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bingdapa 블로그홈 | 로그인
룡수송
<< 2월 2025 >>
      1
2345678
9101112131415
16171819202122
232425262728 

방문자

홈 > 전체

전체 [ 143 ]

23    그리운 님에게 댓글:  조회:1802  추천:0  2013-12-29
그리운 님에게   머나먼 강남땅 출근길에서 만나자  요 마음 앗아갔건만  그대앞에 나설 때면 두려움 앞서 심장속에 북소리 쾅쾅 나네요..   오늘은 님을 만나 무슨 말 할가 머리속의 필기장  정리했건만 눈길만 마주쳐도 가슴 뜨겁고 두볼 익어 새빨간 능금되네요.   이 가슴엔 님 하나 꽉 차있지만 사랑한단 말은 어이 할수 없나요 말보다 더  큰 배려 어떻게 할가 꿈속에도 애가 타  몸부림쳐요 . 사랑을 배워주는 교과서는 없나요 한줄두줄 익히며 실천하고싶어요 세상에서 가장가장 멋진 앞날을 님과 함께  설계해 살고싶어요.           2007-04-28
22    크리스마스의 상가 댓글:  조회:1680  추천:0  2013-12-29
크리스마스의 상가                                  어제는 평안의 밤, 오늘은 크리스마스    밤낮을 이어 거리는 흥에 취했다.    폭죽소리, 웨침소리, 추위도  숨어버리고    끝없는 인파가 거리를 메운다.      빨간 모자 은빛수염 싼타할아버지    만면에 웃음 함뿍 찾아오셨다.    여기도 "세일", 저기도 "세일"    프랑카트 춤추며 희귀상품 쏟아낸다.   친척에게, 친구에게 그리고 련인에게 무엇을 선사할가, 눈부신 상품들이 기녀같이 매달리여 아양떨면서 고객들 옷가슴을 간지럽힌다.   아름아름 기쁨 안고 사람들 돌아가면 상가주인 돈주머닌 만삭임신부 속였다고 기뻐하고 속히여도 밉지 않은 능청스런 산타님 스리슬쩍 사라졌네.   평생을 인정에 굶주린 사람들 사랑을 베풀고 더 큰 사랑 받았으니 크리스마스는 좋다, 해마다 단 한번이지만 예수님 아마 이 광경 훔쳐보고 웃으셨겠지.                          2006-12-25
21    기나긴 설명절 댓글:  조회:1758  추천:1  2013-12-29
 기나긴 설명절   동지뒤를 따른 설이 기웃거리자 도시도 마을도 술도가니 빠졌네. 귀찮은 낡은 날 보내는 기쁨일가 새희망 바라는 소원때문일가?   설은 저 멀리서 어정어정 걸어오는데 얼근히 취한 다리 이리비틀 저리비틀 폭죽성에 시달려 귀가 멀었나 어느 누구 소원도  못알아듣네   한가한 사람들 한자리에 앉으면 부딪치는 술잔에 밤이 지치고 성쌓고 허무는 에 동녘하늘 계명성도  피해버리네   신정이 물러간지 세 보름 넘었건만 술에 절은 구정은 몸 가누지 못하네 만복을 안겨주마 약속턴 부엌신도 엉망되여 쓰러져 자는지 죽었는지?   설 쇠면 나이 한살 더 먹는다고 손군들 어깨 으쓱 재롱부리고 늙은이들 원쑤 주름 깊어졌다고 남몰래 한숨 푸푸 내쉰다마는   로쇠가 어이 다 세월탓인가? 명절문화 서천길 재촉하는데 가없는 술바다서 고역하는 친구들 어서 주정군 저 설님 깨워보내게           2008-02-14
20    고향이 그리워도 댓글:  조회:1778  추천:1  2013-12-29
고향이 그리워도 누가 고향에 가봤는가 묻는다면 나는 부끄러워 입을 못엽니다. 2천리길 멀어서가 아닙니다 성심없어 못간것도 아닙니다.   고향가기 싫은 사람  어디 있을가요? 나도 내고향 무지무지 그립니다. 노래를 들을 때마다 눈 이슬 촉촉이 젖습니다.   꿈마다 들려보는  그리운 고향 그곳은 내 동심입니다 살구꽃 하얗게 덮인  초가마을 개구쟁이 동창들.   마을을 감도는 띠같은 시내 발가벗고 뛰여들어 미역감다가  내가의 매끄러운 조약돌 번지면  엉금엉금 뒤걸음치는  가재...   종달이 부름따라 뒤동산 오르면  더덕내 물씬 봄이 취하고  물고기떼 얼음밑 숨어버리면  썰매 씽씽 팽이 빙글 웃음 와그르   그림같은 산천 후더운 인심 찰떡치는 소리도 귀전에 쟁쟁 샘처럼 솟아나는 어머니 젓줄기 고향은 이몸의 피가 되여 흐릅니다.   그토록 그토록 가고싶었지만.  일에 쫓겨 이전엔 못갔습니다.  세월속에  커가는 그리움의 한  백발이 이젠 더 기다리지않습니다    허나 고향땅 밟기가 두렵습니다. 여윈 산  지친 강이 우는것 같아.  때묻지 않은 동년의   보금자리 머리에서 씻겨질까 두렵습니다. 2007-05-06  
19    시조3수 댓글:  조회:1569  추천:0  2013-12-29
시조 3수          인정세태 준다고 인정이고 받는다고 은정이냐? 실북같이 오가는 정 목을 조여 숨가쁘네 진정도 진펄에 빠져 허덕이고있구나.               2007,1             (시조집 "하늘의소리")           자연에 죄진 마음   동심에 뛰놀때는 록수청산 젊었더니 귀밑머리 세고보니 강도 산도 다 늙었네. 보금터 짓뭉개놓고 호곡한들 무엇하랴?   토끼사슴 어디 갔고 종달새는 어디 갔나? 청풍명월 불러오고 꽃동산을 찾아오세 후대에 남겨줄 재부 너밖에  뭐 있느냐   말못하는 초목이라 구박은 하지 마소 이 세상의 주인이 우리뿐만 아니거늘 강산도 크게 노하면 상전벽해 만들리라.            2007.1          (시조집"하늘의 소리)"             백수건달           방탕녀 치마폭에  넋을 잃은 어중이야       아비어미 피를 빠니  달더냐, 비리더냐?      북망산 까마귀 울면       무얼 먹고 살거냐?
18    배없는 나루터(외1수) 댓글:  조회:1682  추천:1  2013-12-29
배없는 나루터에서  내 오늘 또 여길 왔구나. 맞을 이 없고 보낼 이 뿐인 배 없는 나루터, 한 많은 여울목에 강물도 몸부림치며 흐느끼는구나.   산토끼 재롱에 종달이 노래하던 고향의 선산엔 무궁화 웃건마는 꿈 떠나 조상품에 안겨보지 못하고 죽어서도 그 곁에 못눕는 아픔.   골회 한알이라도 어허영차 저기 고향 백사장에 묻히고싶어 이역 황사에 흰옷 더럽히지 않은 백수어르신 또 고국행 떠나시네   여울물아, 통곡만 하지 말고  제발 좀 더 세차게 달리거라. 동해야, 서해야 팔 벌려다오. 원 배인 뼈가루 껴안아다오.            2008-06-09          (성남문학 기))     리조 오백년 역사를 읽으며 낮 말을 들으니 새 말이 옳고 밤 말을 들으면 쥐 말이 옳다. 동인 서인 남인 북인  노론 소론 멎을 줄 모르는 파당 싸움…   참고 배려하는 지혜 티끌만큼 있었어도 경복궁에 까마귀 둥지 틀지  않았을걸 동강난 몸둥이에 피도 아니 말랐는데 백년전 악몽이 어른거려 두렵구나.           2008-06-09       (성남문학 기)
17    신화서점앞에서 댓글:  조회:1514  추천:0  2013-12-29
  신화서점앞에서   고층건물 숲을 이룬 네거리에 상점,술집,유흥업소 으시대는데 설자리도 못찾아 몸부림치는 핏기잃고 메마른 서점의 몰골   밥 한끼 굶더라도 책없인 못살아 신이 닳게 찾아들던 지혜의 창구 불효자께 쫓겨나 떠돌이하는 쪽박든 할미신세 웬 일이냐?   안일과 허영의 마약에 취해 시대의 뒷골목에 쓰러졌어도 눈뜬 봉사신세에 답답한줄 모르고 저 잘났다고 허풍치는 고얀 인간들     술집에 돈 뿌릴 땐 호걸이지만 책 한권 사보라면 두손을 떨고 "장성"쌓기 밤새울 땐 눈이 밝지만 글 한줄 읽으라면 머리가 터진다지.     책이 밥인가고 코웃음치며 작가,시인 비웃는 한심한 족속 문명의 혜택받고 문명에 썩어 날따라 높아지는 쓰레기더미   배는 남산이고 골수는 말라 치매로 히히 웃는 후손들을 보고 공부자의 혼령이 통탄을 한다, 황혼에 까마귀가 구슬피운다        2007.5            (연변문학)
16    금 상경옛터에서(외2수) 댓글:  조회:1497  추천:1  2013-12-29
    금(金) 상경옛터에서 외(30)수            박병대   여기는 상경옛터_____   금나라 태조의 도읍지   화려한 궁전은 어디 갔나?   가없는 벌에 파아란 오곡만 남실거리네     송료벌을 휩쓸고 중원을 짓밟던   준마의 울음소리 어제같은데   아무리 완조가 무너졌다한들 어이하여   부셔진 기와조차 자취를 감췄느냐?     머리우를 하염없이 떠도는 저 구름떼   혹시 아골타의 원혼이 아닌가?   왔다가는 묵묵히 눈물짓고 돌아가고   갔다가는 못잊어 다시 찾아오는구나.     모든것이 허무속에 흘러갔구나   나라잃고 언어 잃고 넋마저 잃은   불효한 후손들 조상마저 모르건만   충실한 성벽만 비운의 터를 지키고있구나.       2006.5아성에서 (2006년 "장백산" 5기) 바다와 조약돌 파아란 하늘 뭉게구름 금빛해살 부셔지는 백사장에서 소녀는 뛰놀면서 조약돌을 주웠네. 하얗고 파랗고 빨간 조약돌   매끈하고 미묘한 고운 돌이라 소녀는 살그머니 볼에 대였네 바다가 다듬은 보배들이라고 세월이 선사한 진품이라고   바다는 소녀에게 자랑을 했네 "이 몸의 거룩한 힘 너는 아느냐? 바위산 삼켜서 평지 만들고 암석깨여 모래로 만드는 힘을   허나 조약돌은 눈물로 하소하였네 "이 몸은 원래 자유로운 산이였다네. 심술궂은 파도에 깨여지고 뼈갈리는 억만년의 긴긴 아픔 누가 알소냐?"      2006.6 (2006년 "장백산"제 5기)             장기를 두며 가로금 열개에 세로금 아홉 아흔개 교차점이 싸움터란다. 량편 다 열여섯개 기물을 갖고 규정된 방식으로 전쟁을 한다.   말을 먼저 옯기든 졸을 쓰든지 면포장기 꾸리든 면상을 놓든 통장만 부르면 누구나 승자   백발로옹한테 손자놈이 "장훈"도 치고 대감이 초동앞에 무릎도 꿇고 지혜의 장검으로 적을 족치는 장기란 로소동락 공평한 놀이   승승장구 나가며 "장훈"을 치다 아차 실수 한번에 통장을 받아 제발 한수 물려달라 조르는 젊은이 "끊어진 목 이어내나?"거절하는 늙은이   이기면 신나서 큰소리 탕탕치고 지고도 좀체로 승복않고 다시 한판 마주 앉아 쪽을 들면 여름해도 꼴깍 누구의 창조인지 즐거운 신선놀이   만인이 즐기는 오락같은 체육 초단도 있고 국수도 있고 장기수 키워주는 책자도 많은데 그 어디나 이기는 지혜뿐일세.   넓은 세상 와보니 희한도 하네 이기려고 두는 장긴 저급이라네. 상대보고 승부를 정해야한다며 젊잖은 어르신 일깨워주네.   묘수써서 대방을 몰아부쳐서 진땀을 여지없이 빼놓고나서 우연히 실수한척 통장틈 주고 두손들고 항복하며 칭찬하란다.   시골에천치같이 서 나고자라 세정에 무뎌 어리석고 내고지식한 3천 8백살을 산다고해도 그런 고명한 수 못배워 니다. 낼걸세.    2006.7(2006년 "장 백산"5기)던 다녀       고떠돌부평같이 니다  
15    밀물(외2수) 댓글:  조회:1696  추천:0  2013-12-29
     밀물(외2수)       철령    박병대    이젠 귀찮다   고스란히 물러가려무나   보기도 싫다는데   너는 왜 치마자락 흔들며                  자꾸 쫓아와 매달리는거냐     가거라, 저 멀리로   열련에 자꾸 몸부림치기보다   조용히 물러나는것이  한결 귀여울것 같구나    (료동문학 제7기)     계절의 약속    온다고 먼저 호들갑떨지 않고   간다고 떠들썩 소란피지 않네   천금같이 소중한 그 약속 지켜   조용히 왔다가 소리없이 사라지네     하늘의 별 따온다 허풍떨줄 모르고   제 할일 차근차근 빈틈없이 다해놓고   대단하단 찬사엔 오히려 낯붉히며   미진한 일 혹시 있나 돌이켜보네     번번히 새약조 마구 날리지 않고   한번의 약속 천년바위 되였네   믿음은 쌓여 하늘 찌른 금자탑되고   그리움은 뭉게구름마냥 피여오르네          (료녕조선문보2011.4)            산간의 내물     첩첩이 푸른산   굽이굽이 벽계수   차창밖을 에돌면서   숨박꼭질하는가?     소꿉놀이시절의 딱친구마냥   옷깃을 당기며 따르다가도   순식간에 자취를 감춰버리는   수수께끼 많은 산간의 내물     시작은 어디고 끝은 어디냐   산열매 무르익은 이 산이 좋아   수수이삭 붉게 타는 저 곬도 좋아   이곳저곳 빠짐없이 찾아다니냐?    인삼캐는 총각들 마른 입술은   장생불로 약수로 축여줬다지  사과따는 처녀들 고운 홍조는   불타는 단풍잎에 물들었다지?    꽃피는 산촌의 꿀같은 이야기   손님들께 신나게 자랑타가도   바쁜듯 수줍은듯 숨어버리는   생각도 많고 많은 은빛 물줄기     복받은 이 땅의 웃음꽃 안고    눈부신 래일 향해 달음질치는   아, 산간의 생명수, 너는 진정   이곳 주인들의 성미를 닮았구나.      (료녕조선문보 1984.9.28)      
14    고향을 다녀왔습니다((외2수) 댓글:  조회:1690  추천:1  2013-12-29
 고향을 다녀왔습니다(외2수)                 (철령)   박병대      고향을 다녀왔습니다      부평같이 떠돌아 긴긴 50년      고향은 너무 많이 변했습니다.      산도 강도 옛모습 아니였습니다.        진흙창 짚신 뺏던 달구지길은      아스팔트 단장하여 나를 반기고      삼신할미 바람에 이영이 울부짓던      초가집 한숨도 자취를 감췄습니다.        가난 때 곱게 벗은 고향길 들어서니      흥얼흥얼 코노래 즐거웠습니다.       동년의 꿈이 어린 숲도 들도 반가와      동구앞 로송곁에 차를 내렸습니다       기정아, 정기야, 내가 왔단다      소리치면 맨발로 달려나올 옛친구 문앞에서 나는 그만 못박혔습니다 집집마다 쇠장군이 눈 부릅뜹니다   고향엔 옛동창들 없었습니다 한사람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기정이는 병으로 저세상 가고 정기도 로무길서 숨졌답니다   소꿉놀이친구 이름 일일이 불러봐도 메아리만 이 가슴 오려냅니다 양현이는 도회지신사 된지 오래고 수월이도 금 캐러 바다건너 갔답니다   생기 잃은 마을엔 고요만 앓고 모교도 간판 뗀지 아득한 옛날 나는 쓰디쓴 눈물에 앞이 가리여 주검같은 고향을 등졌습니다   불효자는 고향 잃고 방황합니다 동년의 고운 추억 산산이 깨여져 송림은 놀다가라 옷깃 당기건만 내 가슴엔 아픔만 더해집니다.   (연변문학 2008년 제5기)            기다림 우리에게 기다림이 있다는것은 세상에 더없는 행복이여라 우리에게 기다림이 있다는것은 하나의 희망이 숨쉬는게다   그 간절한 기다림이 있어 식은 재속에서 불티가 살아나고 그 간절한 기다림이 있어 눈속에서 씨앗은 싹틔울 준비한다   오랜 오랜 기다림끝에 빙산은 녹아서 강을 이루고 오랜 오랜 기다림끝에 검푸른 바다도 뽕밭이 된다   때가 되면 천년 자던 화산도 기지개 펴고 때가 되면 극심한 아픔도 추억으로 즐겁다 우리의 기다림은 인내를 키운다 기다림은 단꿈을 꽃피워 향기롭다    시향만리 2010년 제5호)        전화기 유리창 허비는 따사로운 봄해빛 방안을 요리조리 간지리는데  머리 하얀 할머니 아래목에 앉아 하염없이 창문턱 바라만 보네   어느해 어느날부터인가 신주같이 모셔놓은 빨간 전화기 정성에 고이고이 닦이고 닦여 반짝반짝 눈부시게 윤기 흐르네   행복 따러 멀리 떠난 점점 혈육들 얼굴은 못 보아도 목소리 놓칠가 종다리 함께 놀자 재촉하건만 잠시도 방 못 비우는 애절한 마음   열흘이 가고 보름이 지나도 놀리는듯 입을 다문 앙증한 괴물 차라리 장식품이면 귀여우련만 끝없는 기다림에 한숨만 잦네    (시향만리 2010년6월호)
13    다람쥐의 계시 댓글:  조회:1553  추천:0  2013-12-29
생태수필                               다람쥐의 계시                                박병대    산가에 살면 산의 혜택을 입고 물가에 살면 물의 혜택을 입는다는 말이 조금도 그름이 없다. 료북의 명산 룡수산아래에 사는 나는 이 산과 깊은 인연을 맺고있다.     구만리장공을 자유롭게 날다가 목이 마른 청룡  한마리가 은빛 파도 반짝이는  채하강의 맑은 물을 마음껏 마시고 혼곤히 잠들어 산으로 변했다는 아름다운 전설을 지닌 룡수산은 사시장철 나에게 즐거움만을 선사하고있다.  4월이 기울 때부터 룡수산은 살구꽃, 배꽃, 아카시아꽃이 잇따라 하얗게 피여 온 산이 은빛단장을 한다. 베란다의 창문을 열면 솔솔 불어오는 봄바람이 그윽한 꽃향기를 날라와 코를 간지럽히면 나의 두 다리는 자석에 끌린 쇠덩이마냥 산으로 향해진다. 참새 종달새의 정다운 부름따라 산등성이에 올라가면 산우에는 유람객들로 붐빈다. 청신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키면서 록음짙은 유보도를 자유자재로 걷노라면 노란빛, 재빛의 다람쥐들이 길에 나와서 들을 반갑게 맞이하고있다.       룡수산에는 다람쥐가 얼마나 많은지 이르는 곳마다 다람쥐의 세상이다. 사람들과 무척 친숙해진 다람쥐들은 우리가 가까이 가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가만히 앉아서 제 할짓을 하거나 사람들앞에서 새까만 눈을 뙤록거리며 한참동안 재롱을 부리다가는  숨박꼭질을 하자는듯 숲속으로 몸을 살짝 숨긴다. 눈이 내린 겨울에 다람쥐들은 먹이를 찾기가 어려운지 사람들한테 찾아와서 도움을 청한다. 고놈들은 애들이 까먹는 개암이나 과자등속을 보면 저도 좀 얻어먹겠다고 찍찍거리고 맴돌이친다. 게그맨 못지 않은 다람쥐들의 익살에 배를 끌어안고 웃음을 참지 못하던 사람들이 먹이를 조금씩 주면 다람쥐들은 날름날름 받아먹고나서 고맙다는 뜻으로 고개를 갑삭거리다가 다시 사람들을 쳐다보면서 먹이를 좀 더 달라고 아양을 떨며 졸라댄다. 사람한테서 먹이를 넉넉히 얻은 다람쥐들은 먹다 남은것을 창고에 저장해두려고  제 보금자리에 물어다놓고나서 다시 찾아오군 한다.     다람쥐들이 어느 때부터 사람들과 이렇게 친해졌는가? 손꼽아 보면 이제 십년도 될가말가한 시간이다. 이전에 나는 룡수산에서 다람쥐를 본 기억이 별로 없다. 그때는 산속에 사는 다람쥐의 수도 많지 않았거니와 그보다도 다람쥐들이 사람을 만날가  두려워하여 인적기만 있으면 숲속에 자취를 감춰버렸기때문일것이다.      옛날 룡수산에는 도라지, 더덕, 취나물 등 산나물도 많았고 다람쥐, 쪽제비, 토끼, 여우 등등의 야생동물들도 욱실거렸다 한다. 그러나 욕심많은 인간들이 산속의 안녕을 깨뜨리고 먹을만한 산나물은 뿌리도 남기지 않고 캐서 야생동물들의 먹이래원이 고갈된데다가 야생동물을 닥치는대로 포획하였기에 많은 동물은 멸종되거나 또는 멸종의 위기를 맞았다.   천행으로 목숨을 건진 야생동물은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깊숙한 골안에 숨어서 비참한 삶을 살았을것이다. 우리가 그들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지만 아마 산짐승들은 우리 인간을 저주하는 말을 얼마나 많이 했을지 모른다. 자연은 우리 인류와 야생동물을 키워준 포근한 보금자리이다. 엄격히 따진다면  야산과 초원의 원주인은 야생동물이지 우리 인류가 아니다. 인류는 마치  아메리카를 강점한 구라파식민주의자들이 토착민을 탄압하듯 평화롭게 살아가는 산야의 원주인들을 박해하고 몰아냈거나 잡아먹으며 멸종까지 시켰다. 인간은 우주 만물의 령장이라 자칭하면서 지구에 사는 생명체들을  평화와 화합의 길로 이끈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독재만을 감행해왔었다. 그로인해 수십억년동안에 형성된 대지의 생태평형은 여지없이 파괴되였다. 실로 는 속담과 같이 인류의 과욕는 자연계에 크나큰 피해를 입혔는데 그것은 또 고스란히 인류자체의 생존에까지 큰 위협을 자초하지 않았던가? 일년 사계절 새옷을 갈아입으며 인류와 야생동물에게 무궁무진한 을 제공하던 아름다운 산은 늙은 문둥이의 머리꼴로 변해 비만 오면 홍수가 범람하고 산사태가 일어나는것이 어디 한두곳이던가? 자연속에서 태여나 자연의 혜택을 받아오다가 다시 자연의 품속으로 돌아가면서 자신을 먹여주고 키워준 어머니-자연을 정복하겠다고  를 저지르던 사람들은 지난날에 저지른  수치를 뼈저리게 느끼고 후속조치를 대느라 바삐 서두르고있는데 천만 다행으로 그 효과가 바야흐로 나타나기 시작했으니 불행중 다행이다. 한달전에 나는 산에서 푸득거리는 꿩 한쌍을 보았다. 아마도 룡수산이 근년에 많이 변모하여 고향을 그리워하던 조상들의 마음을 헤아려 멀리 피난갔던 꿩들의 후손이 보금터를 찾아온 모양이다. 그리고 며칠전에는 산골짜기에서 길이가 2메터는 됨직한 뱀 한마리가 나와서 볕을 쪼이다가 적의를 품지 않은 사람들의 눈길을 감지하고나서 저으기 안심이 되는지 숲속으로 스르르 꼬리를 감추었다. 외계정보에 무딘 뱀은 가 종식되였다는 소식을 뒤늦게 입수하고 그 허실을 친히 확인하려고 에 시찰을 나온듯 하다. 이제 인간들의 의식전환이 동물세계에서 널리 홍보된다면 을 찾아오는 들은 줄을 설것이다. 보라, 저기 머리우에서 까치들이 나무꼭대기우를 빙빙 돌며 보금자리를 찾고 산토끼들이 이사짐을 싸느라 땀을 흘리고있지 않는가? 우리 인간은 하루 속히 지난날에 저지른 과오를 뼈저리게 뉘우치고 그들이 오는 길에 을 켜고 를 걸고 따뜻한 친선의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 우리 인간은  대자연의 한 가족인 야생동물에게 지난 세월에 진 빚을 말끔히 청산하고 다함없는 사랑을 몰부어야 할것이다. 나는 이제 우리의 손길아래 룡수산과 모든 산들이 동화속의 꽃동산같이 아름답게 꾸려지고 인류와 야생동물간에 불신의 장벽이 봄눈같이 스르르 녹고 신뢰의 성이 구축되여 가 로 탈바꿈하고  의 새시대를 활짝 열어갈것을 바라 마지않는다.                           2007-06-22
12    환결보호에 대한 단상 댓글:  조회:1559  추천:1  2013-12-29
수필 “ 환경보호”에 대한 단상                     (철령) 박병대 화창한 봄이 오니 창문턱에 있는 알로에는 가지를 치며 쭉쭉 자라난다. 안해는 알로에가지를 옮기려고 룡수산골짜기에 부식토를 파러 갔다. “할머니, 산의 흙을 파면 생태평형이 파괴된다던대요.” 하학하고 돌아오던 이웃집 딸애가 앵두같은 입을 호물거리며 생긋 웃어보였다. 환경보호에 관한 교육을 얼마나 받았기에 천진한 소녀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왔을가? 예순고개를 바라보는 내가 어린애들보다 소견이 좁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 안해는 자책감에 낯을 붉히며 돌아서고말았다 한다. 우리 인류는 생존과정에서 먼 앞날을 내다보지 못하고 눈앞의 리익만 추구하다가 생태평형파괴로 인한 고배를 실컷 마셨다. 뒤늦게야 환보교육을 진행하고 식수조림, 야생동물보호, 진펄개간중지 등등의 조치를 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대손손 내려오면서 자연을 박해한 죄는 너그러운 용서를 빌기에는 거리가 멀었다. 장백산의 그 많던 호랑이나 아미산의 참대곰이 멸종의 위기에 직면했는가하면 장강에 특대홍수가 터지고 련속되는 황사가 화북평원을 뒤덮고 사막이 옥토를 삼켜버리는 등의 비상사태가 연해연방 뒤따르고있다. 국제체육경기에서 중국의 녀선수들은 금메달을 보란듯이 따오는데 남선수들은 많은 종목에 입장권도 쥐지 못하는것을 보고 누군가 “음성양쇠”라는 묘한 단어를 지어내였는데 이것도 일종의 생태평형파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생태평형문제를 두고 동포사회를 돌아보니 실로 기막혀서 몸서리칠 지경이다. 십여년간 고중3학년의 교수를 맡은 나는 교단에 오를 때마다 우리학생들의 남녀 성별비례가 1대2를 넘는 괴이한 현상을 보고 놀람을 금치 못한다. 옛날 남존녀비가 녀존남비로 변한것도 아닌데 어이하여 남학생이 이리도 적은겐가? 그런데다 월고요 기말고시요하는 시험을 쳐보면 성적이 괜찮은 학생은 거의가 녀학생들이고 남학생은 쌀의 뉘만큼도 안되니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가? 정말 우리 민족도 생리적인 음성양쇠가 되여서 생남생녀의 평형이 파괴되여 그런지 아니면 딸들은 총명하게 낳았는데 아들들은 취중생산을 해서 그런겐지? 지금 도회지에는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사업에서 성과를  올린 녀중호걸이 수두룩하다. 그런데 그들가운데 인물체격 버젓하고 인품도 좋지만 알맞는 배우자를 찾지 못해 꽃나이를 허송하며 랭가슴앓는 처녀들이 비일비재이니 실로 가슴아픈 일이 아닐수 없다. 그런데 시골에 내려가보니 사정은 이와 정반대이다. 30대의 총각들이 마을마다 “가강패”를 이루고있으니 우리 민족 청년들의 성별평형이 파괴되였다는 추측은 그른것 같다.오직 성별분포의 불균형이 오작교가설에 어려움을 더하고있는것이 아닐가? 우리 민족은 남존녀비의 잠재의식이 커서 입으로는 생남생녀일반을 외우고있으나 딸을 낳으면 서운해 하고 아들을 낳으면 입이 함박만해서 백날잔치, 돌잔치를 차리기 마련이다.그들은 족보를 이어주는 귀공자가 쥐면 터질가 불면 날아갈가 애지중지하면서 잘먹이기, 잘입히기 경쟁에 열을 올리고 손끝하나 놀리지 않게 하니 애들은 옛날 왕자도 저기 나앉아라 호통칠 지경이라 생각하는건 저하나뿐이고 례의도 인정도 모른다. 응석받이로 자란 애들 다수는 지력이 총명한 유치원생 꽁무니도 못따르고 의지력, 창발력이란 그림자도 찾을수 없다. 그런데 부모들은 중학교도 탁아소로 보는지 애 손에 뭉치돈 쥐여주고 반주임한테 맡기면 부모의무 다한것으로 알지만 기초가 엉망인 애들 선생님 강의는 소귀에 경읽기라, 죽기보다 싫은 학교생활이지만 학부형의 억압에 못이겨서거나 돈 얻어쓰는 재미에 몸은 교정에 매였으나 마음은 답밖에 나가있다. 수업시간에는 내죽었소 하고 책상에 엎디여 시계소리만 재촉하다가 하학종이 울리면 돌격의 선봉이다. 자유의 천사가 된 그들은 록화청,유희청이며 소매점을 문턱닳게 쏘다니고 부모들은 보지도 못한 생일파티도 척척 벌인다.힘자랑할곳을 못찾아 골머리를 앓던 그들은 싸움판에도 곧잘 끼여들어 대장부의 기상을 보이기도 하는데 일시적 통쾌에 수천원의 대가를 요구하니 녹아나는건 부모들 돈지갑뿐이다. 자비생모집덕분으로 고중문에 들어와서 지옥살이 3년에 백지장보다 값없는 졸업장을 받아쥔다해도 대학진학은 하늘의 별따기라 사회에 발을 들여놓으니 촌닭 관청에 온듯 처처가 심산이다. 십년공부나무아미타불이라 탄식하며 터벅터벅 환고향하니 백수건달신세에 자립이란 엄두도 낼수 없다. 이와 달리 총애를 그리 받지 못한 딸애들은 오히려 분발하여 대학진학도 척척 하고 락방하더라도 녀자의 우세를 발휘해서 도시진출이나 섭외혼인을 어렵잖게 하니 쓸쓸한 시골을 지키는자는 늙은이와 총각대오뿐이다. 이런 총각들 면대를 보면 저마다 두목이요 체격을 보면 관우, 장비인데 속에 든게 없다고 처녀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으니 괘씸하다 해야 할가 아니면 억울하다 해야 할가? 적령기의 청년들이 혼인대사를 치르지 못하니 우리 민족의 인구는 마이나스성장을 피할수 없다. 이런 상태가 십년, 이십년 지속된다면 나라의 시책이 아무리 좋더라도 우리 민족은 동화나 자멸의 비운을 겪지 않을수 없으니 참혹한 현실이다. 생태평형이 파괴되여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 파괴의 주되는 원인은 문화차원에서 기인된 생태평형파괴가 아닐가? 자연계의 생태평형파괴가 환경오염과 관계있는것과 같이 처녀총각들의 생태평형파괴도 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리는 확실히 오염된 공간에서 살면서 저도모르게 오염을 조성하고있다. 시도때도 없는 술놀이, 밤을 지새우는 마작놀이, 신근을 잃고 날아가는 돈뭉치만 바라는 황금몽……. 이런 환경에서 자란 애들이 보는것이란 밥상우의 성쌓기고 듣는것은 육담이고 맡는것은 알콜,니꼬진 냄새이니 “생명1호”요 “뇌황금”이요 하는 약을 밤낮으로 먹인다해도 구정물속의 미꾸라지 룡되기는 틀린 일이다. “웃물이 맑아야 아래물이 맑다”는 속담이 있지 않는가? 어른들부터 솔선하여 주위의 악환경을 정화해야 한다. 겨레의 성산에 있는 천지의 맑은 물로 오염된 령혼을 말끔히 씻고 시대의 앞장에선 농부로 되여야 한다. 우리의 농촌이 무지와 라태와 빈궁에서 벗어나 문명과 근면과 풍요에로 나간다면 자라나는 세대들 누구나 슬기로와 처녀류실의 비극도 종말짓게 되고 옥동자들의 소쩍놀이에 온 마을에 음음이 넘쳐나지 않겠는가? 생활환경의 보호는 자연보호와 마찬가지로 우리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되였다. 우리의 자손을 위해, 우리 겨레의 생존을 위해 환보사업에 일떠나서자. 시간은 하루가 급하고 일분일초가 급하다.                 (료녕조선문보2000년 7월 14일)     
11    조선광복의 선구자------고헌 박상진의사 댓글:  조회:4002  추천:1  2013-12-29
      머리글      간악한 일본제국주의가 삼천리 금수강산을 침략하여 조선을 일제의 식민지로 삼은 1910년의 한일합방때로부터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던 이 10년동안은 일제의 잔혹한 탄압과 무단통치가 극도에 이르렀던 시기였다.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삼천리강산 방방곡곡에서 의병들이 벌떼같이 일어났지만 그들의 반일투쟁은 일제의 무차별진압에 의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번번히 실패했다 .              이 암담한 시기에 나라와 백성들을 불구덩이에서 건져내려고 일떠난 애국지사의 한사람이 바로 고헌 박상진(1884_1921)의사이다.조선조 말기 명성높은 문한가(文翰家)에서 태여난 그는 어릴때부터 량호한 가정교육을 받았다. 다섯살때부터 한시를 잘지어서 신동이라 소문난 그는 령남유림의 거두인 허훈선생과 허위선생이 꾸린 흥구의숙에 들어가서 정치,력사, 병학 등 새지식을 배웠고 영웅,렬사들의 전기를 탐독하면서 강한 애국심과 원대한 포부를 키웠다. 그는  대한제국이 성립되자 조정의 부름을 받고 상경하여 국내 최고법관으로 계시는 허위선생의 인도하에 국내에서 처음으로 근대교육을 실행하던 양정의숙에서 입학하여 나라를 바로 세울 새로운 학문을 배웠다. 을사륵약(乙巳勒约)의 체결로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제에게 완전히 빼앗기자 허위선생이 대한제국의 최고판사직을 사퇴하고 의병을 일으켰을 때 박상진의사는 양정의숙에서 재학중인 학생신분이였지만  의기상합한 동지들을 규합하여 물심 량면으로 의병운동을  크게 도왔었다. 양정의숙을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한 박상진의사는  대한제국에서 처음으로 치르는 판사시험에 참가하여 국가적으로 뽑은 7명의 판사중 수석으로 선발되여 평양재판소의 판사로 발령받았다. 그러나 그는 부임직전에 한일합방(韩日合邦)이 체결 되였다는 비통한 소식을 듣고 나라를 구하는 투쟁을 벌이려고   판사직에 부임하는것을 결연히 거절하였다. 박상진의사는 독립운동을 준비하기위해 만주와 연해주로 건너가서 애국지사들을 만나 독립운동의 방략을 토의하였으며 구국의 진리를 체득하려고 두차례나 바다를 건너 중국의 남경, 상해, 광주 등 지방으로 가서 봉건전제제도를 뒤엎은 중국의 사회현실을 료해하였고 중화민국을 창건하고 초대림시대통령을 지낸 중국민주혁명의 선구자 손중산선생을 만나 신해혁명의 경험을 학습하고 조서국광복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였다. 반일무장투쟁을 진행하려면 무엇보다 중요한것이 충족한 군자금의 보급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아는  그는 자금을 마련할 기반을 닦기위해 자기집의 칠천석에 달하는 토지를 모두 담보로 하고 대부금을 내서 대형의 무역회사인 “상덕태상회”를 꾸리였다. 동시에 그는 “상덕태상회”의 지사를 전국 각지와 해외에 까지  꾸려 조국광복투쟁에 필요한 군자금을 마련하는 한편 상덕태상회와 그 해내외 지점들을 의병운동을 진행하는 애국지사들의 비밀거점으로 삼았고 만주에 진출한 의병장들이 반일투사들의 자질을 제고시키기 위한 신흥군관학교를 꾸릴  자금도 마련해주었다.      박상진의사는 “조선국권회복단중앙본부”를 세우고 반일투쟁을 진행하다가 채기중이 령도하는 “풍기광복단”과 국내에서 반일투쟁을 벌이고 있는 의병들을 규합하고 계몽운동을 결합하여  전국적인 반일결사조직인 “대한광복회”를 결성하고 총사령으로 추대되였다. 그는 오로지 계몽운동과 무장투쟁을 밀접히 결합시키는것만이 나라를 구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진리를 굳게 믿고 계몽운동을 진행하는 한편 일본제국주의자들과 그 앞잡이들을 지혜롭게 처단하면서 광대한 인민군중들에게 반일광복투쟁의 필승의 신념을 심어주었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일본헌병 경찰들의 폭압에 의해 국내에서 무장투쟁을 벌이기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하자  박상진의사는 광복회원 리진룡을 일제의 세력이 상대적으로 박약한 중국 동북지역을 책임진 광복회부총사령으로 파견하였다가 리진룡이 체포되자 그 후임으로  김좌진장군을 파견하여 청산리전투를 비롯한  반일무장투쟁에서 눈부신 성과를 이룩하였다. 박상진의사는 항일투쟁의 전 국면을 고려하여 본인의 안위를 티끌만치도 생각하지 않고 결연히  신변의 안전이 극히 악렬한 국내에 남아서 반일투쟁을 지휘하였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후 대한민국림시정부가 수립되기 전인 비록 짧디짧은 10여년간이지만 박상진의사는 조국광복의 홰불을 들고 반일구국투쟁의 진두에서  빛나는 업적을 이룩하였다. 생모의 초상을 맞아 고향에 왔다가 상청(丧厅)에서 왜놈경찰에게 불행하게 체포된 뒤 박상진의사는 감옥을 자신과의 투쟁장소로 삼고  왜놈들을 호되게 꾸짖었으며 3년 8개월이나 되는 긴 시간동안 놈들의 무려 수십종에 달하는 비인간적인 악랄한 고문에도 입을 철통같이 다물고 비밀을 지켜 혁명가로서의 지조를 지킨 어엿한 귀감으로 되였다. 사형을 당하던 날 박상진의사는 형장으로 나가기 전에  다음과 같은 절명시를 남기였다.   절명시. 다시 태여나기 어려운 이 세상에                        다행히 남자로 태여났건만 아무 일도 이루지 못하고 떠나가려니 청산도 조롱하고 록수도 비웃네. 绝命诗 难复生此世上 幸得为男子身 無一事成功去 青山嘲水嚬   박상진의사의 짧고도 빛나는 일생은 우리 후손들에게 무궁무진한 자호감을 안겨주고 있다. 박상진의사가 창건하고 령도한 대한광복회의 회원들은 박상진의사의 유지를 받들고 중국에서 반일투쟁을 활발히 벌이였는데 광복회의 회원수는 2천여명에 달하였다. 그들중의 일부는 후에 대한민국림시정부의  골간으로 활약하였다. 한국에서 1960년에는 박상진의사추모사업회가 발족되였고 그해 9월 15일에 울산시 달성공원에 박상진의사 추모비의 제막식이 열렸다. 1963년 대한민국정부에서는 박상진의사에게 건국훈장(독립장)을 추서하였고 1978년에는 박상진의사추모사업회를 국가보훈처에 사단법인으로 등록하였다. 대한민국정부에서는 1996년 8월에 박상진의사를 로 선정하였고 박상진의사의 동상도 세웠다. 2007년에는 박상진의사의 생가를 복원하여 으로 만들고 만 수천점의 유물을 전시하고있다. 박상진의사와 에 대한 연구는 날이 갈수록 깊이있게 진행되여 천구백십년대 조선인민의 반일투쟁력사의 공백을 메우고있다.   1. 될성부른 나무   백두대간 산줄기를 타고 남으로 내려오면 금강산, 설악산,오대산을 거쳐 태백산맥에 이르게 된다.이곳으로부터 백두대간과 갈라져 동해안을 따라서 남으로 뻗어내려간 산줄기가 락동정맥이다. 룡이 춤추는 형상을 이룬 무룡산(舞龙山)은 그 락동정맥의 끝자락에 위치한 항구도시  울산을 지켜온 성스러운 수호산이다. 울산에서 북으로 십여리를 내려가면 무룡산서쪽으로 확 터진 넓은 벌이 있다. 이 평야에 수십호의 농가가 있다. 마을에 여러그루의 소나무가 정자모양을 하고있어서 마을 이름을 송정(松亭)이라 하였는데 마을에는 밀양박씨 제 48세 청풍당(清风堂) 박영손(朴英孙)의 후손들이 살고있다.  1884년 음력 섣달 초엿새날, 무룡산우로 서서히  솟아오른 아침해가  겨울날의 추위를 몰아내려는듯 눈부신 해살을 부채살같이 펼친다. 여느때와 달리 오늘은 서기어린 광채가 마을 중심에 자리잡은 “ㅂ”자모양의 박진사댁 안뜰에 감돌고있다. 박진사댁이란 령남에서 문장가로 명성이 높은 박용복(朴容復)진사네가 대대로 살아오던 옛집을 말한다. 박진사는 여러해전에 린근 록동마을( 지금의 경주군 외동면)에 새로 집을 지어 이사갔고 지금 고택에는  호적을 경주군 록동리에 둔 박헌복의 양아들 박시규(朴时奎)일가가 살고 있다. 박시규는 박진사의 세째아들이였다. 박진사는 자기의 친동생인 박헌복(宪復)댁에 아들이 없었으므로  그의 세째아들 시규를 동생댁의 대를 잇게  양자로 출계(出系)시켰다. 지금 박시규는 송정동마을에 있는 박용복진사의 이 옛집에서 양부모를 모시며   살고있다.  박시규댁에서는 이른 아침때부터 온 집 식구들이 초조감에 싸여 신경을 곤두 세우고있었다. 여러해동안 애기의 울음소리 한번 울리지 않던 박씨가문에서 박시규의 안해가 출산을 하게되는 날이였기때문이였다. 그런데 임신부가 몸을 풀려고 산실에 들어간지 반나절이 되였는데 산실쪽에서는 아직까지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혹시 난산이 아닐가? 아무리 첫아기를 낳는다지만 이렇게 오래 시간을 끌수가 있나? 박씨댁사람들은 뇌리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런 말을 감히 입밖에 내놓지 못하였다. 녀자가 시집을 가서 아기를 낳는것은 여상사지만 박진사댁은 남들과 사정이 달랐다.  오늘 태여나는 아기는 성별에 따라 운명이 달라지는 처지에 놓여있었다.   오늘 박시규의 안해가 딸을 낳는다면 그 딸은 박헌복의 손녀로 될것이지만 만약 아들을 낳는다면 그 아기는  박용복진사의 양손자로 될판이였다.  박진사의 큰아들 시룡이의 슬하에 그때까지 일점혈육이 없는데다가 둘째인 시긍(时兢)이 마저 슬하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요절한 처지여서 박용복진사는 가계가 끊어질 위기를 맞고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동생 헌복의 가계를 잇도록 출계시킨 시규가 아들을 낳으면 그 아기를 다시 시규의 형님인 시룡(时龙)에게 양자로 주도록 결정했기 때문이였다.  출산을 할 예정한 시간이 조금 지났건만 산실쪽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어쩐지 불안스럽구나.의원이라도 불러야 되지 않을가?” 사랑방에서 동생과 마주 앉아 바깥의 동정에 귀를 곤두 세우고 있던 시룡이가 동생 시규에게 넌지시 물었다.  “산실에 어머님과 형수님이랑 다 계시고 또 린근에 소문난 산파까지 데려왔으니 과히 우려할 필요는 없을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수씨께서 워낙 초산을 하는지라…”  그들이 한창 걱정을 하고있을 때 산실쪽에서 누군가 급히  달려오는 소리가 났다. 시규가 방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자기집의 하인이였다.  “산실에서 무슨 소식이 없더냐?”  “예, 방금 마님께서 순산했나이다.”  “아들이더냐, 딸이더냐?”  박시룡이 궁금해서 급히 물었다.  “달덩이같은 귀동자를 생산했다 하옵니다.”  “참으로 천우신조(天佑神助)로군.호-”  형님인 시룡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였다. 시룡이는 슬하에 아들이 없어서 근심걱정이 태산같았는데 다행히 제수씨의 몸에서  자기의 대를 이을 양자가 태여났으니 그 기쁨은 실로 이를데가 없었다. 동생인 시규도 자기 사랑의 첫결정을  자식이 없는 형님댁에 바쳐야하는 서운함이야 이루 표현할 수 없었지만 종가집의 대부터 잇게 하는 것이 가문의 어길수 없는 법도라 자기 안해가 순산을 한것만으로도 한시름을 놓아야했다.   박진사의 가문에서는 2십여년만에 처음으로 고추가 달린 아들애가 태여났으니 경사치고도 으뜸가는 경사라  집안팍은 온통 기쁨으로 들끓었다.  박진사는 이 귀한 손자애의 자(字)를 기백(玑伯)이라 하고 호(号)를 고헌(固轩)이라 명하고 관명을 항렬에 의해 상진(尚镇)이라 지었다.   양자로 태여난 상진이는 어미 배속에서 나온지 백날만에 생모 리씨의 품을 떠나 큰어머니인 박시룡의 부인 창녕조씨의 품안으로 옮겨졌다. 너무도 어릴때 양부모댁으로 넘어간 상진이는 철들기전까지 양부모를 친부모로 알고 친부모를 숙부모로 알고 자랐다. 온 가족의 사랑을 한몸에 안은 상진이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양부 양모가 계시는 경주 록동과 생부 시규,생모 여강리씨가 계시는 울산 송정을 오가면서 충실하게 자랐다.  일찍 고향인 영천에서 살다가 울산으로 이사와서 울산의 거부들과 인척관계를 맺은 박용복진사는 살림이 잘풀려 몇해만에 만석거부로 되여 경주와 울산일대에 많은 토지를 차지하고 있었다.그는 울산린근의 토지를 관리하기 위해서 송정에 고택을 보유하고 있었고 그 고택을 박상진의 생부인 아들  시규로 하여금 그의 양부가 된 동생 헌복을 모시고 함께 살게끔 하였다. 그 시기에 조정에서는 울산을 비롯한 몇몇 변방지역은 문인이 나지 않는 벽지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 지방 출신의 선비들을 깔보고 그 지방의 선비들이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는것을 내부적로 규제하는 지역차별이 엄중하였다. 대대로 내려오면서 문장가와 인재를 속출한 박씨가문에서 조정의 지역차별로 인해 자손들의 벼슬길이 막히는것은 도저히 용납할수 없는 일이였다.그렇다고 이 일을 가지고 칼자루를 쥔 조정과 맞서 싸울 힘도 없는 처지였다. 박용복진사는 자손들의 출세를 위해 력대로 문인들이 많이 나온 경주지역의 록동마을에 사택(私宅)을 마련하고 일가족의 호적(户籍)을 다 경주의 록동에 올리였다. 박용복진사는 울산에 토지가 많이 있었으므로 동생 헌복네를 호적은  록동에 두고 울산 송정의 고택에서 살면서 울산지방의 토지를 관리하게 하였다.그리하여 박진사와 헌복의 자식들인 시룡, 시규 두 형제가 벼슬길에 오르는데 아무런 장애도 없게 되였다. 상진이가 두살 잡히던  1885년(고종22년)에 그의 생부인 박시규가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그는 조정의 부름을 받고 안해와 자식들을 시골에 남겨두고 서울로 올라갔다.학문이 뛰여나고 명필인 그는 성균관(成筠馆)의 전적(典迹)으로 벼슬살이를 시작하여 사간원(司谏院)의 정언(正言), 홍문관(弘文馆의 시독(侍读), 장례원(掌礼院)의 장례(掌礼), 규장각(奎章阁)의 부제학(副提学), 승지(承旨) 등 관직을 력임하였다.   박진사댁에서는 남녀로소 가릴것 없이 누구나 다 학문을 숭상하였기에 어린 상진이도 말을 배우자마자 할아버지가 계시는 사랑방으로 들어가서 “천자문(千字文)”, “동몽선습(童蒙先习)”,”명신보감(明心宝鉴)” 등을 배우고 또 한시(汉诗)까지 배웠다. 워낙 총기가 출중해 하나를 배워주면 열을 통하는 상진이는 다섯살이 되자 몇백수의 한시를 줄줄 외웠을뿐만 아니라 자체로 시를 지어 읊어서 어른들을 놀래웠다. 박진사댁에 놀러 왔다가 어린 상진이가 즉석에 시를 지어서 읊는것을 본 선비들은 혀를 털고 탄복하면서  문한가문에서 또 신동(神童)이 나왔다며 칭찬을 금할줄 몰랐다.   상진이가 다섯살에 든 어느 봄날이였다. 상진이가 정원을 나와 밖에서 마을의 소꿉놀이 친구들과 뛰여놀다가 점심때가 되어 집으로 달려와 막 대문을 들어서려는데 대문곁에서 한 로파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문난 부자집에서 거지대접이 너무 한심하구나. 돌이 섞인 나락을 주다니, 애구, 기가 맥해서...”   상진이가 고개를 돌리고보니 누데기옷을 입은 머리카락이 하얗게 샌 낯선 할머니가 대문밖을 나오고있었다. 상진이는 그 할머니앞에 다가가서 자루에 든 나락을 보았다. 자루에는 그 할미의 말과 같이 잔 돌이 드문드문 보이는 나락이 한바가지쯤 담겨있었다.   비럭질하는 할머니한테  어떻게 돌이 섞인 나락을 준단 말인가? 상진이는 집의 마름의 처사가 몹시 마음에 거리꼈다.   “할머니. 저와 함께 안으로 들어가세요. 제가 좋은 나락을 바꿔드릴께요.” “아니, 됐다.나는 네 말만 들어도  마음이 기쁘구나.” “아니예요. 어서 들어오세요.” 상진이는 그 거지할머니의 소매를 잡아끌면서 정원으로 들어왔다. “와 일캐쌌노? 동냥바가지를 깨문 우짤락고”   거지할미는 으리으리한 대문안을 들어오는것이 두려워서 오돌오돌 떨었다.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거예요. 제가 어머님께 말씀드릴테니 여기서 잠간 기다리세요.” 상진이는  안방으로 뽀르르  달려가서 어머니한테 도리를 따졌다.  “어머니, 어머니께서 동냥온 할미에게 닭모이로 쓰는 돌 섞인 나락을 주셨나요? 그걸 가져가서 어떻게 돌을 골라먹으라는 거예요? 거지도 우리나 같은 사람인데 사람대접을 해야 되잖아요?”   다섯살난 어린 아이의 입에서 어른도 미처 생각 하지 못할 말이 나오는것을 들은 하인들은 은근히 감탄하였다.   어린 아들의 말을 듣고 크게 깨우친 어머니가 광앞에 와서 청지기더러 방아찧어 먹으려고 남겨둔 벼섬에서 좋은 벼 한자루를 채워 거지할미에게 주게 하였다.   뜻밖에 좋은 벼를 한자루나 얻은 거지할미는 입이 함박만해져 집에 돌아갔다. 거지할미는 사람들을 만나면  박진사댁의 어린 아들 상진이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였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니깬. 다섯살난 애가 어쩌문 소견이 그리도 넓담, 박진사댁의 공자는 장차 큰 사람이 되구말거라우.”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그 거지할미의 입을 통해 어린 상진이의 선행은 경주 록동과 송정지방은 물론이고 린근의 고을에까지 미담으로 전해졌다. 그 뿐만이 아니였다. 어린 상진이는 마을에 사는 다른 량반댁의 자식들과 달리 가난한 집의 어린이들과 함께 놀기를 즐기였다.그는 종래로 온 몸이 흙투성이인 가난한 집의 애들을 깔보지 않았고 그들과 함께 땅에서 딩굴며 놀았다.  그는 집에  맛나는 음식이 생기기만 하면 찬장을 뒤져 음식을 가지고와서 애들과  나눠먹었다. 동정심이 남달리 강한 그는 옷이 너무 떨어져서 살점이 보이는 애들을 보면 서슴없이 자기가 입던 옷을 벗어서 입혀주군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어머니는 해마다 상진이에게 새옷을 여러벌 해주어야만 했다. 그 마을에 김포수라는 사냥군이 살았는데 그에게는  장쇠라는 아들애가 있었다. 장쇠는 상진이가 일반 량반댁의 자식들과 달리 붙임성이 좋고 사람됨됨이가 훌륭한것을 보고 그와 딱친구로 사귀려 하였다. 두 사람은 만나서 얼마동안 세상이야기를 나누어보니 서로 마음이 맞고 뜻이 맞았다. 그들은 량반과 상민의 계선을 벗어나서 절친한 친구로 되어 밤마다 만나면 이야기에  꽃을 피웠다.그 뒤 김장쇠가 의병운동에 참가하게 된것도 어릴 때 상진이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였다.  상진의 생부 박시규가 문과에 급제한지 5년, 즉 상진이가 일곱살에 들던 1890년(고종 27년)에 그의 양부인 박시룡도 문과에 급제하였다. 박씨가문에서는 련이어 경사를 맞게 되니 집안팎에서 어른아이없이 누구나 학문에  진력하는것을 락으로 삼았다. 상진이는 마을 서당에 가서 “4서3경”과 고문을 배웠는데 상진이가 워낙 총명하여 배워주는것을 모두 다 터득하니 몇해가 지나자 서당의 스승도 그의 물음에 대답을 하기 어려워서 진땀을 흘릴때가 많았다. 그리하여 상진이는 서당에서 공부가 끝나면 집에 돌아와서 학문이 연박한 할아버지한테 의문되는것을 물어야만 하였다.   상진이가 열두살이 되던 해에 가문의 좌장인 할아버지 박용복진사가 로환으로 병석에 누웠다. 자신이 이 세상에 며칠 더 생존하지 못하리라는것을 짐작한 박진사는  후사를 부탁하려고 동생 헌복이며 아들 시룡이와 시규 그리고 조카인 시수와 종손인 규진 등 일가족 사람들을 사랑으로 불렀다. 찾을 사람들이 다 사랑방에 모이자 박용복진사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나도 이생에서 살만큼 살았으니 이젠 떠날 때가 다가왔나보구나. 이제부턴 너희들이 우리 가문을 지켜야 하느니라.…  상진이는 장차 우리 가문을 빛내고 나라에 큰일을 할 비범한 재주를 지녔으니 걔에 대한 교육을 추호도 늦춰서는 아니 되느니라. 내가 죽고나면 상진이를 진보면에 있는 흥구의숙으로 보내거라. 그곳에 가서 충신렬사의 기개를 지닌 허위선생을 스승으로 삼도록 조처하거라. 이 일은 시수나 규진이가 인도해주도록 하여라. 이건 내 유언이니 모두들 명심하거라.” “네, 명심하겠습니다.” 모인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하자 박진사는 회심의 미소를 보였다.자식들에게 유언을 남긴 박용복진사는 며칠뒤 조용히 눈을 감았다.  박씨가문에서는 박용복진사의 장례를 치른 뒤 모여앉아 상진이를 허위선생이 계시는 흥구의숙으로 보내여 공부시킬 일을 토의하였다.그런데 흥구의숙에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겨서 상진이를 잠시 보낼수 없게 되였다.                                       박상진의사의 생가 .           2.태백호랑이와 의형제를 맺다   상진이가 13세가 되던 1896년에 왕산 허위는 리기찬 등과 의병을 일으켰다. 조정에서 백성들이 대대손손로 써내려오던 음력을 폐지하고 일본인들이 쓰는 양력을 사용하도록 명을 내리고 긴 머리태를 깎아버리라는 단발령(断发令)이 내려졌던것이였다. 조선의 백성들 특히 유림(儒林)들은 이 모든것이 일제에 의해 강요된 천벌을 받을 짓이라며 분노했다. 그들은 선산일대에서 의병들을 거느리고 당지에 둔거한 왜놈들을 용감히 무찔렀다. 당시 의병대장은 리기찬이였고 허위는 참모장이였으며 중군은 량제안이 맡았다.이와 때를 같이하여  소년장군 신돌석(申乭錫)도 평해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신돌석 /신돌석장군기념비, 경북 영덕군 영덕읍 신돌석은 본명을 신태호(申泰浩) 또는 신태을(申泰乙)이라 하였는데 경북 영해군 남면 (지금의 영덕군 축산면)의 가난한 농민 신석주(申錫柱)의 장남으로서 1878년 3월에 태여났는데 그때 나이가 겨우 19세밖에 되지 않았다. 어릴적부터 남달리 의협심이 강하고 정의감에 불탄 그는 의병운동에 뛰여들어 중군장으로 되여 백여명이나 되는 의병을 거느리고 동해안에 들어온 왜병들의 거점을 여러개나 점령하였다. 신돌석은 왕산 허위와 밀접하게 래왕하면서 서로 정보를 교환하여 왜놈들을 쳤기에 왜놈들은 신돌석을 “태백산호랑이”이라고 하면서 그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 한다. 경주 록동에서 수학하던 박상진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 필마단기로 왜적들을 수없이 쓸어눕혀 “태백산 호랑이”라 명성이 뜨르르한 소년장군 신돌석의 전투담을 들을 때면 격동되어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도 커서 어른이 되면 신돌석장군처럼 의병을 이끌고  간악한 왜놈들을 이 땅에서 깡그리 몰아내고야 말테다. 의병들이 일본침략자들을 호되게 족치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상진이는 마음속으로 그들을 무한히 흠모하면서 장차 자기도 어른이 되면 신돌석과 같은 의병장이 되어 침략자들을 깡그리 소멸하겠다고 속다짐하였다.  이듬해 즉 상진이가 열네살이 되던 1897년에 고종임금은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고치고 대한제국의 황제로 등극하였다. 황위에 오른 고종황제는 국세를 안정시키려는 목적에서 전국각지에서 활동하는 의병장들에게 의병을 해산시키라는 밀지를 내렸다. 의병장 왕산 허위는 고종황제의 선유밀지를 받고나서 의병을 해산시키고 맏형님 허훈이 계시는 진보읍 홍구동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소년장군 신돌석도 고종황제의 선유밀지를 받들고 자기가 거느리던 의병들을 잠시 해산시키고나서 고향인 울산 송정마을에 돌아와  은거하면서 재기할 기회를 노리였다.  평소에 그렇게도 흠모하던 소년장군이 바로 자기가 태여나고 또 생모가 계시는 송정마을에 와서 은거하고있다는 소식을 들은 상진이는 날것만 같이 기뻤다. 그는 이 반가운 소식을 접하자 당일저녁에 송정마을로 달려왔다. “신대장님, 댁에 계십니까?” 신돌석이 거처하는 집을 찾은 박상진은 울안에 들어서자마자 급한 마음으로  물었다. “거 누구시오?” 밖에서 나는 소년의 목소리에 흠칫 놀란 신돌석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는 이 마을 박진사댁의 손자 상진이옵니다.” “아, 박상진이라, 어릴 때부터 신동이라 소문이 자자하던 그 상진군이 아니시오? 어서 방안에 들어오시오.”  신돌석은 바삐 일어나서 방문을 열어주었다. 신돌석이 자기를 찾아온 소년을 보니 비록 애티는 완전히 벗지 못했지만 두눈에 정기가 어리였고 체구가 튼튼하고 기상이 름름하여 이내 마음이 자석같이 끌리였다. “어서 방우로 올라오십시오.” 신돌석은 열정스레 상진이의 손을 잡아당겼다. “신장군님, 먼저 저의 절을 받으십시오.”  박상진이 신돌석의 앞에 엎드리자 신돌석도 답례로  마주 엎드려 절을 하였다. 인사를 나누고나자 상진이가 다급히 말했다.  “저는 의병들의 전투담을 들으면서 장군님을 우러른지가 오래였지만 오늘에야 존안을 뵙는 행운을 맞게 되였습니다... 저는 아직 나이가 어리고 사회견문이 적지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만은 장군님과 다르지 않습니다. 저는 장군님을 의형으로 모시고 장군님과 생사고락을 함께하고싶습니다.”  “아니, 상진군이 미천한 나와 의형제를 맺겠다고요? 말씀만은 고마우나 불가한 일입니다. 상진군은 우리 령남 유생의 거두인 박진사댁의 장손이자 홍문관 시독님의 자제분이고 나는 일개 미천한 농부의 아들인데 지체가 하늘땅과 같이 차이나는 우리들이 의형제를 맺는다는것은 가당치 않은 일입니다.” 신돌석은 상진이가 일시적 혈기로 의형제를 맺겠다고 말한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로부터 지체가 천양지차인 두사람이 의형제를 맺었다는것은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였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나라의 운명이 시방 풍전등화에 이르렀는데 아직까지 량반상민따위를 따진다는게 어디 말이나 됩니까? 우리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든것도 다 그 몹쓸 신분제도 탓이 아닙니까? 지체야 높든 낮든 우리는 다 단군할아버지의 후손들입니다. 마음이 맞고 뜻이 같은 사람들이 의형제를 맺고 서로 도우면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바쳐 싸우려는데 안될 리유가 어디 있습니까?”  상진이가 도리를 따져가며 의형제를 맺자고 고집하자 신돌석이도 대방의 진정에 깊이 감동되여 더는 사양하지 않았다.  “상진군의 뜻이 진정 그러하다면 난들 왜 반대를 하겠소? ” “그럼 장군님께서 허락하신단 말씀이지요?” “그야 물론이지요.” 그들은 사발에 찬물을 떠놓고 서로의 피를 떨궈 골고루 섞은 뒤 천지신명께 맹세를 하고 두사람의 피가 어린 찬물을 마셨다. 상진이가 신돌석보다 여섯살이나 아래였으므로 신돌석이 당연 의형이 되고 상진이는 의제로 되였다.  “형님, 어느때든 형님께서 다시 의병을 일으키실땐 저를 불러주십시오. 형님의 부름만 있으면 이 동생은 어느때 어디든지 한달음에 찾아가겠습니다.”  “그렇게 하세. 자네는 아직 나이가 어리고 한창 공부할  때이니 지금은 다른 생각을 하지 말고 학업에만 주력하게.” “형님의 가르침을 명심하겠습니다.”  상진이는 다음날 서당에 공부하러 가야했으므로 서운한 마음으로 신돌석과 작별하는 수 밖에 없었다. 집에 돌아온 상진이는 고도로 흥분되여 온 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그는 학업에 더욱 열중하는 동시에 장래에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준비로 의기상합한 동지들을 모으는데 힘을 썼다. 그는 서당에서 학습을 하다가 여가만 있으면 생모가 계시는 송정으로 달려가서 의형 신돌석을 만나 나라의 형세와 의병투쟁에 대한 이야기를 듣군 하였다.                   3.흥구의숙(兴邱义塾)에서   박진사의 초상을 지내고 3년상을 마치자 양부 시룡과 생부 시규는 고향집에서 머리를 맞대고 성장한 상진의 혼사를 서둘렀다. 당시 량반가문에서는 보통 아들이 여남살만 되면 서둘러 장가를 보내였고 이른 집에서는 아들이 아홉살만 되여도 혼처를 정해 장가를 보내였는데 그것이 리조말기의 조혼풍속이였다. 시룡이와 시규는 장차 나라의 기둥감으로 키울  소중한 손자의 혼인을 절대로 서두르지 말라는 박진사의 분부에 따라  상진이가 열두살이 될때까지 혼처를 정하지 않고있었다. 그런데 또 박진사의 사망으로인해 가문에서는 상복을 벗을 때까지 경사를 치를수가 없게 되였다. 그리하여 상진이의 혼사는 또 둬해나 더 늦어졌었다.  문한가로 명성을 떨치는 박씨댁에서 삼년상을 마치고 상제들이 상복을 벗자  아들 상진이에게 천생배필이 생겼다면서 찾아오는  중매꾼들이 문턱이 닳을 지경이였다. 박씨댁에서 가문이며 규수의 인품이며를 일일이 따져서 훌륭한 며느리감을 택한다는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였다.  조정의 부름을 받고 다시 상경하기 며칠전인 어느날 시룡이와 시규 두 형제는 사랑방에서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였다. 중매군들이 소개한 규수들가운데서 마땅한 신부감을 결정하려는것이였다. 마침 린근 마을에 사는 월성최씨 최현교(崔铉教)댁의 장녀인 영백(永伯)이란 소저가 어느 모로 보나 종가집며느리로 가장 합당하였다.  최씨댁 역시  학문을 숭상하는 량반가문이였고 경주일대에서 손꼽히는  명문가인데다가 소저의 품행이 단정하고 나이가 총각보다 두살우인 십칠세(1882년 3월 20일생)라 상진이의 배필로 안성맞춤이였다.당시에는 보통 신랑의 나이가 신부보다 몇살씩 어렸었다.  박씨가문에서 오래동안 걱정하던 장손의 혼례를 치르고나니 상진이는 마음놓고 학업에 정진할 수 있게 되였다.  상진이는 밀월이 끝나기 바쁘게 사랑하는 아내를 록동집에 남겨두고 조부님의 유언에 좇아 왕산 허위를  찾아  흥구의숙이 있는 진보면으로 배움의 길을 떠났다. 학문에 정진하여 령남지방에서 명성이 높은 6촌형님 박규진이 그를 데리고 갔다.   흥구의숙을 꾸린 방산 허훈선생과 박용복진사는 령남 유림의 두 거두로서 서로 존경하며 허물없이 왕래하던 사이였기때문에 일찍부터 두 집안간에 친분이 두터웠다. 허위 일가족이 란을 피해서 한해전부터 고향인 선산군 구미면 임은리를 떠나 청송군 진보리로 이사왔는데 허위선생의 맏형님이신 방산 허훈선생이 진보에 꾸린 흥구의숙에서 큰형님을 도와 교편을 잡았던 것이였다. 흥구의숙은 일반 서당과 달리 당시 사회현실과 결부하여 학문을 연찬하도록 학생들을 이끌고있었다.  흥구의숙에 입학한 상진이는 허훈선생한테서 고문(古文)을 심도있게 학습하였고 또 허위선생의 지도아래 정치, 력사, 지리, 병학 등 다방면의 유용한 지식을 배웠으며 짬짬이 고금의 충신렬사들의 전기를 열심히 읽었다. 이것은 전에 록동의 서당에서는 듣도보도 못한 새로운 학문이라 상진이는 새지식을 배우면 배울수록 재미가 나고 온 몸에 힘이 솟았다.   어느덧 박상진이 흥구의숙에 와서 공부를 시작한지  일년이 다가왔다. 학문이 출중한 스승 왕산 허위선생께서는 조정의 부름을 받고 서울에 올라가서 원구단 참봉에 임명되였다. 마음속으로 가장 존경하는 허위선생이 흥구의숙을 떠나자 상진이는 서운함을 금할수 없었다.스승님한테 더 많은 지식을 배우지 못한것이 후회되였다.  상진이는 생부와 양부가 다 서울에서 관직에 계셨으므로 종종 서울로 올라와 두 부친을 뵐수 있었다. 그는  상경하는 기회에  허위선생을 찾아가서 스승의 지도를 받는것을 잊지 않았다. 성품이 대쪽같고 학문이 연박하고 정사에 밝은 허위선생은 고종황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관직이 성균관 박사, 중추원 의관을 거쳐 국가의 최고법관인 평리원 수반판사로 승진하였다. 허위는 서울에서 재임하는 동안 당시 진보적인 사상을 지닌 위암 장지연(韦奄 张志渊)선생 등과 가까이 사귀면서 사상이 많이 개방되여 서구의 문명을 많이 접수하게 되였다. 스승 허위의 세계관의 변화는 젊은 제자 박상진의 성장에 거대한 작용을 일으켰다. 박상진은 서울에 올라오는 기회에 국내외에서 비밀리에 발간되는 진보적인 서적을 남몰래 구입하여 흥구의숙에 돌아간 뒤 저녁이면 초불을 밝혀놓고 밤깊도록 탐독하면서 변화무상한 세계의 형세를  료해하고 안목을 넓혔다.  상진이가 17세가 되던 1900년에 목포의 부두로동자들이 파업을 일으켰다.왜놈들의 가혹한 경제수탈에 도탄에 빠진 로동자들이 더는 견딜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로동자들의 정당한 요구를 일본자본가는 한가지도 들어주지 않았을뿐만아니라  경찰을 동원하여 총칼로 무고한 로동자들을 여지없이 진압하였다. 신문을 보고  목포사건의 시말을 알게된 박상진은 격분하여 이를 갈았다.그는 일제를 이땅에서 몰아내지 않고서는 로동자,농민들이 영원히 도탄에서 벗어날수 없다는 도리를 더욱 깊이  터득하게 되였다. 상진이가 열여덟살이  되넌 1901년 11월 23일에 장남 경중이가 태여났고  21세되던 4월 20일에 장녀 창남이가 태여났다.두 아이의 아버지로 된 박상진은 부모로서의 책임이 막중하다는것을 모르는 바 아니였지만 가정에 얽매여 구국의 큰뜻을 버릴수는 없었다.그는 미안한 마음으로 어머님과 안해에게 자식들을 부탁하였다.어머님과 안해는 상진이에게 자식이나 집걱정은 조금도 하지 말고 학업에 전념하라고 당부하였다. 이해에 조정에서는 제1차 한일협약이 체결되였고 서울과 부산을 련결하는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였다.편리한 교통수단을 리용한 일제의 수탈은 날로 가심해졌다.온 나라가 도탄에 빠져 신음하고있었다. 도처에서 의병들이 다시 벌떼같이 일어났다.급변하는 나라의 형세와 스승 허위의 끊임없는 교육은 젊은 상진의 세계관의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상진은 점차 서당에서 배우는 구학문으로는 기울어진 나라를 바로 세울수 없다는 도리를 깊이깊이 느끼고 구국에 유용한 새로운 학문을 목마르게 동경하였다. 사랑하는 제자의 심중을 환히 꿰뚫고있는 허위선생은 상진이를 시대의 앞장에선 인재로 배양하기 위해 안깐힘을 썼다. 흥구의숙은 일반 서당보다는 많이 개명했지만 시골에 자리잡고있어서 상진이가 사회와 널리 접촉하고 사회를 연구하는데 매우 불리하였다. 그는 사랑하는 제자를 당시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인 서울에 데려와서 공부를 시키려고 마음먹었다. 어느날 허위는 상진이가 서울에 올라온것을 알고 이내 자택으로 불러들였다. 마침 그해에 서울에 양정의숙이란 근대교육을 하는 학교가 세워졌기때문이였다.  “상진아, 오늘 내가 너를 부른것은 너에게 새로 일어선 학교를 소개하기 위해서이다. 서울에 양정의숙이란 근대교육을 하는 학교가 생겼는데 우리나라의 그 어느 학교보다 진보적인 교육을 하고있다.나는 네가  서울에 올라와서 양정의숙에 들어올것을 권고한다. 우리나라를 세계에 우뚝 설 선진국으로  건설하려면 새로운 학문을 체득한 인재가 박절히 수요되기때문이다.”  “사부님, 고맙습니다. 소생은 사부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허위선생의 말씀을 듣고난 상진이는 새로운 학문을 배울 욕망으로 가슴이 끓어올랐다.  “나는 양정의숙의 숙장과 친밀한 사이이니 입학수속은 내가 해주마.”  “고맙습니다.” 상진이의 생부인 박시규가 경복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집을 잡고 있었으므로 상진이가 양정의숙에서 공부하는데 생활상에서  별 어려움도 없었다. 이튿날 허위선생은  상진이를 데리고 양정의숙을 찾아갔다.          4.양정의숙 (养正义塾)에서     양정의숙은 순헌황귀비(고종의 계비이자 영친왕의 생모인 엄귀비(严贵妃)의 친정조카이자 조정에서 군부협판(军部协办)을 맡고있는 엄주익(严柱益)이 안종원, 박용숙 등 의기상합한 사람들과 함께 근대적 교육보급을 위한 학교설립을 추진하여 세운 인문계(人文系)의 사립고등학교이다. 학생들을 올바르게 깨우쳐준다는 (蒙以养正)의 기치아래 사회에서 기부금을 모으고 또 개인재산을 보충하여 학교를 세우고 교명을 양정의숙이라 하였는데 초대숙장은 엄주익이 맡았다. 이 학교에서는 법학통론, 헌법, 국가학, 형법총론 및 각론, 민법총론, 물권법, 채권법, 상속법, 형사소송법, 민사소송법, 상법총론, 국제법 등 20여가지 과목을 설치하였다.  1907년에는 엄귀비로부터 황실의 재산과 내탕금으로 학교의 재정지원을 받았으며 1908년에는 경제학과를 병설하였다. 그러나 한일합방으로인해 국권이 빼앗긴지 3년 지난 1913년에 일본총독부에서 공포한 에 의하여 전문과정이 페지되어 6회의 법률학과 졸업생과 2회의 경제학과 졸업생이 나왔는데 졸업생 총수는 145명이였다. 일제 강점기에 민족교육의 일환으로 이 학교에서는 체육부를 설치하여 체육인재를 육성하였는데 1932년 로스안젤스 하기 올림픽대회에서 이 학교의 재학생 김은배가 마라톤경기에서 제6등을 따내였고 1936년 베를린 하기올림픽대회에서 이 학교의 5학년생인 송기정이 마라톤종목에서 금메달을 따내고 올림픽마라톤종목의 세계기록을 경신하였으며 학교졸업생인 남승룡은 동메달을 따내였는데 이것은 뒤날의 이야기이다.  양정의숙의 창립자인 엄주익은 왕산 허위선생과 친분이 두터운데다가 그가 소개하는 학생이 첫눈에 마음에 들었다. 그뿐만이  아니였다.허위선생이 상진이가 규장각 부제학인  박시규의 아들이라고 하자 엄주익도 박시규와 친분이 있던 사이라 상진이의 입학을 진심으로 환영하였다.  “상진아, 너는 양정의숙에서 법률과 경제학을 전공하는것이 어떻겠느냐? 네가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 큰일을 하려면 이 전업을 전공하는 것이 보다 합당할것 같구나.”  “네, 스승님의 제의를 따르겠습니다.”  박상진은 당시 나라의 최고법관인 스승 허위의 권유에 좇아 양정의숙에서 법률과 경제학을 배우게 되였다. 그는 스승님처럼 법률에 정통하여 장래에 억압받고 굶주리는 백성들을 위해 자기의 재능을 남김없이 발휘하겠다고 마음먹고 학업에 정진하였다. 그러나 하루가 다르게 돌변하는 나라의 형세는 스물두살의 피끓는 젊은이가 학업에만 몰두하도록 놓아두지 않았다.  중일갑오전쟁과 로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기세등등하여 거리낌없이 조선전역에 마수를 뻗치였다. 1월에는 서울의 경찰치안권을 왜놈들의 헌병대가 차지하였으며 2월에는 일본인 마루야마가 경무청의 고문직을 차지하였고 3월달에는 일본놈들이 서울의 경비를 맡았고 11월에는 일본의 특파대사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조선에 들어왔다. 왜놈들의 야욕은 끝이 없었다. 11월 17일, 이토오는 무장한 헌병들을 이끌고 황궁을 포위하고 강제로 조선의 내각회의를 열게하여 이란 불평등조약을 맺었다. 일제의 한국에 대한 을사보호조약 체결은 1905년 11월 일본 추밀원 의장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조선에 파견되면서 본격화되었다. 11월 9일 서울에 도착한 이토오는 고종황제를 알현하고, 보호조약의 강제체결을 위해 회유와 협박을 거듭했다. 고종황제가 그들의 강요에 순순히 응하지 않자 이토오는 11월 17일 조선정부의 각료들을 일본 공사관으로 불러들여 보호조약을 승인하게 했다. 일본 군인들이 공사관밖에서 무력시위를 벌이는 공포분위기 속에 열린 이 회의에서도 을사보호조약을 승인하는 결론이 나지 못하자 이토오는 다시 궁중으로 회의장소를 옮겼다. 고종황제가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열린 궁중의 소위 어전회의(御前会议)에서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자 하야시[林權助] 공사는 이토오를 불러냈다. 헌병사령관까지 대동하고 들어온 이토오는 다시 회의를 열고 한국정부의 대신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찬성여부를 물었다. 이에 참정대신 한규설(韩圭卨), 탁지부대신 민영기(闵泳綺), 법부대신 리하영(李夏榮) 등은 반대의 뜻을 분명히 했으나 일제의 무력에 겁을 먹은 학부대신 리완용(李完用), 군부대신 리근택(李根泽), 내부대신 리지용(李址鎔),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权重显) 등은 약간의 수정을 조건으로하여 조약체결에 찬성했다. 이토오는 조약체결에 찬동한 5대신(五大臣:乙巳五賊)만으로 어전회의를 다시 열고, 외부대신 박제순과 특명전권공사 하야시의 이름으로 이른바 '한일협상조약'(韓日協商條約)을 강제로 체결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일본 정부는 조선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감리·지휘하고, 일본 령사는 외국에서의 조선의 리익을 보호할 것,  제2조 일본 정부는 조선과 타국 간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수할 임무가 있으며, 조선 정부는 일본 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는 어떠한 조약이나 약속을 하지 않을 것,  제3조 통감(統鉴)을 두어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경성에 주재하고 조선 황제 폐하를 내알(內謁)하는 권리를 가지고, 조선의 각 개항장 및 그밖에 일본 정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역에 리사관(理事官)을 설치해 본협약의 조관을 완전히 실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일체의 사무를 관장한다는 것 등이다.  사흘뒤인 11월 20일, 박상진이 학교에 가니 교정안은  물끓듯하였다. 에 장지연(张志渊)이 쓴 이란 제목의 피를 토하는듯한 사설이 발표되였다.     시일야방성대곡 (是日也放聲大哭)    지난번 이등(伊藤) 후작이 래한(来韩)했을 때에 어리석은 우리 인민들은 서로 말하기를, '후작은 평소 동양삼국의 정족(鼎足) 안녕을 주선하겠노라 자처하던 사람인지라 오늘 래한함이 필경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공고히 부식케 할 방책을 권고키 위한 것이리라. '하여 인천항에서 서울에 이르기까지 관민 상하가 환영하여 마지 않았다. 그러나 천하 일 가운데 예측키 어려운 일도 많도다. 천만 꿈밖에 5조약이 어찌하여 제출되였는가. 이 조약은 비단 우리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삼국이 분렬을 빚어낼 조짐인즉, 그렇다면 이등 후작의 본뜻이 어디에 있었던가?    그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대황제 폐하의 성의(聖意)가 강경하여 거절하기를 마다하지 않았으니 조약이 성립되지 않은 것인줄 이등후작 스스로도 잘 알았을것이다. 그러나 슬프도다. 저 개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대신이란 자들은 자기 일신의 영달과 리익이나 바라면서 위협에 겁먹어 머뭇대거나 벌벌 떨며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기를 감수했던것이다.    아, 4천 년의 강토와 5백 년의 사직을 남에게 들어바치고, 2천만 생령들로 하여금 남의 노예 되게 하였으니, 저 개돼지보다 못한 외무대신 박제순과 각 대신들이야 깊이 꾸짖을것도 없다 하지만 명색이 참정(参政)대신이란 자는 정부의 수석임에도 단지 부(否)자로써 책임을 면하여 이름거리나 장만하려 했더라 말이냐. 김청음(金淸阴)처럼 통곡하여 문서를 찢지도 못했고, 정동계(郑桐溪)처럼 배를 가르지도 못해 그저 살아남고자 했으니 그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제 폐하를 뵈올 것이며, 그 무슨 면목으로 2천만 동포와 얼굴을 맞댈 것인가.  아! 원통한지고, 아! 분한지고. 우리 2천만 동포여, 노예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 기자 이래 4천 년 국민정신이 하루밤 사이에 홀연 망하고 말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이 글은 《황성신문》의 주필이었던 장지연이 논설에서 일제 침략의 원흉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비난하고, 을사오적(乙巳五賊)은 대한제국을 일본에 팔아 백성을 노예로 만들려는 매국노임을 규정하였다. 고종 황제가 을사조약을 승인하지 않았으므로 조약은 무효임을 전국민에게 알렸다. 또한 이 론설 외에도 잡보(杂报)란에 '오조약청체전말'(五條約請締顚末)이라는 제목으로 조약을 강제 체결하게 된 정황을 상세히 보도했다.    이 신문은 평소보다 1만 부를 더 인쇄하여 서울 전역에 배포되었다. 같은 날 오전 5시 장지연은 왜경에게 체포되어 경무청에 수감되었으며 《황성신문》의 사원 10명도 체포되었고 신문은 무기 정간(停刊)을 당했다. 정간의 사유는 일제의 검열을 받지 않고 신문을 배포하여 국가의 치안을 방해했다는 리유였다. 다음날 《대한매일신보》는 장지연을 강한 론조로 찬양하였고 《제국신문》은 ‘《지금의 분함을 참으면 백년화근을 면한다。》’고 하며 과격한 론조는 신문없는 사회가 될것이라며 국민들도 자중해야 한다는 내용을 실었다. 한편 일본인이 발행하던 한글신문인 는 장지연의 행동을 경거망동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장지연은 《대명률(大明律)》잡범편(杂犯篇)에 의해 태형을 선고 받았으나 1906년 1월 24일 석방되었고 같은 해 2월 2일 신문도 속간되었다。) 이 체결됨에 따라 대한제국은 일제에게 외교권을 빼앗긴 빈 이름만 있는 국가로 전락하였다. 온 나라가 단 가마속의 물마냥 펄펄 끓었다. 11월 30일에 시종무관 민영환이 의 체결에 비분강개하여 이란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고 12월 1일에는 특진관 조병세가 극약을 마시고 자결했고 뒤이어 학부주사 리상철, 군인 전봉학, 전 참정 홍만식 등이 차례로 자결했다. 나라잃은 망국노로 살지 않으려는 그들의 절개는 굳지만 한번밖에 없는 목숨을 그냥 버리지 말고 왜놈을 한놈이라도 더 죽이고 나라를 구하는데 피를 흘렸다면 더 보람찬 인생이 아니겠는가? 박상진은 잃어버린 국권을 회복하려면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일어나  맹동할것이 아니라 천천히 힘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그는 친구들과 동창들에게 대한제국이 처한 험악한 현실을 말해주면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위해서는 시시각각 목숨을 바칠 준비를 해야 한다고 일깨웠다. 을사오적인 박재순, 리지용, 리근택,리완용, 권중현 등을 참살해야 한다는 여론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들끓었다. 라인철, 오기호 등은 를 조직하여 활동했으나 실패하고말았다.고종황제의 밀지에 의해 해산되였던 의병들이 다시 전국 곳곳에서 벌떼같이 일어났다.  1906년 3월에는 전 참판 민종식이 홍주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그해 6월에는 최익현과 림병찬이 전라북도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신돌석도 다시 평해에서 의병을 일으켰다.전국 각지에서 이름있는 유생들과 평민들 그리고 머슴들까지 넘어져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려고 의병을 일으켰다. 이에 고무받은 고종황제는 는 밀칙을 내려보내 의병장들과 의병들을 격려했다.  양정의숙에서 학습하던 박상진은 중국혁명의 선구자 중산 손문(中山 孙文)선생이 일본 도꾜에서 “동맹회”를 조직한것과 그들이 제정한 오랑캐를 몰아내고 중화를 회복하고 민국을 건설하고 지권을 평균이 해야 한다는 4대강령을 읽어보고나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  ( 손중산선생의 4대강령은 정말로 현명하구나. 외적을 몰아내지 않고 어이 나라가 편안할수 있으며 농사하는 농민들에게 땅이 없는것은 얼마나 불합리한 일인가? 우리나라도 미국이나 영국처럼 강성한 나라로 건설하려면 반드시 군주제도를 페지하고 서구식의 공화정치를 실시해야 한다.) 그는 단걸음에 도꾜로 달려가서 손중산선생을 만나보지 못하는것이 몹시 한스러웠다.그러나 그는 대업을 이루려면 아직까지는 학업에 충실해야 한다는 허위스승의 말씀이 귀에 쟁쟁하여  학업에 더욱 분발하였다.     5.정미의병(丁未义兵)과 서울탈환작전   1907년의 새해가 시작되였다. 전국적 범위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다. 많은 사람들이 나라가 가난하여 일본국에 빚을 너무 많이 졌기때문에 고종황제가 왜놈들과 과감히 맞서 싸우지 못한다고 인정했기때문이였다. . 1907년 2월 서상돈, 김광제·, 박해령 등 16명의 애국자들이 대구에서 조직한 국채보상기성회(国债报尝期成会)는 곧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로 확대되었다. 특히 대한매일문,황성신문, 제국신문,·만세보 등 언론기관이 자금모집에 적극 참여했으며, 이를 위하여 단연운동(断烟运动)이 전개되었고, 부녀자들은 비녀와 가락지를 팔아서 국채보상에 나섰다. 그외에도 녀성단체인 진명부인회·대한부인회 등에서는 보상금모집소를 설치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 국채보상운동은 바다건너 일본에 까지 파급되어 800여 명의 류학생들도 운동에 참여했다. 그리하여 국채보상운동이 실시된 이후 4월말까지 보상금을 낸 사람은 4만여명이고, 5월말까지 230만원 이상의 거금이 거두어졌다. 이에 대해 일제는 송병준 등 친일파가 지휘하던 매국단체인 일진회를 리용하여 국채보상운동을 방해하였고 통감부에서는 국채보상회의 간사인 량기탁을 보상금횡령죄라는 루명을 들씌워 구속하는 등 갖은 수단을 써서 탄압했다. 그 뒤 량기탁은 무죄로 석방되었지만 국채보상운동은 더 이상 진전을 보지 못하고 좌절되고 말았다. 국채보상운동은 조선 민족의 강렬하고 자발적인 애국정신이 발휘된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평가된다. 이해 5월에 을사오적의 하나인 박제순내각이 경질되고 6월에 다른 한 을사오적 리완용이 총리대신의 보좌를 차지하였다. 1905년 일본 제국주의는 서유럽 제국주의 렬강으로부터 한국의 보호국화를 승인받은 뒤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이에 대해 고종황제는 헐버트를 통해 "보호조약은 병기로 위협하여 륵정(勒定)했기에 전혀 무효하다"는 내용의 급전을 미국 정부에 전달했으나 미국정부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고종황제가 서울의 각국 공사들을 상대로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호소했으나 역시 아무런 성과도 보지 못했다. 이후 1907년 1월 16일, 고종황제는 영국인 베델이 경영하는 〈대한매일신보〉에 미국,·프랑스,·독일,·러시아 원수에게 보내는 서한을 발표했으나 박제순(朴齐純) 친일내각이 21일 이를 위조서한이라고 선포했다. 이에 고종황제는 같은 해 6월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마지막 기대를 걸었다. 이 회의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의 주창으로 열리는 회의로서 40여 개 국의 대표 225명이 참석하는 것인데, 주로 중재재판·륙해전법규 등을 론의하지만 사실상 렬강간의 식민지 쟁탈전에 따르는 분규를 해결하기 위한 국제법회의였다. 고종황제는 전(前) 의정부참판 리상설(李相卨), 전 평리원검사 리준(李儁), 전 러시아 공사관 참서관 리위종(李玮钟) 등 3명을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하여 러일전쟁 이후의 일제의 침략상과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폭로함으로써 렬강의 동정과 후원을 얻어 국권을 회복하려고 했다. 1907년 4월 극비리에 서울을 출발한 리준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리상설을 만나 6월 4일 그와 함께 페테르스부르크(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여 전 주(驻)러시아 공사 리범진(李範晉)과 리위종을 만났다. 먼저 리준,·리상설,·리위종 3명의 특사는 '장서'(長书:控告词)를 러시아어로 번역하여 제2차 만국평화회의 주최의 주창자이며 의장국인 러시아 정부의 지지와 후원을 기대하고 보름이 넘도록 리범진과 함께 러시아 외무부의 동정을 살폈는데  별다른 도움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결국 6월 19일 페테르스부르크를 떠나 독일 베를린에 도착한 뒤 '장서'와 그 부속 문서인 《일인불법행위(日人不法行为)》 1권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인쇄했다. 같은 달 25일에 만국평화회의 개최지인 헤이그에 도착한 그들은 28일 장서와 문서를 일본을 제외한 40여 개 참가국 위원들에게 보냈다. 7월 9일 밀사들은 우선 만국평화회의 의장으로 선출된 러시아 대표 넬리도프를 방문하여 한국의 공식 대표로서 회의에 참석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넬리도프가 자신의 권한 밖의 일이라면서 거절했다. 다시 네덜란드 정부와의 교섭을 권하여 곧 외무장관을 방문했으나 네덜란드 정부의 소개가 없다는 리유로 만나지도 못했다. 이에 영국,미국,·프랑스,·독일의 대표위원을 만나 지원을 호소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들은 다시 네덜란드 외무대신에게 서한을 급송하여 면회를 요청했으나 역시 거절당했다. 그러나 이를 전후하여 이같은 사정이 각국 신문기자에게 널리 알려져 매일 각국 기자와 답지했는데, 특히 영국인 윌리엄 스태드가 회장인 국제협회의 후원을 얻어 그 회의의 회보인 〈쿠리에르 드 라 콩페랑스 Courrier de la Conférence〉에 장서의 전문을 게재했다. 특히 7월 9일에는 협회의 회합에 귀빈으로 초대되어 리위종이 프랑스어로 라는 제목으로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여 큰 호응을 받았다. 이 연설이 있은 후 각국 신문에서 매일같이 한국의 사정을 론해서 '억일부한'(抑日扶韩)의 여론이 일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종황제의 특사들은 각 국 대표들에게 외면당하여 본회의 참석이 좌절되었다. 참석이 좌절되자 리준은 일본에 의해 폭력적으로 자행된 잔인한 재앙에서 조국을 지키지 못하는 근심이 분통이 되어 화가 나고 기가 막혀 음식을 끊었고 그로 말미암아 병이 생겨 7월 14일 류숙한 호텔에서 병사했다. 한편 리위종은 국제협회에서의 연설 직후 잠시 페테르스부르크에 돌아갔으나 리준의 순국을 알리는 급전을 받고 18일 헤이그에 돌아왔다. 이후 리상설과 리위종은 헤이그 사행 전에 이미 계획된 려정인 각국 순방외교에 나서 한국의 독립과 영세중립화(永世中立化)를 역설했다. 이후 그들은 법원의 결석재판에서 리완용 내각에 의해 사형·종신형을 받음으로써 끝내 귀국하지 못했다. 통감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는 7월 3일 밀사파견 사실을 알고는 일본 장교단을 거느리고 고종황제를 찾아가 황위를 아들에게 물려주라고 협박한 후 고종을 폐위시킬 것을 일본 총리대신에게 건의했다. 이에 리완용 내각은 7월 6일 어전회의를 소집하여 고종에게 일제에 대해 사죄해야 한다고 협박했다. 8일 일제 통감부는 궁금령(宮禁令)을 실시하여 고종을 감금하고, 17일 리완용,송병준 등으로 하여금 고종에게 퇴위하도록 협박하게 했다 .7월 19일 아침, 대한문앞에는 모여든 유생들의 통곡소리가 진동하였다. 대한자강회,동우회,기독교청녕회, 각급 학교의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대대적인 양위반대 시위를 벌이였다. 양정의숙에 재학중인 박상진은 양정의숙에서 공부하는 학우들을 이끌고 대한문앞에 가서 청원을 하고 밤이 깊도록 종로거리에서 힘차게 구호를 부르며 시위를 진행했다.  “폐하, 결단코 황위에서 물러서시면 아니 되옵니다.”  모두들 절규하며 한사코 반대하였다. 모인 군중들이 수천명에 달하자 당황한 일본경찰은 총검을 휘두루며 강제로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마침내 20일 일본 군대의 포위 속에 고종황제는 아들 순종에 대한 양위의 형식을 빌어 사실상 폐위당했다. 이어 일제는 한국 군대를 해산시키고 한일신협약을 강요하여 대한제국의 내정까지 장악함으로써 합병의 형식만 남겨놓게 되었다.  백성들의 절절한 마음은 모르는바 아니지만 자신도 자신을 어쩔수 없는 고종황제는 20일날 끝내 폐인과 다름없는 아들에게 양위하고 말았다.간악한 왜놈들은 민족반역자 리완용과 결탁하여 황위에 오른지 나흘밖에 안되는 허울뿐인 순종황제를 강박하여 한일신협약(정미칠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선국의 조야가 펄펄 끓었다. 박상진의 스승이신 왕산 허위는 관직을 버리고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고 하였다.  “스승님, 저도 의병운동에 참가하겠습니다.”  “아직은 안된다. 네 심정은 나도 가히 리해할수 있다만 지금 네가 해야할 주요의무는 공부를 계속하는것이다.우리가 국권을 회복하고나면 나라를 건설할 인재가 너무도 많이 수요된다. 너는 다른 생각을 하지 말고 지금은 학업에만 정진하거라.” “예, 저는 스승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학습하는 여가에 동지들을 많이 모으고 적들의 정보를 수집하여 스승님께 드리겠습니다.” “참으로 좋은 생각을 했구나.지기지피(知己知彼)해야 백전백승하게 되는것이지.” 허위는 제자의 기특한 생각에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였다.  “의병운동에 군자금이 많이 수요될텐데 힘껏 주선해드리겠습니다. 사부님께서는   부디 조심하십시오.”  허위선생을 보내고난 박상진의 심정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의병운동을 벌이는데 무엇보다 큰 어려움이 바로 자금난이 아닌가? 그 많은 의병들이 먹을 량식이며 의복이며 무기를 구입하려면 돈이 수없이 들터인데 그 많은 자금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생각하면 할수록 걱정이 태산같았다. 책을 읽으려해도 글줄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런 때에 아버님께 도움을 청하지 않고 어찌한담. 아버님께서는 의병활동을 줄곳 동정해오신 분이시고 사회적으로 인망이 높은 분이시니 내가 사정을 말씀드리면 단 얼마라도 도움을 주시겠지.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그는 지필을 꺼내놓고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썼다.그러나 혹시 편지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헌병들의 손에 들어갈  경우를 대비하여 그는 극히 암시적인 글을 적어서 아버지에게 편지를 띄웠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열흘이 가까워오는데도 아버지한테서는 회답이 없었다. 간단한 편지로 부친을 설득시키기 어려울것이라 생각한 그는 더 기다지 않고 바삐 아버지를 찾아갔다. “네가 어이하여 공부할 시간에 집에 왔느냐?” 상진의 생부 박시규가 물었다.  “아버님, 지난번에 소자가 보낸 편지를 읽어보셨습니까?” “읽어보긴 했다마는 난들 어쩌겠느냐?” “아버님께 간곡한 청이 있습니다. 나라의 운명이 칠성판에 오른 이때에 가산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지금 허위스승님께서 의병운동을 다시 전개하셨는데 군자금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아버님, 아버님께서 의병운동에는 참가하지 못하시지만 기울어진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목숨걸고 싸우시는 허위선생님께  군자금을  마련해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허위장군이 의병을 일으킨 것은 참으로 장한 일이다. 허나 이제껏 청관으로 살아온 나 하나의 자그마한 힘으로 어이 의병활동에 쓸 그 많은 군자금을 마련해낼 수 있겠느냐?”  상진이의 부친은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물론 아버님 한분의 힘으로 의병운동에 쓸 군자금을  다 해결할수는 없습니다. 전국의 백성들이 십시일반으로 의병운동을 도와나선다면 의병투쟁은 반드시 승리할것입니다. 아버님께서는 조정안팎에 발이 넓으시니 친구들을 동원하면 자금을 적잖게 모으실수 있지 않겠습니까?” “오냐, 내 힘자라는데까지 주선해 주마.”  젊은 상진이의 끈질긴 설복에 감동된  생부 박시규는 십여일동안 동분서주하여  5만량이란 거금을 주선해 내놓았다. 상진이는 그 돈을 비밀리에 의병장 허위장군에게 보내어 그들이 의병투쟁을 벌이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정미년에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은 서로 밀접히 련합하여 “십삼도 창의군”을 창립하고 의병장 리인영을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허위를 군사장이 모셨다. 그들은 왜놈들의 수중에 들어간 서울을 탈환하는것을 국권회복의 첫 목표로 삼았다.그러나 13도 창의군에서는 신돌석, 홍범도 등 평민출신의 의병장들이 합류하는것을 거절하였다. 당시 대다수의 유림출신의 의병장들은 평민출신의 의병장들을 기시하는 편견이 농후하였다.그들은 평민출신의 의병장들이 그들과 한자리에 앉아서 국사를 론의하는것을 치욕으로 삼고있었기때문에 평민출신의 의병장들이 그들과 동등한 자격으로 13도 창의군에 합류하는것을 극력으로 반대하였다. 참으로 슬픈  시대적 착오였다. 음력 12월 21일, 전국 의병련합군인 13도 창의군의 선봉대를 거느린 허위장군은 일본군과의 계속된 싸움으로 지쳐있는 장병들을 격려하며 이른새벽에 주둔지를 떠났다. 비록 13도 창의군의 일원으로 되지 못했지만 천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서울탈환전에 참가한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의병장은 군사장 허위의 휘하에 남아 허위를 도와 선봉대를 지휘하였다.  용감하고 날쌘 의병 3백명은 10만 의병들중에서 뽑아낸 특전대였다. 그들은 일본총독부가 있는 서울을 탈환할 계획이였다. 첫번째 공격목표는 동대문으로 정하였다. 수택리는 망우리고개만 넘으면 곧장 동대문에 이르게 되는 길목이고 동서남북으로 통하는 길이 다 있어서 교통의 요충지였다. 넓은 평야지대여서 13도 창의군 만명을 집결시켜 야영하기에도 장소가 넉넉하였다. 계획된 공격날자는 정월초하루 즉 설날이였다. 이날은 상점들이 쉬고 학생들도 등교하지 않으므로 전투시에 백성들에게 피해가 적다는 점을 감안했던것이였다. 군사장 허위는 전투경험이 풍부한 의병 3백명을 거느리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인 수택리 일대를  점령하여 진지를 구축하기로 하였다..  군사장 허위가 이끄는 특전대 3백명의 임무는 그야말로 나라의 운명을 좌우지하는 중대한 것이였다.  “걸음을 다그쳐라. 동녘이 밝아온다.”  행군을 재촉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일본군과의 여러차례 전투에서 승리한 의병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듯 하였다.  박상진의 소개로 의병에 가입한 김장쇠도 이 특전대와 함께 출발하였다. 그는 허위장군과 박상진 그리고 신돌석사이에 오가는 정보와 명령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희끄므레한 별빛에 의지하여 행군하는 밤길이지만 행군속도는 매우 빨랐다.  의병들은 흰 바지저고리 차림에 베수건으로 머리를 질끈 동여매어 표적을 삼았는데 군데군데  검은 색 군복에 계급장을  떼어버린 군모를 쓴 의병도 있었다.그들은 원 대한제국의 군사들로서 군대가 해산되자 흩어진 뒤 의병에 가담한 사람들이였다.  박상진의 지령을 받은 김장쇠는 서울을 몰래 빠져나와 지휘부가 있는 산으로 급히 올라갔다. 군사장 허위가 신돌석과 기타 장령들에게 작전임무를 포치하고 있었다. 일본군의 한개 소대가 밤중에 마을로 들어왔다는 보고가 들어왔기 때문이였다.  “신돌석장군이 거느린 군사를 제외하곤 모두다 후방을 지키시오.”  “개미새끼 한마리도 빠져나가게 해서는 안됩니다.”  어느 때나 적정을 철저히 료해하고 치밀한 작전계획을 짜서 승산이 있는 작전만 해온 허위장군이였다. “거, 장쇠군이 아니오?” 작전을 포치하고나서 김장쇠를 뒤늦게 발견한 허위장군이 물었다. “예, 장군님, 서울에 계시는 박상진님께서 서울안에 있는 왜놈들의 군사분포도를  그린 쪽지를  보내왔습니다. 박상진님은 장군님께 성안에서 내응할 구체시간을 지시해달랍니다.”  작은 종이장에 그린 지형도에 깨알같이 적힌 글을 자세히 보고난 군사장 허위가 장쇠에게 말하였다. “사정이 변해서 서울진공날자를 나흘쯤 미룰까 하는데 적정이 수시로 변하는 상황이라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전하시오. 그때가서  구체적인 지시를 하겠으니 만단의 준비를 하고 대기하라고 알려주시오.” “예, 잘 알았습니다.” “지체하지 말고 빨리 떠나시오.” “박상진님께서 서울근교까지 부대와 함께 행동하라시기에...” “이런 변이 있나? 부대와 함께 가라던것은 이런 상황이 생기기 않았을 때의 일이고 지금은 상황이 돌변했소. 당장 떠나시오.” “예, 장군님.” 허위장군의 명을 받은 장쇠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기의 사명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달았던 것이였다. 그는 마을을 멀찌감치 에돌아갔다. 개울을 건너고 길에 들어섰을 떄 “땅!”하는 총소리가 귀전을 때렸다. 어느 새 동쪽하늘이 붉게 물들더니 아침해가 얼굴을 빠끔히 내밀었다.  김장쇠는 주위의 동정을 부지런히 살피면서 서울방향으로 걸음을 다그쳤다. 서울에서 내응하기로 한 박상진에게 성밖에서 변화한 긴급한 상황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이때 박강진은 서울에서 장쇠가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있었다. 군사장 허위가 서울을 진공할 때 그가 내응해야 할 구체적 시간을 모르니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웬 일인지 장쇠와 만나기로 예정한 시간을 두시간 넘기고 또 하루밤을 지냈는데도 김장쇠는 그림자도 나타내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친 상진이는 날이 새기바쁘게 집을 나섰다. 그는 동대문 근처의 정황이 어떤지 미리 알아보는게 좋을것 같아 걸음을 재우쳤다. 골목안과 달리 큰길에는 찬바람이 세차게 몰아쳤다. 순식간에 몸이 꽁꽁 얼어붙는것만 같았다. 박상진은 전차를 타고 동대문으로 갔다.이른 아침이라 전차안에는 승객이 별로 없었다. 이윽고 전차가 느릿느릿 움직였다. 동대문에 당도해보니 근처의 상황은 예상밖이였다. 수많은 일본군들이 성문근처에 모여있었는데 성문을 드나드는 사람들에 대한 검문이 무척 까다로웠다. 그뿐만이 아니였다. 왜병들은 성문앞으로 대포까지 끌어오고있었다. “혹시 놈들이 13도창의군의 행동을 눈치채지 않았나?” 박상진은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들은 한달전에 일제의 만행을 만천하에 알리고 전국 의병련합군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다는 밀서를 각국 공사관에 은밀히 전달했었다. 의병 김세영이 총대장 리인영과 군사장 허위의 명령을 받고 밀서를 갖고 서울에 잠입한 뒤  박상진을 찾아왔었다. 박상진은 밤중에 밀서를 여러부 베껴 쓴 뒤 김장쇠와 동지들 여러사람을  불렀다. 극히 짧은 시간내에 각국 공사관에 동시에 밀서를 전달해야 했기때문이였다. 이른 새벽에 그들은 각국 공사관에 일제히 잠입하여 밀서를 보낸 뒤 바람결같이 사라졌었다. 강제로 해산된 대한제국 군대의 합류로 의병의 인수는 일본군보다 훨씬 많았다.  “각도의 의병들이 일치 단합하여 서울로 일제히 공격하면 서울함락은 한결 쉬워질것이다.”  리인영, 허위 등 의병장들은 전국 각지에 흩어져있는 의병들의 련합을 제의했었다.그리하여 대군을 몰아 물밀듯이 서울을 진공하여 통감부를 격파하고 일본과 맺은 모든 불평등조약을 파기시키고 국권을 회복하는것이 그 목적이였다. 의병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여 결사적으로 싸운다면 승리는 꼭 자기들의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있었다. 그런데 창의군이 서울을 진공하기 전에 왜군의 병력이 갑자기 몇배로 불어났다. 일본국에서 의병을 진압하기위해 대량의 군대와 헌병을 서울로 파견했던 것이였다. 놈들은 수량상으로나 장비에서 의병들보다 월등하여 구식무기를 지닌 의병들로서는 기실 상대가 안되였다. 왜놈들은 도처에서 밀정을 파견해 조선백성들의 움직임을 살피였고 의병들을 체포하기위해 혈안이 되여 날뛰었다. 이 정보를 남먼저 장악한 박상진은 김장쇠를 급히 허위군사장에게 보내서 급변한 상황을 상세히 아뢰였었다.  “ ...지금 적들의 군사력은 막강합니다. 의병들이 외부에서 진공하는 것만으로는 서울탈환의 가능성이 매우 희박합니다. 지금 저는 백락정선생과 20여명의 결사대를 무었습니다. 스승님께서 진공이 시작될 때 우리는 배후에서 적들의 등에 비수를 꽂겠습니다. 상세한 지시를 해주십시오.”  박상진은 장쇠에게 서울시내에 배치되여있는 적군정황을 그린 작은 지도와 전갈을 보내고나서 허위 군사장의 지시를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그런데 당일로 돌아올줄 알았던 김장쇠가 밤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았고 이튿날 낮에도 나타나지 않았다.혹시 김장쇠가 서울을 빠져나가다가 적들에게 잡히지 않았나? 아니면 허위장군의 지시를 가지고 입성하다가 잘못되지 않았나? 가슴에 불이 붙어 안절부절인 박상진은 무턱대고 학교에서 김장쇠를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는 숙소를 나와 급히 백락정선생을 찾아갔다.  백락정은 대한제국의 장교출신이였다.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의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그는 서울에서  뜻이 맞는 동지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사회에 인맥이 너른 그는 불과 10여일만에  백여명의 동지들을 모았던 것이다.그는 의병들이 동대문을 칠때 박상진이 무은 결사대와 손잡고 전투에 참가할 준비를 다지고있었다. 박상진이 백락정의 댁을 찾아가보니 백락정도 김장쇠를 안타깝게 기다리고 있었다.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가?” “글쎄요. 저도 장쇠를 기다리다 못해 이리로 달려왔습니다.” “성문에서 왜놈들의 검문이 심하지 않던가?” “굉장히 심합니다. 선생님은 그걸 어떻게 알고계십니까?”  “나도 어제 성문근방에 나가봤었네. 성문을 들어오는 백성들이 그러는데 갈림길이며 나루터에는  헌병과 헌병보조원놈들이 쫙 깔렸다더구나.”  “장쇠가 검문때문에 혹시...” “나도 지금 그걸 걱정하고 있네.”  “장쇠는 워낙 눈치가 빠르고 령리한 젊은이라 놈들에게 쉽사리 잡히지는 않을것입니다.” “아무렴, 그래야지. 자네 이걸 보게.” 백락정은 신문을 몇장 내놓았다.  상진이가 펼쳐보니 였다. 는 영국인이 경영하는 진보적인 신문으로서 이란 특별란을 설치하여 의병들의 활동정황을 수시로 보도하고 있었다.  “신문을 보니 왜놈들은 의병들의 진공을 막기 위해 한강에서의 선박운행을 금지시키고 각지에 검문소를 설치하여 행인들에 대한 검문이 로골화되고 또 동대문에는 기관포까지 설치해놨다는구먼.”  “그런것 같습니다.”  “하여튼 김장쇠가 어서 돌아와야 군사장의 준확한 공격시간을   알겠는데.” “그러게 말입니다.무턱대고 성안에서 우리가 먼저 손을 쓸수도 없고...” “우리 두사람이 모은 동지들이 2백여명이나 되니 수량상으로는 적지 않은데  적수공권이나 다름이 없으니 어쩌면 좋겠나?”  백락정은 무겁게 한숨을 쉬며 박상진에게 물었다. “군사장님의 공격이 시작될 때 적들의 주의력은 모두 성밖으로 옮겨져서 성안의 경비가 상대적으로 소홀할것입니다. 그 기회를 타서 우리 동지들이 동서남북 사대문을 일제히 들이쳐서 적들의 무기를 탈환하고 성문을 빼앗아서 성안의 일본군들이 성문을 나가지 못하게 막으면 어떻겠습니까?”  “자네 생각이 바람직하네만 허위장군의 진공시간을 모르겠으니  답답해서…에이 참.”  백락정댁에서 오래 머물수도 없는 상황이였다. 박상진은 불안한 마음으로 무거운 다리를 옮겨 양정의숙에 돌아왔다.  군사장 허위와 신돌석이 지휘하는 선봉대는 마침내 수택리가 환히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다가왔다.  “정지! 잠시 휴식하라, 적진이 가까우니 주위의 경계를 게을리하지 말라.”  의병장 신돌석이 명령하였다.  의병들은 삼삼오오 모여앉아 휴식을 하면서 서울탈환에 대한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수택리는 과연 천연요새입니다.” 허위와 나란히 앉은 신돌석은 군사장의 현명한 요새선택에 감탄했다. 동서남북 어디로나 창의군이 손쉽게 쳐들어올수 있는 교통요충지인데다가 터가 넓은 곳을 선택했기때문이였다. 이제 대군만 집결한다면 승리는 손에 쥔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약속한 시간내에 각지에 있는 의병들이 도착하지 못했던것이였다. 이제 동대문을 칠 날은 닷새밖에 남지 않았는데 이 일을 어쩐담? 군사장이나 의병장의 속은 타서 재가 될 지경이였다.  “수택리로 오는 우리 의병들이 도처에서 놈들의 기습을 당하고있습니다. 서울은 물론이고 전국 각지에서 의병들이 지나간 마을은 놈들이 불을 질러 초토화시키고있답니다.”   시찰을 나갔던 신돌석이 허위에게 긴급정황을 보고했다.  “씹어죽여도 시원찮을 야수같은 놈들이구나.” 허위군사장의 눈에서는 불이 일고 온 몸이 부르르 떨렸다.  “김장쇠는 어이하여 아직도 돌아오지 않을가?”  “행여 중도에 잘못되지나 않았을가요?”  “김장쇠가 왜놈헌병에게 잡혔다면 큰 일인데...”  “장쇠군이 만약 놈들에게 잡혔다면 4대문에서 동시에 거사하기로 한 박상진의 작전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는데...”  “허군사장님, 다시 사람을 보냅시다. 시간이 급박합니다.”  “김수동과 윤수정을 보내면 어떻겠나?” “그렇게 합시다.” 말을 마친 신돌석은 즉시 김수동과 윤수정을 불러 서울에 잠입하여 박상진과 백락정을 찾아가서 거사일정을 다시 정하게 하였다.  이튿날 새벽, 두사람은 쥐도새도 모르게 진중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수택리를 벗어나기도 전에 매복한 일본군에게 발각되였다. 총알이 비발치듯 날아들었다. 손에 아무런 무기도 지니지 않은 그들은 왜놈들이 빈틈없이 막아선 길을  뚫고 나갈수가 없었다. 다른 출로를 찾으려고 여러곳을 가봤지만 모두다 허사였다. 아무리 애를 써도 수택리를 빠져나날수 없게된 그들은 부득불 진영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윽고 일본헌병들이 총을 쏘아대며 달려오더니 그 뒤에 수백명의 일본군들이 고함을 지르며 진지로 쳐들어왔다. 의병들은 이내 반격에 나섰다. 총알이 빗발처럼 쏟아졌다. 십만 의병들가운데서 가장 날랜 군사들이라 그들은 유리한 지형을 리용하여 완강하게 버티였다. 그러나 수량상에서나 장비상에서 너무 렬세인 그들은 점심때가 되자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부상당하였다. 더 뻗치다가는 전군이 복멸될 위험이 있었다. “당장    수택리를 떠나 망우리에 가서 다시 진을 치시오.” 허위군사장이 수하에게 명령을 내렸다.  의병들이 진지를 옮기자 일본군은 다시 망우리로 쳐들어왔다. 놈들은 의병의 후속부대가 오지 않은 것을 보고 선봉대를 소멸하려고 악을 썼다. 전투는 할수록 더 치렬해졌다.의병들은 탄약이 거의 다 떨어질 때까지 적들을 쓰러눕혔다. 일본군들의 시체는 여기저기 지저분하게 널렸고 흐르는 피는 강물을 이루었다.  “탄약이 떨어졌습니다.” “군사장님, 탄약을 보내주십시오.” 의병들의 간절한 목소리는 여기저기서 연해연방 날아들었다. “사격을 중지하라. 수택리로 퇴각하라!” 허위장군의 명령을 받은 전사들은 수택리로 급히 퇴각했다.  총대장 리인영이 이끄는 의병 2천5백명은 전투가 끝난 이튿날 아침에야 수택리에 도착하였다.그러나 그밖에 안되는 병력으로 이미 전투준비를 마치고 대기하는 적들을 물리치고 서울을 탈환한다는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며칠 뒤 그들이 다시 서울탈환을 의논하고 있을 때 리인영의 집에서 부고가 날아왔다. 리인영의 부친이 사망했던것이였다. “효는 충의 근본인데 내 어찌 친상을 맞은 줄 알고도 진중에 머물러 있겠소? 충효의 도는 하나요 둘이 아니니 나는 차라리 국풍을 지켜 3년상을 입고 효도를 마친후에 재기하겠습니다.” 리인영은 부득불 후일을 기약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당시 유생들의 인생관이였다.그때 만약 리인영이 친상을 당하고도 진중에 남아 전투를 지휘했다면 그는 사람들로부터 불효막대한 사람이란 비냥을 받을 뿐만 아니라 인륜도 모르는 대장밑에서 싸울수 없노라고 수하 의병장들이 반기를 들었을지도 모를 일이였다. 리인영으로 보내고난 허위와 신돌석은 눈앞이 캄캄했다.군사를 점검해보니 겨우 2천 8백명밖에 되지 않았다.리인영이 거느린 의병은 만명이 넘었으나 혈로를 뚫고 오면서 대부분을 잃었던 것이였다.이밖에 안되는 병력으로 왜놈들의 경계가 삼엄한 서울을 빼앗는다는것은 실로 하늘의 별따기였다. 참으로 가슴을 치고 통탄해도 속이 풀리지 않을 일이였다. 군사장 허위는 후일을 기약하고 서울진공을 중지하라고 명령했다. “모든 군사는 림진강류역으로 후퇴하라.그곳은 나의 근거지이니 상대적으로 안전하다. 한동안 장비를 재정비하여 다시 서울진공을 도모합시다.”  허위의 명을 받은 의병들은 적들의 포위망을 뚫고 림진강쪽으로 퇴각을 시작했다. “군사장님, 소장은 소속들을 데리고 저의 근거지인 영해, 영덕쪽으로 내려가서 의병을 더 모으겠습니다. 어느 때든 군사장님께서 명령만 내리시면 저는 지체없이 달려오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오. 그런데 서울에서 내응을 하려던 박상진과 백선생이 걱정되오. 그들을 만나보고 새로운 정황을 알려줘야겠는데...”  “그러잖아도 저는 상진이를 찾아가려고합니다.” “고맙소.” “고맙긴요? 저는 상진이와 의형제인데 여기까지 왔다가 동생을 만나보지 못하고 내려갈수는 없지 않습니까?” “박군을 만나면  후일을 기약하자고 말씀해주시오.” “더 이를 말씀입니까?” 허위와 헤여진 신돌석은 서울에 잠입하여 상진이를 만나 많은 것을 토의하고싶었지만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서울로 들어가는 모든 길이 막혀있었고 성문은 일본헌병들이 철통같이 지키면서 행인들을 엄밀히 조사하고있었다. 허위의 부대가 떠난 뒤 왜놈헌병들은 조금이라도 의병이라 의심되는 사람이면 가차없이 잡아들였던 것이다. 이틀동안 신돌석은 김수동과 함께 서울 4대문을 돌면서 경계가 약한 틈을 노렸으나  허름한 곳이라곤 어디도 없었다.  “내가 태백산 호랑이란 이름을 지니고있으면서도 동생을 만나러 성안에도 들어갈수 없으니  정말 허울뿐이로구나...”  신돌석은 한숨을 지으며 돌아서는 수 밖에 없었다.   6.스승님을 지하에 모시고    왜놈들은 13도 창의군을 물리친 뒤 도처에 숨어있는 의병들을 잡기에 밤낮없이 혈안이 되여 날뛰였고 의병이라 조금이라도 의심되는 사람이면 무조건 끌어다 처형해버렸다. 놈들은 처형된 사람들의 시신을 동대문밖에 공지에 버려놓고 누구도 시신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감시하였다.   며칠 뒤 박상진은 신문지상을 통해 허위가 거느린 창의군이 동대문을 치기 며칠전에 왜병의 기습을 받고 철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그러니 서울로 련락을 하러오던 김장쇠가 놈들에게 체포되여 처형당한 것도 불보듯 뻔했다 .억장이 무너지는것만 같았다. 동대문까지 몇번이나 가봤지만 총을 쥔 헌병나부래기들이 성문앞을 오가면서 성문을  철통같이 지키고있어서 시신 가까이에 도저히 범접할 수가 없었다.  며칠이 지나자 날이 차츰 따스해졌다. 성문밖에는 살해된 의병들의 시체가 썩는 냄새로 코를 찔렀다. 일본 헌병들은 시체를 이대로 방치했다간 서울에 온역이 덮칠까봐 두려웠던지 시신의 임자들이 정한 기한내에 속히  시신을 찾아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박상진은 널려있는 시신속에 행여나 김장쇠의 시신이 있지 않을가 하여 저녁무렵에 학우들을 데리고 시신을 렴습할 천과 무덤을 팔 삽을 지니고 동대문밖을 나갔다.너른 벌판에 여기저기 널려있는 시신속에서 그는 장쇠의 시신을 간신히 찾아내였다. 그는 어릴적부터 친형제나 다름없이 지내던 전우의 시신을 렴습하면서  눈물조차 흘릴 수가 없었다. 놈들이 눈치챌까봐 두려워서였다. 그들은 렴습한 장쇠의 시신을 메고 외진 곳을 찾아서 무덤자리를 판 뒤 관곽도 마련하지 못한 채 묻는 수밖에 없었다. 양정의숙으로 돌아온 그는 짬짬이 동지들을 모으고 군자금을 모으는 일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왕산 허위는 1855년에 경상북도 선산의 대지주인 한학자의 집안에서 태여났다. 본관이 김해이고 허조와 진성리씨 사이의 네째아들이다.그는 령남 유림의 거두인 맏형님  방산 허훈의 지도하에  을 통달하였고 또 자학으로 법률을 통달하였다. 1895년에 고종의 왕비인 민비(후에 명성황후로 칭해졌음)를 살해한 을미사변이 발생하고 단발령이 내려지면서 전국에서 이에 반발하는 의병운동이 일어났다. 이때 그도 경상도에서 리기찬, 리은찬 등과 함께 두 차례나 의병을 일으켰다. 1899년 2월에 조정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올라가서 45세의 늦은 나이에 벼슬길에 들어섰다. 학문이 깊고 성품이 강직한 그는 고종황제의 신임을 받아  원구단의 참봉이란 말단벼슬로부터 승진을 거듭하여 성균관의 박사로 활동하다가 1904년에는 중추원의원, 평리원 수반판사, 평리원 재판장, 의정부참판 등 요직을 지냈고 1905년에는 비서원승이란 높은 관직에 올랐다. 조정에서 일제의 강박에 의해 소위 를  체결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관직을 사퇴하고 리상천, 박규병 등과 다시 격문을 살포하면서 의병을 모집하여 결사적으로 일제에 저항했다. 서울탈환작전이 실패한 뒤 허위는 패잔병을 수습하여 림진강류역인 경기도 포천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조인환, 김수민,김응두,리은찬의 의병부대와 련합부대를 편성하여 일본군과 유격전을 벌이고 매국노를 처단했다. 그는 조정의 거듭되는 여러 회유책에도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리강년, 유인석, 박정빈 등과 함께 거국적인 의병항전을 호소하는 전국의 의병부대에 발송했으며 결사 항전을 주창한 강경파로 활동하며 한일 강제 병합을 추진 중이던 일제를 끈질기게 괴롭혔다.5월에는 박로천,리기학 등을 서울에 보내 고종의 복위,외교권회복,리권침탈 중지 등 30개조의 요구조건을 통감부에 제출하고 요구조건이 관철될 때까지 결사적으로 항전할것을 선언했다.  1908년 6월11일에 그는 경기도 영평군 유동에서 일본군 헌병대의 급습을 받아  체포되었는데 그때 나이가 쉰넷이였다. 그는 일본군의 포로가 되여 자신이 재직하던 평리원 재판소의 피고석에 앉게 되였다.  허위장군이 일본군에게 체포되여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다가 재판을 받게 되였다는 소식이 에 실렸다. 박상진에게는 마른 하늘의 벼락이나 다름없었다. 우리 스승님이 어이하여 놈들에게 붙잡혔나? 그이를 구해낼 방도는 없나? 스승님을 구하지는 못하더라도 놈들이 스승님을  재판하는것만은 꼭 지켜보아야겠다. 양정의숙에서 재학중인 박상진은 그지없이 존경하는 스승님이 재판받는 장면을 지켜보고 놈들의 죄행을 만천하에 알리려고 마음먹었다.  허위를 재판하는 날 박상진이 법정을 찾아가니 법정문앞에는 헌병 두놈이 총창을 꼬나들고 앞을 막았다. 헌병대에서는 피고의 가족이나 지친을 제외하곤 어떤 사람도 법정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였다.  “저는 양정의숙에서 법률을 전공하는 학생입니다. 법정에서 재판하는것을 견학하러 왔습니다.들어가게 해주십시오.” 헌병들은 처음에는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으나 상진이가 도리를 따져가며 하도 끈질기에 졸라대니 어쩔수 없었던지  슬쩍 눈을 감아주었다. 박상진이 법정에 들어와보니 방청석에 앉은 허위의 가족은 아무도 없었다. 허위선생의 큰형님 방산 허훈은 얼마전에 병으로 작고했고 세째형님  허겸은 허위와 함께 림진강일대에서 항전하다가 동생 허위가 체포되자 의병들이 다시 일어설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장승원을 찾아갔다가 군자금을 받기는 커녕 신변이 위태롭게 되자 동생 허위의 4남2녀와 가족을 이끌고 심산속으로 들어갔기때문이였다. 그리하여 방청석에 온 친인척이라곤  허위의 사위인 리기영 한사람뿐이였다.  박상진은   리기영이 앉아있는 방청석의 앞자리에  가서 리기영의 옆에 앉았다. 법정안은 연덩이처럼 무거운 침묵속에 잠기였다. 어느 누구도 감히 숨소리하나 크게 내지 못하였다.  이윽고 헌병들이 허위를 압송하고 들어오더니 허위를 피고석에 앉혔다.  재판이 시작되었다. 허위가 앉던 재판장석에 앉은 일본인 재판장이 기를 돋우느라 어험 하고 헛기침을 깇고나서 목소리를 가다듬고 물었다. “그대가 허위인가?” 한동안 재판장의 얼굴을 뚫어지게 쏘아보며 피고석에 앉아있던 허위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나는 너희들이 두려워 벌벌 떨던 허위가 분명하다. 그렇지만 나는 너희들의 심문에 응할 수가 없다. 나는 대한제국의 사람이니 일본인의 재판에는 응할 수가 없다.”  “우리는 조선정부에 고빙(顾聘) 되여 법정에 왔으므로 당당한 조선의 사법관이다.”  재판관의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허위는 혼신의 힘을 다해 고개를 절래절래 가로 저었다.그는 목에 핏대를 올리고 반박하였다.  “그것은 우리 황제페하의 본의가 아니시다. 을사조약도 너희들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것이요, 소위 법률이란 것도 너희들 마음대로 정한 것이니 우리 대한사람들은 너희 법률을 따를 필요가 없다. 따라서 이것은 재판이 아니라 너희와 내가 서로 담화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이미 죽음을 각오했으니 너희 마음대로 하거라.”  형무소에서 갖은 고문을 받았지만 허위선생은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났는지 목소리가 온 법정안을 찌렁찌렁 울렸다.  “피고가 대한제국 최고재판소의 수석판사를 력임했다고 적혀있는데 그게 사실인가?”  “그렇다. 나는 평리원의 수반판사, 평리원의 재판장을 력임했었다” “의병을 일으키게 주도한 자는 누구이고 의병대장은 누구냐?” “의병을 일으키게 주도한 자는 이토오 히로부미(伊滕博文)이고 의병대장은 바로 나다.” “그대는 어이하여 그런 얼토당토않은 말을 하느냐?” “의병을 일으키게 주도한 자가 이토오 히로부미라는것은 세상사람들이 다 아는바이다. 무엇때문인가고? 그것은 바로 그자가 우리들로하여금 의병운동을 일으키도록 강압했기 때문이다. 이토오가 우리나라를 빼앗지 않았다면 우리는 절대 의병을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 이토오가 주창자가 아니라면 누가 주창자란 말인가?” “그대는 이토오 그분이 초대통감이라는 점을 두고 하는 말인가?” “그 보다도 우리 황제페하와 각료대신을 위협하여 제2차 한일협약, 이른바 ''을사보호조약" 이라는 것을 강제로 체결한 장본인이 바로 이토오 히로부미이기 때문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그것은 협약이나 보호조약이 아니라 바로 철두철미한 강도행위이다. 그리고 그 강도행위를 저지른 앞잡이가 바로 이토오 히로부미이기 때문에 그가 곧 우리가 국권을 되찾기 위한 의병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도록 부추긴 자라는 얘기다.”  법정안은 허위를 재판하는 장소가 아니라 마치 이토오 히로부미를 단죄하는 장소같았다. 재판장은 허위에게 더 심문을 해봐야 일제의 죄행만 더 드러나고 자신들이 오히려 망신만 당할것 같아서 급급히 허위에게 사형을 선포하고 형이 집행될 때까지 경성감옥의 감방에 가두게하였다. 그런데 허위를 체포했던 헌병대장 아카시 모토지로는 법정에서 허위의 정의로운 말을 듣고 저희들이 조선백성들에게 씻을수 없는 죄를 졌다는 것을 심심히 느꼈다.그리고 허위의 강한 애국심과 황제에 대한 충성심에 깊이깊이 감복했다.그는 남몰래  감방을 찾아와서 허위에게 경의를 표하고나서 자기는 허위의 극동평화정책에 동의한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아까운 인물을 절대 죽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허위를 살리기 위해 총독부를 찾아갔다. 그는 일본제국이 허위를 죽인다면 조선백성들의 반발이 더 심해질 것이니 그의 목숨만은 남겨두는게 바람직하다고 통감에게 간절히 탄원했다.그러나 허위를 눈에 든 가시같이 여기는 통감과 재판부는 그의 탄원을 받아들어줄리 만무하였다.  그해 9월 27일, 사형이 집행되는 날이였다. 서대문밖 의주로와 서대문으로 통하는 교차로 부근의 형장에 입회한 검사가 허위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형이 집행되기전에 유언이 있으면 말하시오.” “내가 국권을 회복하려는 큰 뜻을 펴지 못하고 잡혀 죽는데 이제 와서 유언은 해서 무엇하나?” 허위가 조용히 눈을 감으며 말했다. 입회검사가 한걸음 뒤로 물러서자 일본 승려가 다가왔다. “부디 극락왕생하시도록 지금부터 명복을 빌어드리겠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닥쳐라! 충의의 귀신은 스스로 하늘에 오를 것이며 비록 지옥에 떨어진다해도 내 어찌 원쑤의 나라 중에게 도움을 받겠느냐? 어서 썩 물러나지 못할까?” 감았던 눈을 부릅뜨며 허위가 호되게 꾸짖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천군만마를 호령하는 기개가 서려있어 서리발같이 날카로웠다. 일본 승려는 몸을 흠칫 움츠리면서 뒤걸음치고 말았다. 오전 10시. 마침내 형이 집행되였다. 교수형이였다. 일대 학자이자 법관이였고 걸출한  의병장인 허위는 경성감옥에서 1호죄수로 되여 교수대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늦가을 하늘은 먹장구름이 꽈악 덮이고 세찬 비가 금세 퍼부을 기세였다. 스승님의 형을 집행한다는 비보를 듣고 박상진이 형장에 허겁지겁 달려왔을 때는 형이 이미 끝난 뒤였다. 형장으로부터 한마장 떨어진 길가의 찌그러진 초가집담벽에 몸을 숨기고 형을 지켜봤던 리기영이 나와 그를 막았다.  “박군, 나 여기 있소.”  “스승님의 시신을 어디다 모셨소?”  박상진이 다급히 물었다.  “아직까지 모시지 못...”  “아니, 왜요?”  “놈들이 형장근방에 얼씬도 못하게 해서요. 자칫하면 놈들이 형장부근에 있는 사람들을 의병으로 의심하고 잡아다 죽일까봐 나서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법이 어디 있나? 아무런들 스승님의 시신을 황야에 버려둘수야 없지 않나?” 박상진의 말에 리기영은 땅이 꺼지게 한숨만 내쉬였다. 그의 두눈에서는 눈물이 샘솟듯하였다. “사람이 사람질을 못하면 어이 사람이라 하겠소? 욕된 삶을 사는 건 죽기만 못한 일이요. 시신을 나르는게 무슨 죄가 된다고 그럽니까? 우리 함께 스승님의 시신을 수습하러 갑시다. 다들 나를 따르시오.” 박상진의 말에 응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오로지 리기영만이 장인의 시신을 수습하겠다고 따라나섰을뿐이였다. “서라! 출입금지구역에 들어서는 자는 사형수와 같은 자들로 치고 참수한다는 포고를 못봤느냐?” 형장 출입구를 지키는 간수가 눈을 부릅뜨고 호통을 쳤다.  박상진이 간수의 얼굴을 보니 한민족이 분명하였다. 주위를 돌아보니 경비를 서는 자는 간수와 전옥 두사람뿐이였다. 박상진은 이 간수를 달래서 스승의 시신을 꺼내려고 마음먹었다.  “여보시오. 방금 사형당한 분이 누구신지 아시오?” “그분이 누군지 내 어찌 모르겠소.” “그분이 의병장 허위장군이신것을 알면서 어찌 이럴수가 있소?” “그건 나로서도 어쩔수가 없는 일입니다.” “사형수의 시신을 옮기지 못한다는 명이 있으니 우린들 어쩌겠소?”  간수의 뒤에 서있던 전옥이 앞으로 나오면서 거들었다.  “닥치시오. 시국이 아무리 어지러운들 이 나라 평리원의 최고재판장까지 맡으셨던 어른이시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몸바쳐 싸우신 충신렬사이신데  못난 후손들을 만나 사후에도 이렇듯 욕을 보시니 원통하기로 이 이상 더 있겠소? 흑흑흑...”  박상진은 땅바닥에 퍼드러앉아 땅을 치며 통곡했다. 그 장면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비분에 잠겼지만 왜놈들의 감시가 두려워서 가슴속으로 흐느끼며 쓰디쓴 눈물만 흘리였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전옥과 간수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마침내 전옥이 결단을 내렸다. “시신을 조용히 모셔가되 소문없이 장례를 치르시오. 자칫하면 많은 사람이 연루되여 생죽음을 당할테니 부디 조심하시오.” 전옥이 상진의 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박상진은 허위장군의 시신을 수습한 뒤  수레를 구해 싣고 리기영과 함께 왜놈들의 눈길을 피하면서 서울을 빠져나와 스승의 고향인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으로 갔다. 장례를 치르는데 상주가 없었다. 박상진은 상복을 입고 상주를 대체하였고 장례를 치르는데 든 비용은 자신이 부담하였다. 박상진은 장례를 치르고나서 이내 빈소를 떠날 수가 없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문상하러 오는 애국지사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였다.   박상진이 스승 허위의 삼우제를 지내고난 다음날 자정이였다.  밖에서 낮은 기침소리가 나더니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박상진이 급히 문을 열고보니 오매에도 그리던 의형 “태백산호랑이” 신돌석이 호위병 한명과 함께  찾아왔었다.  “아, 형님, 형님께서 꼭 찾아오시리라 믿었습니다.어서 들어오십시오.”  가물거리는 초불아래서 빈소에 절을 올리고나자 신돌석이 상진이의 손을 덥석 움켜잡으며 말했다. “정말 자넬 볼 면목이 없네. 명색이 의병대장이지 군사장님을 구해내지 못했으니 말일세.” “그게 어디 형님 한사람의 불찰입니까? 우리 모두가 마음뿐이였지 어디 손을 쓸 힘이 있어야지요.” “참 하늘도 무심하지. 그토록 어지신 분을 테려가다니... 후-“ 신돌석은 길게 한숨을 쉬고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울산 포수 김장쇠를 만나보았나?”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였습니다.” “어찌 그럴수가 있나?” 신돌석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련락을 오다가 왜놈들에게 잡혀 처형됐습니다.서울탈환작전 직전에 말입니다.” “원래 그런 일이였구나. 성안에 있던 자네와 련락이 도무지 안된것이 바로 그때문이였구나.” “그 일은 이 아우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김장쇠가 죽은게 어찌 아우의 탓이란 말인가?”  두사람은 서울진공이 실패한 것이 너무도 억울하고 원통하여 말없이 한참동안 천정만 쳐다보았다. “군사장 허위장군이 김장쇠편에 전한 명령서를 아우가 받았더라도 혹시 서울탈환이 가능했을지도 모를텐데...” “어떤 명령이였습니까?” “우리가 수택리에  도착하는 날에 맞추어 성안에서 거사하라는 내용이였지. 성안의 도처에서 왜군을 교란시켜 적들의 군사력을 분산시켜놓고 13도 창의군이 일제히 성안으로 쳐들어가는 작전이였지.”  “아, 장쇠군이 놈들에게 잡히지만 않았더면...” 상진이는 말을 더 잇지 못하였다. “잘있게. 나는 급히 가봐야겠네. 이 근처의 왜놈들이 나를 붙잡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싸다닌다는구먼.” “형님을 이렇게 보내긴 너무 섭섭합니다.” “이후에 형세가 좀 나아지면 다시 만나세.” “그날이 어느때나 될는지요.” “글쎄, 밖에 감시하는 눈이 많으니 자네는 나오지 말게.”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문앞에 서서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의형을 바래는 박상진의 심정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박상진은 한동안 구미에 남아서 스승님의 선산을 지키며 그곳에 머물었다.          7.의형 신돌석장군마저 여이고    스승 허위의 선산을 지키며 외부와 소식이 단절되였던 박상진은 겨울이 되자 서울로 올라왔다.  1909년의 새봄이 찾아왔다. 비록 봄이라고 하지만 헐벗은 행인들은 옷깃속에 목을 움추리고 종종 걸음으로 거리를 다녔다. 의병운동이 멎고나서 꽁꽁 얼어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오동지추위가 사려있는것 같았다.  허위선생의 가족들은 어디서 어떻게 지내실가? 형님 신돌석장군께서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실가? 몇달동안 그들과 통신련락이 단절된 박상진은 가슴이 답답해서 견딜수가 없었다. 학교에서는 첫기의 졸업반 학생들에게 일체 잡념을 버리고 졸업시험준비에 몰두하라고 독촉하였다. 허위선생의 선산을 지키느라 오래동안 수업을 받지 못한  박상진은 얼마 남지 않은 복습시간내에 떨어진 학업을 보충해야했기에 눈코뜰새가 없었다. 어느날 양정의숙으로  길손이 한분 찾아왔다. 누가 나를 찾을가 고개를 기웃거리며 문을 열고보니 찾아온 사람은 의형 신돌석장군의 호위병인 김수동의병이였다. “김동지가 어인 일로 여기를 찾아왔습니까?” “만주로 망명가는 길에 박군을 만나뵈러 들렸습니다.” 우리형님을 잘모시지 않고 왜 만주로 망명하는 것일가? 박상진은 그가 신돌석장군과 함께 있지 않는것이 못마땅해서 김수동에게 따져물었다. “지금 우리 형님께서는 뭘 하고계시오? 몇달동안 소식이 끊겼습니다.” “박군은 아직 모르고계시는군요. 신돌석의병장은 지난 겨울에 피살되였습니다.” “뭐라구요? 우리 형님이 피살됐다구요? 도대체 어찌된 일인지 자세히 말씀해주십시오.”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일입니다…” 김수동은 서울탈환전이 실패한 후의 정황을 대충 이야기하였다. 13도련합의병의 서울탈환전이 실패하자 허위와 작별한 신돌석의병장은 수하의 의병들을 거느리고 영해로 돌아온 뒤 1908년 1월에는 평해의 독곡(独谷)에서 일본군을 무찌르고 3월에는 대규모로 투입된 적군에 맞서기 위해 안동, 울진, 삼척, 강릉 등지의 의병과 합친 뒤 군세를 강화하여 춘양, 황지, 소봉동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했다. 그 뒤 울진 도곡, 평해 한곡,희암에서 일제군과 크게 전투를 벌이였다. 10월에 안동 재산을 거쳐 영양 검정려점에 이르렀을 때 일본군과 부딪쳤으나 적들을 교묘하게 빼돌리고 무사히 빠져나올수 았었다.  어느덧 겨울철이 잡아들었다. 산과 들에 하얀 눈이 쌓이고 사나운 북풍이 휘몰아쳤다. 겨울철은 헐벗은 의병들에게 가장 어려운 계절이였다. 엎친데 덮치기로 아껴먹던  식량마저 떨어졌다.  의병들은 산속에서 모진 추위와 주림에 허덕이면서 수시로 쳐들어오는 왜군을 막아야만  했다. 이렇게 버티다간 의병들이 산속에서 굶어죽지 않으면 얼어죽을 판이였다. 사태의 엄중성을 심심히 느낀  의병장 신돌석은 일월산 아래에 이르자 결단을 내리고 대원들을 모아놓고 말하였다. “지금 군량이며 무기가 다 떨어져서 적들의 진공을 막아내기도 어렵고 겨울철을 나기도 어렵구나. 우리 잠시 헤어졌다가 봄철에 다시 여기서 만나기로 하자” 의병장의 명을 받은 의병들도 생각해보니 분산해서 겨울을 나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들은 후일에 아무때든 대장이 부르면 달려오기로 약속하고  제각기  잠시 집으로 돌아갔다. “저는 장군님의 곁을 떠나지 않겠습니다.허락해주십시오.”  언제나 신돌석을 그림자같이 따라다니며 호위하던 의병 김수동이 간청했다. “집에 돌아가서 두어달동안 숨어있으면서 가족들을 잘 돌보게. 봄이 오면 내 자네를 먼저 부를테니 그동안 부디 조심하게.”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김수동이 선뜻이 대답하자 신돌석은 허리춤을 풀어 몇푼밖에 되지 않는 동전을 꺼내서 김수동의 손에 쥐여주면서 말했다. “자네는 그동안 나를 따라다니느라 고생이 많았네. 얼마되지 않지만 로자에 보태쓰게.” “아닙니다. 저에게 로자는 자랍니다.” “사양하지 말고 받게.” 의병들을 다 돌려보내고난 신돌석은 산길을 헤쳐 자기집 근처에 와서 숨어있다가 날이 어둡자 마을로 들어갔다.그는 집에 들어가자 안해에게 찾아온 사유를 이야기하고나서 서둘러 이불짐을 쌌다. 왜경들이 어느때 그의 집을 습격할지 모르기때문이였다.그는 가족들을 이끌고 밤중에 남몰래 마을을 빠져나와 일월산속의 깊은 골짜기안으로 들어갔다. 땅을 파서 움집을 만든 그들은 움집에서 겨울을 나기로 하였다. 신돌석은  진달래가 피여나는 이른 봄철까지 산속에 머무를 계획이였는데 보름이 지나자 속이 갑갑해서 견딜수가 없었다. 세상과 동떨어진 심산유곡에 숨어있으니 바깥소식이란 조금도 알수가 없었기때문이였다. 함께 목숨을 내걸고 싸우던 전우들은 다 무사히 집에 돌아갔는지, 그들은 지금 이 어려운 나날을 어떻게 보내는지 궁금한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12월 11일, 음력으로 동지달 열여드레날, 그는 고독과 갑갑증에 견딜수 없어서 산을 슬슬 내려왔다. 앞에   눌골이란 마을이 내다보였다.  참, 이 눌골에 김상렬이가 살고있지 않은가? 상렬이는 그동안 어떻게 지내고있는지? 그는 갑자기 옛부하 김상렬이가 그리워졌다. 그가 처음으로 의병활동을 벌일 때 김상렬이 그의 의병대오에 가담했었고 적들과의 싸움에서도 용감했었다. 신돌석이 두번째로 의병을 일으켰을 때 김상렬이 의병에 가담하진 않았지만 그는 옛부하가 자기를 반겨주리라 굳게 믿었다.  신돌석이 대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서자 마침 밖에 나왔던 김상렬과 마주쳤다. “아, 상렬이, 그새 잘 지냈나? 이렇게 만나니 반갑네.” “어서 오십시오.신대장께서 어찐 일로 혼자 이렇게 우리집을 찾아오십니까?” “이곳을 두루 돌아보니 산세가 험해서 유격근거지를 잡을만한 좋은 곳이더군. 헤여졌던 동지들을 다시 모아 의병운동을 재개할가 하네. 며칠동안 자네집에서 머물며 신세를 져도 괜찮을가?”  “천만의 말씀입니다. 대장님께서 한사를 찾아오신것은 우리 가문의 영광입니다.” 옛부하가 유달리 친절하게 맞아주니 신돌석의 얼었던 마음은 봄눈같이 녹아내렸다. 또 김상렬 역시 이 마을에서는 내노라 하는 부자라 자기가 그의 집에서 한달쯤 머무른다해도 그에게 별 부담이 될것 같지도 않았다.  사랑방에서 마주앉은 두사람이 그동안 지내온 생활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 상렬의 동생 상근이가 찾아왔다.  김상렬은 상근이를 보고 말했다.   “신대장님께서 우리집에 오셨는데 자네는 가서 소를 한마리 잡게. 우리 오래간만에 만났으니 회포를 풀며 한번 술에 취해봐야겠네.” 형의 분부를 받은 상근이는 정말로 외양간에 가서 소 한마리를 끌어내다가 잡았다. 실로 가정의  대사를 치르는 분위기였다. 저녁에 푸짐한 주안상이 들어왔다. 구수한 고기냄새가 창자를 요동했다. 신돌석은 이 몇해동안 이런 맛있는 고기반찬을 한번도 구경하지 못했었다.   “대장님, 어서 약주를 드십시오.” 김살렬이 막걸리를 사발에 부어서 두손으로 받쳐들고 권하였다. “자네도 함께 들게.” “예, 들구말구요. 저야 주량이 크지 않으니 장군께서 많이 드십시오.”  기분이 유달리 좋아진 신돌석은 김상렬이 부어주는 술을 사양하지 않고 몇사발을 들이켰다.자그마한 항아리의 술이 굽이 났다. 김상렬은 술을 가지러 정주에 가더니 술 한바가지를 떠와서 신돌석의 사발에 부어주고 그가 다 마시자 또 부어주었다. 후에 부은 술을 마시고난 신돌석은  어인 영문인지 머리가 뗑하고 잠이 마구 몰려왔다.  “내가 술을 그리 많이 마신건 아닌데  왜 이럴가?” 주량이 바다같은 신돌석은 혼자말같이 중얼거렸다. “아마 로독에다 시장하던 터에 갑자기 술을 드시니 그런가봅니다. 잠시 구둘에 누워 쉬다가 다시  마십시십시오.” “그럴가? 오늘 자네신세를 단단히 지게 됐네.” 김상렬이 따뜻한 아래목에 신돌석을 눕히였다. 신돌석은 눕자마자 코를 곯며 깊은 잠에 빠져들어갔다.그는 자기의 옛부하인 김상렬이 술에 남몰래 을 넣었을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신돌석이 의병을 해산시켰다는 정보를 입수한 일본통감부에서는 신돌석의 머리를 베어오는 자에게는 라는 큰 관직을 내여주고 또 푸짐한 상금까지 주겠다는 방을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거리마다 붙여놓았고 또 신돌석을 숨겨두는 자는 일족을 멸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던것이였다. 의병운동에 참가했던 력사가 있는 김상렬은  경찰서에서 어느때든 자기를 잡으러 올것만 같아 두려워서 자나깨나 안절부절이였다. 어떻게 하면 왜놈경찰들의 신임을 받으며 발편잠을 잘수 있을가? 요리조리 생각을 굴리던 김상렬은 급기야 상사를 배반할 악한 마음을 먹게 되였다. 내가 잡혀죽고 가족이 몰살당할판인데 그까짓  상사고 뭐고 를 가릴 처지가 아니다. 내손으로  신돌석이를 잡아다 바쳐야겠다. 신돌석을 내손으로 잡기만 하면 당장 벼락부자가 되는것은 식은죽먹기고 재수가 좋으면 령감소리까지 듣게 될텐데. 하지만 그런 복이 나한테 떨어질수 있을가? 그는 신돌석이 지금 어디서 뭘 하는지 몰라 안타까워했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신돌석이 자기의 발로 그의 집을 찾아오리라곤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한 일이였다. 하늘에서 복이  통째로 굴러 떨어지는구나 하고 생각하니 웃음주머니가 흔들거렸다. 그는 이 절호의 기회에 신돌석을 죽이고 한평생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악한 마음을 먹었던것이였다.  “됐다. 이젠 해치워야겠다..” 신돌석이가 죽은듯이 잠에 깊이 빠져든것을 확인한 김상렬이 동생 상근이를 보고 가만히 말했다. “형님, 우리 손으로 를 없애치우자고요?”  동생 상근이는 뒤로 물러앉으며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었다. “이놈아, 꾸물거리다가는 우리 목이 달아나게 됐어.  우리가 신돌석이를 숨겨둔 사실이 드러나면 우리 둘은 더 말할것 없고 온 집안사람들이 몰살당하고 이 마을도 불바다가 된다는것을 몰라? 지금 우리가 신돌석의 목을 베면 현상금은 더 말할 것이 없고 경상관찰사라는 벼슬까지 얻게 된다.알겠지?”  상렬이의 꼬드김에 동생 상근이도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상렬이는 고간에 감춰둔 날이 시퍼런 도끼 두자루를 가져와 한사람이 하나씩 들었다.김상렬은 신돌석의 자는 모양을 잠시 응시하다가 상근이를 보고 동시에 손쓰자고  눈짓을 했다.그러나 정작 도끼를 들고나니 두 팔이 후들후들 떨렸다.  “에잇!”  상근이는 눈을 지그시 감고 신돌석에 가슴을  도끼로 내리찍었다. 상근이도 부들부들 떨면서 도끼를 휘둘렀다. “억...” 치명상을 입은 신돌석은 본능적으로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정신없이  껑충껑충 뛰여가던 그는  담장밖 10여보 되는 길바닥에 이르러 쿵 하고 쓰러졌다. 그의 몸에서는 선지피가 샘솟듯 콸콸 흘러나와 길을 적시였다. 뒤따라 나온 두놈은 혹시 신돌석이 살아날가봐 도끼를 두세번 더 휘둘렀다. 태백산 호랑이로 천하에 용맹을 떨치던 의병장 신돌석은 결국 배반한 옛부하의 마수에 걸려 참혹하게 희생되였다. 이 때 신돌석은 향년이 겨우 31세인 아까운 나이였다. 뒤늦게 떠오른 하현달도 이토록 처참한 광경에 놀라 숨을 죽이고 그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이틎날 아침, 김상렬과 상근이는 신돌석의 수급을 보자기에 싸가지고 호기있게 일본헌병대를 찾아갔다. “대장님, 신돌석의 수급을 가져왔습니다.” 김상렬은 당장 후한 상금을 받고 높은 벼슬자리에 오를 일을 생각하니 웃음주머니가 흔들거렸다. “뭐라구? 신돌석의 수급을 가져왔다구?  신돌석을 잡아오라 했지 누가 그를 죽이라 했어? 상을 받아먹을 생각은 아예 말어!” 일본 헌병대장은 코웃음을 짓더니 수하 헌병에게 눈치짓을 했다.  벼슬과 돈에 눈이 벌개져 자기의 상급을 모해한 반역자는 제놈이 바라던것을 하나도 얻지 못하였다. 왜놈들은 그들에게 약속한 현상금을 주기는 커녕  도리여 그들을 싸늘한 감방에 가두어버렸다. 간교하기 짝이 없는 왜놈들은 새로운 흉계를 꾸미였다. “모월 모일,돈과 벼슬에 눈이 어두워서 자기를 친동기같이 사랑하던 의병대장 신돌석에게 독주를 먹인뒤 도끼로 쳐 죽인 악인 김상렬,김상근형제를 처단한다.” 왜놈들은 김상렬형제를 처단한다는 방을 온 거리에 내붙였다. 놈들은 구경하러 형장에 온 백성들의 앞에서  상렬, 상근형제의 목을 벤 뒤 그들의 수급을  저자거리에 내다 걸었다. 자고로 반역자의 끝장은 다 비슷하였다. 행인들은 반역자의 머리를 향해 침을 뱉기도 하고 돌을 던지기도 하였다. 간교하기 짝이 없는 왜놈들은 돈 한푼 쓰지 않고 란 의병대장을 죽였고 또 반역자의 머리를 내걸어 민심도 수습하는 일석이조의 리득을 챙겼던것이다.   1963년에 신돌석장군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였다. 김수동이 의병이 해산된 사실과  신돌석이 비참하게 살해된 경과를 상세히 말해주자 박상진은 책상을 치며 통곡했다. “비루한 놈들, 의병운동을 하기가 두려우면 그만두면 될것이지 왜놈들의 꼬임에 넘어가 저의 수장을 살해하다니. 내 결단코 이 원쑤를 갚고 형님의 령혼을 위로해줄테다.”  “김상렬네 형제도 마땅한 보응을 받았습니다...” 김수동이 김상렬형제의 끝장에 대해 상세히 소개하자 박상진이 말하였다. “우리의 원쑤가 어찌 그놈들뿐입니까? 우리의 가장 큰 원쑤는 일본침략자입니다. 김동지께서는 만주에 가시더라도 우리형님의 뜻을 이어 의병운동을 끝까지 진행하시기를 바랍니다.” “나도 그럴 타산입니다.”  김수동이 만주로 떠나간 뒤 박상진은 비밀리에 동지들을 모으는 일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그해 7월, 박상진은 전교적으로 최우수성적을 따내고 양정의숙을 졸업했다.   8. 사법시험에서 수석을 따냈건만    10월 13일, 국가에서는 전국적인 범위에서 법관을 모집하는 사법시험을 치렀다. 대한제국이 성립된이래 처음으로 치르는 사법시험이였다. 근대교육을 진행하는 양정의숙에서 법률과 경제전업을 전공한 박상진은 스승 허위의 유지에 따라 사법시험에 참가했다.그는 장래에 훌륭한 판사가 되여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고 억울한 백성들을 위해 정의를 행사하려고 마음먹었었다. 시험장에는 전국 각지에서 선발되여 온 백여명의 응시생들이 긴장하게 답을 쓰느라 진땀을 흘리였다. 학습기초가 튼튼하고 두뇌가 명석하고  각방면에서 지식이 남달리 연박한 박상진이 시험지를 받아보니 시험문제는 예상하던것보다 쉬운셈이였다. 그는 침착하게 한문제 한문제씩 답을 적고나서 후련한 마음으로 시험장을 나왔다. 10월 24일, 대한제국정부에서는 이번 사법시험에 합격한 입시생들의 명단을 발표하였다. 사법시험에 합격한 사람은 전국적으로 오로지 7명뿐이였다. 그가운데 박상진의 이름이 합격자명단의 첫자리에 있었다. 두말할것 없이 박상진이 수석을 따낸것이였다. 이것은 양정의숙으로서는 큰 영광이 아닐수 없었다. 온 교정이 기쁨에 들끓었다.  이틀이 지난 10월 26일, 안중근(安重根)의사가 중국 할빈역에서 백의민족의 철천지원쑤인 이토오 히라부미를 격살하는 쾌거를 달성하였다. 에 실린 특대기사를 읽고난 박상진은 흥분되여 잠시도 그 자리에 앉아있을 수 없었다. 대한제국을 허울만 남겨놓고 그것도 성차지 않아 만주땅까지 노리다가 찬거운 세멘트바닥에 쓰러진 침략자의 원흉의 몰골 그리고 권총을 들고 를 부르는 안중근의사의 름름한 모습이 눈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는 신문을 들고 학우들을 찾아갔다. “이 신문을 보십시오. 이토오가 안중근의사에게 격살당했습니다.” 박상진의 손에서 신문을 받아든 학우들은 저마다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이토오는 벌써 천벌을 받았어야할 놈이야.” “안중근의사는 청사에 빛날 큰 일을 하시였네.” 박상진은 이 특대희사를 한시바삐 온 국민에게 알리고 싶어서 신문의 요지를 여러부 베껴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시장거리의 벽에 붙이였다.  안중근의사의 의거는 삼천리강토의 모든 정직한 사람들에게 희열과 희망을 안겨줬고 간악한 일본제국주의자들로 하여금 소름이 끼치게 했으며 온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일제의 앞잡이질을 하는 친일분자들을 내놓고 무릇 량심이 있는  조선사람들은 둘씩셋씩 모이기만 하면 안중근의사의 쾌거를 이야기하면서 기쁨을 금치 못했다. 누가 지었는지 백성들속에서는 새로운 노래가 사람들의 입에서 힘차게 불리워졌다.     만났도다, 만났도다, 원쑤 너를 만났도다.   원쑤 너를 만나고자 한평생을 별렀건만   왜 이다지도 늦었는가?   지리한 한해가 저물더니 1910년의 정월이 찾아왔다.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사법고시에서 수석을 한 박상진에게 4월 1일전에 평양재판소에 가서 판사로 부임하라는 발령이 내렸다. 양정의숙에서는 개교이래 가장 큰 경사를 맞았다고 경축대회를 열었고 박상진의 가문에서도 친인척들이 찾아와 축하하기에 바빴다.  박상진이 부임을 며칠 앞둔 3월 27일(음력 2월 17일), 박상진은 양정의숙에서 그의 판사시험합격과 평양재판소 판사발령을 축하하는 연회에 참석했다. 축하연이 한창 진행될 때 배달부가 을 가져왔다. 신문을 받아펼치던 박상진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신문의 톱기사는 안중근의사가 어제 려순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했다는 비보였다. 온 국민의 마음속에서 우상이였던 안중근의사가 왜놈들에 의해 교수형을 당하다니? 참말로 기절초풍할 비보였다. 축하파티장소의 분위기는 금세 초상집같이 어수선해졌다.통곡하는 학생, 흐느끼는 학생, 말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는 학생... 박상진이 동창들이 베풀어준 축하만회를 웃음없이 끝내고 어둠속에 무거운 다리를 옮겨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였다.   며칠전에 에서 “대한남아 안중근”이란 기사에 실린 안중근의사가 한 말구절들이 머리속에 떠올랐다. “이토오가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내가  대한의용군의 사령자격으로 그자를 총살한 것이지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나를 일반 살인피고로 취급하지 말고 전쟁포로로 취급하기 바란다...우리 2천만동포에게 허위와 같은 진충갈력(尽忠竭力) 용맹의 기상이 있었던들 오늘과 같은 국욕(国辱)은 받지 않았을 것이다. 본시 고관(高官)들이란 제 몸만 알고 나라는 모르는 법이지만 허위만은 그렇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관계제일(官系第一)의 충신이라 할것이다.” 충신렬사들이 가는 길은 어이 이다지도 험난한 가시밭길뿐인가? 박상진은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이 미여지는것만 같았다.   봄이 찾아왔건만 날씨는 여전히 쌀쌀했다. 헐벗은 백성들은 목을 움추리고 종종 걸음으로 골목을 걷는다. 꽁꽁 얼어붙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봄은 아직 아득히 먼곳에 있는것 같았다. 행인이 뜸해진 골목에서 귀에 익은 노래소리가 은은히 들려온다.   만났도다, 만났도다, 원쑤 너를 만났도다. 원쑤 너를 만나고자 한평생을 별렀건만 왜 이다지도 늦었는가?...   박상진에게 오늘 이 노래는 유달리 구슬프게만 들렸다. 가슴이 미여지는 갑갑함을 풀어보려고 박상진은 하늘을 향해 하고 목청껏 웨쳤다.  나라 잃은 설음을 어디에도 하소연할길이 없는 그는 웨침으로나마 살을 에이는 마음의 아픔을 달래고싶었다.  쓰디쓴 눈물이 줄끊어진 구슬같이 두볼을 타고 주루루 흘러내렸다.   대문을 들어서니 낯익고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벌써 오느냐? 오늘은 늦을줄 알았는데...”  인기척을 듣고 나온 양부 박시룡의 목소리였다. “아버님, 저 돌아왔습니다.” “어서 방안으로 들어가자.” 아들을 데리고 방안에 들어간 아버지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런데  오늘 네몸이 어디 아프냐? 힘이 조금도 없어보이는구나.” “아버님!흑흑...” 박상진은 아버지의 앞에서 참고참던 울음통을 터뜨리고말았다. “얘야, 무슨 일이 생겼느냐?” 박상진은 들고온 신문을 아버지에게 드리면서 말했다. “놈들이 어제 려순감옥에서...” “려순감옥이라구? 그럼 놈들이 안중근의사에게 형을 집행했단 말이냐? 아이구, 기가 차구나. 후- 애국지사 또 한분이  떠나갔구나.아하.” 그의 부친 박시룡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였다. 이윽고 그는 아들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하였다.  “어서 방안에 들어가서 좀 쉬거라.” “예, 아버님.” 침실로 들어와 밑둥이 끊어진 나무같이 쓰러진 박상진은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판서로 평양에 발령되여 간다는 것이 조금도 즐겁지가 않았다. 온 나라의 명맥이 왜놈들의 손아귀에 쥐여있는 이 험악한 세월에 내가 판사직을 맡은들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 무슨 일을 해낼수 있단말인가? 나라를 위해 싸우다 붙잡힌 애국지사들을 내가 변호한다면 어느 재판장이 나의 말을 들어준단 말인가? 죄없이 잡힌 백성들을 풀어주자고 하면 재판장이 귀등으로나 들어줄가? 평양법원의 판사라는것도 그저 빛좋은 개살구지. 자칫하단 놈들의 앞잡이란 루명이나 듣기 쉬운 자리가 아닌가? 어지러운 이 세상 어디에 정의가 서고 법이 설수 있단 말인가? 이따위 판사질은 오히려 하지 않는 것이 낫다. 그런데 내가 판사로 부임하러 가지 않겠다고 말하면 아버지께서는 펄쩍 뛰시겠지? 어쨋든 나의 생각을 아뢰고 아버지를 잘 설득해야겠다. 온 밤을 지새우며 생각을 굴리다 아침에 일어난 박상진은 아버지가 거처하는 사랑방으로 들어가서 문안을 드렸다.  “상진아, 이제 네가 평양으로 떠날 날이 다가왔구나. 짐을 꾸릴 준비를 해야잖겠느냐?” “아버님, 저는 ...” “무슨 일이 있느냐? 어서 말해보아라.” 아들의 기색이 심상찮은것을 본 박시룡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저는 판사로 부임하지 않겠습니다.” “뭐라고? 그 자리가 어떻게 얻은 자리인데? 너는 법원판사로부터 출발해서 허위님처럼 보란듯이 승진을 거듭해서 우리 가문을 빛내야 되지 않겠느냐?” “아버님, 소자는 아버님의 뜻을 받들수  없어 죄송합니다. 지금 이 나라의 요직이란 요직은 다 일본놈들이 차지하고 나라일을 쥐락펴락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소자가 판사직을 맡은들 나라를 위해 무슨 일을 해낼수 있겠습니까?”  “네가 가장 존경하는 허위선생도 나라의 최고재판장을 맡아 백성들의 로고를 풀어주며 세상에 명성을 떨치지 않았느냐?” “아버님,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같지 않습니다. 허위선생님께서 생존하셨더라면 반드시 소자의 생각을 지지하실것입니다.” 박상진은 맺고끊듯 잘라 말하였다. “그러면 몇년동안 네가 억척스레 한 공부가 헛되지 않느냐?” “아버님, 소자가 배운 학문이 어디 하늘로 날아가겠습니까,땅속으로 숨겠습니까? 소자는  배운 학문을 올바르게 쓸 마땅한 자리를 따로 찾겠습니다.”  아들의 의지를 돌려세우기 어렵다고 생각한 박시룡은 동생 시규에게 도움을 청하는 수 밖에 없었다. 학문이 자기보다 월등하고 또 상진이의 생부인 시규가 행여나 상진이의 마음을 돌려세울수 있을가 해서였다.  형님의 부탁을 받고 찾아온 박시규는 상진이의 마음을 돌려세우려고 갖은 말을 다 해봤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친부와 양부가 사랑방에 함께 마주 앉아있을 때 상진이가 들어가서 두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형님, 제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타일렀는데도 상진이가 기어코 고집을 부리네요. 참 형님을 뵐 면목이 없습니다.” “그게 어디 자네탓인가?...상진아, 아무리 생각해봐도 네가 생각을 고치고 네 스승님의 뜻을 따라 우선 평양법원의 판사로 내려가는것이 좋겠구나.”  관직에 대해 아직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한  박시룡이 아들에게 기대에 찬 눈길을 보내면서 애원하듯 낮은 소리로 달래였다.  “아버님께서는 소자의 뜻을 오해하고 계시네요. 허위스승님께서 왜 평리원의 수석판사직을 버리시고 의병을 일으켰습니까? 이 나라의 관청에 우리사람이 들어가 옳은 일을 할 자리는 아무데도 없습니다.왜놈들은 지금 허울좋은 차관정치(次官政治를 하고있습니다. 겉으로는 우리사람들을 정직(正职)에 내세웠지만 그들은 모두 허수아비에 불과합니다.그리고 법원에서 재판해야 할 소위 범인이란 사람들이 누굽니까? 거의 다 의병운동을 하다 잡힌 애국지사들입니다. 아버님께서는 소자더러 우리의 애국지사들을 재판하는 매국적이 되란 말씀은 아니시겠지요?”  아들의 뜻이 요지부동임을 확인한 박시룡이 다시물었다. “판사직에 부임하지 않고 너는 무슨 일을 할 타산이냐?” “저는 한동안 주변국가를 돌아다니면서 견식을 넓히고 배운 학문을 쓸만한 자리를 찾으려합니다.” “네가 우리한테 혹시 무엇을 숨기는게 아니냐?” 박시룡이 정색하고 물었다.  중국의 만주땅과 로씨야의 연해주에서 의병운동이 벌어지고있다는 말을 들으적이 있는 그는 가계를 잇기위해 동생한테서 받아온  귀한 양아들이 만주땅으로 건너가서 의병대오에 가담할까봐 두려웠던것이였다. “소자가 두분앞에 무얼 숨기겠습니까?” “형님 말씀을 듣고보니 저도 집히는데가 있네요” “무엇이 집힌다는게냐?” “지금 리시영, 리동영, 주진수 등 사람들이 종이장수로 가장하고 남만주일대를 돌아보고왔다는 얘기도 들리고 또 길림성 류하현 삼원포에 토지를 사들여 독립군양성학교를 꾸리련다는 말도 들리구요.” “허위선생의 중형(仲) 허혁선생이 만주로 망명한것도 그런 목적인지 모르겠구나.” “아마 그럴것입니다.” “상진이 너도 국외로 망명하여 의병을 일으키려는것이 아니냐?”  상진의 생부 박시규가 정색하고 물었다. “그런것은 아닙니다. 소자는 주변국가를 돌아다니면서 견문도 넓히고 세계정세의 흐름을 파악한 뒤 구국의 길을 알아내고 돌아오겠습니다.” “너의 뜻이 진정 그러하다면 나도 더는 말리지 못하겠구나.”  박시룡은 아들의 뜻을 꺾을 수 없음을 확인하고 아들의 청에 동의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라 형편이 좋아지면 다시 판사직을 맡을 수 있겠지?” 아직까지 판사직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박시룡이 다시 물었다. “물론입지요.하지만 기울어진 나라를 그리 쉽게 바로 세울수 있겠습니까?” “하긴 그래.” 박시규가 고개를 끄덕이였다. “이미 네가 마음을 철석같이 다졌으니 려행준비를 잘 해서 외국을 돌아보고 오너라.” 박시룡이 결단을 내리고 아들의 출국에 동의하였다. “이번 걸음에 나라를 구해낼 학문을 잘배워오너라.” 박시규도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박상진은 몸에 병이 생겼다는 핑게를 대고 평양재판소에 부임하는것을 거절하고 집에서 출국할 준비를 다그쳤다.   9. 대륙에 부는 바람   아장아장 걸어오던 봄도 눈깜짝할 사이에 도망가고 무더운 여름도 소리없이 깊어졌다. 1910년 8월 30일,음력으로 경술년 칠월스므엿새날이였다. 박상진이 생부 박시규와 사랑방에 앉아서 시국담을 하고있는데 배달부가 신문을 가져왔다. 박상진이 신문을 펼쳐보니 첫면에 업전만큼 큼직한 활자로 인쇄된 데라우치 통감의 "통감유고문(通监喻告文)"이란 글이 찍혀있었다.  악마같은 통감놈이 또 무슨 수작을 부리나 어디 보자 하고 신문을 내려다보던 세 사람은 그만 아연실색했다. 통감유고문의 내용은 대개 이러했다. 첫째, 한국황제의 통치권 양여를 일본 천황이 승락한다. 둘째, 합병공로자에게 은사금을 지급하고 효자와 절부에게도 포상한다. 세째, 토지세 등 세금미납액을 면제 또는 탕감해준다. 네째, 일본제국 군대가 조선백성들의 생명과 재산과 질서를 지켜준다. 다섯째, 13도 각지에 신작로를 개설하고 철도를 부설함으로써 조선의 산업을 발전시켜주겠다. 여섯쨰, 중추원을 두어 민정을 살펴서 통치에 반영시키겠다. 일곱째,지혜병원을 설치하여 질병을 없애겠다. 여덟째, 신교의 자유를 보장하겠다. 아홉째, 이상의 시정을 반대하는 자가 있으면 가차없이 처단하겠다.   일제의 사냥개로 완전히 변해버린 리완용과 송병준이 일본정부에 소위 충성심이란 것을 보여주기 위해 서로 경쟁이나 하듯 한일합방을 요구하여 8월 22일에 체결된것이 소위 이였다. 놈들은 한일합방조약을 체결하고나서 민심이 두려워서 한주일간 숨기고있다가 어제 정식으로 발표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치기 떨리는 경술국치(庚戌国耻)였다.  이젠 우리는 나라잃은 망국노로 전락되였구나. 박상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침통한 얼굴로 신문을 뚫어지게 쏘아보았고 마주앉은 생부 박시규도 신문지에 눈을 떼지 못하고 땅이 꺼지게 푸푸 한숨만 내쉬였다. 왜놈들이 조만간에 3천리강토를 완전히 삼켜버릴것은 불보듯 뻔한 바였지만 영원히 씻을수 없는 치욕의 날이 이렇게 빨리 닥치리라곤 생각하지 못한 그들이였다.  “도둑놈이 남의 집에 들어와서 도둑잡으라고 웨치더니 이젠 그것도 성차지 않아서 우리의 나라의 이름마저 삼켜버렸구나. 왜놈들도 왜놈이지만 그 앞잡이들이 정말 사지를 찢어도 용서못할 야수들이지.” 박시규도 참다 못해 울분을 터뜨렸다.  다음날, 박상진은 대소가의 모든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우리는 이제 나라없는 망국노로 변했구나.우국충절로 목숨을 끊는 분들도 많지마는 그것은 나라를 구하는 바른  길이 아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일제와 용감히 싸우는 길만이 잃었던 나라를 되찾는 유일한 길이다.오늘 우리 대소가는 이사짐을 싸가지고 고향 록동으로 돌아가서 때를 기다려야겠다.”  대소가의 장남인 박상진이 자기의 뜻을 피력했다.  조정에서 홍문관교리를 지내다 물러난 양부 박시룡이 먼저 록동으로 내려가서 옛집을 수리했고 전 승지 박시규는 서울집의 가장집물을  정리하기로 하였다.온 집안사람들은 시골로 이사를 하느라 며칠동안 바삐 서둘었다.  박상진은 시골로 내려가면 거들먹거리는 왜놈들의 험한 꼴을 덜볼수 있겠지 하고 생각했었는데 시골도 서울이나 별로 다른바가 없었다. 면장이란 자가 앞장서서 마을을 돌면서 집집마다 일장기를 세우라고 호통치는가 하면 관원들이 일본놈 관헌의 꽁무니를 강아지같이 졸졸 따라다니면서  세금을 바치라고 닥달을 했다. 일본놈경찰들은 토지조사를 한다는 명목으로 량반이나 유생들의 집의 논밭은 물론이고 개인집에서 키우는 소, 말, 나귀, 돼지, 염소, 개, 닭의 수까지 조사해갔고 심지어 정원에 심어놓은 과실나무와 뽕나무의 그루수까지 적어갔다. 놈들은 일반 백성들보다 살림이 유족한 량반이나 유생들의 손발부터 꽁꽁 묶어놓아 그들이 옴작달삭하지 못하고 그들이 시키는대로 따르게하려는 수작이였다. 록동에 가솔을 안배하고난 박상진은 동만주와 연해주들 돌아보기 위해 려행을 빙자하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그가 먼저 찾아간 곳이 바로 압록강건너켠에 있는 량재안이 경영하는 안동려관이였다.안동려관에 들어서자 려관주인 량재안이 그를 반겨맞았다. 량제안은 경북 영일사람으로서 을미(1895년)의병때 리병찬이 이끄는 의병대의 중대장을 맡고 허위 등과 함께 청산, 보은, 괴산, 청주, 음성 등지에서 수차례나 일본침략자와 전투를 벌였었다.그는 1905년 대구에서 국권회복을 위한 국채보상운동을 벌였으며 1906년에는 령남에서 정용기를 중심으로 산남의진(山南义阵)이 결성될 때 상주 선산지방의 책임자가 되여 왜병과 영용하게 싸웠던 의병장출신으로서  허위선생 생존시부터 박상진과 교분이 아주 두터운 사이였다.  박상진이 려관을 돌아보니 려관치고는 너무도 초라하고 규모도 작았다. 그러나 이 려관은 교통이 좋은 곳에 자리잡고있어서 손님들이 찾아오기에 편리했다. “량선생님, 선생님께서 이국땅에 들어와서 려관을 꾸리는것도 국권을 찾기 위한 힘을 키우는 것이 아닙니까?” “그야 더 이를데가 있나?” 박상진의 물음에 량제안은 고개를 끄덕이였다. “려관경영에 어려움이 많으시겠습니다.” “저는 선생님이 려관을 꾸린 목적을 잘알고있습니다. 제가 재정지원을 얼마간 해드리겠습니다. 이 려관을 독립운동을 하는 동지들의 련락지점으로 삼았으면 하는데 선생님 생각에는?”  “나도 그럴 생각을 하고있었네.  나의 려관을 찾아오는 사람들 거의가 의병운동을 하던 동지들이 아닌가?” “그럼 이곳을 독립운동의 만주련락지점으로 정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리 하게.” 안동에서  그는 북행렬차에 올라 할빈으로 갔다. 할빈역전에서 내린 그는 곧바로 출구로 나가지 않고 안중근의사가 이토오 히로부미를 격살한 장소를 찾았다. 신문에 났던 사진을 보니 안중근의사가 이토오에게 사격을 하러 섰던 자리를 짐작할수 있었다. “안중근의사님, 저는 당신께서 거사하신 영광스런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저는 이 몸이 부셔져서 가루가 되더라도 의사님의 장한 뜻을 이어가겠습니다.” 박상진은 주먹을 불끈쥐고 마음속으로 한생을 반일투쟁에 이바지할 장한 뜻을 다졌다. 할빈을 떠난 그는 다시 남하하여  류하로 온 뒤 당지에 자리잡은 혁명지사들을 일일이 만나보았다.  이곳에서 그는 의병운동을 계획하고있는 우재룡, 리상룡, 손일민, 김대락, 김동삼, 권영만, 조용필  등을 만나 만주에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군사학교 설립을 위한 구체방안을 토의하고 또 그들중 일부가 본국에 돌아와서 반일투쟁을 벌일것을 결의했다. 류하를 떠난 그는 다시 행방을 연해주로 돌렸다. 연해주에는 일제의 핍박에 못이겨 이사짐을 짊어지고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 관할지역으로 온 농민들이 무연한 벌판을 개척하여 논농사를 짓고있었다. 연해주에 들어온 애국지사들은 최재형의 령도밑에 반일의병운동도 진행하고있었다. 최재형은 함경북도 경원에서 태여났는데 9세때 연해주에 이주하여 러시아인 양부모를 만나 량호한 교육을 받아 러시아 사정에 정통하였고 사업에 성공하여 러시아관헌의 신임을 받고있었다. 그는 어릴 때 러시아국적을 가졌지만 조국을 사랑하였고 러시아에 있는 동포들을 비호하는데 힘썼다. 그는 러시아 수도에 가서 짜리황제의 훈장까지 받고 연해주의 도헌(都宪)이 되어 년봉 3천원을 받게 되자 그 돈을 은행에 예금하고 나오는 리식으로 매년 동포류학생 한명씩을 모쓰크바에 보내어 공부시켰다. 기울어진 나라를 바로 세우려는 일편단심을 지닌 그는  박영효(朴泳孝)를 만나려고 바다건너 일본에까지 갔었으며 1909년에는 리범윤(李范允)과 더불어 불라디보스토크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의병장이 되였다. 그해 7월에 그는 의병 2백여명을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너와 경원의 신아산(新牙山)에서 왜적을 격파하였고 여세를 이어 회령, 영산지방에서 여러달동안 싸우다가 러시아령역으로 철수하였다.그는 연해주에서 지방자치회의 부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3.1운동후 상해림시정부의 재무총장에 선임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920년 일본군이 시베리아에 출병하여 쌍성(双城)을 습격할 때 그는 일본군과 결사적으로 싸우다가 불행하게도 체포되어 김리직(金理直), 황경섭(黄景燮), 엄주필(严柱弼) 등과 함께 살해당하였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单章)을 수여받았다. 박상진이 연해주를 찾아가니 마침 최재형이 자치회의 사무실에 있었다. 최재형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난 박상진은 최재형에게 자기가 연해주를 찾아온 동기를 이야기하였다. 최재형은 애국심에 불타는 박상진에게 마음이 자석같이 끌리였다. 년령차이는 좀 많았지만 의기상합한 두사람은 지기로 되어 나라안팎의 형세를 분석하고 일제를 몰아내는 신성한 투쟁에서 서로 긴밀히 련계하기로 약속하였다. 박상진은 귀국하기 전에 다시 심양에 들렸다. 당시 만주지방의 군권을 장악하고있는 봉계군벌의 통수인 장작림을 만나기위해서였다. 동삼성의 군권을 장악한 장작림이 조선의병들의 활동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의병투쟁은 너무나 어려워질것이였다. 그는 의병들이 만주지방에서 일본군과 싸우는데 장작림의 도움은 받지 못하더라도 그와의 마찰은 피해야 되므로 일찍  조처해야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였다. 장작림을 만나자 박상진은 일본제국주의의 야심을 폭로하고나서 조선의 젊은이들이 일제를 몰아내는 투쟁을 만주땅에서 펼치고있으니 우리의 공동한 적인 일제를 이땅에서 몰아내는 성스런 투쟁에 힘을 같이하자고 부탁했다. 장작림도 왜놈들의 세력이 만주에서 날로 커지는 것을 우려하던 중이라 조선의 열혈청년의 간절한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었다. 만주지역을 두루 돌아보며며  앞으로의 반일독립투쟁방안을 구상한 박상진은 후련한 마음으로 귀로에 올랐다.   10. 신해혁명의 현장에서    그해 가을의 어느날, 박상진의 집에 한 낯선 젊은이가 찾아왔다.  “여기가 고헌 박상진선생댁이 틀림없지요?” “그렇습니다. 누굴 찾아오셨습니까? “ 박상진은 허줄한 옷차림의 사나이의 아래우를 쓸어보면서 되물었다. “고헌 박상진선생을 만나보러 왔습니다.” “제가 박상진입니다. 댁은 뉘신데 저를 찾습니까?” 낯선 손님은 박상진의 얼굴을 자세히 훑어보고 눈앞의 서있는 젊으니가 박상진이란 것을 확인하고나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성산 허혁선생님의 부탁을 받고 박선생을 만나러 만주에서 온 백동규(白东奎)란 사람입니다.” “이제 성산선생이라 하셨소?” “그렇습니다. 성산 허혁선생의 부탁을 전하려 왔습니다.” 박상진의 얼굴에는 대뜸 해살이 비끼였다. 얼마나 그리던 선생님이신가? 그는 스승 허위의 식솔과 허혁선생의 소식을 몰라 몹시 궁금해 하던 차에 허혁선생의 소식을 전하러온 젊은이를 만나니 한없이 반가웠다. “어서 집안으로 들어갑시다.” 박상진은 손님을 사랑방으로 안내했다.  “지금 성산선생님은 어떻게 지내고계십니까?” “허선생님께서는 지금 를 운영하고계시는데 형편이 무척 어렵습니다.” “경학사라면 독립운동단체인가요?” “물론이지요. 경학사안에는 신흥강습소라는 교육기관도 있습니다.” “신흥강습소라?” “신흥강습소에서는 국외에 나와있는 애국청년들에게 새지식을 배워주고 애국심을 키워 인재로 양성하는 학교입니다.” “허선생님께선 참으로 보람찬 일을 하시는군요.참, 허겸선생님과 허위선생님의 가족에 대해 아시는지요?” “아직 국내에서 헌병들의 눈을 피해 산속에 숨어살고있다고합니다. 앞으로 자주 련계하겠습니다.” 박상진은 손님이 돌아갈 때 로비를 넉넉히 주었다. 1911년(신해년)의 봄이 찾아왔다. 대한제국이 망한 뒤 처음으로 맞는 수난의 한해였다. 사람들은 서로 만나면 하늘에는 검은 태양이 떠오르고 온 천지가 어둠속에 잠겼다면서 천지가 뒤집힐 징조라고들  수근거렸다. 서울에서는 종묘의 제사가 끊겼는데 때아닌 폭풍이 휘몰아치고 호두알같은 우박이 마구 쏟아졌다. 곡우철에는 또 때 아닌 폭설이 퍼부어서 심어놓은 곡식이 다 얼어죽었다. 농사가 만풍이 들어도 주린배를 채우지 못하여 허덕이던 이 나라의 백성들인데  전국 방방곡곡에 심한 재해가 들었으니 백성들은  이젠 꼼짝없이 굶어죽게 되였다고 통탄하였다. 일제는 모래알같이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려고 은사금이라는 명목으로 약간의 돈을 내주었다. 그러나 놈들의 간사한 무마책은 백성들의 끓어넘치는 반일정서를 가라앉히기에는 역부족이였다. 놈들이 내준다는 소위 은사금이란 일제가 조선백성들에게 강박으로 3천만원의 공채를 팔아서 긁어모은 돈인데 왜놈들은 그 돈으로 친일파와 량반, 유생 및 소위 효자, 효부 그리고 과부, 홀아비 등에게 준 돈표였다. 그런데 그것은 현찰이 아니라 후날 돈으로 바꿔준다고 약속한 백지에 불과했다. 백성들은 아무런 소용도 없는 쪽지를 공수표라하면서 분개하여 치를 떨었다,  초여름이 되였는데도  하늘에는 구름 한점없어 숨막히게 무더운 날씨였다.   그해 여름, 박상진은 두번째로 출국려행을 떠났다. 말복무렵이라 막바지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렸다.그는 이번 기회에 만주에 망명해 경학사를 꾸린 성산 허혁(许赫)선생(왕산 허위의 중형)을 만나볼 계획이였다. 허위가 일본헌병대에 붙잡혀간 뒤 허위의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한 그는 리상용 등 의사들과 경학사를 뭇고 독립운동의 기틀을 쌓아가고있다는 소식을 지난번에 들었던 것이였다.  삼원포로 가자면 평양에서 강계를 거쳐 만포까지 가야만 했다. 그런데 만포일대에는 국경수비대의 검문검색이 여간 까다롭지 않다는것이였다. 생각을 굴리던 그는 아예 만주에서 먼길을 에돌더라도 신의주를 거쳐 기차를 타고 안동(지금의 단동)에 직행하기로 계획했다.  때마침 압록강대교가 1909년 11월에 준공되였었다. 생전 처음으로 웅장한 철교를 보느라 강 량켠에는 날마다 구경군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철교가 생기고나니 평양에서 렬차에 오르면 안동(지금의 중국 단동)까지 직행할수 있었다.  안동역에 내린 박상진은 곧바로 안동려관으로 찾아갔다. “자네가 오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던 중이였네.” “제가 여기에 오리라는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다 알아내는 수가 있지...잠자코 나를 따라오게.” 량제안(梁济安)이 박상진을 이끌고 려관 뒤편에 있는 어두컴컴한 골방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저는 여기서 박선생이 오시기를 열흘동안이나 기다렸습니다.” 방안에서 나온 사나이가 박상진을 반겨맞았다. 박상진이 귀에 익은 목소리에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고보니 방금 말한 사람은 몇달전에 만주에서 왔노라고하면서 그에게 경학사의 취지를 말하고 간 그 길손이였다. “오오, 백동규(白东奎)씨가 아니오?” “서로 구면이였나?” 량제안이 두사람의 얼굴을 번갈아보며 물었다. “구면이라고까지 말할수는 없지만 초면은 아닙니다.” 박상진은 자세한 말을 삼가했다. “잘됐네. 내가 소개할 필요가 없게 됐으니 말일세. 둘이 오래만에 만났으니 서로 이야기를 나누게나.나는 려관에 나가봐야겠네.” 량제안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남기고 문을 나서자 박상진이 정색을 하고 물었다. “성산선생님네 다들 편안하시오?” “산다는 게 도무지 말이 아닙니다.” “혹시 무슨 변이라도 생겼는지요?” “천재지변이라고 해야 할가요. 병농일치(兵农一致)의 구국리념으로 첫해 농사를 시작했는데...참, 하늘도 무심하지.”                                                                                                                                    “만주에서도 가물이 무척 심했던가보군요?” “가물이 그저 심하다고만 말할 정도가 아니지요. 봄부터 여름까지 하늘에서 비 한방울도 내리지 않았으니까요.” “어쩌면 그럴수가 있나?” “게다가 풍토병까지 겹쳐가지고...” “풍토병이라 했지요?” “그렇습니다. 만주는 국내와 달리 날씨가 건조하고 마실 물도 없고... 수백년 묵은 나무뿌리에 고인 물을 마실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물을 마시면 당시에는 별 반응이 없지만 따뜻한 방안에 들어가 며칠을 보내고나면 풍토병이 령락없이 덮쳐드는데 이 병에 걸리기만 하면 누구나 며칠 견디지 못하고 죽어버린답니다. 목마른 사람이 물을 마시지 않을 수도 없고 또 물을 마시면 병에 걸리니 참으로 기가 찹니다. 어른들은 그런대로 억지로 참아내지만 철없는 애들은 어른들의 눈을 피해 몰래 물을 마시는 경우가 파다하지요.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이 어려운 국면을 타개하려면 자금이 많이 필요하겠군요?” “식량을 해결하고 깊은 우물을  파려면 돈이 적잖게 들겠지만 어디 사정이...” “내 돌아가서 자그마한 힘이라도 보태드리겠습니다.” “말씀만 들어도 고맙습니다.” “혹시 허위선생의 가족에 대해서는 아시는지요?” “올봄에 허위선생의 세째형님이신 허겸선생께서 허위선생의 유족들을 데리고 만주로 망명해와서 다 함께 계신다고 합니다.” “잘알았습니다. 기회가 있으면 찾아뵙겠습니다.” 저녁에 려관주인 량제안이 찾아왔다. “고헌 자네 혹시 조성환이란 사람을 알고있는가? 지금 북경에 있는데 우리의 동지라네.” “조성환이라?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 량제안의 물음에 박상진은 고개를 기웃거리면서 대답했다. “서울태생인데 대한제국 군대에서 참위를 지낸적이 있고 안창호, 량기탁 등 동지들과 신민회를 꾸린적이 있는 사람일세. 고종12년(1875년)생이니까 자네보다는 아홉살 이상일세.” “갑자기 왜 조성환이란 분을 거론하십니까?” “그분과 자네가 뜻이 맞을 것 같아서 소개하는것일세. 며칠전에 그사람이 나한테 편지를 보내왔었네. 지난 10월 10일에 혁명군이 호북성 무창이란 곳에서 기의를 일으켰는데 신해혁명이라 한다더군. 봉건전제제도를 뒤엎는 이 혁명의 물결은 남방의 여러 성으로 파급되더니 급기야 손중산선생이 남경에서 중화민국의 성립을 선포했다네. 그 혁명을 령도한 손중산(손문)이란 분이 중화민국 림시대통령으로 추대되였다네.” “그 편지를 저에게 보여줄수 있겠습니까?” 호기심이 동한 박상진이 급히 물었다. “자네한테 보여주려고 가져왔다네.” 량제안이 손에 들고있던 편지를 박상진에게 내밀었다. 박상진을 그것을 빼앗듯이 받아들고 허겁지겁 펼쳤다.  조성환의 편지를 다 읽고난 박상진은 흥분하여 몸을 벌떡 일으키면서 말했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제가 너무 꾸물댔습니다.” “어딜 가려구?” 량제안이 물었다. “남경으로 가서 손문선생을 직접 만나 봐야겠습니다. 조성환이란 분도 찾아보구요. 그래서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중국의 혁명의 보귀한 경험을  배워야지요.” 박상진이 잘라 말했다. “자네 뜻이 정해졌다면 누가 막겠나? 이륭양행(伊隆洋行)을 찾아가서  상해로 가는 배를 타게나. 우리 려관에 진(秦)씨성을 가진 동포청년이 있는데 상해로 갈때 데려가게. 사람이 착한데다  중국어까지 능해서 자네가 데려가면 일을 보는데 큰 도움이 될걸세.” “고맙습니다. 상해에 도착하면 할일이 태산같을텐데 그 청년이 동의한다면 함께 떠나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려던 일을 마무리짓고  떠나는게 좋지 않겠나?” “그건 돌아오는 길에 들려 해결하겠습니다.” 손문선생을 하루속히 만나고 싶은 그에게 다른 일은 다 차요적이였다.  “자네 일이니 내가 간섭하지 않겠네. 생각대로 하게. 그리고 남경에 다녀올 로자는 넉넉히 지녔나?” “예 점포를 얻을가 해서 지니고온 돈이 그대로 남았습니다.” “로중에 부디 몸조심하게나. 대륙에는 비적떼의 출몰이 빈번해서 려행하기가 여간 시끄럽지 않다더군.” “념려마십시오. 그런 각오는 하고있습니다.” 진씨청년을 만나본 박상진은 지방정황에 익숙한 그를 앞세우고 안동려관을 떠났다.길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면서 박상진은 진씨청년이 신흥강습소에서 애국주의 교육을 받은 젊은이의 동생으로서 역시 애국심이 무척 강하다는 것을 알고 마음을 놓았다. “먼저 이륭양행부터 들려야지요?”  진씨청년이 물었다. “물론이지.” 이륭양행(伊隆洋行)은 안동려관에서 멀지 않은 흥륭가(兴隆街)에 있었다. 이 회사는 영국국적의 아일랜드 사람 쇼(G.L.Show)가 경영하는 무역회사 겸 중국의 태고 선복공사대리점이였다. 쇼는 그의 고국 아일랜드가 영국의 식민지로 된적이 있었기때문에 한국의 처지를 동정하고 독립운동가의 립장을 리해하고있었다. 게다가 그가 경영하는 회사가 안동의 구시가지에 위치하고있어서 일본령사관의  경찰들이 관할하지 못하였다. 그는 이런 우세를 리용하여 독립운동가들을 양행에 숨겨두기도 하고 독립운동가들에게 상해로 가는 선박편을 제공했을뿐만 아니라  자기의 이름으로 독립운동가들의 우편물도 날라주고 무기구입을 돕기도 한 국제주의전사였다.  박상진은 쇼의 주선으로 선원복을 갈아입고 무난히 상해로 떠나는 화물선에 올랐다. 그는 손문선생을 만나 신해혁명의 경험을 학습하고 조선의 독립방략에 관해 허심탄희하게 의견을 나눠보리라 생각하니 가슴은 망망한 바다물같이 설레였다. 상해를 거쳐 남경에 이른 박상진은 신해혁명의 승리로하여 달라진 중국의 면모를 볼수 있었다. 수천년간 지속되던 봉건전제제도를 뒤엎은 중국인들의 얼굴에는 희망의 웃음이 돌았고 걸음도 활기찼다.그는 이 위대한 혁명을 령도하신 손중산선생을 한시 바삐 만나보고싶었다. 그러나 그의 소원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았다. 림시대통령직에 오른 손중산선생에겐 눈앞에 닥친 일들이 태산같아 눈코뜰새가 없었다. 그에게는  국빈도 아닌 일개 외국청년을 조용히 만나줄 여가가 없었던 것이였다. 남경에서 무턱대고 머무르면서 손문선생을 만날 날을 기다릴 시간적 여유가 없는 그는 손중산을 받드는 자유당에 가입한 조성환과 신규식을 찾아갔다.  당시 조성환과 신규식은 당내에서 요직을 맡고 있었다. 박상진은 그들의 주선으로  손중산선생과 함께 동맹회를 창립하고 중화민국정부에서 륙군총장까지 지낸 민주혁명가 황흥(黄兴)을 만날수 있었다. 새로 건립된 중화민국정부의 재정상황이 아주 어렵다는 것을 알게된 박상진은 황흥에게 자기가 힘 자라는대로 재정지원을 해주겠다고 약속하였다. 황흥은 박상진의 의기에 깊이 감동되어 후에 대통령께서 조금 짬이 있을 때 만나도록 주선해주마고 약속하였다.  며칠 뒤 상해를 떠나 안동에 이르러 계획한 일을 처리하고난 박상진은 기차를 타고 평양을 거쳐  고향으로 돌아왔다.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려면 한시바삐 대량의 군자금을 마련해야 하는데  이국땅에서 한가롭게 머물러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였다.   11.상덕태상회를 꾸리고   어느날 생부 박시규가 찾아왔다. 상진은 양부가 계시는 사랑으로 들어가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버님, 우리집의 전답을 삼정물산(三井物产)에 저당잡히려고 하는데 허락하시겠습니까?” “우리집에 용돈이 없는것도 아닌데 전답을 저당하겠다는것은 무슨 의도냐?” 양부가 제 귀를 의심하며 놀라 물었다. “큰 돈을  써야할 일이 생겨서 그럽니다.” “네가 또 무슨 일을 저지르려고 그러느냐?”  양부와 생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가정살림이 유족한데 전답을 저당잡히겠다는 것은 이만저만한 돈을 쓰려는 것이 아니였다. 박씨가문이 소유한 전답은 논이 5백여 두락이고 밭 또한 4백여 두락이나 되였다. 여기서 두락이란 마지기인데 한두락이라는 전답은 한말의 종자를 뿌릴 만한 토지를 가리키니 박진사댁의 토지가 얼마나 되는가를 가히 짐작할수 있다..  생부인 박시규가 먼저 물었다.  “너는 그 큰 돈을 어디에다 쓰려구 그러느냐?” “사업을 한번 크게 벌이려고 그럽니다.” “우리집은 네가 별도로 돈을 벌어들이지 않아도 되느니라. 땅에서 나오는 소작료만으로도 우리 대소가의 식구들이 얼마든지 잘 살아갈수 있는데 네가 사업을 벌일 필요가 어디 있느냐?”  “소자는 단지 우리 가족의 생계를 위해 사업을 벌이려는게 아닙니다. 소자는 우리나라의 민족산업을 발전시키고 왜놈들에게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독립운동의 자금을 마련하는 성스러운 사업을 하기 위해서입니다...우리가 회사령 등으로 민족기업을 말살시켜  백성들의 숨통을 꽉 조이려고 시도하는 간악한 일본 총독부와 맞서 싸우려면 경제활동을 활발히 벌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먼저 놈들의 감시가 허술한 곡물상을 차렸다가 차차 사업범위를 늘여서 우리의 민족경제를 파탄시키려는 일본놈들과 당당히 겨뤄보겠습니다.” “참 기발한 생각을 했구나. 그런데 토지를 저당잡히고나면 우리 대소가의 식구들은 뭘 먹고 살아가겠느냐?” 상진이의 말을 듣고난 양부가 반문했다.  “아버님, 그런것은 념려하지 마십시오. 토지를 저당잡힌다는것은 토지소유권을 저당잡히는것이지 토지사용권과 소작권을 저당잡히는게 아닙니다. 우리가 은행의 리자를  제떄에  갚아준다면 아무런 문제도 될것이 없습니다. 전답에서 얻는 수입은 예전이나 다를게 없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리자와 본금은 십년내에 다 갚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장사수입에서 일부만 떼내어 독립운동에 쓰겠습니다.” “네 말대로 될수 있다면 별 문제가 없겠구나.” “그렇습니다. 아버님, 허락해주십시오.” “오냐.그렇게 하거라. 사업을 벌이려면 각별히 신경을 써야하느니라.” “허락해줘서 고맙습니다.” 가문의 주장들인 두 아버지의 허락을 받은 박상진은 토지문서를 가지고 대부금을 받으러 삼정물산을 찾아갔다.그 많은 량의 토지를 저당잡히면  20 여만원쯤은 대부받을수 있으려니 생각했었는데 정작 토지를 저당잡히고나니 삼성물산에서는 10년 년부로  14만원밖에 대부해주지 않았다. 기대치와는 차이가 너무도 많았다. 돈이 돈울 번다고 밑천이 너무 적으면 사업을 크게 벌일수가 없는것이였다. 박상진은 동업자를 찾아으려고 여러곳을 다녔다. 마침 그와 이전부터 서로 의기상합한 친구들인 평양의 김덕기(金德淇)와 전주의 오혁태(吴赫泰)가 사업을 함께 하겠다고  자원하였다. 총 자금 24만원을 모은 세사람은 그 자금을 밑천으로하여 상덕태상회(尚德泰商会)를 설립하였다. 상회의 명칭은 박상진의 이름에서 상(尚)자, 김덕기의 이름에서 덕(德)자와 오혁태의 이름에서 태(泰)자를 따서 상덕태상회라고 명명하였다. 그들은 대구시의 약전골목어귀 교통이 편리하고 번화한 곳에 점포와 사무실 및 곡물창고를 앉히였다. 당시 24만원이란 돈은 거금이였다. 1909년에 진주에서 울산의 거부 김홍조(金弘祚)가 사장을 맡고 황성신문에 을 발표했던 위암 장지연이 주필을 맡아 창간된 의 주식값이 겨우 3만원이였으니 24만원이란 돈은 지방신문사를 조선팔도에 하나씩 꾸릴만한 거금이였다. 회사의 경영이 순조롭게 된다면 의병운동에 쓸 군자금의 상당수를 해결할만 하였다.  상덕태상회는 겉으로 보기엔 여느 곡물상과 별로 다른 바가 없었다. 그러나 이 상회에서는 국내에서 생산되는 곡물을 수입하여 전국 각지로 판매할 뿐만 아니라 만주와 중국내지로 곡물을 수출하는 무역까지 겸하고 있어서 경영범위가 매우 넓었다. 박상진이 이렇게 규모가 큰 상회를 꾸리고나니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다. 박상진과 김덕기, 오혁태 세사람의 힘만으로 상회를 경영하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거기다가 박상진의 주요 정력이 독립운동을 조직하는데 있었기에 더구나 일손이 딸렸다. 그리하여 박상진은 아우들인 호진,하진, 현진 삼형제를 불러서 임무를 맡겼다. 호진이는 주로 상회안의 구체적인 일을 주관하게 했고 하진이는 안희제의 백산상회와의 거래를 맡게 하였고 현진이는 록동에 있는 본가에 남아서 대소가의 살림을 도맡아 처리하게 하였다.  비록 처음으로 꾸린 대형상회였지만 법률과 경제학을 전공한 박상진이 일머리를 잘틀고 수하의 사람들이 하나같이 단합하여  회사일에 진력하니 상회의 경영은 무척 순리로웠다. 박상진이 상덕태상회를 설립한 목적이 단지 돈만 버는 것이 아니라 반일투쟁을 진행하는 기반을 작성하는 것이였으므로 상회를 대구 한곳에만 설립하여서는 예기한 목적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였다. 박상진은 자금이 돌아가는 족족 상회의 규모를 확대하였다. 몇달만에 상덕태상회는 국내의 많은 도시에 상회지점을 설립했고 지점을 설치할수 없는 곳에는 동지들을 설득하여 이와 비슷한 상회를 설립하도록 하고 서로 밀접히 련계를 가지기로  하였다. 례를 들면 부산에 있는 안희제의 백산상회, 평양에 있는 리인실의 평북상회, 충주에 있는 김성환의 충주상회를 비롯하여 갑인상회, 이춘상회 등이 상덕태상회와 밀접한 련계를 맺었던 상회였다.  박상진은 상회를 국내범위에서 꾸리는것만으론 만족할수 없었다.그는 시선을 만주와 드넓은 해외로 돌리였다.  상덕태상회의 해외지점도 겉으로 보기엔 무역업을 겸한 곡물상회였지만 기실은 독립운동가들이 비밀련락을 하는 안전한 거점이자 자금조달을 마련하는 터전이였다.  박상진은 상덕태상회의 해외지점을 먼저 신의주와 압록강을 사이두고 마주보는 안동(지금의 단동)에  설립하였다. 안동은 조선땅과 압록강을 사이에 둔 지척에 있어서 유사시에 동지들과 호상 련계하기가 편리한데다가 안동을 거쳐서 류하에서 독립운동의 기지를 마련하는 의병장 리히영, 리시영, 리동녕, 리상용, 김창환, 주진수 등 유림이나 의병장들과 련계하기가 본국에서보다 훨씬 편리했기때문이였다.  그의 다음 목표는 상해였다. 상해는 중국에서 공상업이 가장 발달한 근대 도시이기에 경제활동을 벌이는데 다른 도시보다 편리하고 또 중화민국의 수도 남경과도 가까운 곳에 있었으며 중국으로 망명한 의병이나 애국지사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이기 때문이였다.   상덕태상회의 규모는 날이 갈수록 커지고 경영도 잘되였다. 경제학을 전공한 박상진이 과학적으로 운영한 결과였다. 박상진은 상회를 경영하여 벌어들인 돈으로 은행리자와 정한 기한내에 갚을 본금을 바치고 남은 리윤은 만주에서 의병운동의 기지를 닦는 분들에게 활동경비와 생활비를 보태주었고 손중산선생이 중화민국의 정비를 위해 군사력을 발전시키는데도 일정하게 기여했다.   12.손중산선생과의 뜻깊은 상봉    1913년의 새해가 시작되였다.박상진은 상덕태상회의 경영을 정상적으로 하는 외에 애국심이 강한 유생들과의 련계를 가강하였다. 음력 정월 보름날이였다. 시골사람들은 낮에 윷놀이를 하고 나물밥을 먹고 밥이면 보름달을 보면서 자기의 소원을 비는 날이였다. 박상진은 왜놈들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시회를 연다는 명의로 애국유생들을 경북 달성군 수성면 안일암이라는 곳에 모이게 하였다.  윤상태, 서상일, 리시영, 정운일, 홍주일, 박영모, 서병룡, 윤창기 등 애국유생들이 다 모이자 박상진은 유생들에게 당전의 국제국내의 형세를 분석하고나서 일본제국주의를 이땅에서 조속히 몰아내려면  비밀결사조직을 결성해야 한다고 력설하였다. 박상진의 제의는 회의에 참석한 모든 유생들의 한결같은 호응을 받았다. 이날 그들은 “조선국권회복단 중앙본부”를 결성하고 박상진이 단장으로 추대되였다.그들은 우로는 단군을 받들고 신명을 다 바쳐 국권회복운동을 활발히 전개할것과 만주와 연해주에 사는 민족지도자들과 련계하여 대규모의 항일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회의에서는 이 조직을 전국적 범위로 확대하기로 결정하였다.    박상진이 손중산선생을 만나려는 간절한 소원은 한해가 지난 1913년에야 이루어졌다.박상진은 상해에 상덕태상회의 상해지점을 설립하려고 다시 중국 안동에 들어와서 이륭양행의 도움을 받아 상선을 타고 중국 상해로 갔다. 그는 상해에 거주하면서 의병운동을 계획하고있는 조선인 유지인사들을 만나 순조롭게  상덕태상회의  상해지점을 설립하였다. 이로써 중국대지의 심장부인 상해에도 의병운동의 기지가 건립되였다. 이제는 중국혁명의 선구자인 손중산선생을 만나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 박상진은 오매에도 그리던 손중산선생을 만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손중산선생께서 대통령직을 내놓고 남하했다는것이였다. 그는 여러 곳에 탐문하여 손중산선생이 광주에 계신다는 정보를 접수하고나서 다시 광주로 찾아왔다.  황흥이 그를 매우 반갑게 맞아주었다. 여러차례로 경제상의 어려움이 있을 때 박상진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벗어난 황흥은 마땅한 기회가 생기자 박상진과 손중산선생이 만날 장소와 시간을 마련해주었다.   청나라 조정의 군권을 장악한 원세개와 손을 잡지 않고서는 청조를 멸망시키기 쉽지 않았다.그리하여 손중산선생은 중화민국의 대통령직을 원세개에게 양보하는 조건으로 원세개더러 청조의 마지막 황제 부의를 페위시키고 공화정치를 실행해야 한다는 내부협약을 맺었었다. 그런데 야심많은 원세개는 부의황제를 페위시키는 일까지는  했지만 대통령보좌에 앉은 뒤 공화정치에는 마음이 없었다. 그는 대통령다운 바른 정치는 하지 않고  오만가지로 횡포만 부리다가 그것도 성차지 않아 다시 황제로 될 복벽의 꿈을 꾸고있었다. 이때 중화민족의 부흥을 위해 대통령직을 내놓은 손중산은  다시 원 동맹회 회원들과 함께 새로운 정당인 중국국민당을 창립하고 원세개와 맞서 싸우고있었다.  황흥을 통해 박상진의 정황을 상세히 알고있는 손중산선생은 이국손님을 매우 열정적으로 맞아주었다. “황흥동지를 통해 박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댔소. 우리 중화민국을 위해 많은 기여를 한 박동지를 이렇게 만나니 매우 반갑습니다.” “저는 손선생님께서 도꾜에서 중국동맹회를 성립하신 일과 동맹회의 강령을 읽고나서 선생님을 만나보는게 소원이였습니다.” “지금 귀국에서의 반일투쟁정황은 어떻습니까?”  박상진은 조선에서의 의병투쟁의 정황이며 상덕태상회를 꾸린 정황이며 조선독립을 위해 를 결성한 정황 등을 상세히 말씀드였다. “박선생께선 참으로 많은 일을 했습니다.대단합니다.” 손중산선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박상진을 치하했다. “손선생님, 선생님께서 무창기의를 령도하시여 신해혁명을 성공시킨 경과와 의의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그럽시다.”  손중산선생은 청조의 부패한 정권을 뒤엎기 위해 란 혁명조직을 창건하게 된 동기로부터 시작하여 민주혁명을 진행한 전반과정을 요약해서 이야기하고나서 그가 제정한 “삼민주의(三民主义)”에 대해서도 상세히 설명하였다. 삼민주의는 민족주의. 민권주의, 민생주의를 가리킨다. 민족주의는 제국주의 침략을 물리치고 중화민족이 해방을 쟁취하며 국내의 여러 민족이 자유롭게 련합하여 통일적인 중화민국을 세우는 것이고 민권주의는 로동자,농민,소자산계급, 민족자산계급 등 광범한 인민대중이 나라의 주인이 되여 민주주의를 실행하는 것이고 민생주의는 국가가 로동법을 제정하여 실업자로 전락한 로동자들을 구제하고 그들의 생활을 개선하며 농민들에게 토지를 주어 밭가는 자에게 토지가 있게하는 것 등이였다. 손중산선생의 사상중에서 박상진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인식론과 실천론이였다.그는 인간의 언행은 객관세계의 반영이며 인간의 의식은 객관적 사물에 의존하고 있으며 인간은 사회적 실천활동을 통해서 객관세계를 인식하고 객관세계를 개조할수 있다고 보고있었다.그는 선진적인 리론의 지도가 없이는 혁명이 승리할수 없다고 말하였다. 그는 무창기의가 성공할수 있었던 것도 신군이 동맹회의 활약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조직적으로 반란을 일으켰기때문이라고 말하였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박상진은 눈앞이 환히 트이는 것 같았고 또 많은 감동을 받았다.   “저도 본국에 돌아가면 “동맹회”와 성질이 비슷한 혁명조직인 “대한 광복회”를 창립할 계획입니다. 신해혁명의 경험은 우리에게 오로지 선진적인 혁명리론과 무장투쟁의 결합만이 일제를 우리나라에서 몰아낼수 있다는 진리를 제시했습니다. 우리가 강대한 군사력을 소유하려면  작전지휘능력이 강한 군관들을 양성할 기반을 닦아야겠는데 이 방면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으신 선생님께서 많이 도와주십시오.”  “그야 더 이를 데 있소. 조선의 혁명과 중국의 혁명은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무창봉기를 일으킬 떄  조선의 수많은 우수한 젊은이들이 중국혁명을 위해  보귀한 피와 생명을 바쳤습니다... 우리 국민당도 군사력을 가강하기 위해 군관학교를 창설하여 군사지휘관을 양성하려 하고있습니다... 그때에 귀국의 훌륭한 인재들을 많이 보내십시오.”   “고맙습니다.”  박상진은 손문선생에게 고개숙여 진심으로 감사를 표시했다.  박상진은 손중산선생과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고싶었지만 일분일초도 쪼개쓰는 그를 오래동안 붇잡아둘 수는 없었다. 이젠 작별인사를 나눌 때가 되였다. “손선생님, 오늘 선생님의 보귀한 시간을 허비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박상진이 고개를 숙여 작별을 고하자 손문선생이 박상진의 손을 굳게 잡고 말하였다. “천만의 말씀이오. 오늘 당신을 만나보니 나는 귀국이 반드시 독립될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였소. 당신이야말로 귀국에서 없어서는 안될 훌륭한 인재요. 나는 귀국의 독립이 하루 속히 이뤄지길 진심으로 빕니다.” 손문선생은 잠시 말을 멈추고 손을 허리춤으로 가져가더니 권총을 뽑아들었다. 기름기가 번쩍이는 정교롭고 새까만 권총이였다. “이것은 내가 오래동안 호신용으로 지니고 다니던 미국제의 권총이오.나는 이 권총이 귀하를 지킬수 있도록 선물합니다. 부디 옥체를 보전하여 귀국의 독립투쟁의 앞장에 서주십시오. 내 손문은 귀국의 독립을 위해 도울수 있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무슨 일이나 주저없이 나서겠습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박상진은 권총을 받으면서 손중산선생에게 감사의 뜻으로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박상진은 손문선생이 이국에서 온 자기를 이렇게 믿고 사랑하리라곤 생각치 못했었다. 중산선생과 늦게 만난것이 한스러웠다. “저는 손선생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용감히 싸우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귀국의 독립운동의 조속한 성공을  다시 한번 축원합니다.” 손중산선생은 박상진의 두손을 으스러지게 잡고 오래도록 놓을줄 몰랐다. 손중산선생을 만나 중국에서의 민주혁명의 경과와 구국의 도리를 익히고난 박상진은 신심 가득히 본국으로 돌아왔다. 비록 손중산선생과의 짧디짧은 만남이었지만 수확은 이루 말할수 없이 컸다.그들의 뜻깊은 만남은 뒷날 상해에 대한민국림시정부가 자리잡고 또 손중산선생이 창립한 황포군관학교에 “조선인 특설부”를 두어 조선인 사관을 양성하는데 튼튼한 기반을 마련하게 하였다.   13.대한광복회의 결성    박상진이 조국에 돌아와서 의 사업을 한창 벌일 때 의병출신인 채기중(蔡基中)도 풍기광복단을 결성했다. 채기중은 1873년 10월 7일 경상북도의 함창(咸昌)에서 채헌락(蔡献洛)과 곡부공씨(曲阜孔氏)사이의 막내로 태여났다. 본관은 인천. 자는 극오(极五), 호는 소몽(素夢)이다. 5척 4촌 정도의 키에 얼굴이 둥글고 거무스름한데 성품이 소박하고  민첩하여 구김살이 없는 기질의 소유자인 그는 의협심이 강해서 남의 부당한 처사나 억울함을 보면 참지 못하였다. 그는 비록 근대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애국심이 강하고 한시에도 능했다. 채기중은 1913년 유창순(庾昌淳)· 류장렬(柳璋烈)· 한훈(韩焄)· 정만교(郑万敎) ·김상옥(金相玉) 등 의병출신자들과 함께 풍기광복단(丰基光复团)을 결성하고, 독립군양성을 위한 무기구입과 군자금 모집에 노력했다. 군자금 모집을 위해 강순필(姜順弼)과 함께 일본인이 경영하는 녕월의 중석광산에 잠입하여 자금 탈취를 기도했었다 박상진은 처음 중국을 다녀오면서 안동려관의 주인 량제안의 주선으로 풍기를 찾아가서 채기중을 만났었다.  박상진보다 열한살우인 채기중은 .박상진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서 박상진의 웅대한 포부와 연박한 지식에 놀랐다. “박공이 생각하건덴 지난번 서울탈환전이 실패한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시오?” 채기중이 박상진에게 물었다. “적의 력량이 너무 강한 것이 주되는 원인이라 할수 있지만 그것은 객관적 사실이고 우리측에도 큰 실수가 있었습니다. 이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13도 창의군에서 평민출신의 의병장들을 배척한 것은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는 일입니다. 평민출신의 의병장들가운데 유림출신의 의병장보다 지모를 겸전한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을 배척한다는 것은 의병장들이 자신의 목을 자체로 조이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참으로 지당한 말씀입니다. 우리의 시대가 어느 때인데 아직까지 신분여부를 따지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는 군주전제제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백성들이 나라의 주인으로 되는 민주공화제도의 새로운 나라를 세워야 합니다. 당전에 독립구국운동을 하는데 두갈래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무장투쟁이고 다른 하나는 계몽운동입니다. 이 두 력량은 밀접히 결합해야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형편은 어떻습니까? 의병들은 계몽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친일인사로 간주하고 학교를 짓부시거나 계몽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박해하고있습니다. 백성들이 계몽하지 못한다면 이 땅에서 일제를 몰아내더라도 새로운 나라를 세울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두가지 혁명력량을 하나로 똘똘 뭉쳐야합니다.” “그래서 저는 신분,출신을 가리지 않고 문과 무를 분리하지 않고 우리나라를 사랑하는 모든 애국지사들을 망라한 전국적인 혁명조직인 대한광복회를 창립할 뜻을 품고있습니다.” “박공은 참으로 장한 뜻을 지녔습니다.” 두사람은 이야기를 나눌수록 뜻이 맞았다. 그들은  일제를 몰아내는 신성한 투쟁에서 어깨겯고 나서기로 굳게 약속했었다.  이해 6월에  상회의 일을 볼겸 독립운동의 동지들을 찾으러 서울에 올라갔던 박상진은 형무소에서 방금 풀려나온 김좌진(金佐镇)을 만나게 되였다.              본관이 안동김씨인 김좌진은 1889년(고종 26)에 태여났는데 자는 명여(明汝), 호는 백야(白冶). 아버지는 형규(衡奎)이다. 세살때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그는 천성이 명민하고 말타기를 즐기였다. 15세 때인 1904년에는 대대로 내려오던 노복 30여명을 모아놓고 그들을 노복에서 해방시킨다면서 그들 앞에서 종문서를 불에 태우고 그들이 농사를 지어먹고 살만한 논밭을 골고루 나누어주었다. 그는 1905년에 서울로 올라와 륙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다. 1907년 향리로 돌아와서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우고 가산을 정리하여 학교운영에 충당하게 하고 자기의 90여칸이나 되는 집을 학교교사로 제공하였다. 그리고 홍성에 대한협회 지부와 기호흥학회(畿湖兴学会)를 조직하여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909년에는 한성신보의 리사를 력임하고 안창호(安昌浩),·리갑(李甲) 등과 함께  서북학회(西北学会)를 세우고 산하 교육기관으로 오성학교(五星學校)를 설립하여 교감을 력임하였고 청년학우회의 설립에도 협력하였다. 1911년에 북간도에 독립군사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하여 자금조달 차 돈의동(敦義洞)에 사는 족질 김종근(金鍾根)을 찾아간 것이 죄가 되어 2년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심한 옥고를 치렀었다.  두사람은 서로 만나 이야기를 얼마 나누지 않았는데 마음이 맞고 뜻이 맞았다. 그들은 마치도 수십년간 갈라져있다가 만난 친형제같이 반가웠다.  “박선생님,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도 연분인가 봅니다.우리 의형제를 맺읍시다. 제가 박선생을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김좌진이 박상진의 손을 으스러지게 잡고 지성으로 말하였다. “그럽시다. 나는 난생 처음 의병장 신돌석장군과 의형제를 맺었었는데 그 형님을 잃고나니 한쪽팔이 떨어진 것만 같더군요.  오늘 김군을 만나고나니 나도 의형제를 맺고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었소. “ 나이를 따져보니 박상진이 김좌진보다 5년 년상이라 자연 의형으로 되고 김좌진이 의제로 되였다. 의형제를 맺는 례를 간단히 치르고난 그들은 유사시에 수시로 밀접히 련계하기로 약속하고 서운한 마음으로 갈라졌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전라도일대에서 의병장 림병찬(林炳瓚, 1851년 2월 5일 ~ 1916년 5월 23일)이 대한독립의군부를 무었다. 림병찬은 최익현과 함께 거병했던 구한말의 의병장이다. 아호는 돈헌(遯軒)으로 전라북도 옥구에서 출생했고 한학을 공부했다. 그는 1883년 전라도 지방에 흉년이 들었을 때 거금을 희사하여 구휼하는 등 이 지역에서 존경 받는 유림으로 활동했다. 락안군(현 순천시) 군수로도 근무했으나 관직보다는 학문과 교육에 뜻을 두어 고향의 회문산 린근에서 제자를 기르는데 전념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척화파인 유림들 사이에서는 의병 운동을 일으키고자 하는 움직임이 고조되었다. 경기도의 최익현이 호남으로 내려와 정읍에서 의병을 일으킬 때 의병에 합류하였고 그해 6월 4일에 정읍의 무성서원에서 거병했다. 이들은 며칠 동안 린근 고을을 차례로 점령했으나 순창에서 관군의 공격을 받아 패배하면서 최익현과 림병찬 등 지도부가 일본군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대마도에 감금되었다가 1907년에야 풀려났다. 고령이었던 최익현은 대마도에 류배되었다가 적소에서 사망했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된후 페위된 고종황제는 밀지를 내려 독립의군부를 구성할 것을 명하고 의병들의 항쟁을 독려했다. 림병찬은 1912년과 1913년 거듭 호남 지방을 담당하는 전라남북도 순무대장에 임명한다는 고종의 밀지를 받고 즉시 행동에 옮기였다. 그는 서울과 전라도를 오가면서 전국적인 규모의 독립의군부 조직을 결성했다. 애국심에 불타는 박상진은 이 조직에도 가담했다. 독립의군부에서는 1914년 5월에 거사일을 정하여 대한독립을 선언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독립의군부의 성원인 김창식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면서 지도부의 성원들이 련이어 체포되어 독립선언계획은 실행에 옮기지 못했고 조직도 와해되었다. 림병찬도 이때 체포되어 거문도에 류배형을 선고 받고 불행하게도  적소에서 사망했다. 박상진은 전국적으로 항쟁의 불길을 지피려면 무엇보다 통일된 혁명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그는 채기중, 김좌진 등 의병장들과 의견을 교환하고나서 전국적인 반일무장조직인 대한광복회를 결성하기로 결정하고 대한광복회의 투쟁강령을 규정하였다.대한광복회는 장래에 나라가 광복을 맞으면 공화정치를 하는 민주국가를 세울것을 장원한 목표로 하고 군자금 모집,혁명기지 건설,친일부호 처단,무기구입,독립군양성 등을 목적으로 투쟁하려는 국내혁명단체였다. 이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혁명기지를 건설하고 적당한 시기에 독립전쟁을 발동하여 국가의 독립을 달성하려는 투쟁방략을 가졌다.대한광복회는 비밀,폭동,암살,명령 등 4대행동강령을 채택하고 활동을 전개했다.대한광복회의 투쟁강령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부호의 의연금 및 일인(日人)이 불법 징수하는 세금을 압수하여 무장을 준비한다.      ② 남북만주에 군관학교를 설치하여 독립전사를 양성한다.      ③ 종래의 의병 및 해산군인과 만주 이주민을 소집하여 훈련시킨다.      ④ 중국 등 여러 나라에 의뢰하여 무기를 구입한다.      ⑤ 본회의 군사행동․집회․왕래 등 모든 연락기관의 본부를 상덕태상회(대구)에 두고, 한만(韓滿) 요지와 북경․상해 등에 지점 또는 려관․광무소(鑛務所) 등을 두어 련락기관으로 한다.     ⑥ 일인(日人)고관 및 한인 반역자를 수시(隨時)․수처(隨處)에서 처단하는 행형부(行刑部)를 둔다.     ⑦ 무력이 완비되는 대로 일인(日人) 섬멸전을 단행하여 최후 목적을 달성한다.    1915년 8월 25일, 음력으로는 7월15일 백중(百中)날이였다.  불가(佛家)에서는 부처님의 제자 목련이 어머니의 령혼을 구하기 위하여 백중날에  5미백과를 공양했다는 전설에 의해 우란분회(盂兰盆会)를 열어 선친을 공양하는 풍속이 있다. 마을에서도 여러가지 행사를 진행하는데 그가운데 농가의 "호미씻이"를 비롯한 머슴들의 잔치가 한강이남 지방에서는 성행했다. 백중날이 되면 주인은 머슴들에게 하루동안 쉬게 하면서 약간의 용돈을 손에 쥐여주는데 머슴들은 그 돈을 가지고 장에 가서 술을 사마시기도 하고 요긴한 물건을 사기도 한다. 술을 마시고난 농부들은 취흥에 젖어 농악을 치면서 하루를 즐기기도 하고 씨름판을 벌이기도 한다. 이날, 대구의 달성공원도 평소와 달리 인파가 몰리였다.  “오늘 달성공원에서 무슨 시회라도 있는가보지?” “백중날에 무슨 시회가 열려?” “그럼 웬 유생들이 저렇게 많이 모여드나?” “오늘같은 날에는 씨름판이 벌어지겠으니 구경꾼들이 많이 모여들게지.” 로점상들이 주고받는 말을 들으며 박상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원래 시회를 여는것으로 가장하고 동지들을 모이라고 하려 했었는데 모임에 참가하는 동지들중에 많은 사람이 유림출신이 아니였기 때문이였다. 공연히 농사군출신의 동지들에게 선비차림을 시켰다가 자칫하면 경찰들들의 의심을 살것 같아서 백중놀이 구경을 나온것처럼 가장하라고 일렀던것이였다.  박상진이 백중날을 택한것은 데라우치총독이 한 말에서 계발을 받았기때문이였다. 잔인무도하고 교활하기 그지없는 총독놈은 조선백성들의 민심을 달래기 위해 선심이나 쓰는것처럼 이렇게 말했었다. “...백중날은 선고의 고혼을 달래는 우란분회의 종교행사도 있고 민가에서는 호미씻이니 머슴잔치니 하는 머슴잔치를 하면서 하루를 즐겁게 노는 날이니 이를 방해하는 어떤 행위도 용납하지 않는다...”  박상진은 이것을 리용하면 헌병들의 눈길을 피할수 있고 회의도 순리롭게 열수 있다는것을 고려했던 것이였다. 박상진이 회의장소로 정한 관풍루에 올라와 자리에 앉자 채기중도 뒤따라 올라왔다. “시간이 대략 진시(8~10시)쯤 된듯 한데 몇시요?” 풍기광복단의 채기중이 해를 쳐다보고나서 곁에 앉은 박상진에게 물었다. “진시(辰时)가 거의 지나고 사시(巳时)가 가까워올거예요. 어디 시계를 봅시다.”  박상진이 양복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보고 고쳐 말했다. “정확히는 아홉시 반이군요.”  “하기사 여름해가 이만큼 솟았으니 사시가 거의 되였겠지.” 채기중이 혼자소리마냥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거의 모인듯 한데 회의를 시작할까요?”  박상진이 물었다.   “그럭헙시다.” 말을 마친 채기중은 풍기광복단의 대표들을 불러모았다. 박상진도 국권회복단의 대표들에게 모이라고 손짓을 했다.  “올만한 동지들은 다 왔는데 이젠 시작할가요?” 채기중이 박상진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렇게 합시다.”  박상진도 동의했다. “자, 다들 앉으십시오. 처음 오신 분들도 있기에 통성명부터 합시다. 소생은 풍기광복단의 채기중이올시다.”  뒤이어 풍기광복단의 류창순, 류장렬,  한훈, 강병수,김병렬, 정만교, 김상오, 정운동, 정진화,   황상규, 리각 등등이 자아소개를 했다. 국권회복단에서도 박상진과 정운일 등이 인사를 하고 그외에 참석한 우재룡, 량제안, 권녕만, 김한종, 엄경섭, 김경태 등등도 다 간단히 자아소개를 했다.  회의는 채기중과 박상진이 사회했다.  관풍루 주위에도 왜놈헌병대의 밀정들이 쫙 깔려있었기에 회의는 길게 할수가 없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대한혁명의 새로운 형세에 맞춰 풍기광복단과 국권회복단 등의 애국단체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자주독립을 념원하는 대한사람 모두가 참여하여 우리 민족의 원쑤인 침략자 일본제국주의와  맞서서 싸울수 있는 강력한 무력항쟁단체인 “대한광복회”를 성립하려고  이곳에 모였습니다.” 박상진이 광복회를 성립하는 요지를 말하였다. 뒤이어 채기중이 말했다. “먼저 우리 “대한광복회”를 이끌어갈 지도자부터 선출합시다. 여러분께서 마음에 점짝어두고계시는 분의 성함을 말씀해주십시오 .” “상덕태상회의 주인인 고헌 박상진선생을 추천합니다.” 누군가 먼저 박상진을 천거했다. “나도 동의합니다. 고헌이야말로 일찍 왕산 허위선생의 수제자(首弟子)로서 국권회복을 위하여 스승과 함께 몸바쳐 싸우셨고 경술국치이후에는 리관식, 신규식, 조성환, 박경철, 김병만 등과 신해혁명의 현장에 가서 구국혁명의 길을 모색하였고 청나라의 봉건통치를 뒤엎고 중화민국을 세우신 손문선생한테서 대한독립을 협조하겠다는 밀약까지 받아온 지사입니다. 뿐만 아니라 제작년에 “국권회복단”을 조직하여 지금까지 잘 이끌어오고있으며 상덕태상회와 그 지점을 국내외 각지에 설립하여 독립운동의 거점을 삼았습니다. 고헌 박상진선생이야말로 우리 혁명동지들의 훌륭한 본보기이며 우리의 지도자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는 분입니다. 나도 고헌 박상진을 우리 대한광복회의 총사령으로 천거하는 바입니다.” “고헌을 우리 총사령으로 모시는데 의의가 없습니다.” 채기중의 발언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찬성한다는 말이 쏟아졌다. 평소에 박상진을 우러르면서 만나는 동지들한테 늘 “박상진은 실로 위인입니다.”하고 선전했던 채기중의 작용이 컸었다. “좋습니다. 반대하는 동지가 한분도 없으니  고헌 박상진동지가 대한광복회의 총사령에 만장일치로 추대되였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우리 대한광복회의 총사령 고헌께서  회의를 사회하겠습니다.”  채기중의 말에 이어 사회를 맡은 박상진이 태도를 표시하였다. “저는 여러 동지들의 신임에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이 한 목숨을 대한의 광복을 위하여 기꺼이 바칠것을 대한광복회의 이름으로 동지들앞에서 맹세합니다.”  이어서 그는 오늘 그들이 모여 조국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기로한 약속을 천지신명과 자자손손에게 알리는 의미로 광복회원들의 뜻을 모아 작성한 혈맹서를 랑독했다.                 대한광복회 혈맹서   우리들은 대한독립 광복을 위하여 우리들의 생명을 희생함은 물론, 우리들이 한평생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때는 자자손손 계속하여 원쑤 일제를 완전히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하기까지 절대 불변하고 일심륙력(一心戮力)할 것을 천지신명께 고합니다..   비록 그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구절구절이 애국충정으로 끓어넘치였다. 혈맹서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회원들의 가슴에 또박또박 새겨졌다. 특히라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격앙되어 저마다 주먹을 불끈 쥐였다. 박상진이 말을 계속했다. “이제부터 우리의 4대 실천강령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대한광복회에 아직까지 정규군이 건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는 첫째 비밀, 둘째 폭동, 셋째 암살, 네째 명령, 이 네가지 실천강령을 가슴속에 새겨두고 꼭 지켜야 합니다.  첫째, 비밀. 우리 광복회와 회원들의 일거일동은 모두다 비밀에 붙여야 합니다. 귀신도 모르게 하는 행동이 일본총독과 헌병들의 감시로부터 우리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나라의 독립을 이룰 때까지 우리가 살아남아 투쟁할수 있는 길입니다. 설사 우리들가운데서 누가 잘못되어 적에게 붙잡혀간다해도 우리는 나밖에 모르기때문에 입을 열 수가 없는 것이고 입을 열어 비밀을 루설해서는 절대 안되는것입니다.  둘째, 폭동. 우리는 이미 정미의병투쟁에서 경험한 바와 같이 "강도 일제를 구축하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가 없다"는 국민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었습니다. 그 공감대는 우리 백성들의 가슴속에서 활화산같이 불타고있는 것이여서 분화구만 생기면 어느 때든지 세차게 뿜어나올 것입니다. 그 분화구로 뿜어나오는 불길이 바로 폭동입니다. 이 거대한 힘은 경찰의 칼도, 군대의 총도, 간교한 정치가의 세치 혀바닥으로도 막아내지 못할것입니다. 혁명은 이렇게 일어나고 왜놈들은 급기야 굴복하고 이땅에서 물러날 것입니다.  세째, 암살. 이것은 두번째 강령과 궤를 같이합니다. 총독과 각 관공서에  흩어져있는 왜놈 관공리들을 암살하고 군사시설을 파괴하고 나아가서는 놈들의 천황까지 격살해야만 독립을 쟁취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을 배신하고 왜놈들의 앞잡이가 되어 우리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악질 친일 부호와 정탐군과 매국노들을 처단해야만  민족의 정기가 바로서고 독립의 날도 앞당길 수 있습니다. 폭동은 시기가 무르익어야 가능하지만 암살만은 수시로 진행할수 있습니다.  네째, 명령. 이것 또한 절대절명의 사항입니다. 우리 대한광복회는 제국주의의 앞잡이인 강도 일제를 구축하여 나라의 독립을 쟁취하려는 단체입니다. 바꿔 말씀드리면 우리는 독립을 위한 군대라는 얘기도 됩니다. 군대란 무엇입니까? 적과 싸워 이기는 것이 주어진 책임입니다. 그러자면 지휘계통이 뚜렷해야만 하고 명령에 따라 주어진 임무를 성실히 수행해야만 합니다. 이 점은 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언제 왜놈의 헌병들이 덮쳐들지 모르기때문에 회의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구체적인 분공을 하였다. 경상도 지부장에 채기중, 충청도 지부장에 김한종, 전라도 지부장에 리병찬, 경기도 지부장에 김선호, 함경도 지부장에 최봉주, 평안도 지부장에 조현군,황해도 지부장에 리해량(리관구), 강원도 지부장에 김동호 등으로 각도의 지부장을 임명하고 본부에는 회장 박상진과 휘하에 최준, 리복우 등 요인이 각지 기맥을 통하게 하였다. 국외에는 남만에 안동려관을, 봉천에는 심달양행 정미소를 손일민과 정순영 등 요인이 주동기관을 운영케 하였고 대한광복회 만주사령관으로 리진룡을  위임하는 등 모든 분공을 마치자 급히 시행할 임무를 포치한 뒤 페회했다.         14. 대한광복회의 국내외 조직의 정비   대한광복회가 성립된지 한달쯤 되는 어느날, 광복회의 지부장들은 상덕태상회의 사무실에서 비밀회의를 가졌다. 대한광복회의 지부장들은 왜놈 헌병 경찰과 그들이 거느린 정탐들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 일정한 시간차로 도착했고 차림차림도 다 달리 했다. 양복차림을 한 사람도 있고 큰 갓에 도포차림을 한 사람도 있고 농부차림으로 지게에 빈 가마니를 지고 온 사람도 있었다.  “모두 다 모였습니까?” 파수군 길복에게 주위의 경계를 각별히 당부하고 집안으로 들어온 박상진이 물었다. “예, 모두 다 모였습니다.”  방문곁에 앉은 우재룡이 대답했다. 방안에 모인 사람들을 휙 둘러보고나서 박상진이 입을 열었다. “그동안의 활동상황부터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우리 대한광복회가 각처에 마련키로 한 거점상황에 대해 채기중동지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예.” 박상진의 곁에 쪼그리고 앉았던 채기중이 수첩을 꺼내 펼치며 말을 이었다. “우리 대한광복회는 이곳 상덕태상회를 거점의 본부로 삼고 영주의 대동상점, 감척의 김동호, 광주의 리명서, 예산의 김재영, 연기의 리장희, 인천에 있는 리재덕의 미곡취인소와 황학성의 미곡중개소, 룡천의 문응극과 국외로는 만주의 삼달양행, 장춘의 상원양행 등의 곡물상점을 설치하여 각각 우리의 비밀거점으로 삼았습니다. 그밖에도 몇몇 려관이나 음식점을 거점으로 쓸수 있게 하였고 서울의 어재하, 안동의 리종영, 고령의 김재열, 영천의 정재목 등 동지들의 개인집도 우리 광복회의 련락거점으로 확보했습니다. 곡물상중에는 상덕태상회의 지점인것도 있고 경영에서 상덕태상회와 무관한 곳도 있습니다만 우리 혁명기지로서의 거점역할을 하는데는 조금도 손색이 없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로써 우리 광복회의 강령 다섯번째가 되는 련락기관 설치문제는 대충 마무리가 된 셈입니다. 이제부터는 이 거점을 중심으로 직접 행동을 시작할  차례입니다. 이 문제는 우재룡동지께서 말씀하십시오.”  “제일 시급한 일은 우리 광복회의 취지를 국내외 동포들에게 널리 알리는 일인데 그 일차적인 일로서 다음과 같은 포고문 수만장을 인쇄해 국내외에 배포하기로 했습니다. 이제 포고문을 읽겠습니다.                                포고문 우리나라 천년의 종사(宗社)는 회진(灰烬)이 되고 2천년을 이어온 우리민족은 노예가 되여 날로 가중되는 섬 오랑캐의 악정폭행(恶政暴行)에 시달리고 있다. 이를 생각하면 피눈물이 용솟음치고 내조국을 어서 찾아야하겠구나 하는 간절한 마음 금할 길이 없다. 이것이 본회가 성립된 소이(所而)이며 각 동포는 지닌바 능력을 다해 본회를 돕고 앞날 본회의 의기(义旗)를 동지(东指)할것을 기대하라. 그리고 각지의 자산가(资产家)는 예축(予畜)하였다가 본회의 요구가 있을 때는 주저말고 출금(出金)하기 바란다. 만일 우리 광복회의 기밀을 루설하거나 그 요구에 불응할 때는 본 광복회가 정한 정규(正规)에 따라 엄중조처하리라. 주의사항: 본 광복회의 회원은 각지에 산재하여 여러분 각자의 동태를 감시할 터이므로 본 광복회의 지령을 준수하고 지정 배당금을 비축해뒀다가 본 광복회의 불시(不时)청구에 대기하라. 본 광복회의 정규는 각자의 행동을 감시하리라 .                         광복회 창립 11년 병진(丙辰1915)년  8월 일. 광복회(인)”   광복회의 창립기점을 "을사보호조약"이 맺어진 1905년으로 산출(算出)하기를 요한다. 을사(乙巳)년이후의 모든 국권회복운동, 례컨대 병오(丙午), 정미(丁未), 의병항쟁까지도 광복회활동으로 포용한다는 뜻이 들어있기 때문이였다.    대한광복회의 포고문은 우재룡에 의해 만주의 안동려관의 량제안에게 전해졌고 그것은 다시 중국 각지로 전해졌다. 아듬해인 1916년에 이르러 박상진과 결의형제를 맺은 김좌진과 로백린, 신현대, 윤흥종, 신두현, 김정호, 권태진, 림병한, 윤형중, 김홍두, 윤치성, 리현, 박성태, 명기섭 등이 선후로 대한광복회에 가담함으로써 대한광복회의 력량은 크게 확대되였다. 그리고 1917년에 들어서서는 김재풍, 장두환, 김경태 등 경기호남지방의 애국자들과 관동지방의 김동호 등 지사들이 참가하여 대한광복회는 명실공히 전국적인 조직으로 부상하였으며 회원수도 수백명에 이르렀다.  하루는 대한광복회의 지도부의 성원들이 녀성회원 어재하(鱼在河)가 꾸리는 서울 남대문밖에 있는 남일려관에 모였다. 며칠전에 박상진은 대한광복회의 상해지사로 로백린(卢伯麟:1875-1926)을 파견하기로 결정했었다. 그는 당전의 투쟁정황을 총화하고 래일 중국으로 떠나는 로백린 일행을 환송하려는 목적에서 오늘 회의를 소집하였다.  “국내의 문제는 계획대로 진행되고있지만 아직 해외 특히 여러나라의 조계가 되여있는 상해가 문제거리였는데 이제 로백린동지가  해외지사 책임을 맡고 떠나시게 되어서 이젠 한시름을 놓게 되였습니다...”  박상진의 환송사에 이어 로백린이 말하였다. “총사령께서 해외지사라고 거창하게 말씀하셨지만  만주지역에 부사령 리진룡동지가 책임지고 있으니까 저는 상해지사를 맡았을 따름입니다. 저와 동행하는 십여명의 동지들은 총사령과 국내에서 투쟁하시는 여러분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열심히 공작하겠습니다.”  자기네 일행을 환송하기 위해 각지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특별히 찾아온 동지들의 따뜻한 정에 로백린은 감격하여 독립운동을 위해 온 몸과 지혜를 바칠 결의를 다시 한번 다지였다. 로백린은 황해도 풍천태생인데 일본에 건너가서 륙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대한제국의 륙군 정령에 임명되여 관립무관학교의 교육국장,교장 등을 력임했었고 1907년에는 안창호 등과 “신민회”를 건립하고 국권회복을 위해 활약했었다.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자 그는 하와이로 건너가서 박용만 등과 함께”국민군단”을 창설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했었다.  “수차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 광복단의 국내외 활약상을 세계만방에 널리 알려 조국의 독립을 하루 속히 쟁취하도록 하는 막중한 임무가 동지들에게 있다는 사실을 잠시도 잊으시면 안됩니다.우리가 말하는 해외란 만주지역을 제외한 중국 본토와 동남아, 영국, 불란서 독일 등 유럽국가와 미국, 카나다, 하와이 등등 세계의 모든 나라와 지역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임무가 너무도 중대하기에 박상진은 당부를 거듭하였다. “총사령과 여러분께서 념려하지 마십시오. 제가 우리 광복회의 단원들을 이끌고 상해에 들어가는 만큼 그 어떤 일도 소홀히 하지 않을 것입니다. 명색이 해외총책임을 진 이상 저는 상해 한곳에서만 일을 벌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안심하십시오.”  “고맙습니다. 중국 대륙쪽의 일은 동지들만 믿겠습니다. 국내에 남아있는 우리는 국내에서의 일을 원만히 처리하겠습니다.”  로백린일행이 중국 안동을 거쳐 배를 타고 상해로 떠나간 뒤 며칠 지나지 않아 만주에서 광복회원 한사람이 박상진을 찾아왔다. “무슨 일로 이 먼 길을 달려왔습니까?” “우리 만주지역을 책임진 리진룡부사령께서...” 그 광복회원은 총사령의 엄엄한 모습에 기가 질려 뒷말을 흐리였다. “리진룡사령께서 어쨌단 말이요?” “왜경들에게 체포되였습니다.” “도대체 어찌된 일이요? 자세히 말씀하십시오.” 박상진이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식을 가져온 광복대원에게 따져물었다. “리부사령께서는 광복회의 군자금을 마련하시려고  회원 몇명을 거느리고 은산금광에 잠입했었는데 금광의 경비가 어찌나 삼엄한지 성사도 하지 못하고 경찰에 련행되였습니다.” “그 뒤에 리부사령의 소식은 알고있습니까?” “자세한 정황은 알 수 없지만 지금 옥고를 치르고있습니다.”  만주지역을 책임진  광복회의 부사령이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였다는것은 대한광복회에 이만저만한 손실이 아니였다. 대한광복단이 만주지역에서 반일투쟁을 진행하는데 사령관이 없어서야 어찌한단 말인가? 당장 그자리를 채워야 한다. 그런데 지금 누구에게 만주지역의 책임을 지게 해야 할가? 이사람 저사람을 두고 저울질하던 박상진은 급히 사람을 띄워 의동생인 김좌진을 불렀다. 그는 무관학교를 나오고 전투지휘능력이 비범한 김좌진이 만주광복단 사령의 적임자라고 생각했던것이였다.  “형님, 무슨 일로 저를  찾았습니까?” 박상진의 부름을 받고 급히 찾아온 김좌진이 연유를 물었다.  “만주에서 광복단을 지휘하던 리진룡부사령과  광복단의 회원 몇분이 군자금을 마련하려다가 왜경에게 체포되였다네. 왜경들에게 체포였으니 쉽사리 풀려나올 수야 없지 않겠나? 그러니 만주에서의 광복단의 활동을 책임질 사령관이 급히 수요되네.”  “형님께선 심중에 누구를 점찍어뒀습니까?” “내가 며칠동안 두루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자네가 만주에 가서 광복단의 사령을 맡아야 시름이 놓이겠네.”  “형님의 뜻이 정녕 그러하시다면 저는 만주로 떠나겠습니다.” “자네를 만주에 보내기는 참으로 서운하네만 장차 우리 광복회의 주요한 활동무대는 넓은 만주벌이니 어느 때든지 우리 대한광복회는 만주에 대거진출해야 하네. 우선 이곳에 남아있는 동지들에게 사업인계를 잘해놓고  될수있는 한  일찍 떠나주게. 만주에 가거든 손일민,주진수,리홍주 등 동지들이 조직한 길림광복회와 서간도의 삼원포에 계시는 허혁선생님과 리상룡님의 부민단과 신흥학교를 총괄하여 만주광복단을 무어 강력한 독립군을 꾸리게. 나는 국내에서  물적 인적자원을 확보하는데 주력하겠네. 부디 조심하게.”  박상진은 만주로 떠나게 되는 김좌진의 손을 으스러지게 잡고 부디 잘싸워 이기라고 거듭거듭 당부했다.  김좌진장군이 만주로 떠나는 날 박상진은 다시 그를 바래주었다. 의제이자 가장 믿음직한 전우를 이역으로 보내는 박상진은 격동을 금할수가 없었다. “리별의 기념으로 자네한테  시 한수를 선물하겠네.” 박상진은 즉흥시를 지어서 소리내여 읊었다.                              김좌진장군을 만주로 보내며   압록강에 가을 해 비꼈는데  그대를 바래나니 쾌히 내린 그대 단심  서약도 환하구나. 칼집속의 룡천검 빛 하늘에 내뻗쳐 공세워 돌아오는 날 개선가 불러보세.         送金佐镇将军满州诗 鸭江秋日送君行,快许丹心誓约明。 匣里龙泉光射斗,立功指日凯歌声 。                     15.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첫거사    겨울추위가 유난히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박상진은 모처럼 시간을 짜내 상덕태상회로 나왔다. “여보세요, 어르신, 이제 어르신을 찾아뵈러 가려던 참이예요.” 사환군으로 있는 길복이가 그를 반기였다. 길복이는 서울탈환전때 희생된 울산 포수 김장쇠의 아들인데 애가 제 아버지를 닮아서 총기가 있고 무척 령리하였다. 박상진은 상덕태상회를 꾸리자마자 의지가지없는 길복이를 상회로 데려와서 사환군으로 쓰면서 내심 아들같이 사랑하였다. “상회에 무슨 급한 일이 생겼느냐?” “예, 방금 전보 한통이 왔습니다.” 전보문을 받아읽던 박상진은 자신도 모르게 바짝 긴장을 했다. “혹시 무슨 나쁜 소식이 왔습니까?” “아니, 내 념려는 하지 말고 너는 밖에 나가서 네가 할 일이나 하거라.” “예, 어르신.” 길복이가 나가자 박상진은 손에 들고있던 전보문을 다시 한번 천천히 읽었다.   광맥발견. 크고 확실함. 채광장비 속히 준비할것.   그것은 우재룡이 보낸 전보문이였다. 암호련락임은 분명하였으나 밑도 끝도 없이 광맥발견이라고만 했으니 무슨 암호인지 도무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길복아, 길복이 게 있느냐?” “예, 여기 있습니다.” 길복이가 들어오자 박상진이 분부했다.    “급히 나가볼 곳이 생겼구나. 얼른 나가서 인력거를 불러오너라. 아니 그만 둬라.”  대구시내에 사는 광복회의 회원들을 찾아가려다가 생각을 고친 박상진은 급히 우체국으로 달려 갔다. 그는 광복회의 책임자 몇몇에게 전보를 치고나서 급히 상회의 사무실로  돌아왔다. 이튿날 아침에 참모장 권영만이 달려왔다. 뒤이어 찾아온 사람은 어제 전보를 쳐왔던  우재룡이였다.  “우동지, 무슨 전보를 알아보지도 못하게 치셨습니까?” “바삐 치다보니 전문을 곰곰히 생각하지 못했습니다.그리고 전보를 치고나서 알아보니 거사시간이 앞당겨졌기에 직접 달려왔습니다.”  “광맥발견이란 무슨 뜻입니까?” 박상진이 물었다. “사무실에 들어가서 얘기합시다.” 권영만이 주위를 둘러보면서 말했다. 뜰안에서 곡물가마니를 운반하는 인부들이 마음에 걸렸기때문이였다. “그럽시다.” 박상진이 앞서서 세사람은 상덕태상회의 안집이자 광복회의 비밀회의장소인 구석진 방에 들어가 앉았다. “전보에서 밝혔듯이 이번 광맥은 진짜입니다. 덩치가 커요.” “좀 더 자세히 말해주시오.” 우재룡의 앞에 바싹 다가앉으며 박상진이 물었다. “왜놈들이 강박적으로 징수한 세금을 탈취하여 우리 광복회의 군자금으로 사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그 정보가 확실합니까?” “오는 동지날에 경주, 영일, 영덕 세 고을에서 징수한 세금을 대구로 운송한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오늘이 열나흘이니까 꼭 사흘밖에 남지 않았네.” 권영만이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무엇으로 운송한답디까?” 박상진이 물었다. “우편마차로 나른답디다.” “무장경호원이 얼마나 될것 같습니까?” “그건 딱히 말할수 없습니다만 비교적 많을것 같습니다.” “금액은 대략 얼마나 된답디까?” “정확한 금액까지는 알수 없지만 3개 군에서 징수한 세금이니까 만원은 넘지 않겠습니까?” 만원이라면  거액의 돈이였다. “어떻습니까? 권동지, 해낼수 있겠습니까?” 박상진이 물었다. 그는 권영만이 의병출신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였다. 순간 방안에는 무거운 긴장이 감돌았다. 이윽고 권영만이 대답했다. “우리가 하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못해낼 것도 없겠지요.” “제가 살펴본바로는 우편차가 경주에서 대구까지 오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험한 길이 몇군데가 있지요. 그중에서 마땅한 곳을 선택하면 성사가 가능할것입니다.”   우재룡이 말했다.  “그렇지만 지난번에 광산에서처럼 거사를 쉽게 생각하고 서뿔리 덤비다간 큰코 다치겠지요.” 권영만이 말했다. 그것은 광복회 결성직후에 무기구입자금을 확보하기 위하여 그들이 일본인이 경영하는 녕월 상동의 중석광산에 광부로 가장하고 몰래 들어가서 광주가 로동자들에게  로임을 지급하려고 보관하던 현금을 탈취한 일을 두고 말한다. 그러나 말이 탈취성공이지 탈취한 금액이 보잘것 없어서 군자금을 보태는데 별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그 뒤 직산금광의 금고를 털려했는데 경찰들이 낌새를 눈치챘는지 경비가 어찌나 삼엄한지 도무지   손을 쓸 방도가 없었다.  “따지고 보면 그때 광산에서의 거사도 결코 쉬웠던 것은 아니지요.” 우재룡이 볼멘 소리를 했다. “그건 그렇다치고 거사할 날자가 급박하니 우선 결행여부부터 정하는게 순서가 아닐가요?” 권영만이 박상진에게 물었다. “물론이지요. 누구 반대하는 분 있습니까?” 박상진이 두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찬성이요.” “이런 기회가 종종 있는 것도 아니니 결행해야지요.” “좋습니다. 결행합시다.’ 박상진이 결단을 내리고  말했다. “이번 거사엔 제가 앞장서지요.’ 권영만이 자원했다. “그렇게 합시다. 전투경험이 풍부한 권동지가 의병출신의 동지들을 이끌고 세금을 수송하는 차를 습격하기로 하고 우동지는 뒤에서 권동지네를 엄호하십시오.” 박상진이 명령했다. 뒤이어 세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구체적인 작전방안을 세우기 시작했다. 습격장소는 가급적으로 대구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택해야 한다. 그래야만 상덕태상회를 드나드는 광복회원들이 의심을 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였다. 그들은 거사지점을 경주에서 가까운  광명리부근으로 정했다. “이 지점이 가파르고 험준한 소태고개인데 경주에서 대구로 가는 우편차의 필경지로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게다가 이곳은 경주에서 가깝기때문에 놈들의 경계가 상대적으로 소홀할 수도 있습니다.” 박상진은 종이장에 대충 지도를 그리고나서 손가락으로 지도를 가리키면서 권영만에게 말했다. “거사지점은 광명리부근이 가장 적합합니다. 그곳에 가서 지형을 잘 살펴보고 유격전법에 따라 구체적인 작전을 펼칠테니까 그 일은 저와 우동지에게 맡겨주시고 총사령께서는 우리가 래일 출발할수 있도록 주선해주십시오.” “나한테 권총 한자루와 양총 세자루가 있으니 떠날 때 가지고가십시오.” “알겠습니다.”  권영만의 얼굴에는 비장한 각오가 어려있엇다. 이튿날 새벽 동이 틀 무렵 그들은 상덕태상회를 떠났다. 보부상(褓负商)차림의 장정 여덟명이였다. 그들이 보부상차림을 하고나선 것은 나름대로 리유가 있었다.  그 당시의 보부상들은 단순히 물건을 팔러 다니는것이 아니라 일진회라는 친일파조직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자들에게 폭력을 가하거나 한일합방선전문을 들고다니면서 매국행위를 일삼고 왜놈의 첩자노릇을 했다. 그리하여 헌병 경찰이나 보조원들은 보부상 차림을 한 사람을 만나면 검문검색을 대충하고 내보냈었다. 또 보부상이라면 등짐이건 보짐이건 짊어지고 다녀야하기 때문에 그속에 무기를 감추기도 편리하였다.  그들이 광명리부근의 고분이 여기저기 널려있는 곳에 이른 것은 해가 지고 어둠이 깃든 뒤였다. “난 잠시 다녀올 곳이 있으니 모두들 오늘밤은 이 초막에서 푹 쉬십시오.” 우재룡이 말했다. 그는 경주군청에 심어둔 정보원을 통해 우편차의 준확한 출발시간을 알아오려고 했던것이였다. “늦어도 래일 아침까지는 돌아와야 하네.” “그건 념려하지 마십시오. 두어군데만 다녀오면 되니까요.”  권영만이 걱정을 하자 우재룡이 자신있게 말하였다. 우재룡을 보내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 권영만은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총사령한테서 건네받은 무기라곤 고작 권총 한자루와 구식 양총 세자루에 화승총이 둘이고 나머지는 몽둥이뿐이였다. 이런 허술한 무기를 가지고 수자적으로 우세이고 장비도 월등한 왜놈들의 손에서 군자금을 빼앗을 일을 생각하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밤이 퍽 깊어서야 우재룡이 동지들이 쉬는 초막으로 돌아왔다.  아침에 저격장소에 이른 그들은 사방에 널려있는 썩은 나무등걸을 도로로 굴려 떨어뜨려서 길을 가로막았다. 권영만은 길 뒤켠에 두사람만 숨게 하고 나머지는 고개우로 올라가게 했다. 고개 못미쳐 가파른 오르막길이 있었지만 거기에는 아무런 장애물도 설치하지 않았다. 우재룡이 납득이 되잖아서 권영만을 보고 물었다. “오르막길을 가로막고 싸운다면 더 유리하지 않을가요?” “나도 그점을 생각 안한건 아니네.”  권영만이 말끝을 흐렸다. “그런데요?” “이번 작적의 궁극적인 목적은 적들의 손에 있는 돈을 탈취하는 것이니까.” “우편차가 골짜기에 굴러떨어질까봐 우려하는것인가요?” “그렇다네.” 이 때 건너편 산마루에 나갔던 동지들한테서 신호가 왔다. 우편마차가 고개로 올라오고있다는 신호였다. “전투준비! 각자는 자기 위치에 돌아가서 명령신호를 기다리시오.’ 권영만이 명령했다. 순간 주위는 쥐죽은듯 조용해졌다. “적이 나타났다.”  누군가 속삭였다. 모두들 아래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말은 길고 가파로운 고개길을 올라오느라 지쳤는지 꾸물꾸물 거북이걸음을 하였다. 다행히 우편마차를 제외하고 다른 차는 없었다. 보아하니 호위하러 나온 병시들이 많지 않았다. 마차의 앞좌석 마부의 오른쪽에 호위병 한놈이 앉아있는 외에 다른 놈들은 다 차안에 있었다. 마침내 우편마차가 고개마루턱에 이르더니 더 오르지 못했다. 말이 지쳤던것이였다. 채찍을 휘둘러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자 마부는 하는수 없이 차에서 내려 말고삐를 당겼다. 그러자 차안에 앉아있던 놈들도 내려와서 차를 뒤에서 밀었다. 알고보니 우편차를 호위하는 놈들은  모두 해서 세명뿐이였다. 예상했던것보다 호위병의 수가 훨씬 적자 그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이번 일은  참으로 하늘이 그들을 도운 셈이였다. “쏴라!” 마차가 고개우에 다다르자 권영만이 사격명령을 내렸다. “탕탕탕...”  총소리에 놀란 말이 멍에를 끊고 앞으로 미친듯이 내달렸다. 우편차를 호위하던 놈들은 반항 한번 해보지 못한채 모두 쓰러져 원귀로 되여버렸다. 달아나는 말은 총을 쏠 필요도 없었다. 우편차는 나무등걸이가 널려있는 곳에서 뒤집어졌기때문이였다.  참으로 가슴벅찬 대성공이였다. “어서 차안에 들어있는  돈부터 꺼냅시다.” 우재룡이 재촉했다. “예!”  돈과 보총 세자루를 로획한 그들은 바람결같이 현장에서 사라졌다. 산속으로 들어가서 오후 한나절과 온 밤동안 걸음을 다그쳐 이튿날 아침에 대구에 도착한 그들은 로획한 돈과 보총을 총사령 박상진에게 바쳤다. “동지들, 이번 일은 정말 본때있게 해치웠습니다.. 고맙습니다.” 박상진은 행동대원들의 지혜와 로고를 치하하였다. 로획한 돈을 세어보니 도합 8천 7백원이였다. 예상하던것보다는 훨씬 못미쳤지만 결코 적은 금액은 아니였다. 박상진은 그 돈을  대한광복회의 재무를 관할하는 사촌동생 최준에게 넘겨주었다.   16.자그마한 실수로 생긴 천추의 한   “우리 대한광복회가 독립군의 양성기지를 건립한다든가 백개의 잡화점을 꾸리려면 이까짓 돈으론 어림도 없네요.” 최준이 돈을 받으면서 시답잖게 말했다. “목숨을 각오하고 싸워서 쟁취한 돈인데 많고적고를 따져서야 되겠나?” 박상진이 사촌처남을 나무랐다. “제가 그걸 왜 모르겠습니까? 급히 쓸 돈이 적어도 백만원은 되야 하니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지요.” “티끌 모아 태산이라 하지 않나? 자네도 개인재산을 좀 헌금하고 다른 부호들에게 모금도 하고... 원래 우리 광복회의 지금 마련계획이 이런 것이 아니였나?” “그걸 누가 모릅니까? 우리 경북에서 제 집을 포함해서 매호에 만원씩 모금할 집을  60호로 지명하였지만  모금이 쉽게 되지 않으니 안타까워서 하는 말입니다.” “자네는 모금이 잘 되지 않는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나?” “돈 많은 부호들이 모금에 호응을 잘 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우리 대구만 보더라도 몇차례나 모금하러 다녔지만 헛물만 켰잖아요.” “한번 본때를 보여줘야겠구나.” “그래요. 나라야 망하던 말던 제 리속만 챙기느라 급급한 친일부자 한놈을 골라서 본때를 보여줘야 합니다.” 광복회의 재무 최준이 말하였다. “자네는  혹시 머리속에 점찍어놓은 놈이 있나?” 박상진이 물었다. “서우순이란 놈부터 족칩시다.” “서우순이라?” “예, 대구부호 서우순만 혼내우면 린근의 다른 부호들은 벌벌 떨면서 배당금을 앞다투어 바칠것입니다.” “이건 중대사인만큼 우리 둘이서 결정할 일이 아니로군. 이제 곧 참모회의를 소집하겠네. 회의에서 결정되면 곧 행동에 옮기겠네.” “자형은 총사령이니 생각대로 하십시오. 저야 지도부의 성원이 아니니 총사령의 명령만 따를 뿐입니다.” 최준이 두 어깨를 치켜올리며 말했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7월 초순의 어느날, 대구 부호 서우순은 낯선 길손한테서 괘상한 편지 한통을 받았다. “도대체 봉투안에 뭐가 들었길래 이렇게 봉함을 꽁꽁했누?” 서우순이 두덜거리면서 피봉을 뜯었다. 속지를 뽑아 글을 읽던 그는 벌린 입을 다물지도 못한채 온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령감, 무슨 일이 생겼수?” 곁에서 지켜보던 마누라가 눈이 동그래지며 물었다. “당장 그놈을 잡아오너라!” 서우순은 문쪽을 가리키면서 웨쳤다. “방금 편지를 가져온 그놈 말이유?” “응, 그래, 바로 그 불한당놈을 잡아오란 말이다.” “여봐라, 거기 누가 없느냐?’ 서우순의 마누라가 소리를 질렀다. “예, 마님, 쇤네를 부르셨슈?” 머슴 우도길이 들어와 머리를 쪼아리며 물었다. “방금 어르신께 편지를 가져온 놈이 어떤놈이냐?” “쇤네는 모르는 사람인데유.” “너는 왜 낯짝도 모르는 놈을 함부로 집안에 들어오게 했느냐?” “어르신을 잘 안다기에...” “시끄럽다. 당장 그놈을 잡아오너라.” “예, 마님.” “밥만 축내는 등신들이라구, 끌끌끌...” 머슴의 등에 대고 서우순의 마누라는 혀를 찼다. 그때까지 서우순은 정수리를 맞은듯 정신을 못차리고있었다. “아니, 령감, 무슨 죄라도 지었시유? 여태껏 정신도 못차리시고...” “내가 무슨 죄를 지어?” “그런데 왜  서리 맞은 풀꼴이 됐시우?” “이건 임자가  알 일이 아니여.” “아뇨, 큰일이면 나도 알아야지유. 그 편지 나도 한번 봅시다요.” “임잔 알것 없다는데두.” 남편이야 뭐라 하든 상관하지 않고 마누라는 편지를 낚아채서 펼치였다.                          특정배당금          金贰万圆也. 본 회의 특별 경비로 좌하(座下)에게 이상과 같이 배당하였으니 금년 7월 5일까지 현찰로 준비해뒀다가 본 광복회의 지령인에게 교부할 것. 만약 이를 어길 시에는 본회의 행형부가 조국의 이름으로 민족의 이름으로 응분의 형벌을 가할 것임.                           개국기원 4천2백49년. 병진 6월 일 광복회 재무부 (인)   “배당금이라니? 령감이 언제 광복회라는데 가입했수?” “내가 미쳤다고 그런 비밀결사조직에 가입하겠나?” “그럼 가입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무슨 배당금을 내란 말이유? 그것도 2만원이나 되는 거금을?” “그러니까 그놈들이 날강도들이지.” “그럼 령감은 어쩔 셈이유? 그 날강도들한테 그 많은 돈을 바칠 생각이유?” “안주고 배길수만 있다면사 여북 좋겠나...듣자니 놈들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 옛날 홍길동이보다 더 날쌔다던데 내가 돈을 안내놓고 견딜수 있겠나?” “관청에 고발하시우. 령감은 순사들하고도 친하지 않수? 그 날강도놈들을 몽땅 잡아다 처형하라시우.” “안돼, 그러다가 자칫하면 우리 목이 먼저 날아갈텐데...”  간이 콩알만해진 서우순은 마누라가 뭐라고 달래여도 두려워서 벌벌 떨기만 한다. “령감, 나한테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놈들을 죄다 붙잡을 계략이  있는데 실행하시겠수?” “나는 머리가 둘도 아닌데 그런 모험은 하긴 싫어.” “그럼 령감은 뒤방에 숨어계시우. 내가 나서서 다 처리할테니까.” “좋아, 무슨 계책인지 어서 말해보라구.” 서우순의 마누라가 남편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광복횐지 뭔지 하는 놈들은 당신의 얼굴을 모르잖나요?” “그래, 그놈들이 언제 본 놈들이라고 내 얼굴을 알아?” “당신 대신 종놈 하나를 희생시키구려. 당신으로 가장시켜 사랑방에 앉혀놓고 그놈들이 협박을 시작할 때 경찰들을 몰래 불러오면  놈들을 일망타진할수 있지 않아유?” “그러다가 혹시 잘못되는 날엔 어쩌자구?” “그까짓 종놈 하나 잃어버리는거야 뭐 대단하나유?” “그럼 어느 놈을 고를가?” “우도길이가 좋겠네요. 령감과 체구도 비슷하구...” “우도길이는 령감의 흉내를 내야겠으니 사랑방을 지켜야하지만 령감은 안방에서 내 치마폭속에 숨어있으면 되잖겠수?호호호.” “요런 못된 녀편네라구. 말이면 아무거나 마구 하는 줄 알고...” 이튿날부터 서우순은 우도길을 불러서 며칠간 외출할 일이 있으니  평소에 제가 입던 옷을 갈아입고 사랑방에 앉아서 주인행세를 하라고 일렀다. 순직한 우도길은 집의 주인이 왜 자기더러 서우순의 배역을 하라 시키는지 알수가 없었지만 주인의 분부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우순의 계집이 부린 잔꾀가   면바로 들어맞았다. 광복회의 행동대원들은 서우순의 집으로 두어차나 독촉장을 보냈지만 서우순한테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했다. 그런데 그 낌새를 여우같은 서우순의 마누라가 알아차렸었다. 그녀는 요즈음 낯선 사람들의 그림자가 자주 사랑방을 기웃거리더란 하인들의 말을 들었던것이였다. 서우순의 마누라는 부랴부랴 주재소에 달려가서 위험한 사정을 알리고 경찰의 도움을 청했다. 1916년 9월(음력 8월), 유달리 늦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달도 없는 캄캄한 밤이였다. “젠장, 해가 진지도 어지간히 오랜데 무슨 놈의 날씨가 이리도 덥노?”  앞장선 권백초가 흐르는 땀을 연방 닦으며 짜증을 부렸다. “너무 긴장해서 그런가 봅니다. 제가 앞장설가요?” 뒤따르던 김진만이 가만히 물었다. “괜찮소. 내가 그냥 앞장서리다.” “맘대로 하시구려.” 김진만, 정운일, 김재열, 홍우일, 김진우, 최준명, 최병규 등등이 차례로 뒤를 따랐다. “마침 서우순이 집에 있군요.” 김진만이 서우순의 사랑방에 불이 켜진 것을 발견하고 말하였다. “거야 대문밖을 나가지 않았으니 집에 있을수 밖에요.” 며칠동안 대문근방에 숨어서 동정을 살폈지만  서우순이 외출하는 것을 발견하지 못한 한 대원이 말했다. “쉬잇!” 사랑방으로 발볌발볌 다가간 권백초가 사랑방 문을 활짝 열었다. 정운일과 최병규가 권백초를 량옆에서 호위했다. “서우순! 너는 어디서 굴러온 놈이냐? 단군의 후손이리면 마땅히 우리 광복회를 받들고 기꺼이 군자금을 내놔야 하거늘 네놈은 어이하여 후안무치하게 우리 광복회의 독촉명령을 무시하고있느냐?” “나으리, 저는 이 댁의 나으리가 아...” 우도길이 어인 영문인지 몰라 눈을 둥그렇게 치뜨고 떠듬거렸다. “이 교활한 놈아, 궤변을 하지 말아!” 권백초가 권총을 뽑아들었다. 이때 옆방에 잠복해있던 주재원들이 우루루 쏟아져 들어왔다. “손들엇! 네놈들은 포위되였다. 무기를 버리고 나왔!”  권백초가 다급히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적들에게 잡히기 전에 교활한 서우순부터 처단하기 위해서였다. “사람 살려주시오. 소인은 이집의 머슴 우도길이오....” 우도길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방바닥에 쓰러졌다. 경찰들의 포위망에 들었다는 것을 깨달은 권백초는 뒤창문을 차고 도망쳤다. 그는 권총을 지닌 덕에  용케 포위망을  빠져나갔지만 방안에 들어왔던 다른 대원들은 독안에 든 쥐신세로 되여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모두 경찰에게 체포되였다. 형무소에 끌려간 그들은 모진 고문을 받았다. 그들은 조직의 안전을 위해 한결같이 광복회의 이름을 빌어 강탈행위를 저질렀다고 거짓으로 자백하였다. 재판소에서도 그들의 범죄를 단순한 강도행위로 인정하고 일반 형사범으로 재판하였다. 리시영이 넉달, 홍우열이 다섯달, 김재열이 여섯달, 최준명이 2년,정운일이 10년, 최병규가 10년, 김진우가 12년도형에 각각 언도되였다. 서우순사살미수사건이 있은 몇달 뒤 또 한차례의 불행이 박상진을 덮쳤다. 한해가 저물어가는 12월 말의 어느날,박상진은 국경근처에서 보내온 전보 한통을 받았다.만주로부터 권총 두자루가 들어왔다는 뜻의 내용이었는데 만날 시간과 장소가 적혀있었다. 무기가 너무 부족하여 거사에 너무 많은 어려움을 겪고있는 박상진은 소식을 접하자 집을 나섰다. 박상진이 약속한 시간에 접촉장소에 이르자 총을 지닌 사람도 나타났다. 그들은 행인이 잘 다니지 않는 골목에 들어가서 거래를 시작했다. “꼼짝말고 손 들엇!” 어디서 나타났는지 경찰 대여섯명이 권총을 뽑아들고 그들을 둘러쌌다. 갑자기 당한 일이라 박상진은 대항할수도 도망칠수도 없이 놈들에게 체포되였다.경찰들은 박상진을 대구경찰서로 호송했다. “서우순 살해미수사건”이 있은 뒤 경찰들은 총을 들고 도망간 권백초의 행방을 찾기에 분주한 동시에 권총의 출처를 알아내려고  백방으로 날뛰였다. 변경 우체국에서 수상한 전보문을 발견한 경찰들은 그 전보문이 무기를 거래하는 암호라 짐작하고 그들이 만나기로 한 장소 근방에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였다. 법정에서 재판이 시작되였다. “그대의 왜 권총을 사려했는가?” “호신용으로 쓰려고 샀던 것입니다.” “그대는 총포화약류 단속령을 모르는가?” “알고는 있습니다.” “그럼 왜 불법인것을 알면서 도 총기를 샀는가?” “나는 상덕태상회의 주인입니다. 대형상회를 경영하는데  호신용 권총이 없어서야 어디  될일입니까? 나라에서 내여주지 않으니 자체로라도 구입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박상진은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권총을 사려한것은 정당한 행위라고  주장하였다.  형사들도 대형 상회의 주인이 권총을 사려하는 심리를 리해할수 있었고 또 막강한 경제실력을 갖춘 기업인이 강도무리에 가담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민간인이 암시장에서 권총을 사는 것은 법적으로 용허할수 없는 일이였다. 대구지방법원에서는 하나를 징계해 백을 놀래울 목적으로 박상진에게 이란 죄를 씌워  6개월 형을 내렸다.        17.데라우치총독 암살계획   1916년 7월의 어느날, 박상진의 상회에 황해도 지부장 리관구(리해량) 가 두사람을 데리고 찾아왔다. 리관구는 며칠전에 인편에 일본총독 데라우치 마시타케(寺内正毅)를 처단할 계획을 쓴 쪽지를 보내면서 박상진더러 무기를 빌려달라는 부탁을 했었다.  글쪽지를 받은 박상진은 대뜸 할빈역에서 이토오 히로부미를 격살한 안중근의사를 떠올렸다. (안중근의사는 혼자서도 할빈역에서 이토오를 격살했는데  그보다 월등한 조직력을 갖춘 우리 대한광복회에서 데라우치 총독놈을 처단하지 못한다면 어디 될 일인가?) 데라우치는 이토오가 죽은 뒤 한국에 들어온 제3대 통감인데 이놈은 1910년 8월 22일에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이였던 매국적 리완용과 함께 에 서명한 장본인이니 백번 죽여도 시원찮을 악마였다. 5년전에  데라우치사살미수사건에  처음으로 걸려든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안중근의사의 사촌동생인 안명근(安明根)이였다. 황해도 신천태생인 그는 어려서부터 안중근의 영향을 받아 애국심이 강하였다. 그는 항일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고 안악군면학회(安岳郡勉學會)와 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의 회원으로 교육구국운동에 힘썼으며, 리승훈·김구 등 신민회 계통의 인사들과 사귀였다. 1909년 10월 안중근의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 사살사건이 있은 후, 동지들을 규합하여 리완용 등 친일파를 척살하고 북간도로 가서 독립군을 양성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이를 위해 배경진(裵敬鎭)·박만준(朴萬俊)·한순직(韓淳稷) 등과 군자금모집 계획을 추진했다.그는 1910년 11월 황해도 송화의 신석효(申錫孝), 신천의 리원식(李元植) 등에게서 군자금을 얻은 후  신천의 민모(閔某)에게 군자금을 요구하였더니  민모는 제때에 군자금을 마련해놓겠다고 통쾌히 대답하였다. 12월 초에 안명근은 데라우치총독이 압록강 철교준공식에 참가하게 된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나의 형님께선 이미 이토오를 죽였는데 내가 데라우치를 죽이지 못하겠는가?” 안명근은 이 기회에 데라우치를 사살하고야 말겠다 결심하고 몇몇 애국지사들과 비밀리에 무기를 마련하고나서 모월 모일 신의주로 통한 철도의 요도에서 데라우치를 습격하기로 작전방안을 세웠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행동에 옮길 직전에 왜놈경찰들이 안명근의 처소에 쳐들어 왔다. 그는 민모가  음모를 꾸몄으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민모의 밀고로 안명근은 12월에 평양에서 왜경에게 체포되었다. 뒤이어 군자금을 보관하던 배경진과 박만준 등도 왜경에게  붙잡혀 모두 서울로 압송되었다. 안명근은 형무소에 끌려가서 심문을 받을 때 남달리 당당하였다. “피고의 성명은 무엇인가?” “나는 할빈역에서 이토오를 격살한 안중근의사의 사촌동생인 안명근이다.” “그대는 무엇때문에 데라우치총독을 모살하려 하였느냐?” “데라우치는 우리나라를 멸망시킨 철천지 원쑤이다.그놈은 백번 죽여도 시원찮을 도적이다. 하지만 나는 데라우치총독을 죽일 계획을 꾸민 적은  없다.” “그대가 데라우치총독을 살해하려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대라.” “그 대답을 하기전에 당신들이 아무런 증거도 없이 무죄한 나를 체포했으니 그 체포 리유부터 밝혀야 한다.” 안명근이 혹시 데라우치를 살해하려 하지 않았을가 의심만 했을뿐 손에 아무런 인증물증도 쥐지 못한 법관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대는 나라 일을 구실삼아 백성들에게 모금하면서 강박적으로 남의 돈을 빼앗있으니 이것이 강도가 아니고 무엇이냐?” 경찰이 반문하자 안명근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고 맞받았다. “당신들은 우리 2천만동포들이 죽을지언정 뺏기지 않으려는 나라를 강제로 탈취했으니 이것이야말로 천하에 둘도 없는 강도들이다. 나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정의로운 일을 하려한 사람인데 어째서 나를 강도라 하는거냐?” 안명근은 심문실이 떠나갈듯 호통쳤다. 심문관은 안명근에게 더 따져물어야 그의 입에서 바라는 말이 한마디도 나올것이 없다는것을 깨닫고 그를 구류소로 끌어갔다. 이것이 이른바 안명근사건, 이른바 안악사건의 발단이다. 당시 일제는 안명근사건을 계기로 안악지방을 중심으로 160여 명의 감시대상자를 구금해 그 관련 여부를 캐면서, 18명에게 내란미수·모살미수 등의 혐의를 씌워 재판에 회부했고, 40여 명에 대해서는 거주를 제한했다. 결석재판에서 안명근은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안악 일대에 대한 정치적 탄압은 관서지방으로 확대되였고 이 과정에서 신민회 조직이 발각되였는데, 일제는 리승훈(李昇薰)·류동열(柳東說) 등 신민회 관계자들과 그외의 항일투사들이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에 대한 암살을 모의했다고 날조하여 기소했다. 이것이 바로 105인 사건이다. 안명근은 10년간 옥고를 치르고 출옥한 뒤,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길림성[吉林省] 이란현[依兰县] 팔호리(八湖里)에서 사망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였다. “우리의 이번 거사는 절대로 실패하지 않을것입니다. 성공할 계획을 치밀하게 짜놨습니다.” “아무렴, 우리 광복회가 하는 일인만큼 성공할 파악이 십분 있을 때만 손을 써야합니다. 데라우치놈은 교활하기 짝이없는 놈입니다. 이토오가 안중근의사에게 격살된 뒤 겁을 집어먹은 데라우치놈은 공개장소에 얼굴을 내밀지 않고 행동도 일체 극비에 부치고있습니다. 서뿔리 덤벼들지 마십시오.” “명심하겠습니다. 헌데 부탁한 총은?” 리관구가 물었다. 박상진은 우재룡을 시켜서   권총 두자루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 두자루의 권총은 박상진이 1913년에 중국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구입해서 몰래 국내로 반입한것이였다. 총사령한테서 권총을 받은 리관구는 그 권총을 함께 온 성락규(成乐奎)와 조성환(曹成焕)에게 각각 한자루씩 넘겨주었다. 이 두 사람은 6월달에 광복회에 입회한 새회원들이였다. 성락규는 황해도 장양면 순막리 출신이고 조성환은 신천군 남부면 마산리 출신이였다.  박상진의 지령을 받은 그들은 서울 경기지역에 잠입하여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를 암살할 기회를 엿보았다. 그런데 석달동안이나 데라우치가 나타나기를 눈빠지게 기다렸지만 데라우치놈은 총독부안에 들어박혀 옴짝달삭하지 않았다.그들로서는 경비가 삼엄한 총독부안으로 쳐들어가는것이 불가능한 처지여서 도무지 손을 쓸 기회가 없었다. 참으로 분통이 터져 죽을 지경이였다.  데라우치총독놈은 명이 길었던지 이해 10월달에 일본정부의 발령을 받고 비밀리에 본국으로 소환되였다. 그 후임으로 일본 륙군대장 하세가와(长谷川好道)가 조선총독으로 임명되였다. 데라우치는 본국에 돌아간 뒤 일제가 조선을 삼키는데 큰 공을 세운것을 정치자본으로하여  일본국의 총리대신으로 발탁됐던것이였다. 이토오 못지 않게 조선인민에게 용서받지 못할 큰 죄를 지은 데라우치놈을 없애치우지 못한 광복회원들은 너무도 분해서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이번 거사가 성사되지 못하자 박상진은 광복회에서 새로운 계획에 사용하기 위해 두사람에게 맡겼던 권총을 거둬들이기로 하였다. 권성욱(权成旭/권백초)이 성락규와 조성환한테서 권총을 받아다가 박상진에게 바쳤다.           18.악질친일주구 장승원을 처단                  때이른 장마비가 시도 때도 없이 지절지절 내렸다. 말이 칠월이지 아직 기온은 봄이나 다름없었다. 상덕태상회의 안채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비좁은 방안에는 삼복더위 못잖은 열기가 펄펄 끓었다. 위반죄로 대구 지방법원에서 징역형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박상진이 형을 마치고 출옥했던 것이였다. 광복회 총사령의 출옥을 축하하여 린근에 사는 광복회의 크고 작은 간부들이 한자리에 모였던것이다. 그중에서 왜경의 마수로부터 용케 벗어났던 채기중, 유창순,  림봉주, 강필순을 내놓고는 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온 사람들이였다. “총사령께서 출옥하셨으니 우리도 다시 행동을 전개해야지요.” 서로 오래간만에 만나 인사치레가 끝나자 채기중이 말했다. “아무렴, 잠시도 지체할수 없는 일이지요.” 박상진보다 한달 앞서 출옥한 홍우일이 맞장구를 쳤다. “이번에는 칠곡의 장관찰사부터 해치웁시다.” 박상진보다 한달 먼저 출옥한 김재열이 제의했다. 소위 장관찰사란 칠곡의 친일부호 장승원을 이르는 말이였다. “좋습니다. 이번 기회에 우리 민족과 왜놈들 모두에게 경종을 울리고 오랜 빚도 청산할 겸 장승원 그놈을 처단합시다.” 박상진이 저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부르쥐면서 결정을 내렸다. 장승원이라는 놈은 이름만 들어도 이가 갈리고 치가 떨렸다. 11년 전의 일이 아직도 머리속에 생생하다. 1905년 늦은 어느 봄날이였다. 박상진은 양정의숙에서 공부하다가 짬을 타서 스승 허위댁을 찾아갔었다. 당시 허위선생은 조정에서 비서승원(秘書承院)이란 높은 직무를 맡고계셨다. 두사람이 무릎을 맞대고 앉아서 한창 국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칠곡의 부호 장승원이 찾아왔다. 그는 허위의 고향이 칠곡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것을 알고 여러 쪽으로 연줄을 놓아 허위댁을 찾게 된것이였다.  수인사가 끝나자 허위선생이 물었다. “무슨 요긴한 일이 있어서 이 먼 곳을 찾아왔습니까?” 장승원이 허위선생의 앞에 무릎을 꿇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감, 이놈이 생기기는 이러해도 재물복은 있어서 돈을 적잖게 모았습네다.남들은 소인을 령남의 갑부라고들 일컸지요. 허지만 손에 억만금이 있은들 죽으면 한푼도 가져가지 못하는게 아닙니껴? 돈을 산데미같이 쌓아둔들  시골나부랑이야 어느때든 시골나부랭일수밖에요. “ “어느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것을 다는 가질 수 없는 일이지요.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를 잃는게 철리지요.” 허위가 대꾸했다. “천만 지당한 말씀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차지하겠다는것은 허망한 욕심이고 말굽쇼. 소생이 대감을 찾아뵙는 까닭도 바로 그 때문입니더.” “그건 무슨 뜻의 말씀이지요?” “소생은 가산의 반을 떼내서 대감께 바치고저합니더. 부디 좋은 일에 쓰시고 그 대신 소신에게 벼슬 한자리만 추천해 주십쇼.” “벼슬살이가 탐나신가요?” “그러하옵네다.. 고을의 수령따위야 대감을 찾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얻을수 있겠지만  경상관찰사쯤을 할라니깨...” 장승원은 허위의 눈치를 슬슬 살피면서 뒤의 말을 삼키였다. “닥쳐라 이놈! 감히 뉘 앞에서 함부로 매관매직을 운운하는거냐?” 왕산 허위가 대노하여 목에 핏대를 세우며 질책했다. “그런 일로 찾아왔으면 당장 물러나라!” 허위가 분기를 못이겨 주먹을 불끈 쥐며 호통치자 장승원은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면서 허리를 굽혀 절을 하고 엉금엉금 물러났다. 그러나 그 길로 순순히 집에 돌아갈 장승원이 아니였다. 백번 찍어서 넘어가지 않는 나무가 없다지 않나? 지금 허위가 청관인척하지만 세상에 진정한 청관이 어디있담? 황금에 흑사심이라는데 허위인들 다르겠나? 사랑에서 물러난 그는 정원에 서있는 나무에 기대서서 다시 허위를 만나 말을 건닐 방도롤 찾고 있었다. 사랑방안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던 박상진은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장승원의 낯짝에 침을 뱉지 못한 것이 분했지만 생각을 고쳐보니 장승원을 잘만 리용하면 화가 복으로 전화될수도 있을것 같았다.  “스승님 좀 고정하십시오 매관매직이 어디 어제 오늘에 성행한 일입니까? 어지러운 이 세월에 장승원같은 부호들이  벼슬을 사려면 누구를 찾아간들 못사내겠습니까?” “자네는 나더러 어쩌라는말이냐?” “장승원의 청을 받아주십시오.” “뭐라구? 고헌, 자네까지 어찌...” 성품이 대쪽같은 허위는 자신이 그렇게도 믿고 사랑하는 제자의 입에서 엉뚱한 말이 나오자 커다란 충격을 받았는지 하던 말을 더 잇지 못하고 박상진의 얼굴을 뚫어질듯  쏘아보았다. “스승님, 소생은 그 돈을 사부님께서 뢰물로 받으시라고 권하는것이 아닙니다.소생은 사부님께서 그 돈을 받아뒀다가 장차 의병을 일으키실 때  군자금으로 쓰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옵니다.”  “음, 자네 말에 일리가 있긴 하다마는...” “기울어진 국가를 바로 세우고 왜놈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자면 무장투쟁이 아니고선 불가능한 일이라고 스승님께서 늘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거야 물론이지.” “장차 의병운동을 하시려면 얼마나 많은 군자금이 수요되겠습니까?” “자네의 뜻을 알만하네. 후일 장승원을 만나면 다시 의론해보자꾸나.” 박상진이 밖으로 나가  장승원을 데리고 다시 사랑으로 들어왔다. 허위가 생각을 고치고 뢰물을 받을 의사가 있다고 짐작한 정승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대감, 소생에게 경상관찰사만 추천해주신다면 현금 20만원을 대감님께 에누리없이 드리겠십니다요.” 허위와 박상진이 생각해보니 20만원이란 당시 입쌀을 2천가마니도 더 살수 있는 거금이였다. “좋소. 벼슬살이가 그토록 소원이라면 내 상감께 여쭈어서 당신의 소원을 성취시켜 드리리다. 그 대신에...” “예? 대신에?” “그 대신에 20만원을  반드시 지불해야한다는것만은 명심하십시오.” “그야 어디 더 이를 데 있겠습니껴? 전답을 요구하신다면 땅문서를 드리고 현찰을 요구하시면 현찰을 드리겠십니다요.” “둘 다 아니웨다.” “그러문요?” “내가 지금 국록을 먹으면서 이런 말을 하기는 심히 부끄러운 일이오나 요즘 나라형편이 말이 아니웨다. 소위 한일협약이란 게 작년 8월에 발표된 것을 아시겠지요?” “예, 소생도 듣긴 들었십니더. 그런데요?” “돈 액수가 얼마라고 하셨지요?” “20만원입니다요.” “20만원이라... 내 그 돈을 장차 나라를 위해 요긴한데 써야겠소. 당장은 쓸곳이 정해지지 않았으니 령감이 잠시 보관해 두시오. 일제를 이땅에서 몰아내고 국권을 찾기 위해 돈이 급히 필요할 때 어느 때든 내 령감을 찾아가리다. 그때엔 지체말고 돈을 내놔야 하오. 리자까지 듬직이 붙여서 말이오. 내 뜻을 아시겠소? 허허허.” “알다 뿐입니껴? 소생이 오늘처럼 기쁘기는 난생 처음입네다. 대감의 장한 뜻을 어이 모르시겠습니껴?” “그럼 됐습니다. 집에  돌아가서 기쁜 소식이나 기다리시오.” “고맙십니다요. 대감의 하해같은 은덕은 자손만대 잊지 않겠십니다요.” “스승님, 빈 말은 증거로 되지 않으니 수결을 한 문서라도 한장 만들어둬야 되지 않겠습니까?” “남아일언중천금(男儿一言重千金)이요 일구이언 (一口二言)은 이부지자(二夫之子)라 했거늘 문서따위를 만들 필요가 따로 있겠나? 그렇지 않소? 장관찰사?” “그러구말구요.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소생이 허대감 주선으로 경상관찰사가 되였다는 소문을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알게 될텐데 소생이 언감생심 훼약을 하겠십니껴?”  장승원은 허리가 부러지도록 굽석굽석 절을 하고 돌아갔다.  허위의 천거로 경상관찰사에 오른  장승원은 코대가 하늘꼭대기까지 올라 거들먹거렸다. 장승원은 관찰사로 되기 전에는 20만원이 아니라 더 많은 거금을 써서라도 벼슬을 사고 싶었는데 정작 그렇게  바라던 벼슬자리에 올라 앉으니 돈 한푼을 내놓기도 아까웠다. 허위가 조정에 사표를 내고 의병을 일으키자 그는 어느날 허위가 문득 찾아와서 돈을 내놓으라 할지 몰라서 날마다 가슴을 조였었다. 그러다가 의병장 허위가 체포되였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기뻐서 막 춤이라도 덩실덩실 추고싶었다. 그 뒤 허위가 처형되고 경술국치까지 맞고나니 그놈은 일제에게 굽신거리면서 제세상이 되였노라 더욱 기세를 부렸다. “후유, 이제야 내가 베개를 높이고 발편잠을 자게 되였구나. 그놈의 허위가 없어졌으니 이제 누가 감히 나더러 돈을 내라 한단말인가? 동전 한푼도 안돼. 어림도 없구말구.”  허나 공은 닦은대로 가고 죄는 지은 대로 간다는 속담을 그놈은 가맣게 잊고있었다. “장승원이 진 죄가 어디 그뿐입니까?  그자는 이왕( 경술국치후 왜놈들에 의해 폐위되여 이왕으로 격하되여 왕궁에 유폐된 순종황제)전하의 토지까지 사취했답니다.”  박상진의 말에 이어 홍우일과 채기중이 말하였다. “그건 총독부에서 토지조사를 할 때 저지른 일을 말씀하는 것이지요?” 박상진과 함께 출옥한 강순필이 물었다. “그자의 보복이 두려워서 다들 입을 다물고 있으니 그렇지, 그 내막을 모르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놈들이 토지조사를 하는 목적이 백성들의 피를 말리자는것인데 놈들은 선심을 베푸는 척 하면서 친일하는 지주놈들한테만 특혜를 베풀었지요. 그놈들은 왜놈들한테 알랑거리며 더 많은 땅을 차지하고...” “그 일에 앞장섰던 놈이 바로 장승원이겠지요.” “그야 더 이를데 있습니까?” 장승원의 죄악을 들추다가 채기중이 화제를 돌렸다. “총사령님, 이번에는 절대 실수가 없도록 권총부터 점검해야겠습니다.” “그놈의 권총에 귀신이 붙은것은 아닐가?” 유창순이 들릴락말락 중얼거렸다. 데라우치총독을 사살하지 못한 뒤 권백초는 그 총을 가지고 두번이나 장승원의 집을 찾아갔었지만 총을 사용하는데 서툴어서 성공하지 못했었다. “좋습니다. 이번에는 거사하기 전에 총기부터 철저히 점검합시다. 외진 곳에 가서 발사시험도 몇차례 해보구요...” “물론 그래야지요.”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해야 합니다... 어떻습니까? 이번 임무는 채기중동지가 책임지고 류창순, 림봉주, 강필순 세 동지가 실행을  맡아주십시오.” 박상진이 명령했다. “좋습니다. 이 세동지가 나서면 반드시 성사할 것입니다.” 채기중도 동의했다. “거사후에는 왜경과 친일분자 그리고 우리 백성 모두에게 경각성을 일깨워줘야 하니까 이 경고문을 눈에 잘 띄는 곳에 붙여두십시오.”  박상진이 안주머니에서 이 적힌 종이를 꺼내 채기중에게 보이며 말했다. “혹시 이로 인하여 우리 광복회의 정체가 백일하에 드러나서 금후 활동에 어려움이 있을까봐 걱정입니다.” 채기중이 주저했다. “저도 그점을 고려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지금은 총독부의 악랄한 리간정책에 휘말린 일부 백성들이 놈들과 감히 맞서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이제 더 늦기전에 우리 대한광복회의 정체를 만천하에 당당하게 알려줘야 우리 백성들이 조국의 앞날에 대해 신심을 가지게 될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합니까?” “지당한 말씀입니다.그동안 우리가 우편을 통해 배포한 경고문이 어디 한두곳입니까? 이젠 단순한 경고문만으로는 위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총사령의 말씀대로 놈들에게 직격탄을 퍼붑시다.”  성질이 괄괄한 강순필이 대뜸 동의했다. “동지들의 뜻이 다 그렇다면 저도 동의합니다. 그런데 내용이 어떤지 한번 봅시다.”  채시중도 급기야 동의했다. “모두 한번 읽어보십시오.” 박상진이 한지에 붓으로 쓴 고시문을  채시중에게 넘겨주었다.                   고 시 문(告示文)    오직 나라를 찾고자 함은 하늘과 인간의 뜻이 같거늘  너는 어이 나라와 백성을 팔아 네 리속만 챙기려 하는가?  이제 너의 큰 죄를 꾸짖고 우리 동포에게 경고하노라.                              꾸짖고 경고하는 자_ 광복회   “됐습니다. 이 고시문을 읽은 사람이면 우리 광복회가 사심이 있어서 장승원을 처단한게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될것이고 또 우리 광복회의 뜻을 거역하는 자의 끝장은 이러하다는 경고도 충분히 담겨있으니까요.” 채기중이 말했다. “더 필요한 것은 없습니까?”  박상진이 유창순, 림봉주, 강순필의 얼굴을 한사람 한사람씩 번갈아 보면서 물었다. “이젠 만단의 준비가 되였습니다.” “장승원의 집이 대궐같이 크고 화려해서 자칫하면 길을 오낄수 있다던데 각별히 류의하십시오.” 박상진이 그들을 바래주면서 정중하게 부탁했다. “장승원의 소작인가운데 우리사람이 있습니다.그분이 장승원의 주택구조를 거울같이 환히 알고있어서 길을 오끼거나 기회를 놓지는 실수는 절대 하지 않을것입니다.”  “채기중동지는 무슨 일이고 침착하게 하는 분이니 마음이 놓입니다만 속담에 고 했으니 각별히 신중하십시오.”  “념려마십시오. 좋은 소식을 가져다드릴테니까.”  “들리는 말에 의하면 장승원의 둘째 아들 장직상이란 놈은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군수벼슬도 내여놓고 칠곡에 있는 제 아비집에 들여박혀있다던데 그점도 류의하십시오.” “예. 그점도 명심하겠습니다.” 박상진은 믿음에 찬 눈길로 그들을 바래며 손을 으스러지게 잡았다.장승원 처단은 채기중이 주도했으며 강순필(姜順必),유창순(庾昌淳)이 함께 가담했다.채기중은 1917년 음력 9월 25일 자신이 가지고있던 권총과 박상진으로부터 받은 권총 1정을 가지고 장승원의 집에서 10리쯤 떨어진 주막에 숙소를 정하였다.  채기중은 먼저 려행객으로 가장하고 장승원의 집을 찾아가서 하루동안 그집에서 숙박하면서 정황을 파악하였다.다음날 채기중은 석유병을 준비했다.이것은 거사를 치른 뒤에 장승원이 거처하는 집을 태워버리기 위해서였다.세사람은 구체적인 임무를 분담했는데 채기중과 강순필은 장승원을 처단하고 유창순은 장승원의 집을 소각하기로 결정했었다. 그들이 장승원의 집을 찾아갔을때는 늦가을의 비가 구질구질 내리였다.채기중과 강순필은 장승원이 들어있는 사랑방문을 열었다. 마침 장승원이 방에 앉아있었다.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 그들은 두말없이 장승원을 향해 권총을 갈겼다.아무런 방비도 없었던 장승원은 머리와 목,왼쪽 무릎 등을 명중당해 즉사하였다. 그러나 장승원의 집을 소각하는 일은 성공하지 못하였다.시간이 급박한데다가 비가 많이 내려서 불이 잘붙지 않았기때문이였다. 채기중은 이 거사가 대한광복회에서 실행한것임을 세상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장승원의 시체옆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겨놓고 급히 탈출하였다.              曰維光復 天人是符  聲此大罪 戒我同胞  聲戒人 光復會員 (조국광복을 하자는 것은 하늘과 사람의 같은 뜻이니 이 큰 죄를 성토하여 우리 동포를 경계하노라)  경계하는 사람  광복회원   거사는 순리롭게 이뤄졌다. 대궐같은 집을 차지하고 살면서 폭군같은 권세를 누리며 악한 짓이란 악한 짓은 빠짐없이 다하던 친일악질부호 장승원에게 대한광복회는 민족의 이름으로, 조국의 이름으로 더러운 삶을 끝내주었다. 이 뜻깊은 날이 바로 1916년 11월 10일이였다.장승원 처단사건은 대한광복회의 의협투쟁에 있어서 가장 대표적인 활동이였고 친일세력에게 큰 경각심을 일으킨 사건이기도 하였다.                                   19.가장 위험한 곳에 남아   민족반역자 장승원의 처단은 온 삼천리강토를 펄펄 끓게 하였다. 백성들은 몇몇이 한자리에 모이기만하면 광복회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조국독립에 대한 희망에 부풀었다. 이번 사건으로 하여 크게 놀란것은 일본총독부였다. 그들은 처음 광복회의 삐라나 고시장을 보고서 그것은 몇몇 강도들이 부호들의 재물을 우려내기 위한 일종의 공갈수단이라  여기고 별로 신경을 도사리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들은 경상도의 관찰사라는 높은 직위에 있는 거물급의 앞잡이가 사살되자 사태의 엄중성을 깊이 깨달았다. 놈들은 급기야 광복회라는것이 결코 몇몇 강도나 불한당들의 무리가 아니고 하나의 거대한 반일무장단체라는것을 의식했다. 총독부에서는 헌병 경찰을 총동원해 광복회의 낌새를 맡기에 광분하였다. 왜경들은 의복차림이나 행동이 조금만 의심스러운 사람을 봐도 경찰서로 끌고가서 심문을 하였다. 상덕태상회의 주인인 박상진도 차츰 놈들의 의심을 받게 되였다.박상진이 권총을 구입하다가 탄로났을 때만하여도 그가 대형상회의 주인이니 사사로이 권총을 사들이는것을 그저 위법행위로만 인정하고 반년간의 감금으로 징벌수위를 정했었는데 그 뒤에 장승원이 살해되자 놈들은 이번 사건이 박상진과 관련이 있을것이라고 짐작했던 것이였다.  상덕태상회의 주위에는 행동거지가 수상한 사람들이 밤낮없이 얼씬거렸다. 자신의 신변에 위험이 덮쳐들고 있다는것을 감지한 박상진은  상회에 앉아있을수가 없었다. 왜경들의 마수가 어느때 자기에게 덮쳐들지 모를 일이였다. 그뿐만이 아니였다.광복회원들의 련락거점인 상덕태상회에 동지들이 찾아오다가 불의의 변을 당할수도 있기 때문이였다. 박상진은 왜경들의 눈길을 피해 한밤중에 몰래 상회를 뛰쳐나왔다.  어디를 갈가 잠시 망설이던 그는 변복을 하고 인력거에 올라 역전으로 갔다. 기차에 올라 안동에 도착한 그는 시골에 사는 광복회원인 리동흠의 댁을 찾아갔다. “총사령께서 어인 일로 아무 기별도 없이 저의 집을 찾아왔습니까?” 리동흠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부득이한 사정이 생겨서 자네 신세를 지러 왔네.” “어서 집안에 들어갑시다.” 리동흠은 매우 반가워하면서 박상진을 집안으로 이끌었다.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박상진이 방안에 들어와 앉자 리동흠이 급히 물었다. “일본헌병들이 이젠 나까지 의심하고 있다네. 헌병대에서는 지금 상덕태상회의 주위에 밀정들을 파견하여 우리의 일거일동을 감시하고있다네. 잠시 자네 집에 피신을 할가해서 찾아왔다네.” “총사령께서 마침 잘찾아왔습니다. 저의 집에 숨어계시면 안전할것입니다. 물론 불편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 “고맙네.” 박상진은 빙그레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리동흠이가 의병장의 후손답게 어엿이  성장한것이 무척 대견스러웠다. 리동흠의 집은 안동군 도산면 토계동에 있었다. 리동흠은 조선 말기의 학자이자 일제가 단발령을 내리자 례안에서 의병투쟁을 조직한 의병장 리만도의 손자였다. 경술국치를 당한 뒤 리만도는 나라 잃은 서러움을 참지 못해 유서를 남기고 24일동안 단식하여 목숨을 끊은 애국지사였다. 그는 왕산 허위의 백씨 빙산 허훈과도 절친한 사이라 허위의 생가인 선산군 구미면 임은리에 자주 찾아왔기에 박상진이 무척 존경하던 분이였다.  리동흠, 리종흠 형제는 박상진을  장기적으로 그곳에 은신하라고 권하였다. 당분간 적당한 피신처를 구하지 못한 박상진은 그들의 권고를 따르기로 하였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리동흠 형제는 뒤뜰에 있는 대나무숲속에 땅굴을 파고 움집을 만들었다. “상황이 엄중할 때 총사령님께선 어려운대로 이 움막에서 계십시오. 외부와의 련계는 우리 두형제가 전적으로 맡아하겠습니다.” 리동흠이 말하였다. 박상진은 이날부터 어둡고 축축한 움안에서 어려운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서울 남대문밖에 있는 남일려관은 어느때 와봐도 찾아오는 손님이 많지 않았다. 려관주인 어재하는 체구가 남달리 크고 치마를 둘러서 녀자이지 남자같이 성품이 활달한 녀장부였다. 어재하는 명색이 려관을 꾸리는 것이지 려관의 수입따위에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 녀인이였다. 그녀가 고용한 려관의 사환군들도 다 광복회의 회원들이였다. 어재하는 자기의 려관을 대한광복회의 비밀거점으로 삼고 광복회의 일에만 모든 정력을 몰붓고있었다.   검은 안경을 끼고 중절모자를 쓰고 서울로 올라간 박상진은 남일려관에 들어가서 주인 어재하를 찾았다. “주인마님께서 여기 안계십니다.” 어재하가 외출했을 때 려관안팎의 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정서방이 박상진을 알아보고 말하였다. “마님께서 약속을 어길리가 없는데...” 박상진이 고개를 기웃거리자 정서방이 말했다. “마님께선  총사령께서 오시면 이걸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마님께서 지난달에 새로 구입한 집인데 주변환경이 좋아서 손님께서 며칠을 묶어도 안전하다시면서...” 정서방이 집주소와 그 주변의 략도가 그려져있는  종이장을 박상진의 앞에 내밀면서 말했다. 박상진이 략도를 보니 어재하가 마련한 새집은 이전에 자기의 양부가 살던 집에서 골목 하나 건너면 다달을수 있는 곳에 있었다. 주위 지형에 익숙한 그는 남에게 길을 묻지 않고서도 어재하가 새로 잡아놓은 집을 어렵잖게 찾을 수 있었다. 이 집은 행인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외진 곳에 있었다. 그는 광복회의 회원들의 안전한 비밀모임장소를 구하는것이 급선무라  생각하고 수중에 있는 돈을 털어서 이 집을 장만했던것이였다. 박상진이 대문안에 들어서자 어재하가 반기며 말하였다. “이제야 오셨군요. 다들 모여서 총사령이 오시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있습니다.” “몇군데 시급히 처리할  일을 마무리짓고 오느라 그만 늦었습니다.” 그날 회의에 모인 사람들로는 어재하, 권영목, 김노경, 조재하, 권영만 등 주로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이였다.그들은 이번 모임이 끝나면 곧바로 만주로 진출할 광복회원들이였다. 장승원을 처단한 후 일본 헌병, 경찰들의 마수가 시시각각 좁혀오고 있음을 감지한 대한광복회에서 자구책으로 마련한것이 이민의 이름을 빌어 대한광복회의 만주로의 전략적 이동계획이였다. 이 일을 먼저 제기한 사람은 어재하였다. 어재하는 보기보다 생각이 치밀하고 상냥한 녀인이였다. 그는 자기보나 손아래인 박상진을 인격적으로는 존경하지만 마음속으로 친동생같이 아끼고 사랑하였다. 만주로 떠나는 동지들을 위한 환송회가 끝나자 어재하가 박상진을 보고 말하였다. “안동 리동흠의 집에서 그냥 숨어 지낼수는 없는 일입니다. 총사령께서도 이 기회에 활동무대를 아예 만주로 옮기는게 어떻겠습니까?” “만주에는 내가 없어도  우리 광복회의 동지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서간도, 북간도 그리고 멀리 로령 연해주까지......” “만주에 동지들이 많아서 나쁠건 없잖아요? 부사령 김좌진과는 의형제간이겠다 성산 허혁선생과 허위선생의 유족들도 있지 않습니까? 총사령께서는 1911년과 1912년의 극심한 가물을 이겨내도록 지원했고 경학사를 부민단,한족회로 확대 개편하였으며 거기에다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고있습니다…. 총사령께서는 그들을 위해 할일을 다 하신것입니다. 총사령께서 만주로 가시면 모두 환영할것입니다.” “어재하동지가 저를 이렇게 관심해주시는것은 한없이 고맙습니다만 저는 한동안 국내에 남아있어야 합니다. 아시다싶이 제가 이곳을 떠나게 되면 국내에서의 우리 광복회는 조직자체가 흔들리게 될것입니다. 만약 그리 된다면 무엇보다 광복회에 군자금의 조달이 어려워집니다. 군자금의 조달이 잘 되지 않을 경우를 생각해보세요. 만주에 있는 우리 젊은이들의 처지가 어찌되겠습니까? 전에 신흥무관학교로 보낸 젊은이들은 놔두더라도 래일부터 당장 만주로 떠나는 동지들은 장차 누굴 의지해야 합니까? 이곳이 만주땅에서보다 반일투쟁을 벌이기가 훨씬 어렵고 생명의 위협이 그림자같이 따른다는것을 저도 왜 모르겠습니까? 그렇다고 우리 광복회원들이 다 본국을 떠날수는 없습니다. 이곳이 가장 위험한곳이니 총사령인 제가 남아있어야지요. 남아있으면서 더 많은 애국청년들을 동원하여  만주로 보내고 군자금을 모아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그 병사들을  무장시켜서 일본군과 당당히 전투를 벌여야지요. 어동지, 그렇지 않습니까? “  “총사령은 이미 일본헌병경찰들의 추적목표로 되였습니다. 총사령께서  국내에 남아계시다가 혹 잘못되는 날이면...” 어재하는 하던 말을 끊었다. 불길한 말을 입에 올리기가 무서웠다. 국내에서 일제의 탄압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광복회원들의 행동이 날로 어려워지는 상황을 감안한 어재하는 박상진의 신변안전이 너무 걱정돼서 사정을 하다싶이 박상진을 말렸다. “이런 것 저런 것 다 고려하다간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옛말에 진인사 대천명(尽人事待天命)이라고 했거늘 나의 운명은 하늘의 뜻에 맡기렵니다.”  박상진은 젊은 광복단원들의 생명안전을 위해 그들의 만주진출을 적극 권장하면서 자신은 만주로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본국에 남아있으면 신변에 위험이 시시각각 따랐지만 그는 본국을 떠날수가 없었다. 국내에서 그가 해야할 일이 너무나도 많이 남아있었기때문이였다.  “동지들은 만주땅으로 들어간 뒤 드넓은 만주벌판을 활무대로하여 일본침략자들을 호되게 족치십시요.”  그날밤, 박상진은 만주로 진출할 권영목, 김노경, 조재하, 권영만 등 동지들에게 몸소 지니고 온 군자금을 나눠주면서 그들의 장원한 도모를 격려해주었다.   20.도고면장 박용하를 처단하라!    여느 때와 달리 오늘의 회의 장소는 영주에 있는 대동상점의 안집 깊숙히 들어앉은 밀실로 정해졌다. 영주의 대동상점도 대구에 있는 상덕태상회와 마찬가지로 곡물상을 경영하고 있었다. 박상진은 이 상회에 자본의 일부를 출자하고 대동상회를 상덕태상회의 영주지점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1914년 군면통합시에 영주, 풍기, 순흥의 3개군을 영주로 통합하여 영주군이 된 만큼 영주에 있는 대동상회는 채기중이 사는 풍기와는 한나절 거리에 있었고 박상진이 은신하고있는 리동흠의 집에서도 멀지 않았다.  정기적인 회의는 아니지만 각 도의 지부장들을 다 불렀는데 참석자가 예상외로 적어서 회의를 통지한 채기중은 안절부절이였다. 정한 시간이 되였는데 모인 사람은 박상진과 채기중 외에 충청지부장 김한종, 강원지부장 김동호, 경기지부장 김선호와 전라도에서 올라온 한훈뿐이였다.  “함경도와 평안도에도 통지를 했는데 제 시간에 온 동지들은 우리 몇뿐입니다.” 회의에 참석한 인원이 예상보다 춸씬 적자 채기중은 그것이 자신의 불찰같아 박상진을 보고 변명삼아 말하였다. “혹시 기별이 닿지 못했을 수도 있고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결석할수도 있겠지요.” 박상진이 대수롭잖은 일이라는듯이 채기중을 위로했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기보다 요즘 일본헌병과 순사들의 기찰이 무척 심하다보니...” 한훈이 한마디 끼여들었다. 그는 원래 풍기광복단의 일원이였는데 대한광복회가 성립된 뒤 전라도에 내려가서 광복회원들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이날 그는 전라도지부장 리병찬을 대신하여 회의에 참석했는데 나이가 겨우 스물여덟인 열혈청년이였다. “그렇다면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는 일이지요...예, 밖에 누가 있느냐?”  박상진이 문밖을 향해 말했다. “예, 어르신!” “됐다. 준비한 주안상을 들여놓아라.” “무슨 주안상까지...” 한훈이 생각밖에 주안상을 차린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래였다. “오늘은 장승원을 처단한것을 자축하는 모임이고해서  조촐한 주안상을 마련했습니다. 먼저 요기부터 하시면서 얘기를 나누도록 합시다.” 박상진은 상에 둘러앉은 매 사람에게 차례로 약주를 권했다.  “총사령께서 평소에 안차리던 주안상까지 차리신걸 보니 뭔가 다른 특별한 의미가 있는게 아닙니까?”  경기지부장 김선호가 정색을 하고 물었다. “사실 이 자리는 김경태, 림봉주, 강순필 세동지의 의거를 축하하는 모임입니다. 그런데 그분들은 여기로 오다가 밀정들이 뒤따르는 바람에 놈들을 뿌리치고 은신처로 피했습니다. 부득이한 사정에 의해  오늘 주인공들을 모시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세동지들이 성사할 수 있도록 보살피신 채기중동지가 참석했습니다. 그 동지들의 의거를 축하하고 우리 광복회의 건전한 발전을 기원하여 이 술을 듭시다.”   “대한광복회의 무궁무진한 발전을 위하여.”  광복회원들은 격동된 마음으로 술을 마셨다. 이윽고 박상진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한훈동지, 요즘 기찰이 무척 심하다는게 사실입니까?” “예, 일본 관헌들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광복단원들을 잡기에 미쳐났지요.” “우리가 거사하기 전에 선분을 밝히는가 마는가를 주저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부득이한 서정에서 그렇게 했습니다. 우리 광복회가 모금에 나섰지만 친일부호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그러나 장승원을 처단하자 온 나라 백성들이 흥분하지 않았습니까? ... 중국에서는 자국에서의 봉건군주제도를 뒤엎는 혁명에도 승리했습니다. 우리는 외적을 물리치는 독립운동을 하기 때문에 백성들의 지지를 받기가 한결 쉽습니다. 장승원을 처단한것은 반일투쟁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이제 친일악질들을 계속 처단하면 왜놈들에게 달라붙는 친일파들이 날로 적어질것입니다. 우리의 투쟁은 간고하지만 반드시 승리하고야 말것입니다.”  “총사령의 말씀에 저도 동감입니다. 이제 전형적인 악질분자 몇놈을 더 처단하면 어떻겠습니까?” 충청지부장 김한종이 좌중에 물었다. “충청지부장께선 어느 놈을 먼저 처단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도고면의 박용하부터 처단합시다. 이놈은 어떤 모로 봐선 장승원보다 더한 악질분자입니다. 박용하는 왜놈들의 세력을 등대고 도고면의 토지를 몽땅 제놈의 소유로 만들어놓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광복회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러 가니 이놈은 코방귀만 핑핑  뀌면서 도리어 제놈이 우리를 경찰에 고발하겠다고 으름장까지 놓았답니다.”  “그렇다면 박용하놈부터 처단합시다.” 김한종의 설명을 듣고난 박상진이 명령조로 말했다. “그놈을 처단하자면 무기가  있어야 되는데요.” “그건 념려하지 마십시오. 필요한 만큼 무기를 내드릴테니 념려말고 결행하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번 거사는 우리 충청지부에서 책임지고 완성하겠습니다.” “좋습니다. 동지들의 성공을 빕니다.” 박상진은 회의를 끝내고 움막으로 돌아온 뒤 무기를 보관하는 우재룡에게 권총 두 자루와 필요한 탄약을 충청지부로 보내게 하였다.  그런데 이 일을 성사시키기 전에 불상사가  벌어졌다. 광복단 내부에서 변절자가 나타났던것이다. 광복회를 전복하려고 날뛰는 왜경들이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거리마다 고시문 써붙여놓았다.                                                                      고시문    광복회와 광복단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자에게는 거액의 현상금을 지급하며 과거나 현재의 광복단원이더라도 헌병대를 찾아와 자수만 하면 이전에 진  죄를 일률로 묻지 않을뿐만 아니라 군청이나 면사무소 등에 공무원으로 채용하겠노라.   그뿐만이 아니였다.  경찰들은 광복단원을 숨겨주거나 광복단원인줄을 알면서도 경찰서에 신고하지 않은 자는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처자식과 형제자매까지 엄벌할 것이며 광복대원을 재워준 마을은 모조리 불태워버리겠다는 류언비어를 퍼뜨렸다. 이것은 왜경들이 의병을 토벌할 때 쓰던 상용수법이였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신돌석장군을 모해한 김상렬, 김상근형제의 끝장이 어떻다는것을 잘 알고 놈들의 꼬임수와 위협에 넘어가지 않았지만 의지가 나약한 자들중에는 왜놈들이 늘인 올가미에 걸려드는 자도 더러 있었다. 그중의 한놈이 바로 천안에 사는 리종국(李钟国)이였다.  리종국은 김한종이 지부장으로 있는 충청지부의 광복회원이였다.그는 광복회에 들면 당장 큰 일을 해낼 것 같아서 젊은 혈기에 광복회에 선뜻 가입했었는데 광복회원이 되고보니 원래의 생각과 같지 않았다. 말이 광복회원이지 그의 손에는 총 한자루도 차려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경솔히 광복회에 가입한 것을 몹시 후회하고 있었다.어느 날 장에 나갔다가 벽에 붙은 고시문을 보고 두려워서 몸서리를 치던 그놈은 몇날며칠동안 발편잠을 자지 못했다.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던 그는 몇번이나 망설이다가 급기야 천안경찰서로 찾아가고말았다. “리상, 무슨 볼일이 있어서 왔나?” 안면이 있는 한 헌병보조원이 친절하게 물었다. “자수하러 왔습니다.” “자네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여기 와서 자수를 해?” “이놈은 남의 꼬임에 빠져서 광복회라는 데 가입했댔습니다.” “뭐라고? 네놈이 광복단원이였다구?” 리종국과 안면이 있는 한 헌병보조원은 대방의 말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서 그를 쏘아보았다. “그러하옵니다.” “네놈이 광복단원이라? 다른 것도 아니고 어찌...” 그 헌병보조원은 대뜸 리동국을 경찰서장한테 데리고갔다. 천안경찰서장은 리동국이 원래 광복단원이였다는 말을 듣자 반가운듯 리동국의 두손을 움켜쥐면서 말했다. “자네 참 생각을 잘했네. 그까짓 광복회라는게 몇날이나 갈게라구. 자네가 자백을 했으니 이젠 우리 사람일세. 자네는 우리 경찰서를 도와 광복단원 토벌에 앞장서야겠네.”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럼 광복회에 대해 자네가 아는 것을 추호도 숨기지 말고 이실직고하게.” “예, 그..그렇게 하겠습니다.” 리동국은 왜놈 경찰한테 광복회와 광복단원들의 활동을 제가 아는것은 죄다 고아바쳤다. 경찰서장은 리동국에게 벼슬을 준다면서 일본경찰의 통역을 맡게하였다. 그리하여 리동국은 조국광복을 위해 생사를 같이하자고 다진 혁명동지들을 물어먹는 미친개로 전락하여  광복단원들을 체포하는 일에 앞장을 섰다.  1917년 12월 16일, 리동국의 밀고로 충청지부장 김한종이 가장 먼저 왜경들에게 체포되였다.  이튿날 박상진이 몸을 숨기고있는 리동흠의 움막에  우재룡이 찾아왔다. “총사령님, 충청지부장 김한종동지가 왜경들에게 체포되였습니다.” “뭐라구요? 좀 자상히 말씀하십시오.” “리동국이란 변절자의 밀고로인해 체포되였습니다...” “변절자의 밀고로요?” 박상진은 우재룡의 말을 듣고 자즈러질듯  놀랐다. “김한종에게 빌려준 권총은 어떻게 됐습니까?” 생명같이 귀중한 권총이 일본경찰의 손에 들어갔을까봐 걱정이 된 박상진이 급히 물었다. “김한종이 체포되기 직전에 정태복, 엄정섭 등 세 동지가 박용하를 처단할 비밀회의를 하고 권총과 탄약을 그 두동지에게 넘겨줬기에 잠시 마음을 놓을 수 있습니다. 이 며칠내에 박용하는 처단될것입니다.”  “변절자가 김한종동지를 물어먹었으니 충청지부의 다른 동지들의 신변안전도 보장이 없게 되였네요.충청지부의 동지들은 당장 련락지점을 옮겨야겠습니다.” “물론입니다.” “정동지와 엄동지를 만나거든 각별히 신중하고 십분 파악이 있을 때 행하라고 일러주십시오.” 박상진은 우재룡이 작별을 고할  때 다시 한번 당부했다.                           21.꿈밖의 비보                                                                                                                                        21.꿈밖의 비보 바로 이때 움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두 사람은 신경을 곤두 세우고 하던 말을 멈추었다. “으흠,흠,흠...” 움밖에서 다시 기침소리가 련거퍼 났다. “밖에 누가 왔소?” 박상진이 움문을 약간 열고 나직이 물었다. “예, 저 올시다.” 망을 보던 리동흠이 움앞에서 대답했다. “밖에 동정이 없으면 잠간 들어오십시오.” “아닙니다. 록동에 있는 총사령님의 본가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록동에서 사람이 왔다구요?” 박상진이 깜짝 놀라 반문했다. “예, 아마 급한 일이 있는가 봅니다.” “록동에서 급한 일이 없고서야 예까지 사람을 보낼 까닭이 없을텐데. 그사람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 “저 여기 있습니다. 어르신...” 길복이가 앞을 나서며 굽석 절을 했다. “아니 넌 길복이가 아니냐?” “예, 길복이옵니다.” “헌데 네가 무슨 일로...” “록동 정부인께서...” 정부인(贞夫人) 리씨는 박상진의 생모를 가리킨다. “무어라구? 어머님께서 어디 편찮으시냐?” “예, 병세가 아주 위중하십니다.” “아-니 뭐라고?” 박상진은 너무도 놀라 자리를 차고 벌떡 몸을 일으키면서 반문했다. “그 사이에 무슨 변고라도 생기지 않으셨는지...” 길복이는 감히 대답을 하지 못하고 옷자락을 만지락거리며 박상진의 눈치만 살폈다. 박상진이  길복이의 언행을 보니 생모께서 이미 운명을 하셨거나 아니면 목숨이 붙어있더라도 오늘래일하는 위중한 상태임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세상에 이런 불효가 어디 있나...” 박상진은 금세 온 몸에 맥이 빠져 쓰러질듯 바닥에 털썩 주저 앉고 말았다. “정부인께서 혹시 신병이 있으신데다가 아들을 오래동안 보지 못해서 일부러 부르신게 아닐까요?”  우재룡이 박상진을 안정시키려고 말했다. “아닙니다. 저의 어머님께서는 자식이 보고싶다고 큰일을 하는 아들을 댁에 부르실 그런 분이 절대 아닙니다.” 리동흠과 우재룡이 안위의 말을 많이 했으나 그 말들이 박상진의 귀에는 한마디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때까지 생부모와 양부모님들이 건재하신것을 자신의 큰 복으로 삼고 마음놓고 혁명투쟁을 해왔는데  이게 무슨 변인가? 생모께서 꿈에도 생각못한 병으로  쓰러졌다니 가슴이 마구 찢어질것만 같았다. 생모께서는 당신께서 시집와서 처음으로 낳은 귀여운 아들을 그것도 아직 피덩이나 다름없던 이 아들을 백날만에  큰집으로 양자를 보내셔야 했고 친아들을 남들앞에서 한번도 아들이라 불러보시지  못하고 사셨으니  가슴이 얼마나 아프셨을가? 내가 어머님께 너무나도 큰 불효를 저질렀구나. 비록 늦었지만 어머님께서 생존해 계실 때 찾아가 뵙고 어머님께 용서도 빌고 마음의 안위를 드려야겠다.  “록동에 다녀와야겠습니다.” 박상진이 두 사람을 보고 말하였다. “안됩니다. 총사령님, 지금은 불가합니다. 왜경들이 총사령을 잡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있는데 지금 총사령께서 록동으로 가신다면 왜경들의 마수에 걸릴 위험이 너무도 큽니다.”  우재룡이 걱정이 되어 극력으로 말렸다. “어머님을 뵙지 못하고 운명하시게 한다면 저의 불효는 평생토록 씻지 못할것입니다.  이제 떠나더라도 록동까지 가려면 사흘길이니 서둘러야 합니다.”  “총사령님을 잡겠다고 도처에 방을 걸어놓고 미쳐날뛰는 왜놈들이 이 기회를 놓지겠습니까?지금 록동 주위에는 놈들이 그물을 치고 기다맇 것입니다. 절대 가셔선 아니됩니다.”  리동흠이 울면서 말리였다. “예로부터 효는 충의 근본이라고 하였습니다. 부모님에게 불효한 사람이 어찌 나라에 충성할 수 있겠습니까? 내 이미 뜻을 정했으니 더 만류하지 마십시오.” 박상진은 칼로 베듯 잘라 말하였다. 총사령이 결단을 내린  이상 그들은 더 말릴 재간이 없었다.나라의 정승 판서도 친상을 당하면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서 3년동안 상복을 입고 선산을 지키는 것이 당시의 례법이였으니 무엇이라 만류할 수가 없었다. “총사령님, 부디부디 조심해서 속히 다녀오십시오.” 한번 가면 다시 만날 기약이 영영 없다는 것을 생각한 두사람은 샘솟는 눈물을 훔치며 박상진을 대문밖까지 배웅했다. 우재룡과 리동흠이 그렇게 우려하던 일은 끝내 벌어지고야 말았다. 박상진의 사가가 있는 록동마을 주변에는 며칠전부터 낯선 길손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았다. 보부상들이 줄줄이 마을로 들이닥치는가 하면 엿장수나 거지가 뻔질나게 마을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들의 행색을 눈여겨보면 그자들이 진정한 장사군이나 거지따위가 아님을 쉽게 알수 있었다. 그들은 총독부 경무국에서 파견한 탐정들이였다.  변절자 리동국은 대한광복회의 충청지부의 성원들을 물어먹은 외에 그는 대한광복회의 총사령이 박상진이란 것을 불었었다. 그리하여 일본헌병대에서는 박상진의 생가와 록동에 밀정을 파견하여 지키게 한 동시에 박상진에 대한 모든 재료를 수집하기에 미쳐날뛰였다.  마침 박상진의 생모의 병세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탐지한 경찰들은 박상진을 체포할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고 기뻐하였다. 그들은 사서삼경을 정통하고 효성이 지극한 박상진은 어떤 일이 발생하더라도 생모가 사는 록동에 나타나리라고 확신하고있었다. 유교를 숭상하고 사회적으로 명망이 높은 문한가문의 장자인 박상진이 자신의 신변안전을 고려해서 친상을 당하고도 눈감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였다. 헌병대장을 겸하고있는 경상북도 경무부장의 지시에 의해 경주수비대의 일본군과 헌병경찰 3백여명이 록동주변의 길목마다 철통같이 진을 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박상진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해질 무렵에 경주에 도착한 박상진은 친모가 이미 타계했다는 비보를 접했다. 해가 지고 날이 어두워지자 박상진은 발걸음을 다그쳤다. 그의 집까지는 아직 상당한 거리가 남아있었기 때문이였다. “어쩐지 몸이 으시시 떨리네요.” 주인의 뒤를 따르는 길복이가 불길한 생각이 들어서 나직막한 소리로 말하였다. “겨울철인데 밤날씨가 따스할 수야 있겠느냐?” 박상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재촉하면서 시답잖게 대답했다. “어르신, 록동에 이르시더라도 상청(丧厅)에는 들어가지 마십시오.” “어르신의 행적을 찾느라고 상덕태상회에도 밀정들의 발길이 끊기지 않습니다. 놈들이 정부인께서 별세한 소식을 이미 탐지했을텐대요.” “아무리 그러한들 아들된 도리에 제 한 목숨 부지하겠다고 상청에 들지 않는다는것이 어디 가당한 일이냐?” 밤이 이슥해서 록동의 생부집에 당도한 박상진은 곧바로 상청안으로 들어갔다. 흰천에 덮여있는 생모께서는 잠드신듯 고이 누워계셨다.  “어머님, 이 불효자 상진이가 이제야 왔습니다. 어머님, 눈을 뜨세요. 엉엉.” 박상진은 어머니의 시신우에 엎디여서 넉두리를 하며 슬피 울었다. “형님, 좀 진정하세요. 형님께서 나라를 구하는 큰일을 하시느라 못오신 것을 어머니께서 잘 리해하고계십니다. 먼길을 오시느라 로독이 심하실텐데 휴계실에 들어가서 잠시 쉬세요.” 박상진이 어머님의 령전에 술을 붓고 령전에 절을 올리고나서 일어날 념을 하지 않고 계속 실신한 사람같이 슬피 울자 세 동생이 말리였다. “너희들이나 들어가서 잠시 눈을 붙이거라. 나는 조금도 잠이 오지 않는다.” 박상진은 밤이 샐 때까지 령전에 꿇어앉아 어머니의 시신을 지켰다. 아침일찍 령전에 상식상을 올리고나서 박상진이 수없이 찾아오는 조객들을 접대하다나니 어느덧 한낮이 되였다. “꼼짝하지 말아! 죄인 박상진은 나와서 포승을 받아라!” 전신을 무장한 십여명의 헌병 경찰들이 상청으로 덮쳐들었다. 워낙 문상객이 많은 대가라 밤중에  서뿔리 쳐들어왔다가는 혼란한 틈에 목표를 잃어버리고 헛물을 켤것을 우려한  경찰들은 상가집주위를 이중삼중으로 에워싸고 온 밤을 밖에서 떨며 기다렸었다. 왜경들의 호령에 박상진은 추호도 당황하지 아니했다. 올 일이 끝내 찾아왔구나 하고 생각한 박상진은 침착하게 일어나서 놈들을 쏘아보았다. 헌병 경찰들이 그에게 포승을 지우려 하자 박상진은 천둥같이 호통쳤다.  “이놈들! 나는 죄인이 아니다. 어디서 함부로 무엄한 짓을 하느냐? 내게 죄가 있고 없는것은 너희들 대장한테 가서 밝히겠다. 내집에서 먹이는 말이 한필 있으니 나는 그 말을 타고 너희들이 가자는 곳으로 가겠다. 내 자의로 너희들을 따라가는 것이니 아무도 내 몸에 손을 대지 말아! “  박상진의 위엄에 기가 죽은 헌병경찰들은  가타부타 다른 말을 감히 내놓지 못하였다. 박상진은 어머니의 령전에 마지막 술을 올리고나서 태연하게 일어났다. 그는 몸에 입었던 상복을 벗어놓고 흰 바지 저고리를 갈아입었다. “아버님, 이 불효자는 아버님을 끝까지 모시지 못하고 떠나갑니다. 부디 옥체만강하십시오.” 박상진은 사색이 된 아버지앞에 꿇어앉아 하직인사를 올리고나서 동생들에게 후사를 부탁한 뒤  두루마기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 그는 생부인 전 부재학 박시규령감이 평소에 타던 백마에 올라 천천히 록동을 빠져나갔다. 그의 앞뒤에는 검은 옷차림의 수많은 일본수비대의 병사들이 겹겹이 에워쌌다. 그 광경은 마치 한마리의 백학이 창공으로 훨훨 날아가는데 뭇 까마귀떼가 지저귀면서 그 뒤를 따라가는것만 같았다.   김장쇠의 아들인 길복이가 견마잡이로 따라갔다. 이날이 바로 대한광복회 충청지부장 김한종이 체포된지 나흘 뒤인 1917년 12월 20일이였다.                                   22. 이어진 광복의 홰불                        총사령이 왜경에게 체포되고 뒤이어 경상도지역의 많은 광복대원들이 체포되였다. 채기중도 국내에서 반일투쟁을 벌이기가 어렵게 되자 놈들의 눈을 피해 중국 상해로 망명하려고 전라남도 목포로 갔다가 역시 그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헌병들에게 체포되였다. 그는 먼저 공주감옥에 감금되였다. 채기중은 일제경찰의 가혹한 심문과정과 재판과정에서도 의연하게 대처했다. 그는 옥에 갇히자 당시의 심경을 아래와 같은 시로 표현하였다.   爲復先王國 (옛 왕국을 회복하기 위해)   交來有義人 (의로운 사람들과 사귀어 왔네)   誓死貫天日 (죽겠노라 맹세가 하늘과 해를 뚫나니)   萬刑不讓身 (오만가지 형벌인들 몸을 사리랴.)   채기중은 후에 사형선고를 받고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되여있다가 1921년 8월에 영용하게 희생되였다.1963년에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单章)이 수여되였다.  조선땅에서의 대한광복회의  반일투쟁은 전례없는 침체기에 들어갔다. 그러나 박상진의사가 지핀 광복의 홰불은 꺼지지 않았다. 김한종은 일본경찰에게 체포되기 직전에 우재룡에게서 받았던 권총 두자루를 광복단원 장두환에게 맡겼었는데 장두환은 그 권총 두자루를 다시 행동대원인 정태복과 엄정섭에게 넘겨주어 박용하를 처단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김한종이 체포된 사실을 안 두사람은 김한종동지의 원쑤를 갚기 위해서라도 기어이 이번 일을 성사시키고야 말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들은 박용하를 처단하기 위해 아산으로 비밀리에 떠났다. 그러나 도고면장 박용하를 처단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였다.   일제의 사냥개로 완전히 변신한 박용하는 평소에 광복회의 활동을 탐지하여 일본 헌병경찰에게 고자질하는 매국행위를 일삼고있었다. 백성들의 원쑤로 된 박용하는  친일부호 장승원이 처단되자 놀란 나머지 자택에 대한 경비를 더욱 가강했다.그놈은 자기의 심복이자  처조카인 인원배로 하여금 경호원을 대신해서 그를 그림자같이 따라다니면서 신변보호를 맡게했던 것이였다.게다가 김한종이 체포된 뒤 광복회에서의 보복이 있을것을 두려워한 박용하는 웬만한 일에는 집문밖을 나서지 않았고 대문에도 경비를 물샐틈 없이 하였다. 박용하를 처단할 임무를 맡은 광복대원들은 기회를 포착하느라 여러날을 기다려야만 했다.   20여일이 지나도 광복회에서 아무런 보복행위가 없자 박용하는 긴장을 조금씩  풀고있었다. 그는 드문드문 문밖출입도 했는데 대문에 파수군이 없을 때도 더러 있었다. 드디여 광복대원들이 손을 쓸 기회가 찾아왔다. 이날은 1918년 1월 24일 음력으로 정사년 섣달 열이틀이였다.  광복단원인 림봉주와 김경태는 해가 진 뒤 박용하의 집 대문앞에 이르렀다. 마침 대문지기가 없자 정원안으로 몰래 숨어들어온 두사람은 곧바로 박용하가 거처하는 사랑방으로 쳐들어갔다. 그런데 그들이 방문을 열고보니 방안에 박용하는 보이지 않고 그의 호위를 맡은 인원배만 앉아있었다.  낯선 사람들이 갑자기 쳐들어오자 놀란 인원배가  물었다.  “당신들은 뭣하는 사람들이오?” “보면 몰라?” “여기가 뉘집인줄 알고 함부로 쳐들어왔나?.” “시끄럽다. 네놈은 도대체 어디서 굴러온 놈이냐?” “ 나는 인원배요.” “박면장과는 어떤 사이냐?”                                                                                                 “면장님은 내 고모부이신데 무슨 용무가 있으슈?” 대방이 강경하게 나오자 인원배는 누그러져서 고분고분 대답했다. “이게 뭔줄 알지? 이게 바로 권총이란게다. 내가 손가락만 한번 까딱하면 네놈의 목숨은 황천으로 날아간다는 것을 알겠지?” “예, 어르신...” “알만하면 우리를 당장 면장한테로 안내하거라.” 기겁을 한 인원배가 그들을 박용하가 들어있는 방으로 데려갔다. “뉘신데 이런 야밤에...” 대방이 만만한 상대가 아니란 것을 짐작한 박용하는 앉은걸음을 쳐서 뒤로 물러나면서 가까스로 물었다. “우리는 대한광복회의 지령원이다. 지난번에 받은 문서는 읽어봤겠지?” 림봉주가 물었다. “보, 보질 못했습니다. 정말입니다.” 박용하는 깜짝 놀란듯 펄쩍 뛰였다. “우리가 누구라고 또 잔꾀를 부리려는거냐?” “아닙니다. 저는 정말로 지령문을 본일이 없습니다.” “좋다, 그럼 지령문을 다시 보여주마. 김동지, 지령문을 지닌게 있으면 내놓으십시오.” “여기 있습니다.” 김경태가 호주머니에서 지령문이 적힌 종이장을 림봉주에게 건늬였다. “박용하, 이것이 바로 대한광복회의 지령문이다. 두눈을 똑바로 뜨고 읽어보아라!” 림봉주가 김경태한테서 받은 종이쪽지를 박용하의 앞에 내밀면서 말했다.                                  지령문 ...한일합방후 우리는 나라가 없어 유감스럽기 짝이 없다. 그대들은 안일을 탐하고 도식을 일삼고 있지만 우리는 국사를 회복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이 일을 수행하자면 군대양성이며 신식무기구입 등등 많은 군자금이 필요하다. 그대는 일만원을 내여놓아라.! 이것이 박용하 그대에게 배당된 금액이다. 만약 이에 불응하면 군률에 의해 처벌하겠다...                                                            대한광복회 지령원  0 0 0 인 지령문을 읽고난 박용하가 떠듬거리며 말했다. “다, 다 읽었습니다. 허지만  집에 현,현찰이 없습니다. 사, 사흘간 말미를 주십시오.예금한 돈을  찾아와서 일원도 모자라지 않게 바, 바치겠습니다. 참말입니다.저를 한번만 믿어주십시오.”  박용하의 속심을 손금같이 환히 들여다보고있는 광복단원들이 다시 그놈의 꼬임에 넘어갈 리는 만무하였다.  “닥쳐! 우리가 네놈의 잔꾀에 두번이나 속았는데 이제 더는 속지 않는다. 오늘 우리 광복대원들은 네놈에게 민족의 이름으로  형벌을 내린다. 달게 받아랏!” 벼락치는듯한 호령소리와 함께 두발의 총성이 울렸다. 땅!땅! 김경태와 림봉주가 박용하를 겨냥하여 각각 방아쇠를 당겼던것이였다. 한방은 가슴에 한방은 배를 관통했다. 곁에 있던 인원배는 총소리와 함께 쓰러진 박용하의 시체를 보고 기겁했다.  “ 어서 사형선고문을 붙여놓고 이 자리를 뜹시다.” 김경태가 재촉했다. 림봉주는 박용하가 군자금을 내놓지 않을 것을 알고 미리 사형선고문을 써가지고 왔던것이였다. 그는 사형선고문을 박용하가 거처하던 방앞의 처마에 매달았다.  박용하의 가족들은 광복대원들이 쳐들어온 것도 모르고있다가 사랑방에서 난데 없는 총소리가 울리자 놀라 머리를 부등켜안고 몸을 숨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윽고 정원안에 아무런 동정이 없자 박용하의 가족들은 살금살금 밖으로 나와 집주인을 찾아갔다. 그런데 박용하가 있던 집앞에 이르니 처마끝에 커다란 종이장이 매달려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가까이 가 보니 대한광복회의 사형선고문이였다.                                        사형선고문   박용하는 본디 사리사욕만 취하고 나라와 민족을 위할줄 모르는 성품을 지닌 자로서 본 대한광복회의 지령을 여러차례 어겼다.그러므로 대한광복 회는 나라와 민족의 이름으로 도고면장 박용하를 사형에 처하노니 모든 동포는  각성할지어다.                              대한광복회 창립 3년 정사 12월 12일 광복회 지령원   박용하를 처단하고나자 악질친일부호들은 밤낮없이 안절부절이였다. 그러나 날로 심해지는 일제의 탄압에 대한광복회는 최대의 수난기를 맞았다. 박용하를 처단한지 사흘만인 1918년 1월 27일에 충청지부의 광복단원 장두환이 천안군 환성에서 체포되였고 그해 6월에는 해주에 사는 조동하의 밀고로 황해지부장 리관구가 체포되여 대한광복회는 충청, 경상지부에 이어 황해지부까지 와해되고말았다. 하지만 전라도에서 광복회의 투쟁은 줄기차게 진행되였다. 1918년 10월, 한훈은 리병호, 장남칠, 리병원 등과 함께 보성 박곡에 사는 친일부호 량재성(학)을 처단하고나서 락안군 벌교읍 고읍리에 사는 친일악질부호로 소문난 서도현을 사살했다.그뿐만이 아니였다. 한훈 등은 오성에 있는 헌병분대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여 만주로 망명하였다가 대한민국 상해림시정부가 수립되자 다시 모여 김상옥의 암살단에 가입하여 반일투쟁에 합류했다. 그 암살단은 리시영 등의 도움으로 권총 40자루와 탄알 3천발, 폭탄 10개를 국내로 비밀리에 들여왔다. 그들은 일본 관헌을 암살하고 관공서 등 중요한 기관을 폭발하려고 계획했었는데 거사 직전에 적들에게 발각되어 불행하게 체포되었다. 우재룡과 권영만도 1920년 심영택, 소진영 등의 주비단과 합류하여 활동하다가 일제경찰에게 체포되고말았다.  국내에서의 광복회의 조직은 기본상 해체했지만 만주에서의 반일투쟁은 빛나는 성과를 이룩했다. 만주로 건너간 김좌진은  일본의 감시를 피하여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고, 3·1독립선언에 전주곡이 되는 무오독립선언서에 39명의 민족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그리고 서일(徐一)을 중심으로 한 대한정의단(大韩正义团)에 가담하여 군사책임을 맡고, 정의단을 군정부(军政府)로 개편한 다음 사령관으로 추천되었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권고를 받아들여 북로군정서(北路军政署)로 개칭하고, 소속 무장독립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독립군 편성에 주력하였다. 우선 독립군 양성을 위하여 왕청현 십리평(汪淸县十里坪)산곡에 사관연성소를 설치하고, 스스로 소장이 되어 엄격한 훈련을 시키는 한편 무기 입수에 전력하였다. 1920년 9월 제1회 사관련성소  졸업생 298명을 졸업시켰다. 그러나 10월 일본군 대부대가 독립군 토벌을 목적으로 만주로 출병하자 소속독립군을 장백산으로 이동시키던 도중 청산리(靑山里)에서 일본군과 만나 전투를 전개하였다. 3일간 계속된 10여 차례의 치렬한 전투에서 일본군 3천여명을 살상하는 거대한 전과를 올렸다. 신비한 전술전략이 기적과도 같은 승리를 거두어 독립전투상 승리의 금자탑을 세웠다. 그뒤 북진을 강행하며 그해 말에 러시아와 린접한 북만주 밀산(密山)에 도착하였고, 여기에 집결한 10여개의 독립군단체가 통합, 대한독립군단이 결성되자 여기에 부총재로 취임하였다. 약소민족의 독립을 원조한다는 레닌정부의 선전에 한가닥 희망을 걸고 많은 사람이 북쪽 러시아로 넘어갈 때 우수리강을 건넜다가 생각한 바가 있어서 만주로 되돌아와 흩어진 동지들을 재결합하여 대기하였다. 그는 1925년 3월 신민부(新民府)를 창설하고 군사부위원장 및 총사령관이 되었으며 또한 성동사관학교(城东士官学校)를 세워 부교장으로서 정예사관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때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무위원으로 임명하였으나 취임하지 않고 독립군 양성에만 전념하였다. 1927년 많은 간부가 일제에 붙잡히자 신민부를 재정비하여 중앙집행위원장으로서 신민부를 통솔하였다. 1929년 신민부의 후신으로 한국총연합회 (韩国总联合会)가 결성되자 주석으로 선임되어 계속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 1월 24일 영안현 중동로 산시역(永安县中东路山市驿)앞 자택에서 200m 거리에 있는 정미소에서  박상실(朴尙实)이란 극좌분자의 총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23.사철푸른 소나무                                                 해외에서 광복회원들의 반일투쟁이 바야흐로 일어나고있을 때 옥중에 있는 박상진은 새로운 형식의  투쟁을 진행했다. 이제부터 그는 여태껏 몸을 바쳐 싸워온 일제보다 자기 자신과의 처절한 투쟁을 해야만 했다.  그는 1917년 12월 20일에 체포되어 경주수비대에 감금되는 날부터 놈들의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심문이 시작되였다. “피고의 성명은 무엇인가?” 심문을 맡은 형사가  엄숙하게 물었다. “나의 성명은 박상진이다.” “너희들이 꾸린 조직은 무엇이냐?” “우리가 꾸린 조직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싸우는 대한광복회라는 결사조직이다.” “피고는 그것이 한일합방에 유배되는 폭력조직임을 승인하는가?” “한일합방 그 자체가 우리나라 백성들의 뜻과 위배되는, 일제의 강압에 의해 맺어진 불평등조약인데 우리가 그것을 반대해 싸우는 것이 무슨 죄가 된단 말인가?” “”국사에 불만이 있을 때 정당하게 상소문을 올리지 않고  폭력조직을 꾸미는 것이 어떤 죄에 해당한지 피고는 모르는가?”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대한광복회를 세우지도 않았을 것이다. 너희들이 우리나라 백성들을 꼬물만치라도 생각했다면 그런 몰렴치한 수작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잃어버린 내 조국을 되찾기 위해 침략자들과 싸우는 것이 무슨 죄가 된단 말이냐?” 왜경들은 박상진에게 심문을 한다는게 번번이 면박만 당하여 피동이 되니 형사는 도리어 피고로 되여 심문을 받는 꼴로 변하군하였다.   며칠 뒤 일본총독부와 헌병대에서는 박상진을 충남공주경찰서로 압송하였다. 놈들은 경주수비대의 능력으론 박상진의사의 입에서 바라는 것을 꼬물만큼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던 것이였다. 공주경찰서에서는 왜놈들에게 자백한 반역자 리종국을 리용하여 충청지부장 김한종을 체포했기때문에 총독부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있었다. 일본총독부와 헌병대에서는 박상진을   공주경찰서에 수감하고 갖은 수단을 다해서 박상진의 입을 열어보려고 발버둥쳤다. 공주경찰서는 경주수비대와 달리 그야말로 악명높은 명실공인 마귀의 소굴이였다. 이곳에는 항일투사들을 고문하는 각가지 끔찍한 고문설비가 구전하였다. 코를 틀어막아 숨을 쉬지 못하게 하면서 억지로 물을 먹이는 물고문, 손가락,발가락, 귀, 배꼽 등으로부터 시작하여 혀바닥, 이발, 젖꼭지, 생식기, 항문 등에 전기줄을 집어넣고 자행하는 전기고문, 추운 겨울에 발가벗겨 얼음이 꽁꽁 얼 때까지 찬물을 끼얹는 고문, 손톱발톱을 뽑아내는 고문, 발바닥껍질을 칼로 벗겨내는 고문, 숯불에 달군 인두로 살을 지지는 고문...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야만적인 고문을 서슴없이 자행하는 곳이 바로 공주경찰서였다.  놈들은 모진 고문을 자행하다가 상대가 의식을 잃으면  찬물을 끼얹어 정신을 차리게 한 뒤 다시 그 끔찍한 고문을 시작하였다. 인류력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그 가혹한 고문은 박상진에게 한가지도 빠짐없이 차려졌다. “군자금을 누가 댔는지 말하라!” 왜경은 대한광복회에 군자금을 기부한 애국인사의 명단을 장악하려고 박상진에게 악착스레 따지고 물었다. “이놈들아! 너희들은 은혜를 입은 사람을 제 주둥이로 고자질해 벌을 받게하는 짐승만도 못한 놈들이냐? 나는 절대 그런 비루한 짓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모진 고문끝에 의식이 가물가물했지만 박상진은 한마디 한마디씩 또렷하게 맞받았다. “대한광복회의 회원들이 누구누구인지 이실직고하라. 그러지 않으면 너는 살아서 철창밖을 나가지 못할 것이다.” 일본경찰의 끈질긴 추궁은 오히려 박상진의 마음을 더욱 굳세게 다져줄 뿐이였다. “나는 대한광복회의 총사령이다. 나는 광복회의 동지들의 이름을 다 알고있다. 허지만 네놈들에게 고자질할 그런 비겁한 내가 아니다.” 박상진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도리어 왜경들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박상진을 고문하는 왜경들도 진땀을 흘리였다. 악에 받힌 왜경들은 목에 핏대를 세우고 고문실이 떠나가게  호통을 치고 갖은 고문을 다했어도 박상진한테서는 실오리만한 단서도 얻을수 없었다. 왜경들의 잔혹한 고문은 날이 갈수록 더 잔혹해졌다. 혹심한 고문에 박상진은 심신이 탈진되어 사람의 형상이 아니였다. 그를 고문하던 왜경들도 종당에는 지쳐서 쓰러질 지경이였으니 그 잔혹함은 상상할수도 없었다. 그러나 박상진의사의 철통같이 굳게 다문 입만은 열수가 없었다.   왜경들이 공주경찰서에서 체포한 항일투사들을 고문하느라 여념이 없을 때 일본에 거주하는 애국투사들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투쟁에 일떠섰다. 1919년 2월 8일 오전 10시경 일본 도꾜에 있던 독립선언 림시실행위원들은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민족대회소집청원서를 각 국 대사관 및 공사관과 일본 국회의원, 조선총독부, 그리고 도꾜 및 각지의 신문사와 잡지사, 학자들에게 우편으로 발송한 다음, 오후 2시부터 조선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학우회 임원선거를 명목으로 류학생대회를 개최했다. 도꾜에 있는 류학생의 거의 전부를 망라한 600여 명이 회의에 참석했다. 회장 백남규(白南奎)가 개회를 선언한 다음 최팔용의 사회로 대회 명칭을 '조선독립청년단대회'로 바꾸고 비등해진 분위기 속에서 력사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회순에 따라서 백관수가 독립선언문, 김도연이 결의문을 랑독하자 장내는 독립만세소리로 가득찼다. 이날의 독립선언회의에서 류학생들은 독립실행방법을 토의하려 했으나 니시간다[西神田] 경찰서장이 강제해산을 명령하여 27명이 련행되었다. 체포된 27명 중 임시실행위원 10명은 출판법 제27조 위반으로 2월 10일 도꾜 지방재판소 검사국에 이송되고 나머지는 석방되었다. 2·8독립선언 후 지도부가 검속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지도부를 구성하여 일본 국회에 독립을 청원하기 위하여 2월 12일 100여 명의 유학생들이 히비야 공원[日比谷公園]에 모여 리달(李達)을 회장으로 독립선언서를 다시 발표하려 했으나, 리달 등 13명이 붙잡히는 바람에 대회는 중도에 해산되고 말았다. 23일에는 변희용(卞熙鎔)·최재우(崔在宇), 장인환(張仁煥) 등 5명이 조선청년독립단민족대회촉진부 취지서를 인쇄하여 역시 히비야 공원에 배포하고 시위운동을 벌이려 했으나 배포 도중에 붙잡히고말았다.   공주경찰서에서는 박상진 등 독립운동가들에게 아무리 잔혹한 고문을 해봐야 저희들에게 유리한 단서를 티끌만큼도 얻을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3.1운동이 폭발하기 전날인 1919년 2월28일, 공주지방법원에서는 박상진의사와 김한종 등 광복회의 골간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고말았다. 14개월이나 끈 기나긴 고문이 끝나자 박상진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였다. 차디찬 감방에서 박상진의사는 고종황제의 승하소식을 들었다. 한일합방이 된 뒤 10년동안 자유를 잃고 덕수궁에 연금되어있던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해 독살되였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비보를 접한 박상진의사는 오래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깊은 슬픔에 잠기였다.  반일투쟁에 대한 의지가 강한 고종황제께서 철천지 원쑤 일제에 의해 독살되였다는 소식이 전국각지에 퍼지자 백성들의 분노는 극도에 달하였다. 1919년 3월 4일이 고종황제의 인산일이였기에 전국각지에서 고종황제의 장례식에 참가하려 오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도꾜에서 독립선언문을 발표한데 고무를 받아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려던 독립운동가들은 이 때를 가장 적절한 기회라고 판단하였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들은 돌연 예정을 변경하여 3월 1일에 인사동 명월관 지점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의 축배를 들기로 결의하였다. 본래 그들은 비폭력·비저항의 독립운동을 진행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고종 인산으로 각지에서 모인 수많은 백성들과 학생들이 독립선언에 지나치게 열광하게 될 경우 비폭력시위가 불가능해질 수 있다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였다.  민족대표 33인 중 29명(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는 불참)은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 100매를 탁상위에 펴 놓고, 찾아오는 이들이 열람하도록 하였다. 2시 정각이 되자 한용운이 일어나 독립선언서를 랑독하고, 일동은 기립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한 다음 축배를 들었다.그들은 명월관의 주인인 안순환을 시켜 총독부 경무총감부에 전화를 걸고 대한민족의 독립을 선언한 민족대표 일동이 지금 인사동 명월관 지점에서 축하연을 하고 있다고 통고하였다. 이날 같은 시각인 오후 2시에 파고다 공원에는 중등 이상 각 학교 학생 4,5천명이 강기덕, 김원벽의 지휘로 모였다. 단상 정면에는 10년동안 자취를 감췄던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이때 경신학교 졸업생 정재용이 한 장의 종이를 접어들고 단상에 뛰어올라 독립선언서를 랑독했다. 감격의 흐느낌 속에 독립선언서의 랑독이 끝나갈 무렵 어디선가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우레같이 터져나왔다.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만세!”  흥분한 학생들은 모자를 벗어서 공중으로 던지였다. 처음에는 학생들만 모였던 군중이 어느새 서울시민과 지방에서 인산 참례차 상경한 사람들로 꽉차 공원안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학생들이 "광복가"를 부르며 앞장서고 많은 사람들이 그 뒤를 따라 행진을 시작했다. “2천만 동포야! 일어나거라. 일어나서 총을 메고 칼을 잡아서 잃었던 내 조국과 너의 자유를 원쑤의 손에서 피로 찾아라.” 공원문을 쏟아져 나온 수만의 군중들은 독립만세를 부르며 정연한 대오를 이루어 시위행진을 시작했다.  수십만의 군중들은 두갈래로 나누어졌다. 한갈래는 종로를 거쳐 덕수궁 앞에 이르러 만세를 높이 웨치며 대한문 안으로 들어가 삼국궁(三鞠躬)의 례를 행하고 다시 대한문 앞에 나와 독립연설을 하였고 다른 한 갈래는 광교를 지나 남대문 정거장 광장을 거쳐 의주통으로 꺾어서  프랑스령사관으로 향하였다. 여기서 또 한갈래가 대한문으로 돌아와서 미국령사관에 이르렀을 때 미국령사는 문을 열고 나와 환영하며 동의를 표하였다. 각국의 령사관을 두루 돌며 독립선포의 주지를 설명한 학생대표들은 시위행진대오를 이끌고  다시 종로에 모여 연설회를 열었다. 3·1운동은 서울에서와 같은 날 평양·진남포·안주·의주·선천·원산·함흥에서 동시에 발발하였고, 3월 2일에는 해주 ·수안·황주·중화·강서·대동에서 터졌는데, 5일까지는 주로 경기 이북이 연일 시위를 계속했고, 5일에 군산, 8일에 대구, 10일에 철원·강경·광주, 11일에 부산, 19일에 괴산 등 순차로 전국에 확대되어 료원의 불길처럼 막을 수 없이 퍼져갔다.  3.1운동의 장면을 목격하고 쓴 글 (경북 예천군 룡문면 대저동 박씨집안에서 5대(107년간)에 걸쳐 기록한 대하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1919년 3월 4일(음력 기미년 2월 3일) 인산일(고종황제의 장례식날), 서울 금곡에 이르는 40리 길에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곡하는 소리가 하늘을 찔렀다고 하며 이 광경을 보고 외국인도 흐느껴 울면서 눈물을 닦았다고 한다.   1919년 3월 10일(음력 기미년 2월 9일) 천도교 회장 손병희 외 몇만 무리들이 덕수궁의 대한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일장기를 뽑은 다음 태극기를 세워놓고 만세를 불렀는데 이와같이 3일을 계속해도 일본총독이 금지시키지 못했다고 한다. 대세로 보아 이번 인산 때에는 팔도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를 따랐으며 수천명의 기생들까지 소복을 입고 뒤를 따랐다고 한다. 서울에는 3일간 일장기가 사라졌으며 보이는 것은 태극기, 들리는 소리는 만세소리뿐이였다고 한다.   1919년 4월 22일 (음력 기미년 3월 22일) 서흘전, 울산의 병영에서 장꾼들과 지역 유지들이 한데 어우러져 만세를 불렀다. 일본수비대가 쏜 총에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고 한다. 만세꾼중에는 천도 교도가 여러사람 있었는데 그중 박생원을 왜병이 붙잡아다 장꾼들이 보는 앞에서 목을 베어 죽였다 한다. 그 외에도 이날 병영 장터에서 만세를 부르다가 왜병의 총에 맞아 죽은자가 셋이요 감옥에 끌려간자는 서른명도 더 된다고 한다. 사흘전이면 4월 19일인데 원체 끔찍한 사건이라 특별히 기록해 둔다.   전국성적인 만세운동은 일제와 그 앞잡이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일본총독부와 헌병들은 시위대오를 해산시키려고 총을 란사하여 무고한 백성 7천 5백여명의 목숨을 앗아갔으며 수많은 부상자를 내였고 4만 6천여명의 군중을 체포하여 고문을 진행했었다. 경무국 발행 『소요사건개황(騷擾事件槪況)』에 게재된 3월 1일부터 6월 30일까지의 '조선소요사건 총계일람표‘에는 소요인원 총계 587,641명, 검거인원 13,175명, 조선측 사망자 553명, 부상자 1,409명이라고 씌여 있다. 『고등경찰요사』(1929)에도 역시 50명이상 소요발생시 총계 618개소, 회수 847회, 소요인원 587,641명이라고 되어 위의 통계와 합치된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는 집회 회수 1,542회, 참가인수 2,023,098명, 피수자(被囚者) 46.948명, 사망자수 7,509명, 부상을 입은자가 15,961명이라고 계산하고 있다. 국외에서 신문통신의 보도와 개인 구두보고를 종합한 것이다. 한편 조선총독부 관방 서무부 조사와 발행의 『조선독립사상 및 운동』(1924)에는 3월 이후 12월 말까지 13도 11부 206군에 걸쳐 독립운동 3,200건이 발생하여 검거된 사람 수가 19,522명인데, 검거된 자는 실제 운동자의 몇십분지 일에 불과하므로 가령 50배만 치더라도 실제 참가인원은 100만에 달할 것이라고 하였다.    독립만세운동의 엄청난 소식이 옥중에 있는 박상진의 귀에 들려왔다.  절망속에 빠졌던 박상진에게는 커다란  희망의 불빛이였고 비할바 없이 벅찬 감격이였다. “오오, 이제야 내 조국의 앞날이 내다보이는구나. 온 나라의 백성들이 한결같이 일떠나 목숨을 내걸고 일제와 싸운다면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할 날도 멀지 않을 것이다.” 박상진의 가슴속에서 뜨거운 피가 솟구쳤다.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였다. 그는 이 장렬한 투쟁의 앞장에 나서지 못하고 령어에 갇힌 몸이 한없이 원통하였다. 두줄기 눈물이 주르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1919년 8월 12일,악독하기로 소문난 하세가와(长谷川好道)  총독이 본국으로 소환되어가고 9월 2일에 새총독으로 사이토오 마코토오(荠藤实)가 부임하였다.사이토오는 부임하는 도중 서울역에서 애국지사  강우규(姜宇奎)의 폭탄세례를 받아 하마트면 황천객이 될번 하였다. 사이토오는  데라우치나 하세가와 전 총독의 폭압정책은 조선인민들의 반일감정을 내려누르지 못하고 오히려 반항의 불길만 더 세차게 지폈다는것을 깊이 깨달았다. 그는 폭압정치를 유화정치로 바꾸어 조선총독부의 관제를 개정하여 악명높던 헌병경찰제도를 페지하였다. 9월 10일에 사이토오는 이른바 문화정책이란것을 발표하였다.그는 조선인들의 반일감정을 무마하기 위해 조선문으로 된 신문의 출간을 허가하였고 감옥에서의 혹형도 다소 감소시켰다.           24. 생의 마지막 나날에   1919년 9월 26일, 경성 복심법원 형사부에서는  박상진, 채기중 등에게 사형판결을 내리고 사건을 대구 복심법원으로 이첩하였다. 그리하여 공주 형무소에서 재판을 받던 광복회원 대다수가 대구 형무소로 옮겨갔다. 대구형무소에서는 이미 판결을 내린 죄수들에게 별도로 고문은 진행하지 않았고 가족들과의 면회도 허락하였다. 가족과의 면회를 통해 박상진은 외부의 소식도 조금씩 듣게 되였다. 그중 그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끌게 한 것은 의렬단(义烈团)과 의렬단의 단장 김원봉에 대한 소식이였다. 하루는 대구감옥에 박상진의 생부 박시규가 면회하러 왔다. 그는 간수들이 듣지 못하도록 아들의 귀에 대고 낮은 소리로 김원봉과 의렬단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김원봉은 1898년 8월 13일, 밀양군 북부면 감천리에서 태여났다. 그는 서당에서 공부를 하다가 나이가 13세가 되던 1910년에 밀양시립 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한일합방으로 나라가 망하고 뒤이어 학교가 폐교되자 19세때인 1916년에 서울로 올라와서 중앙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풍기광복단에서 활약하던 고모부 황상규를 통해서 대한광복회에 대해 료해하게 되였고 총사령 박상진을 무척 흠모하였다.그는 혁명사업에 투신할 장한 뜻을 지니고 일년간 공부하던 서울의 중앙학교를 중퇴하고 중국으로 건너가서 천진에 있는 덕화학당에 입학했다가 이듬해인 1918년 9월에는 남경에 있는 금릉대학에 입학해서 공부했다.그러나 금릉대학도 애국심에 불타는 그의 구지욕을 만족시키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 박상진이 자금을 대주어 꾸리고있는 신흥무관학교로 옮겨가서 1919년 6월까지 군사학을 학습하였다. 그해 11월에 그는 길림성에서 의렬단이란 항일독립운동단체를 창립했다.처음 의렬단을 창립할 때는 김원봉, 윤세주,리성우, 곽경, 강세우, 리종암, 한봉근, 한봉인, 김상윤, 신철휴, 배동선, 서상락, 박재혁 등 13명뿐이였다.  의렬단은 김원봉의 명령을 받아 일본관리를 암살하거나 백성들을 괴롭히는 일본관청을 폭파하여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했던 비밀단체였다. “김원봉 그 사람 말이다. 알고보니 광복단원 황상규의 처조카라더구나. 김원봉은 그의 고모부를 통해서 너를 잘 알고있다더구나.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광복회의 총사령 박상진이라고 말하더라는구나.” “김원봉은 참으로 장한 젊은이네요.우리나라에 김원봉같은 청년들이 수천수만명 나타난다면 조국의 광복은 불원할텐데요.” 김원봉은 어떻게 생긴 청년일가? 박상진은 생부의 말씀을 들으면서 의렬단장 김원봉의 모습을 머리속에 그려보려고 무진 애를 썼다. 비록 13명이란 적은 수의 젊은이들이지만 신출귀몰하며 대한독립을 위해 목숨바쳐 싸우는 그들이 박상진은 눈물겹도록 고마웠기 때문이였다. 의렬단원들의 활동은 참으로 눈부셨다. 그중 의렬단원 박재혁(朴载赫)에 대한 미담은 사람들의 입에 올라 널리 전파되였다.  1920년 9월 14일 아침, 부산경찰서에 중국인 차림의 한 젊은이가 찾아왔다. 그는 귀중한 고서(古书)를 가져왔다면서 경찰서장 하시모토(桥本秀平)를 만나겠다고 하였다.     하시모토가 평소에 고서를 아주 좋아했기 때문에 부하들은 고서를 가져온 사람에 대해 별로 경계하지 않고 곧바로 경찰서장실로 그사람을 안내했다. 이 젊은이가 바로 박재혁이였다.그는 부산진 보통학교와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무역상회의 고용인으로 일하다가 1917년에 중국 상해로 들어가서 무역업에 종사했다. 이때 중국에서 민족주의 독립운동가 김원봉 등과 친분을 가지면서 사상상에 큰 변화가 생겼다.1920년 8월에 그는 김원봉이 주도한 독립운동의 폭력조직인 의렬단에 가입하였다. 이해 9월 13일에 그는 부산경찰서를 파괴할 임무를 맡고 짐속에 폭탄을 숨겨 나가사키를 거쳐 부산으로 들어왔덨다. 하시모토는 고서를 가지고온 청년을 보자 무척 반가워하면서 의자에 앉으라고 권한 뒤 보자기를 펼치고 고서 한권을 들고 보더니 무척 흥미진진하여  도정신해 책을 읽고 있었다. 바로 이때였다. 고서를 가져온 그 청년이 류창한 일본말로 소리쳤다. “나는 상해에서 파견되어 온 의렬단원이다. 네놈이 우리 동지들을 잡아 의렬단의 투쟁계획을 깨뜨린 까닭에 우리는  네놈을 처형한다!” 젊은이는 말을 마치기 바쁘게 고서더미에 숨겨뒀던 작은 폭탄을 꺼내어 던졌다. “꽝!” 요란한 폭발소리가 부산경찰서를 진동하였다.폭음에 놀란 경찰들이 달려와서 서장실의 문을 열었다.  두사람은 파편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채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당황망조한 왜경들이 중상을 입은 하시모토를 구급차에 급히  싣고 병원으로 운송했지만 파편에 요해처를 맞은 경찰서장은 중도에서 숨지고 말았다.  중상을 입은 박재혁이 혼미상태에서 깨어나자나자 일본경찰들은 그를 형무소로 끌고가서 혹독한 고문을 하였다.그러나 왜놈형사들은 그 청년의 입에서 필요한 단서를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박재혁은 대구감옥에 이송된 뒤 사형선고를 받았다. 박재혁은 이미 죽음을 각오한 바라 사형선고에 낯빛 한번 변하지 않고 당당하게 말했다. “나는 폭탄을 터쳐 하시모도와 함께 죽으려고 했는데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일본인 관리의 더러운 손에 죽는 것은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 박재혁은 간수가 들여보낸 밥을 차버리고 단식을 진행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몸이 허약할대로 허약해진 그는 단식한지 며칠만에 감옥안에서 27세의 꽃나이로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이날이 바로 1921년 5월 27일이였다. 광복후 박재혁에게는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였다. 독실에 갇혀있는 박상진은 박재혁의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깊이 감동되였다. “우리나라에 그대같이 장한 동지들이 있는 한 조국의 광복도 결코 멀지 않을 것이다.” 박상진은 며칠 밤을 잠 못 이루며 이 젊은 의렬단원의 명복을 빌었다. 박상진의사에게 사형판결이 선포되자 생부 박시규옹은 아들의 소중한 생명을 건지기 위해 늙고 허약한 몸으로 동분서주했다. 그는 가장집물을 다 팔아서 일정한 돈을 마련한 다음 일본으로 건너가서 도꾜에서 가장 유능한 변호사를 찾으려고 백방으로 애를 썼다. 옥중에서 이 소식을 알게 된 박상진은 생부가 하는 구조운동을 저지했다. 그는 생부에게 세차례나 편지를 써서 생부의 구명활동을 극력 만류했다. “... 저는 몸을 깨끗이 갖고 죽는 것이 소원입니다. 어찌 구구한 짓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 “...죽으면 죽었지 저들과 더불어 삶을 구한다면 사는 것이 오히려 죽는 것만 못합니다.아버님께서는 처음부터 이렇게 결정한 소자의 마음을 왜 모르십니까?...” “...만약 제가 불행을 당하게 되면 아버님께서 먼 만리밖에서 허탈해 하실까 늘 밤낮으로 걱정입니다. 빨리 돌아오셔야 한번 만나뵙고 영결의 말씀을 여쭐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저의 소원입니다....” 박상진의 편지를 받고나서 아들의 생각이 옳다는것을 깨달은 박시규옹은 가슴을 에이는 아픔을 참고 아들의 구명운동을 더는 벌이지 않았다. 박시규가 대구감옥에 찾아오자 박상진은 생부의 손을 꼭 쥐고 울먹거리면서 말했다. “아버님, 자식도리를 다 하지 못한 이 불효자를 용서해주십시오....이젠 저의 지원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이제부터 아버님께서 이 못난 자식때문에 더 심려하지 마십시오.”  “오냐, 너는 이 세상에 남아있는 날까지 대한의 남아답게 의젓하게 살거라.” 박시규로서는 사형을 집행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아들에게 다른 위안의 말을 더 할수가 없었다. 1921년 여름에 신채호가 작성한 의 초안이 비밀리에 대구감옥안으로 반입되였다. 그 주요내용은 아래와 같다.   ...이제 -폭력,암살,파괴,폭동-의 목적물을 대략 렬거하건대 1.조선총독 및 각 관공리 2.일본천황 및 각 관공리 3.정탐노(侦探奴), 매국노 4. 적의 모든 시설물...>> 박상진은 의렬단의 선언문을 읽으면서 자기보다 열네살이나 아래인 의렬단장 김원봉이 대견스럽기만 했다. 몸에 날개만 있으면 당장이라도 훨훨 날아가서 그에게 고무격려의 말을 해주고싶었다. 그런데 우연이라고 할가 아니면 필연이라고 할가? 박상진이 그 선언문을 숙독 음미하기도 전에 그에게 사신이 찾아왔다. 1921년 8월 11일, 음력으로는 신유년(申酉年) 칠월 초여드래날이였다. 이날 점심에 의외로 감방에 갇혀있는 박상진에게 허술한 술상이 차려졌다. 박상진은 자기의 생명이 끝에 다가왔음을 직감했다.감옥에서는 사형을 집행하기 직전에 사형수에게 술상을 차려주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였다.  박상진은 태연한 자세로 술을 마시고나서  간수를 불러놓고 분부했다. “어서 문방4구를 가져오너라.” 간수는 죄수가 마지막으로 유언을 남기려고 그러는가 싶어서 종이와 벼루,먹 및 붓을 가져왔다. 벼루에 물을 조금 부어 먹을 갈고난 박상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붓에 먹물을 듬뿍 찍어 일필휘지로 붓을 날렸다.                             绝命诗 难复生此世上 幸得为男子汉 无一事成功去 青山嘲绿水嚬                        절명시 다시 태여나기 어려운 이 세상에 다행히 남자로 태여났으나 아무 일도 이루지 못하고 가니 청산이 조롱하고 록수가 비웃네.   박상진이 붓을 던지고나자 옥경들이 형을 집행하려고 박상진이 들어있는 감방문을 열었다. 박상진은 태연히 일어나서 옥경들을 따라 무거운 족쇠를 찬 다리를 옮겨 교수대가 설치된  형장으로 걸어갔다. 이 날 함께 교수형을 당하게 된 김한종도 형장으로 나왔다. 박상진은 몇년동안 만나보지 못한 의젓한 전우 김한종을 한눈에 알아보고 그를 향해 힘있게 고개를 끄덕이였다. 김한종도 박상진을 알아보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였다. 생의 마지막 순간을 값지게 보내자는 무언의 약속이였다. 박상진이 교수대앞에 다가서자 그의 머리에 검은 천이 씌워졌다. 생명의 최후의 순간이 다가왔다. 박상진의사는 일본경찰의 혹독한 고문으로 말미암아 잘 펴지지 않는 두 팔을 온 힘을 다해 쳐들고 웨쳤다.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죽음앞에서도 끝까지 꿋꿋한 자세를 잃지 않는 그 의연함에 일본인 간수들까지 흠모했던 박상진의사는 만세 삼창을 마지막으로 담담히 교수대에 몸을 맡겼다. 그는 불꽃같이 훨훨 타오르던 뜨거운 삶을 서른 여덟 젊은 나이로 깨끗이 마감했다. 실로 청산도 고개 숙이고 록수도 흐느꼈다.              25. 박상진의사가 순국한 뒤   박상진의사는 나라의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모든것을 깡그리 바쳤다. 그가 순국한 뒤 그의 가정은 철저히 파산되였고 그 후대들은 거지로 륜락해 류리걸식하는 비참한 처지에서 줄곳 광복이 될 때까지 살아왔다. 아래에 박상진의사의 생부 박시규옹이 아들의 3년상을 맞아 아들과 대화하는 형식으로 쓴 제문(祭文)이 있다. 이 제문을 읽어보면 박상진의사가 옥에 갇혀서부터 희생 두돌이 될 때까지 그의 가족이 겪어온 눈물겨운 참상이 한눈에 안겨온다.                            먼저 간 아들 상진에게   이 해(1923년), 계해년 칠월 초여드레 갑자일(甲子)은 출계(出系)한 망자(亡子) 상진의 종상(终祥)이다.그의 생부인 성심옹(醒心翁) 은 간장이 끊어지는 듯 하고 정신도 다 나간 듯 하다. 몇마디 이야기해보고 싶으나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부자의 정으로 뜻밖의 궁천지통(穹天之痛)을 당하여 한마디 말이 없다는 것도 나로서는 참지 못할 일인데 하물며 너의 영령이 이 아비때문에 떠나가지 못하고 이승에서 머뭇거리게 된다면 이 아비는 더욱 참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하루전인 계해일(칠월 초 이렛날) 아침에 몇가지 과일과 한잔 술을 차려놓고 가슴을 치면서 고하노라. 내 아들 상진아! 아아, 오늘은 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날이구나. 너의 죽음을 온 천하 사람들이 슬퍼하고 애석하게 여기는 말이 모두 한 목소리같이 어쩌면 그렇게도 한결같느냐? 그날 형무소의 간수는 “의인(异人)이 세상을 뜨니 천지가 캄캄해지고 시정에는 전방문이 모두 닫혔습니다.” 라고 하였고 아이 호(琥)가 네 시신을 수레에 싣고 돌아왔을 때는 성안에 있는 너의 친구가 모두 너를 어루만지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또 번갈아가면서 밤을 새우고 마포(蔴布)와 지촉(纸烛)으로 돕기도 하여 함렴(含敛)에 대한 모든 절차를 치르렀느니라.  장사지내던 날, 연도에 가득한 남녀가 상여를 따라 통곡하자 길가던 나그네까지 눈물을 흘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 이를 본 사람들은 라고 말하면서 너를 칭송했다.  또 영국인과 우리 대한사람 리만우,김모 등등 수십명의 애국지사가 일본경관의 감시를 피하여 십오리쯤 떨어진 동촌역앞에 와서 네가 이승을 떠나는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면서 통곡하였고 너를 실은 상여가 청천역에 이르렀을 때는 누군지 모르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통곡하는 소리에 땅이 꺼지는것만 같았구나.  장지(葬地)인 록문구산(鹿门臼山)까지 운구(运柩)할 힘이 없어서 그만 너의 장인어른께서 잡아놓았던 등운산(登云山)기슭에 장사지내게 되였다. 발인할 때부터 일본경찰 기마대가 달려와 길가에 늘어서서 문상객을 휘몰아쫓았는데 그 광경이 필설(笔舌)로 다할 수 없으리 만큼 참혹했다.그 때문에 산우에 올라와서 회장(会葬)한 사람은 겨우 십여명에 불과했느니라.  네가 죽은 후 최군 준(浚)은 우리 집안 형제와 자기 조카들이 가졌던 농토의 전부를 그가 샀다는 핑게를 대면서 하루아침에 다 빼앗아가버렸다. 데체로 생각해 볼 때 농민은 농사를 짓지 않으면 굶게 되고 굶으면 죽게 될뿐이다. 일곱집안 백여명이나 되는 식구가 모두 거지로 되어 사방으로 떠돌아다니고 나도 혼자서 이 옛집을 지키고있느라 며칠동안 굶어서 죽을 지경에 이르렀건만 이렇게 된 리유를 알수가 없어서 네 아내에게 물어보았더니라.   “을묘년 7월 어느날 최준, 최완 형제가 우리집에 와서 말하기를 라고 했는데 오늘날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으니 천운(天运)이라 할까요?아아, 천운이라 할까요?” 라고 말하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짓더구나. 내가 최준에게 이를 따져물었더니 최준은 “박상진이 삼정회사에 부채가 있어 저당한 토지를 빼앗기게 되었다고 하면서 나더러 매수(买受)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값이 시가(市价)에 맞지 않아서 살 수 없다고 했더니 상진은 곧바로 칼을 빼들면서 죽일듯이 위협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죽음을 면하기 위해서 또 한편으로는 그를 돕기 위해서 억지로 매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와서 죽을 고비를 당하자 하늘이 부여해준 본성을 잃어버리고 그 아이들을 보내 느닷없이 생떼를 부리면 되겠습니까?”라고 하면서 딱 잡아떼더구나.  이게 어디 리치에 닿는 말이더냐? 이 토지는 논이 5백두락이요, 밭이 4백두락으로 합치면 모두 9백두락으로 당시 시가(市价)로 거금 륙칠만원이상이 넘던 까닭에 삼정회사에서도 삼만원에 저당잡았을테고 최준이 그 보증인이 되었다. 이는 모르는 사람이 없던 사실인데 이제와서는 너의 위협이 두려워서 일만이천원에 억지로 매수했다니 이거야말로 생떼가 아니라고 어느 누가 말할수 있겠느냐?또 너를 돕기 위해 그 전답을 마지못해 매수하게 되었다지만 그 농토 전부를 다 빼앗아 그 형제자매 일곱집안의 식구 백여명을 하루아침에 거지가 되도록 만들어놓은 것을 어찌 도왔다고 말하겠느냐? 너의 장인어른께서도 최준에게 “네 말은 한마디도 리치에 닿지 않는다.그토록 많은 농토를 이미 빼앗겼다면 삼정회사에 빼앗겼거나 너에게 빼앗겼거나 간에 상진에게는 아무 손익이 없었을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진이가 꼭 너에게 팔려고 칼로 위협했다면 그때 네가 딴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 그 토지를 3만원에 저당잡혔다면  그 원가가 무려 륙칠만원어치가 넘는다는것은 확실히 알수있지 않느냐? 그런데 너는 상진의 위협에 눌려 만이천원을 주고 사기 싫은 것을 억지로 샀다하니 그 실제를 따진다면 상진이가 그 토지로써 너를 구조한 셈이고 너는 도리어 상진에게 구조를 받은 셈이렸다. 우리집안은 옛날 조상때부터 정당치 않은 일로는 한평의 땅도, 한푼의 돈도 몸에 붙이지 않았다. 너도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빼앗은 농토를 되돌려줘야 옳을 것이다.”라고 꾸짖었다는구나. 그렇지만 최군형제는 잘못을 고치기는 커녕 오히려 우리 량대(两代)의 분묘가 있는 산판을 제 소유로 만들어 지금 은행에 저당잡혔다고 하더구나. 네가 살았을 때 최군과 더불어 어떻게 했길래 그 욕스러움이 조상에게 미치며 또 나로 하여금 이 궁지에 빠져 철천지원(彻天之冤)을 하소연해도 아무 반응이 없도록 하였느냐?   한밤중에 잠이 오지 않을 때면 나는 네 나이 4십이 가깝도록 왜 가정을 돌볼 생각이 없었는지, 그것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원망스럽기만 하였다. 너는 그때 5년 년부라는 일 때문에 부산과 서울을 몇차례나 오르내렸느니라. 이는 모두 가정을 돌보려고 한 일이라 여기고 있었는데 왜 조상에 대한 향화도 생각치 않고 늙은 부모를 돌아보지 않았으며 어린 처자들도 걱정하지 않았느냐? 일곱집안 식구가 먹고사는 농토를 아무 까닭없이 준에게 넘겨주었으니 이는 준의 부형과 숙질들에게 물어본다 하더라도 반드시 그럴 리가 없다 할 것이다.  아, 우리형제는 모두 자식이 없어 우리부모께서 밤낮으로 걱정하셨다. 뒤늦게 네가 태여나자 겨우 백날이 지난 후 숙인께서 데려다 잘 길러 키우기를 마치 자기가 낳은 것처럼 하셨으므로 너는 워낙 어려서 정부인께서 태여난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밤이면 우리 어머님께서 너를 끌어안고 주무셨으며 낮이면 우리 아버님께서 너를 등에 업고 놀기도 하셨는데 마치 장중보옥(掌中宝玉)같이  귀히 여기셨니라. ...... 아, 나는 일찌기 멀리 나가서 여러해를 보냈는데 너를 꿈에 본 다음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너의 편지가 배달되곤 하여 내가 이것을 징험으로 삼자 옆에서 보는 이들은 내게 전지지감(前知之监)이 있다고 했단다. 내가 경성에 있을 때나 심양(沈阳)에 가 있을 때나 또 네가 옥중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으며 지난해 내가 동경에 가 있을 때에 너를 꿈에 세번이나 보았는데 역시 세번 다 너의  편지가 왔었다. 첫번째 편지에는 “몸을 깨끗이 갖고 죽는것이 소원입니다. 어찌 구구한 짓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하였고 또 두번째 편지에는 “죽으면 죽었지 저들과 더불어 삶을 구한다면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합니다. 본래부터 이렇게 결정한 저의 마음을 왜 모르십니까?” 라고 하였으며 그 세번째 편지에는 “만약 제가 불행하게 되면 먼 만리밖에서 허탈해 하실까 늘 밤낮으로 걱정입니다. 빨리 돌아오셔야 한번 만나뵙고 영결(永诀)말씀을 여쭐 수 있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저의 소원입니다.”라고 했기에 나는 즉시 돌아와서 옥중으로 들어가 너를 만났었다.그랬더니 너는 눈물을 철철 흘리면서 “저의 지원(至愿)이 다 이루어졌습니다.”라면서 울먹이던 모습이 지금도 어제런듯 선하게 떠오른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동경에 건너와 있으면서 꿈에 너를 보았건만 다음날이 되어도 네 편지가 끝내 배달되지 않고있으니 네가 정말로 죽었나보구나. 네가 죽었는데...... 지금 나는, 머리가 백발이 된 이 늙은 나이에 온갖 고난을 다 겪으면서 네 기일(忌日)을 두번씩이나 맞이하고있으니 정녕 너를 잊은걸까? 잊어버린다는 것은 본래 내가 바라던 바이나 조금 잊을만 하면 지나간 최준의 일이 늘 나의 마음을 어지럽힌다.갑자기 너의 육신이 내 눈앞에 서있는듯 하고 네 음성이 내 귓가에 들리는 듯하여 마음속에 맺힌 한이 불길처럼 치솟아오른다. 미친듯이 땅바닥을 두드리며 울음을 터뜨리는 등 공연히 정신을 손상시키게 되니 이는 잊으려는것이 도리어 잊을수 없도록하는 셈이 되는구나.   아아, 이제 다 끝나고 말았으니 이 모두를 천운(天运)이라 할까? 네 아내가 낮에도 가끔 울음소리를 내는바람에 나의 심간(心肝)이 마치 칼로 도려내는듯하며 우리 형님은 흰 머리카락을 날리면서 고독한 생활로 남에게 얹혀있게 되였으니 내가 목석이 아닌만큼 이 쌓이고 쌓이는 한이 먼 우주에까지 뻗히지 않을수 있겠느냐? 아아, 참으로 비참한 신세이다.  네가 죽은 후 몇달이 안되어 도손(道孙)이 아들을 낳았다. 그가 임신했다는 말은 네가 옥중에 있을 때 들었을줄 아나 그가 태여난 일은 네가 모르겠기에 지금 들려주는것이다.아이의 이름은 호동(浩东)이라 지었는데 미목(眉目)이 아주 청수하고 살결도 옥설(玉雪)처럼 깨끗하다.지금 나이가 세살인데 말도 할줄 알고 걸음도 제법 걷는다.하늘이 부여한 자질이 매우 강명(刚明)하게 보이니 참으로 우리집 아이라 하겠다.  나는 아이를 끌어안고  “너의 할아비는 내게는 바로 아들이였고 너의 아비는 나를 증조부라 불렀느니라. 너는 나를 증증조부라고 불러야 하며 내가 죽은 뒤에는 너는 시복(媤服)을 입어야 하는데 옛날 성인이 이렇게 마련한 례제는 인정에 따라 후박(厚薄)의 차이가 있느니라. 내가 죽은 뒤 제사지낼 때에 이 말을 잊지 말고 늘 제사에 참여하겠느냐?”라고 말하면서 아이를 얼르곤 했다.    우리 형님도 이 아이를 그러안을 때면 마음속의 울화증을 풀고 약간이나마 웃음을 지으시고 네 아내도 그 손자를 안으면 울음을 그치고 억지로 밥을 먹으면서 이 저주할 세월을 보내고있다. 세상의 흥폐(兴废)와 성쇠(盛衰)란 바뀌어지는 바가 시대에 따라 한이 없다.이로 본다면 우리 집안이 중흥(中兴)할 조짐이 이 아이에게 있다고 하겠다.나는 이것을 기대하면서 자위(自慰)하고 살아갈뿐이다.  아아, 맨 처음 네가 구속되어 갈때 나를 돌아보면서 따라오라고 한 말은 나를 념려한 말이였고 내가 너를 따라다니게 된것 또한 잊을 수 없는 사랑때문이였다. 바로 위험한 지경에 이르러 한 부탁이였는데 아비된 나로서 어찌 저버릴수 있겠느냐? 그러므로 경주에서 대구까지, 대구에서 공주까지, 공주에서 경성까지 따라가게 되였고 또 경성에서 다시 대구까지 따라가기도 했다. 5년동안 남쪽과 북쪽을 수없이 쫓아다닌것은 너의 목숨을 꼭 살려보려고 한것인데 너는 끝내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그만 후회없이 가버렸구나! 이로 본다면 너의 죽음이 오히려 나의 삶보다 낫다 하겠다.  너를 장사지내던 날에는 갑자기 눈이 어두워지고 귀도 들리지 않아서 붓을 잡을수가 없었고 또 재상(再祥)때는 마침 설사를 앓고 누워있느라 제문을 쓰지 못했다.이제 3상(三祥)이 되였는데 끝내 말 한마디 없다면 부자간의 은정이라 할수 있겠느냐? 그래서 마음속에 쌓인 생각을 글로 표현하다보니 이처럼 장황하지 않을 수 없구나.이 점은 네가 량해해줘야겠다.  오직 이 제문은 내가 너에게 고결(告诀)하는 바요 이 주과(酒果)는 내가 너에게 먹고 마시도록 권하는바이다. 너는 감격하여 흐르는 눈물을 닦고 흠향하기 바란다. 아아, 가슴이 미어지는것 같구나! 부디 많이, 배불리 먹고 가거라.   이 편지를 읽노라면 가슴이 막 미여지는것 같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심정도 한없이 아프겠지만 그보다도 아들을 잃고 가산까지 탕진하고 류리걸식하게 되였으니 더 이를데가 있겠는가? 알고도 모를 일은 박상진의 사촌처남이자 대한광복회의 재무를 맡았던 최준의 처사이다. 박상진이 체포되고 국내에 남아있던 대부분의 광복회원들이 적들에게 체포되여 갖은 고문을 받고 처형되거나 종신형을 당했는데 최준은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았고 오히려 거부로 되여 호의호식하며  살았다는것이다. 사촌자형이 잘못됐으니 누님네는 자신이 돌보겠다던 자가 자형네 재산을 통차지하고 자기의 사촌누님을 거지로 만들었으니 최준이는 필경 어떤 인간인가?최준이가 정말 그런 짐승보다 못한 짓을 했다면 그 징그러운 낯짝에 침을 뱉고싶다.   그런데 박시규옹의 글만 보고 최준을 매도하기엔 너무 경솔한것 같다. 최준네는 예로부터 경주에서 소문난 갑부이다.일반 집들은 3대가 계속 부자로 남기 어렵다고 하는데 경주 최부자네는 3백년동안 만석거부를 지켜오다가 최준 대에 내려와서 망했다는 것이다. 최준이 가산을 팔아 독립운동에 기부하느라 빈털털이가 됐다는 일화가 전해지고있으니 말이다.그렇다면 최준이는 사촌누님일가를 보호하고 자신의 정체를 감추기 위해서 일부러 그들을 외면하고 지냈을가? 이미 고인이 된 그분은 입을 열수 없으니 답답하기만 하다.  불행은 잠시도 멎지 않았다. 박상진의사의 후손들은 광복이 날 때까지 기나긴 25년이란 세월을 류리걸식하며 눈물겨운 비참한 나날을 견뎌왔다. 하루 세끼 죽으로도 주린 배를 채우지 못하는 처지에 어느 자식 하나 글공부를 시킬 엄두를 내봤겠는가. 불행은 다만 그의 후대에게만 따른 것이 아니였다. 박상진의사와 가깝게 지내던 이웃들도 왜경들한테 불령선인(不逞鲜人)으로 락인찍히는게 두려워서 감히 그들과 상대하지 못하였고 박상진의사의 친척들은 헌병경찰의 감시에서 벗어나려고 정든 고향을 버리고 눈물겨운 타향살이를 해야만 했다. 광복을 맞은 후 본국으로 돌아온 대한광복회의 성원들은 나라의 부흥을 위해 재기하려고 힘썼지만 “대한광복회”의 재건운동도 계획처럼 순탄하지 못하였다. 대한광복회의 후임회장을 맡았던 리종태가 조선의 독립운동을 위해 몸바쳐 싸웠던 대한광복회의 회원들에게 일떠나서 새나라건설에 뛰여들것을 호소하는 다음과 같은 격문을 썼다..   생존한 동지는 본부로 오라! 우리 한성에 광복회가 부활되였다. 그 리유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과거 을묘(1915)년 7월 15일(양력 8월 26일) 경상도 대구 달성공원에서 총사령 고 박상진씨가 우리 대한팔도의 의병장령 2백수십인을 망라하여 조직된 이후 그 실행에 들어갔다. 압수한 세금과 의연금 3백여만원을 모집하여 무장을 계획하고 한편으로는 친일파 장승원,박용하의 사형을 집행하고 만주에 사관학교를 설립하여 사관생도 만여명을 교련하던 도중에 왜적들의 탄압을 받아 박상진 외 20여인의 사형과 초살자가 나고 3백여명이 체형을 받은 사건은 실로 몸서리쳐진다.  이것이 바로 광복회 공주사건이다.  원래 광복회의 정신은 정치적인 색채를 떠나서 우리 국민이 왜놈에게 강탈된 것을 광복하기 위한 군사성격으로 구성된 정신적인 단체인만큼 본 광복회원은 자자손손 목적을 달성하기까지 계속할것을 천지신명께 맹세하였다. 따라서 이 광복회원가운데는 3형제를 비롯하여 전 가족 내지 3대까지 희생된 사실도 있음은 광복회의 특별한 혈투사라 아니할수가 없다. 그밖에도 해외로 망명하여 활동중에 상해의 우리 림시정부 수립에 있어서는 본회원으로서 손보현, 박환, 한훈 등 여러사람의 출석이 있었다. 리상룡씨의 수석 참가를 비롯해 로백린씨의 주비단조직을 련합하여 심영택, 안종운씨 등의 만주동포에 대한 무장계획이며 김좌진씨의 만주에서의 군사적 활약과 김성옥씨의 왜놈들 가슴을 놀라게 한 사건 등 이 모든 사건들이 모두 광복회와 직접 또는 련결된 거사였다.  본회 우재룡씨같은 분이 그 일생에 무기체형을 두번씩이나 받고도 지금까지 생존해 건국사업에 다시 활약하게 된것은 광복회의 신기한 사실이라 아니할수 없다.  그 당시 광복회원은 3만여명이 국내외로 각기 분산하여 개성적인 활동을 하게되니 이 개성적 활동 그 자체가 미약해짐도 사실이나 이에 따른 왜놈들의 탄압과 강압밑에 광복회의 국내적 활동은 일시 침체상태였다. 우리나라 5천년의 국수적 정신을 한몸에 지니고있었으며 국제적 보장아래 우리 광복회는 건국의 사명을 완수코저 적합한 내부조직으로 본부를 한성시 전동 3번지에 두고 회장은 만국평화회의에서 세계를 놀라게 하고 만고불멸 일월병명할 정충대의사 해아 전권대사 리상설, 리종태, 리준통역관,리위종 일행중 한분이신 리종태씨의 통솔하에 있다.  기동,외무,발명,총무 4국제도로 개편하여 우리 신정부수립 도상에 대하여 군정을 협조하며 우리 국가적 대의와 정도유래의 모든 정신을 총집중하여 혼란한 현 정치정세의 과도적 건국통일에 이바지하고저 본 광복회원은 재집회를 명하니 생존한 회원과 그 유족은 광복회 본부로 통신하여주기 바란다.                                대한광복회장 리종태 (인)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조선반도는 리념이 같지 않은 두개의 정권이 통치하였다. 조선의 남반부에서는 미 군정이 광복전에 일제의 앞잡이질을 하며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던 매국적들과 손을 잡고 국정을 운영하였다. 그들은 중경에 있던 대한민국 림시정부의 김구주석을 비롯한 정부 성원들도 집단적으로 입국하지 못하게 하면서 그들이 오직 개인의 이름으로만 입국하는것을 허락하였다. 대한민국 림시정부의 초대주석을 지낸 리승만과 미 군정은 자신들의 권세욕에 의해 대한민국림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았다. 중국대륙에서 항일투쟁을 벌이던 애국자들이 국내에서 합법적인 정부로 국사를 맡는다면 리승만과 미 군정의 통치에 불리하기 때문이였다. 그뿐만이 아니였다. 항일투사들이 남조선에서 정권을 잡는다면 친일파들이 청산을 당할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였다. 때문에 권력의 보좌에 오른 친일파들은 천방백계로 항일투사들이 건국활동에 참여하는것을 방해하였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장렬하게 희생된 렬사들의 공적을 매몰시키기에 광분하였다.  광복이 된지 3년이 지난 1948년 9월 7일에 제헌국회에서는 반민족행위 특별법을 제정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로 략칭)를 성립하기로 결정하였다. 그해 10월 10월 13일에 반민특위가 정식으로 성립되여 두달동안의 준비와 조사를 거쳐 1949년 1월초순부터 반민족행위자들에 대한 검거에 나섰다. 하지만 그들의 정당한 행위는 반민족 친일파들의 필사적인  저항에 부딪쳤다. 서울시 경찰서에서는 수뇌간부들이 밀모하여 반민특위의 간부들과 특위 소속의 국회위원들에 대한 암살을 감행하였다.그뿐만이 아니였다.2월 9일에 리승만정부에서는 반민특위의 공작에 저항하면서 소위 “지금은 일체 력량을 동원하여 국가의 재건에 주력해야하므로 정부내의 해당자에 대한 조사를 중단한다.”고 공포하였다. 이로하여 헌법에 의해 성립된 반민특위는 공작에서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해산되였다.  대한광복회와 박상진의사의 공적을 말살하는데 앞장에 서서 지휘한 자는 당시 리승만정부에서 경무국장을 지내다 후에 국무총리의 보좌에까지 오른 장택상이란 친일파다. 장택상은 대한광복회에서 처단한 친일악질분자 장승원의 둘째아들이였다. 그놈은 자기의 부친을 처단한 대한광복회 및 총사령 박상진의사와는 불공대천지 원쑤였다 해방이 되자 살아남은 광복대원들과 그 유족들이 뜻을 모아 대한광복회를 다시 재건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들은 장택상는 분이 치밀어서 펄펄 뛰였다. “안돼! 그자들은 우리 아버지를 살해한 강도집단이다. 그자들이 영원히 일어나지 못하도록 꽉  밟아버렸…” 장택상은  수하에게 대한광복회와 관련된 일이면 일률로 관여하지 못하게 지시했던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였다. 장택상은 대한광복회와 박상진의사의 력사적 공적이 만천하에 알려지는것이 두려워서 암암리에 졸개들을 파견하여 대한광복회와 관련되는 유적과 자료를 훼멸시키기에 갖은 수단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까마귀의 날개로 태양을 가리울 수 없듯이 박상진의사와 대한광복회의 력사적 공적은 친일파들의 검은 손으로 영영 지워버릴수는 없었다. 1960년 4월 19일 서울에서 4.19혁명이 일어났다. 3월 18일에 부정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되였던 리승만은 종신 대통령을 하려던 꿈을 실현하지 못하고 한달 하루만에 백성들의 버림을 받고  권좌에서 물러나고 7월 29일 총선에서 민주당이 대승을 거두었고 8월 12일에 윤보선(尹谱善)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8월 23일에 장면(张勉)내각이 성립되였다. 대한민국에는 박상진의사추모사업회가 발족하였고 동년 9월 15일에 울산 학성공원에 대한광복회총사령 박상진의사 추모비의 제막식이 있었으며 울산시 중구 북정공원에 박상진의사의 동상이 세워졌다. 새로 정권을 잡은 민주당은 정돈과 재결합을 거쳐 신민당으로 개칭했는데 원로파와 소장파들의 갈등이 날로 가심해져서 국정이 파탄에 이르게 되였다.이 혼란한 틈을 타서 박정희의 5.16 쿠데타가 성공하였다.국정이 초보적인 안정을 얻자 대한민국정부에서는 독립유공자들에 대한 포상이 진행되였다. 1963년에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박상진의사에게 건국훈장(독립장)을 추서하였고 1978년에는 박상진의사추모사업회를 국가보훈처에 사단법인으로 등록하였다. 1996년 8월에 대한민국 국가보훈처와 광복회, 독립기념관에서 박상진의사를 공동으로 로 선정하였다. 1996년에 박상진의사 순국 75돌을 맞아 “한의 독립투사 박상진”,”조국 광복의 홰불 박상진” 등 전기집 2종이 발간되였다. 2007년에는 박상진의사의 생가를 복원하여 “박상진의사 기념관”을 만들고 만여점의 유물을 수장하였으며 생가를 찾아가는 길을 박상진로(고헌로)로 명명하였다.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박상진의사의 위대한 업적을 평가하는데 아직 거리가  너무나 멀다. 대한민국에서의 “우리 력사 바로잡기”운동이 심입됨에 따라 학자들의 박상진의사에 대한 연구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박상진의사와 그가 창립한 대한광복회는 불원한 장래에 력사의 공정한 평가를 받을것이다. 박상진의사여 영생불멸하시라.                            2008-05-01 초고                            2008-08-25 수개       머리글      간악한 일본제국주의가 삼천리 금수강산을 침략하여 조선을 일제의 식민지로 삼은 1910년의 한일합방때로부터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던 이 10년동안은 일제의 잔혹한 탄압과 무단통치가 극도에 이르렀던 시기였다.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삼천리강산 방방곡곡에서 의병들이 벌떼같이 일어났지만 그들의 반일투쟁은 일제의 무차별진압에 의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번번히 실패했다 .              이 암담한 시기에 나라와 백성들을 불구덩이에서 건져내려고 일떠난 애국지사의 한사람이 바로 고헌 박상진(1884_1921)의사이다.조선조 말기 명성높은 문한가(文翰家)에서 태여난 그는 어릴때부터 량호한 가정교육을 받았다. 다섯살때부터 한시를 잘지어서 신동이라 소문난 그는 령남유림의 거두인 허훈선생과 허위선생이 꾸린 흥구의숙에 들어가서 정치,력사, 병학 등 새지식을 배웠고 영웅,렬사들의 전기를 탐독하면서 강한 애국심과 원대한 포부를 키웠다. 그는  대한제국이 성립되자 조정의 부름을 받고 상경하여 국내 최고법관으로 계시는 허위선생의 인도하에 국내에서 처음으로 근대교육을 실행하던 양정의숙에서 입학하여 나라를 바로 세울 새로운 학문을 배웠다. 을사륵약(乙巳勒约)의 체결로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제에게 완전히 빼앗기자 허위선생이 대한제국의 최고판사직을 사퇴하고 의병을 일으켰을 때 박상진의사는 양정의숙에서 재학중인 학생신분이였지만  의기상합한 동지들을 규합하여 물심 량면으로 의병운동을  크게 도왔었다. 양정의숙을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한 박상진의사는  대한제국에서 처음으로 치르는 판사시험에 참가하여 국가적으로 뽑은 7명의 판사중 수석으로 선발되여 평양재판소의 판사로 발령받았다. 그러나 그는 부임직전에 한일합방(韩日合邦)이 체결 되였다는 비통한 소식을 듣고 나라를 구하는 투쟁을 벌이려고   판사직에 부임하는것을 결연히 거절하였다. 박상진의사는 독립운동을 준비하기위해 만주와 연해주로 건너가서 애국지사들을 만나 독립운동의 방략을 토의하였으며 구국의 진리를 체득하려고 두차례나 바다를 건너 중국의 남경, 상해, 광주 등 지방으로 가서 봉건전제제도를 뒤엎은 중국의 사회현실을 료해하였고 중화민국을 창건하고 초대림시대통령을 지낸 중국민주혁명의 선구자 손중산선생을 만나 신해혁명의 경험을 학습하고 조서국광복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였다. 반일무장투쟁을 진행하려면 무엇보다 중요한것이 충족한 군자금의 보급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아는  그는 자금을 마련할 기반을 닦기위해 자기집의 칠천석에 달하는 토지를 모두 담보로 하고 대부금을 내서 대형의 무역회사인 “상덕태상회”를 꾸리였다. 동시에 그는 “상덕태상회”의 지사를 전국 각지와 해외에 까지  꾸려 조국광복투쟁에 필요한 군자금을 마련하는 한편 상덕태상회와 그 해내외 지점들을 의병운동을 진행하는 애국지사들의 비밀거점으로 삼았고 만주에 진출한 의병장들이 반일투사들의 자질을 제고시키기 위한 신흥군관학교를 꾸릴  자금도 마련해주었다.      박상진의사는 “조선국권회복단중앙본부”를 세우고 반일투쟁을 진행하다가 채기중이 령도하는 “풍기광복단”과 국내에서 반일투쟁을 벌이고 있는 의병들을 규합하고 계몽운동을 결합하여  전국적인 반일결사조직인 “대한광복회”를 결성하고 총사령으로 추대되였다. 그는 오로지 계몽운동과 무장투쟁을 밀접히 결합시키는것만이 나라를 구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진리를 굳게 믿고 계몽운동을 진행하는 한편 일본제국주의자들과 그 앞잡이들을 지혜롭게 처단하면서 광대한 인민군중들에게 반일광복투쟁의 필승의 신념을 심어주었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일본헌병 경찰들의 폭압에 의해 국내에서 무장투쟁을 벌이기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하자  박상진의사는 광복회원 리진룡을 일제의 세력이 상대적으로 박약한 중국 동북지역을 책임진 광복회부총사령으로 파견하였다가 리진룡이 체포되자 그 후임으로  김좌진장군을 파견하여 청산리전투를 비롯한  반일무장투쟁에서 눈부신 성과를 이룩하였다. 박상진의사는 항일투쟁의 전 국면을 고려하여 본인의 안위를 티끌만치도 생각하지 않고 결연히  신변의 안전이 극히 악렬한 국내에 남아서 반일투쟁을 지휘하였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후 대한민국림시정부가 수립되기 전인 비록 짧디짧은 10여년간이지만 박상진의사는 조국광복의 홰불을 들고 반일구국투쟁의 진두에서  빛나는 업적을 이룩하였다. 생모의 초상을 맞아 고향에 왔다가 상청(丧厅)에서 왜놈경찰에게 불행하게 체포된 뒤 박상진의사는 감옥을 자신과의 투쟁장소로 삼고  왜놈들을 호되게 꾸짖었으며 3년 8개월이나 되는 긴 시간동안 놈들의 무려 수십종에 달하는 비인간적인 악랄한 고문에도 입을 철통같이 다물고 비밀을 지켜 혁명가로서의 지조를 지킨 어엿한 귀감으로 되였다. 사형을 당하던 날 박상진의사는 형장으로 나가기 전에  다음과 같은 절명시를 남기였다.   절명시. 다시 태여나기 어려운 이 세상에                        다행히 남자로 태여났건만 아무 일도 이루지 못하고 떠나가려니 청산도 조롱하고 록수도 비웃네. 绝命诗 难复生此世上 幸得为男子身 無一事成功去 青山嘲水嚬   박상진의사의 짧고도 빛나는 일생은 우리 후손들에게 무궁무진한 자호감을 안겨주고 있다. 박상진의사가 창건하고 령도한 대한광복회의 회원들은 박상진의사의 유지를 받들고 중국에서 반일투쟁을 활발히 벌이였는데 광복회의 회원수는 2천여명에 달하였다. 그들중의 일부는 후에 대한민국림시정부의  골간으로 활약하였다. 한국에서 1960년에는 박상진의사추모사업회가 발족되였고 그해 9월 15일에 울산시 달성공원에 박상진의사 추모비의 제막식이 열렸다. 1963년 대한민국정부에서는 박상진의사에게 건국훈장(독립장)을 추서하였고 1978년에는 박상진의사추모사업회를 국가보훈처에 사단법인으로 등록하였다. 대한민국정부에서는 1996년 8월에 박상진의사를 로 선정하였고 박상진의사의 동상도 세웠다. 2007년에는 박상진의사의 생가를 복원하여 으로 만들고 만 수천점의 유물을 전시하고있다. 박상진의사와 에 대한 연구는 날이 갈수록 깊이있게 진행되여 천구백십년대 조선인민의 반일투쟁력사의 공백을 메우고있다.   1. 될성부른 나무   백두대간 산줄기를 타고 남으로 내려오면 금강산, 설악산,오대산을 거쳐 태백산맥에 이르게 된다.이곳으로부터 백두대간과 갈라져 동해안을 따라서 남으로 뻗어내려간 산줄기가 락동정맥이다. 룡이 춤추는 형상을 이룬 무룡산(舞龙山)은 그 락동정맥의 끝자락에 위치한 항구도시  울산을 지켜온 성스러운 수호산이다. 울산에서 북으로 십여리를 내려가면 무룡산서쪽으로 확 터진 넓은 벌이 있다. 이 평야에 수십호의 농가가 있다. 마을에 여러그루의 소나무가 정자모양을 하고있어서 마을 이름을 송정(松亭)이라 하였는데 마을에는 밀양박씨 제 48세 청풍당(清风堂) 박영손(朴英孙)의 후손들이 살고있다.  1884년 음력 섣달 초엿새날, 무룡산우로 서서히  솟아오른 아침해가  겨울날의 추위를 몰아내려는듯 눈부신 해살을 부채살같이 펼친다. 여느때와 달리 오늘은 서기어린 광채가 마을 중심에 자리잡은 “ㅂ”자모양의 박진사댁 안뜰에 감돌고있다. 박진사댁이란 령남에서 문장가로 명성이 높은 박용복(朴容復)진사네가 대대로 살아오던 옛집을 말한다. 박진사는 여러해전에 린근 록동마을( 지금의 경주군 외동면)에 새로 집을 지어 이사갔고 지금 고택에는  호적을 경주군 록동리에 둔 박헌복의 양아들 박시규(朴时奎)일가가 살고 있다. 박시규는 박진사의 세째아들이였다. 박진사는 자기의 친동생인 박헌복(宪復)댁에 아들이 없었으므로  그의 세째아들 시규를 동생댁의 대를 잇게  양자로 출계(出系)시켰다. 지금 박시규는 송정동마을에 있는 박용복진사의 이 옛집에서 양부모를 모시며   살고있다.  박시규댁에서는 이른 아침때부터 온 집 식구들이 초조감에 싸여 신경을 곤두 세우고있었다. 여러해동안 애기의 울음소리 한번 울리지 않던 박씨가문에서 박시규의 안해가 출산을 하게되는 날이였기때문이였다. 그런데 임신부가 몸을 풀려고 산실에 들어간지 반나절이 되였는데 산실쪽에서는 아직까지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혹시 난산이 아닐가? 아무리 첫아기를 낳는다지만 이렇게 오래 시간을 끌수가 있나? 박씨댁사람들은 뇌리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런 말을 감히 입밖에 내놓지 못하였다. 녀자가 시집을 가서 아기를 낳는것은 여상사지만 박진사댁은 남들과 사정이 달랐다.  오늘 태여나는 아기는 성별에 따라 운명이 달라지는 처지에 놓여있었다.   오늘 박시규의 안해가 딸을 낳는다면 그 딸은 박헌복의 손녀로 될것이지만 만약 아들을 낳는다면 그 아기는  박용복진사의 양손자로 될판이였다.  박진사의 큰아들 시룡이의 슬하에 그때까지 일점혈육이 없는데다가 둘째인 시긍(时兢)이 마저 슬하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요절한 처지여서 박용복진사는 가계가 끊어질 위기를 맞고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동생 헌복의 가계를 잇도록 출계시킨 시규가 아들을 낳으면 그 아기를 다시 시규의 형님인 시룡(时龙)에게 양자로 주도록 결정했기 때문이였다.  출산을 할 예정한 시간이 조금 지났건만 산실쪽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어쩐지 불안스럽구나.의원이라도 불러야 되지 않을가?” 사랑방에서 동생과 마주 앉아 바깥의 동정에 귀를 곤두 세우고 있던 시룡이가 동생 시규에게 넌지시 물었다.  “산실에 어머님과 형수님이랑 다 계시고 또 린근에 소문난 산파까지 데려왔으니 과히 우려할 필요는 없을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수씨께서 워낙 초산을 하는지라…”  그들이 한창 걱정을 하고있을 때 산실쪽에서 누군가 급히  달려오는 소리가 났다. 시규가 방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자기집의 하인이였다.  “산실에서 무슨 소식이 없더냐?”  “예, 방금 마님께서 순산했나이다.”  “아들이더냐, 딸이더냐?”  박시룡이 궁금해서 급히 물었다.  “달덩이같은 귀동자를 생산했다 하옵니다.”  “참으로 천우신조(天佑神助)로군.호-”  형님인 시룡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였다. 시룡이는 슬하에 아들이 없어서 근심걱정이 태산같았는데 다행히 제수씨의 몸에서  자기의 대를 이을 양자가 태여났으니 그 기쁨은 실로 이를데가 없었다. 동생인 시규도 자기 사랑의 첫결정을  자식이 없는 형님댁에 바쳐야하는 서운함이야 이루 표현할 수 없었지만 종가집의 대부터 잇게 하는 것이 가문의 어길수 없는 법도라 자기 안해가 순산을 한것만으로도 한시름을 놓아야했다.   박진사의 가문에서는 2십여년만에 처음으로 고추가 달린 아들애가 태여났으니 경사치고도 으뜸가는 경사라  집안팍은 온통 기쁨으로 들끓었다.  박진사는 이 귀한 손자애의 자(字)를 기백(玑伯)이라 하고 호(号)를 고헌(固轩)이라 명하고 관명을 항렬에 의해 상진(尚镇)이라 지었다.   양자로 태여난 상진이는 어미 배속에서 나온지 백날만에 생모 리씨의 품을 떠나 큰어머니인 박시룡의 부인 창녕조씨의 품안으로 옮겨졌다. 너무도 어릴때 양부모댁으로 넘어간 상진이는 철들기전까지 양부모를 친부모로 알고 친부모를 숙부모로 알고 자랐다. 온 가족의 사랑을 한몸에 안은 상진이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양부 양모가 계시는 경주 록동과 생부 시규,생모 여강리씨가 계시는 울산 송정을 오가면서 충실하게 자랐다.  일찍 고향인 영천에서 살다가 울산으로 이사와서 울산의 거부들과 인척관계를 맺은 박용복진사는 살림이 잘풀려 몇해만에 만석거부로 되여 경주와 울산일대에 많은 토지를 차지하고 있었다.그는 울산린근의 토지를 관리하기 위해서 송정에 고택을 보유하고 있었고 그 고택을 박상진의 생부인 아들  시규로 하여금 그의 양부가 된 동생 헌복을 모시고 함께 살게끔 하였다. 그 시기에 조정에서는 울산을 비롯한 몇몇 변방지역은 문인이 나지 않는 벽지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 지방 출신의 선비들을 깔보고 그 지방의 선비들이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는것을 내부적로 규제하는 지역차별이 엄중하였다. 대대로 내려오면서 문장가와 인재를 속출한 박씨가문에서 조정의 지역차별로 인해 자손들의 벼슬길이 막히는것은 도저히 용납할수 없는 일이였다.그렇다고 이 일을 가지고 칼자루를 쥔 조정과 맞서 싸울 힘도 없는 처지였다. 박용복진사는 자손들의 출세를 위해 력대로 문인들이 많이 나온 경주지역의 록동마을에 사택(私宅)을 마련하고 일가족의 호적(户籍)을 다 경주의 록동에 올리였다. 박용복진사는 울산에 토지가 많이 있었으므로 동생 헌복네를 호적은  록동에 두고 울산 송정의 고택에서 살면서 울산지방의 토지를 관리하게 하였다.그리하여 박진사와 헌복의 자식들인 시룡, 시규 두 형제가 벼슬길에 오르는데 아무런 장애도 없게 되였다. 상진이가 두살 잡히던  1885년(고종22년)에 그의 생부인 박시규가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그는 조정의 부름을 받고 안해와 자식들을 시골에 남겨두고 서울로 올라갔다.학문이 뛰여나고 명필인 그는 성균관(成筠馆)의 전적(典迹)으로 벼슬살이를 시작하여 사간원(司谏院)의 정언(正言), 홍문관(弘文馆의 시독(侍读), 장례원(掌礼院)의 장례(掌礼), 규장각(奎章阁)의 부제학(副提学), 승지(承旨) 등 관직을 력임하였다.   박진사댁에서는 남녀로소 가릴것 없이 누구나 다 학문을 숭상하였기에 어린 상진이도 말을 배우자마자 할아버지가 계시는 사랑방으로 들어가서 “천자문(千字文)”, “동몽선습(童蒙先习)”,”명신보감(明心宝鉴)” 등을 배우고 또 한시(汉诗)까지 배웠다. 워낙 총기가 출중해 하나를 배워주면 열을 통하는 상진이는 다섯살이 되자 몇백수의 한시를 줄줄 외웠을뿐만 아니라 자체로 시를 지어 읊어서 어른들을 놀래웠다. 박진사댁에 놀러 왔다가 어린 상진이가 즉석에 시를 지어서 읊는것을 본 선비들은 혀를 털고 탄복하면서  문한가문에서 또 신동(神童)이 나왔다며 칭찬을 금할줄 몰랐다.   상진이가 다섯살에 든 어느 봄날이였다. 상진이가 정원을 나와 밖에서 마을의 소꿉놀이 친구들과 뛰여놀다가 점심때가 되어 집으로 달려와 막 대문을 들어서려는데 대문곁에서 한 로파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문난 부자집에서 거지대접이 너무 한심하구나. 돌이 섞인 나락을 주다니, 애구, 기가 맥해서...”   상진이가 고개를 돌리고보니 누데기옷을 입은 머리카락이 하얗게 샌 낯선 할머니가 대문밖을 나오고있었다. 상진이는 그 할머니앞에 다가가서 자루에 든 나락을 보았다. 자루에는 그 할미의 말과 같이 잔 돌이 드문드문 보이는 나락이 한바가지쯤 담겨있었다.   비럭질하는 할머니한테  어떻게 돌이 섞인 나락을 준단 말인가? 상진이는 집의 마름의 처사가 몹시 마음에 거리꼈다.   “할머니. 저와 함께 안으로 들어가세요. 제가 좋은 나락을 바꿔드릴께요.” “아니, 됐다.나는 네 말만 들어도  마음이 기쁘구나.” “아니예요. 어서 들어오세요.” 상진이는 그 거지할머니의 소매를 잡아끌면서 정원으로 들어왔다. “와 일캐쌌노? 동냥바가지를 깨문 우짤락고”   거지할미는 으리으리한 대문안을 들어오는것이 두려워서 오돌오돌 떨었다.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거예요. 제가 어머님께 말씀드릴테니 여기서 잠간 기다리세요.” 상진이는  안방으로 뽀르르  달려가서 어머니한테 도리를 따졌다.  “어머니, 어머니께서 동냥온 할미에게 닭모이로 쓰는 돌 섞인 나락을 주셨나요? 그걸 가져가서 어떻게 돌을 골라먹으라는 거예요? 거지도 우리나 같은 사람인데 사람대접을 해야 되잖아요?”   다섯살난 어린 아이의 입에서 어른도 미처 생각 하지 못할 말이 나오는것을 들은 하인들은 은근히 감탄하였다.   어린 아들의 말을 듣고 크게 깨우친 어머니가 광앞에 와서 청지기더러 방아찧어 먹으려고 남겨둔 벼섬에서 좋은 벼 한자루를 채워 거지할미에게 주게 하였다.   뜻밖에 좋은 벼를 한자루나 얻은 거지할미는 입이 함박만해져 집에 돌아갔다. 거지할미는 사람들을 만나면  박진사댁의 어린 아들 상진이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였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니깬. 다섯살난 애가 어쩌문 소견이 그리도 넓담, 박진사댁의 공자는 장차 큰 사람이 되구말거라우.”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그 거지할미의 입을 통해 어린 상진이의 선행은 경주 록동과 송정지방은 물론이고 린근의 고을에까지 미담으로 전해졌다. 그 뿐만이 아니였다. 어린 상진이는 마을에 사는 다른 량반댁의 자식들과 달리 가난한 집의 어린이들과 함께 놀기를 즐기였다.그는 종래로 온 몸이 흙투성이인 가난한 집의 애들을 깔보지 않았고 그들과 함께 땅에서 딩굴며 놀았다.  그는 집에  맛나는 음식이 생기기만 하면 찬장을 뒤져 음식을 가지고와서 애들과  나눠먹었다. 동정심이 남달리 강한 그는 옷이 너무 떨어져서 살점이 보이는 애들을 보면 서슴없이 자기가 입던 옷을 벗어서 입혀주군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어머니는 해마다 상진이에게 새옷을 여러벌 해주어야만 했다. 그 마을에 김포수라는 사냥군이 살았는데 그에게는  장쇠라는 아들애가 있었다. 장쇠는 상진이가 일반 량반댁의 자식들과 달리 붙임성이 좋고 사람됨됨이가 훌륭한것을 보고 그와 딱친구로 사귀려 하였다. 두 사람은 만나서 얼마동안 세상이야기를 나누어보니 서로 마음이 맞고 뜻이 맞았다. 그들은 량반과 상민의 계선을 벗어나서 절친한 친구로 되어 밤마다 만나면 이야기에  꽃을 피웠다.그 뒤 김장쇠가 의병운동에 참가하게 된것도 어릴 때 상진이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였다.  상진의 생부 박시규가 문과에 급제한지 5년, 즉 상진이가 일곱살에 들던 1890년(고종 27년)에 그의 양부인 박시룡도 문과에 급제하였다. 박씨가문에서는 련이어 경사를 맞게 되니 집안팎에서 어른아이없이 누구나 학문에  진력하는것을 락으로 삼았다. 상진이는 마을 서당에 가서 “4서3경”과 고문을 배웠는데 상진이가 워낙 총명하여 배워주는것을 모두 다 터득하니 몇해가 지나자 서당의 스승도 그의 물음에 대답을 하기 어려워서 진땀을 흘릴때가 많았다. 그리하여 상진이는 서당에서 공부가 끝나면 집에 돌아와서 학문이 연박한 할아버지한테 의문되는것을 물어야만 하였다.   상진이가 열두살이 되던 해에 가문의 좌장인 할아버지 박용복진사가 로환으로 병석에 누웠다. 자신이 이 세상에 며칠 더 생존하지 못하리라는것을 짐작한 박진사는  후사를 부탁하려고 동생 헌복이며 아들 시룡이와 시규 그리고 조카인 시수와 종손인 규진 등 일가족 사람들을 사랑으로 불렀다. 찾을 사람들이 다 사랑방에 모이자 박용복진사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나도 이생에서 살만큼 살았으니 이젠 떠날 때가 다가왔나보구나. 이제부턴 너희들이 우리 가문을 지켜야 하느니라.…  상진이는 장차 우리 가문을 빛내고 나라에 큰일을 할 비범한 재주를 지녔으니 걔에 대한 교육을 추호도 늦춰서는 아니 되느니라. 내가 죽고나면 상진이를 진보면에 있는 흥구의숙으로 보내거라. 그곳에 가서 충신렬사의 기개를 지닌 허위선생을 스승으로 삼도록 조처하거라. 이 일은 시수나 규진이가 인도해주도록 하여라. 이건 내 유언이니 모두들 명심하거라.” “네, 명심하겠습니다.” 모인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하자 박진사는 회심의 미소를 보였다.자식들에게 유언을 남긴 박용복진사는 며칠뒤 조용히 눈을 감았다.  박씨가문에서는 박용복진사의 장례를 치른 뒤 모여앉아 상진이를 허위선생이 계시는 흥구의숙으로 보내여 공부시킬 일을 토의하였다.그런데 흥구의숙에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겨서 상진이를 잠시 보낼수 없게 되였다.                                       박상진의사의 생가 .           2.태백호랑이와 의형제를 맺다   상진이가 13세가 되던 1896년에 왕산 허위는 리기찬 등과 의병을 일으켰다. 조정에서 백성들이 대대손손로 써내려오던 음력을 폐지하고 일본인들이 쓰는 양력을 사용하도록 명을 내리고 긴 머리태를 깎아버리라는 단발령(断发令)이 내려졌던것이였다. 조선의 백성들 특히 유림(儒林)들은 이 모든것이 일제에 의해 강요된 천벌을 받을 짓이라며 분노했다. 그들은 선산일대에서 의병들을 거느리고 당지에 둔거한 왜놈들을 용감히 무찔렀다. 당시 의병대장은 리기찬이였고 허위는 참모장이였으며 중군은 량제안이 맡았다.이와 때를 같이하여  소년장군 신돌석(申乭錫)도 평해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신돌석 /신돌석장군기념비, 경북 영덕군 영덕읍 신돌석은 본명을 신태호(申泰浩) 또는 신태을(申泰乙)이라 하였는데 경북 영해군 남면 (지금의 영덕군 축산면)의 가난한 농민 신석주(申錫柱)의 장남으로서 1878년 3월에 태여났는데 그때 나이가 겨우 19세밖에 되지 않았다. 어릴적부터 남달리 의협심이 강하고 정의감에 불탄 그는 의병운동에 뛰여들어 중군장으로 되여 백여명이나 되는 의병을 거느리고 동해안에 들어온 왜병들의 거점을 여러개나 점령하였다. 신돌석은 왕산 허위와 밀접하게 래왕하면서 서로 정보를 교환하여 왜놈들을 쳤기에 왜놈들은 신돌석을 “태백산호랑이”이라고 하면서 그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 한다. 경주 록동에서 수학하던 박상진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 필마단기로 왜적들을 수없이 쓸어눕혀 “태백산 호랑이”라 명성이 뜨르르한 소년장군 신돌석의 전투담을 들을 때면 격동되어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도 커서 어른이 되면 신돌석장군처럼 의병을 이끌고  간악한 왜놈들을 이 땅에서 깡그리 몰아내고야 말테다. 의병들이 일본침략자들을 호되게 족치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상진이는 마음속으로 그들을 무한히 흠모하면서 장차 자기도 어른이 되면 신돌석과 같은 의병장이 되어 침략자들을 깡그리 소멸하겠다고 속다짐하였다.  이듬해 즉 상진이가 열네살이 되던 1897년에 고종임금은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고치고 대한제국의 황제로 등극하였다. 황위에 오른 고종황제는 국세를 안정시키려는 목적에서 전국각지에서 활동하는 의병장들에게 의병을 해산시키라는 밀지를 내렸다. 의병장 왕산 허위는 고종황제의 선유밀지를 받고나서 의병을 해산시키고 맏형님 허훈이 계시는 진보읍 홍구동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소년장군 신돌석도 고종황제의 선유밀지를 받들고 자기가 거느리던 의병들을 잠시 해산시키고나서 고향인 울산 송정마을에 돌아와  은거하면서 재기할 기회를 노리였다.  평소에 그렇게도 흠모하던 소년장군이 바로 자기가 태여나고 또 생모가 계시는 송정마을에 와서 은거하고있다는 소식을 들은 상진이는 날것만 같이 기뻤다. 그는 이 반가운 소식을 접하자 당일저녁에 송정마을로 달려왔다. “신대장님, 댁에 계십니까?” 신돌석이 거처하는 집을 찾은 박상진은 울안에 들어서자마자 급한 마음으로  물었다. “거 누구시오?” 밖에서 나는 소년의 목소리에 흠칫 놀란 신돌석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는 이 마을 박진사댁의 손자 상진이옵니다.” “아, 박상진이라, 어릴 때부터 신동이라 소문이 자자하던 그 상진군이 아니시오? 어서 방안에 들어오시오.”  신돌석은 바삐 일어나서 방문을 열어주었다. 신돌석이 자기를 찾아온 소년을 보니 비록 애티는 완전히 벗지 못했지만 두눈에 정기가 어리였고 체구가 튼튼하고 기상이 름름하여 이내 마음이 자석같이 끌리였다. “어서 방우로 올라오십시오.” 신돌석은 열정스레 상진이의 손을 잡아당겼다. “신장군님, 먼저 저의 절을 받으십시오.”  박상진이 신돌석의 앞에 엎드리자 신돌석도 답례로  마주 엎드려 절을 하였다. 인사를 나누고나자 상진이가 다급히 말했다.  “저는 의병들의 전투담을 들으면서 장군님을 우러른지가 오래였지만 오늘에야 존안을 뵙는 행운을 맞게 되였습니다... 저는 아직 나이가 어리고 사회견문이 적지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만은 장군님과 다르지 않습니다. 저는 장군님을 의형으로 모시고 장군님과 생사고락을 함께하고싶습니다.”  “아니, 상진군이 미천한 나와 의형제를 맺겠다고요? 말씀만은 고마우나 불가한 일입니다. 상진군은 우리 령남 유생의 거두인 박진사댁의 장손이자 홍문관 시독님의 자제분이고 나는 일개 미천한 농부의 아들인데 지체가 하늘땅과 같이 차이나는 우리들이 의형제를 맺는다는것은 가당치 않은 일입니다.” 신돌석은 상진이가 일시적 혈기로 의형제를 맺겠다고 말한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로부터 지체가 천양지차인 두사람이 의형제를 맺었다는것은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였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나라의 운명이 시방 풍전등화에 이르렀는데 아직까지 량반상민따위를 따진다는게 어디 말이나 됩니까? 우리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든것도 다 그 몹쓸 신분제도 탓이 아닙니까? 지체야 높든 낮든 우리는 다 단군할아버지의 후손들입니다. 마음이 맞고 뜻이 같은 사람들이 의형제를 맺고 서로 도우면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바쳐 싸우려는데 안될 리유가 어디 있습니까?”  상진이가 도리를 따져가며 의형제를 맺자고 고집하자 신돌석이도 대방의 진정에 깊이 감동되여 더는 사양하지 않았다.  “상진군의 뜻이 진정 그러하다면 난들 왜 반대를 하겠소? ” “그럼 장군님께서 허락하신단 말씀이지요?” “그야 물론이지요.” 그들은 사발에 찬물을 떠놓고 서로의 피를 떨궈 골고루 섞은 뒤 천지신명께 맹세를 하고 두사람의 피가 어린 찬물을 마셨다. 상진이가 신돌석보다 여섯살이나 아래였으므로 신돌석이 당연 의형이 되고 상진이는 의제로 되였다.  “형님, 어느때든 형님께서 다시 의병을 일으키실땐 저를 불러주십시오. 형님의 부름만 있으면 이 동생은 어느때 어디든지 한달음에 찾아가겠습니다.”  “그렇게 하세. 자네는 아직 나이가 어리고 한창 공부할  때이니 지금은 다른 생각을 하지 말고 학업에만 주력하게.” “형님의 가르침을 명심하겠습니다.”  상진이는 다음날 서당에 공부하러 가야했으므로 서운한 마음으로 신돌석과 작별하는 수 밖에 없었다. 집에 돌아온 상진이는 고도로 흥분되여 온 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그는 학업에 더욱 열중하는 동시에 장래에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준비로 의기상합한 동지들을 모으는데 힘을 썼다. 그는 서당에서 학습을 하다가 여가만 있으면 생모가 계시는 송정으로 달려가서 의형 신돌석을 만나 나라의 형세와 의병투쟁에 대한 이야기를 듣군 하였다.                   3.흥구의숙(兴邱义塾)에서   박진사의 초상을 지내고 3년상을 마치자 양부 시룡과 생부 시규는 고향집에서 머리를 맞대고 성장한 상진의 혼사를 서둘렀다. 당시 량반가문에서는 보통 아들이 여남살만 되면 서둘러 장가를 보내였고 이른 집에서는 아들이 아홉살만 되여도 혼처를 정해 장가를 보내였는데 그것이 리조말기의 조혼풍속이였다. 시룡이와 시규는 장차 나라의 기둥감으로 키울  소중한 손자의 혼인을 절대로 서두르지 말라는 박진사의 분부에 따라  상진이가 열두살이 될때까지 혼처를 정하지 않고있었다. 그런데 또 박진사의 사망으로인해 가문에서는 상복을 벗을 때까지 경사를 치를수가 없게 되였다. 그리하여 상진이의 혼사는 또 둬해나 더 늦어졌었다.  문한가로 명성을 떨치는 박씨댁에서 삼년상을 마치고 상제들이 상복을 벗자  아들 상진이에게 천생배필이 생겼다면서 찾아오는  중매꾼들이 문턱이 닳을 지경이였다. 박씨댁에서 가문이며 규수의 인품이며를 일일이 따져서 훌륭한 며느리감을 택한다는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였다.  조정의 부름을 받고 다시 상경하기 며칠전인 어느날 시룡이와 시규 두 형제는 사랑방에서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였다. 중매군들이 소개한 규수들가운데서 마땅한 신부감을 결정하려는것이였다. 마침 린근 마을에 사는 월성최씨 최현교(崔铉教)댁의 장녀인 영백(永伯)이란 소저가 어느 모로 보나 종가집며느리로 가장 합당하였다.  최씨댁 역시  학문을 숭상하는 량반가문이였고 경주일대에서 손꼽히는  명문가인데다가 소저의 품행이 단정하고 나이가 총각보다 두살우인 십칠세(1882년 3월 20일생)라 상진이의 배필로 안성맞춤이였다.당시에는 보통 신랑의 나이가 신부보다 몇살씩 어렸었다.  박씨가문에서 오래동안 걱정하던 장손의 혼례를 치르고나니 상진이는 마음놓고 학업에 정진할 수 있게 되였다.  상진이는 밀월이 끝나기 바쁘게 사랑하는 아내를 록동집에 남겨두고 조부님의 유언에 좇아 왕산 허위를  찾아  흥구의숙이 있는 진보면으로 배움의 길을 떠났다. 학문에 정진하여 령남지방에서 명성이 높은 6촌형님 박규진이 그를 데리고 갔다.   흥구의숙을 꾸린 방산 허훈선생과 박용복진사는 령남 유림의 두 거두로서 서로 존경하며 허물없이 왕래하던 사이였기때문에 일찍부터 두 집안간에 친분이 두터웠다. 허위 일가족이 란을 피해서 한해전부터 고향인 선산군 구미면 임은리를 떠나 청송군 진보리로 이사왔는데 허위선생의 맏형님이신 방산 허훈선생이 진보에 꾸린 흥구의숙에서 큰형님을 도와 교편을 잡았던 것이였다. 흥구의숙은 일반 서당과 달리 당시 사회현실과 결부하여 학문을 연찬하도록 학생들을 이끌고있었다.  흥구의숙에 입학한 상진이는 허훈선생한테서 고문(古文)을 심도있게 학습하였고 또 허위선생의 지도아래 정치, 력사, 지리, 병학 등 다방면의 유용한 지식을 배웠으며 짬짬이 고금의 충신렬사들의 전기를 열심히 읽었다. 이것은 전에 록동의 서당에서는 듣도보도 못한 새로운 학문이라 상진이는 새지식을 배우면 배울수록 재미가 나고 온 몸에 힘이 솟았다.   어느덧 박상진이 흥구의숙에 와서 공부를 시작한지  일년이 다가왔다. 학문이 출중한 스승 왕산 허위선생께서는 조정의 부름을 받고 서울에 올라가서 원구단 참봉에 임명되였다. 마음속으로 가장 존경하는 허위선생이 흥구의숙을 떠나자 상진이는 서운함을 금할수 없었다.스승님한테 더 많은 지식을 배우지 못한것이 후회되였다.  상진이는 생부와 양부가 다 서울에서 관직에 계셨으므로 종종 서울로 올라와 두 부친을 뵐수 있었다. 그는  상경하는 기회에  허위선생을 찾아가서 스승의 지도를 받는것을 잊지 않았다. 성품이 대쪽같고 학문이 연박하고 정사에 밝은 허위선생은 고종황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관직이 성균관 박사, 중추원 의관을 거쳐 국가의 최고법관인 평리원 수반판사로 승진하였다. 허위는 서울에서 재임하는 동안 당시 진보적인 사상을 지닌 위암 장지연(韦奄 张志渊)선생 등과 가까이 사귀면서 사상이 많이 개방되여 서구의 문명을 많이 접수하게 되였다. 스승 허위의 세계관의 변화는 젊은 제자 박상진의 성장에 거대한 작용을 일으켰다. 박상진은 서울에 올라오는 기회에 국내외에서 비밀리에 발간되는 진보적인 서적을 남몰래 구입하여 흥구의숙에 돌아간 뒤 저녁이면 초불을 밝혀놓고 밤깊도록 탐독하면서 변화무상한 세계의 형세를  료해하고 안목을 넓혔다.  상진이가 17세가 되던 1900년에 목포의 부두로동자들이 파업을 일으켰다.왜놈들의 가혹한 경제수탈에 도탄에 빠진 로동자들이 더는 견딜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로동자들의 정당한 요구를 일본자본가는 한가지도 들어주지 않았을뿐만아니라  경찰을 동원하여 총칼로 무고한 로동자들을 여지없이 진압하였다. 신문을 보고  목포사건의 시말을 알게된 박상진은 격분하여 이를 갈았다.그는 일제를 이땅에서 몰아내지 않고서는 로동자,농민들이 영원히 도탄에서 벗어날수 없다는 도리를 더욱 깊이  터득하게 되였다. 상진이가 열여덟살이  되넌 1901년 11월 23일에 장남 경중이가 태여났고  21세되던 4월 20일에 장녀 창남이가 태여났다.두 아이의 아버지로 된 박상진은 부모로서의 책임이 막중하다는것을 모르는 바 아니였지만 가정에 얽매여 구국의 큰뜻을 버릴수는 없었다.그는 미안한 마음으로 어머님과 안해에게 자식들을 부탁하였다.어머님과 안해는 상진이에게 자식이나 집걱정은 조금도 하지 말고 학업에 전념하라고 당부하였다. 이해에 조정에서는 제1차 한일협약이 체결되였고 서울과 부산을 련결하는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였다.편리한 교통수단을 리용한 일제의 수탈은 날로 가심해졌다.온 나라가 도탄에 빠져 신음하고있었다. 도처에서 의병들이 다시 벌떼같이 일어났다.급변하는 나라의 형세와 스승 허위의 끊임없는 교육은 젊은 상진의 세계관의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상진은 점차 서당에서 배우는 구학문으로는 기울어진 나라를 바로 세울수 없다는 도리를 깊이깊이 느끼고 구국에 유용한 새로운 학문을 목마르게 동경하였다. 사랑하는 제자의 심중을 환히 꿰뚫고있는 허위선생은 상진이를 시대의 앞장에선 인재로 배양하기 위해 안깐힘을 썼다. 흥구의숙은 일반 서당보다는 많이 개명했지만 시골에 자리잡고있어서 상진이가 사회와 널리 접촉하고 사회를 연구하는데 매우 불리하였다. 그는 사랑하는 제자를 당시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인 서울에 데려와서 공부를 시키려고 마음먹었다. 어느날 허위는 상진이가 서울에 올라온것을 알고 이내 자택으로 불러들였다. 마침 그해에 서울에 양정의숙이란 근대교육을 하는 학교가 세워졌기때문이였다.  “상진아, 오늘 내가 너를 부른것은 너에게 새로 일어선 학교를 소개하기 위해서이다. 서울에 양정의숙이란 근대교육을 하는 학교가 생겼는데 우리나라의 그 어느 학교보다 진보적인 교육을 하고있다.나는 네가  서울에 올라와서 양정의숙에 들어올것을 권고한다. 우리나라를 세계에 우뚝 설 선진국으로  건설하려면 새로운 학문을 체득한 인재가 박절히 수요되기때문이다.”  “사부님, 고맙습니다. 소생은 사부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허위선생의 말씀을 듣고난 상진이는 새로운 학문을 배울 욕망으로 가슴이 끓어올랐다.  “나는 양정의숙의 숙장과 친밀한 사이이니 입학수속은 내가 해주마.”  “고맙습니다.” 상진이의 생부인 박시규가 경복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집을 잡고 있었으므로 상진이가 양정의숙에서 공부하는데 생활상에서  별 어려움도 없었다. 이튿날 허위선생은  상진이를 데리고 양정의숙을 찾아갔다.          4.양정의숙 (养正义塾)에서     양정의숙은 순헌황귀비(고종의 계비이자 영친왕의 생모인 엄귀비(严贵妃)의 친정조카이자 조정에서 군부협판(军部协办)을 맡고있는 엄주익(严柱益)이 안종원, 박용숙 등 의기상합한 사람들과 함께 근대적 교육보급을 위한 학교설립을 추진하여 세운 인문계(人文系)의 사립고등학교이다. 학생들을 올바르게 깨우쳐준다는 (蒙以养正)의 기치아래 사회에서 기부금을 모으고 또 개인재산을 보충하여 학교를 세우고 교명을 양정의숙이라 하였는데 초대숙장은 엄주익이 맡았다. 이 학교에서는 법학통론, 헌법, 국가학, 형법총론 및 각론, 민법총론, 물권법, 채권법, 상속법, 형사소송법, 민사소송법, 상법총론, 국제법 등 20여가지 과목을 설치하였다.  1907년에는 엄귀비로부터 황실의 재산과 내탕금으로 학교의 재정지원을 받았으며 1908년에는 경제학과를 병설하였다. 그러나 한일합방으로인해 국권이 빼앗긴지 3년 지난 1913년에 일본총독부에서 공포한 에 의하여 전문과정이 페지되어 6회의 법률학과 졸업생과 2회의 경제학과 졸업생이 나왔는데 졸업생 총수는 145명이였다. 일제 강점기에 민족교육의 일환으로 이 학교에서는 체육부를 설치하여 체육인재를 육성하였는데 1932년 로스안젤스 하기 올림픽대회에서 이 학교의 재학생 김은배가 마라톤경기에서 제6등을 따내였고 1936년 베를린 하기올림픽대회에서 이 학교의 5학년생인 송기정이 마라톤종목에서 금메달을 따내고 올림픽마라톤종목의 세계기록을 경신하였으며 학교졸업생인 남승룡은 동메달을 따내였는데 이것은 뒤날의 이야기이다.  양정의숙의 창립자인 엄주익은 왕산 허위선생과 친분이 두터운데다가 그가 소개하는 학생이 첫눈에 마음에 들었다. 그뿐만이  아니였다.허위선생이 상진이가 규장각 부제학인  박시규의 아들이라고 하자 엄주익도 박시규와 친분이 있던 사이라 상진이의 입학을 진심으로 환영하였다.  “상진아, 너는 양정의숙에서 법률과 경제학을 전공하는것이 어떻겠느냐? 네가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 큰일을 하려면 이 전업을 전공하는 것이 보다 합당할것 같구나.”  “네, 스승님의 제의를 따르겠습니다.”  박상진은 당시 나라의 최고법관인 스승 허위의 권유에 좇아 양정의숙에서 법률과 경제학을 배우게 되였다. 그는 스승님처럼 법률에 정통하여 장래에 억압받고 굶주리는 백성들을 위해 자기의 재능을 남김없이 발휘하겠다고 마음먹고 학업에 정진하였다. 그러나 하루가 다르게 돌변하는 나라의 형세는 스물두살의 피끓는 젊은이가 학업에만 몰두하도록 놓아두지 않았다.  중일갑오전쟁과 로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기세등등하여 거리낌없이 조선전역에 마수를 뻗치였다. 1월에는 서울의 경찰치안권을 왜놈들의 헌병대가 차지하였으며 2월에는 일본인 마루야마가 경무청의 고문직을 차지하였고 3월달에는 일본놈들이 서울의 경비를 맡았고 11월에는 일본의 특파대사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조선에 들어왔다. 왜놈들의 야욕은 끝이 없었다. 11월 17일, 이토오는 무장한 헌병들을 이끌고 황궁을 포위하고 강제로 조선의 내각회의를 열게하여 이란 불평등조약을 맺었다. 일제의 한국에 대한 을사보호조약 체결은 1905년 11월 일본 추밀원 의장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조선에 파견되면서 본격화되었다. 11월 9일 서울에 도착한 이토오는 고종황제를 알현하고, 보호조약의 강제체결을 위해 회유와 협박을 거듭했다. 고종황제가 그들의 강요에 순순히 응하지 않자 이토오는 11월 17일 조선정부의 각료들을 일본 공사관으로 불러들여 보호조약을 승인하게 했다. 일본 군인들이 공사관밖에서 무력시위를 벌이는 공포분위기 속에 열린 이 회의에서도 을사보호조약을 승인하는 결론이 나지 못하자 이토오는 다시 궁중으로 회의장소를 옮겼다. 고종황제가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열린 궁중의 소위 어전회의(御前会议)에서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자 하야시[林權助] 공사는 이토오를 불러냈다. 헌병사령관까지 대동하고 들어온 이토오는 다시 회의를 열고 한국정부의 대신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찬성여부를 물었다. 이에 참정대신 한규설(韩圭卨), 탁지부대신 민영기(闵泳綺), 법부대신 리하영(李夏榮) 등은 반대의 뜻을 분명히 했으나 일제의 무력에 겁을 먹은 학부대신 리완용(李完用), 군부대신 리근택(李根泽), 내부대신 리지용(李址鎔),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权重显) 등은 약간의 수정을 조건으로하여 조약체결에 찬성했다. 이토오는 조약체결에 찬동한 5대신(五大臣:乙巳五賊)만으로 어전회의를 다시 열고, 외부대신 박제순과 특명전권공사 하야시의 이름으로 이른바 '한일협상조약'(韓日協商條約)을 강제로 체결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일본 정부는 조선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감리·지휘하고, 일본 령사는 외국에서의 조선의 리익을 보호할 것,  제2조 일본 정부는 조선과 타국 간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수할 임무가 있으며, 조선 정부는 일본 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는 어떠한 조약이나 약속을 하지 않을 것,  제3조 통감(統鉴)을 두어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경성에 주재하고 조선 황제 폐하를 내알(內謁)하는 권리를 가지고, 조선의 각 개항장 및 그밖에 일본 정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역에 리사관(理事官)을 설치해 본협약의 조관을 완전히 실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일체의 사무를 관장한다는 것 등이다.  사흘뒤인 11월 20일, 박상진이 학교에 가니 교정안은  물끓듯하였다. 에 장지연(张志渊)이 쓴 이란 제목의 피를 토하는듯한 사설이 발표되였다.     시일야방성대곡 (是日也放聲大哭)    지난번 이등(伊藤) 후작이 래한(来韩)했을 때에 어리석은 우리 인민들은 서로 말하기를, '후작은 평소 동양삼국의 정족(鼎足) 안녕을 주선하겠노라 자처하던 사람인지라 오늘 래한함이 필경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공고히 부식케 할 방책을 권고키 위한 것이리라. '하여 인천항에서 서울에 이르기까지 관민 상하가 환영하여 마지 않았다. 그러나 천하 일 가운데 예측키 어려운 일도 많도다. 천만 꿈밖에 5조약이 어찌하여 제출되였는가. 이 조약은 비단 우리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삼국이 분렬을 빚어낼 조짐인즉, 그렇다면 이등 후작의 본뜻이 어디에 있었던가?    그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대황제 폐하의 성의(聖意)가 강경하여 거절하기를 마다하지 않았으니 조약이 성립되지 않은 것인줄 이등후작 스스로도 잘 알았을것이다. 그러나 슬프도다. 저 개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대신이란 자들은 자기 일신의 영달과 리익이나 바라면서 위협에 겁먹어 머뭇대거나 벌벌 떨며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기를 감수했던것이다.    아, 4천 년의 강토와 5백 년의 사직을 남에게 들어바치고, 2천만 생령들로 하여금 남의 노예 되게 하였으니, 저 개돼지보다 못한 외무대신 박제순과 각 대신들이야 깊이 꾸짖을것도 없다 하지만 명색이 참정(参政)대신이란 자는 정부의 수석임에도 단지 부(否)자로써 책임을 면하여 이름거리나 장만하려 했더라 말이냐. 김청음(金淸阴)처럼 통곡하여 문서를 찢지도 못했고, 정동계(郑桐溪)처럼 배를 가르지도 못해 그저 살아남고자 했으니 그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제 폐하를 뵈올 것이며, 그 무슨 면목으로 2천만 동포와 얼굴을 맞댈 것인가.  아! 원통한지고, 아! 분한지고. 우리 2천만 동포여, 노예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 기자 이래 4천 년 국민정신이 하루밤 사이에 홀연 망하고 말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이 글은 《황성신문》의 주필이었던 장지연이 논설에서 일제 침략의 원흉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비난하고, 을사오적(乙巳五賊)은 대한제국을 일본에 팔아 백성을 노예로 만들려는 매국노임을 규정하였다. 고종 황제가 을사조약을 승인하지 않았으므로 조약은 무효임을 전국민에게 알렸다. 또한 이 론설 외에도 잡보(杂报)란에 '오조약청체전말'(五條約請締顚末)이라는 제목으로 조약을 강제 체결하게 된 정황을 상세히 보도했다.    이 신문은 평소보다 1만 부를 더 인쇄하여 서울 전역에 배포되었다. 같은 날 오전 5시 장지연은 왜경에게 체포되어 경무청에 수감되었으며 《황성신문》의 사원 10명도 체포되었고 신문은 무기 정간(停刊)을 당했다. 정간의 사유는 일제의 검열을 받지 않고 신문을 배포하여 국가의 치안을 방해했다는 리유였다. 다음날 《대한매일신보》는 장지연을 강한 론조로 찬양하였고 《제국신문》은 ‘《지금의 분함을 참으면 백년화근을 면한다。》’고 하며 과격한 론조는 신문없는 사회가 될것이라며 국민들도 자중해야 한다는 내용을 실었다. 한편 일본인이 발행하던 한글신문인 는 장지연의 행동을 경거망동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장지연은 《대명률(大明律)》잡범편(杂犯篇)에 의해 태형을 선고 받았으나 1906년 1월 24일 석방되었고 같은 해 2월 2일 신문도 속간되었다。) 이 체결됨에 따라 대한제국은 일제에게 외교권을 빼앗긴 빈 이름만 있는 국가로 전락하였다. 온 나라가 단 가마속의 물마냥 펄펄 끓었다. 11월 30일에 시종무관 민영환이 의 체결에 비분강개하여 이란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고 12월 1일에는 특진관 조병세가 극약을 마시고 자결했고 뒤이어 학부주사 리상철, 군인 전봉학, 전 참정 홍만식 등이 차례로 자결했다. 나라잃은 망국노로 살지 않으려는 그들의 절개는 굳지만 한번밖에 없는 목숨을 그냥 버리지 말고 왜놈을 한놈이라도 더 죽이고 나라를 구하는데 피를 흘렸다면 더 보람찬 인생이 아니겠는가? 박상진은 잃어버린 국권을 회복하려면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일어나  맹동할것이 아니라 천천히 힘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그는 친구들과 동창들에게 대한제국이 처한 험악한 현실을 말해주면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위해서는 시시각각 목숨을 바칠 준비를 해야 한다고 일깨웠다. 을사오적인 박재순, 리지용, 리근택,리완용, 권중현 등을 참살해야 한다는 여론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들끓었다. 라인철, 오기호 등은 를 조직하여 활동했으나 실패하고말았다.고종황제의 밀지에 의해 해산되였던 의병들이 다시 전국 곳곳에서 벌떼같이 일어났다.  1906년 3월에는 전 참판 민종식이 홍주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그해 6월에는 최익현과 림병찬이 전라북도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신돌석도 다시 평해에서 의병을 일으켰다.전국 각지에서 이름있는 유생들과 평민들 그리고 머슴들까지 넘어져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려고 의병을 일으켰다. 이에 고무받은 고종황제는 는 밀칙을 내려보내 의병장들과 의병들을 격려했다.  양정의숙에서 학습하던 박상진은 중국혁명의 선구자 중산 손문(中山 孙文)선생이 일본 도꾜에서 “동맹회”를 조직한것과 그들이 제정한 오랑캐를 몰아내고 중화를 회복하고 민국을 건설하고 지권을 평균이 해야 한다는 4대강령을 읽어보고나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  ( 손중산선생의 4대강령은 정말로 현명하구나. 외적을 몰아내지 않고 어이 나라가 편안할수 있으며 농사하는 농민들에게 땅이 없는것은 얼마나 불합리한 일인가? 우리나라도 미국이나 영국처럼 강성한 나라로 건설하려면 반드시 군주제도를 페지하고 서구식의 공화정치를 실시해야 한다.) 그는 단걸음에 도꾜로 달려가서 손중산선생을 만나보지 못하는것이 몹시 한스러웠다.그러나 그는 대업을 이루려면 아직까지는 학업에 충실해야 한다는 허위스승의 말씀이 귀에 쟁쟁하여  학업에 더욱 분발하였다.     5.정미의병(丁未义兵)과 서울탈환작전   1907년의 새해가 시작되였다. 전국적 범위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다. 많은 사람들이 나라가 가난하여 일본국에 빚을 너무 많이 졌기때문에 고종황제가 왜놈들과 과감히 맞서 싸우지 못한다고 인정했기때문이였다. . 1907년 2월 서상돈, 김광제·, 박해령 등 16명의 애국자들이 대구에서 조직한 국채보상기성회(国债报尝期成会)는 곧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로 확대되었다. 특히 대한매일문,황성신문, 제국신문,·만세보 등 언론기관이 자금모집에 적극 참여했으며, 이를 위하여 단연운동(断烟运动)이 전개되었고, 부녀자들은 비녀와 가락지를 팔아서 국채보상에 나섰다. 그외에도 녀성단체인 진명부인회·대한부인회 등에서는 보상금모집소를 설치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 국채보상운동은 바다건너 일본에 까지 파급되어 800여 명의 류학생들도 운동에 참여했다. 그리하여 국채보상운동이 실시된 이후 4월말까지 보상금을 낸 사람은 4만여명이고, 5월말까지 230만원 이상의 거금이 거두어졌다. 이에 대해 일제는 송병준 등 친일파가 지휘하던 매국단체인 일진회를 리용하여 국채보상운동을 방해하였고 통감부에서는 국채보상회의 간사인 량기탁을 보상금횡령죄라는 루명을 들씌워 구속하는 등 갖은 수단을 써서 탄압했다. 그 뒤 량기탁은 무죄로 석방되었지만 국채보상운동은 더 이상 진전을 보지 못하고 좌절되고 말았다. 국채보상운동은 조선 민족의 강렬하고 자발적인 애국정신이 발휘된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평가된다. 이해 5월에 을사오적의 하나인 박제순내각이 경질되고 6월에 다른 한 을사오적 리완용이 총리대신의 보좌를 차지하였다. 1905년 일본 제국주의는 서유럽 제국주의 렬강으로부터 한국의 보호국화를 승인받은 뒤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이에 대해 고종황제는 헐버트를 통해 "보호조약은 병기로 위협하여 륵정(勒定)했기에 전혀 무효하다"는 내용의 급전을 미국 정부에 전달했으나 미국정부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고종황제가 서울의 각국 공사들을 상대로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호소했으나 역시 아무런 성과도 보지 못했다. 이후 1907년 1월 16일, 고종황제는 영국인 베델이 경영하는 〈대한매일신보〉에 미국,·프랑스,·독일,·러시아 원수에게 보내는 서한을 발표했으나 박제순(朴齐純) 친일내각이 21일 이를 위조서한이라고 선포했다. 이에 고종황제는 같은 해 6월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마지막 기대를 걸었다. 이 회의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의 주창으로 열리는 회의로서 40여 개 국의 대표 225명이 참석하는 것인데, 주로 중재재판·륙해전법규 등을 론의하지만 사실상 렬강간의 식민지 쟁탈전에 따르는 분규를 해결하기 위한 국제법회의였다. 고종황제는 전(前) 의정부참판 리상설(李相卨), 전 평리원검사 리준(李儁), 전 러시아 공사관 참서관 리위종(李玮钟) 등 3명을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하여 러일전쟁 이후의 일제의 침략상과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폭로함으로써 렬강의 동정과 후원을 얻어 국권을 회복하려고 했다. 1907년 4월 극비리에 서울을 출발한 리준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리상설을 만나 6월 4일 그와 함께 페테르스부르크(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여 전 주(驻)러시아 공사 리범진(李範晉)과 리위종을 만났다. 먼저 리준,·리상설,·리위종 3명의 특사는 '장서'(長书:控告词)를 러시아어로 번역하여 제2차 만국평화회의 주최의 주창자이며 의장국인 러시아 정부의 지지와 후원을 기대하고 보름이 넘도록 리범진과 함께 러시아 외무부의 동정을 살폈는데  별다른 도움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결국 6월 19일 페테르스부르크를 떠나 독일 베를린에 도착한 뒤 '장서'와 그 부속 문서인 《일인불법행위(日人不法行为)》 1권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인쇄했다. 같은 달 25일에 만국평화회의 개최지인 헤이그에 도착한 그들은 28일 장서와 문서를 일본을 제외한 40여 개 참가국 위원들에게 보냈다. 7월 9일 밀사들은 우선 만국평화회의 의장으로 선출된 러시아 대표 넬리도프를 방문하여 한국의 공식 대표로서 회의에 참석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넬리도프가 자신의 권한 밖의 일이라면서 거절했다. 다시 네덜란드 정부와의 교섭을 권하여 곧 외무장관을 방문했으나 네덜란드 정부의 소개가 없다는 리유로 만나지도 못했다. 이에 영국,미국,·프랑스,·독일의 대표위원을 만나 지원을 호소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들은 다시 네덜란드 외무대신에게 서한을 급송하여 면회를 요청했으나 역시 거절당했다. 그러나 이를 전후하여 이같은 사정이 각국 신문기자에게 널리 알려져 매일 각국 기자와 답지했는데, 특히 영국인 윌리엄 스태드가 회장인 국제협회의 후원을 얻어 그 회의의 회보인 〈쿠리에르 드 라 콩페랑스 Courrier de la Conférence〉에 장서의 전문을 게재했다. 특히 7월 9일에는 협회의 회합에 귀빈으로 초대되어 리위종이 프랑스어로 라는 제목으로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여 큰 호응을 받았다. 이 연설이 있은 후 각국 신문에서 매일같이 한국의 사정을 론해서 '억일부한'(抑日扶韩)의 여론이 일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종황제의 특사들은 각 국 대표들에게 외면당하여 본회의 참석이 좌절되었다. 참석이 좌절되자 리준은 일본에 의해 폭력적으로 자행된 잔인한 재앙에서 조국을 지키지 못하는 근심이 분통이 되어 화가 나고 기가 막혀 음식을 끊었고 그로 말미암아 병이 생겨 7월 14일 류숙한 호텔에서 병사했다. 한편 리위종은 국제협회에서의 연설 직후 잠시 페테르스부르크에 돌아갔으나 리준의 순국을 알리는 급전을 받고 18일 헤이그에 돌아왔다. 이후 리상설과 리위종은 헤이그 사행 전에 이미 계획된 려정인 각국 순방외교에 나서 한국의 독립과 영세중립화(永世中立化)를 역설했다. 이후 그들은 법원의 결석재판에서 리완용 내각에 의해 사형·종신형을 받음으로써 끝내 귀국하지 못했다. 통감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는 7월 3일 밀사파견 사실을 알고는 일본 장교단을 거느리고 고종황제를 찾아가 황위를 아들에게 물려주라고 협박한 후 고종을 폐위시킬 것을 일본 총리대신에게 건의했다. 이에 리완용 내각은 7월 6일 어전회의를 소집하여 고종에게 일제에 대해 사죄해야 한다고 협박했다. 8일 일제 통감부는 궁금령(宮禁令)을 실시하여 고종을 감금하고, 17일 리완용,송병준 등으로 하여금 고종에게 퇴위하도록 협박하게 했다 .7월 19일 아침, 대한문앞에는 모여든 유생들의 통곡소리가 진동하였다. 대한자강회,동우회,기독교청녕회, 각급 학교의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대대적인 양위반대 시위를 벌이였다. 양정의숙에 재학중인 박상진은 양정의숙에서 공부하는 학우들을 이끌고 대한문앞에 가서 청원을 하고 밤이 깊도록 종로거리에서 힘차게 구호를 부르며 시위를 진행했다.  “폐하, 결단코 황위에서 물러서시면 아니 되옵니다.”  모두들 절규하며 한사코 반대하였다. 모인 군중들이 수천명에 달하자 당황한 일본경찰은 총검을 휘두루며 강제로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마침내 20일 일본 군대의 포위 속에 고종황제는 아들 순종에 대한 양위의 형식을 빌어 사실상 폐위당했다. 이어 일제는 한국 군대를 해산시키고 한일신협약을 강요하여 대한제국의 내정까지 장악함으로써 합병의 형식만 남겨놓게 되었다.  백성들의 절절한 마음은 모르는바 아니지만 자신도 자신을 어쩔수 없는 고종황제는 20일날 끝내 폐인과 다름없는 아들에게 양위하고 말았다.간악한 왜놈들은 민족반역자 리완용과 결탁하여 황위에 오른지 나흘밖에 안되는 허울뿐인 순종황제를 강박하여 한일신협약(정미칠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선국의 조야가 펄펄 끓었다. 박상진의 스승이신 왕산 허위는 관직을 버리고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고 하였다.  “스승님, 저도 의병운동에 참가하겠습니다.”  “아직은 안된다. 네 심정은 나도 가히 리해할수 있다만 지금 네가 해야할 주요의무는 공부를 계속하는것이다.우리가 국권을 회복하고나면 나라를 건설할 인재가 너무도 많이 수요된다. 너는 다른 생각을 하지 말고 지금은 학업에만 정진하거라.” “예, 저는 스승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학습하는 여가에 동지들을 많이 모으고 적들의 정보를 수집하여 스승님께 드리겠습니다.” “참으로 좋은 생각을 했구나.지기지피(知己知彼)해야 백전백승하게 되는것이지.” 허위는 제자의 기특한 생각에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였다.  “의병운동에 군자금이 많이 수요될텐데 힘껏 주선해드리겠습니다. 사부님께서는   부디 조심하십시오.”  허위선생을 보내고난 박상진의 심정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의병운동을 벌이는데 무엇보다 큰 어려움이 바로 자금난이 아닌가? 그 많은 의병들이 먹을 량식이며 의복이며 무기를 구입하려면 돈이 수없이 들터인데 그 많은 자금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생각하면 할수록 걱정이 태산같았다. 책을 읽으려해도 글줄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런 때에 아버님께 도움을 청하지 않고 어찌한담. 아버님께서는 의병활동을 줄곳 동정해오신 분이시고 사회적으로 인망이 높은 분이시니 내가 사정을 말씀드리면 단 얼마라도 도움을 주시겠지.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그는 지필을 꺼내놓고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썼다.그러나 혹시 편지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헌병들의 손에 들어갈  경우를 대비하여 그는 극히 암시적인 글을 적어서 아버지에게 편지를 띄웠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열흘이 가까워오는데도 아버지한테서는 회답이 없었다. 간단한 편지로 부친을 설득시키기 어려울것이라 생각한 그는 더 기다지 않고 바삐 아버지를 찾아갔다. “네가 어이하여 공부할 시간에 집에 왔느냐?” 상진의 생부 박시규가 물었다.  “아버님, 지난번에 소자가 보낸 편지를 읽어보셨습니까?” “읽어보긴 했다마는 난들 어쩌겠느냐?” “아버님께 간곡한 청이 있습니다. 나라의 운명이 칠성판에 오른 이때에 가산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지금 허위스승님께서 의병운동을 다시 전개하셨는데 군자금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아버님, 아버님께서 의병운동에는 참가하지 못하시지만 기울어진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목숨걸고 싸우시는 허위선생님께  군자금을  마련해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허위장군이 의병을 일으킨 것은 참으로 장한 일이다. 허나 이제껏 청관으로 살아온 나 하나의 자그마한 힘으로 어이 의병활동에 쓸 그 많은 군자금을 마련해낼 수 있겠느냐?”  상진이의 부친은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물론 아버님 한분의 힘으로 의병운동에 쓸 군자금을  다 해결할수는 없습니다. 전국의 백성들이 십시일반으로 의병운동을 도와나선다면 의병투쟁은 반드시 승리할것입니다. 아버님께서는 조정안팎에 발이 넓으시니 친구들을 동원하면 자금을 적잖게 모으실수 있지 않겠습니까?” “오냐, 내 힘자라는데까지 주선해 주마.”  젊은 상진이의 끈질긴 설복에 감동된  생부 박시규는 십여일동안 동분서주하여  5만량이란 거금을 주선해 내놓았다. 상진이는 그 돈을 비밀리에 의병장 허위장군에게 보내어 그들이 의병투쟁을 벌이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정미년에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은 서로 밀접히 련합하여 “십삼도 창의군”을 창립하고 의병장 리인영을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허위를 군사장이 모셨다. 그들은 왜놈들의 수중에 들어간 서울을 탈환하는것을 국권회복의 첫 목표로 삼았다.그러나 13도 창의군에서는 신돌석, 홍범도 등 평민출신의 의병장들이 합류하는것을 거절하였다. 당시 대다수의 유림출신의 의병장들은 평민출신의 의병장들을 기시하는 편견이 농후하였다.그들은 평민출신의 의병장들이 그들과 한자리에 앉아서 국사를 론의하는것을 치욕으로 삼고있었기때문에 평민출신의 의병장들이 그들과 동등한 자격으로 13도 창의군에 합류하는것을 극력으로 반대하였다. 참으로 슬픈  시대적 착오였다. 음력 12월 21일, 전국 의병련합군인 13도 창의군의 선봉대를 거느린 허위장군은 일본군과의 계속된 싸움으로 지쳐있는 장병들을 격려하며 이른새벽에 주둔지를 떠났다. 비록 13도 창의군의 일원으로 되지 못했지만 천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서울탈환전에 참가한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의병장은 군사장 허위의 휘하에 남아 허위를 도와 선봉대를 지휘하였다.  용감하고 날쌘 의병 3백명은 10만 의병들중에서 뽑아낸 특전대였다. 그들은 일본총독부가 있는 서울을 탈환할 계획이였다. 첫번째 공격목표는 동대문으로 정하였다. 수택리는 망우리고개만 넘으면 곧장 동대문에 이르게 되는 길목이고 동서남북으로 통하는 길이 다 있어서 교통의 요충지였다. 넓은 평야지대여서 13도 창의군 만명을 집결시켜 야영하기에도 장소가 넉넉하였다. 계획된 공격날자는 정월초하루 즉 설날이였다. 이날은 상점들이 쉬고 학생들도 등교하지 않으므로 전투시에 백성들에게 피해가 적다는 점을 감안했던것이였다. 군사장 허위는 전투경험이 풍부한 의병 3백명을 거느리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인 수택리 일대를  점령하여 진지를 구축하기로 하였다..  군사장 허위가 이끄는 특전대 3백명의 임무는 그야말로 나라의 운명을 좌우지하는 중대한 것이였다.  “걸음을 다그쳐라. 동녘이 밝아온다.”  행군을 재촉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일본군과의 여러차례 전투에서 승리한 의병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듯 하였다.  박상진의 소개로 의병에 가입한 김장쇠도 이 특전대와 함께 출발하였다. 그는 허위장군과 박상진 그리고 신돌석사이에 오가는 정보와 명령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희끄므레한 별빛에 의지하여 행군하는 밤길이지만 행군속도는 매우 빨랐다.  의병들은 흰 바지저고리 차림에 베수건으로 머리를 질끈 동여매어 표적을 삼았는데 군데군데  검은 색 군복에 계급장을  떼어버린 군모를 쓴 의병도 있었다.그들은 원 대한제국의 군사들로서 군대가 해산되자 흩어진 뒤 의병에 가담한 사람들이였다.  박상진의 지령을 받은 김장쇠는 서울을 몰래 빠져나와 지휘부가 있는 산으로 급히 올라갔다. 군사장 허위가 신돌석과 기타 장령들에게 작전임무를 포치하고 있었다. 일본군의 한개 소대가 밤중에 마을로 들어왔다는 보고가 들어왔기 때문이였다.  “신돌석장군이 거느린 군사를 제외하곤 모두다 후방을 지키시오.”  “개미새끼 한마리도 빠져나가게 해서는 안됩니다.”  어느 때나 적정을 철저히 료해하고 치밀한 작전계획을 짜서 승산이 있는 작전만 해온 허위장군이였다. “거, 장쇠군이 아니오?” 작전을 포치하고나서 김장쇠를 뒤늦게 발견한 허위장군이 물었다. “예, 장군님, 서울에 계시는 박상진님께서 서울안에 있는 왜놈들의 군사분포도를  그린 쪽지를  보내왔습니다. 박상진님은 장군님께 성안에서 내응할 구체시간을 지시해달랍니다.”  작은 종이장에 그린 지형도에 깨알같이 적힌 글을 자세히 보고난 군사장 허위가 장쇠에게 말하였다. “사정이 변해서 서울진공날자를 나흘쯤 미룰까 하는데 적정이 수시로 변하는 상황이라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전하시오. 그때가서  구체적인 지시를 하겠으니 만단의 준비를 하고 대기하라고 알려주시오.” “예, 잘 알았습니다.” “지체하지 말고 빨리 떠나시오.” “박상진님께서 서울근교까지 부대와 함께 행동하라시기에...” “이런 변이 있나? 부대와 함께 가라던것은 이런 상황이 생기기 않았을 때의 일이고 지금은 상황이 돌변했소. 당장 떠나시오.” “예, 장군님.” 허위장군의 명을 받은 장쇠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기의 사명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달았던 것이였다. 그는 마을을 멀찌감치 에돌아갔다. 개울을 건너고 길에 들어섰을 떄 “땅!”하는 총소리가 귀전을 때렸다. 어느 새 동쪽하늘이 붉게 물들더니 아침해가 얼굴을 빠끔히 내밀었다.  김장쇠는 주위의 동정을 부지런히 살피면서 서울방향으로 걸음을 다그쳤다. 서울에서 내응하기로 한 박상진에게 성밖에서 변화한 긴급한 상황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이때 박강진은 서울에서 장쇠가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있었다. 군사장 허위가 서울을 진공할 때 그가 내응해야 할 구체적 시간을 모르니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웬 일인지 장쇠와 만나기로 예정한 시간을 두시간 넘기고 또 하루밤을 지냈는데도 김장쇠는 그림자도 나타내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친 상진이는 날이 새기바쁘게 집을 나섰다. 그는 동대문 근처의 정황이 어떤지 미리 알아보는게 좋을것 같아 걸음을 재우쳤다. 골목안과 달리 큰길에는 찬바람이 세차게 몰아쳤다. 순식간에 몸이 꽁꽁 얼어붙는것만 같았다. 박상진은 전차를 타고 동대문으로 갔다.이른 아침이라 전차안에는 승객이 별로 없었다. 이윽고 전차가 느릿느릿 움직였다. 동대문에 당도해보니 근처의 상황은 예상밖이였다. 수많은 일본군들이 성문근처에 모여있었는데 성문을 드나드는 사람들에 대한 검문이 무척 까다로웠다. 그뿐만이 아니였다. 왜병들은 성문앞으로 대포까지 끌어오고있었다. “혹시 놈들이 13도창의군의 행동을 눈치채지 않았나?” 박상진은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들은 한달전에 일제의 만행을 만천하에 알리고 전국 의병련합군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다는 밀서를 각국 공사관에 은밀히 전달했었다. 의병 김세영이 총대장 리인영과 군사장 허위의 명령을 받고 밀서를 갖고 서울에 잠입한 뒤  박상진을 찾아왔었다. 박상진은 밤중에 밀서를 여러부 베껴 쓴 뒤 김장쇠와 동지들 여러사람을  불렀다. 극히 짧은 시간내에 각국 공사관에 동시에 밀서를 전달해야 했기때문이였다. 이른 새벽에 그들은 각국 공사관에 일제히 잠입하여 밀서를 보낸 뒤 바람결같이 사라졌었다. 강제로 해산된 대한제국 군대의 합류로 의병의 인수는 일본군보다 훨씬 많았다.  “각도의 의병들이 일치 단합하여 서울로 일제히 공격하면 서울함락은 한결 쉬워질것이다.”  리인영, 허위 등 의병장들은 전국 각지에 흩어져있는 의병들의 련합을 제의했었다.그리하여 대군을 몰아 물밀듯이 서울을 진공하여 통감부를 격파하고 일본과 맺은 모든 불평등조약을 파기시키고 국권을 회복하는것이 그 목적이였다. 의병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여 결사적으로 싸운다면 승리는 꼭 자기들의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있었다. 그런데 창의군이 서울을 진공하기 전에 왜군의 병력이 갑자기 몇배로 불어났다. 일본국에서 의병을 진압하기위해 대량의 군대와 헌병을 서울로 파견했던 것이였다. 놈들은 수량상으로나 장비에서 의병들보다 월등하여 구식무기를 지닌 의병들로서는 기실 상대가 안되였다. 왜놈들은 도처에서 밀정을 파견해 조선백성들의 움직임을 살피였고 의병들을 체포하기위해 혈안이 되여 날뛰었다. 이 정보를 남먼저 장악한 박상진은 김장쇠를 급히 허위군사장에게 보내서 급변한 상황을 상세히 아뢰였었다.  “ ...지금 적들의 군사력은 막강합니다. 의병들이 외부에서 진공하는 것만으로는 서울탈환의 가능성이 매우 희박합니다. 지금 저는 백락정선생과 20여명의 결사대를 무었습니다. 스승님께서 진공이 시작될 때 우리는 배후에서 적들의 등에 비수를 꽂겠습니다. 상세한 지시를 해주십시오.”  박상진은 장쇠에게 서울시내에 배치되여있는 적군정황을 그린 작은 지도와 전갈을 보내고나서 허위 군사장의 지시를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그런데 당일로 돌아올줄 알았던 김장쇠가 밤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았고 이튿날 낮에도 나타나지 않았다.혹시 김장쇠가 서울을 빠져나가다가 적들에게 잡히지 않았나? 아니면 허위장군의 지시를 가지고 입성하다가 잘못되지 않았나? 가슴에 불이 붙어 안절부절인 박상진은 무턱대고 학교에서 김장쇠를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는 숙소를 나와 급히 백락정선생을 찾아갔다.  백락정은 대한제국의 장교출신이였다.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의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그는 서울에서  뜻이 맞는 동지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사회에 인맥이 너른 그는 불과 10여일만에  백여명의 동지들을 모았던 것이다.그는 의병들이 동대문을 칠때 박상진이 무은 결사대와 손잡고 전투에 참가할 준비를 다지고있었다. 박상진이 백락정의 댁을 찾아가보니 백락정도 김장쇠를 안타깝게 기다리고 있었다.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가?” “글쎄요. 저도 장쇠를 기다리다 못해 이리로 달려왔습니다.” “성문에서 왜놈들의 검문이 심하지 않던가?” “굉장히 심합니다. 선생님은 그걸 어떻게 알고계십니까?”  “나도 어제 성문근방에 나가봤었네. 성문을 들어오는 백성들이 그러는데 갈림길이며 나루터에는  헌병과 헌병보조원놈들이 쫙 깔렸다더구나.”  “장쇠가 검문때문에 혹시...” “나도 지금 그걸 걱정하고 있네.”  “장쇠는 워낙 눈치가 빠르고 령리한 젊은이라 놈들에게 쉽사리 잡히지는 않을것입니다.” “아무렴, 그래야지. 자네 이걸 보게.” 백락정은 신문을 몇장 내놓았다.  상진이가 펼쳐보니 였다. 는 영국인이 경영하는 진보적인 신문으로서 이란 특별란을 설치하여 의병들의 활동정황을 수시로 보도하고 있었다.  “신문을 보니 왜놈들은 의병들의 진공을 막기 위해 한강에서의 선박운행을 금지시키고 각지에 검문소를 설치하여 행인들에 대한 검문이 로골화되고 또 동대문에는 기관포까지 설치해놨다는구먼.”  “그런것 같습니다.”  “하여튼 김장쇠가 어서 돌아와야 군사장의 준확한 공격시간을   알겠는데.” “그러게 말입니다.무턱대고 성안에서 우리가 먼저 손을 쓸수도 없고...” “우리 두사람이 모은 동지들이 2백여명이나 되니 수량상으로는 적지 않은데  적수공권이나 다름이 없으니 어쩌면 좋겠나?”  백락정은 무겁게 한숨을 쉬며 박상진에게 물었다. “군사장님의 공격이 시작될 때 적들의 주의력은 모두 성밖으로 옮겨져서 성안의 경비가 상대적으로 소홀할것입니다. 그 기회를 타서 우리 동지들이 동서남북 사대문을 일제히 들이쳐서 적들의 무기를 탈환하고 성문을 빼앗아서 성안의 일본군들이 성문을 나가지 못하게 막으면 어떻겠습니까?”  “자네 생각이 바람직하네만 허위장군의 진공시간을 모르겠으니  답답해서…에이 참.”  백락정댁에서 오래 머물수도 없는 상황이였다. 박상진은 불안한 마음으로 무거운 다리를 옮겨 양정의숙에 돌아왔다.  군사장 허위와 신돌석이 지휘하는 선봉대는 마침내 수택리가 환히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다가왔다.  “정지! 잠시 휴식하라, 적진이 가까우니 주위의 경계를 게을리하지 말라.”  의병장 신돌석이 명령하였다.  의병들은 삼삼오오 모여앉아 휴식을 하면서 서울탈환에 대한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수택리는 과연 천연요새입니다.” 허위와 나란히 앉은 신돌석은 군사장의 현명한 요새선택에 감탄했다. 동서남북 어디로나 창의군이 손쉽게 쳐들어올수 있는 교통요충지인데다가 터가 넓은 곳을 선택했기때문이였다. 이제 대군만 집결한다면 승리는 손에 쥔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약속한 시간내에 각지에 있는 의병들이 도착하지 못했던것이였다. 이제 동대문을 칠 날은 닷새밖에 남지 않았는데 이 일을 어쩐담? 군사장이나 의병장의 속은 타서 재가 될 지경이였다.  “수택리로 오는 우리 의병들이 도처에서 놈들의 기습을 당하고있습니다. 서울은 물론이고 전국 각지에서 의병들이 지나간 마을은 놈들이 불을 질러 초토화시키고있답니다.”   시찰을 나갔던 신돌석이 허위에게 긴급정황을 보고했다.  “씹어죽여도 시원찮을 야수같은 놈들이구나.” 허위군사장의 눈에서는 불이 일고 온 몸이 부르르 떨렸다.  “김장쇠는 어이하여 아직도 돌아오지 않을가?”  “행여 중도에 잘못되지나 않았을가요?”  “김장쇠가 왜놈헌병에게 잡혔다면 큰 일인데...”  “장쇠군이 만약 놈들에게 잡혔다면 4대문에서 동시에 거사하기로 한 박상진의 작전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는데...”  “허군사장님, 다시 사람을 보냅시다. 시간이 급박합니다.”  “김수동과 윤수정을 보내면 어떻겠나?” “그렇게 합시다.” 말을 마친 신돌석은 즉시 김수동과 윤수정을 불러 서울에 잠입하여 박상진과 백락정을 찾아가서 거사일정을 다시 정하게 하였다.  이튿날 새벽, 두사람은 쥐도새도 모르게 진중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수택리를 벗어나기도 전에 매복한 일본군에게 발각되였다. 총알이 비발치듯 날아들었다. 손에 아무런 무기도 지니지 않은 그들은 왜놈들이 빈틈없이 막아선 길을  뚫고 나갈수가 없었다. 다른 출로를 찾으려고 여러곳을 가봤지만 모두다 허사였다. 아무리 애를 써도 수택리를 빠져나날수 없게된 그들은 부득불 진영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윽고 일본헌병들이 총을 쏘아대며 달려오더니 그 뒤에 수백명의 일본군들이 고함을 지르며 진지로 쳐들어왔다. 의병들은 이내 반격에 나섰다. 총알이 빗발처럼 쏟아졌다. 십만 의병들가운데서 가장 날랜 군사들이라 그들은 유리한 지형을 리용하여 완강하게 버티였다. 그러나 수량상에서나 장비상에서 너무 렬세인 그들은 점심때가 되자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부상당하였다. 더 뻗치다가는 전군이 복멸될 위험이 있었다. “당장    수택리를 떠나 망우리에 가서 다시 진을 치시오.” 허위군사장이 수하에게 명령을 내렸다.  의병들이 진지를 옮기자 일본군은 다시 망우리로 쳐들어왔다. 놈들은 의병의 후속부대가 오지 않은 것을 보고 선봉대를 소멸하려고 악을 썼다. 전투는 할수록 더 치렬해졌다.의병들은 탄약이 거의 다 떨어질 때까지 적들을 쓰러눕혔다. 일본군들의 시체는 여기저기 지저분하게 널렸고 흐르는 피는 강물을 이루었다.  “탄약이 떨어졌습니다.” “군사장님, 탄약을 보내주십시오.” 의병들의 간절한 목소리는 여기저기서 연해연방 날아들었다. “사격을 중지하라. 수택리로 퇴각하라!” 허위장군의 명령을 받은 전사들은 수택리로 급히 퇴각했다.  총대장 리인영이 이끄는 의병 2천5백명은 전투가 끝난 이튿날 아침에야 수택리에 도착하였다.그러나 그밖에 안되는 병력으로 이미 전투준비를 마치고 대기하는 적들을 물리치고 서울을 탈환한다는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며칠 뒤 그들이 다시 서울탈환을 의논하고 있을 때 리인영의 집에서 부고가 날아왔다. 리인영의 부친이 사망했던것이였다. “효는 충의 근본인데 내 어찌 친상을 맞은 줄 알고도 진중에 머물러 있겠소? 충효의 도는 하나요 둘이 아니니 나는 차라리 국풍을 지켜 3년상을 입고 효도를 마친후에 재기하겠습니다.” 리인영은 부득불 후일을 기약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당시 유생들의 인생관이였다.그때 만약 리인영이 친상을 당하고도 진중에 남아 전투를 지휘했다면 그는 사람들로부터 불효막대한 사람이란 비냥을 받을 뿐만 아니라 인륜도 모르는 대장밑에서 싸울수 없노라고 수하 의병장들이 반기를 들었을지도 모를 일이였다. 리인영으로 보내고난 허위와 신돌석은 눈앞이 캄캄했다.군사를 점검해보니 겨우 2천 8백명밖에 되지 않았다.리인영이 거느린 의병은 만명이 넘었으나 혈로를 뚫고 오면서 대부분을 잃었던 것이였다.이밖에 안되는 병력으로 왜놈들의 경계가 삼엄한 서울을 빼앗는다는것은 실로 하늘의 별따기였다. 참으로 가슴을 치고 통탄해도 속이 풀리지 않을 일이였다. 군사장 허위는 후일을 기약하고 서울진공을 중지하라고 명령했다. “모든 군사는 림진강류역으로 후퇴하라.그곳은 나의 근거지이니 상대적으로 안전하다. 한동안 장비를 재정비하여 다시 서울진공을 도모합시다.”  허위의 명을 받은 의병들은 적들의 포위망을 뚫고 림진강쪽으로 퇴각을 시작했다. “군사장님, 소장은 소속들을 데리고 저의 근거지인 영해, 영덕쪽으로 내려가서 의병을 더 모으겠습니다. 어느 때든 군사장님께서 명령만 내리시면 저는 지체없이 달려오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오. 그런데 서울에서 내응을 하려던 박상진과 백선생이 걱정되오. 그들을 만나보고 새로운 정황을 알려줘야겠는데...”  “그러잖아도 저는 상진이를 찾아가려고합니다.” “고맙소.” “고맙긴요? 저는 상진이와 의형제인데 여기까지 왔다가 동생을 만나보지 못하고 내려갈수는 없지 않습니까?” “박군을 만나면  후일을 기약하자고 말씀해주시오.” “더 이를 말씀입니까?” 허위와 헤여진 신돌석은 서울에 잠입하여 상진이를 만나 많은 것을 토의하고싶었지만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서울로 들어가는 모든 길이 막혀있었고 성문은 일본헌병들이 철통같이 지키면서 행인들을 엄밀히 조사하고있었다. 허위의 부대가 떠난 뒤 왜놈헌병들은 조금이라도 의병이라 의심되는 사람이면 가차없이 잡아들였던 것이다. 이틀동안 신돌석은 김수동과 함께 서울 4대문을 돌면서 경계가 약한 틈을 노렸으나  허름한 곳이라곤 어디도 없었다.  “내가 태백산 호랑이란 이름을 지니고있으면서도 동생을 만나러 성안에도 들어갈수 없으니  정말 허울뿐이로구나...”  신돌석은 한숨을 지으며 돌아서는 수 밖에 없었다.   6.스승님을 지하에 모시고    왜놈들은 13도 창의군을 물리친 뒤 도처에 숨어있는 의병들을 잡기에 밤낮없이 혈안이 되여 날뛰였고 의병이라 조금이라도 의심되는 사람이면 무조건 끌어다 처형해버렸다. 놈들은 처형된 사람들의 시신을 동대문밖에 공지에 버려놓고 누구도 시신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감시하였다.   며칠 뒤 박상진은 신문지상을 통해 허위가 거느린 창의군이 동대문을 치기 며칠전에 왜병의 기습을 받고 철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그러니 서울로 련락을 하러오던 김장쇠가 놈들에게 체포되여 처형당한 것도 불보듯 뻔했다 .억장이 무너지는것만 같았다. 동대문까지 몇번이나 가봤지만 총을 쥔 헌병나부래기들이 성문앞을 오가면서 성문을  철통같이 지키고있어서 시신 가까이에 도저히 범접할 수가 없었다.  며칠이 지나자 날이 차츰 따스해졌다. 성문밖에는 살해된 의병들의 시체가 썩는 냄새로 코를 찔렀다. 일본 헌병들은 시체를 이대로 방치했다간 서울에 온역이 덮칠까봐 두려웠던지 시신의 임자들이 정한 기한내에 속히  시신을 찾아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박상진은 널려있는 시신속에 행여나 김장쇠의 시신이 있지 않을가 하여 저녁무렵에 학우들을 데리고 시신을 렴습할 천과 무덤을 팔 삽을 지니고 동대문밖을 나갔다.너른 벌판에 여기저기 널려있는 시신속에서 그는 장쇠의 시신을 간신히 찾아내였다. 그는 어릴적부터 친형제나 다름없이 지내던 전우의 시신을 렴습하면서  눈물조차 흘릴 수가 없었다. 놈들이 눈치챌까봐 두려워서였다. 그들은 렴습한 장쇠의 시신을 메고 외진 곳을 찾아서 무덤자리를 판 뒤 관곽도 마련하지 못한 채 묻는 수밖에 없었다. 양정의숙으로 돌아온 그는 짬짬이 동지들을 모으고 군자금을 모으는 일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왕산 허위는 1855년에 경상북도 선산의 대지주인 한학자의 집안에서 태여났다. 본관이 김해이고 허조와 진성리씨 사이의 네째아들이다.그는 령남 유림의 거두인 맏형님  방산 허훈의 지도하에  을 통달하였고 또 자학으로 법률을 통달하였다. 1895년에 고종의 왕비인 민비(후에 명성황후로 칭해졌음)를 살해한 을미사변이 발생하고 단발령이 내려지면서 전국에서 이에 반발하는 의병운동이 일어났다. 이때 그도 경상도에서 리기찬, 리은찬 등과 함께 두 차례나 의병을 일으켰다. 1899년 2월에 조정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올라가서 45세의 늦은 나이에 벼슬길에 들어섰다. 학문이 깊고 성품이 강직한 그는 고종황제의 신임을 받아  원구단의 참봉이란 말단벼슬로부터 승진을 거듭하여 성균관의 박사로 활동하다가 1904년에는 중추원의원, 평리원 수반판사, 평리원 재판장, 의정부참판 등 요직을 지냈고 1905년에는 비서원승이란 높은 관직에 올랐다. 조정에서 일제의 강박에 의해 소위 를  체결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관직을 사퇴하고 리상천, 박규병 등과 다시 격문을 살포하면서 의병을 모집하여 결사적으로 일제에 저항했다. 서울탈환작전이 실패한 뒤 허위는 패잔병을 수습하여 림진강류역인 경기도 포천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조인환, 김수민,김응두,리은찬의 의병부대와 련합부대를 편성하여 일본군과 유격전을 벌이고 매국노를 처단했다. 그는 조정의 거듭되는 여러 회유책에도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리강년, 유인석, 박정빈 등과 함께 거국적인 의병항전을 호소하는 전국의 의병부대에 발송했으며 결사 항전을 주창한 강경파로 활동하며 한일 강제 병합을 추진 중이던 일제를 끈질기게 괴롭혔다.5월에는 박로천,리기학 등을 서울에 보내 고종의 복위,외교권회복,리권침탈 중지 등 30개조의 요구조건을 통감부에 제출하고 요구조건이 관철될 때까지 결사적으로 항전할것을 선언했다.  1908년 6월11일에 그는 경기도 영평군 유동에서 일본군 헌병대의 급습을 받아  체포되었는데 그때 나이가 쉰넷이였다. 그는 일본군의 포로가 되여 자신이 재직하던 평리원 재판소의 피고석에 앉게 되였다.  허위장군이 일본군에게 체포되여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다가 재판을 받게 되였다는 소식이 에 실렸다. 박상진에게는 마른 하늘의 벼락이나 다름없었다. 우리 스승님이 어이하여 놈들에게 붙잡혔나? 그이를 구해낼 방도는 없나? 스승님을 구하지는 못하더라도 놈들이 스승님을  재판하는것만은 꼭 지켜보아야겠다. 양정의숙에서 재학중인 박상진은 그지없이 존경하는 스승님이 재판받는 장면을 지켜보고 놈들의 죄행을 만천하에 알리려고 마음먹었다.  허위를 재판하는 날 박상진이 법정을 찾아
10    미음속의 비밀 댓글:  조회:3149  추천:3  2013-12-29
중편소설                   마음속의 비밀                        박병대   폭우가 억수로 퍼붓는 새벽,하늘은 먹장구름에 꽈악 덮여 어두컴컴하다.고양이같이 교문을 살그머니 빠져나온 해란이는 우산도 없이 장대같은 비줄기를 맞으며 허둥지둥 대통로에 나섰다.고층건물에서 폭포같이 쏟아지는 락수가 하수도로 미처 빠지지 못해 아스팔트길은 어디라없이 온통 물천지다.삽시에 물참봉이 된 그녀는 다리가 후둘거렸지만 이를 사려물고 앞으로 앞으로 발걸음을 재우쳤다.이따금 번개가 장검같이 허공을 가르면 머리우에서는 우르릉 꽝꽝 하고 천둥이 터진다.그녀는 금세 등뒤에서 누가 유령같이 나타나 갈구리같은 손으로 덜미를 잡을것만 같아 가슴이 섬찍하였다.  이윽고 비줄기가 점차 가늘어지면서 날이 훤히 밝았다.길에는 행인들이 하나둘 나타났고 뻐스도 가끔 눈에 띄였다.지금 반란파총부에서는 그녀의 야간도주를 발견하고 급히 홍위병들을 파견하여 골목을 막을것만 같았다.승냥이한테 쫓기는 토끼신세로 된 그녀는 겁에 질려 가슴이 방망이질하였다.대로를 걷다가는 귀신도 모르게 잡힐판이였다.좀 에돌더라도 안전지대를 택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그녀는 무작정 좁은 골목으로 꺾어들었다. 생소한 골목에 들어서니 방향도 가리기 어려운데 굽이진 곳을 만날 때마다 심장이 쾅쾅 뛰여 걸음을 멈추고 주춤거렸다. 쓰레기가 둥둥 뜬 탁수가 발목까지 잠기는 골목길을 한시간남짓 걷고나니 앞에 철길이 나타났다.이젠 학교에서 퍼그나 먼곳에 이르렀으리라 생각하니 탕개가 풀리고 사지가 나른해졌다.몸에는 한기가 덮쳐들고 주린 창자가 아우성을 쳤다. 철뚝에 올라가 다리쉼을 하려고 무거운 다리를 놀려 차단봉곁에 이르렀다.돌기둥에 기대고 한창 가쁜 숨을 몰아쉬고있는데 뒤에서 팔에 붉은 완장을 낀 한무리의 홍위병들이 두리번거리며 이쪽으로 걸어오는것이였다. 몸을 다급히 일으킨 그녀가 도망갈 방향을 찾는데 차단봉이 내려졌다.이제 더 머물거리다가는 꼼짝달싹 못하고 잡힐 판이였다. (뛰자, 차단봉이 내렸을 때 철길만 건느면 기차에 막혀 따라잡지 못하겠지.)그녀는 허리를 굽혀 차단봉밑을 빠져나와 철길쪽으로 내달렸다. 기관사는 철길로 사람이 오는것을 발견하고 자지러지게 경적을 울렸다.그러나 그녀는 렬차가 다다르기전에 레루를 넘으려고 기적에 아랑곳않고 철길에 발을 올리였다. 벽력같은 웨침과 함께 넉가래같은 손이 그녀의 덜미를 잡고 뒤로 내동댕이쳤다.제동을 걸어 속도를 죽이던 렬차는 찬바람을 일구면서 그녀의 곁을 스쳐지나갔다. 그녀를 구해낸 철도로동자는 볼부은 소리를 지르면서 해란이를 일으켜 세웠다. 그는 물병아리같은 처녀의 몰골을 훑어보다가 측은한 생각이 들었던지 온화한 목소리로 넌지시 물었다. 그녀는 대답 대신 애끚은 눈물만 떨구었다. 해란이는 로동자의 물음에 이렇게 얼버무리고말았다. 그녀는 방울방울 샘솟는 눈물을 훔치면서 역전방향으로 걸음을 다그쳤다.뒤를 돌아보니 홍위병들은 어느 길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공연히 제김에 놀라서 원귀로 될번했었다. (어서 마귀의 소굴을 벗어나야만 해.)허둥지둥 걸음을 다그치던 그녀는 학생마크와 홍위병완장을 떼서 책가방에 넣었다.여러 반란파조직에서 그녀를 빼앗아가려 한다던 복대위의 말이 상기되였던것이다. (큰 역전에 갔다가 홍위병을 만나면 어쩌나?대합실에 그들이 지킬지도 모르잖아? 십리길을 더 걷더라도 작은 역전이 안전할거야.)생각을 정리한 그녀는 발길을 돌려 시교에 있는 작은 역전으로 향했다. 천근같이 무거운 다리를 옮겨 맥없이 터벅터벅 걷는 그녀의 뇌리에는 한달동안의 악몽같은 일들이 주마등같이 지나갔다. 그녀는 할빈 H대학교 반란파사령부의 방송실에서 을 읽으며 아나운서면접시험을 기다렸다. 방송실은 사령부사무실과 벽 하나 사이다.두 호실의 간벽에는 작은 미닫이창문이 있고 창문턱에는 전화기를 놓아두고 두 호실에서 공동으로 쓰고있다. 작은 창문이 삐걱 소리를 내면서 열렸다. 해란이가 어록책을 손에 든채 방송실을 뛰여나가 사령부실로 들어갔다. 몸집이 우람지고 키가 1메터 80쯤 되여보이는 30대의 사나이가 일어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밤색 구두를 신고 중산복을 입은 이 사나이는 채양이 긴 모자를 쓰고 금테안경을 걸었는데 입이 유달리 크고 왼쪽 눈가에는 팥알만한 기미가 있었다. 정색을 하고 엄숙하게 묻던 그는 얼굴에 웃음을 띄우면서 말했다. 말을 마치고 밖에 나갔던 그는 무슨 일이 있는지 부랴부랴 돌아오더니 해란이에게 사무실의 열쇠를 맡기면서 엄숙하게 말했다. 복대위가 나간 뒤 해란이는 사무실을 깨끗히 청소하고나서 문을 채우고 방송실에 돌아왔다.손을 씻고나서 침대에 걸터앉아 단발머리를 손빗질하던 그녀는 총부의 책임자가 틀거지 있고 손아귀가 무척 셀것 같아 매사에 신경을 곤두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느날 아침 일찍 일어난 그녀는 이불을 반듯히 개여놓고 실내청소를 한 뒤 웃옷을 벗고 세수를 했다.이때 노크도 없이 문이 열리더니 복대위가 불쑥 들어왔다.그녀는 부랴부랴 웃옷을 걸쳤다. 해란이는 옷을 걸친채 얼굴을 대강 씻고나서 손으로 머리를 빗었다. 복대위는 들가방에서 과자봉지를 꺼내 사무상우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무척 송구스러웠으나 과자봉지를 펼쳐놓고 먹었다. 7시가 되자 교정에는 시위행진에 참가할 홍위병들이 줄지어 섰다.복대위는 연단에 올라가서 주의사항을 말했다. 시위대오는 해방표트럭을 앞세웠는데 트럭에는 채색종이기를 든 학생들로 가득 찼다.반란총부의 기는 트럭에 고정시켜놓았다.선전차가 그 뒤를 바싹 따랐는데 복대위는 해란이와 함께 선전차에 앉았다. 성세호대한 시위행렬이 교정을 나서자 복대위가 입을 열었다. 뒤이어 확성기에서는 이 우렁차게 울렸다. 난생처음 선전차에 앉은 해란이는 흥분과 긴장감에 심장이 세차게 고동쳤다.자신이 혁명대오의 앞장에 섰다는 긍지감에 그녀는 시간이 가는줄도 목구멍이 아픈줄도 모르고 어록을 외우고 또 외우고 구호를 웨치고 또 웨쳤다. 지도자의 칭찬을 들은 그녀는 꿀물을 마신듯 속이 달콤했다. 어느날 저녁,해란이가 어록을 읽다가 잠이 몰려와서 문을 안으로 걸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밖에서 방송실의 문고리를 당기는 소리가 났다. 그녀가 놀라 비명을 지르자 밖에 있던 사람은 꽁무늬를 뺐다. 해란이는 가슴이 활랑거려 도무지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옷을 입고 침대에 걸터앉아 날이 새기를 기다리다가 새벽녘에 쪽잠이 들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여난 해란이가 눈을 비비고 창밖응 보니 아침해살이 사무상을 비추고있었다. 그녀는 문가로 가며 물었다. 복대위가 찾아온것이였다.그가 방송실로 들어오자 해란이는 설음이 북받쳐서 울음보를 터뜨렸다. 해란이는 흐느끼면서 엊저녁에 벌어질번한 일을 보고하였다. (다같은 혁명조직인데 사람을 랍치하다니…)한동안 입을 다물고 손톱여물만 썰던 해란이가 복대위를 쳐다보며 말했다. 복대위는 정색을 하고 해란이에게 사상교육을 시작하였다. 복대위의 말에 해란이는 저으기 마음이 놓였다. 운동의 형세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였다.며칠이 지나자 주요가도와 광장,기관,학교 및 고층건물에는 어디라없이 프랑카드와 대자보가 나붙고 이르는 곳마다 확성기소리가 고막을 울렸다.골목골목을 꿰지르고 달리는 선전차들은 온 시가지를 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어느 토요일 오후,먹장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6~7급의 바람이 몰아쳤다.폭풍우가 들이닥칠 조짐이였다.복사령이 헐레벌떡 방송실로 달려왔다. 선전차가 XX학원에 이르러 구호를 몇번  부르지도 못했는데 번개가 일더니 폭우가 쏟아졌다.금방 벽에 붙여놓았던 대자보는 물참봉이 되여 락엽같이 길바닥에 떨어져 딩굴었고 행인들도 자취를 감추었다.XX학원의 홍위병들은 교실에서 창문을 닫아걸고 바깥의 동정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복대위는 씩씩거리며 거센 숨을 몰아쉬더니 마이크를 들고 목청껏 웨쳤다. 그래도 대방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복대위는 결이 나서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도전에 실패한 복대위는 운전기사를 보고 학교로 돌아가자고 분부하였다.폭풍우를 맞받아 질주하는 자동차는 소방차마냥 비방울을 신작로 량켠에 뿌리였다. 방송실에 돌아온 해란이는  머리의 비물을 닦고나서  카텐을 치고 물에서 건진것 같은  겉옷을 벗어  짜 침대머리에  걸어놓고  속옷을 갈아입은 뒤 사무상앞에 앉았다.아무리 고달파도 견지하는 일기였다. 일기를 쓰고나니 소름이 끼치고 한기가 엄숩해왔다.그녀는 진통제 약을 두알 먹고 침대에 올라가 이불을 덮어쓰고 누웠는데 이내 굳잠이 빠졌다. 그녀는 자다가 무서운 꿈을 꿨다.그녀는 시위행진에 나갔다가 오매에도 그리던 고중때의 련인 천룡이가 부랑자들한테 물매를 맞고있는것을 보았다.그녀는 놈들과 시비를 따지려고 앞으로 달려갔다. 갑자기 헌 담장이 우르르 허물어져 그녀는 담장에 깔려 옴짝달싹할수 없었다.사람 살리라고 고함을 쳐도 말이 목구멍을 빠져나오지 못했다.한사코 몸부림치다가 깨여나보니 복면을 한 사내가 그녀의 몸우에 덮쳐들고있었다.자신이 폭행을 당한다는것을 직감한 그녀가 고함을 치려 하자 그자는 대뜸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사나이는 입에 물었던 가위를 그녀의 목에 가져다대면서 발음이 분명찮은 소리로 위협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해란이는 몸을 연자돌에 눌린듯 숨이 막히고 요동할수조차 없었다.젖먹던 힘까지 다 내여 결사적으로 반항했지만 녀인의 연약한 힘으로 억대우같은 사내의 폭행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였다.발버둥치며 항거하던 그녀는 사내의 강타를 맞고 혼미상태에 빠졌다. 새벽에 정신을 차린 해란이는 입을 틀어막은 손수건을 뽑아내고 전등 스위치줄을 더듬었으나 손네 잡히지 않았다.일어나려고 해도 몸이 천근같아 꼼짝할수 없었다.정적이 깃든 사무실안에 들리는건 오로지 창문을 때리는 비소리뿐이였다.모지름을 써서 일어나 앉은 그녀는 번개빛을 빌어 하얀 침대보위에 얼룩진 피자국과 침대머리에 떨어진 가위를 보았다. 엊저녁에 폭행당한 일을 생각하자 그녀는 치가 떨리고 몸에 소름이 오싹 끼쳤다.너무 원통해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싶었으나 그럴 처지가 못되였다.울음소리에 경호원이 깨여나고 아래층의 사람들이 몰려와 이 광경을 목도한다면 무슨 꼴이겠는가?쓰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침대보에 찍힌 피자국을 보고 이를 부득부득 갈던 그녀는 가위를 자세히 보았다.건너칸 사무실에서 본 눈익은 가위였다. 안팎으로 경비가 삼엄한 반란파총부의 사무실과 방송실을 누가 감히 들어올수 있단말인가?엊저녁에 방송실문을 분명히 안으로 걸었는데 놈이 어떻게 들어왔을가?총부사무실의 미닫이를 떼고 들어온것이 분명하였다.총부사무실의 문을 열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복대위의 소행이 불보듯 뻔했다.마음같아서는 칼을 들고 그놈을 찾아가고싶었으나 리지를 잃은 미욱한 짓을 할수는 없었다. 건달놈을 법에 고소하면 어떨가?해란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공안이며 검찰,법기관이 엉망진창이 된 오늘 내가 기소를 한다면 누가 접수하며 설사 법기관에서 안건을 접수한다한들 기세등등한 그자를 누가 체포한단말인가?야속한것은 연약하고 무능한 자신뿐이였다.혁명파의 허울을 쓰고 짐승같은 짓을 하는 승냥이놈아,이제 두고보자.어느때든 내 기어코 원쑤를 갚고야말테다.이를 사려문 그녀는 가위로 침대보의 피묻은 자리를 베내서 가위를 싼 뒤 책가방안에 넣었다.죄증을 보관할 타산이였다.어둠속에서 옷을 찾아 입고나서 이불짐과 일용품을 싸서 묶어놓았다.그녀는 방송실과 총부사무실의 열쇠를 미닫이창문턱에 올려놓고나서 방송실의 문을 열고 다람쥐같이 살그머니 복도를 지나 아래층의 현관에 내려왔다. 막상 교정을 떠나려고 하니 그녀는 가슴이 쓰리고 발걸음이 무거워졌다.이곳은 소녀시절부터 그렇게 동경하던 배움의 전당이 아닌가?그녀는 동창들과 작별인사 한마디 못나누고 야반도주를 하는 자신의 처지가 한스럽기 짝이 없었다.혁명을 한답시고 남의 장단에 춤추다가 처녀의 정조를 짓밟혔는데 이제 반란에 무슨 미련을 둔단말인가?가자,어디든지 멀리 떠나버리자.날이 밝기전에 어서 이 마귀의 소굴을 벗어나야 한다… 교구에 있는 기차역이 어렴풋이 보이자 해란이는 걸음을 멈추고 망설이였다.무턱대고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어디로 가나?그녀의 눈앞에는 천룡이의 밝은 얼굴이 달처럼 떠올랐다.천룡오빠,오매불망 그리는 당신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있나요?그녀는 3년동안 편지 한통 없는 천룡이가 야속하기 그지없었다.오빠의 마음속에 아직도 이 해란이가 자리잡고있을가?내가 찾아간다면 오빠가 예전처럼 나를 반겨줄가?나의 처지를 안다면 그이의 마음은 어떠할가?순결을 지키지 못한 내가 무슨 낯으로 그이를 찾아간단말인가?너무너무 사랑하기에 나는 그이를 찾아갈수가 없어.그럼 어디로 행한단말인가?아무리 생각을 굴려봐도 갈만한곳이 없었다.그녀는 대합실에 들어가서 고향집으로 가는 기차표를 사는수밖에 없었다. 렬차에 오른 그녀는 출입문과 가까운 구석진 곳에 좌석을 잡았다.려객들은 물병아리가 된 그녀를 보고 놀라면서 왜 우산을 지니지 않고 길을 나섰는가고 나무랐다.해란이는 려객들의 동정에 설음이 북받쳐올라 차탁에 엎디여 흐느꼈다.근방에 앉은 려객들은 그녀를 달래면서 감기에 걸리기 쉬우니 어서 옷을 벗어 비물을 짜라고 권고하였다.해란이는 몸에 한기를 느끼고 화장실로 들어갔다.옷을 벗어 비물을 짜 입은 뒤 좌석으로 돌아왔다.려객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이것저것 물을가봐 그녀는 좌석에 앉자마자 엎디였다.밤잠을 설치고 비바람속에 몇시간을 시달린 그녀는 로독에 어슴푸레 잠이 들었다. 옆에 앉았던 한 할머니가 어깨를 흔드는바람에 그녀가 깨나보니 기차는 어느새 종착역에 이르렀다.정신을 가다듬고 간신히 일어나 차문어귀까지 걸어나온 그녀는 플래트홈에 내려 법석거리는 인파를 따라 개찰구를 빠져나왔다.  역전광장의 복판에는 한 소녀가 손에 비둘기 한마리를 받쳐들고 서있는 조각상이 있었다.소녀의 발주위에는 비둘기 몇마리가 그녀를 에워싸고있었다.해란이가 조각상우를 올려다보니 소녀의 손바닥에 앉은 비둘기는 한쪽 날개죽지가 없었다.어느 심술꾸러기가 돌을 던져 비둘기를 해친 모양이였다.얼마나 참혹한 정경인가?너의 처지도 나처럼 애처롭구나.푸른 하늘을 자유롭게 날려던 아름다운 희망이 저렇게 처참하게 깨여졌으니 비참하기는 나와 다름없구나.그 무엇이 너와 나의 행복과 파아란 꿈을 이렇게 산산조각으로 만들었나?오늘 내가 이 모양 이 꼴로 집에 돌아가면 부모님께서 얼마나 실망하시겠나…  해란이는 저녁 네시에 있는 마지막 뻐스를 타려고 정류소로 종종걸음을 쳤다.매표구앞에서 표를 사려고 호주머니를 뒤지던 그녀는 눈이 퀭해졌다. 돈이 70전밖에 없었다.차표를 사려면 50전이 모자랐다.혹시 한마을에 사는 사람을 만날가 하고 주위를 돌아봐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70리나 되는시골길을 홀로 걸어갈수는 없었다. 그녀는 고중때 동창이자 하숙집 주인의 아들 권철이를 찾아가기로 했다.골목길을 꿰지르니 영화관앞이였다.선전용화랑에는 영화 을 소개한 그림이 붙어있었다.그녀는 천룡이와 처음 밀회를 가질 때 바로 이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던 생각이 났다.  잊을래야 잊을수 없는 지난날이 주마등같이 그녀의 머리속을 스쳐갔다.1961년 새학년도에 그녀가 시의 한족고중에 입학하여 두번째로 맞은 주말이였다.그날 오후 담임교원인 강선생님께서는 전교의 조선족학생들을 학교 구락부에 불러놓고 서로 인사를 시켰다.회의가 시작되기 10여분전에 그녀가 구락부에 들어서니 학생 10여명이 와 있었다.그중 검정운동복을 입은 한 남학생은 피아노를 치면서 조선민요 을 신나게 부르고있었다.음악을 즐기는 해란이는 피아노 가까이 가서 그 노래를 가만가만 따라불렀다.연주를 마친 남학생이 일어서더니 해란이를 보고 빙긋 웃으면서 말을 걸었다.   그는 두손으로 피아노를 가리키면서 말하였다.    피아노를 만져보지도 못한 그녀는 금세 얼굴이 익은 능금알로 되였다.    그 남학생은 다시 탁구대앞에 가더니 탁구채를 쥐고 말했다.   선뜻 나서는 학생이 없자 그는 아쉬운듯 탁구채를 놓고 자리에 가 앉았다.  이윽고 강선생님이 들어왔다. 그는 학생들이 아직 덜 모인것을 보고 탁구대앞에 가더니 그 남학생을 불러 두 사람이 함께 공을 쳤다.그들은 길게 뽑고 가까이에서 깎는것과 정면이나 뒤면으로 치고 받는 기술이 대단했다.  학생들이 다 모이니 모두 18명이였는데 녀학생은 오직 해란이뿐이였다.고년급 학생이 다수이고 신입생은 세명뿐이였다. 해란이와 권철이외에 남학생 한명이 더 있었다.권철이는 학교와 1리 상거한 철길 동쪽에 사는데 해란이의 외가와 동성동본이며 해방전부터 친숙한 사이라 해란이의 어머니가 권철의 부친을 오빠라고 부르므로 해란이도 권철이를 오빠라고 불렀다.  먼저 강선생님이 자아소개를 했다.  피아노를 치던 그 남학생이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일어서서 말했다.    그 한차례의 모임이 있은 뒤 해란이는 천룡이에 대해 점차 호감이 생기기 시작했다.1메터 75센치가 조금 넘는 키에 둥글넙적한 얼굴,검은 눈섭아래 쪽 선 코대,커다란 눈,웃을 때 생기는 보조개,꼿꼿한 키에 어느때나 검정운동복을 입고다니는 그는 성격이 활발하고 음악과 체육에 능하였다. 집이 료녕에 있는 학생이 왜 우리 길림에 와서 공부할가?피아노치는건 언제 배웠고 탁구치는 기술은 언제 익혔을가?일련의 물음표가 머리속에서 맴돌이쳤다.해란이네 교실은 천룡이네 교실과 복도를 사이두고 있어서 교실을 드나들 때면 자주 볼수 있었다.그와 만날 때면 해란이는 방긋 미소를 지으며 눈인사를 하거나 고개를 약간 끄덕였다.날이 갈수록 그녀는 천룡이에 대한 호감이 커갔고 그와 접근하고싶은 충동이 생겼다.  국경절을 맞으면서 학교에서는 문예공연대회를 열었다. 천룡이네 학급에서는 라는 연극을 공연했는데 천룡이가 주역을 맡아 관중들의 갈채를 받았다.막간 휴식때 천룡이는 또 막앞에 나와 바이올린독주까지 하였다.해란이는 천룡이의 다재다능에 감복하였다.  어느덧 운동기념일이 다가왔다.학생회에서는 또 한차례의 문예공연을 조직했는데 학습압력이 큰 3학년을 돌봐서 1,2학년에만 임무를 맡겼다.학급의 단지부서기를 맡은 해란이는 대합창을 하는데 악기반주를 맡을 학생이 없어서 문오위원인 장연과 상의한 끝에 천룡이한테 도움을 청하기로 하였다.해란이는 단독으로 천룡이를 만나기가 쑥스러워서 장연과 함께 천룡이네 교실문을 노크했다.  밖에서 누가 찾는다는 말을 듣고 복도에 나온 천룡이는 해란이를 보고 무슨 일로 찾는가고 물었다.장연이가 사유를 말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통쾌하게 응낙했다.  그들은 천룡이의 학습에 지장을 덜 주려고 점심시간이나 저녁식사후의 짬을 타 종목을 련습하였다.  이번 공연에서 해란이네가 출연한 대합창이 최우수상을 받았다.  어느 토요일날 저녁,영화관에서 조선영화 을 상영한다는 말을 들은 해란이는 천룡이와 함께 영화관람을 하려고 마음먹었다.그러나 단독으로 천룡이를 만날 용기가 나지 않아 비록 맘에 내키지 않았지만 장연이를 앞세우고 천룡이를 찾아갔다. 천룡이는 그들의 말을 듣고 무척 기뻐하면서 다섯시 반에 영화관문앞에서 만나자고 말하였다.영화상영을 5분 앞두고 천룡이가 영화관앞에 왔다.좌석을 잡을 때 장연이가 해란이더러 천룡이의 곁에 앉으라고 밀자 그녀는 못이기는척하고 가 앉았다.  영화를 보다가 해란이는 천룡이한테 낯을 돌리면서 가만히 물었다.      천룡이의 대답은 아주 간단했다.  어느새 영화가 끝났다.  그해 학교에서는 활동을 대대적으로 벌였다.학교에서는 로동에 참가한 학생에게 약간의 량권을 내줬는데 해란이도 량권을 10근 받았다.거듭되는 천재와 인재로 온 나라 백성들이 심한 기아에 허덕일 때 알곡은 목숨과 같이 귀한것이였다.량권을 손에 받아쥔 해란이는 남먼저 천룡이를 생각하였다.천룡이는 학교의 식당밥을 먹으니 배를 얼마나 곯을가?신체가 좋고 운동을 즐기는 그가 끼마다 강냉이가루떡 두개만 먹으며 주림을 참느라 얼마나 고생할가?   해란이는 글을 쓴 쪽지에다 량권 10근을 끼워서 천룡이가 수업을 마치고 식당으로 갈 때 남의 눈을 피해 천룡이의 손에 쥐여주었다.  원단에 학교에서는 사흘동안 휴식하였다.집에 오가는 뻐스비를 남기려고 학교에 남은 해란이는 교실에 홀로  있기가 적적해서  천룡이를 찾아가서 함께 영화구경을 나섰다.두 사람이 나란히 길을 걷는데 천룡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차지도 덥지도 않은 천룡이의 말에 해란이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생긋 웃어보였다. 그녀는 대답을 기다리는 천룡이의 눈길과 마주치자 얼굴이 홍시같이 익고 가슴도 참새를 품은듯 콩콩 뛰였다.그녀는 자기가 짝사랑에 빠진것이 아닌가고 의심해봤으나 천룡이가 호의를 받아들인걸 보아 자기를 배척하지는 않는다고 단정했다.영화관에서 금방 좌석을 잡을 때 두 사람은 저마다 단정한 자세를 취했지만 영화를 보면서 그들은 그들은 서로 어깨를 맞대게 되였다.영사막에 젊은 사내가 련인에게 꽃다발을 선물하는 장면이 나타났다. 이때 천룡이는 호주머니에서 자그마한 물건을 꺼내 해란이의 손에 쥐여주었다.그녀가 희미한 불빛을 빌어 펴보니 붉은 털실로 짠 장갑을 손수건에 싸놓으것이였다.그녀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던지 천룡이의 손을 꼭 쥐고 오래동안 놓을줄 몰랐다.    학교로 돌아오는 길에서 천룡이는 해란이의 물음에 확답을 피하고 빙그레 웃으면서 되물었다.그는 해란이의 대답을 기다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해란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방긋 웃었다.어느새에 교문앞에 이르렀다.천룡이는 해란이의 자그마한 손을 꼭 쥐고 아무런 말도 없이 그녀를 뚫어지게 보았다.마치도 그녀의 마음을 꿰뚫으려는듯이. 그는 돌아서서 두어발작 내디디다가 다시 머리를 돌려 해란이한테 손을 젓고나서 성큼성큼 교정안으로 들어갔다.해란이는 못박힌듯 서서 그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눈바램을 했다.  겨울방학이 되였다.학생들은 너도나도 앞다투어 귀가했다.이튿날 아침 뻐스표를 사놓은 해란이는 천룡이가 밤 11시 차표를 샀다는 말을 듣고 저녁 7시가 되자 천룡이를 찾아갔다.기차를 탈 시간이 4시간 남았으므로 그들은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고 나왔다.하늘에서는 솜털같은 눈이 날렸는데 겨울치고는 무척 푸근한 날씨였다.그들은 역전광장부근의 거리에서 어깨를 나란히하고 걸으면서 학습과 리상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가슴속에 숨겨놓은 말들이 많았지만 누구도 털어놓기를 주저했다.그들은 심중에 깊이깊이 숨겨둔 사랑이 신성하다는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기때문이였다.  해란이는 두 사람이 호젓이 만난 이 자리에서 진정을 토로하려고 몇번이나 입술을 호물거렸지만 천룡이가 웃을가봐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다.그러나 이제 두시간만 지나면 천룡이가 렬차에 오를것을 생각하니 절호의 기회를 놓치기가 싫었다.          해란이는 천룡이의 곁에 바싹 다가서서 발등을 내려다보며 모기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빙그레 웃는 천룡이의 얼굴을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안타깝게 그의 대답만 기다렸다.이윽고 천룡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천룡이가 해란이의 손을 꼭 쥐고 의미심장하게 웃어보이자 그녀는 격동되여 눈물이 핑그르 돌았다.    해란이는 천룡이의 넓은 가슴에 얼굴을 대고 어깨를 들먹거렸다. 밤, 삼라만상이 고요에 잠긴 밤, 가로등불도 지쳤는듯 명멸하는 거리에서 한쌍의 청춘남녀는 인적 끊긴 거리의 주인이 되여 많고 많은 정담을 나누었다.발차시간을 한시간 앞두고 그들은 정거장으로 돌아왔다.  지루한 방학이 끝나고 개학할 날이 찾아왔다.뻐스를 타고 시내에 온 해란이는 책가방과 일용품을 넣은 가방을 메고 식량자루를 짊어진 아버지를 따라 하숙집인 권철이네 집으로 찾아갔다.  그날 저녁,해란이의 부친과 권철의 부친은 술상에 마주앉았다. 술이 거나해지자 흥이 난 두 사람은 말이 잦았다.      흥이 도도한 권령감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옆방에 앉아서 어른들의 말을 귀동냥하던 해란이는 너무도 억이 막히고 귀에 거슬려서 일찌감치 이불을 덮어쓰고 누웠다.이튿날 아침 해란이는 밥을 먹자마자 책가방을 메고 학교로 갔다.누구보다 천룡이가 몹시 보고싶었다.  새학기가 되자 학습이 긴장해졌다.해란이는 대학입시시험준비에 바쁜 천룡이의 학습에 지장이 될가봐 의식적으로 그와의 접촉차수를 줄이였다.5월달에 천룡이가 졸업시험을 치르고나자 해란이는 그를 찾아가서 어느 대학 무슨 전업을 지망하는가,생활에서 애로는 없는가를 물었다.천룡이는 예술학원의 음악전업을 지망한다면서 생활에 별 어려움이 없으니 안심하고 공부나 잘하라고 말하였다.  7월하순에 대학입시시험이 진행되였다.수험생들에게 시험장소를 제공하느라 재학생들은 농촌에 내려가 적비로동에 참가하였다.해란이가 시골에서 닷새동안 일을 하고 교정에 돌아와보니 대학입시시험을 치른 고3학생들이 모두 집에 돌아가고 3학년 교실은 텅텅 비여있었다.해란이는 현관벽에 써붙여놓은 수험생명단에서 천룡이의 이름을 읽었을뿐이였다.  9월초에 해란이는 천룡이가 부쳐온 편지를 받았는데 금년에 국가에서 대학생모집인수를 줄인바람에 락방했다면서 명년에 시험을 한번 더 치겠다고 하였다.그는 해란이더러 잡념을 버리고 정력을 학습에 몰부어 기초를 튼튼히 닦으라고 조언하였다.며칠뒤 그는 약간의 복습재료와 백로지 한묶음을 우편으로 부쳐왔다.종이가 결핍하던 그 시기에 한뭉치의 백로지는 그녀의 학습에 커다란 도움이 되였다.  순식간에 2년이란 시간이 흘러 해란이도 고중을 졸업하였다.총명한 기질에 워낙 악착스레 공부한 보람으로 그녀는 할빈에 있는 H대학에 진학하였다.대학교에 등교하여 한주일이 되였을 때 해란이는 자기를 그렇게 아끼고 보살펴주던 천룡이에게 감사편지를 써보냈는데  어인 영문인지 강물에 돌던진 격으로 회신이 없었다.혹시 편지가 류실되지 않았나 하고 일년동안 대여섯번이나 편지를 띄웠어도 천룡이한테서는 아무 회답이 없었다.지금 그이는 어디서 무얼 하고있을가?편지를 한통도 받아보지 못했을가?아니면 나보다 이쁜 쳐녀를 만나 가정을 꾸렸나?아니, 참군했을지도 몰라.천룡이에 대한 그리움은 자나깨나 그녀를 괴롭혔다…  ”  권철이의 페부지언을 듣고 그녀는 코가 시큰하였다.  “해란아,지금 너의 처지엔 집을 떠날수 없구나.그리고 가망없는 천룡이에 대한 미련은 버려라.이젠 우리도 나이가 적잖은데 혼인대사를 무제한 끈다는건 비현실적이잖아.오늘 나는 네한테 정식으로 청혼한다.내 마음을 받아주겠니?”  “오빤 내가 밉지도 않아요?나는 소녀의 순정을 남한테 바친 녀잔데 한평생 후회하지 않을수 있겠어요?”  “해란아,나는 널 평생 사랑한다고 맹세한다.너는 내 천사고 우상이니까 설사 네가 다른 사람과 살다가 혜여졌다고 해도 나는 너를 반갑게 받아들일거야.내 말을 믿어줘.”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라 첫사랑은 영원히 지워버릴수 없는가봐.권철이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나 내가 천룡이를 그리는 심정은 꼭 같을거야…)  해란이는 권철이와 속심의 말을 하고 또 했다.그러나 그날밤에 당한 폭행만은 입밖에 낼수가 없었다.그것은 권철이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기때문이였다. (아, 녀자는 왜 정조를 짓밟히면 고개도 떳떳하게 들수 없는가?남자들은 왜 녀성들의 이런 고충을 리해하지 못하는가?)그녀는 자신이 녀자로 태여난것이 서러웠다.  “오빠의 심정을 알만해요.천천히 고려해보겠어요.”  “해란아,고마와.나는 네가 마음을 정리하고 날 받아줄 때까지 기다릴테다.”  격동된 권철이는 해란이의 손을 꼭 쥐고 미칠듯이 키스를 퍼부었다.  “오빠,이젠 주무세요.나는 돌아가 쉬겠어요.”  어머니의 곁에 누운 해란이는 오래동안 잠들수 없었다.권철이의 청혼에 응한다는것이 쉽지 않아서였다…  초가을에 해란이네는 알곡을 팔아 약간의 혼물을 마련하여 초라한 결혼식을 올렸다.그들은 권철이가 근무하는 학교 근처에 세집을 구해 새살림을 꾸리였다.해란이는 친정의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결혼식을 치른 한주일만에 림시공일을 찾아나섰다.  이듬해 봄에 대학교에서 편지가 왔다.정상수업을 시작했으니 며칠내에 등교하라는 통지였다.얼마나 반가운 소식인가?그녀는 배움의 전당에서 리상의 나래를 펼치던 학창생활이 환영처럼 눈앞을 스쳐지나갔다.그런데 정작 등교하려고 하니 두려움도 적잖았다.반란파조직 우두머리의 보복이 두려웠다.그러나 앞날을 위해 그녀는 결연히 북행렬차에 몸을 실었다.  학교의 모든것은 그렇게 익숙하고 또 그렇게 생소했다.폭풍뒤의 교정은 2년전의 아늑함이 없었다.반동학술권위로 몰려난 교수들은 대부분이 아직 교단에 오르지 못했고 실험실이며 도서실 그 어느 곳도 피해를 입지 않은 곳이 없었다.내란끝의 사생이나 동창사이에는 아직까지 성에가 끼여있었다.말이 전기전업이지 배운다는것은 신문의 사설이나 중앙령도의 지시정신이였다.피땀에 절인 돈을 허비하며 무료한 나날을 보내자니 피가 말랐으나 졸업장을 타기 위해 그녀는 모든 고통을 참고 견뎌야만 했다.  몇달이 지나자 학교에서 졸업식을 거행하였다.학교에서는 졸업증서는 후에 발급할테니 집에 돌아가라면서 학생들에게 졸업증명서만 한장씩 떼주었다.  이불짐을 정리한 해란이는 부랴부랴 교정을 떠났다.안해가 집에 오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는 권철이가 보고싶었고 년로다병한 어머님과 친정 동생들이 그리웠지만 그보다도 날이 다르게 불어나는 배가 걱정스러웠던것이였다.집에 돌아와서 한달이 좀 지나자 그녀는 몸을 풀었는데 하늘이 점지했는지 옥동자를 순산하였다.오래만에 새생명이 태여나자 시부모와 친정어머니는 기뻐서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권철이와 해란이는 시대조류에 맞춰 애의 이름을 홍근이라고 지었다.  그런데 권씨댁의 경사는 오래 가지 못하였다.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화가 머리에 떨어졌다.홍근이의 백날잔치를 앞둔 어느날,권철이가 자전거를 타고 시내에 가서 장을 보고 돌아오는중이였다.멀리서 질주해오는 기차는 횡도에 사람이 있는것을 보고 경적을 울리였다.이때 철길을 지나던 짐마차의 말들이 경적에 놀라 울부짖으며 길복판에서 미친듯이 내닫고있었다.70~80메터앞에는 방금 하학한 소학생들이 짐마차가 덮쳐드는것도 모르고 길에서 히히닥거리며 걷고있었다.다급해난 차몰이군이 말고삐를 힘껏 잡아당겼으나 허사였다.놀랄대로 놀란 말들이 차우에 실은 짐짝을 땅에 떨구면서  날뛰는통에 차몰이군도 차에서 떨어져  끌려가고있었다.  위기일발의 시각에 현장에 당도한 권철이는 “길을 비켜라!”하고 벽력같이 고함을 지르며 나는듯이 자전거의 페달을 밟아 학생들을 피하게 하면서 자전거를 가로세워 말들의 전진을 막으려 하였다. 그러나 전속으로 내닫던 말들을  그로서는 막아낼수가 없었다.자전거를 깔아버린 짐마차는 순식간에 권철이를 넘어뜨려 깔고지나가다 멎었다.  비장한 광경을 보고 행인들이 달려왔을 때 권철이는 이미 머리에 심한 타박상을 입은데다 내출혈로 인사불성이였다.칠팔명의 어린이들은 위기를 모면했지만 권철이는 병원에 호송되기도전에 숨지고말았다.  해질무렵, 비보를 접한 해란이는 이같은 청천벽력에 까무러치고말았다…얼어붙었던 가슴이 봄바람을 맞아 바야흐로 녹기 시작했을 때 운명의 신은 그녀를 또 천길나락으로 떨어뜨렸다.내가 무슨 죄를 졌다고 불행이란 불행은 다 나에게만 떨어지는가?그녀는 하늘이 밉고 땅이 밉다고 통탄하였다.  정부에서 약간의 위자료를 보내왔지만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하기엔 바가지로 산불을 끄는 격이였다.  생계를 위해 해란이는 남편의 장례를 치른 한주일만에 홍근이를 업고 인사부문을 찾아갔다.졸업생배치를 주관하는 젊은 간부는 그녀가내놓은 대학졸업증서와 보존서류를 자세히 보고나서 그녀의 얼굴을 훑어보더니  “동무가 권철선생의 애인이요?””하고 묻는것이였다.  “예.”  그녀의 대답이 떨어지자 그 간부는 얼굴에 화색을 띄우면서 일어나 의자를 가져다주면서 잠시 기다리라고 하였다.  “권선생이 장한 일에 몸바쳤는데 우리가 다른것은 못돕지만 사업단위만은 좋은 곳을 골라주겠소.해란동무,대학교에서 전기전업을 배웠으니 여기 있는 공장중에서 맘에 드는 곳을 고르시오.”  해란이는 인사간부의 손에서 공장이름이 적혀있는 종이장을 받아들고 자세히 보았다.인사간부가 곁에 서서 매개 공장의 위치와 정황을 차근차근 소개해주자 해란이는  동력곤장을 선택했다.동력공장에는 배치받은 대학생들에게 숙사를 마련해준다니 생활근심이 적은데다가 학겨까지 부근에 있어서 홍근이를 교양하는데도 유리하였다.인사간부는 소개신을 써주면서 먼저 집에 돌아가 며칠간 쉬면서 출근준비를 하고나서 공장에 가라고 하였다.  한주일뒤 해란이는 동력공장을 찾아갔다.인사부문에서 걸어온 전화를 받고 사정을 알게 된 공장장과 지도일군들은 그녀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해란이는 홍근이를 공장 탁아소에 맡가고 이튿날부터 출근을 시작했다.비록 산후의 몸조리는 변변히 놋했지만 직장을 찾으니 새 삶을 찯은 느낌에 가슴이 벅차오르고 몸에 힘이 솟았다.  생활이란 호수물같이 고요하고 안온한것은 아니다.그녀가 비록 조직의 보살핌과 동료들의 도움을 받지만 많잖은 로임에 홀몸으로 젖먹이를 키우고 친정을 돌보며 사는게 여간 힘겹지 않았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곤난을 하나하나 이겨내였고 언제나 맑은 미소로 사업과 동료들을 맞이하였다.  생활이 궤도에 오르자 그녀에게 중매를 서겠다는 동료도 적잖았고 청혼하는 동료들도 한둘이 아니였다. 껴버린 사랑의 불씨가 소생할수 있을가? 그녀는 천룡이와의 초련과 권철이와의  짧디짧은 혼인생활을 회고하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진정한  사랑란 일생에 단 한번밖에 있을수 없다. 애정이란 한곬으로만 쏠리는 것으로서  물건같이 아무에게나 주고받는것이 아니다.나는 이미 부득이한 사정에서 마음을 한번 움직였는데 이제 더는  움직일수 없다.권철이를  잃고나니 천룡이가 새삼스레 그리워졌다. 순간,그녀는 권철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홍근이를 자리우는것만이 권철이에게 보답하는것이라고 생각하였다.아들까지 있는 자기가 아무런 감정도 없는 사람과 새 가정을 이루는것은 불행만 초래할것이라고 생각한 그녀는 그들의 호의를 웃음으로 막아버렸다.     20여년이란 파란많은 세월이 꿈결같이 흘러갔다. 기름기 흐르던 까만 머리에는 성에가 끼고 웃음기 남실거리던 눈언저리에도  잔 금이 지나갔다. 꿈많던 시절은 추억으로 사라지고 중년의 인생고개가 앞에 놓여있다. 친정어머니와 시부모들도 선후로 타계하고 철부지 동생들도 장성해서 가정을 이루어 깨알이 쏟아진다. 마음의 기둥 홍근이도 충실하게 자라났다. 초중을 졸업한 홍근이는  소년병으로 입대했는데 지금은 료녕 군구 수장의 승용차를 몰고있다. 7~8년전에 군복을 갈아입은 홍근이는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사업에 충성하여 선후로 2등공과 3등공을 세워 어머니에게 기쁨을 안겨주었다. 홍근이는 비록 수당금을 많이 받지 못하지만 평소에 아껴쓰면서 용돈을 모았다가 명절이나 어머니의 생신날이 되면 집에 선물을  보내왔다. 해란이는 어엿한 아들로하여 긍지감을 느꼈고 삶의 기쁨을 느껴 사업에도 성수가 났다. 진취심이 강한 그녀는 기술개발에서 많은 성과를 얻어  공장에서 손꼽히는 고급공정사로 진급하였다. 그녀는 모든 심혈을 사업에 몰부으면서 고독과 시름을 풀었다. 모자간에 서신래왕은 그녀의 유일한 향수였다.   사람들은 해마다 설이 되면 흩어져있던 가족이 한자리에 단란히 모여 그리던 정을 나누고 천륜지락을 누린다. 그러나 해란이만은 한날한시같이 독수공방으로 고독을 달래야 하니  명절을 맞는것이 오히려 고통이였다. 그녀는 공장장을 찾아가 명절기간에 직일을 서겠다고 자원하였다.  동료들로하여금  가정식구들과 즐겁게 명절을 쇠게하기 위해서였다. 그녀의 고마운 처사에 깊이 감동된 공장지도자와 동료들은  륜번으로 접수실을 찾아와서 말동무를 하면서 명절음식을 나눠먹기도 하였다.   20여일전에 홍근이한테서 편지가 왔다. 홍근이는 군관학교모집에 응시하겠다 면서 경비가 좀 딸린다는 뜻을 에둘러 표했었다.   >   해란이는 신바람나게 우체국에 달려가서 돈 200원을 부치면서 편지에 공부를 착실히 해 기쁜 소식을 전해달라고 당부하였다. 그런데 십여일이 지나 홍근이한테서 또 편지가 날아왔다. 피봉을 뜯어보니 보내온 돈은 잘 받았는데 돈을 더 부쳐달라는것이였다. 보름만에 돈을 두번이나 부치고난 해란이는 어쩐지 이상했다. 홍근이한테 무슨 변이 생겼나? 돈을 왜 자꾸 부쳐달라는겐가? 책 사는데  돈이 수백원씩이나 들가?  의혹은 생겼지만 홍근이의 인품을 손금보듯 아는 그녀는 아들의 말을 믿고싶었다. 아마 다른 곳에 목돈을 쓸 일이 생긴게로구나. 그렇지, 뒤문거래가 많은 세월인데 부대라고 정토겠나? 누구나 다 가고싶어하는 군관학교니  경쟁이 무척 치렬할테지. 군관학교에 입학하려면 성적만으로는 부족할거야. 령도한테 감정투자를  하려면  홍근이 손의 돈이야 새발의 피지. 이렇게 생각하니  의혹이  해소되여 가슴이 후련해졌다.   마침 해란이는 산동으로 출장가게 되였다. 홍근이의 일이 궁금한 해란이는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군구를 찾아갔다. 사령부사무실에 들어가서 수장을 만난 그녀는 출장길에 들렸다면서 지금 홍근이가 어디 있는가고 물었다.  안면이 있는 수장은 해란이에게 의자를 권하고나서 홍근이가 거리에 나갔으니 돌아올때까지 기다리라면서 차물을 한컵 부어주었다. 그녀는 수장께 홍근이의 공작과 생활정황을 물어보고싶었으나 수장이 전화를 받고 지시하느라 바쁜것을 보고 입밖으로 나오는 말을 삼켜버렸다. 그녀는 수장의 공작에 영향을 끼칠까봐 수장에게 소풍하고 오겠다고  말하고 사무실을 나와 대문쪽으로 걸어갔다.  이 때 마중켠에서 승용차 한대가 대문으로 들어오고있었다. 그녀가 길을 내주느라 한켠으로 비키는데 승용차가 대문앞에서  멈춰섰다.      귀익은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번쩍 드니 오매에도 그리던 아들이 운전석에서   뛰여내렸다.       홍근이는 약간 당황해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 하고는 다시 승용차에 올랐다.  해란이는 아들의 능숙한 운전솜씨를 보고 마음이 흐뭇했다.  차고에서 돌아온 홍근이는 해란이의 손을 잡고  숙소로 왔다. 침실에 들어가자 홍근이는 어머니에게 의자를 권하고나서 작업복을 벗고 손을 씻더니 물 한컵을 부어 어머니한테 드렸다.   해란이가 물을 마시면서 집안을 돌아보니 사무상에는 전화기가 놓여있고 책꽂이에는 서적이 여러권 꽂혀있었다. 침안은 무척 우아하고 정결했다. 그녀는 롱조로 말하였다.        해란이는 려행용가방에서 과일꾸럭을 꺼내 사무상우에 놓으면서 어서 먹으라고하였다.   어머니의 자애로운 모습을 바라보던 홍근이의 낯에서 웃음기가 점점 사라졌다. 그는 머리를 숙이고  머뭇거렸다.       어머니의 눈길을 피하며 말하는 그는 입술이 떨리고 눈물이 글썽하였다. 그는 급기야 어머니의 무릎앞에 꿇어앉아 울먹거리며 입을 열었다.     해란이는 오늘 그를 만나 복사령이라고 부를 때 젓던 손이 바로 대학교 방송실에서 그녀의 입을 틀어막던 그 죄악의 손이라고 단정하였다. 그녀는 분노에 찬 눈길로 복대위를 쏘아보았다.   복대위는 머리를 맥없이 떨어뜨리고 아무런 말도 못했는데 얼굴은 삽시에 난로불같이 달아올랐다.   해란이는 복대위가 그녀를 폭행한 죄를 탄백하지 않는것을 보고 격분했으나  지금  죄증이 손에  없어서 치솟는 분노를 가까스로 누르며  말했다.        해란이는 일어서면서 대위를 보고 물었다.    해란이는 어쩐지 령령이의 신원을 알지 않고는 견딜수 없었다.   >               해란이가 병원에 와보니 령령이는 그때까지 훌쩍거리고있었다. 해란이도 몸을 벽쪽으로 돌리고 흐르는 눈물을 훔치고 또 훔치였다.  홍근이가 침대머리에 앉아서 령령이의 눈물을 닦아주며 달래고 또 달래서야 그녀는 가까스로 울음을 그치고 수술을 하겠다고 응낙하였다.  의사들은 환자의 입에서  동의한다는 말이 나오자 밤이 길면 꿈이 많아질까봐 수술시간을 앞당기려하였다. 그러나 며칠동안 입에 곡기 한모금  들어가지 않아 허약한 환자를 수술대에 올려놓을수 없어서 며칠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해란이는 이 기회에 복대위의 죄증을 가져오고 또 령령이의 신원을 밝히려고 서둘렀다. 그녀는 홍근이더러 집에 잠시 다녀올테니 그동안 령령이를  잘 돌보라고 당부하였다. 집에 와서 농밑에 20여년간 감춰뒀던 죄증을 찾아 손가방에 넣은 그녀는 곧바로  령령이의 양이모댁을 찾아갔다.   해질 무렵에 령령이의 양이모를 만났다. 50대를 바라보는 그녀는 손님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녀와의 담화를 통해 해란이는 복대위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확인하였다. 그날 밤, 해란이는 령령이의 양이모댁에서 하루밤을 쉬였다. 그들은 침대에 가지런히 누워서 령령이의 신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  내 추측이 틀리잖았구나. 령령이는 확실히 천룡이의 딸이였구나! 그러기에 령령이는 첫눈에 어딘가 그렇게 낯익어 보였고 웃을 때 생기는 보조개는 그렇게도 천룡이를 닮았었구나. 수술을 앞두고 그애의 친부모가 누군지 알고싶던 충동이 인것도 이런 연분때문이였구나. 해란이는 령령이의 아픔을 몰라줬던 자신이 미워졌다. 그녀는 인간세상에 왜 걸림돌이 이렇게 많고 고통이 이렇게 많고 생리사별의 슬픔이 이렇게 많은가고 하늘을 향해 소리쳐 묻고싶었다.    이튿날 아침, 병원에 돌아온 해란이는 대위의 숙소로 찾아갔다.    노크소리에 화뜰 놀란  대위는 해란이가 옛장부를 청산하러 왔으리라 짐작하고 죄책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20여년전의 여름밤에 저지른 일이 환영같이 머리속을 스쳐갔다.   폭우로 인해 헛걸음을 치고 숙소로 돌아온 그는 새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있다가 일어나보니 여덟시가 지났었다. 식당은 문을 닫은지 오래였다. 그는 해란이와 음식점에 가서  저녁을 사먹으려고 사무실에 갔다. 전등을 켜고난 그는 해란이가 들으라고 몇번 헛기침을 했다. 그런데 방송실안에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해란이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가? 호기심이 동한 그는 벽의 창문 미닫이를 살그머니 밀고 방송실안을 들여다보았다. 방송실은 전등을 켜지 않아 어두컴컴하였다. 해란이가 하마 잠을 자나? 그는 어쩐지 마음이 싱숭생숭해났다.  손을 내밀고 커튼의 한쪽을 당겨보니 커튼은 두 끝을 고정해놓았는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서랍에 있는 손가위를 가져와서 커튼에 작은 구멍을 내고 전등불빛을 빌어 방송실을 들여다보았다. 침대우를 훔쳐보던 그의 눈이  확 밝아졌다. 해란이는 옷을 입은채 단잠이 들어있었다.기름기 도는 까만 머리카락, 약간 벌린 앵두입술, 능금같이 발가우리한 두 볼, 속적삼우로 봉긋하게 솟은 젖무덤, 사람 인(人)자 모양으로 약간 벌어진 두 다리… 그는 금세 온 몸에 피가 거꾸러 흐르고 숨이 가빠졌다. 리지를 잃은 그의 두뇌에는 수욕이 끔틀거렸다. 지지벌개진 목을 움추리고 주위 동정에 귀를 기울이던 그는 인적이 없자 벽창문에 놓인 전화기를 사무상우에 옮겨놓았다. 그는 사무실의 전등을 끄고 창문으로 머리를 내밀고 고양이같이 미식을 노렸으나 큰 체구라 들어갈수가 없었다. 그는 창문미닫이를 들어내고나서 커튼을 손가위로 베고 방송실로 기여들어갔다. 그는 귀를 도사리고 주위의 동정을 살피다가 처녀의 다리를 살짝 건드렸다. 꿈나라에 깊이 빠진 그녀는 벼락이 떨어질줄도 모르고 쌔근쌔근 달게 자고있었다.그는 손가위를  입에 물고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낸 뒤  세수대야옆에 걸린 수건을 가져다 복면을 하고 처녀의 몸우에 덮쳐들었다…… 수욕을 한창 채울 때 전화벨이 울렸다. 화뜰 놀란 그는 누가 찾아올까봐 급히 문을 열고나와 사무실에 들어갔다. 그는 미닫이를 다시 달아놓고 전화기를 창문턱에 올려놓은 뒤 부랴부랴 숙소로 돌아갔다……   해란이는 결김에 대위를 찾아오긴 했지만 20여년이 지난 오늘 대위가  죄를  부인하면 어쩌나 하고  망서리였다.   그런데 심한 량심적 가책에 모대기던 대위는  해란이가 노크하고 들어오자 일어나 해란이의 걸상에서 일어서더니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땅에 이마를 짓쪼으며 용서를 빌었다.     남의 청춘을 여지없이 짓밟은 원쑤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들으니 그녀는 너무도 분해서 말조차 할수 없었다. 치가 떨리고 이가 부득부득 갈리고 가슴이 방망이질하였다. 악이 받친 그녀는 대위의 옷자락을 거머쥐고 부리나케 대위의 귀통을 두어번 치고나도 성이 차지 않아 발로 두어번  다리를 찼다.     과거를 생각하면 마구 물어뜯어도 성차지 않지만 대위의 랑패상을 보니 더는 어쩔수가 없었다. 아무리 원쑤라도 사사로이 흉기를 쓸수는 없다.하물며 자신이 진 죄를 탄백하고 손이야발이야 하고  비는데야 어쩐단 말인가?  땅바닥에 꿇어앉아 이마방아를 찧는 대위의 몰골을 보니 측은한 생각도 들었다. 18년간 옥살이를  한 그가 명색은 령령이의 양부가 아닌가? 광란하던 그 세월에 죄진 자가 어디 한둘인가? 20여년이 지난 오늘 다시 복수의 칼을 든다면  너무 옹졸하지 않은가? 그녀는 대위를 용서해줄가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그를 한번 더 자극하지 않고서는 분이 풀릴것 같지 않았다.그녀는 품속에서 피가 얼룩진 침대보조각과 손가위를 꺼냈다.       가까스로 고개를 들고 해란이의 손을 보던 대위는 소스라쳐  악 비명을 지르더니 저의 따귀를 마구 치며 울음섞인 소리로 말했다.          해란이는 대위를 일으켜세웠다.   그들이 병원에 찾아오니 가무단책임자와 담당의사가 이미 병실에 대기하고있었다. 오늘 홍근이도 청가를 맡고 와있었다.   의사는 수술하기전에 가속이 병지에 싸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의사가 병지를 대위한테 내미니 대위는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감히 받지 못하였다. 아버지의 거동을 못마땅해하는 령령이는 대번에 입이 뽀르퉁해져서 고개를 돌리고 홍근이와 해란이를 찾았다.    홍근이는 령령이를 내려다보면서 눈을 한번 껌벅하고나서 의미있게 미소 하다가 의사한테서 병지를 받아들고 환자가속이 싸인하는 자리에 권홍근이라는 세 글자를 써놓았다.   홍근이가 선참으로 싸인하자 해란이가 병지를 받았는데 마음이 삼검불같았다. 대위가 저지른 죄행과 령령이 양모의 파리한 모습이 떠오르고 령령이가 바로  첫사랑 천룡이의 딸이라는것과 홍근이가 애원하던 정경이 떠올랐다. 사랑과 증오, 동정과 원한이 한데 엉켜 맴돌이쳤다. 그녀는 병지를 들고 병실밖을 나왔다. 잠시나마 정신적 안정을 찾고싶었다.  복대위가 그녀의 뒤를 따라나왔다. 그는 해란이의 옷깃을 당기면서 앞에 꿇어앉아 밀했다.    대위의 그 말 한마디가 해란이의 어지러운 심사를 얼마간 눅잦혀주었다. 그의 가련상을 보고 또 령령이의 양모의 고달픔을 생각하며 그녀는 병지에 싸인하고나서 의사한테 가져다주었다. 그녀가 복도에 나와보니 대위는 그때까지 꿇어앉아 고개를 숙인채 흐느끼고있었다.
9    부조돈 30원 댓글:  조회:2086  추천:0  2013-12-29
단편소설            부조돈 20원                      박병대 새벽녘에 살짝 뿌린 백탕같은 싸락눈은 해살을 받아 유난히도 눈부시다.  아홉시 뻐스를 타고 현성에 와 내린 리어머니는 중심거리로 발을 옮겼다. 마침 공일날이라 대통로에는 여느때보다 행인들이 많았다. 리어머니는 밀물같은 사람들속에 끼여 길남켠에 새로 선 4층짜리 백화상점안으로 들어갔다. 아침상을 받다가 뒤마을 영실이 할머니한테서 현성중학교에 있는 김선생이 오늘 딸잔치를 한다는 말을 듣고 부랴부랴 집을 나섰던것이다. 리할머니는 무슨 물건을 사서 잔치에 부조할가 머리를 짜며 붐비는 사람들속에 끼여 상점아래층을 한바퀴 돌았다. 맞은켠에서 웬 청년이 백옥바탕에 빨간 매화꽃이 그려져있는 장식용사기병과 한쌍의 원앙이 호수에서 헤염치는 우모화를 들고 걸어오고있었다. 아마 그도 뉘 집 잔치에 가는것 같았다. (저까짓거야 빛좋은 개살구지. 살림살이에 무슨 도움이 된다구. 잔치부조에는 아무래도 옷감이 기중 낫지.) 리어머니는 층층대손잡이를 잡고 의복을 파는 2층으로 올라갔다. 진렬대앞에 걸려있는 각양각색의 복장은 그야말로 그의 눈을 황홀하게 하였다. 젊은 시절에는 기껏해야 옥양목이나 사봤고 늘그막에 들어서도 나일론, 데트론밖에 더 만져보지 못한 그였다. 이 몇해동안은 이름모를 새천이 얼마나 나왔는지 어느것이나 다 새롭고 신기해보였지만 시체를 따르는 젊은이들이 어떤것을 더 좋아할지 몰라 매대앞에 서서 망설이고있었다. 량태머리를 드리운 판매원처녀는 고객들이 많이 모여선 곳에서 물건을 내보이느라 바삐 서둘렀다. 판매원이 돌아서기를 기다리는데 창문밖에서 구급차 한대가 지나가는것이 얼핏 보였다. 리어머니는 어쩐지 가슴이 섬찍했다. (참, 걔 병이 더해지진 않았겠나?) 애 아비 걱정은 말고 잔치구경만 하고 오라면서 며느리가 5원짜리 지페 넉장을 손에 쥐여주긴 하였지만 정작 그 돈을 부조에 다 쓰려 하니 가슴이 아려났다. 이 돈은 며느리가 제 남편 몸조리하는데 보내려고 이웃에서 빌려온것임을 그는 잘 알고있다. 작년에 기와집을 짓느라고 뭉치돈은 다 썼고 분배결산도 아직 못했는데 애 애비가 갑자기 중독성리질에 걸려 현립병원에 입원하고보니 요즘은 돈이 퍽 딸렸다. 며느리는 용처돈을 벌겠다고 짬짬이 가마니를 짜고있는데 이 늙은이는 짜놓은 가마니도 꿰매지 않고 돈까먹으러 다니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미안한 감이 들었다. 그는 매대앞에서 어정거리다가 판매원처녀가 다가오자 앞에 걸린 옷 한가지를 가리키며 보자고 했다. 노랑바탕에 연분홍꽃무늬가 돋친 저고리가 퍽 맘에 들었다. 아버지의 몸매를 따서 후리후리하고 어머니를 닮아 곱살스런 영란이가 그 옷을 입으면 한결 아릿다울것 같았다. 판매원처녀는 옷걸이에 걸려있는 그 저고리를 내려다주면서 값은 18원95전이라 했다. (에이구나, 물건이 좋으니 값도 비싸구나.) 리어머니는 뽀얗게 서리내린 머리를 벅벅 긁으며 호 한숨을 쉬였다. 왔던김에 병원에도 들려보고싶었지만 이 옷을 사고나면 사과 몇근 살 돈도 모자랄것 같았다. 그렇다고 저켠에 있는 눅거리옷을 사자니 또 맘에 들지 않았다. (부조시세도 하늘 높은줄 아는지 꾸역꾸역 오르기만 한는데 괜히 저런걸 사갔다가 남의 말밥에 오르면 도로 망신이야.) 수수대같은 앙상한 손으로 옷을 만지작거리는 그의 눈앞에는 병원침대에 누워 신음할 아들의 백지장 같은 얼굴이 얼른거렸다. 리어머니는 떨리는 손으로 저고리를 판매원에게 돌려주고 맥없이 층층대를 내려왔다. 그러나 정작 상점문을 나서려니 발이 떼여지지 않았다. 그의 귀전에는 돈을 쥐여주며 하던 며느리의 목소리가 챙챙하게 울려오는듯 했다. 하긴 정말 그렇기도 하다. 김선생의 신세를 어이 말로나 돈으로 갚을수가 있단말인가? 제 일만 일이라고 김선생이 무남독녀 영란이를 시집보내는데도 모르쇠를 놓아서야 될 일인가? 김선생은 제쳐놓고라도 남들이 날 인정머리도 없는 늙은 맹꽁이라 할게다. 리어머니의 머리속에는 김선생과 한이웃에 살던 때의 일들이 환영같이 스쳐 지나갔다. 1968년 여름에 있은 일이다. 토지개혁때부터 촌장,지부서기를 맡아하던 령감이 반란파들의 몽둥이찜질에 어혈이 들어 고생하다가 모자도 벗지 못한채 세상을 떠났을 때 현성중학교에서 사업하다가 니 뭐니 하는 모자를 덮어쓰고 이 마을에 쫓겨왔던 김선생은 자신의 처지가 딱해서 상가집에 오지는 못했지만 장례에 보태쓰라고 남몰래 돈 15원을 보내왔었다. 돈보다도 뜨거운 마음을 받아안고 눈물을 흘리던 그때의 일만은 지금까지도 머리속에 생생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반생동안 교편을 잡고 지나온 김선생은 시골에서의 고된 로동에 무척 지쳤지만 밤이면 예나 다름없이 등불밑에서 수학문제풀이에 골똘했었다. 리어머니는 아는것이 많은 죄로 그렇게 혼이 나고도 그냥 공부에 몰두하는 그가 갸엾기도 하고 어리석기도 했다.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세상사란 그렇게도 변화무상할줄을… 가 꺼꾸러지고 새로운 대학생모집제도가 나오자 김선생은 10년이나 젊어진 사람같이 활기를 띠고 정신이 분발하였다. 워낙 입이 무거워 반가운 사람을 만나도 고작해야 빙긋 웃어보이면 그만이던 그는 마치도 직업적본능이 발작한듯 승학을 지향하는 젊은이들에게 지식의 샘물을 대여주었다. 낮에는 들에 나가 일을 하고도 밤이면 젊은이들을 자기집에 데려가서는 삼태성이 기우는것도 모르고 이악스레 복습지도를 해주었다. 그 덕에 대대손손 농군밖에 없던 리어머니의 가정에도 어엿한 대학생이 나오게 되였다. 리어머니가 너무도 기뻐서 막내아들이 대학교로 가기전날 저녁에 술 두병과 과일 몇근을 사가지고 사례하러 김선생을 찾아갔었다. 김선생은 과일가방을 한사코 받지 않았다. 지식분자정책이 락착되면서 김선생네가 현성으로 돌아갈 때 어머니는 외동아들을 먼먼 타향에 보내는것 같이 서운하여 동구밖까지 바래주면서 시골에 자주자주 놀러 와달라고 당부했었다. 김선생도 빙그레 웃으며 앞으로 집구경도 할겸 놀러 오시라고 했는데 리어머니는 딴 때는 몰라도 영란이 잔치때는 죽잖은 담엔 꼭 가마고 대답했던것이다. 세월은 빠르기도 하여 김선생과 헤여진지도 어언간 3년이 지났건만 리어머니는 김선생댁을 단 한번밖에 들려보지 못했었다. 그는 깊은 자책감에 사로잡혀 다시 상점안으로 들어갔다. 점심때가 다가오니 물건을 사러 온 손님들은 한결 더 많아졌다. 2층까지 겨우 비집고 올라오긴 했어도 매대앞을 철통같이 둘러싼 사람들 틈은 도저히 뚫고들어갈수가 없었다. 발돋움을 하고 목을 빼보았으나 자그마한 그의 키로는 판매원의 얼굴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야속하게 시간은 자꾸만 흘러갔다. 이러다간 잔치구경도 제때에 못할것 같았다. 상점문을 나선 리어머니는 중학교교원사택을 향해 총총걸음을 놓았다. 리어머니가 김선생네 뜨락에 와보니 예상밖으로 잔치날의 흥성이는 기분은 볼수 없었다. 문앞에 자전거 몇대가 서있을뿐 드나드는 손님은 별로 없었다. (오늘은 잔치날이 아닌가베? 시가지 잔치는 그저 이렇나? 손님들은 하마 돌아갔나?) 집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김선생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잖았고 행주치마를 두른 사모님만 김서린 정지에서 젖은 손으로 그를 맞아줄뿐이였다. 방안으로 들어가니 시골손님들이 한방 둘러앉아서 방금 점심상을 받는것이였다. 색술잔을 들던 영실이 할머니가 리어머니를 끌어당겨 곁에 앉히였다. 손님들은 이야기도 하고 웃기도 하다가는 서로서로 권해가며 술을 마셨다.그러나 리어머니는 난생처음으로 온지라 바늘방석에 앉은것 같았다. 방문옆에 놓인 탁상우에는 손님들이 가져온 례물이 여간 많잖았다. 어떤 물건은 상점에서 보지도 못했던것이였다. (하기사 30년동안 글을 배워준분이니 은혜진 제자가 어이 한둘이겠나?>> 리어머니는 례물더미에 눈을 팔며 저가락을 쥔채 멍하니 앉아있었다. 탁상우에는 꽃주전자와 목긴 술잔을 올려놓은 차관, 고압가마며 비닐박막자루안에 넣은 옷들이 키돋움하고있는가 하면 한쪽에는 입쌀을 담은 큼직한 자루도 몇개나 서있었다. 속구구를 해보니 어느게나 20원어치는 잘될것 같았다. (그런데 저건 왜 남 눈에 띄이는데 놓았능고?) 자기도 버젓한 물건을 들고왔더면 그런 생각이 없으련만 남들이 다 보는데서 맨손으로 들어와 앉고보니 참말 얼굴을 들수 없었다. 정말 알고도 모를 일이였다. 시골사람들은 손님이 가져오는 부조는 사양하는척하다가는 슬쩍 농안에 넣어두고 남몰래 아무아무게한테 무엇을 받았다고 부조기에 적어놓는다. 그리고 다음번 그집 잔치에는 받았던 부조가치에 해당한 선물을 사가기도 하고 돈이 마를때는 남한테 받았던 부조물에서 마땅한것을 골라가기도 한다. 시골에서 8~9년 지낸 사람이니 그만한 처사는 할줄 알터인데 오늘 와보니 정말 코막고 답답할 일이였다. (저건 남한테 자랑하자는겐가? 하기사 부조를 많이 받았다는건 이전에 남한테 그만한 부조를 했다는것이기도 하고 또 그만한 지위나 인덕이 있다는것이기도 하겠지만… .) 그것도 그뿐만이 아니였다. 누가 언제 적어놓았는지 가져온 례물에는 보낸 사람의 이름까지 쓴 종이조박이 끼여있지 않는가? 아무리 신식잔치를 한다기로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나싶었다. 이거야말로 선물을 가져온 사람들끼리 서로 누가 더 많이 가져왔나 비기며 시샘하게 하고 빈손으로 온 사람의 낯에단 화로불을 들씌우는게 아니고 뭔가? 그러고보니 이전에 태산같이 우러르던 김선생에 대한 믿음에 저도 몰래 금이 가는것이였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속은 정말 측량할수가 없었다. 금전에 흑사심이란 말이  있더니 도회지로 돌아가 겨우 3년에 그 직심이던 사람도 다 변했구나! 리어머니는 남몰래 쯧쯧 혀를 찼다. 누군가 밥술을 들면서 옆에 앉은 늙은이에게 부조더미를 가리키며 무어라고 소곤거린다.  리어머니는 그들이 자기를 두고 말하는가싶어 귀를 강구었다. 떠들썩하는 말소리, 웃음소리,수저가락 오가는 소리에 뒤의 말은 똑똑히 들을수 없었지만 분명히 부조를 두고 하는 말이여서 그는 정수리를 얻어맞은것 같이 머리가 띵하였다. 탁상우에 놓여있는 선물더니는 자꾸 그의 눈길을 끌었고 남들도 저 늙은이는 도대체 뭘 들고왔나 하고 의혹의 눈초리를 던지는것만 같아 평소에 보기 드믄 풋남새, 고기반찬도 입안에서 뱅글뱅글 돌며 목안으로 좀체 넘어가지 않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큰 모멸감을 느꼈다. (그까짓거 가져왔다구들 우줄렁거리지 말아. 나도 가져온 돈 다 내놓으면 그뿐이다.) 슬그머니 속다짐을 하고나니 마음은 다소 안정디는것 같았다. 글나 허전한 기분은 머리속을 맴돌이치며 좀체로 떠나지 않앗다. 벽시계가 땡 하고 한점을 쳤다. 돌아보니 오후 한시였다. 두시차를 타고 집에 가지 않겠느냐고 영실이 할머니한테 물었더니 그는 좀 더 앉아있다가 근방에 사는 딸네 집으로 가겠다고 하였다. 리어머니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밖에 나온 리어머니는 돈을 싼 종이봉지를 따라나온 사모님의 앞에 내밀었다. 사모님은 불에 덴 사람같이 흠칫 놀라며 손을 뒤로 가져갔다. 리어머니는 사모님의 눈치를 살피며 돈봉지를 그의 손에 억지로 쥐여주려 하였다. 그러나 사모님은 생글생글 웃기만 할 뿐 받을념을 하지 않았다. (남이 가온 부조는  한상 받아놓고 내한테는 우짤락고 이러능교?) 괘씸한 생각이 밸을 꼬자 그는 그만 리지를 잃고 버럭 성을 내고말았다. 가져온 돈이 적어보여 그러는지, 아무래도 받을걸 가지고 거듭거듭 사양하는 꼴이 아니꼬왔던것이다. 말해놓고보니 후회도 좀 되였으나 이미 쏟아놓은 물이라 어쩌는수가 없없다. 돈봉지를 한손에 쥐고 홍시가 된 사모님이 만류했으나 그는 집안일이 바쁘다며 그의 손을 뿌리치고 부랴부랴 나오고말았다. 가로수우에 앉은 참새 한마리가 짹짹 울더니 포르르 날아갔다. 참새는  마치도 눈녹은 길우에서 타박타박 걸어가는 그를 조롱하는듯했다. 자다가 생긴 병 같던 부조근심을 털어버리고나니 마음은 한결 후련했으나 워낙 용을 썼던탓인지 두 다리는 나른했다. 아들한테 보내려고 빌려온 돈을 대접도 받지 못한 잔치에 빛없이 밀어넣고 돌아온 리어머니는 며칠동안 기분없는 나날을 보내였다. 그러던 어느날, 리어머니는 뜻밖에 편지 한통과 20원짜리 돈표를 받았다. 며느리에게 물어보니 김선생이 부친게라고 하였다. 내라는 돈보다 받는 돈이 반가와야 하련만 시어머니도 며느리도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것만 같았다. 세상에 받은 부조를 되돌리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나이 7순이 돼가도록 보도듣도 못한 일이였다. 도대체 우리한테 무슨 유감이 있어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짚히는데란 없었다. 무형의 모욕이 온몸을 칭칭 감았다. (진작 이럴줄 알았더면 가지도 않았을걸.) 불안에 싸여 봉투를 떼고보니 편지속에는 팥알같은 글자가 빼곡이 들어차있었다.       어머니::   그간 안녕하십니까? 추운 겨울에 어머님께서 우리 집 잔치에 찾아와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모처럼 어려운 걸음을 하신 어머님을 괴롭혀서 미안합니다. 공일날이라 집에서 손님접대를 하려던것이 그만 한 학생이 앓는바람에 병원에 갔다오고보니 어머님도 못뵈였습니다… 어머님께서는 아마 오늘 제가 받았던 부조돈을 되돌린다고 무척 노여워하시겠지요? 기실 우리는 이번에 잔치는 벌리지 않고 간단히 례만 갖추어 넘기려 했습니다. 그래서 외지에는 누구한테도 결혼날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공연히 잔치기별을 해가지고 마을어른들께 의외의 걱정, 경제부담을 더해주기 싫어서였습니다.  이번에 저는 부조감이나 부조돈을 들고야 잔치집에 간다는 옛습관에 얽매여 돈이 없이는 맘에 있는곳에도 못가는 사람들의 딱한 사정도 보아왔고 잔치에 부조를 많이 하고 적게 하는것으로 인격을 저울질하는 나쁜 기풍도 보아왔습니다. 그래서 우리집에서는 외동딸을 시집보내지만 잔치는 벌리지 않기로 했습니다. 돈이 없거나 돈쓰기가 아까와 그런건 절대 아닙니다. 저는 이 기회에 잔치를 크게 벌리기 경쟁을 하는 이들에게 도전을 걸려 했습니다. 때문에 그 누구의 부조도 받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일로 하여 적잖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을것을 생각하고있습니다. 그러나 손끔만큼도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조만간에 모두들 저의 심정을 헤아려줄것입니다…. 받은 부조물에는 가져온 분들의 이름을 적어서 문옆에 놔뒀다가 손님들이 돌아갈 때 돌려줬습니다. 그 당시 미처 돌리지 못한것은 우편으로 부쳤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편지를 읽어내려가던 며느리도, 그곁에서 귀를 강구고 듣던 시어머니도 목구멍에서 뜨거운것이 울컥 솟아오르는것을 느꼈다..                                1981.12 초고                                 1982.5 수개 (새마을 1982.3기)  
8    후회 댓글:  조회:1347  추천:0  2013-12-29
[미니소설]        후    회                      철령    박병대     아침해가 동산마루에 서너발 올라 찬란한 빛을 뿜는다. 아침산보를 마친 순보령감이 무거운 다리를 끌고 아파트에 돌아와 대문을 여는데 1층창문에서 녀인의 째지는 목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아부지, 너무해요.이제 또 맘대로 일을 쳤다간 나도 가만 있지 않을거예요."   "장병에 효자가 없다지만 아비가 병석에  누운지 이제 몇달이 되였다고 자랑에 쉬쓸던 딸년이 지 아비한테 마구 을 쏴대나 후--" 순보령감은 남의 일 같지 않아 길게 한숨을 내쉬며 2층에 들어가 텔레비죤을 켰다. 그런데 아래층 녀인의 앙살이 고막을 마구 짓뭉개 드라마의 내용이 도무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윽고 " 탕탕탕"하고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누가 무슨 급한 일이 있어 문을 부셔지게 두드린담?" 순보령감은 짜증이 났으나 마지못해  일어나 출입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아래층 허풍령감의 딸 미분이가 설익은 오얏상을 해가지고 서있었다.   "아니, 자네가 오늘 어인 일로 우리집엘 왔나?"   "이거 돌려주려구요."  40대의 녀인은 손에 든 휴대폰을 불쑥 내밀었다.   "그건 내가 자네 부친 쓰라고 준긴데..."   "아니, 필요없어요. 우리집에도 있어요. 아저씨, 이제부턴 남의 집일에 헛신경 끄라구요." 녀인은 비양쪼로 얼음장같은 말 한마디 내뱉고 홱 돌아서더니 비맞은 중이 념불하듯 무어라고 비양거리며 층층대를 씽씽 내려갔다.   순보령감은 가는귀가 먹어 미분이가 뭐라 하는지 똑똑히 듣지는 못했지만 자기를 욕한다고 짐작했다.   "뭐, 나더러 남의 집일에 헛신경 끄라고? 그래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머리에 쇠똥도 안벗은 계집애가 훈계하는거지?" 순보령감은 생각하면 할수록 밸이 꼬여 허연 수염이 부르르 떨렸다.   기실 순보령감과 허풍령감사이에 깊은 교분은 없었다. 제작년에 미분이가 자식 공부시킨다며 학교 근처에 있는 이 아파트 1층을 임대했는데.몇해전에 상처한 허풍령감은 아들이 출국하자 딸한테 의탁하러 왔었다. 무르익은 대추같은 얼굴에 땅딸보인 그는 븥임성이 좋고 사람을 잘 웃겨 순보령감은 그와 종종 만나 한담을 하며 고독을 풀었다.   그런데 한치앞도 내다볼수 없는것이 풍운변화라더니 그리도 건장해보이던 허풍령감은 작년 가을 친구댁에 갔다가 중풍에 걸려 침대신세를 지고있었다. 순보령감은 병석에서 지옥살이하는 친구가 얼마나 고적할가 안타까워서 종종 아래층에 내려가 문병하고 환자의 말동무로 되여주었다.   며칠전 순보령감이 허풍령감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따르릉, 따르릉" 하고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가 왔네, 에익, 요너무 다리가 쬐끔만 말 들어도 일나겠는데...김형이 대신 받아보소. ...."   "그래도 되겠능교?" 남의 전화를 대신 받기가 무엇해서 잠시 머뭇거리던 순보령감은 허풍령감이 어서 받으라고 손짓하자 객실에 놓인 수화기를 들고 물었다   "여보세요?"   대방은 낯선 목소리를 듣자 전화가 잘못 걸린줄 알았던지 송화기를 덜컥 놓는것이였다   "소우지(手机)가 있으문 이런 낭패가 없을긴데  "   "허형이 전에 씨던 소우지는 우쨌능교?"   "글쎄..." 허풍령감은 반쪽이 된 얼굴에 어설픈 웃음을 바르며 대답을 피했다.   "울집에 노는 소우지 하나 있는데 허형이 두고 쓰이소."   "아니, 그래도 되겠능겨?"   허풍령감이 사양하는 말을 하나 무척 반기는 기색이 력력했다.   다음날 순보령감은 아들이 출국할 때 두고간 휴대폰을 찾아 충전하고 료금카드까지 하나 사넣어 허풍령감한테 가져갔다.   "이거 참, 내가 김형 신세를 너무 집니다요. 요긴할 때 잘쓰겠니더." 허풍령감은 휴대폰을 이불밑에 슬쩍 밀어넣었다. 누가 볼가봐 감추는것 같았다...   "오늘 허풍령감이 딸 몰래 전활 걸다가 들통난게로구나 고까짓 손톱만한 일각꼬 삼이웃 시끄럽게 난동을 피워? 에익, 몰상식한 계집같으니라구."   좋은 일하고 인사받기는 커녕 무안만 당한 순보령감은 허풍령감이 가련하기 그지없었으나 미분이의 올빼미상을 볼 생각을 하면 몸에 소름이 끼쳐 병문안을 자제하였다.   초여름이 찾아오자 순보령감 내외는 새집구경도 하고 관광도 할 겸 꼭 놀러오라는 작은 아들네의 청에 못이겨 남방에 가서 태산 황산이며 항주, 소주, 계림산수 등 좋다는 명승지를 두루 구경하고 초가을에 집에 돌아왔다. 그날 저녁 김로인은 허풍령감이 심한 치매에 걸려 제 딸도 못알아보고 자꾸 헛소리만 친다는 말을 들었다.   "참 불쌍한 늙은이로구나. 허풍령감이 그 꼴이 된건 자식농사 잘못한 탓이지. 하기사 친구를 못돌본 나도 과실도 적잖구나!" 그는 미분이의 꼴이 보기 싫어 친구의 병문안을 안한 자신의 옹졸한 처사를 후회하였다.그는 미분이가 귀를 틀어막고 행악을 부리든 말든 그녀앞에서   "자네는 병석에 누운 아비한테 약만 사주면 자식도릴 다 한줄 아나? 너의 아비한테 고독이 얼매나 무서운 병인지 글캐 모르나? 아들놈 용돈 조금 덜주고 가슴이 타 재가 쌓인 자네 아비가 친구들하고 통화하게 하면 죄가 되나? 자네가 고런 고약한 심보 쓰다 아비가 더 큰 병이 걸리면 워짤락고 그러나?" 하고 대성질호하며 정신이 부쩍들게 일깨워주지 못한것이 몹시 한스러웠다.                        2011.5                               {기원컵 응모작}
7    공할머니의 소망 댓글:  조회:2287  추천:1  2013-12-29
편소설             공할머니의 소망 박병대      이른 아침, 날이 채 밝기도전에 꿈나라에서 헤여난 공씨댁할머니는 침대우에 누워서 눈을 지그시 감고있었으나 잠은 천리밖으로 달아나서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4시를 알리는 괘종소리가 땡땡 울리자 침대에서 부시시 일어났다. 화장실에 들어간 그녀는 수도꼭지를 틀어놓고 찬물에 세수를 대충 했다. 거울에서 구겨진 종이같이 쪼글쪼글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할머니는 빠진 앞이사이로 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였다. 공할머니는 이 3년동안에 머리칼이 새하얗게 세여 일흔세살치고는 자신이 너무 늙어보인다는것을 생각하니 서글프기 그지없었다. 이제 며칠만  견뎌내면 할미로서 자신이 해야할 의무를 마치게 된다고 생각하니 속이 후련하기도 하고 허전하기도 했다. 세상에 둘도없이 소중한 손자애의 전도가 이 사흘에 달렸으니 오늘부터는 좀 더 정성껏 기도를 올려야겠다고 생각한 그녀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할머니는 주방의 서쪽벽에 놓인 벽장문을 열었다. 벽장선반의 맨 웃층에는 쌀과 물을 담아놓은 공기 둘과 향 한봉지가 놓여있었다. 할머니는 물공기를 가져다 수도물에 깨끗이 씻은 뒤 찬물을  떠다가 원래자리에 조심스레 올려놓고나서 향가치 3대를 봉지에서 뽑아 가쯘히 한 뒤 가스판곁 창문턱우에 있는 성냥갑에서 성냥 한가치를 꺼내 향에 불을 붙여가지고 쌀이 담겨있는 공기에 꽂았다. 그녀는 경건한 마음으로 신당앞에 다가서서 두손을 모아 신령님께 절을 올리고나서 들릴가말가한 낮은 소리로 소원을 말했다. 말을 마친 할머니는 신당앞에 고개를 숙이고 한참동안 묵묵히 서있다가 다시 두손을 모아 공손히 절을 올리고나서 향불을 끄고 몸을 돌렸다. 랭장고에서 살얼음이 약간 낀 소고기덩이를 꺼내 도마우에 놓고 잘게 썰고난 그녀는 미나리며 햇배추와 상추잎이며 표고버섯등을 가져다 수도물에 깨끗히 씻었다. 손자애가 평소에 즐겨 먹는  감자볶음도 해야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광주리안에 들어있는 감자 두알을 꺼내서 껍질을 깎은 뒤 채칼질을 하였다. 쌀을 한공기 퍼다가 물에 세번 씻고나서 전기밥솥에 안치고 그 웃층에는 엊저녁에 불궈놓은 찹쌀을 시루에 안쳤다. .     아침준비를 마치고 벽시계를 보니 이제 겨우 다섯시밖에 되지 않았다. 반찬을 너무 일찍 장만했다가 식어버리면 어쩌누 하고 생각한 그녀는 침실로 돌아와서 침대머리에 놓여있는 책을 펼치였다. 3년동안 할머니는 그 책을 얼마나 번져보았는지 책가위에는 보풀이 일었다. 해마다 설에는 물론이고 평소에도 밤에 잠이 오지 않을 때 할머니는 아들이며 딸, 손자,  외손들의 생년월일을 가지고  계산하여 에서 알맞는 페지를 찾아보고나서 어느 때는 무슨  일에 조심하고 어느 달에는 외출을 금하라느니 아무 성을 가진 사람을 조심하라느니 하는 내용을 자손들에게 알려주군 하였었다. 을 보니 올해 손자 명석이는 대운이 터서 륙칠월에 경사를 맞는다는것이였다. 사회인도 아닌 학생 그것도 고중3학년학생에게 경사란 대학록취를 내놓고 무엇이 있겠는가? 할머니는 누가 책의 그 페지를 찢어가기라도할가봐 가위를 덮은 뒤 베개밑에 밀어넣고는 저도몰래 씽긋 웃었다. 하루도 아니고 꼬박 3년동안 매달 초하루날과 보름날아침에 신령님께 한번도 거르지 않고 꼭꼭 정성을 드렸는데  정성이 지극하면 돌에도 꽃이 핀다지 않았던가? 공할머니는 원래 이 도시에서 90여리 떨어진 조선족마을에 살았었다. 3년전에 명석이가 시에 있는 고중에 입학하자 손자놈의 밥을 해주려고 시내에 와서 52평방짜리 세집을 잡았다. 10년전에 명석이가 소학교3학년에 올라갈 무렵 위장결혼을 하고 한국남자를 따라 출국한 며느리는 첫두해는 가끔 전화도 쳐오고 돈도 좀 부쳐오더니 그 뒤로는 살았는지 죽었는지 줄곳 소식이 없었다. 3년이 지나자 아들녀석도 농사짓기가 지겹었는지 외로움에 지쳤는지 로무를 신청하여 출국하였고 손녀가 심양에 있는 사범학교에 입학하여 집에는 늙은 량주와 손자애만 남아있었다. 두 늙은이는 명석이를 쥐면 깨여질가 불면 날아갈가 금지옥엽같이 애지중지하면서 아비어미없이 자라는 손자애가 혹시 애들한테 업신당하지나 않을가 무척 신경을 썼다. 명석이가 5학년에 올라갈 때 마을의 학생수가 너무 적다는 리유로 농촌소학교를 현성에 있는 중심소학교와 합병해버리자 이 동네 애들은 마을뻐스를 타고 현성에 있는 학교에 다니게 되였다. 공할머니 량주는 날마다 손자애에게 점심밥을 싸주고 용돈도 넉넉히 쥐여주며 아침에 애를 뻐스에 태워주고  저녁이면 뻐스역에 나가서 손주애를 맞이하군하였다. 5년이 지나자 키가 한메터칠십이 넘게 자란 명석이는 초중을 졸업하고 시에 있는 고중에 입학하였는데 입시성적이 기준선에 조금 못미쳐서 자비생이라는 이름을 달고 남들보다 9천원이란 학비를 더 냈었다. (내가 하루세끼 정성들여 해준 밥도 맛이 없다고 고양이 밥먹듯하는 우리 명석이가 식당밥을 먹어낼가? 학교식당의 음식은 맛이 없다면서 밖에 나가 사먹는 애들이 어디 한둘인가? 우리 석이는 이 할미가 없이는 안되지, 안되구말구.) 명석이가 입학통지서를 가져오자 공할머니는 새로운 근심이 태산같았다. 공할머니는 울며 겨자먹기로 일년에 5천 4백원씩 내고 학교근처에 있는 아파트를 세내였었다. 할머니는 봄에 령감을 저세상으로 보냈으니 어디에 가 있어도 외롭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손자곁에 있으면서 끼니를 해주고 애를 돌보면 늘그막의 외로움도 덜고  사는 보람도 있을것 같아서 시내로 왔었다. 할머니가 탁상시계를 보니 여섯시가 되였다. 옆방의 미닫이문을 살짝 열고 침대우를 보니 명석이는 아직도 꿈나라속을 헤매고있었다.
6    경칠령감의 문화유산 댓글:  조회:1518  추천:1  2013-12-29
소설, 경칠령감의 문화유산  Author:관리자 Date:7/16/2013     (철령)  박병대     청명이 지났건만 꽃샘추위는 옷틈새를 파고든다. 경칠령감은 습관대로 대문밖을 나와 마을을 한바퀴 돌아보았다. 집집의 담벽에는 회가루로 쓴 아라비아수자가 눈을 부릅뜨고 주민들의 철거동정을 살피고있었다.     “이젠 며칠 안남았는데 우짜노? 후유€뿠?집에 돌아와 정원에서 동향으로 놓인 창고를 멍하니 바라보던 경칠령감의 입에서 애꿎은 한숨이 터져나왔다.   “아저씨 안녕하십니까?”     인기척에 흠칫 놀라 철창문밖을 내다보던 경칠령감의 흐릿한 눈에 뜻밖의 반가운 얼굴이 비끼였다.   “정식이, 자넨 오늘 무신 바람이 불어 여길 왔노?”     “아저씨를 만나뵈려고요.”     “치운데 얼른 집안에 들어가자. 그새 집은 다 편안하재?”      경칠령감은 이웃에 살던 친구의 아들이자 30년전에 마을의 첫 대학생이 되여 지금 도회지에서 사업하는 정식이와 인사말을 나누다가 궁금증이 동해 말머리를 돌렸다.      “공직에 매인 자네가 이 먼데를 일부러 올리는 만무허구.”     “기실 저는 아저씨댁 대물림보밸 보러 왔습니다.”     “대물림보배라? 옛 연장말이재? 젊은이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그걸 볼라고 일부러 왔다? 참 기특하군그려. 말이 난김에 먼저 광을 돌아보고올가?”   경칠령감을 따라 창고안에 들어간 정식이는 두눈이 휘둥그래졌다. 두간짜리 넓고 정결한 벽돌창고안은 마치도 작은 박물관을 련상할만큼 벼라별 옛날 공구가 질서정연하게 배렬되여있지 않은가?     “아저씨, 저기 저건 뭔가요?”     호기심어린 정식이의 손길을 따라 눈길을 옮기던 경칠령감이 대답했다.          “그건 내 할머니께서 실 타는데 쓰시던 물레라는 연장일세.”   “아저씨의 할머니라? 그럼 백년도 넘은 고물이네요?”     “아마 그럴게지. 할머니께서 쓰시던 저 베틀도 그렇구.” 눈이 동그래진 정식이의 물음에 경칠령감은 심드렁한 대답이다.     “아저씨, 이 많은 고물을 수십년간 건사하시느라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셨지요?”     “그게사 조상께 효도하는 맘으로 내 좋아서 한건데 고생이랄게야 있나? 하루 한번씩 들여다보면 세월을 거슬러올라 조상을 뵈는것 같아 가슴이 후련커든. 시장켔는데 이젠 방에 들어가세.”    옛날 손망이며 절구, 다듬이돌, 디딜방아, 떡판, 지게, 멍석, 콩기름등잔, 인두 등 벼라별 고물에 정신을 팔던 정식이는 주인이 두어번 재촉해서야 아쉬운듯 밖을 나왔다.     이윽고 정결히 차린 밥상이 올라왔다.     “미리 기별이나 할거지. 돌연습격하문 우짜락꼬? 채마밭도 못심어 달랑 김치에 두부뿐이랑께. 그 소주는 두고 막걸릴 들게. 집에서 담근건데 도시에선 아마 별밀걸세.”     경칠령감은 정식이가 내놓은 술병을 밀어버리고 컵에 막걸리를 부으면서 물었다.   “춘부장은 무탈하고 잘 기시제?”   “병은 없으신데 종일 ‘옥살이’에 몸살나겠다며 자주 짜증내시네요.”     “와 앙그렇겠노? 후유€?지지고 볶고해도 다 함께 모여 살 때가 질 좋았지.”   “이젠 아저씨도 할수 없이 떠나야겠네요?”     “글쎄, 우리 손으로 세운 동네니께 정이 깊어 남들 다 떠나도 끝까지 버티다가 여게 뼈를 묻을라캤는데 맘대로 대야 말이재? 고속철이 토지 절반 훌떡 삼키고 마을뒤에 역전까지 생겨 시가지로 된닥카잖나? 농사도 못짓는 여기서 무신 재미로 살겠노?”     “이사자리는 봐뒀습니까?”   “그럼, 불도젤로 밀 때 쫓겨갈수야 없잖나? 먼 시교에 아빠트를 사놨다만…”   “매도 먼저 맞는게 낫다고 훌쩍 떠나시지요.”     “이부자리에 그릇뿐이문  당장이라도 뜨겠네만 저것땜에 안죽(아직) 이라고 있잖나? 후€뿠?경칠령감은 벽돌창고를 가리키며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였다.     “아저씨, 마침 잘 됐네요. 성에서 조선족민속관을 꾸렸습니다. 우리 민족의 력사며 전통문화예술 그리고 풍속사진이며 해설자료까지 구전한데 전시관에 실물이 턱없이 모자라서 아직 개관을 못하고 아저씨의 도움을 빌러왔습니다. 아저씨, 이젠 건사하기도 어려울텐데 고물을 우리 민속관에 파세요. 값은 후히 드릴테니깐요.”     “머여? 자네가 날 조상 욕뵈는 불효자로 만들락카나?”   불에 덴듯 흠칫 놀라는 경칠령감의 밭고랑같은 주름살을 보며 자신의 실언을 깨달은 정식이가 급히 변명했다.     “아저씨, 제 말은 그뜻이 아닙니다. 기실 아저씨댁 고물이 바로 우리 민족의 보귀한 유산이 아닙니까? 우리는 조상들이 겪어온 눈물겨운 력사와 민족의 미풍량속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백의민족의 얼을 자손만대 길이 전하려고 민속관을 꾸렸습니다. 아저씨, 보귀한 문화유산을 혼자만 보시지 말고 민족의 문화사업에 빛을 내게 하십시오.”     “나더러 손을 빌리자면 손을 내고 돈이 수요되면 기꺼이 허리춤을 풀겠네만 연장만은 못내놓는당께… 큰돈을 들여 고물을 수집하면 팔려는 사람이 더러 나올게니 그리 알고 돌아가게.”      다 잡은 토끼를 놓칠순 없다고 생각하고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구르던 정식이가 애원하듯 졸랐다.     “저는 옛날 물건을 오늘까지 지켜오신 어른이 아저씨뿐이란 말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아저씨 도움없이 우리 민속관은 영영 개관도 못할 처지예요. 팔지 않으시려면 임대라도 해주세요.”     “자네는 내가 돈에 눈이 먼줄 아나? 연장이란 내돌리면 마사지기 마련이니 어쩔수 없네.”     “아저씨, 그런 걱정은 붙들어매십시오. 보물을 저희들께 맡기면 신주같이 고이 모시겠습니다. 이걸 보세요.”     정식이가 새로 선 민속관의 외경이며 내부시설을 찍은 선전용사진을 보여주면서 어려움을 호소하자 경칠령감은 마음이 다소 동했는지 강경한 말투가 얼마간 누그러들었다.   “내가 자네 빈말을 어떻게 믿겠나? 보증서라도 쓸텐가?”   “예, 쓰고말구요. 하나가 못쓰게 되면 열개 값을 물겠습니다.”   “그게 참말인가? 참… 자네 성화에 내 두손 들었네. 값은 고하간에 팔고나면 남의것이라 발언권도 없을게니 자네 안면을 봐서 임대해줄수밖에 없구나.”   “아저씨, 정말 고맙습니다. 임대료는 얼마로 정하겠습니까?”     “기왕 내놓는바엔 임대료는 무신 임대료야? 무상임대하겠네. 내 한 3년 자네들 거동을 단단히 지켜보고 믿음이 가면 아예 속시원히 증정하겠네. 자네 내 뜻을 알만한가?”   “아저씨, 그게 정말입니까? 아저씨의 참뜻을 이제야 알듯합니다. 우리 민족의 애환이 슴배인 보귀한 문화유산은 어느 개인의 힘으론 지켜내지 못합니다. 우리들은 이 보귀한 문화유산을 조상같이 모시고 친자식같이 사랑하겠습니다.”     “나도 내만 죽고나면 고물을 지켜내지 못할걸 알고 몇날며칠 속을 썪였네. 나는 자네가 찾아올줄 알고 기다리면서 자네 성심을 알고팠네. 하하하…”     이튿날 창고안을 가득 채웠던 유산은 큰 트럭에 실려 영원한 빛을 뿜을 보금자리로 찾아갔고 경칠령감네도 홀가분한 마음으로 성소재지 근방에 새로 건설하는 조선족집단촌으로 이사하였다.  
5    그늘속의 납함 댓글:  조회:1828  추천:1  2013-12-29
.소설. 그늘속의 납함  Author:관리자 Date:1/31/2012  (철령) 박병대     이변이 일어났다. 대학입시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운동장의 돌멩이마냥, 길가의 풀마냥 어느 누구의 눈길도 끌지 못하던 영철이가 이번 입시에서 693점이라는 높은 성적을 따냈다는것이다. 월고때 한번도 5등안에 못들던 영철이가 전교 으뜸은 물론이고 시의 장원까지 바라볼수 있게 되였으니 참으로 기적이 아닐수 없다. 학생들과 교원들은 처음 자기의 귀를 의심하였다. 하지만 입시참고답안과 채점기준에 따라 꼼꼼히 자기의 점수를 추측했으니 십여일후에 인터넷에 발표될 실제 성적과 오차가 생긴들 극상해야 2~3점일것이고 또 평소에 허풍이란 꼬물만큼도 없고 온종일 입에 자물쇠를 채우고있는 영철이니 수분이 있을리 만무하였다.  “눈먼 고양이가 쥐 잡은 셈이구나.”  “거참, 벙어리같던 영철이가 뗑을 잡았으니 대입고시란 정말 복불복인거야.”  온 학급이 단솥의 물마냥 펄펄 끓고 교정이 수림처럼 술렁거렸다. 소문을 듣고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담임 선옥선생이였다. 자기가 맡은 학급에서 봉황이 나왔으니 경사치고 이보다 더한 경사가 어디 있을가만은 품밖에 버려진 알에서 나왔으니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대학지망원서를 쓰는 날 선옥선생은 영철이를 사무실에 불러들이고 만면에 환한 해빛을 띄우면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영철이, 축하한다. 나는 언녕 네가 기적을 일으킬줄 알았다… 이젠 지망원서를 쓸 일만 남았는데 맘속에 어떤 대학을 점찍어놨나?” “아직은 뭐…”  영철이가 어줍은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이자 선옥선생이 말했다. “그만한 성적이면 북대나 청화도 문제없구나. 도전해보지 않겠니? 밑져야 본전인데.” 글쎄요.”  “하늘이 꺼질가 겁내면 아무일도 못하는거야. 절호의 기회이니 결단을 내리라구… 어때? 신심 있지?”   “……”   꿀먹은 벙어리마냥 가타부타 말이 없던 영철이가 사무실을 나갈 때 선옥선생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여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행동이 무척 비굴하고 어색하다고 느껴졌다. 영철이가 자기의 속내를 빤히 꿰뚫어보는것 같아서였다. “선옥선생, 성공을 축하하오.” 학년조장인 김선생의 말에 장난기 많은 력사선생이 한술 더 떠 부채질을 하였다. “선생님, 오늘 시원히 한턱 내세요. 목구멍이 근질근질하네요.” 선옥선생은 동료들이 자기를 비꼬는것만 같아 얼굴에 모닥불을 뒤집어쓴듯 했다. 못먹을 음식을 먹은것처럼 속이 쓰려 견딜수 없는 그녀는 바람을 쏘이러 교정으로 나왔다. 파아란 하늘에서 유유히 헤염치는 흰구름은 그렇게도 자유롭건만 그녀는 영철이와 동사자한테 버림받은 느낌이였다. 내가 영철이한테 부은 심혈이 도대체 몇방울이나 되였던가? 걔가 이제 북경대나 청화대에 진학한다면 학교에선 물론이고 신문사며 TV 기자까지 몰려와서 비결을 내놓으라 성화댈텐데 어쩐단 말인가? 엉뚱한곳에서 떨어진 복아닌 “복”이 그녀를 자꾸만 괴롭혔다.  20여년을 드팀없이 신성한 교단을 지키며 어느 학생한테도 그늘 한점 생길가 가슴 조이며 하루도 발편잠 한번 못자본 그녀는 내가 언제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나 반성도 해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것이 본인만의 불찰이라고 인정하긴 싫었다. 소질교육이 입치례로 변해버린지 얼마인가? 지금 사회에선 명문대의 진학률로 학교의 순위를 따지고 해당교원의 실적을 평하지 않는가? 진학풍수를 꿈꾸며 학교간에 벌이는 우수생쟁탈전은 또 얼마나 치렬한가? 성인도 시속을 따른다는데 명예와 실리를 추구하는 대환경에 맞서 싸운들 독불장군이 아니겠는가? 승벽심이 강한 선옥선생은 남의 “경험”을 본따 중점생을 정하고 교수의 심도와 난도를 거기에 초점 맞추고 시시각각 “작은 가마밥”까지 먹이고 대다수 학생들은 건성으로 대했었다. 그러니 권력자나 부자집 귀공자가 아니고 고시성적이 다섯손가락안에 못드는 영철이는 자연스레 괄호밖 신세로 되였었다. 수업시간에 그녀의 밝은 웃음과 눈동자는 단 일초도 영철이와 그 부류 학생들의 얼굴에 머문적이 없었다… 지망원서를 쓸 때 선옥선생은 영철이한테 진 “빚”을 약간이라도 갚고싶었지만 안해본 “굿”을 하자니 낯이 간지러웠다. 지망원서를 마감하는 날까지 영철이는 한번도 사무실에 낯을 내밀지 않았다. 마지막 10명이 낸 지망원서를 학급장이 거둬오자 그녀는 영철이의 지망원서부터 찾았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그가 쓴 지망란에 있어야 할 청화대나 북경대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웬 뚱단지같은 무명대학들만 그녀를 놀리는듯 줄서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였다. 그녀를 더욱 놀래운것은 지망원서안에 끼인 자그마한 쪽지였다. 그녀는 콩닥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쪽지를 펼쳐보았다. “선생님, 본의 아닌 장난을 쳐 죄송합니다. 시험점수를 추산할 때 너무 우쭐대는 한 ‘중점생’의 코대를 꺾어놓으려고 한 거짓말이 일파만파 번질줄 몰랐습니다. 전날 저는 사무실에서 실상을 고할가 생각했지만 선생님의 지나친 관심에 그만 용기를 잃었습니다. 그늘에 시들며 순간만이라도 볕을 받고싶던 간절한 마음이 저지른 불찰을 용서해주세요. 그리고 이것이 저만의 소망이 아님을 알아주세요. 우리도 부모님께는 천금보다 귀한 자식이니깐요. 선생님의 옛모습이 그립습니다. 부디 부디.” “뭐, 거짓성적이였다고? 볕을 받고싶어 그랬다고?”  덴겁한 선옥선생의 손은 중풍환자같이 파르르 떨리였다. 쪽지안의 글자 한자한자가 그늘속 제자들의 납함이 되여 고막을 때렸다… 일장 악몽에서 깨여난 그녀는 명리의 포로가 되여 몇그루의 묘목만 보고 숲을 잊은 자신이 한없이 가증하고 참괴하였다. 죄악의 그늘은 만들수 없다. 빛을 모두에게 안겨주던 지난날로 돌아가자. 그녀는 이를 악물고 주먹을 불끈 쥐였다. 창문으로 들어온 시원한 바람이 노을 어린 그녀의 볼을 천천히 식혀주었다.  
4    얄미운 상사 댓글:  조회:1443  추천:0  2013-12-29
단편소설 얄미운 상사 박 병 대 명문대의 석사과정까지 마친 영실이가 남방에 와서 직업을 찾는길이 이렇게 험난할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었다. 수십개의 회사에 이력서를 보냈지만 면접을 하겠다는 회사는 불과 여남곳뿐이였는데 면접관을 넘긴다는것 또한 산너머 산이였다. 여기저기서 금세 날아와 손에 쥐일것만 같았던 채용통지는 숨박꼭질하듯 사람을 놀려 밥맛이 없고 입술이 까칠해졌다. 애간장을 태우던 어느날 마침 일본의 모 전자회사에서 채용통지가 왔다. 영실이는 금세 날것만 같이 기뻤다.공든 탑이 무너지랴, 정성이면 돌에도 꽃이 핀다더니 이건 나를 두고 한 말이구나. 어렵게 찾은 회사이니 오색찬란한 빛을 뿜어봐야지. 희망에 부푼 영실이가 가벼운 걸음으로 회사에 찾아오니 마침 그녀를 맞아준 사람은 면접시험을 맡았던 본부장인 영준한 젊은이였다. "영실씨가 우리회사에 입사한것을 환영하오.우리회사는 초창기여서.아직까지 규모가 크잖지만 이런 회사에서 일하면 배울것이 많소. 열심히 일하고 많은것을 배우시오." 본부장은 기대에 찬 눈길을 보내면서 그녀가 할 임무를 알려주었다.  나의 정황을 누구보다 잘아는 본부장이 그녀에게 맡긴 일이란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 그저 팀장이 시키는대로 자료나 정리하고 전화나 받고 타자하는 자질부레한 일이였다.. 내가 연구생학력인걸 팀장이 모를리 없는데 고졸생도 식은죽먹기로 해낼수 있는 이따위 허드레일을 시키다니 인재를 어기 개발싸개로 아나? 영실이는 자존심이 잔뜩 구겨졌으나 어느 회사에서도 시용기에는 다 이런 수모를 받는다는 말을 귀에 딱지가 박히게 들어왔기에 부글부글 끓는 불평을 가까스로 눌렀다. 종종 할 일이 별로 없어 한가할때면 그녀는 일어에 능통한 장끼를 발휘하여 눈코뜰새없이 바삐 도는 통역의 문자번역도 도와주고 다른 사원을 도와 타자도 해주었다. 그런데 본부장이 이 사실을 알고 그녀를 칭찬하기는 커녕 호되게 힐책할줄이야 뉘 알았으랴?  "동무는 여기가 신선놀음턴줄 아오? 만약을 대비해 자기 자리를 잠시도 비워서는 ,안되오, 알겠소?" 영실이는 제딴에는 회사를 위해 좋은 일을 했다싶었는데 본부장의 꾸중을 듣고나니 오장륙부가 비틀렸다. 정규직 사원이 되면 실력을 인정해주겠지 하고 믿었는데 일년이 지났어도 그 나물의 그 밥이였다. 영실이는 본부장의 지시에 의해 이곳저곳 자꾸 부서를 옮겼다. 한가지 일에 능숙하여 일손이 잡힐만 하면 새 부서로 옮기라고하니 도대체 무슨 도깨비장난인지 알수 없었다. 회사에서는 새 프로그램을 개발한다고 기술연구팀을 무엇는데 이번에도 그녀는 괄호밖 신세였다. 내가 북방사람이라고 회사에서 색안경을을 끼고 보는걸가? 그렇다면 같은 북방사람인 본부장은 회사에서 왜 그렇게 중용할가? 나는 계산기전업을 전공했는데 회사에서 왜 인재를 적소에 쓰지 않고 대졸학력밖에 안되는 경력사원만 쓰나? 그녀는 본부장의 편견에 은근히 반발심이 일었다. 덩실한 키에 훤한 이마, 만날때마다 환한 웃음을 흘리지만 속으로 무슨 꿍꿍이를 하는지 알수 없었다. 본부장을 찾아가 시비곡직을 따지고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상사의 심기를 잘못 건드려 불똥이 튈까봐 두려웠다. 그녀는 상심한나머지 입에 자물쇠를 채우고 수걱수걱 맡겨준 일만 했다 저들이 도대체 무슨 프로그램을 개발하길래 이렇게 사람차별을 하나? 반발심이 잔뜩 동한 그녀는 자신의 재능을 보여줘야겠다 마음먹고 연구팀에 있는 친구를 통해 프로그램내용을 대충 알아냈다.그다지 어려울것 같지 않았다.그녀는 그들 먼저 프로그램을 개발해 상사를 깜짝 놀래우려고 퇴근벨이 울려도 자리를 뜨지 않고 열심히 자료를 뒤지고 컴퓨터를 쳤다. 십여일의 고투끝에 륜곽이 드러나고 실마리가 잡혔다. 성공의 아지랑이가 눈앞에서 이른거리자 안도의 한숨을 후 몰아쉬고나니 전신이 나른하고 피곤기가 몰려왔다. 잠시 눈을 붙인다는게 까박 잠이 들었다. 그녀가 문여는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드니 본부장이 사무실에 들어오는것이였다. "밤깊도록 무얼 하고있소?" "저..." 영실이는 수업시간에 손장난치다가 선생님한테 들킨 소녀마냥 얼굴이 홍당무우로 변했다.  본부장은 그녀의 컴퓨터앞에 서서 그녀가 개발하는 프로그램을 한동안 자세히 보고있었다. 영실이는 상사가 프로그램설계를 읽고나서 자신의 실력을 어떻게 평가할지 몰라 참새를 품은듯 심장이 콩닥콩닥 방망이질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본부장한테서 긍정하는 언사는 일언반구도 없고 입에서 웬 구렁이가 쏟아져나올줄이야. "누가 영실씨더러 이런 일을 하라 했소? 자신을 나타내고싶어 안달복달이오? 공연히 긁어 부스럼내지 마오. 연구팀과 척지면 좋을게 티끌만큼도 없소,... 이후 자기 직책이 아닌 일엔 함부로 손대지 마오, 알겠소?."  한달 뒤 영실이는 프로그램개연구팀에 편입되였다. 이제야 그렇게도 갈망하던 부서에 왔구나 하고 생각하니 온 몸에 힘이 솟았다. 그녀가 악착스레 일해 바야흐로 두각을 나타내는데 얄미운 본부장은 그녀를 제품류통부서로 보내였고 반년뒤엔 또 다른 직장으로 발령했다.. "나는 어디 트럼프놀이의 이란 말인가? 한가지 일에 손 익으면 또 다른걸 하라 하니 본부장은 왜 나 하나를 떡반죽으로 만드나?" 생각하면 할수록 기분이 잡치고 서러움이 북받쳐올랐다.. 수천리밖에 계시는 부모형제가 사뭇차게 그리웠고 허물없이 지내던 동창들의 웃는 얼굴이 눈에 삼삼했다. 오매불망 그리던 남방의 회사생활도 이젠 신물이 났다. 나이도 한살두살 더먹어 서른고개가 눈앞인데 가슴을 설레게 하는 젊은이는 그림자도 찾을수 없었다. 사표를 내고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구직이 하늘의 별따기이니 결단을 내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고향에 돌아가는 꿈도 꿔봤지만 금의환향하겠다며 큰소리를 탕탕친 자신이라 삼년만에 서리맞은 풀신세로 귀가할수는 없었다. 어느날 영실이가 퇴근하자 본부장이 그녀를 사무실로 불렀다.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본부장이 이 시간에 사무실로 부르나?" 영실이는 두려움이 앞서 푸주간에 끌려가는 늙다리황소같이 천근같은 발을 옮겨 사무실문을 열었다. "어서 오시오." 본부장은 영실이가 들어오자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조용한데 가서 이야기를 나누자면서 그녀를 데리고 회사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간이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영실씨, 요즘 회사일이 재미있소?" 영실이는 상사의 뜻밖의 물음에 선뜻 대답을 줄수 없었다. 재미없다고 속심을 털어놓으면 맘에 드는데 가라 하겠고 재미있다고 입술에 침을 바르자니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영실씨를 너무 박대한것 같은데 량해해주오." 본부장이 빙긋 웃자 영실이는 가슴속에 쌓였던 설음이 왈칵 치밀어올라 뜨거운 이슬이 두 볼을 적시였다.." "영실씨, 나도 료녕사람이요. 나하고 료녕으로 돌아갈 의향은 없소?" 본부장의 밤중에 홍두깨네미는 소리에 영실이는 소스라쳐 올똘해진 눈으로 그를 빤히 쳐다봤다. "이제야 진실를 토로하게 되여 너무 죄송하오. .나는 조선족이요. 더 적절히 말하자면 나는 영실씨의 대학동기 순옥이의 친오빠요." "순옥이 오빠라구요? 그럼 왜 여태까지 저를 감쪽같이 속였나요?" 영실이는 대학시절의 딱친구 순옥이한테서 그녀의 오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고 은근히 맘속에 두었었다. 본부장이 순옥이의 낯을 봐서라도 나를 이렇게 괴롭힐수가 있나? 일종의 배신감이 머리끝으로 치밀어올랐다. "기실 회사의 사정에 의해 나는 영실씨와 알은체 할수 없었소.. 하지만 나는 시종 영실씨의 일거일동을 지켜보면서 영실씨가 흙에 묻힌 진주라는것을 깊히깊이 느꼈더랬소." "제가 진주라고요? 그럼 왜 진주가 빛을 못내게 흙속에 묻어뒀나요?" "기실 나는 몇해전부터 이 회사에서 기술을 익히고 관리능력을 키운 뒤 고향에 돌아갈 타산이였소. 내가 영실씨한테 야박하게 군건 나대로의 타산이 있었기 때문이였소. 나는 영실씨가 한가지만 전공한 인재로 되기보다 다면수가 되길 절실히 바랐던것이오." "그건 왜선데요?" 오리무중에 빠진 영실이가 본부장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솔직히 말한다면 나는 영실씨를 지켜보면서 고향에 돌아가 영실씨와 손잡고 우리 자신의 회사를 꾸릴 뜻을 굳혔댔소. 영실씨의 생각이 어떤줄도 모르면서...." "개인이 회사를 꾸린다는게 어디 애들 장난인가요?" 영실이는 미덥잖은 눈길로 홀겨보며 본부장의 말을 잘랐다.. "총명한 영실씨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가보오. 기실 자본도 인재을 못찾아 눈에 쌍심지를 켜고있다는것을. 자본은 좋은 인재만 보면 찰거머리같이 달라붙는다는 도리를 왜 모르오? 나는 이미 심양에 회사를 꾸릴 준비를 해놨고 투자할 외상도 찾아와 만사구전에 동풍만 모자랄뿐이오.. 어떻소? 나와 손잡고 고향의 진흥에 이바지하지 않겠소?" 열변을 쏟는 본부장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보아하니 만단의 준비가 된 것 같았다.. 솜뭉치를 틀어박은듯 답답하던 가슴이 금세 확 열려 후련했다. "제가 본부장의 말을 진정 믿어도 될가요?" "되구말구요., 나는 오늘 사표를 써놨는데 영실씨의 의향을 확인하려고 이렇게 찾았소. 돌연히 불러서 참으로 미안하오. 나와 합작하겠소? 대답해주오.." 얼마나 바라 마지 않던 물음인가? 영실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이때 탁자에 반찬 몇가지와 맥주병이 올랐다. 본부장은 맥주병을 열고 컵에 맥주를 부었다. "자, 그럼 료녕의 진흥을 위해 우리의 성공을 위해 오늘 통쾌히 한잔합시다." 눈부신 앞날을 내다보는 두 젊은이는 스스럼없이 맥주잔을 부딪쳤다.상사와 하급사이를 가로 막던 무형의 장벽도 어느새 봄눈같이 녹아버렸다. 술기운에 두볼이 홍시로 된 영실이가 가는 눈을 곱게 홀기며 을 쐈다. . "동무는 정말 얄미운 상사예요. 사람속을 재로 만들어놓고 속이 편하던가요?" "영실씨, 참으로 죄송하오. 그게 다 우리의 앞날을 위한 고육계였다는것만 알아주오. 내 벌주를 달갑게 마시겠소." 본부장은 어줍게 변명하며 자기의 컵에 맥주를 콸콸부었다. 2011.6
‹처음  이전 2 3 4 5 6 7 8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