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룡수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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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절세기인 정치가 리항복41) 복이 많은 정승 댓글:  조회:1317  추천:0  2015-12-25
 41.복이 많은 정승 어느 날 리항복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였다.일인지하 만인지상에 있는 령의정대감의 행차인지라 앞서가는 하인들의 웨침 또한 기세가 당당했다. “오성대감 행차하신다. 썩 물러나거라!” 하늘에 사무칠듯한 호통소리가 울리면 백성들은 저마다 다투어 길을 비켜주기 마련이였다. 그런데 이날은 운수가 좀 사무라웠던지 자그마한 사고가 일어났다.얼굴에 주름살이 잡히고 허리가 꼬부장한 녀인이 광주리를 이고 길을 가다가 대감행차를 미처 피하지 못하고 넘어졌다. 성미가 불같은 하인들이 이것을 보고 가만이 있을리가 없었다. 한 하인이  방망이를 휘둘렀는데 머리에 인 광주리가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자 팔다 남은 참외 몇개가 길우에 우르르 나딩굴었다. 그러자 화가 치민 하인이 다시 방망이를 휘둘렀다. “이런 무엄한 계집년, 어서 썩 물러나지 못할가?” 리항복은 하인들이 게세를 부리는 꼴을 보기가 너무 민망하여 먼 하늘만 바라보다가 하인들을 보고 그자리를 피해 어서 가자고 조용히 지시했다. 집에 돌아온 리항복은 하인들을 불러모아 눈물이 쏟아지도록 훈계를 했다.    “너희들이 한가지 잘못을 저지르면 그 잘못은 고스란히 내게로 돌아온다. 내가 이 나라의 정승이니 백성 누구라도 억울함을 당하면 그 원망이 누구에게 돌아오겠느냐? 너희들이 아니고 바로 내가 아니냐?” 리항복이 하인들에게 일장 훈시를 하고있는데 어디선가 녀인의 앙칼진 목소리가 귀전을 때렸다. “이마빼기가 하얀놈아.” 리항복이 소리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담너머에서 그 녀인이 악을 쓰며 욕을 퍼붓고 있었다. “나의 말을 똑똑이 들어라.” 리항복은 서둘러 하인들을 해산시켰다. 담구석에 들어박혀 꼼짝하지 말라는 분부도 함께 하였다. 녀인의 악담은 계속되였다. “종놈들을 시켜서 녀인네 머리에 인 광주리를 내려치는 법이 어디 있다더냐? 어찌 힘없는 백성들의 참외쪽을 마구 깨뜨리느냐?네가 그러고도 이 나라의 정승이란 말이냐? 백성들 살릴 궁리는 조금도 하지 않고 백성들을 마구 깔아뭉개고 위세를 땅땅 부리는자가 그래 정승이란 말이냐?” 하인들은 담구석에 꼼짝 말고 들여박혀 있으라는 대감의 명은 받았으나 악담을 듣고 더는 참을수가 없어서 조용히 항의를 했다. “ 대감님, 어찌 저런 계집년을 그냥 내버려둡니까?” “내가 잘못을 저질러서 이렇게 되였는데 어찌 내가 나서서 욕을 하지 말라고 권할수 있겠느냐?” 녀인의 악다구니는 지칠줄 모르게 이어져서 이젠 그만 그치나 하면 또 다시 새 악담이 쏟아졌다. “아직도 분이 안풀린 모양이구나.” 녀인의 악다구니가 끝도 없이 이어지자 리항복은 더 듣기를 포기하고 발길을 돌렸다. “내가 역시 복 하나는 타고난 모양이지. 아직까지 욕 한가지 얻어먹을 복은 남아있으니까.하하하."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입을 모아 리항복의 바다같이 넓는 도량에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참으로 도량이 바다같은 재상이야.”
122    절세기인정치가 리항복 40) 도체찰사의 중임을 맡고 댓글:  조회:1681  추천:0  2015-12-25
 40.도체찰사에 원수의 중임을 맡고 조정안은 얼마동안 잠잠하더니 또 붕당싸움으로 몸살을 앓았다.서인들이 우의정인 류성룡을 강력하게 공격해나섰던 것이였다. 그 리유는 갑오년에 명나라의 제독 리여송이 왜놈들과 화의를 하자고 주장했을 때 선참으로 동의한 사람이 바로 우의정 류성룡이라는 것이였다. 그들은 명나라와 일본이 갑오년에 화의를 했기때문에 정유재란이란 참혹한 전쟁이 재발생다고 하면서 류성룡에게 죄를 씌우려고 하였다. 기실 왜놈들과 화의를 주장한것은 리여송이였지 우의정인 류성룡은 아니였다.류성룡은 리여송이 화의를 하려고 할때 남먼저 반대하였던것이였다.조선을 지원하러 온 명나라의 제독이 기어코 화의를 하겠다고 나서니 류성룡이나 리항복은 막을수가 없었던 것이였다. 조정의 모든 신하들이 하나같이 똘똘 뭉쳐도 당면한 난제를 수습하기 어려운 판국인데 조정은 붕당싸움으로 인해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으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한담? 리항복은 생각하면 할수록 한숨만 났다.그의 입에서 저도몰래 시조 한수가 흘러나왔다.             시절도 저러하니 시절도 저러하니 인사도 이러하다 이러하거니 어이 저러 아니하리 이렇다 저렇다 하니 한숨겨워하노라. 임진왜란 때 누구보다 바삐돌면서 큰 공을 세운 류성룡을 구하려면 서인에 속한 자신부터 탄핵야겠다고 생각한 리항복은 임금에게 소장(疏章)을 올렸다.  “…신도 일찍 왜적과 화의하는데 찬성하였습니다. 3사에서 우상에게 죄를 묻는데 신이 요행을 바랄수는 없는 일입니다.전하께서 신을 돌보려 생각하지 마시고 우상과 함께 처벌해주십시오.” 리항복은 자신을 탄핵하는 소장을 써올렸지만 임금의 윤허를 받지 못하자 마침내 병을 핑게하고 사직하고말았다.이로하여 동인에 속한다하여 죄를 받을뻔했던 서애 류성룡도 죄를 모면하게 되였다. 오랜 뒤에 그는 “남과 함께 일을 해놓고 끝에 가서 번복하는 자는 리모의 죄인이다”라고 말하였다. 나라 일로 걱정하며 잠못이루는 밤이 하루이틀이 아니였다.리항복은 이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은 시로 표현했다.                 잠 못이루며 세상이 어지러워 공자가르침 멀어지고 시절이 하도 험해 큰어른 말도 꺼리네. 잠 못이루고 나라걱정하면서도 창생을 구제할 힘이 없구나.   초조해하는것은 새해의 꿈 쓸쓸한것은 옛역사로다. 고향집 벌써 천리나 먼데 그 누가 내 안부 물어줄거냐.            难眠 世乱疏儒术, 时危忌太言. 不眠忧社稷, 无力济黎元   草草新年梦, 萧萧古驿轩. 家乡已千里, 谁肯问寒喧. 리항복은 경자년(庚子年:1600)에 사망한 권률장군의 뒤를 이어 도원수(都元帥)에 올랐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선조왕은 그를 도체찰사 (都体察使 )에 임명하고 경상도와 전라도 일대의 모든 사황을 시찰하고 관할하게 하였다.리항복이 호남땅에 이른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선조왕이 리항복에게 지방에서 반역을 하려고 꿈꾸는 무리들이 있는가 잘 기찰하라는 어명이 내렸다. 어느 세월에도 임금된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반란이였다. 임진왜란을 갖 겪은 남방의 백성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큰 고역을 겪고 있었다.전쟁의 피해로 경작지의 절반이상이 페허로 된데다가 로동력이 대량으로 줄어들어서 해마다 흉년이 거듭되였으니 백성들이 기아에 허덕이는 참상은 상상만해도 알수 있었다.오죽하면 남의 무덤을 파헤쳐 죽은  사람의 고기를 먹는 일까지 종종 발생하겠는가. 나라에서 마땅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있으니 생사의 고비속에 허덕이는 백성들이 나라에  불만이 적을 리가 없었다. 리항복은 국왕이 민란이 일어날것을 두려워하는 심정은 얼마든지 리해할 수 있었다.그러나 무턱대고 무고한 백성들을 역적으로 의심하여 잡아다 문초하는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만 했다. 이에 리항복은 임금에게 계를 써올려 임금의 잘못을 지적하였다. “역적은 금수(禽兽:새나 짐승)나 어별(鱼鳖:물고기와 거부기)처럼 아무곳에서나 생산되는 물건이 아닙니다.신이 역모를 기찰하기란 너무너무  어렵나이다.” 그 계를 읽어본 대신들은 리항복의 주장이 참으로 기이한 말이라고 탄복하였다.전라도지방을 돌아보면서 농민들의 비참한 생활을 목격한 리항복은 한시도 방임할수가 없었다.그는 즉시 임금에게 전라도 농민들의 부역을 경감해줄것을 주청하고 또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해상의 방위를 가강할데 관한 대책으로 십륙책(十六策)이라는것을 써서 올렸는데 선조왕은 그 대다수를 채납하였다.그리하여 남방의 백성들은 조정에 감사한 마음을 지니고 조정의 령에 더욱 잘따랐다.이해 여름에 리항복은 령의정에 임명되여 서울로 올라왔다.
121    절세기인 정치가 리항복 39) 궁전안에서 울린 닭울음소리 댓글:  조회:1608  추천:0  2015-12-25
39.궁전안에서 울린 닭울음소리 해학에 능한 리항복은 평소에 롱을 즐겨 진담절반 롱담 절반으로 종종 잘못을 주장하는 신하들을 깨우쳤다. 붕당싸움이 그칠줄 모르는 조정에 며칠동안 리항복의 해학이 없으니 조정안은 가을날씨같이 썰렁하였다.어느날 몇몇 신하들이 리항복을 난처하게 만들어보려고 모의하고나서 임금을 찾아가서 어이어이하자고 주청하였다.  원래 리항복과 롱하기를 즐기던 선조왕은 대뜸 응하고나서 조정에서 대신들이 조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내시를 시켜서 다음날 아침 조회할 때 한사람이 달걀 한개씩 가져오라고 분부하였다. 그러나 내시는 왕의 명에 의해 리항복에게는 감쪽같이 비밀을 지키였다.  이튿날 선조왕은 대신들과 함께 조회를 하고나서 대신들에게 분부했다. “애경들, 과인이 당장 달걀을 쓸 일이 생겼으니 모두들 달걀 한알씩만 구해오시오.” “예, 그렇게 하겠나이다.전하, 달걀을 가져왔소이다.” 대신들은 저마다 소매안에 넣어두었던 달걀을 꺼내더니 임금한테 바치였다. 리항복은 이들이 임금과 짜고들어 자기를 난처하게 만들려 한다는것을 대뜸 알아차렸다. 대신들은 리항복이 불의지변을 당해 어떻게 처사하는가 보려고 저마다 리항복한테로 슬금슬금 눈길을 돌리였다.매우 깨고소해하는 눈치가 력력했다. “오성대감은 달걀을 준비하지 못했소?” 선조왕이 웃음을 띄우면서 물었다.  리항복은 임금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는 조금도 당황해하는 기색이 없이 침착하게 앞으로 둬발작 걸어가서 쪼그리고 앉더니 온 대궐이 떠나갈듯 우렁차게 “꼬끼오.꼬끼오!”하고 장닭이 우는 흉내를 내였다. 그는 장닭이   홰를 치는 흉내를 내느라 두 소매를 펄럭이였다. “오성은 과인이 부탁한 달걀은 내놓지 않고 지금 무슨 짓을 하고있는고?” 선조왕이 의아해하며 이렇게 묻자 리항복이 대뜸 대답했다.  “ 전하,저분들은 모두 다 암탉인지라 당장에 알을 낳아 상감님께 올릴수 있지만 신은 암탉이 아니여서 알을 즉석에 낳는 재주가 없소이다. 하지만 암탉이 고생스레 알을 낳았을 때 수탉이 목청껏 칭찬해주는것이 마땅한 도리라 생각되여 신은 수탉을 본따 “꼬끼오”를 힘차게 불렀나이다.” 그 말을 듣고난 대신들은 부끄러움을 감출길이 없어서 저마다 얼굴이 홍당무우같이 발갛게 물들었다. “오성부원군은 참 림기응변하는 재주가 비상하오. 여러 대신들이  오성대감의 지혜를 시험하는 롱을 하자고 조르기에 해봤는데 정말 대단하오.오성덕분에 오늘하루 재미있게 웃었소.하하하.” 선조왕이 통쾌하게 껄껄 웃자 대신들도 멋적게 따라 웃었다.비록 리항복을 놀래우려고 하다가 실패했지만 그의 재치와 익살은 도리여 선조왕과 대신들의 마음을 즐겁게 하였다.선조왕은 조회가 끝나자 수라를 담당한 내시를 시켜 조회에 참석한 신하들에게 어주 한잔씩 내리라고 분부하였다.
120    절세기인 정치가 리항복 38) 다시 맺어준 금슬 댓글:  조회:1172  추천:0  2015-12-25
   37.변무사를 맡고    얼마뒤 리항복은 다시 병조판서로 임명되였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다섯번째로 맡은 군사직무였다.왜적이 전국각지에 웅거해있고 명나라의 군사들이 수륙(水陆)으로 모여드는 때를 만나서 모든 군려(軍旅)에 관계된 일은 병조에 귀속되지 않은것이 없었다. 리항복은 편의에 따라 조처하며 일처리에 언제나 여유를 두었다.그는 항상 여분으로 베 만필을 비축해놓아서 급한 일을 당할때 쓰도록 대비하였다.그리하여 양경략(杨经略)이 그의 재능에 감복하여 매양 어려운 일을 만날때마다 “리판서,리판서를 기다려서 해야겠다”하고 입버릇처럼 말하였다.     무술(1598)년 가을에 명나라에서 정응태(郑应泰)라는 자가 감찰사를 맡고 조선에 내려왔었다. 그는 중국에서 자기의 경쟁자인 양경략이 조선에 와서 많은 전공을 세우는것을 보니 시기심이 굴뚝같이 솟아났다.그는 본국으로 돌아가자 황제에게 양경략이 야심을 품고 황제의 명을 잘따르지 않는다고 무함하면서 양경략을  탄핵하였다.    조선을 돕기위해 이역만리에 와서 생사를 가리지 않고 적과 싸워 많은 전공을 세운 사람에게 상은 후하게 주지 못하더라도 무함을 당하고 탄핵당하게 하는것은 결코 수수방관할수 없는 일이였다.리항복은 국왕에게 상주하여 명나라황제에게 양경략이 조선에 와서 세운 공을 상세히 알리는 동시에 그의 직무를 보류해줄것을 제의하도록 하였다. 조선 조정에서 양경략을 비호한다는것을 알게 된 정응태는 조선국에 앙심을 품고 이를 갈았다. 그는 황제에게 주문을 올려 조선국의 임금과 신하들을 미친듯이 무함하였는데 언사가 잔혹하기 비할데 없었다.      선조왕은 대단히 놀라 당장 사신을 명나라에 보내 진상을 해명하려고 하였다. 선조왕은 사신으로 령의정 류성룡을 맘속으로 점찍어놓고 그의 뜻을 물었다.  당시 류성룡은 신병이 있어서 약을 쓰는 중이여서 선조왕물음에 대뜸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성질이 불같은 선조왕은 류성룡이 명나라로 떠나가기 꺼려하는 기색을 보이자 노염을 품고 류성룡을 파직시켰다. 선조왕은 리항복을 의정부의 우의정에 임명하고 오성부원군에 책봉한 동시에 명나라로 갈 진주사(陳奏使)로 삼았다.그러자 리항복은 두차례나 공문을 써올려 강력히 사양하였다. “전하,신이 명나라에 진주사로는 갈수 있지만 우의정만은 맡을수 없습니다.” “명나라에 진주사로 가는 대신이 정승도 아니면 명나라에서 중시해줄수 없어서 그러네.” “진정 그러하오면  잠시 우의정이란 이름을 빌려서  출국하겠나이다.”    “명국에 가서 변무(辩诬)를 하려는 사신의 신분으로서 먼저 황제를 속여서야 되겠는가? 거짓이 아니라 당당한 우의정의 신분으로 출국하시오.”    선조왕이 무함을 바로잡기 위해 출국하는 사신이 거짓 정승질은 할수 없다고  강조하자 리항복은 마지못해 우의정의 관직을 맡고 명나라로 떠나게 되였다.     리항복이 출국을 하려고 한창 행장을 수습하는데 리덕형의 소실이 또 찾아왔다. “네가 어인 일로 찾아왔나?” 리항복이 의아해하며 이렇게 묻자 한음의 소실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소첩은 허물투성이라 우리 대감의 버림을 받을 운명이지만 대감께서 소첩을 갑자기 버린 리유나 알고저 찾아왔나이다.” 한음의 소실은 오열을 터뜨렸다. 하염없는 눈물이 고운 얼굴을 타고내렸다. “래일 내 한음을 만나 물어보고 알려주겠으니 너무 상심해 하지 말고 집에 돌아가거라.” 이튿날 리항복은 한음을 만나 그가 사랑하는 소실을 버린 리유를 물었다. “기실 그애에겐 티끌만한 허물도 없네.그애가 너무 귀여워서 버리고말았네.” “아니, 그것도 말이라고 하는가?” “나라의 형편이 이같이 어려운 상황인데 내가 색에 깊이 빠져서 정사를 옳게 처리하지 못하여 나라에 죄를 질까봐 두려워서 버렸다네.” “자네 그 뜻이 참 장하고 거룩하네.” 리항복은 그 말에 감동되여 미더운 친구의 손을 굳게 잡고 흔들다가  작별하였다. 리항복은 부인에게 도봉산에 있는 절에 들어가서 수녀로 있으려고하는 한음 리덕형의 소실을 극력 만류하라고 분부하였다. 리항복의 부인은  한음 리덕형의 장인인 리산해댁을 찾아가서 두 늙은이를 설복하여 한음의 소실을 리산해대감의 댁에 데려가서 한동안 함께 살도록 하였다. 이 일은 물론 한음 리덕형에게는 절대적인 비밀에 붙이였다. 리항복은 부사(副使) 리정구(李廷龟) 및 수종들과 통역을 데리고 하루에 이틀길씩 달려서 명나라의 수도에 이르렀다.그는 명나라 황궁에 주문을 올리고나서 여러 각부(阁部)를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정문(呈文)을 올려 사실의 진상을 밝히였다.리항복을 만나보고 그의 풍모를 존경하게 된 명나라의 대신들은 리항복이 쓴 정문을 읽고나서 깊이 감동되였다.그들은 황제에게 주청하여 오해를 풀고 일을 원만히 해결하겠다고 말하면서 서로 다투어가며 리항복에게 주안상을 차려 극진히 대접하였다. “국가의 수치는 이제 곧 씻어질것이니 과히 걱정할것이 없습니다.” 여러 대신들의 말을 듣고 사건의 진상을 알게된 명나라 황제는 대노하여 즉시  정응태를 파직시키고 다시 조선국에 칙서를 보내 조선국의 왕과 대신들을 위로하였다. 이듬해 봄에 리항복은 변무사의 사명을 완수하고 무사히 조선국에 돌아왔다. 선조왕은 크게 기뻐하며 리항복에게 령의정을 제수하고 호종(扈从)의 공 1등에 책록하였으며 전답과 동복(僮僕)을 특별히 하사하였다.
119    절세기인 정치가 리항복37) 변무사를 맡고 댓글:  조회:1250  추천:0  2015-12-25
   37.변무사를 맡고    얼마뒤 리항복은 다시 병조판서로 임명되였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다섯번째로 맡은 군사직무였다.왜적이 전국각지에 웅거해있고 명나라의 군사들이 수륙(水陆)으로 모여드는 때를 만나서 모든 군려(軍旅)에 관계된 일은 병조에 귀속되지 않은것이 없었다. 리항복은 편의에 따라 조처하며 일처리에 언제나 여유를 두었다.그는 항상 여분으로 베 만필을 비축해놓아서 급한 일을 당할때 쓰도록 대비하였다.그리하여 양경략(杨经略)이 그의 재능에 감복하여 매양 어려운 일을 만날때마다 “리판서,리판서를 기다려서 해야겠다”하고 입버릇처럼 말하였다.     무술(1598)년 가을에 명나라에서 정응태(郑应泰)라는 자가 감찰사를 맡고 조선에 내려왔었다. 그는 중국에서 자기의 경쟁자인 양경략이 조선에 와서 많은 전공을 세우는것을 보니 시기심이 굴뚝같이 솟아났다.그는 본국으로 돌아가자 황제에게 양경략이 야심을 품고 황제의 명을 잘따르지 않는다고 무함하면서 양경략을  탄핵하였다.    조선을 돕기위해 이역만리에 와서 생사를 가리지 않고 적과 싸워 많은 전공을 세운 사람에게 상은 후하게 주지 못하더라도 무함을 당하고 탄핵당하게 하는것은 결코 수수방관할수 없는 일이였다.리항복은 국왕에게 상주하여 명나라황제에게 양경략이 조선에 와서 세운 공을 상세히 알리는 동시에 그의 직무를 보류해줄것을 제의하도록 하였다. 조선 조정에서 양경략을 비호한다는것을 알게 된 정응태는 조선국에 앙심을 품고 이를 갈았다. 그는 황제에게 주문을 올려 조선국의 임금과 신하들을 미친듯이 무함하였는데 언사가 잔혹하기 비할데 없었다.      선조왕은 대단히 놀라 당장 사신을 명나라에 보내 진상을 해명하려고 하였다. 선조왕은 사신으로 령의정 류성룡을 맘속으로 점찍어놓고 그의 뜻을 물었다.  당시 류성룡은 신병이 있어서 약을 쓰는 중이여서 선조왕물음에 대뜸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성질이 불같은 선조왕은 류성룡이 명나라로 떠나가기 꺼려하는 기색을 보이자 노염을 품고 류성룡을 파직시켰다. 선조왕은 리항복을 의정부의 우의정에 임명하고 오성부원군에 책봉한 동시에 명나라로 갈 진주사(陳奏使)로 삼았다.그러자 리항복은 두차례나 공문을 써올려 강력히 사양하였다. “전하,신이 명나라에 진주사로는 갈수 있지만 우의정만은 맡을수 없습니다.” “명나라에 진주사로 가는 대신이 정승도 아니면 명나라에서 중시해줄수 없어서 그러네.” “진정 그러하오면  잠시 우의정이란 이름을 빌려서  출국하겠나이다.”    “명국에 가서 변무(辩诬)를 하려는 사신의 신분으로서 먼저 황제를 속여서야 되겠는가? 거짓이 아니라 당당한 우의정의 신분으로 출국하시오.”    선조왕이 무함을 바로잡기 위해 출국하는 사신이 거짓 정승질은 할수 없다고  강조하자 리항복은 마지못해 우의정의 관직을 맡고 명나라로 떠나게 되였다.     리항복이 출국을 하려고 한창 행장을 수습하는데 리덕형의 소실이 또 찾아왔다. “네가 어인 일로 찾아왔나?” 리항복이 의아해하며 이렇게 묻자 한음의 소실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소첩은 허물투성이라 우리 대감의 버림을 받을 운명이지만 대감께서 소첩을 갑자기 버린 리유나 알고저 찾아왔나이다.” 한음의 소실은 오열을 터뜨렸다. 하염없는 눈물이 고운 얼굴을 타고내렸다. “래일 내 한음을 만나 물어보고 알려주겠으니 너무 상심해 하지 말고 집에 돌아가거라.” 이튿날 리항복은 한음을 만나 그가 사랑하는 소실을 버린 리유를 물었다. “기실 그애에겐 티끌만한 허물도 없네.그애가 너무 귀여워서 버리고말았네.” “아니, 그것도 말이라고 하는가?” “나라의 형편이 이같이 어려운 상황인데 내가 색에 깊이 빠져서 정사를 옳게 처리하지 못하여 나라에 죄를 질까봐 두려워서 버렸다네.” “자네 그 뜻이 참 장하고 거룩하네.” 리항복은 그 말에 감동되여 미더운 친구의 손을 굳게 잡고 흔들다가  작별하였다. 리항복은 부인에게 도봉산에 있는 절에 들어가서 수녀로 있으려고하는 한음 리덕형의 소실을 극력 만류하라고 분부하였다. 리항복의 부인은  한음 리덕형의 장인인 리산해댁을 찾아가서 두 늙은이를 설복하여 한음의 소실을 리산해대감의 댁에 데려가서 한동안 함께 살도록 하였다. 이 일은 물론 한음 리덕형에게는 절대적인 비밀에 붙이였다. 리항복은 부사(副使) 리정구(李廷龟) 및 수종들과 통역을 데리고 하루에 이틀길씩 달려서 명나라의 수도에 이르렀다.그는 명나라 황궁에 주문을 올리고나서 여러 각부(阁部)를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정문(呈文)을 올려 사실의 진상을 밝히였다.리항복을 만나보고 그의 풍모를 존경하게 된 명나라의 대신들은 리항복이 쓴 정문을 읽고나서 깊이 감동되였다.그들은 황제에게 주청하여 오해를 풀고 일을 원만히 해결하겠다고 말하면서 서로 다투어가며 리항복에게 주안상을 차려 극진히 대접하였다. “국가의 수치는 이제 곧 씻어질것이니 과히 걱정할것이 없습니다.” 여러 대신들의 말을 듣고 사건의 진상을 알게된 명나라 황제는 대노하여 즉시  정응태를 파직시키고 다시 조선국에 칙서를 보내 조선국의 왕과 대신들을 위로하였다. 이듬해 봄에 리항복은 변무사의 사명을 완수하고 무사히 조선국에 돌아왔다. 선조왕은 크게 기뻐하며 리항복에게 령의정을 제수하고 호종(扈从)의 공 1등에 책록하였으며 전답과 동복(僮僕)을 특별히 하사하였다.
118    절세기인 정치가 리항복 36) 소박당한 한음의 소실 댓글:  조회:1265  추천:1  2015-12-24
  36.소박당한 한음의 소실 명나라에서 다시 왜적을 정벌하러 나왔는데 경리군무 어사 양호(经理军务 御史 杨镐)가 격문을 써서 조선의 호조,병조,공조판서 등이 국경에 나와 그들을 영접할것을 요구하였다 리항복은 리덕형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구련성(九连城)까지 가서 양호 일행을 맞이하였다. 명나라에서 사신이 오거나 대신들이 오면 조선의 접반사들의 능력을 저울질하는게 정하지 않은 법이였다.접반사를 맡은 리항복은 양호가 내놓은 여러가지 까다로운 질문을 일일이 재치있게 대답하여 그의 찬탄을 자아냈다.  리항복과 리덕형은 양호를 설득하여 서울의 방어를 가강하여 서울이 적에게 점령되는것을 막아냈다. 리덕형이 명나라 군사를 따라 울산까지 내려가서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아주게 되였다. “이번에 남하한 김에 리순신장군을 꼭 만나보고오게. 우리수군과 명나라의 수군의 잘 합작하여 바다를 물샐틈없이 방비하면 왜놈들의 수군은 우리나라의 땅에 발을 들여놓지 못할것이네.” 리덕형은 울산에 갔다가 다시 리순신장군이 있는 수영을 찾아가서 리순신장군을 만나  그의 로고를 치하하고나서 리항복대감의 뜻을 전하였다.     선조 31년(1598년) 6월,리덕형은 38세의 젊은 나이에 우의정에 올랐다가 좌의정으로 승진했는데 조선력사상 가장 젊은 재상이였다.국사와 군사의 중임을 한몸에 지닌 리덕형은 찌는듯한 삼복더위에도 대궐안에서 먹고 자면서 국사를 처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선조왕은 한음이 비지땀을 흘리며 수두룩이 쌓인 문건을 일일이 심열하는것을 보고 가슴이 쓰라렸다.그는 리덕형이 과로로 쓰러질까봐 두려웠다.그는 리덕형을 보고  며칠동안 집에 돌아가서 휴양하고 돌아오라고 말미를 주었다.     한음 리덕형은 17세때 결혼하였다. 그가 어릴적에 길에서 애들과 놀고있는데 길을 가던 토정 리지함(土亭 李之菡:1517-1578)선생이 우연히 이 애를 보고 그가 장래에 큰 인물이 되리라는것을 보아내였다. 리지함은 당시 령의정에 있는 조카 리산해에게 딸을 리덕형이에게 시집보낼것을 권하였다. 숙부 리지함이 세상에 둘도없는 이인(异人)임을 잘 아는 리산해는 숙부의 조언을 받아들여 둘째딸을 네살우인 리덕형과 혼약을 맺게 하였고  딸애가 열세살이 되자 리씨댁으로 시집을 보내였다.      한음의 부인 한산리씨는 시집온 뒤 아들 셋을 보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남편은 어가를 호위하러 집을 나갔는데 왜군이 서울을 쳐들어오자 그녀는 여덟살난 둘째아들 여벽(如璧)과 세살난 작은 아들 여황(如黄)이를 데리고 시아버지의 고향인 강원도 안협으로 들어가서 어려운 피난살이를 하였다. 그해 9월에 왜적들이 안변으로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나자 한산리씨는 안변에서 멀지 않은 백암산속에 들어가서 몸을 피했다. 그런데 왜놈들이 백암산으로 쳐들어오자 정조를 생명보다 중히 여기는 그녀는 왜놈들에게 몸을 더럽힐까봐 높은 바위에 올라가서 남편이 있을 북쪽하늘을 향해 고별인사를 하고나서 치미로 낯을 가리우고 절벽에서 떨어져 스물여덟살의 꽃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한음의  어린 두 아들은 절벽아래에 달려와서 어머니의 시신을 안고 구슬프게 울부짖으며 어쩔바를 몰라했다.이 처참한 광경을 하인들이 보고 부랴부랴 달려왔다.그들은 한음부인의 시신을 수습하여 산기슭에 림시 매장했다가 란이 끝나자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의 유택에 장사지냈다. 선조왕은 그 소문을 듣고 크게 감동되여 그녀의 절개를  칭송하고 동네 입구에 정려문(旌闾门)을 세워주도록 명하였다.    리덕형이 궁을 떠나던 날은 찌는듯한 무더위가 지속되여 일사병에 걸려 쓰러지는 사람까지 있었다.  가혹한 전쟁으로 인해 사랑하는 안해를 잃은 리덕형은 부득불 소실과 살림을 꾸리였다. 그러나 명색이 살림살이지 공직에 몸매인 그가 소실이 사는 집에 가는 차수는 가물에 콩나듯 드물였다.   한음이 경운궁(庆云宫)이라는 시어소(时御所)로부터 안국방에 사는 소실의 집까지 말을 타고 오는데 땀이 비오듯 내리고 현기증까지 나서 하마트면 졸도할뻔 하였다.     한음의 소실은 고향이 안동인 녀자로서 총명령리하고 성품이 현숙한데다가 한음을 지극히 사랑하였다. 그녀는 한음이 집에 온다는 기별을 받자 너무도 기뻐서 숨을 헐떡거리며 달려나가 땀투성이로 된 한음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계집종을 시켜서 한음을 부축하여 사랑에 모시게 한 뒤 땀에 젖은 옷을 벗겨주고  몸에 가득한  땀을 닦아주고나서 부채질까지 해주었다.그녀는 우물에 가서 찬물을 길어와서 한음에게 갈증을 풀게 하고나서 볶은 찹쌀가루와 강릉 석청을 타서 제호탕을 급히 만들어서 한음더러 마시게 하였다. 한음이 제호탕을 다 마시고나니 그녀는 한음이 세수하고  발까지 씻으라고 대야에 더운 물까지 떠다주었다.    마음씨가 비단결같은 리덕형은 사랑스러운 소실이 자기때문에 잠시도 쉬지 못하고 찌는듯한 무더위에 진땀을 흘리며 고생하는것을 보니 가슴이 쓰라리였다. 참으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고 입으로 핥으면 꿀같이 달것같은 소실이였다.그는 자기의 소실에 대한 뜨거운 사랑때문에 함께 있게 되면 마음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정사를 다스리는데 도리여 영향을 끼칠까봐 두려워졌다. 소실의 댁에서 하루밤을 자고난 그는 아침에 일어나자 생각이 깊어졌다.  나라의 중책을 짊어진 내가 이러고있을수가 있나? 아침밥상을 물린 그는 꿈에서 깨여난듯 벌떡 일어났다.    “이보게,우리 오늘부터 헤여지세. 하인이고 재산이고 모두 자네 주겠네. 왜 헤여지는가 하는 원인은 묻지 말게.”     한음은 앞도 뒤도 없는 말 한마디를 던지고나더니 소실의 고운 얼굴을 더  돌아보지 않고 뜰에 나와 말에 오르더니  채찍질하여  조정으로 떠나버렸다.     사랑하는 남편을 영문도 모르게 잃어버린 한음의 소실은 너무도 기가막혀 방안에 들어가 쓰러져서 오래동안 대성통곡을 하였다.    그뒤 리항복은 한동안 병사(兵使)를 맡고 남방의 전선으로 내려가게 되였다. 리항복이 바야흐로 임지로 떠나려고하는데 리덕형의 소실이  찾아왔다.그녀는 리항복과 상의하여 리덕형에게 남자종을 보내여 남편이 자기를 버린 연유를 알아보려하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한음은 명나라의 사신을 맞는 접반사를 맡고  경상도지방으로 떠났었다. 한음의 소실은 그 소식을 듣고나서 크게 실망하여 한동안 식음을 전페했었다.
  35.”그런 자질구레한 일까지 대감한테 꼭 문의해야 되느냐?” 임진란후 조정에서는 회의가 빈번하였다. 붕당싸움이 하루도 잠잠할때가 없는 조정이라 해당한 관원이 직권범위내에서 직접 처리할수 있는 일도 남의 구설수가 두려워서 매사를 대신들과 의논하여 어전회의에 내놓거나 계문을 써 바쳤다. 회의를 열면 동의하는 편과 반대하는 편이 생겨서 쟁론을 하다보면 한나절이 지나갔으므로 그 번잡하고 혼란스러움은 이루 말하기 어려웠다. 어느날 리항복이 집에 있는데 몇몇 친구들이 모처럼 찾아왔다.리항복은 사랑방에 주안상을 간단히 차려놓았다. 그들이 술을 마시며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있는데 례조(礼曹)의 한 랑관(郎官)이 찾아왔다. 그는 어떤 문제를 처리하는데 리항복대감의 의견을 들어보려고 댁을 뵈러왔다고 하였다..  리항복은 단란한 술좌석의 분위기가 식어지는것도 불쾌했지만 그보다도 사소한 일마저 자체로 주관하지 못하는 이 무능한 랑관을 보니 화가 버럭 치밀어올랐다. 그러나 모처럼 찾아온 여러 친구들앞에서 상을 찡그리거나 어성을 높일수가 없는지라 치미는 화를 가까스로 누르고 바야흐로 적절한 대답을 해주느라 머리를 짰다.  이때 어린 계집종이 사랑방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리항복에게 아뢰였다. “대감님께 아뢰옵니다.지금 말 먹일 보리콩이 떨어졌는데 어찌 하오리까?” 계집종의 말에 리항복은 짐짓 성을 버럭 내면서 질책을 하였다. “너는 그런 자질구레한 일까지 대감한테 꼭 문의해야 되느냐? 술이 찹고 안주가 적으니 마님께 여쭙고 다시 가져오너라.” 좌중에 있던 사람들은 리항복대감의 그 말을 듣고 배를 끌어안고 웃었다.례조의 그 랑관은 모닥불을 뒤집어쓴듯 큰 무안을 당해 꼬리빳빳 도망치고말았다  리항복은 당시에 조정에서 티끌만한 일이 있어도 회의를 열고 금싸락같은  시간을 허비하는 페단을 비꼬아서 한 말이였다. 병신(丙申:1596)년에는 명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여 일본의 추장을 책봉하였는데 부사를 맡은 양방형이 리항복을 접반사(接伴使)로 삼아줄것을 주청하니 선조왕이 윤허하였다. 조정을 잠시 떠나게 된 리항복은 리조판서(吏曹判书), 대제학(大提学) 등 직무를 다 내놓고 의정부(议政府)의 우참찬(右参赞)직만 맡게 되였다.  양부사는 리항복과 만나 학문을 론의하는가운데서 심히 놀랐다.그가 본국에 있을 때 조선을 다녀온 사신들을 통해 리항복이란 대신의 학문이 매우 연박하단 말은 많이 들어왔지만 정작 만나보니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말의 참뜻을 알만하였다.  리항복은 고금중외와 정치,경제,학문 그 어디에도 막히는 곳이 없었다. 양부사는 리항복의 깊은 학문과 출중한 지혜에 놀라 그를 지극히 존경하고 중히 여겼다. “동국에 이런 박식한 인물이 있는데 우리가 어찌 그들을 외국사람이라 여기고 가벼이 대할 수 있겠는가?” 양부사는 사람들을 만나면 종종 이런 말로 리항복을 찬양하였다. 리항복도 양부사가 학문이 연박하고 겸손하며 례절 또한 밝아 그와 마음이 아주  가까워졌다.그들은 서로 너무 늦게 만난것을 안타까워하였다. 그런데 정사(正使)를 맡은 리종성만은 그의 눈에 너무 거슬렸다. 리항복은 리종성을 한번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고나서 머리를 흔들면서  친구들과 말하였다. ”리종성은 부자집에서 금이야 옥이야하고 고이 키운 자식으로로서 방안에서 죽은 글이나  읽고 풍월이나 읊을줄 알았지 머리속이 텅빈 보잘것없는 위인이요.세도하는 가문의 자손이라 조상의 음덕을 입어 벼슬에 올랐다고 으시대고있는데  이런 아무런 능력도 없는자가 정사를 맡았으니 어쩌겠소? 장차 왕명을 욕되게 할게 분명하니 무척 두렵소이다.” 이때 일본군의 진영에 찾아간 정사(正使 ) 리종성(李宗城)은 난생 처음 외교일을 맡아 해보는지라 적장을 만나기도 전에 두려움이 앞서 간이 콩알만해졌다. 그는 저녁을 먹고 소풍을 하러 밖에 나갔다가 “간악한 왜놈들이 어쩌면 명나라의 사신을 해칠지도 모른다”고 지껄이는 병졸들의 말을 얼핏 들었다. 목숨을 잃을까봐 두려워서 벌벌떨며  잠자리에 들지도 못하던 그는 야밤중에 홀몸으로 적진에서 도망쳐나와 린근의 사람들을 크게 놀래우는 소동을 일으켰다.참으로 나라의 큰 치욕이였다.   양부사가 새벽에 급히 리항복을 찾아왔다.그는 리종성이 야반도주한 사실을 리항복에게 알리였다. 두사람은 토의한 끝에 사건이 중대하므로 즉시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기로 하였다. 리항복이 닫는 말에 채찍질을 하여  이틀만에 조정에 이르렀더니 리종성은 이미 서울에 도망쳐와있었다.기실 일본군의 진중에서 추장을 책봉하러 온 명나라의 정사를 해칠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리종성의 비겁한 본질이 백일하에 드러나자 사람들은  “리항복대감은  사람의 됨됨이를 첫눈에 알아보는 특수 기능을 소유하고있다”고 감탄하였다. 부사 양방형이 명나라로 돌아갈 때 그와 두터운 우정을 쌓았던 리항복은  국경까지 따라가서  바래주었다. 정유년(丁酉年:1597년)에 왜적이 다시 전쟁을 발동하여 조선을 침입하자 리항복은 다시 병조판서로 임명되였다.
116    절세기인 정치가 리항복 34) 너그러운 용서 댓글:  조회:1165  추천:0  2015-12-24
 34.너그러운 용서 어느날 사간원에 있는 젊은 관리가 김제군수와 초계군수를 탄핵하는 상소문을 임금에게 올렸다. 선조왕이 상소문을 읽어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였다. 김제군수는 부임하던 날,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왔는데 그는 자기의 출세를 어머니에게 자랑하고 또 어머니를 즐겁게 해드리려고 련꽃구경을 한다는 소위 상련회(赏莲会)를 열었다. 그는 술과 안주를 푸짐히 장만하고 기생이며 광대까지 불러 질탕하게 논 일이 있었다. 그리고 초계군수는 난리후 상관이 초계읍을 돌아보려 내려왔을 때 상관에게 잘보이려고 했는데 관가에 기생이 없었다. 수청들 기생이 없으니까 민간의 술장수를 관가의 기생으로 가장시켜 상관의 수청을 들게 한 일이 있었다.이는 상관을 속이고 조정의 법도를 무시한 행위이므로 반드시 엄히 다스려야 한다는 내용이였다. 선조왕이 상소문을 읽어보니  이런 사실은 지방의 수령들치고 흔히 있는 일이였다.선조왕은 이것은 임금이 머리를 쓸 중대한 사건이 아니지만 사간원에서 올린 상소문인지라 깔아뭉갤수가 없어서  리항복에게 맡기면서 리조에서 알아서 처리하라고 분부하였다. (지금 나라에서 시급히 처리해야할 일이 태산같이 많고 많은데 이따위 자질구레한 일까지 리조에 맡겨 처리하라고 하는것은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구나.) 리항복은 그 두 군수가 평소에 군청에서 공무를 착실히 보고 백성들속에 위신이 비교적 높다는 말을 들어왔었다.  그들이 출세를 해보겠다고 십여년동안 집안에 박혀 두문불출하고 산데미같은 책을 읽고 머리카락이 희슥희슥한40대에 이르러서야 겨우 지방군수라는 깨알만한 벼슬자리를 얻었는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다른 큰죄를 지은것도 아닌데 이 한가지 과실을 가지고 그들을 면직을 시킨다면 그들의 전도는 끝장나는게 아닌가?사람이 신선이 아닌데 누가 종신토록 과오를 범하지 않는단 말인가?그들을 한몽둥이로 쳐눕힐게 아니라 잘못을 고칠 기회를 주는게 도리가 아닌가?그는 무슨 방도를 써서라도 그들을 도와주고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가 리조의 정식 회의에서  두 군수가 범한 과오를 선처하자고 제출하면 대간들이 또 들고일어나 조정안이 무척 시끄러울 판이니 이를 어찌한담? 어느날 리항복은 대신들과 이 일을 조정의 정식회의에 내놓지 않고 휴식시간에  밖에서 한담을 하는 기회를 빌어 자기의 뜻을 은근히 내비치면서 다른 관원들의 동의를 얻어보려고 하였다. 이때 조정의 소환을 받고 대궐에 와 있으면서 조정의 처분을 기다리는 초계군수가 비맞은 수탉같이 머리를 땅에 떨구고 뜰로 지나가고있었다. “저사람이 김제군수 아무개가 아닌가?” “그러하옵니다.대감.” “여보게,이  사람, 여기로 좀 오게.”  리항복대감의 부름에 김제군수는 몹시 불쾌하였으나 례절을 지키느라 걸어와서 공손히 절을 올리고나서 물었다. “ 대감께서 하관을 부르셨습니까?” “그렇다네. 지금 자네일을 가지고 상의하려는 중이네.한번 자그마한 벼슬아치의 위풍을 자랑하려다가 무슨 꼴이 되였나? 남들은 그보다 더한 짓을 하고도 걸리지 않았는데 자넨 참 재수가 되게 없구먼.내가 보기엔 자네가 저지른 일이 철직까지 받아야 할 큰죄는 아닐세만 사람마다 보는 눈이 다 다를테니 모를 일일세. 나는 자네와 아무런 친인척관계도 없고 지어 안면조차 없는 사람이니 내가 자넬 두둔한다고 누가 날 바보라고 놀리지야 않겠지? 안그런가? 이번 한고비 넘겼다고 안심을랑 말고 매사에 각별히 신중하게.허허허.” 리항복이 히물히물 웃으며 이렇게 말하자 좌중에 있던 사람들은 배를 끌어안고 웃음통을 터뜨렸다.그들은 오성대감이 김제군수를 훈계하는척 하면서 일부러 그들이 들으라고 연극을 꾸민것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있었다.  “대감의 해학에 등골을 뺐습니다.” “하도 우스워서 배가 아파 물러나겠습니다.” “대감께서 그만큼 교육했으면 됐습니다. 처벌은 무슨 처벌을 합니까?” 모였던 신하들이 두 군수를 파면시키지 말자는 리판서의 제의를 따르고 하나둘 물러나자 두 군수에 대한 처벌문제는 회의를 정식으로 열기전에 풀린 셈이였다. 한가지 골치아픈 일이 쉽사리 해결되자 리항복의 마음도 한결 후련했다.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의 머리속에는 한수의 시조가 엮어졌다.그는 걸어가면서 소리높이 시조를 읊었다. 선(善)으로 패(败)한 일 보며 악(恶)으로 이룬 일 본다. 이 두 즈음에 취사(取舍) 아니 명백하냐 평생에 악된 일 아니하면 자연위선(自然为善)하리라.   이 소식을 들은 사간원의 그 젊은 선비도 자세히 생각해보니 자신의 처사가 너무 경솔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상소문을 써보낸것을 후회하고 더는 이런 일을 들먹거리지 않았다.
115    절세기인 정치가 리항복 33) 잠방이를 입은 장군 댓글:  조회:1109  추천:0  2015-12-24
  33.잠방이를 입은 장군 을미년(乙未年:1595년)에 리항복은 선조왕의 교지를 받고 리조판서로 되여 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지의금부사(弘文馆大提学,艺文馆大提学,知义禁府事) 등 직무를 다 겸임하였다. 이해 여름의 어느날 아침, 리항복은 입궐하러 가는 길에 처가댁에 잠시 들렸다. 장인인 도원수 권률도 조회에 나갈 준비를 하느라 바빴다.권률장군은 속에 걸칠 만한 옷이 없어서 이것저것 뒤지느라 한창이였다.  리항복은 곁에 서서 그것을 보기있기가 참으로 민망했다. “장인어른, 오늘은 날씨가 아주 무더운데 조회에 의관속대를 다 갖춰 입고 가시지 말고 베 잠방이우에 융복만 걸치고 가십시오.” “그래도 될가?” “누가 옷을 벗고 검사를 한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융마생활에 습관된 권률장군은 고지식하게 사위의 말에 좇아 집안에서 입는 베 잠방이우에다 융복만 걸치고 대궐에 가서 조회에 참석했다. 물론 리항복은 리조판서의 조복을 제대로 차려입고 입궐했었다. 이날은 날씨가 유달리 무더워서 임금이 조회를 하는데 땀이 방울방울 솟아나서 잔등을 푹 적시였다. 그 광경을 본 리항복이 일어나서 임금에게 주청했다. “전하, 오늘은 날씨가 유달리 무더우니 숨이 막혀서 이대로 조회를 열기 어렵습니다. 모두들  거치장스러운 관복을 시원하게  벗어버리고 조회를 계속하는것이 어떠하오리까?” “그거 참 좋은 제의로군. 외부에서 온 사람이 없으니 모두 융복을 벗고 조회를 계속합시다.” 선조왕이 너그럽게 윤허하자 조회에 참가한 대신들은 얼싸 좋다 하고 저마다 서둘러  관복을 벗었다. 그런데 좌석에 있는 권률장군만 난처하지 않을수 없었다. 오늘 아침 그는 사위의 권고를 듣고 관복안에 짧은 베 잠방이만 걸치고 나왔는데 맹랑하게도 사위되는 사람이 임금한테  관복을 벗고 조회를 계속하자고 주청했으니 참으로 울도웃도 못할 사정이였다.권률장군은 무척 난감했지만 임금의 명이라 관복을 벗지 않을수 없었다. 권률장군이 몸에 베 잠방이만 걸친것을 본 선조왕은 흠칫 놀랐다. “ 경은 댁에 긴 속옷이 없으시오? 어찌하여 속에 베 잠방이만 입으셨소?” 임금의 물음에 대답할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쩔쩔매는 장인을 보던 리항복이 일어서서 임금한테 솔직히 아뢰였다. “전하, 도원수께서는 살림살이가 너무 구차해서 여름에는 언제나 짧은 속옷만 입고 계십니다.심히 부끄럽습니다.” “이번 임진왜란에서 혁혁한 전공을 이룬 도원수께서 잠방이만 입고 조회에 참석하신줄도 모른것은  과인의 불찰이오..백성들이 이 정황을 안다면 과인을 나무람하겠으니 어디 될일이오?” 선조왕은 즉시 내시를 불러 좋은 속옷 한벌을 가져오게 한 뒤 권률장군에게 하사하였다. 리항복은 아직 전쟁이 완전히 끝나지 않아 백성들이 도탄속에 허덕이는데 몇몇 대신들이 사치를 부리느라 모시옷이나 명나라에서 수입해온 비단옷을 입고 으시대는것을 보고 무척 못마땅해하였다. 그는 전쟁마당에서 목숨을 내걸고 적들과 싸워  대공을 수없이 세우고도 항상 백성들같이 어렵게 생활하는 장인 권률장군의 검소함을 임금에게 보여주고 일부 대신들이 사치를 부리는 꼴을 임금더러 직접 보게 하려고 일부러 앾은 꾀를 써서 장인을 일시 난처하게 만들었었다.  리항복은 정치를 하면서 시를 멀리하였다. 그는 시인을 광대와 풀벌레로 비유하며 시를 짓지 않고는 못배기는 자신을 억제하느라 손가락을 깨물며 시를 말하기를 꺼려하였다.그러나 시를 만나기만 하면 즐거워서 마치 술을 즐기다 병이나서 억지로 술을 절제하는 사람이 이내 해장술을 마시려드는 꼴이라고 말하였다.  리항복은 확실히 타고난 시인이였다.하지만 그는 문장을 잘써서 립신양명한 문인이였다.수십편의 묘지명과 시집을 보면 그의 학문과 시재가 얼마나 놀라운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그가 쓴 시는 다른 시인들과 달리 재치와 기지가 넘친다.허나 정치에 몸담은 그는 평소에 시를 가까이하여 정력을 분산시킬까봐 시를 두려워하고 피하였다. 아들의 생일날, 백사는 자식들이 부어주는 술을 얼근히 마시고나니 시상이 떠올랐다.비록 째진 가난속에 허덕이지만 마음이 깨끗하고 정직한 애들을 보면  대견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얘들아, 오늘 내 시한수를 읊을테니 들어보아라.” 백사는 장난삼아 즉석에서 아래와 같이  시를 지어 읊었다.             부자집은 딸을 낳아 온갖 시름 모여들지만              가난뱅이는 아들 낳아 만사가 넉넉하네.             부자는 날마다 천냥 돈 들여 사위대접하느라 고생하지만              나는 책 한권 아들에게 읽히면 그만이지.                나는 지금 아들만 있을뿐 딸이 없는데              큰애는 글을 알고 작은애는 례절을 아네              뉘집에서 딸길러 효부(孝妇)를 만들어놓을지              내 아들 보내 천년손님 만들어야지.                집 지키고 취한 몸 부축할 일 걱정없으니              장가 보내고 늘그막에 락이나 누리련다.   “아버님, 즉석에서 명시를 지으셨네요.. 아버님의 깊은 뜻 명심하겠습니다.” 맏아들 성남이가 말하자 둘째아들 정남이도 거들었다. “아버님께선 입만 여시면 명시가 나오시네요. 우리는 발벗고도 따라가지 못하겠네요.” “그러니 학문이란 아무리 배워도 끝이 없다는게 아니냐?” 좁은 방안에선 웃음소리가 차고넘치였다. 리항복이 아들을 부자집 규수에게 시집을 보내겠다고 한것은 물론 그의 진심이 아니다. 그는 부패하고 탐욕스런 관리들을 비꼬면서 청백한 자신을 위로하고 자식들을 격려하기 위해 약간의 익살을 부린것이였다.    
114    절세기인 정치가 리항복 32)피치못한 거짓말 댓글:  조회:1047  추천:1  2015-12-24
 32.피치못할 거짓말 11월이 들자 명나라의 사신이 칙서를 가지고 조선에 왔다. 리항복은 명나라 사신의 청을 받고 원접사로 되여 사신을 맞이하였다.   명나라 황제의 칙서에 왕세자로 하여금 호조판서와 병조판서를 대동하고 전라도,경상도지방으로 내려가 분조(分朝)를 하고 장기적으로 그곳에 머물면서 남방의 정치,경제,군사를 총 지휘하라고 적혀있었다.당시 조선국의 사정에서 국왕이 서울에 있으면서 아직까지 전쟁이 끝나지 않은 남방지역의 백성들을 다스리기가 어려운 상황이였다. 명나라 황제의 칙서의 내용은 옳았고 설사 그르다 해도 조선국의 처지에서 황제의 칙서는 거역할수 없는 어명이였다. 리항복은 당시 병조판서직을 담당하고있었기때문에 호조판서와 함께 왕세자인 광해군을 모시고 남방으로 떠나게 되였다. 선조왕이 남방에서 진행하고있는 전쟁까지 지휘할 정력이 없었기때문에 남방에 림시로 하나의 조정을 꾸린 셈이였다. 갑오(甲午:1594)년 봄에 충청도에서 송유진(宋儒真)의 반란이 일어났다.송유진은 임진왜란이후의 혼란으로 사처에 흩어졌던 병졸들을 끌어모으고 또 1594년의 대기근으로하여 굶주리고 있는 백성들을 거느리고 천안,직산등지에 출몰하며 도적질을 일삼아왔다.그들의 무리가 날로 장대해져 2천여명에 이르자 송유진의 반란을 일으키려는 야심은 나날이 커졌다. 그는 서울의 수비가 허술한 틈을 타서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의병대장이라 칭하고 자기들의 괴수는 리산겸이라고 사칭함으로써 조정에서 리산겸을 잡아죽이도록 만들었다.그들은 오원종,홍근 등과 함께 아산, 편택의 병기를 략탈하여 정월보름날 서울을 쳐들어가기로 계획했는데 중도에 비밀이 탄로가 났다. 송유진은 직산에서 부하 십여명과 함께 관군에 체포되여 서울에 압송되여 온 뒤 선조왕의 친국을 받고 사형당하였다. 송유진의 모반사건이 발생한 뒤 남방에 따라온 여러 신하들은 무엇보다 서울의 안위를 돌봐야 한다는 명의로 분조를 취소하고 세자를 받들고 서울에 올라갈것을 주장하였다. 리항복은 신하들이 국사는 뒤전에 밀어놓고 자신의 안일만 생각하고 적들과 멀리 떨어진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갈것을 주장하는 눈치를 대뜸 알아차렸다.그는 즉시 선조임금에게 글을 써올려 세자가 분조를 하여 전라도와 경상도의 전장을 직접 지휘하니 관군과 의병들의 사기가 높아진 실례를 들어 세자가 전방을 떠나 서울로 올라가 환궁하는것은 옳은 방도가 아니라고 론박했다.광해군도 리항복의 주장이 십분 정확함을 확인하고 남방에 남아서 분조정치를 견지할것을 주장하였다。 여름철이 다가오자 반갑잖은 비가 시도때도 없이 구질구질 내렸다.생활하는데는 어설펐지만 둔취한 왜적을 습격하는데는 편리한 점이 많았다. 창문을 열고 주룩주룩 쏟아져내리는 장마비를 바라보는 리항복의 머리속에서 한수의 시가 무르익었다. 그는 대뜸 필을 날려 시 한수를 써내려갔다.               장마     장마비 열흘동안 주야로 계속되니     저녁뜰의 구름안개 너무나 자욱하다.     침상마다 새는 비에 피하는이 어찌 원망하고     가지가지 시름에 남은 백발 몇오리냐?     모래는 보물에 밀려 부엌까지 밀려오고     개구리는 놀란 개따라 담장에 올라 우네.     종성전투에서 흘린 피 바다같은데     하늘도 오랑캐가 미워 병사들 목역시키네.                                苦雨 苦雨连旬夜徹明,  晓庭云物太纵橫.  床床避漏人何限,  种种緣愁髮几莖. 沙捲洑流穿竈入,  蛙随惊犬上墙鸣. 鍾城战血今如海,  天厌頑胡爲洗兵.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국토에 남아있는 왜적을 기본상 평정하였다.그렇게도 갈망하던 평화가 멀리서 손짓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광해군이 홍주(洪州)에 있을 때의 일이다.세자를 시중하던 한 신하가 보녕(宝宁)은 경치가 매우 좋은 곳이니 조정을 보녕으로 옮기는것이 좋지 않냐고 꼬드겼다.그 신하의 달콤한 말에 광해군은 귀가 솔깃해졌다. 광해군은 군정을 총책임진 리항복을 불러서 보녕의 수영(水营)이 조정을 안치하는데 마땅한 지방인가 잘 알아보고오라고 분부했다. 세자의 명를 거역할수가 없어서  보녕에 가서 수영을 시찰하고 돌아온 리항복은 세자를 찾아가서 정황을 아뢰였다. “보녕은 신이 평소에 듣던 말과는 달리 한개 자그마한 시골에 불과합니다. 그곳은 터가 좁아서 세자께서 조정을 꾸리고 공무를 처리할만한  장소가 못됩니다.” “보녕의 정황이 그러하오? 병판의 생각이 그러하다면 조정을 보녕의 수영으로 옮기지 맙시다.” 오성대감을 누구보다 믿는 세자 광해군은 그 뒤 보녕에 대해서는 다시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런데 조정에 보녕의 지리상황에 매우 익숙한 신하가 하나있었다.그는 리항복이 보녕은 일개 보잘것없는 시골이라고 말한데 대해 도무지 리해가 가지 않았다.어느 날 그는 리항복을 만나자 마음속에 풀지 못한 수수께끼를 슬그머니 내놓았다. “병판대감,보녕의 경치가 수려하기로 소문난 건 세상사람들이 다 아는 일인데 병판께선 왜 세자한테 이실직고하지 않으셨습니까?” “영보정(永保亭)의 좋은 경치가 호중(湖中:충청도)의 으뜸인것이야 내가 어이 모르겠나?우리 세자는 장차 금상의 뒤를 이어 이 나라의 지존에 오르실 존귀한 분입니다. 그분을 지금부터 경치좋은 곳으로 모셔가서 장기적으로 향락을 누리시게 한다면 우리가 저하를 방탕한 마음으로 인도하게 될까봐 념려했기 때문이였소. 나의 이 말이 세자의 귀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각별히 조심하십시오.” “대감께선 참으로 높은 곳에 올라 멀리를 내다보십니다.하관의 생각이 너무 짧았습니다.” 리항복의 설명을 듣고난 그 신하는 병판의 원대한 식견에 크게 감복하면서 자신의 좁은 소견을 부끄러워했다.
113    절세기인 정치가 리항복31)백성들이 지어준 집 댓글:  조회:1218  추천:0  2015-12-24
31.백성들이 지어준 집  리항복은 어가가 신속히 서울로 환궁할것을 강력히 청하였다.모래알같이 흩어진 민심을 재빨리 수습하고 관군과 의병들의 사기를 북돋우어주려면 국왕과 조정이 서울에 들어와서 정무와 군무를 봐야하기 때문이였다.  리항복의 주청을 받아들인 선조왕은 불에 탄 서울의 궁전을 대충 수건한 뒤 시월에 환궁하였다. 리항복이 서울에 돌아와서 살던 집을 찾아가보니 옛집은 불에 타고 담장이 허물어져 폐허로 되어  말이 아니였다.그는 공무를 보는 외에 밤에  동분서주하면서 허물어진 옛집을 재건을 하려했지만 주머니사정이 허락하지 않아서 겨우 사랑방과 침실 하나에 행랑채만  지어놓고 그럭저럭 살림을 시작하였다. 어느날 조정에서는 임진왜란기간에 어가를 호위하는데 공을 세운 호성공신(护圣功臣)을 책봉하게 되였다. 선조왕은 리항복을 원훈으로 봉하는데 누구도 이의가 없을것이라 생각하고 자기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오성대군 리항복을 원훈(元勋:일등공신)으로 봉하는것이 어떠하오?”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임금을 호위하는데 누구보다 앞장에 섰고 어가를 의주로 옮기고 명나라의 원조를 받도록 만들고  수많은 전장에서 기이한 계책을 많이 내놓아 나라에 닥친 위기를 지혜롭게 극복하게 한 리항복의 공은 어느 누구도 비교할수가 없는 일이였다.  “천만지당한 말씀입니다.전하.오성은 호성공신 원훈으로 될 자격이 있습니다.” 좌중의 신하들은 이구동성으로 찬성했다. 조회가 끝날 무렵 선조왕은 특별한 행사를 선포했다. “오성대감이 이번 란리에 나라와 나를 위해 거룩한 공을 수없이 세웠는데 임금인 내가 오성대감의 댁을 방문하여 위로하는것이 임금이 할 도리라 근일내에 적당한 날을 택해 댁을 방문갈가 하오.”  “천만 지당한 말씀이옵니다.” 대신들은 리항복의 행운을 부러워하며 이구동성으로 찬성하였다. 그러나 선조왕의 말을 듣고난 리항복은 난감하여 어쩔줄을 몰랐다. 그는 급히 룡상앞에 나가 부복하고 임금에게 주청하였다. “ 전하, 실로 황송하오이다.상감께서 신의 댁에 대한 하방은 취소하여 주십소서.” 일반 대신들은 임금이 하방하는것을 평생에 한번 있을가 말가한 영광으로 알고 꿈속에도 바라마지않는데 리항복은 왜 나의 방문을 두려워하는것일가? 오리무중에 빠진 선조왕은 의혹을 풀길이 없어서 리항복을 내려보며 자애롭게 물었다. “혹시 리공의 댁에 무슨 피치 못할 사연이 있는가?” “전하, 심히 부끄러우나 이실직고하겠나이다.신의 집에 대가를 봉영할 외사가 한간도 없고 또 창졸간에 외사를 지을 사정도 못되옵기에 전하의 어가를 맞이할 형편이 못되옵니다.” “그러시오? 과인은 오성대감이 그렇게 어렵게 지내는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소. 그럼 오성댁에 대한 방문은 이후로 미루겠소.” 선조왕은 난감한 기색을 보이면서 오성댁에 대한 방문날을 무작정 뒤로 미루었다. 오성대감께서 임금의 어가를 맞이할 외사가 없어서 하방을 사절했다는 소문은 어느새 바람결같이 민간에 쫙 퍼졌다. 린근의 백성들은 이 소식을 듣고 서로 모여 의논하였다. 오성대감이 청백리란 말은 많이 들어왔지만 외사 한간 없이 지내는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우리 대감께서 그렇게 어렵게 지내는줄 정말 몰랐네.” “우리의 대감이신데 우리가 도와줍시다.” 린근에 사는 백성들은 합심하여 오성대감에게 외사를 한채 지어주자고 약속하였다. 돈이 있는 사람은 돈을 내고 재목이 있는 사람은 재목을 실어오고 어떤 사람은 돌과 흙을 실어오고 어떤 사람은 목수와 기와장이를 데려왔다.  모두들 맘에 내켜서 하는 일이라 일은 할수록 성수가 났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다그친 덕분에 사흘만에 집 원채가 다 일어났다.그들은 벽이 채 마르기도 전에 서둘러서 벽에 도배를 해놓고 장판까지 다 해놓았다.수십년간 공직에 있으면서 외사 한채 세울 돈도 마련하지 못한 리항복의 거룩한 청빈생활이 백성들의 마음을  깊이깊이 감동시켰기 때문이였다.
112    절세기인 정치가 리항복 30) 사람의 속을 꿰뚜르는 혜안 댓글:  조회:1578  추천:0  2015-12-24
 30.사람속을 꿰뚜르는 혜안 리항복이 리여송이 반사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임금에게 전하자 선조왕은 크게 기뻐하며 친필로 라는 제사를 써주었다. 이튿날 오전에 리여송은 선조왕과 바둑시합을 해보겠다고 말하였다.리항복이 생각해보니 참으로 난감했다. 선조왕이 비록 바둑은 즐기지만 기실 실력은 수준급이 아니였다. 그런데 바둑의 능수인 리여송을 당해내지 못하는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였다.대방의 요구를 거절한다는것은 실례인지라 라항복은 선조대왕에게 알리겠다고 말하였다. 리여송의 장막을 나온 리항복은 급히 류성룡을 찾아갔다. 수준이 국수급이고 바둑을 각별히 즐기는 류성룡은 리여송을 얼마든지 이길수 있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였다.두사람은 계교를 연구한 뒤 선조왕을 찾아갔다. “전하,지금 도독 리여송이 전장터에 나가기 전에 전하와 바둑을 두고싶다고 하옵니다.어쩧게 하겠습니까?” 리항복이 리여송의 의도를 말하자 선조왕이 무척 난감한 기색을 보이며 말하였다. “경들도 알다싶이 과인은 평소에 바둑을 잘 두지 않으니 이 일을 어떻게 하리오?” “전하,과히 근심할바는 아니옵니다.오늘 날씨가 화창하니 정원에서 바둑을 두십시오.신이 힘껏 도와드리겠나이다.” 류성룡이 여차여차하면 된다고 아뢰자 선조왕의 얼굴에 웃음기가 돌았다. 리여송이 찾아오자 선조왕은 리여송과 함께 정원에서 바둑을 두게 되였다.류성룡은 작은 구멍이 있는 양산을 들었는데 해볕이 작은 구멍을 통해 바둑판을 비추었다. 리여송이 한수를 쓰고나면 류성룡은 양산을 움직여서 양산구멍으로 들어온 빛이 선조왕이 바둑알을 놓을 자리를 비추게 하였다.류성룡의 기예를 잘 아는 선조왕은 머리를 짤 필요없이 햇빛이 바친 자리에 바둑알을 놓았는데 그것을 리여송은 알아차릴 리가 없었다.  바둑알을 다 쓰고나서 자리를 세여보니 두사람이 차지한 땅은 완전히 같았다. 기실 류성룡의 높은 바둑수준으로는 리여송을 얼마든지 이길수 있었지만 그는 “화위귀(和为贵)라는 원칙을 지키고 대방을 이기려고 하지 않았었다. 리여송은 선조왕과의 내기에서 무승부를 거두자 기분이 각별히 좋아져서 즉시 대오를 정돈하였다.그는  출발하기 직전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턱대고 리항복의 앞에 주먹을 불쑥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리항복은 도독이 어느때든 작전지도를 달라고 할것이라  짐작하고 작전지도를 줄곳 품에 지니고다녔다.리여송이 주먹을 불쑥 내밀자 리항복은 그가 지도를 찾는다는것을 대뜸 알아차리고 소매안에 간직하고있던 지도말이를 꺼내서 리여송의 앞에 내밀었던것이였다. “리공은 참 남의 속을 귀신같이  아는구려.조선국에 리공과 같이 고명한 대신이 있는데 세상에 무엇이 두렵겠소?” 작전지도를 펼쳐보며 칭찬을 금치 못하던 리여송은 대오를 지휘하여 호호탕탕하게 전방으로 나갔다. 리여송의 군기가 매우 엄한것을 본 리항복은 선조왕을 보고 아뢰였다. “리여송의 군대는 군기가 엄해 한차례 싸움에서 큰 공을 세울수 있습니다. 그런데 막하에 있는 정동지(郑同知)와 조지현(赵知县)란 두 부하가 큰 애물꺼리입니다. 이 두사람은 품성이 성실한데가 추호도 없고 간교하기가 그지없는데 장차 우리나라의 대사를 그르칠 놈들이 바로 그 두놈입니다.” 계사(1593)년 정월에 리여송은 대군을 이끌고 조선군과 합동하여 평양성을 포위하고 화포를 련발하였다. 당시 명나라 군사들의 화포는 최신식무기였다. 평양성안에 주둔하고있던 코시니와 왜놈 장병들은 끊임없는 포소리에 놀라 안절부절 못하다가 결국 성을 비워놓고 도망치고말았다. 평양성을 손쉽게 탈환한 리여송은 승승장구 남하하여 도망가는 적들을 추격하였다. 그해 12월 25일, 그들은 벽계관(碧蹄馆)에 이르렀다.그러나 리여송이 적을 너무 경시한데다가 왜장 코바야가와(小早川隆景),티치바나(立花宗茂) 등이  결사코 반격하는바람에 그들은 적들에게  대패하고말았다  전투상황이 아군에게 불리하게 되자 리여송과 명국군의 사기는 크게 좌절되였다.리여송은 대군을 이끌고 개성으로 후퇴하였다가 다시 평양으로 돌아와서 주둔하였다. 이때 적들의 기세에 눌리워 벌벌 떨던 정동지와 조지현이 왜적들과 화해를 하자고 리여송을 꼬드겼다. 부하들의 끈질긴 꼬드김에 넘어간 리여송은 왜적과 싸우기를 단념하고 화의하는데 동의하였다. 그는 심유경에게 명나라군대의 담판대표를 맡겨 코니시한테 보내여 화의를 계속하였다. 임진(1592)년 7월에 리순신장군이 이끄는 수군이 한산도에서 대첩을 거두어 아군이 제해권을 장악하여 왜적들의 수송로가 끊기고 전국 각지에서 의병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적들을 습격하는데가 명나라군사들과 관군이 쳐들어옴에따라 왜적들도 더는 뻗쳐내기 어려웠다. 거기다 평양성이 수복됨과 아울러 권률장군이 행주산성에서 대첩을 거두자 기세가 꺾인  일본군들은 서울을 버리고  남으로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29.리여송의 점심상과 룡의 울음소리 이해 7월에 명나라의 료동부총병으로 있던 조승훈(祖承訓)이 조선을 지원하는 선발대로 사유(史儒) 등과 함께 5천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왔고 8월에는 심유경(沈惟敬)이 유격장군으로 임명되여 조선으로 왔다. 명나라 장군들을 영접하러 갔던 리항복은 조승훈과 전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크게 실망하였다.조승훈이란 사람은 리항복이 바라던 바와는 너무 달리 위인이 교만방자하고 경솔한데다가  지략이 너무없었다.리항복은 이런 사람이 지휘하는 군사는 백번 싸워서 구십아홉번 패배할것이라 생각하고 크게 실망하였다. 리항복의 짐작은 과연 조금도 빗나가지 않았다. 조승훈은 평양성을 당장에 탈환하겠다고 호언장담을 하고나서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을 향해 진격했다. 그런데 적정을 잘 살피지 않고 급행군을 하던 그들은 중도에서 왜적의 기습을 당해 싸움 한번 해보지 못하고 크게 패하였다.동행했던 사유가 적의 조총에 맞아 맥없이 죽자 질겁을 한 조승훈은 겨우겨우 목숨을 건져 패잔병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료동으로 도망쳤다.그는 료동으로 도망간 뒤 자신의 체면을 내세우기 위해 조선국이 암암리에 왜놈들을 돕고있다는 요언을 퍼뜨리면서 조선국의 조정을 무함하였다. 명나라에서 조선에 대한 태도가 변할것을 우려한 리항복은 다시 임금에게 주청하여 사신을 북경에 보내 명나라에서 대군을 파견할것을 재촉하도록 하였다. 이해 12월에 제독 리여송(李如松)이 명나라 황제의 명을 받고 4만 3천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왔다. 토번과의 전쟁에서 여러차례 공을 세운 리여송은 토번을 멸하지 않고 조선으로 나오는것이 마음에 그리 내키지 않는지라 압록강을 건넌 뒤 바로 조선왕이 거처하고있는 의주로 떠나지 않고 강변에 류진하고있었다. 접반사를 맡은 리항복은 리덕형, 류성룡과 함께  강변에 마중을 나갔었다.그들은 리여송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하고나서 “도독께서 우리 조선을 구하려고 만리원정을 하셨으니 감격무려로소이다.”하고 거듭거듭 치하하였다. 점심때가 되여오자 리여송이 접반사를 맡은 리항복을 불러서 점심상을 차릴것을 분부했다. “오늘은 대군이 귀국땅에 들어온 첫날이니 점심상을 각별히 마련해야되겠소이다. 반드시 황하의 물로 밥을 짓고 룡의 간으로 회를 치고 돌미간적으로 안주하도록 해야겠소이다.” 리항복이 그 말을 들어보니 리여송이 분명히 무슨 트집을 잡으려는것이였다. 그렇다고 그와 맞서 시비를 가릴 처지도 못되였다. 그는 류성룡과 리덕형을 불러놓고 함께  대책을 의논했다. “황하수가 여기서 수천리 떨어져있는데 어떻게 구해다 오늘 점심밥을 지으란 말이오?” 리덕형이 너무도 기가차서 말하자 서애대감 류성룡이 대답했다. “황하수를 구하는 일은 어렵지 않네. 고서에 압록강의 원류가 황하수와 통했다 적혀있으니 저 압록강의 물을 길어다가 밥을 지으면 리여송도 할말이 없지 않겠소?그런데 미륵간적(弥勒肝炙)을 가져오라니 인간세상에 그게 어디 있나 말일세.” “미륵간적을 구하는건 어렵잖소. 석불적(石佛炙)이 바로 조포일세.두부지짐을 상에 올려놓으면 리도독이 딴말은 하지 못하겠지만 룡의 간을 내놓으라고 억지를 부리니  참으로 황당하구려.” 리항복의 푸념에 리덕형이 대답했다. “룡의 간은 내가 구해오리다.” “자네가 룡의 간을 구해오겠다구?” 리항복은 친구의 말에 둔이 휘둥구레졌다. 리덕형은 그길로 급히 강변에 나가더니 백사장에 꿇어앉아서 하늘을 향해 세번 절을 하고 경문을 읽고나서 빌었다. “소소(炤炤)하신 명천은 굽어살피소서. 조선국의 위태함이 조석에 달려있고 억조창생의 목숨이 시각을 다투오니 명명하신 명천은 이 사정을 하감하시고 룡국에 분부하여 룡 한마리를 불러주옵소서.룡의 간을 명나라의 제독 리여송의 식상에 올려놓아 칠성판에 놓인 우리 조선국을 구해볼가 하나이다. 룡의 간을 얻지 못하면 우리나라는 국파군망하올지니 이 아니 원통하리오.”  말을 마치고 앙천통곡을 하니 그 정상이 하늘에 사무쳐서 룡왕을 감동시켰는지 갑자기 룡 한마리가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강변에 내려 백사장에 누웠다.  리항복이 급히 달려가서 룡에게 경서를 읽어주니 룡이 고개를 끄덕이기에 즉시 룡의  배를 갈라 간을 내여 회를 쳐서 리여송의 식상에 올려놓았다. 리여송은 식상에 놓인 룡의 간을 보고 짐짓 놀랐으나 내색을 하지 않고 다시 트집을 부렸다. “룡의 간을 먹으려면 소상반죽(潇湘斑竹:호남성 소수, 반수에서 나는 무늬있는 대나무)으로 만든 젓가락으로 집는것이 제법인데 그걸 장만했소이까?”  이럴줄을 알고 옆에 서서 기다리던 서애대감 류성룡이 행건속에 간직한 무늬있는 참대젓가락을 꺼내 리여송에게 공손히 올렸다. “ 참으로 대단하오. 룡의 간은 어떻게 구했으며 소상반죽은 어이 알았는고? 조선 대신들의 충성은 하늘에 사무치고 지혜 또한 천하에 으뜸이오.” 조선 신하들의 재주와 충성에 놀란 리여송은 세사람과 주안상을 같이하고 맛나게 점심을 들었다. 식사를 마친 리여송은 대오를 정돈한 뒤 위무당당하게 의주로 향하였다. 의주에 당도한 리여송은 자신이 조선의 국왕을 배알하려 가지 않고 리항복더러 조선왕을 막사에 모셔오라고 분부하였다. 리항복은 리여송이 조선왕을 릉멸하는 태도를 보니 울화가 치밀어올랐지만 칼날을 잡은 사람이 칼자루를 쥔 사람에게 이길수 없는 법이라 억울함을 간신히 참고 선조왕을 막사로 모셔왔다. 선조왕은 모욕을 당한감이 들어 무척 괘씸했지만 내색을 하지 않고 장막으로 와서 리여송의 손을 잡고 원로의 로고를 위로하고 적잖은 치하의 말을  해주고 돌아갔다. 조선국의 임금이 리여송을 찾아와 만나줬으니 모든 일이 다 순리롭게 해결되였는가 싶었는데 그렇지 않았다. 선조왕이 궁으로 돌아간 뒤 리여송은 리항복을 보고 새로운 트집을 잡았다. “내가 귀국 국왕의 용모를 잠간 보니 대왕의 기상이 없더이다. 내가 목숨을 걸고 구원을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겠소이다. 래일 나는 본국으로 돌아가려 하오. 당신네 국왕에게 알려주시오.” 참으로 마늘 하늘에서 벼락이 내려친것이나 다름없었다.리항복은 리여송에게 좋은 말로  달래여도 아무런 소용이 없자  선조왕을 찾아가지 않을수 없었다.그는 리여송이 한 말을 차마 입밖에 내놓을수 없어서 오래동안 망설이다가 부득불 임금한테 입을 열었다.  선조왕은 리항복의 말을 듣고나서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고나서  말했다. “천성으로 생긴 얼굴인데 이제 과인이 어떻게 고친단 말이요?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로 되였으니 이 일을 어찌해야겠나?” “전하, 과히 상심하지 마십시오.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길이 있다지 않습니까? 소신에게 한가지 작은 계교가 있나이다. 전하께서 한번 이리이리 해보시면 리여송은 결코 반사하지 않을것입니다.” 리항복이 리여송의 막사로 돌아가자 선조왕은 즉시 대궐문을 열어놓고 큰 독안에 들어간 뒤 하늘이 조선국을 구해달라며 목청껏 울었다. 독에 울려 나오는 울음소리는  얼마나 우렁찬지 주위의 산천까지 진동하였다. 막사에 있던 리여송은 갑자기 대궐에서 울려나오는 우렁찬 곡성을 듣고 크게 놀라 리항복에게 물었다. “이건 어디서 누가 우는 소리요?” “도독께서 반사하신다는 말씀을 들으신 우리국왕께서 국사를 생각하고 너무 상심하신 끝에 저렇게 통곡을 하고계십니다.” “그렇소? 내가 잠간 국왕의 안면을 보니 왕자의 기상이 아니였는데 국왕의 울음소리는 실로 동해 철룡의 목소리구려.내가 귀국 국왕의 외모만 얼핏 보았지 깊은 속을 볼줄 몰라서 하마트면 큰 실수를 저지를뻔 했소이다. 내가 반사하지 않는다는것을 귀국의 국왕에게 알려주시오.” 리여송은 조선국에 남아서 왜적을 칠 뜻을 밝히자 리항복도 한시름을 놓았다.
110    절세기인 정치가 리항복 28) 말하는 송장 댓글:  조회:1507  추천:0  2015-12-24
 28. 말하는 송장 며칠뒤 남방에서 전라도 순찰사로 파견되여갔던 권률장군한테서 장계가 올라왔다. 권률장군은 선조 15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례조좌랑,호조정랑 등 벼슬을 지내였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로 임명되였는데 군병을 모집하여 방어사 곽영의 지휘를 받았었다. 룡인싸움에서 왜적에게 패하자 그는 다시 광주에 가서 천여명의 군사를 모집하여 남원싸움에서 적을 대파하고 라주목사를 제수받았는데 부임하기전에 전라도 순찰사로 임명되였다.그는 전주에서 병사 만여명을 거느리고 수원 독산(秃山)에 진을 치고 적들의 서진(西进)을 막고있다는 것이였다. “권률장군은 참으로 대단한 충신이오.” 선조왕은 장계를 읽고나서 기쁨을 금하지 못하였다.그는 내시를 시켜 권률장군에게 어검을 하사하게 한 뒤 그더러 군률을 더욱 엄정히 다스릴것을 당부하였다. 이 반가운 소식을 가져온 병사는 나이가 겨우 십칠세밖에 되지 않는 정충신이라는 젊은이였다.정충신은 고려때의 무장 정지의 후손으로서 권률이 군사를 모집하자 응하여 참군한 뒤 권률장군의 휘하에서 용감하게 싸워 많은 적의 머리를 배내여 권률장군의 두터운 신임과 사랑을 받는 군인이였다. 리항복은 도처에 왜적들이 욱실거리는데 천리 먼길을 홀로 적의 이목을 피하면서 지혜롭게 조정을 찾아온 이 젊은이의 용기와 지혜에 크게 놀랐다. 선조왕도 정충신이 나라의 유용한 인재감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고 그를 리항복에게 맡기면서 반드시 훌륭한 인재로 배양하라고 당부하였다. 리항복은 자기 장인이신 권률장군의 휘하에서 용맹을 떨친 청년군인 정충신을 친동생같이 사랑하면서 그를 문무가 겸전한 걸출한 인재로 배양하기 위해 로심초사하였다.그는 낮에는 정충신에게 병법과 무예를 배워주고 밤이면 치국의 도리를 일깨워주었다.남달리 총명하고 향학열이 강한 정충신은 무엇이든 배워주면 그 즉시 익혀내군하였다.                        정충신의 영정 어느날 리항복은 정충신의 담력을 시험해보려고 그를 관청에 불러놓고 분부했다. “아무아무곳에 내가 잘아는 사람이 있는데 전가족이 몰살을 당했다네.자네가 오늘밤에 그곳에 가서 시체를 렴습해주게. 날이 밝으면 내가 사람을 보내서 매장하려 고하네.렴습할 때 쓸 상포는 곳간에 있으니 몇필을 가져가게.” “그리하겠습니다.대감.” 정충신은 리항복에게 인사를 하고 나온 뒤 바로 곳간에 가서 렴습에 쓸 상포를 몇필 타가지고 밤중에 지정한 곳으로 갔다.그가 시체가 있는 집의 문을 여니 송장이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그는 관솔에다 불을 붙여놓고 희미한 불빛을 빌어 시체를 하나하나 렴습했다.  마직막 한구의 시체만 남았을 때 졸지에 음산한 바람이 획 불더니 관솔불이 꺼져서 집안은 칠흑같이 어두웠다.그가 다시 관솔에 불을 붙이려고하는데 어둠속에서 시커먼  하나가 벅떡 일어나 앉더니 주먹으로 정충신의 면상을 탁 쳤다. 일반 사람같으면 기절초풍을 할것이지만 호랑이담을 지닌 정충신은 놀라는 기색이 없이 태연하게 그 를 안아눕히면서 엄숙하게 말하였다. “너 귀신은 사불범정(邪不犯正)을 모르느냐? 너와 나는 유명을 달리하고있는데 네가 나를 건드린다는게 어디 될 일이냐?” “하하하하.” 이 껄껄 웃었다. 이때  홰불을 든 병사 수십명이 달려와서 집을 포위하더니 고래고래 호통쳤다.     “저기 집안에 시체를 훔치러 온 도적놈이 숨어있으니 들어가서 당장 잡아내오너라!” “예이.” 밖에서 나는 말소리를 들은 정충신은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 밖에 나가 군사들과 시비를 걸려고하였다.이때 아직 렴습을 하지 못한 그 이 정충신의 다리를 잡으면서  권고했다. “어서 뒤봉창을 뚫고 밖으로 달아나오.” 그러나 정충신은 추호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당당하게 버티고서서 밖을 향해 호통을 쳤다. “나는 리항복대감의 명을 받고 렴습하러 온 정충신이란 사람이다.이제 렴습이 곧  끝나가니 어서 들어와서 이미 렴습한 시체를 날라다 매장하여라!” 그러자 이 벌떡 일어나서 정충신의 어깨를 치면서 칭찬했다. “자네 밤새 수고가 많았네. 이젠 돌아가서 푹 쉬게나.” 정충신이 말소리를 들고보니 그 은 분명히 오성대감 리항복이였다. 리항복은 정충신이 시체에 감을 천을 가지러 간 사이에 말을 몰아 시체가 있는 집에 먼저 도착하여  정충신이 당도할 무렵에 방 웃목에 가서 누워있었던것이였다.  
109    절세기인 정치가 리항복 27) 김상궁이 차린 제사음식 댓글:  조회:1534  추천:0  2015-12-24
 27.김상궁이 차린 제사음식 평양을 수비하다 쫓겨온 재상까지 의주성안에 다 모이니 조정안은 오래만에 활기를 띄였다. 어느날, 리항복이 비변사에 나와보니 류배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림시로 령의정을 맡은 정철과 우의정 류성룡만 나와있고 좌의정 윤두수는 보이지 않았다. 정철이 회의를 소집하려고 하자 윤두수와 가까운 판서 리성중(李诚中)이 반대해 말하였다. “중대한 회의에 윤정승이 오시지 않았으니 기다려야 합니다.” “령상과 우상이 다 계시는데 원로대신들과 의논하여 결정하면 되지 않습니까?” 리항복의 말에 리성중이 변명쪼로 말하였다. “이런 회의에서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은 윤정승뿐이라서 말입니다.”  그들이 한창 쟁론을 하고있는데 별감이 점심상을 차려왔다. 김상궁이란 계집이 제 아버지의 제사상을 푸짐하게 장만해서 임금과 대신들에게 잘 차린 제사음식을 한상씩 보냈던 것이였다. 대신들은 점심때가 되여 한창 시장하던 차에 또 피난다니느라 오래동안 구경도 못했던 기름진 음식을 보자 침을 삼키면서 상앞에 대들었다. 그러나 대신들중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재상 윤두수가 임금을 만나러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에 모두들 수저만 들고 만지작거리면서 그가 오기를 초조히 기다렸다. “나는 배가 너무 고파서 더는 기다리지 못하겠소.여러분들이 들지 않겠다면 나 혼자라도 먹겠소이다.” 리항복이 수저를 들고 상앞에 다가앉자 다들 조금만 더 기다리라며 말렸다. 그러나 리항복은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게걸한 사람처럼 우적우적  먹어댔다. 이때 임금이 있는 내전에도 제사상이 올라왔다. 선조왕은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놓은 제사음식을 보고 깜짝 놀랐다. “지금 온 백성들이 전쟁때문에 허리띠를 졸라매고서도 배를 곯고있는데 일개 상궁이 제 아비의 제사상을 이렇게 륭성하게 차렸으니 어디 말이나 되오? 과인은 이렇게 잘차린 제사음식은 차마 먹을수가 없소.” 선조왕은 노기를 띄고 내관을 부르더니 음식상을 당장 내가라고 명하였다. 내전에서 돌아온 윤두수는 대신들을 보고 호통쳤다. “그래 여러 대신들이 전쟁통에 이런 귀한 음식을 먹겠다고 기다린단 말이오? 지금 전하께서도 음식상을 드시지 않고 물리시였소. 모두 제발 좀 정신들을 차리시오.” 윤두수가 호통을 치자 대신들은 감히 수저를 들지 못하고 아쉬운듯 음식상을 힐끔힐끔 훔쳐보면서 상앞에서 물러날수밖에 없었다. 배안에서는 창자가 꼬르륵꼬르륵 반항을 했다. 이때 남이야 어쩌든 상관하지 않고 혼자서 제사음식을 배불리 먹고난 리항복은 불룩하게 나온 배를 손으로 쓸면서 윤두수를 보고 말하였다. “윤대감, 나는 오늘 대감께 죄를 져서 지금 대죄하고있소이다.” 그 말을 듣고난 윤두수는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때 리항복이 좌중을 돌아보며 빙긋 웃고나서 다시 뚱단지같은 소리를 하였다. “그러게 내가 진작 먹자고 안합디까? 우리들이 배가 불러야 난리도 이겨낼수 있지 않습니까?임금님께 여쭙고 차린 음식을 어서 들도록 하십시오. 설마 이 귀한 음식을 버리지야 않겠지요?”    리항복의 익살에 대신들은 이럴수도 저럴수도 없어서 얼굴에 어리석은  웃음만 띄웠다. 이 소문이 인츰 선조왕의 귀에 들어갔다. 선조왕은 리항복의 소행에 노발대발하기는 커녕 오히려 즐거워하면서 말하였다. “오성은 참으로 신기한 인물이요. 배고플 때 이런 저런것 가리지 않고 배부터  채웠으니까.허허허.모두들 가져온 음식을 나눠들라고 하시오.” 선조왕이 명을 내리자 대신들은 배를 골던 참이라 비록 식은 음식이나마 맛있게 먹었다.
108    절세기인 정치가 리항복 26)홍통사의 의리 댓글:  조회:1490  추천:0  2015-12-24
26. 홍통사의 의리 석성이 찾는 홍통사란 사람은 십여년전에 조선에서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할 때 역관으로 따라간 홍순언이란 사람이였다. 어릴적에 의주의 압록강변에 살면서 중국애들과 압록강에 뛰여들어 함께 미역도 감고 물싸움도 하면서 중국말에 익숙해진 그는 나라에서 중국어통역을 모집하는 시험에 참가하여 장원급제를 하고 사신을 따라 명나라로 갔었다.그와 함께 간 통역으로 김통사라는 중늙은이가 있었는데 해마다 북경을 다녀오면서 몰래 장사를 하여 큰 돈을 벌었었다.  김통사는 명나라의 수도에 오면 마치 제집같이 떠돌아다니였다. 그는 통역할 일이 없는 날은에는 장사를 하거나 청루를 드나들었다. 북경에 도착한 첫날 사신들은 별 행사가 없어서 자유시간을 가졌다.김통사는 홍통사를 보고 북경에 왔으니 청루구경을 하자며 꼬드겼다. 청루라는 데는 티끌만한 흥미도 없어서 김통사를 보내놓고 숙소에 홀로 남은 홍순언은 숙소에서 저녁을 지내려니 너무 지루하였다.명나라의 수도에 왔는데 집안에 박혀 있어서야 될일인가 하는 생각이 든 홍통사는   거리구경을 나왔다. 번화한 거리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그는 그만 숙소로 돌아오는 길을 잊어버렸다.여기저기를 헤매던 그는 한 청루앞에 이르렀는데 청루앞에는 이란 글을 쓴 광고가 붙어있고 그 옆에는 절세가인의 화상이 걸려있었다. 도대체 어떤 녀인이기에 몸값이 이다지도 비쌀가? 호기심이 부쩍 동한 그는 청루안을 찾아갔다. 한 젊은 몸종이 그를 반겨맞아주었다. 그는 이 몸종을 보고 어떤 녀자가 몸을 팔기에 몸값이 이렇게도 비싼가고 물었다. 그 몸종은 지금 몸을 팔려는 녀인은 나라의 재상 아무개의 무남독녀라고 하면서 재상이 실수를 하여 국고의 돈을 옮겨썼다가 제때에 갚지 못하고 발각되여 관직을 박탈당하고 지금 옥에 갇혀있다는것이였다.나라에서는 정승댁에서 그 돈을 제 기한내에 갚으면 옥에서 무사히 풀려나올수 있다고하여 재상의 천금소저가 가산을 모조리 처분했지만 그래도  돈 천량이 모자란다는것이였다. 천냥빚을 갚지 못하면 년로다병한 아버지가 옥살이를 하다가 옥사할 위험이 열에 아홉인데 깊디깊은 규중에서 살면서 외계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소저녀 천냥빚을 갚을 기한이 사흘밖에 남지 않자 부득불 자신의 천금같은 옥체를 팔더라도 아버지만은 구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이란 방을 걸어놓고 옹근 이틀밤낮을 기다렸지만 찾아오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그렇다고 몸값을 조금이라도 낮출수는 없는 처지였다. 몸종은 오늘저녁이 소저가 아버지를 구할 마지막 고비이라고 말하였다. 그 말을 홍순언은 무심코 들을수가 없었다.그녀를 불구덩이에서 구해주고싶은 동정심이 가슴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는 소저의 몸종을 보고 자기가 천금을 내여 소저의 부친을 구해내겠다고 장담하면서 당장 인력거꾼을 불러달라고 분부하였다.  인력거를 타고 사신들이 머무는 숙소에 돌아온 홍통사가 자기의 려비로 가져온 돈에다가 김통사가 장사밑천으로 쓰려고 가져온 돈까지 몽땅 터니 가까스로 천냥 돈이 되였다. 그는 다시 인력거를 타고 청루를 찾아가서 천량돈을  재상의 따님에게 주고 돌아서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청루를 나왔다.  통역을 하는데 쓰라는 경비와 김통사의 장사밑천을 젊은 혈기에 누구의 허락도 없이 다써버린 그는 당장 부닥칠  일이 두려웠다.  그는 김통사가 돌아오기전에 급히 숙소를 나와버렸다. 부랴부랴 북경을 떠난 그는 손에 돈 한푼 지닌게 없어서 풍찬로숙을 하며 수천리길을 걷고걸어서 20여일만에 조선땅에 돌아왔다. 그러나 통역의 임무는 수행하지 않고 나라에 죄를 지은 그는 관가에서  잡으러 올까봐 집에 있을수 없었다.그는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움집을 지어놓고 늙은 어머니를 모셔와서 나무를 해다팔아  이날이때까지 근근득식을 하고있었다. 대국에서 군권을 잡고있는 병부상서 석성이 일개 통역을 찾는다는 말에 리항복은 집히는데가 있어서 전국각지에 방을 붙여 홍순언을 찾았다.  나무를 팔러 시내에 들어왔다가 나라에서 자기에게 죄를 묻지 않고 오히려 중용하련다는 방을 본 홍순언은 반신반의하며 의주로 돌아왔다. 홍순언이 조정을 찾아오자 리항복은 그를 반겨맞으면서 명나라에 갔다가 도망친 사유를 물었다. 홍순언이 여차여차했다는 말을 듣고난 리항복은 기뻐서 홍순언을 보고 참으로 착한 일을 했다며 크게  치하하고나서 이번에 명나라에 다시 통역으로 보낼테니 북경에 도착하면 반드시 어떻게 어떻게 처사해야한다고 차근차근 일러주었다. 명나라에서 조선에 대한 의심이 풀렸기에 조선정부에서는 안심하고 지충주부사 정곤수를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하여 지원병을 청하기로 하였다. 조선사신이 북경에서 십리밖에 이르렀을 때 명나라조정에서는 관원들을 파견하여 환영하였다. 실로 력사이래 있어본적이 없는 례우였다. 명나라의 영접사는 그들을 만나자 대뜸 홍통사부터 찾았다.  그들은 조선사신과는 겉인사만 하고나서 인차 가져온 가마에 홍통사를 모셔가지고 북경시가지를 한참동안 달리더니 어느 골목에 있는 솟을대문안으로 들어갔다. 홍순언은 얼핏 보기만해도 으리으리한게 마치 궁전에 온것만 같아 꿈인지 생시인지 어리벙벙하였다. 이윽고 집안에서 한 귀부인이 하인의 부축을 받으며 련보로 뜰에 걸어나오더니 홍통사가 탄 가마앞에 이르러 큰소리로 말하였다. “은인어르신, 소녀의 절을 받으세요.” 귀부인은 뜰에 비단요를 편 뒤 그우에 엎드려서서 홍순언에게 공손이 절을 올리고나서 연신 은인이라 부르더니 화려한 객실로 안내했다.  그 귀부인은 바로 십여년전에 홍순언이 구해준 재상의 무남독녀였다. 그녀는 홍통사가 주는 돈을 보태서 옥에 갇힌 아버지를 구해내고 이듬해에 대가집으로 시집을 갔는데  그 남편 석성이 크게 승진해서 오늘날엔 병부상서라는 높은 관직에 올랐다는 것이였다. 저녁에 석성내외는 산해진미로 연회를 베풀고 홍순언을 좌상에 모시고고서 재생은인을 양아버지로 모시겠다고 하였다.  홍순언은 난생 처음 보는 진수성찬이라 침이 목구멍으로 꼴깍꼴깍 넘어갔지만 조정을 떠날때 리항복대감이 한 당부를 명심하고 가까스로 참았다.그가 한사코 사양하며 수절을 들지 않자 석성내외는 놀라 도대체 어이된 영문인가고 물었다.  이때가 기회라고 생각한 홍순언이 입을 열었다. “이 홍아무개는 명나라에 청병을 성공시키라는 임금의 명을 받고 온 일개 사신의 통역에 불과한데  사명도 완수하기 전에 사적으로 이런 륭성한 대접을 받는것은 임금을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참혹한 전쟁마당에 계시는 우리나라의 임금님께서도 맛보시지 못한 진수성찬을 내가 먹는다는것은 죄중에 죄가 되는 일이기에 수절을 들수 없으니 량해해주시오.” 홍순언이 수저를 들지 않고 물러앉자 그의 하늘에 사무치는 충심과 의리에 크게 감동된 석성은 래일 황제에게 진언하여 꼭 조선에 파병할수 있도록 하겠노라고 장담하였다. 이튿날 명나라 조정에서는 조선에 대한 파병문제를 두고 동의하는 신하와 반대하는 신하들 사이에서 쟁론이 치렬하게 벌어졌다.이때 조선사람한테 큰 은혜를 입은 병부상서 석성이 나서서 자기의 립장을 천명했다. “동양 오랑캐는 우리나라를 넘본지 오래되였습니다.속담에 고 했습니다.우리가 출병하여 조선을 도우면 본토에서의 전쟁을 피면할수 있고 또 우리나라를 지킬수 있는 가장 좋은 방도라는것은 삼척동자도 알수 있는 도리인데 무엇을 더 우려할것이 있겠습니까?” 석성의 말에 도리가 있다고 생각한 명나라 황제는 결단을 내리고 대군을 조선에 파하는데 동의했다.  
107    절세기인 정치가 리항복 25)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서찰의 쓸모 댓글:  조회:1111  추천:0  2015-12-24
 25.토요토미의 서찰의 쓸모 선조왕과 조정의 각 부처가 의주성안에 자리를 잡자 리항복은 임금에게 중요한 건의를 올렸다. “전하, 지금 호서,호남, 령남에서 왜적과 싸우는 관군과 의병들은 아직까지 주상의 행재소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습니다.시급히 사람을 파견하여 그들과 련계를 가져야 합니다. 선조왕은 리항복의 건의가 매우 중요하단 것을 깨닫고 즉시 신하 윤승훈(尹承勳)을 남방으로 보내기로 했다. 리항복은 윤승훈이 륙로로 가다가 왜적들을 만나 변을 당할것을 념려하여 배를 타고 바다길로 먼저 전라도에 가도록 지시하였다.그리하여 조정에서 전국 각지에 있는  관군과 의병들의 전투정황을 제때에 알수 있게 되였고 조정의 명령도 제때에 전방으로 전달할수 있게 되였다. 남방에 순찰사로 내려갔던 리원익이 임금을 보위하는 금군의 력량이 너무 약하다는것을 알고 전방의 병사들중 일부를 뽑아서 의주방면으로 보내 어가를 호위할것을 건의했다.  리원익의 계(啓)를 읽어보고난 리항복은 어가를 호위하는 금군의 력량을 가강하자는 순찰사의 건의는 지당하지만 정규군의 병사들을 뽑아서 보내겠다는 제안은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의도를 전하였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정예군이 너무나 적습니다.훈련된 군사는 전방에 남아서 적을 물리치는데 써야 합니다. 어가를 호위하는데 쓸 병사는 별도로 장정을 뽑아 훈련시키도록 하십시오.” 이에 앞서 중국의 료서지방에서는 조선에서 왜놈들이 중국을 치도록 길을 내줬다는 요언이 떠돌았다.그 요언은 재빨리 명나라의 수도에까지 들어갔다.명나라 조정에서도 처음에는 그 요언을 믿지 않았지만 왜군이 조선에 쳐들어온 뒤 별 저항도 받지 않고 승승장구로 북진하고있었으니 그 요언을 완전히 배제할수도 없게 되였다.     명나라의 병부상서(兵部尚书) 석성(石星)은 지휘 황응양(黄应旸)을 조선에 파견하여 사실의 진상을 밝히게 하였다.그는 황응양이 떠날 때 조선국에 가면 십여년전에 조선의 사신들이 명나라에 올 때 통역으로 왔던 홍통사의 행방을 알아오라는 부탁도 하였다. 황응양은 압록강을 건너오자 조정을 찾아와서 일본국에서 조선에 보내온 모든 서찰을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이런 일이 생길것을 대비한 리항복은 서울을 떠날 때 다른 물건들은 다 버리면서도 일본국에서 보내온 서찰만은 하나도 버리지 않고 다 가져왔었다. 리항복은 신묘(1591)년에 토요토미가 써보낸 오만방자하기 그지없는 내용의 서찰을 황응양에게 보여주었다. 서찰을 자세히 읽고난 황응양의 모든 의심은 봄눈이 녹듯 말끔히 사라졌다.그는 왜란을 맞아 고생이 극심한 조선 국왕과 대신들에게 깊은 동정을 표시하고나서 십여년전에 명나라에 사신을 따라 왔던 홍통사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고 물었다. 리항복은 여러해전에 홍통사가 명나라로 사신을 따라 갔다가 려비로 준 은전 천냥을 가지고 실종된 사실을 남들한테 들은 일이 있었다.당시 그는 홍통사가 국고의 돈을 훔치고 행방불명이 된데 대해 의심을 하고있었는데 명나라의 병부상서가 홍통사의 안부를 묻는것을 보니 머리속에 잡히는것이 있었다. 그는 황응양을 보고  빠른 시일내에 홍통사의 행방을 알아서 알려주겠다고 대답하였다. 황응양은 본국으로 돌아간 뒤 석성에게 조선에서 보고들은것을 사실대로 회보하였다. 명나라관리들의  조선에 대한 부질없는 의혹은 말끔히 풀리였다.
106    절세기인 정치가 리항복 24) " 상감께선 좀 굶으셔도 되오." 댓글:  조회:1403  추천:0  2015-12-24
.24.”상감께선 좀 굶으셔도 되오” 의주에 도착하여 림시 행재소를 잡은 선조왕은 찹잡한 마음을 걷잡을수 없었다.그는  몇몇 신하들을 데리고 압록강변에 자리잡은 통군정(统军亭)에 올라갔다.     평안북도 통군정   통군정은 의주읍밖의  압록강기슭 가장 높은 삼각산봉우리에 자리잡고 있다. 고려초기에 세운 이 통군정은 조선의 관문으로서 해마다 중국에 사신을 보낼 때는 다 이 통군정에서 중국에 가져가는 물건들을 검사하였고 중국에 갔다가 오는 사신들도 통군정에서 검사를 받는다. 통군정에 올라 푸르른 압록강물에 점점이 떠있는 섬들이며 이끼푸른 의주성벽을 바라보는 선조왕은 비분을 금할수가 없었다.그는 시 한수를 지어 읊었다. 산에 걸린 달을 보니 절로 통곡이 나고 심심한 가슴 압록강 찬바람이 쓰리게 하네 리항복은 임금에게 하루 속히 낡은 관청을 수리하여 림시 궁전으로 삼을것을 청구하였다.어가가 장기적으로 의주에 머무른다는 뜻을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 백성들이 마음을 놓고 의주에 돌아오게하기 위해서였다. 선조대왕과 조정이 의주성안에 장기적으로 주둔한다는 소문이 고을 안팎에 널리 퍼지자 집을 버리고 산속으로 도망갔던 지방관리들과 백성들도 다시 하나둘 성안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어느날, 가산(嘉山)의 백성들은 임금님을 대접하겠다고 닭을 여러마리 잡아서 닭고기국을 끓여가지고 목판에 고기그릇을 담아이고 조정을 찾아왔다.리항복은 시골백성들의 순박한 마음이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다.  임금에게 진상하는 음식은 반드시 안전검사를 하는것이 궁내의 법도였다.외처에서 가져온 음식이 정결한지 어떤지 혹은 나쁜놈들이 음식에 몰래 독약을 넣었는지 알수 없는 일이였다.하지만 즉석에서 그 음식을 검사한다면 백성들의 성의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라 참으로 난처했다.이 일을 어떻게 처리한담? 잠시 생각을 굴리던 리항복은 임금에게 국그릇을 날라가려는 내관을 불러 세워놓고  성을 버럭 내면서 볼멘 소리를 질렀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소? 상감께서 좀 굶으시면 어떻소? 앞에서 힘든 일을 하는 우리가 먼저 배를 채워야겠소.”리항복은 내관이 국그릇을 다 내려놓자 리덕형을 보고 말했다. “리대감,자넨 요사이  그 누구보다 고생이 많았으니 제일 배가 고플게 아닌가? 몹시 시장할텐데 자네 먼저 한그릇 받아먹게.” 리덕형이 흠칫 놀라 급히 한발 물러서며 대꾸했다. “그건 아니되는 소릴세.상감님을 두고 신하인 내가 어이 감히 먼저 음식을 먹는단 말인가?” “내가 먹으라면 자네는 얼싸 좋다하고 먹게.뒤일은 내가 다 감당할테니까.” 리덕형은 친구의 성화에 못이겨 닭고기국을 받아놓고 몇숟가락 떠서 먹었다. 몇달만에 맛보는 닭고기국이라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판이였다.그러나 리덕형은 혼자 닭고기국을 먹어서 임금한테 큰 불경을 저지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는 먹지 못하였다. 리항복은 리덕형이 고기국을 먹어도 아무런 탈이 없는것을 보고 빙그레 웃으면서 말하였다. “국이 식기전에 어서 전하께 한사발 올리시오. 그리고 당신들도 꿔온 보리자루처럼 앉아있지 말고 한사발씩 나누어 들게나.”  리항복의 명이 떨어지자 모두들 부리나케 국을 나누어 먹었다.그들이 서울을 떠난 뒤 처음으로 먹어보는 맛있는 음식이였다.모두들 고기국을 받아 정신없이 다 먹고나자 리항복이 리덕형을 보고 롱쪼로 말하였다. “명보(한음의 자), 오늘 자넨 진정 나의 뜻을 몰랐나? 백성들가운덴 벼라별 사람이 다 있을텐데 자넨 무턱대고 임금한테 올리려고 했는데 그게 옳은 일인가?그 후과는 생각해보지 않았나?” “아. 자넨 그래서 나더러 먼저 먹으라고 했나?” “그렇지. 아무것도 모르는 자넬 가지고 시험을 했다네.” “자네는 왜 먼저 맛보지 않았나?독이 있으면 죽을까봐 두려워서였나?” “음식을 관할하는 내가 먼저 맛보면 백성들이 의심하지 않겠나?그리고 자네는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니까 주저없이 먹을수 있겠기에 내가 자네를 가지고 시험해보기 안성맞춤하지 않나?” “그럼 자넨 국에 독이 있었다면 나더러 죽으라고 한 짓이구만.” “거야 물론이지,사정을 모르는 자네가 죽어야지 모든 사정을 다 아는 내가 죽어서야 될 일인가?하하하.” 리덕형이 얼핏 생각해보니 리항복의 처사가 십분 옳았다.그는 친구의 지혜에 다시 한번 탄복했다. “자상이,자넨 정말 나한테는 스승일세.오늘 자네가 아니였다면 나는 임금한테 불경죄를 저지를 뻔 했네.큰 죄를 모면하게 된건 전적으로 자네 덕분일세.”  외처에서 들어온 음식을 먼저 맛도 보지 않고 직접 임금에게 진상하려했던 한음은 후에 생각해봐도 몸이 오싹했다. 그는 주위의 신하들을 보고 “오성은 참으로 성인이오.”하고 칭찬을 거듭했다.
105    절세기인 정치가 리항복23) 명나라에 청병을 주청 댓글:  조회:1144  추천:0  2015-12-24
23. 명나라에 청병을 주청 리항복과 리덕형이 함께 명나라로 가서 구원병을 청해오겠다고 주청하자 선조왕은 선뜻 응낙하지 않았다. 그는 리항복이 자기의 신변에 있어줄것을 은근히 바라는 눈치였다. “전하, 시국이 이렇게 어지러운데 병판께서 본영을 떠나 국외에 나간다는것은 불가한 일이옵니다.” 한 신하가 왕의 눈치를 보며 이렇게 제의하자 선조왕은 대뜸 동의하고 명을 내렸다. “과인의 생각도 그러하오.이번 일에는 한음이 수고해주시오.즉시 료동으로 떠나가서 명나라에 청병을 하시오.” 리덕형이 필마단기로 산설고 물선 료동으로 떠난다는 것은 실로 위험천만한 일이였다.  리항복은 서울을 떠나 출국하려는 친구 리덕형을 바래주려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며 남대문밖까지 말을 타고나왔다. “자네 이번 길이 얼마나 어려운 걸음인지를 생각하고 있겠지?” “그야 더 이를데가 있나?하루에 이틀길을 달려야 하겠으니 말이 지쳐 쓰러질까봐 걱정이네..” “아,내가 왜 그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나?자네 이 말을 가져가게.타던 말이 지치면 다른 말을 갈아 타면서 길을 재촉하게.” 리항복은 자기와 생사고락을 함께 해온 애지중지하는 말을 리덕형에게 서슴없이 빌려주면서 눈물을 머금고 말하였다. “이번에 만일 명나라의 군사가 압록강을 건너오지 않으면 자네는 나의 시체를 룡만(龙湾:지금의 의주)에서 찾게나.  그 말에 한음이 대답했다.   “아닐세. 만일 명나라에서 지원병을 보내지 않는다면 자네는 나의 시체를 로룡(芦龙:당시 명나라의 수도)에서 찾게나.” 말을 마친 두 친구는 으스러지게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작별하였다.  적들이 승승장구로 북진하고 관군의 방어가 련이어 무너지자 급해난 선조왕은 밤중에 어전회의를 열고 자신의 계획을 말하였다. “일이 이렇게 급하게 되였으니 과인은 중국으로 피해가야 되겠소. 다만 우리 부자가 함께 압록강을 건너가버리면 조선땅에서 전쟁을 지휘할 주인이 없게 되니 세자는 조선땅에 머물러있으면서 묘주(廟主)의 사주(社主)를 받들수 있게 하오. 경들가운데서 누가 나를 따라 서행(西幸)하겠소?” 가정식구들을 서울에 둔채 무작정 어가를 호위해 이곳까지 따라온 신하들은 저마다 고개를 숙이고 감히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이 시각 가솔들이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누구도 알수가 없었다. 이 때 리항복이 서슴없이 임금의 앞으로 다가서서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신은 몸이 건강하고 부모님쎄서도도 생존해계시지 않으시니 큰 부담이 없사옵니다. 신은 죽기를 각오하고 칼산에 오르고 불바다에 뛰여들더라도 끝까지 전하를 호위하겠습니다.”  리항복의 페부에서 울어난 말에 깊이 감동된 다른 신하들도 일제히 임금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겠다고 결심을 표시했다. 어가가 박천(博川)에 머무르고 있을 때 적들이 몇십리밖에 되지 않는 가까운  거리까지 추격해오고있다는 급보가 날아왔다.임금은 호위하는 신하들더러 즉시 어가를 재촉하여 출발하라고 명했는데 밤은 어느새 2경이 되였다. 낮부터 내리는 소낙비는 밤을 지새우려는듯 그칠줄 모르고 쏟아진다. 진흙길은 발이 빠져서 걸음을 걷기조차 어려운데 어가를 호위하는 인원은 겨우 수십명밖에 되지 않았다. 뒤에서 추격하는 적들의 동정은 잠시  없었지만 앞에서 또 어떤 불의가 들이닥칠지 모를 판이였다. 리항복은 관속들을 보고 말하였다. “어가의 앞쪽 호위가 너무 허술하니 우리들이 다 어가의 뒤를 따라서는 안되겠다.” 말을 마친 리항복은 말을 채찍질하여 어가를 앞선 뒤 앞을 살피며 길을 인도하였다. 어가가 무사히 의주에 당도하자 성안에 살던 백성들은 왜놈들의 군사가 방금 뒤쫓아 오는줄 알고 모두 놀라서 가장집물을 버리고 뿔뿔이 도망쳤다.   
104    절세기인 정치가 리항복21)양례수의 발병약 댓글:  조회:1186  추천:0  2015-12-24
 20.양례수의 발병약 임진년(壬辰年:1592년) 4월에 일본국에서는 코시니(小西行长)와 카토오(加藤清正) )가 36명의 장수와 15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부산으로 쳐들어왔다. 총수격인 병사(兵使) 리각(李珏)은 대적을 만나자 겁을 집어먹고 저항 한번 하지 않고 도망쳤다. 부산부사 송상현이 왜적과 결사적으로 싸웠으나 사태같이 밀려드는 왜군을 막아내지 못하고 희생되였다.부산을 점령한 왜군은 부산에서 하루 묵은 뒤 3로로 나누어 파죽지세로 북상하였다. 양산,언양, 밀양이 함락되고 리각이 적에게 포로되였다는 장계가 올라왔다. 소식이 서울에 전해지자 조정에서는 좌의정 류성룡에게 도체찰사를 임명하여 전방의 모든 일을 전담하게 하였다. 순변사(巡边使) 리일(李镒)은 크게 싸워보지도 못하고 대패하여 겨우 수백명의 병졸을 거느리고 후퇴하다가 도중에 왜적의 기습을 받아 벌거벗은 몸으로 충주로 도망쳤다.그 꼬락서니를 본 류성룡은 기가 막혔다.  “률곡선생이 생전에 과 을 내놓았을 때 내가 왜 반대했었나? 률곡선생이야말로 성인이였구나!”  그 어디에도 의지할만한 군사가 없게 된 류성룡은 자신이 친히 전투에 나설 결심을 내리고 조정에 장계를 올린 동시에 막료들을 모집했다.문관 막료인 의주부윤 김여물(金汝岉)과 군관 80여명이 모였으나 전투에 참가할 병졸들이 너무 적었다. “이 보잘것없는 병력을 가지고 우리가 파죽지세로 몰려드는 왜적을 어떻게 막는단말인가? 아, 하늘도 무심쿠나!” 류성룡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 땅이 꺼지게 탄식을 하고있을 때 곁이 있던 한성판윤 신립(申砬)장군이 여쭈었다. “류대감께서는 후방에서 전투를 지휘하십시오.하관은 비록 불재(不才)오나 전방에 나가 목숨을 걸고 싸우겠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고맙습니다.” 류성룡은 즉시 조정에 신립을 도순변사로 임명할것을 주청하였다.선조왕은 신립에게 검을 한자루 하사하면서 그를 격려하였다. 신립을 김여물을 데리고 도중에 병사를 모집하며 충주에 이르렀다. 이때 순변사 리일이 상주에서 적에게 대패당하고 쫓겨왔다. 신립은 리일을 사형에 처하려고 하다가 그의 재주를 아끼여 그더러 선봉에 나서 적과 싸워 립공속죄할 기회를 주었다. 김여물은 조령에 진지를 구축하자고 제의했다.그러나 신립은 그의 제의를 받아주지 않았다. “적이 이미 고개밑에 당도했으니 진지를 구축하다가 적을 만나면 매우 위험하다. 더구나 우리군사들은 아무런 훈련도 받지 않은 장정들이니 그들을 사지(死地)에 갖다놓지 않으면 결사적으로 싸우지 않고 도망칠것이다.” 신입은 달천을 뒤에 두고 배수의 진을 쳤다.그런데 코시니가 지휘하는 적병은 조령을 넘어 산과 들을 가득 메웠다.신립은 두차례나 적의 포위를 돌파하려 시도했으나 적들의 협공을 맞아 성공하지 못하고 하는수없이 탄금대로 돌아왔다. 적의 포위망을 뚫을수 없다는것을 깨달은 신립은 김여물더러 임금에게 올리는 공문을 짓게 한 뒤 믿음직한 부하를 시켜 조정에 공문을 올리게 하고 김여물과 함께 적진에 돌입하여 칼을 휘둘러 적병 십여명을 죽이였다. 전신에 상처를 입어 적들과 더 싸울 힘이 없게된 두사람은 소용돌이치는 강물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 신립의 군사가 대패했다는 보고가 대궐에 올라오자 조정안팎은 벌집같이 발칵 뒤집혔다.온 서울이 울음판이 되였고 피난민들이 길을 메웠다.이젠 서울도 왜구에게 함락될 날이 하루이틀뿐이였다. 선조왕은 서울을 버리고 서쪽으로 몽진(蒙尘)할 계획을 정하고 좌의정 류성룡에게 서울에 남아서 서울을 방어하는 류도대장(留都大将)을 겸하라는 어명을 내리려고하였다. (조정의 대소사를 관할하는 좌의정을 조정을 떠나게 하여 서울에 남겨두고 어가만 서울을 떠나다니 이게 어디 될말인가?) 리항복은 즉시로 임금에게 교지의 불가함을 지적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밝히였다. “전하, 좌상께서 전하와 함께 계시지 않고 서울에 혼자 남게 되면 조정의 중대한 일들을 그뿐께서 어이 처리할수가 있겠습니까?이제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우리나라가 처한 현정황을 황제에게 설명할 계책이 반드시 그분한테서 나와야합니다.전하께서 서울방어를 맡을 류도대장을 다른 사람으로 고쳐 임명하실것을 여쭙나이다.” 선조왕이 리항복의 건의를  듣고 곰곰히 생각해보니 도승지의 청이 십분 면밀한지라 그 청을 들어주기로 하였다. 왜적들의 진공소식이 시시각각 급박해지자 리항복은 나라를 위해 자신의 한목숨을 기꺼이 바치리라 결심하였다.그는  퇴궐하고 집에 돌아오면 아예 외사(外舍)에 거처하면서 내실로 통하는 문을 걸어잠그었다. 그는 집안일에 자신을 관련시키지 못하도록 금지하여 손우 누의와도 결별하였고 측실이 단 한번만 만나자고 울면서 청했어도 만나주지 않았다.     이달 그믐날 밤에 선조왕은 정여립을 탄핵한 공으로 하여 경림군(庆林君)에 봉해진  김명원(金命元)을 팔도 도원수(八道都元帅)로 임명하여 한강수비를 담당하게 하고 례조판서 정창연은 종묘사직의 신주를 모시고 서대문으로 가고 령의정 리산해는 백관을 거느리고 어가를 호위하며 피난길에 올랐다. 이른 새벽 중전(中殿)이 십여명의 후궁을 거느리고 임금을 따라 인화문(仁和门)으로 걸어가는데 소나기는 억수로 퍼붓고 어둠은 칠흑같았다.사람들은 비를 조금이라도 덜맞겠다고 무턱대고 앞으로 걸음을 다그쳤다. 그러나 리항복은 조금도 당황한 기색이 없이 천천히 걸었다.   “리공, 그렇게 걸으면 옷이 남먼저 젖겠군요. 좀 빨리 걸으시오.”한 동료가 권고하는 말에 리항복이 웃으며 대답했다.  “참 모르는 소리요. 비를 맞아 빨리 걸으면 머리우의 비도 맞고 앞에서 오는 비까지 다맞을게 아닌가? 나는 머리우의 비만 맞겠네.”  리항복의 해학에 사람들은 웃음통을 터치였다. 사람들의 두려움과 긴장정서도 다소 풀리였다.     리항복은 필요한 어보인감(御宝印鉴)이며 일본과 교섭하던 기록이며 왕복문서가 들어있는 궤를 밀봉하여 등에 지고 초불을 잡고 대오의 앞에 서서 길을 인도했다. 중전은 너무도 감동되여 리항복을 보고 말했다. “경은 실로 세상에 둘도 없는 충신이오. 부디 조심하여 나라님을 도우세요.” “일국의 신하로서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았으니 그 죄 만사무석이옵니다. 중전께선 옥체를 보중하십시오.” 어둠속에서 피난가는 대오는 엎어지고 자빠지며 북으로 북으로 빠져나갔다. 리항복이 대오를 돌아보니 양례수(杨礼寿:?-1597)란 의원이 헐레벌떡 달려오고있었다. 리항복이 양례수의 꼬락서니를 보니 여러 사람들앞에서 한번 톡톡이 망신을 시켜줘서 그의 고약한 버릇을 고쳐주지 않으면 아까운 사람을 망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례수는 중종때부터 대궐에서 백관의 병을 고쳐주는 의원인데 의술이 뛰여났다.선조 13(1580)년에는 가선대부에,선조 19년에는 가의대부에 올랐다. 그런데 양례수는 자신의 의술을 턱대고 거드름을 잘부렸다. 대신들이 병에 걸려서 그에게  왕진을 청하면 이핑게 저핑게를 대면서 웬만해선 가주려 하지 않았다. 그뒤 그는 아예 다리에 병이 생겨서 걷지 못한다는 거짓말을 꾸미고서 일체 왕진을 사절하였었다. “양동지, 나는 양동지의 다리병때문에 근심을 많이 하다가 마침 좋은 처방을 얻었는데 이제 보니 그 처방도 쓸모가 없게 됐습니다 그려.” 리항복이 자기를 빗대고 하는 말임을 잘아는 양례수는 무안을 당해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지만 모르쇠를 하고 되물었다. “무슨 좋은 처방이 있습니까?” “ 이상 양동지의 다리병을 고치는데 더 좋은 약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제까지만 해도 문밖 출입을 못하시던 양동지의 그 다리병이 난리가 닥치자 밤사이에 말끔히 나았으니 말입니다그려.하하하.” 함께 피난길에 올랐던 사람들은 리항복이 양례수의 정곡을 찌른 속시원한 조롱에 배를 끌어안고 “하하하하…”하고 한바탕 웃어댔다. 피난길에 몰려드는  근심걱정도 잠시 자취를 감추었다. 리항복은 롱을 하여 양례수의 정곡을 찔러놓고 다시 생각해보니 양례수의 처지가 불쌓하여 도와주지 않을수 없었다.그는 나이가 많은 양례수의 거동이 불편한것을 보고 임금에게 청하여 말 한필을 빌려줘서 타고가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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