이였다. (아마 저 유생들이 낯선 사람에게 터세를 받으려고 수작하는 모양이구나.) 백사가 그들이 소근거리는 말을 대충 듣고도 모르는척 빙그레 웃으며 두 측근에게 자기의 신분을 드러내지 못하게 눈짓하였다. 이윽고 한 젊은 유생이 말을 걸어왔다. “여보게 늙은이, 수염이 한자나 자란 늙은이가 이곳에는 무얼 하러 왔소?” “선비님의 눈치가 이만저만이 아니구려.이 늙은이는 외지서 벼슬살이를 하던 사람인데 이젠 늙어서 벼슬도 싫증이 나서 팔도강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산수를 구경하다가 살기 좋은 곳을 만나면 그곳에 락향할 타산이오.” “그럼 우리 춘천에 와서 사시구려.이곳은 옥토가 많고 또 경치좋고 물이 맑기로 소문났는데 그보다도 외방사람이 여기에 이사오면 단박 부자가 된다오.” “세상에 그런 곳도 있소? 대체 그건 무슨 까닭이오?” 백사가 깜짝 놀라는 시늉을 하며 연유를 묻자 유생들은 늙은이가 저희들의 꼬임수에 걸려드는줄 알고 히물히물 웃으며 딴전을 부렸다. “이건 비밀이라 아무한테나 루설하면 안되는데…” “비밀은 무슨 말라 비틀어진 비밀이요? 말하기 싫으면 그만 두시오.” 백사가 짐짓 앵돌아진듯 정색을 하자 한 유생이 입을 열었다. “이 고장에 한가지 전설이 있다네.저기 저 앞이 예전에는 평지였는데 하루밤사이에 산이 강으로 떠내려와서 저렇게 자리를 잡았기에 부래산(浮来山)이라 부른다네. 뜰 부(.浮)자는 부유할 부(富)자와 동음이라서 그런지 이곳에서는 타관사람들이 토배기들보다 훨씬 잘산다는 말이 있다네.” “그것 참 락향할만한 좋은 고장이구려.이르는 곳마다 먼지투성이고 똥오줌내가 코를 찌르는 서울에 비하면 여기가 그야말로 선경이구려.” 백사가 맞장구를 쳐주자 유생은 신이나서 다시 말했다. “이곳이 천하에 제일 살기좋은 고장이라 이 고장으로 락향하고싶어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지만 우리의 허락없이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한다네. 손님이 진정 이곳에 와서 살 생각이 있다면 술 한상 톡톡이 내야 하네.” “술을 한상 내라구? 허허, 내손에는 그런데 쓸 돈이 없는데…” “뭐라구?이 두상이 우리를 가지고 놀려고 하나? 어디 두고보자.” 유생들이 막 늙은이의 말고삐를 잡고 늘어지려 하는데 뒤에서 배 한척이 나는듯이 쫓아오고있었다. 배안에는 귀인 량반 하나에 수종 몇십명이 타고있었다.배전에서 공작꼬리를 늘인 벙거지에 자지빛 천틱을 입은 무예청 두명이 눈을 부릅뜨고 “어느 잡인들이 배우에서 소란을 부리느냐? 부마대감의 행차를 못봤느냐?”하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뒤따르던 배가 앞의 배를 거의 따라잡았을 때 귀인은 앞의 배우에 탄 늙은이를 알아보고 흠칫 놀라 말하였다. “조용들하게. 저 배에 오성대감께서 승선하셨구나.무슨 일로 여길 오셨는지 모르겠지만 어서 가서 문안을 드려야겠다.” 두 배가 맞대이자 무예청이 일어나서 “오성대감께 문안드리옵니다.어서 하선하십시오. 동양위께서 근친하러 가시다가 대감행차를 알아보고 문안드리려 하옵나이다.” 라고 말하면서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저 늙은이가 온 나라 백성들이 우러르는 리항복대감이란 말인가? 우리가 하마트면 큰 경을 칠뻔 했구나!” 뜻밖의 광경을 접한 시골유생들은 금세 얼굴이 백지장같이 창백해지고 온 몸에 소름이 일어 부들부들 떨었다. 배가 강변에 닫자 무예청이 호령했다. “잡인들은 당장 배에서 내려 물러나거라!” 시골 유생들이 걸음아 날살려라 하고 꼬리빳빳 달아나자 배에서 내린 그들은 강변에 돛자리를 깔아놓고 백사 리항복을 좌상에 모신 뒤 동양위가 꿇어앉아 큰절을 올렸다. 주안상이 차려지자 리항복은 동양위와 마주 앉아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흥이 도도해진 백사가 시종을 불러 분부했다. “여봐라,지묵을 갖추어라.내가 아까 배우에서 시 한수를 얻었는데 읊을테니 종이에 받아쓰거라.” “예이.” 수종들이 지묵을 가져와서 대기하자 리항복은 일어나서 소리높이 시를 읊었다.               부래산        늙으막에 생계찾아 소양강에 왔더니         이 고장 유생들과 한배를 타게 됐네.         외방사람 이곳 오면 살아가기 좋다누나 저기 부래산이 재부를 싣고 온다더라. “참으로 절묘한 시입니다.대감께선 어떻게 이런 묘한 시를 구상하셨습니까?” 동양위의 물음에   리항복이 이 시를 얻게 된 경과를 죽 이야기하자 동양위와 좌석을 함께 했던 사람들은 배를 끌어안고 웃었다.
126    절세기인 정치가 리항복 44) 기꺼이 정승직에서 물러나다 댓글:  조회:1718  추천:0  2015-12-25
  44.정승직에서 기꺼이 물러나다    선조 33년(1600년) 선조의 왕비 의인왕후(毅仁王后:1555-1600)가 자식을 남기지 못한채 병으로 승하했다. 그때  리항복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상여를 따라 산소가 정해진  산으로 갔다. 정해진 절차에 의해 령구를 묻고났을 때였다. 궁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조심하지 않아서 산불이 일어났는데 바람을 맞은 세찬 불길이 령악전(灵幄殿)에 옮겨붙었다. 창졸간에 생긴 변이라 따라갔던 사람들은 당황하여 어쩔줄을 몰라 쩔쩔매였다. “모두들 덤비지 말고 나의 지휘를 따르시오.” 리항복은 침착하게 사람들을 지휘하여 불을 다 끄고나서 례궁(礼宫)을 불러 위안제(慰安祭)를 속히 거행하도록 지시하였다.마침내 자궁(梓宮)을 받들어 장례지내는 일을 의식대로 모두 거행하면서 지계(弛启)하고 끝내 이날의 반우제(反虞祭)까지 모두 순조롭게 마무리지였다. 장례에 참가했던 문무과원들은 혀를 털면서 “리항복대감이 아니였으면 우리는  불의지변을 어떻게  대처할지 몰라 큰 일을 저지를뻔 했소.”하고  탄복하였다.  이번 일이 있은 뒤 리항복은 후진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려고 여러차례 사직을 청하였다. 리항복을 누구보다 신임하는 선조왕은 그의 사직을 윤허하지 않고 몇해동안 더 자리를 지켜줄것을 간절히 청하였다.그리하여 리항복은 마지못해 조정에 나와 출근하였다. 어느날 선조왕은 리항복을 보고 학문이 연박하고 품성이 바른  선비 몇사람을 천거하라고 하였다 리항복은 김장생(金長生),신응거(申应举),리기설(李基卨) 등 전도유망한 선비들을 임금에게 천거하였다.  일찍 그는 입궁하여 경연을 할 때  “우에서 성심을 열고 공정한 도를 펼치면 아래에서는 능히 붕당을 깨뜨리고 렴치를 면하는 것이니 오늘날의 급선무는 여기에서 벗어날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뜻인즉 임금이 일을 공정하게 처리해야만 아래에서 붕당싸움이 없어진다는것이였다. 선조왕은 그의 강연을  듣고나서 크게 깨달은바가 있어서 매우 좋은 건의라고 칭찬하였다. 어느날 건주위(建州衛)의 오랑캐 추장이 글을 보내와서 량국이 서로 화목하게 지내기를 청하였다.그러자 리항복이 임금에게 자신의 생각을 피로했다. “전하, 이 추장은 이미 명나라로부터 벼슬을 받았으므로 우리나라로서는 그들과  의리상 사적으로 사귈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신의라곤 티끌만큼도 없는 자들과 잘못 사귀다간 장래에 우환거리가 생길수 있습니다. 청컨대 전하께서는 그 사신의 청을 완곡하게 거절해주옵소서.” 선조왕도 리항복의 제의가 옳다고 생각되여 오랑캐추장에게 앞으로 사이좋게 지내면 되지 무슨 협약같은것은 맺을 필요가 없다고 듣기 좋은 말을 해서 돌려보냈다. 임인년(壬寅年:1602년) 봄에 이르러서는 조정의 형세가 크게 변하였다 3사에서 우계 성혼(牛溪 成渾)에게 추가로 죄를 줄것을 제의하였다. 성혼(1535-1598)은 률곡 리이와 같이 조선조의 성리학의 대가로서  퇴계 리황선생의 성리학설을 이어받아 룰곡 리이선생과 함께 
125    절세기인 정치가 리항복 43)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 댓글:  조회:1700  추천:0  2015-12-25
 43.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    봄빛이 무르녹는 어느날, 마침 조정에서 쉬는 날이였다.모처럼 휴식을 가진 리항복은 강변에 나가 산보를 하려고 집을 나섰다.마침 그를 찾아오는 리정구와 만났다. “자네 무슨 일로 날 찾아와ㅆ나?” “오늘 날씨가 하도 좋기에 대감과 함께 들놀이나 할가 해서 댁을 찾아가던 중입니다.” “마침 잘됐네. 나도 혼자 가기가 싫어서 동행을 찾으려고 하던 참이였네.” 두사람은 남대문을 나와 한강가로 걸어갔다.예나 다름없이 구비치고 흐르는 한강물은 시인들의 가슴을 흐뭇하게 한다.이윽고 길 저쪽에서 몇사람이 이쪽으로 걸어오고있었다. 백사가 그쪽을 돌아보는데 리정구가 알아보고 환호성을 울렸다. 서애대감 류성룡과 송강 정철, 일송 심희수와 월사 리정구가 들놀이를 왔던것이였다. “서애대감, 오늘은 어인 일입니까?”리항복이 존경하는 류성룡에게 인사를 건늬자 류성룡도 반갑게 대답하였다. “오늘 봄날씨가 유달리 화창하기에 들놀이를 나왔다네.” “영웅의 소견이 다 같다더니 오늘은 희한하게 시인들이 자리를 함께 했네요.” 리항복은 그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고나서 강변의 경치를 구경하며 회포를 풀었다.이윽고 점심때가 되였다.그들은 약속이나 한듯 강변에 있는 주막을 찾아 들어가서 주안상을 청하였다.  문장과 시를 각별히 즐기는 그들이 모처럼 좌석을 같이하니 모두들 금시 하늘을 날듯한 기분이였다. 그들은 서로 권커니 작커니하며 즐겁게 술을 마시였다. 술판이 무르익자 좌상인 서애 류성룡이 일어나서 한가지 제의를 했다. “오늘 우리 글 잘하는 친구들이 한자리에 모였으니  시를 읊지 않고 어이 아까운 시간을 보내겠소? 라는 내용으로 각자가 시 한구절씩 지어 읊되 시의 운은 소리 성자를 쓰기로 하여  주흥을 돋우는 어떻겠소?” “그것 참 훌륭한 제의군요. . 시인들이 술을 마시는데 풍월이 따르지 않아서야 될 일입니까? 그럼. 누가 먼저 시 한구절을 읊으시겠소?” 리항복이 이렇게 맞장구를 치자 남 먼저 시상이 떠오른 시인 송강 정철이 시  한구절을 읊었다. “청소랑월에 루두알운성(清宵朗月 楼头遏云声)이라, 맑은 밤, 달 밝은 때에 다락우로 구름이 지나가는 소리.” “참 멋진 시입니다.달 밝은 밤에 다각우로 구름이 살금살금 넘어가는 소리가 은은히 들리는듯 하군요. 자,우리 축하하는 의미에서 술 한잔씩 듭시다.” 일송 심희수가 건배를 제의하자 모두들 잔을 들어 굽을 내였다. “이번엔 제가 시 한수를 읊겠습니다.” 심희수는 남에게 뒤질세라 일어나서 시 한구절을 읊었다. “만산홍수에 풍전원수성(满山红树 风前远岫声)이라, 온 산에 단풍이 붉은데 먼 산굴앞을 스쳐가는 바람소리.” “허허,참 좋은 시를 읊었네.가을날의 경치가 한눈에 안겨드는군요.자 다들 축하주를 듭시다. 다음엔 내가 한수 읊겠소이다.” 좌중의 사람들이 다 술잔을 굽내자 술을 남달리 즐기는 류성룡이 시를 읊었다. “효창수여에 소조주적성(晓窗睡余 小槽酒滴声)이라,새벽 창 잠결에 안해가 술거르는 소리.” “참 기막힌 시입니다. 서애대감께선 새벽에 마님께서 술 거르는 소리를 듣고 기뻐하시는 모습이 눈앞에  떠오릅니다.어서 축하술을 듭시다.”  다음으로 시를 읊을 준비를 한  월사 리정구가 술잔을 들어 마시면서 말하였다. 모두들 술잔을 굽내자 리정구가 일어나서 시 한귀를 읊었다. “산간초당에 재자영시성(山间草堂 才子咏诗声)이라,산골마을 초당에서 선비가 시 읊는 소리.” “참 훌륭한 시요. 우리가 과거를 보기전에 산간의 초당에서 소리내여 글을 읊던 옛날모습이 눈에 선하네요. 자 축재를 듭시다.” 마지막에 남은 리항복이 술잔을 들고 말하였다. 저마다 시를 잘짓기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명사들이라 어느 시도 흠잡을데가 없었다. 시 한구절을 읊고나면 모두들 즐거워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술 한잔씩을 따뤘다.  이제는 백사 리항복이 시를 읊을 차례였다.그는 주흥을 돋우기 위해 일부러 사람들의 배창자를 끊게할 시 한구절을 구상하여 소리높이 읊었다. “동방량소에 가인해군성(洞房良宵 佳人解裙声)이라, 깊숙한 골방에서 미인이 치마끈 푸는 소리.” 모두들 자신이 멋진 시를 지어 읊었다고 흐뭇해하고 있었는데 백사 리항복의 시처럼 사람을 웃기지는 못하였다.동방화촉을 끄고 자기 전에 사랑하는 사람이 잠을 자기위해 치마끈을 푸는 그 소리를 듣던 그때를 생각하면 누구나 황홀함을 금할수 없었다. 누구 지은 시가 가장 멋진가는 평의할 여지도  없게 되였다. “오늘 시회에서 누구의 시가 으뜸입니까? 내가 보건대는…” 류성룡이 누구라고 집어 말하지 않았지만 모두의 얼굴은 리항복에게로 돌려졌다. “오늘 시회에서는 오성대감이 지은 시가 으뜸인것은 우리 모두가 인정하는 바요. 자 오성이 장원을 한것을 축하해서 잔을 냅시다.” 류성룡의 제의에 의해 모두들 리항복을 축하하며 즐겁게 술잔을 내였다. 오래간만에 한자리에 모여서 술과 시로 하루낮을  즐겁게 보낸 그들은 취흥이 도도하여 저마다  코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124    절세기인 정치가 리항복 42) 중과 고자의 싸움 댓글:  조회:1790  추천:0  2015-12-25
  42.중과 고자의 싸움 어느날 리항복이 조정에 출근하러 가는데 성균관 담벽에 조정을 비판하는 괴상한 익명서가 나붙어 있었다.누가 저지른 짓인지는 알수 없지만 이 일이 임금의 귀에 알려지면 성균관의 유생들이 먼저 피의자로 지목되여 고초를 당할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였다.실로 몸에 소름이 끼는 옥사가 또 벌어지겠구나 하고 생각하니 가슴이 마구 떨렸다. 이번 익명서사건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가?리항복은 대책을 강구하느라 머리를 짜다보니 일부러 남들보다 훨씬 늦게 입조하였다. “령상대감, 오늘은 어인 일로 이렇게 늦게 입궐하셨습니까?성균관 벽에 조정을 모독하는 익명의 글이 나붙은것을 보셨습니까?” “성균관의 유생들을 몽땅 잡아다 족쳐야겠습니다.” 보아하니 대신들은 령의정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게 분명하였다. “또 그런 괴상한 일이 발생했는가?나는 대궐로 나오다가 길에서 너무도 기가막힌 구경거리가 생겨서 그걸 구경하느라 그만 늦었다네.” “대감께선 무슨 좋은 구경거리를 보셨습니까?” 한 대신이 호기심이 동하여 리항복을 쳐다보며 따지고 물었다. “세상에 참 기가 막힌 일도 있지. 글쎄 중놈하고 고자놈이 길거리 한복판에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  으르렁거리며 한창 싸움을 벌이고있지 않겠나?” “그런 일도 있습니까?” 몇몇 대신들은 눈이 동그렇게 되여 귀를 기울였다. “글쎄, 중놈은 고자놈의 불알을 잡아당기고 고자는 중놈의 머리카락을 끌어당기면서 서로 놓지 않고 죽기내기로 싸움을 벌이고있었다네.내 참 보기가 민망해서 원.” “대감, 세상에 그런 허황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오늘 령상께선 당치도 않은 이야기를 꾸며내고 계십니다 그려.고자가 어디 불알이 있고 중놈이 어디 머리카락이 있습니까?” 한 신하가 리항복대감이 분명히 무슨 일이 있어서 얼토당토않은 거짓말을 꾸며낸다 싶어서 따지고들었다. “그렇던가?자네 참 좋은 질문을 했네. 그럼 성균관의 벽에 어느 놈이 락서를 했는지 알아보지도 않고 무턱대고 죄없는 유생들을 다 잡아다가 마구 족치고 그들에게 가혹한 형벌을 가하려는건 그래 허황한 일이  아니고 뭔가?” “……” “익명서를 쓴 사람은 필연코 한사람일텐데 아무 죄도 짓지 않은 무더기로 사람들이 잡혀들어가서 갖은 고초를 받는다면 이보다 더 원통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남의 일이라 생각하지 말고 내가 그런 옥사를 당했다고 한번 바꿔 생각을 해보게.” 리항복정승의 뼈있는 말에 대신들은 사태의 엄중성을 자각하고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무턱대고 죄없는 유생들을 잡아다 족치자고 주장하던 대신들의 길게 내밀 었던 목도 자라목같이 쑥 들어가버렸다.  리항복의 이 허황한 롱담 한가지가 조정에서 벌어질 한차례의 피비린 옥사가 일어나는것을 막았기에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많은 유생들은 리항복대감에게 감사함을 금할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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