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룡수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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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조선조의 명신 학봉 김성일 13. 파란많은 사행길 3) 댓글:  조회:1500  추천:0  2015-08-17
  돛을 높이 올린 룡선은 동으로 동으로 내달렸다. 섬 근처 바다에서는 어부들이 그물을 늘이고 고기를 잡는 장면이 한눈에 안겨왔다. 김성일은 자기들도 그물에 걸려든 물고기신세로 된것만 같아 서글픈 생각을 금할수 없었다. 시작부터 순리롭지 못한 이번 사행길이 종국에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가? 김성일은 검푸른 바다물을 바라보며 구름처럼 일어나는 번뇌를 씻으려고 몸부림쳤다.     해상에서 5월의 마지막 하루를 보낸 룡선은 일본국의 본토와 가까운 일지도(一枝岛)에 이르러 부두에 정박했다. 사신들은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어부들한테서 일본국의 수도에서 파한 선위사들이 이미 일지도에 와서 사신들을 기다린다는 소식을 들었던것이였다.     사신일행이 객관에 든 뒤였다. 하루는 그곳 령주가 입쌀을 가져온다는 기별이 왔다.               황윤길과 허성은 령주를 찾아가려고 일어섰다.          황윤길과 허성이 학봉선생의 말을 들어보니 그 말이 도리가 있는듯하였다. 그리하여 통신사들은 일지도의 령주를 만났으나 그가 주는 쌀은 받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갔다. 그러나 일지도에 와서 조선통신사를 기다린다는 선위사는 코등도 보이지 않았다. 놈들은 조선사신을 떠볼양으로 근방에 와 있으면서도 얼굴을 내밀지 않고 모르쇠를 하고있었다. 이제 며칠만 더 지나면 조선에서 가져온 식량도 거덜날 지경이라 모두들 조급증이 났다.          황윤길은 참다못해 김성일을 돌아보며 일어났다.     >           황윤길은 학봉선생의 타이름을 듣지 않고 수행인원을 파하여 선위사들과 만날것을 청했다.      그러나 3-4일이 지났는데도 선위사들은 머리도 내밀지 않았다. 이제 며칠만 더 지나면 식량이 완전히 거덜날판이였다. 조선국의 국서를 가지고 일본에 와서 하찮은 놈들한테 수모를 받을대로 받은 그들은 선위사를 만날 생각을 버리고 결연히 배에 올랐다.      바다를 건너 6월 16일에 일본 본토와 100리 상거한 계빈(堺滨)에 이른 사신 일행은 인접사(引接寺)에 들어가서 숙소를 정하였다.  어느 하루, 서해도의 한 령주가 인접사에 찾아와 례단을 바치였다. 황윤길 등 세사람은 례물보자기를 풀어헤쳐놓고 례물을 꺼내 수행인원들에게 골고루 나눠주고 과일 등속은 수행인원들과 같이 나눠먹었다.  김성일은  보자기를 접다가 깜짝 놀라 하고 비명을 질렀다. 보자기의 한구석에                 황윤길의 말에 맞장구를 치는 허성의 꼴이 얄미워 김성일은 버럭 성을 내였다.                  허성은 그냥 제주장을  우겨댔다.          김성일이 계속 도리를 따지며 설복하자 황윤길과 허성도 더는 딴 말이 없었다.     김성일은 그길로 하인을 데리고 장에 나가서 모자라는 과일 등속을 사가지고 돌아왔다. 그는 례단을 령주가 처음 가져왔을 때와 꼭같이 포장한 뒤 서해도 령주에게 되돌려보내였다.     영문을 알아차린 서해도 령주는 수하사람을 보내여서 조선사신들에게 자기네가 조심하지 않아 잘못되였다고 사죄하였다.          사신들은 쾌히 응낙하고 그 례단을 받아들였다.     며칠이 지나자 각지에서 보내온 례단이 수두룩이 들어왔다. 그런데 그가운데 비전주(肥前州 ), 원구성(源久成 ) 등 령주가 보내온 례단에는 여전히 라는 문구가 그대로 적혀있었다.     《지난번에 상사의 태도가 엄정하지 못했다는 소문이 났기에 이번에도 이런 굴욕을 당하였소. 문구가 잘못된 례단은 일률로 돌려보내기요>>          학봉선생의 말에 황윤길은 대뜸 짜증을 내였다. 하찮은 글자 하나를 가지고 미주알고주알 캐면서 시끄러운 문장을 자꾸 만드는 김성일의 처사에 황윤길은 불만이 가득했다. 그는 즉석에서 례단을 풀어헤치고 수행인원들과 같이 나누어가졌으며 가져온 주육은 나누어먹었다. 도리에 어긋나는 일은 절대 할수 없다고 생각한 김성일은 자기앞에 차례진 례물에 손끝 한번 대지 않았고 자기의 시종들에게 차례진 례물도 황윤길에게 돌려주었으며 술이며 음식은 객관에 든 일본사람들에게 나눠주고말았다.  례의상으로 남의 례단을 받았으면 답례선물을 보내야 하였다.  라는 문구를 써가지고 례단을 보내온  두 령주에게 답례선물을 보낼 때였다.   답례선물을 보낸 사람의 이름을 적을 때 김성일은 이렇게 말했다. 부사의 이름을 적어넣을수 없게 된 황윤길은 하는수 없어서 개인이름이 아닌 라의 돛을 높이 올린 룡선은 동으로 동으로 내달렸다. 섬 근처 바다에서는 어부들이 그물을 늘이고 고기를 잡는 장면이 한눈에 안겨왔다. 김성일은 자기들도 그물에 걸려든 물고기신세로 된것만 같아 서글픈 생각을 금할수 없었다. 시작부터 순리롭지 못한 이번 사행길이 종국에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가? 김성일은 검푸른 바다물을 바라보며 구름처럼 일어나는 번뇌를 씻으려고 몸부림쳤다.     해상에서 5월의 마지막 하루를 보낸 룡선은 일본국의 본토와 가까운 일지도(一枝岛)에 이르러 부두에 정박했다. 사신들은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어부들한테서 일본국의 수도에서 파한 선위사들이 이미 일지도에 와서 사신들을 기다린다는 소식을 들었던것이였다.     사신일행이 객관에 든 뒤였다. 하루는 그곳 령주가 입쌀을 가져온다는 기별이 왔다.               황윤길과 허성은 령주를 찾아가려고 일어섰다.          황윤길과 허성이 학봉선생의 말을 들어보니 그 말이 도리가 있는듯하였다. 그리하여 통신사들은 일지도의 령주를 만났으나 그가 주는 쌀은 받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갔다. 그러나 일지도에 와서 조선통신사를 기다린다는 선위사는 코등도 보이지 않았다. 놈들은 조선사신을 떠볼양으로 근방에 와 있으면서도 얼굴을 내밀지 않고 모르쇠를 하고있었다. 이제 며칠만 더 지나면 조선에서 가져온 식량도 거덜날 지경이라 모두들 조급증이 났다.          황윤길은 참다못해 김성일을 돌아보며 일어났다.     >           황윤길은 학봉선생의 타이름을 듣지 않고 수행인원을 파하여 선위사들과 만날것을 청했다.      그러나 3-4일이 지났는데도 선위사들은 머리도 내밀지 않았다. 이제 며칠만 더 지나면 식량이 완전히 거덜날판이였다. 조선국의 국서를 가지고 일본에 와서 하찮은 놈들한테 수모를 받을대로 받은 그들은 선위사를 만날 생각을 버리고 결연히 배에 올랐다.      바다를 건너 6월 16일에 일본 본토와 100리 상거한 계빈(堺滨)에 이른 사신 일행은 인접사(引接寺)에 들어가서 숙소를 정하였다.  어느 하루, 서해도의 한 령주가 인접사에 찾아와 례단을 바치였다. 황윤길 등 세사람은 례물보자기를 풀어헤쳐놓고 례물을 꺼내 수행인원들에게 골고루 나눠주고 과일 등속은 수행인원들과 같이 나눠먹었다.  김성일은  보자기를 접다가 깜짝 놀라 하고 비명을 질렀다. 보자기의 한구석에           학봉선생의 말에 황윤길은 대뜸 짜증을 내였다. 하찮은 글자 하나를 가지고 미주알고주알 캐면서 시끄러운 문장을 자꾸 만드는 김성일의 처사에 황윤길은 불만이 가득했다. 그는 즉석에서 례단을 풀어헤치고 수행인원들과 같이 나누어가졌으며 가져온 주육은 나누어먹었다. 도리에 어긋나는 일은 절대 할수 없다고 생각한 김성일은 자기앞에 차례진 례물에 손끝 한번 대지 않았고 자기의 시종들에게 차례진 례물도 황윤길에게 돌려주었으며 술이며 음식은 객관에 든 일본사람들에게 나눠주고말았다.  례의상으로 남의 례단을 받았으면 답례선물을 보내야 하였다.  라는 문구를 써가지고 례단을 보내온  두 령주에게 답례선물을 보낼 때였다.   답례선물을 보낸 사람의 이름을 적을 때 김성일은 이렇게 말했다. 부사의 이름을 적어넣을수 없게 된 황윤길은 하는수 없어서 개인이름이 아닌 라의 명의로 답례선물을 보내고말았다.
62    조선조의 명신 학봉 김성일 13.파란많은 사행길 2) 댓글:  조회:1369  추천:0  2015-08-17
 룡선이 대마도의 수부인 이즈하라항구에 정박한 뒤 조선사신들은 배에서 서둘러 내리지 않고 관례대로 일본국의 선위사가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담배 한대 피울 시간이 지나갔다. 그러나 선위사들이 배에 올라오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 나라 사람들이 외국 사신에 대한 접대를 이렇게 소홀히 할수 있단말인가?) 의혹의 눈길을 서로 마주치던 통신사일행은 곈쇼오를 부두에 내려보내여 동정을 알아오게 하였다. 이윽고 섬에 올랐던 겐쇼오가 얼굴에 난처한 기색을 보이며 배우로 올라왔다. 물어보나 마나 선위사가 대마도에 오지 않은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였다. 일본국에서 사신이 올 때면 우리 나라에서는 언제나 선위사를 동평관까지 파견하여 사신을 맞아들였는데 섬나라의 오랑캐들은 정말 이런 기본적인 례의도 모른단말인가? 상사 황윤길도 부사 김성일도 서장관 허성도 풀기 어려운 이 수수께끼를 두고 서로 눈길을 마주쳤다. 학봉선생은 겐쇼오를 마주보고 낮으나 엄숙한 어조로 물었다. 학봉선생의 물음의 무게를 가늠한 겐쇼오는 당면한 창피를 모면하려고 거짓말을 꾸며  둘러댔다. 겐쇼오의 안내하에 대마도 객관에 들어간 사신일행은 객관에서 행장을 부리우고 로독을 풀면서 일본 본토에서 영접사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였다. 이러구러 며칠이 지나갔다. 어느 하루 아침에 겐쇼오가 객관에 찾아왔다. 일국 사신들이 섬에 들렸는데 섬의 주인은 낯 한번 내보이지 않아 괘씸하던차에 섬의 주인이 초대연을 베푼다 하니 통신사들은 분이 약간 풀리였다.   겐쇼오가 떠난 뒤 사신일행은 객관을 나왔다. 그들은 조선땅과 판이하게 기암괴석이 즐비한 해안과 향나무, 대나무들로 우거진 수려한 산천경개를 두루 구경하다가 한낮이 되자 국분사로 올라왔다. 사신일행이 국분사의 대문안으로 들어서자 심부름군 하나가 돌층계를 뛰여오르더니 중당(中堂)안에 있는 사람들이 들으라고 크게 웨쳤다. 사신들은 다른 한 심부름군의 안내하에 중당안으로 들어갔다. 초대연을 벌이려고 차려놓은 네모반듯한 상우에는 이미 수저가락이 놓여있었는데 주인측에서는  온 사람이 몇이 보이지 않아 어딘가 스산한 감이 들었다. 상좌에 앉아있던 겐쇼오는 사신들이 집안에 다 들어오자 일어서서 객석을 가리키면서 거기가서 앉으라고 손짓을 하는것이였다. (손님이 오는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문밖에 나와보지도 않고있다가 손님들이 집안에 들어왔는데도 빈 인사 한마디도 변변히 할줄 모르는 미련한 자식이라구야.)  학봉선생은 밸이 울컥 솟아올랐으나 사신의 체면을 지키느라 낯빛을 변하지 않고 객석에 가서 앉아있었다. 시간은 일각 일각 지나갔다. 어느덧 정오가 지난지 이슥하여 배속에서는 꼬르륵소리가 연신 울렸다. 그러나 겐쇼오는 연회를 주최할 섬주인이 오지 않아 연회를 시작할 생각도 못하고 어색한 기분으로 시간을 끌어갔다.  한식경이나 지났을 때였다. 밖에서 떠들썩하는 소리가 나더니  하는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사신일행이 열려진 문으로 밖을 내다보니 섬의 주인인 종이지(宗义智)의 아들인 평이지(平异智)가 가마를 타고 대문안으로 들어오고있었다. 허리에 장도를 찬 평이지는 뜰안에 들어서서도 가마에서 내릴념을 하지 않고 있어서 교군들은 가마를 메고 곧추 중당으로 통한 돌단계우로 올라오고있었다.  (일개 섬주인의 아들이란 놈이 이렇게 오만무례할수 있단말인가? 황차 지난번에 겐쇼오를 따라 조선에 와서 후한 대접을 받은자로서 이럴수가 있단말인가? 인의례절이란 털끝만큼도 모르는 이 섬나라 오랑캐들은 외국에서 온 사신조차 제 하인 대하듯하는구나!) 하찮은 놈한테서 치욕을 당했구나 하는것을 느낀 김성일은 얼굴이 숫불같이 달아올랐다. 대뜸 눈살이 꼿꼿해지고 이가 갈렸다. 그는 옆에 앉은 황윤길과 허성을 돌아보면서 가만히 입을 열었다.      황윤길은 그 자리에서 일어날념을 하지 않고있었다.     말을 마친 김성일은 분연히 일어나서 문가로 나갔다.  놈들의 무례한 행위에 밸이 꼬였던 허성도 뒤따라 일어섰다. 연회청안에 들어온 뒤에야 가마에서 내린 평이지는 김성일과 허성이 밖으로 나가는것을 보고 황윤길에게 다가갔다.   ,   대답할 말을 미처 찾지 못한 황윤길은 등골에 땀을 빼며 애원에 가까운 눈길로 번역을 돌아봤다.   평이지의 기세에 눌리운 번역 진세운(陈世云)이 호랑이앞에 선 여우마냥 굽실거리며 거짓말을 발라맞췄다.     평이지가 하는 골에 구역질이 나서 연회청밖으로 나오던 김성일은 진세운이 지껄이는 소리를 듣고 성이 상투끝까지 치밀어올라 두가닥 수염을 푸들푸들 떨었다.      >      부사의 추상같은 호령이 떨어지자 번역 진세운은 사시나무같이 떨면서 밖으로 허둥지둥 나와서 고개를 푹 떨구었다.            널판자같은 손바닥이 번개같이 진세운의 볼에 떨어졌다.                  눈에 불이 일게 따귀를 맞고 정신이 번쩍 든 진세운은 부사 김성일의 앞에 무릎을 꿇고 빌었다.      번역을 맡았으면 제할일이나 할것이지 나라를 욕되게 하는 짓을 할게 무엇이냐?>>      노기어린 김성일의 눈매는 비수보다 날카로웠다. 왜놈들의 무례한 행위에 항의는 못할 망정 놈들의 비위에 거슬릴가봐 거짓말까지 꾸며대는 번역의 행동이 가증스럽기 그지없었다.      이때 연회청밖에서 일어난 소동을 듣고 집안에 앉았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가슴이 캥긴  평이지도 뒤따라 나왔다.             평이지가 의아해하는 표정을 보이며 김성일에게 묻자 김성일은 댜뜸 바른말을 쏟았다.                  교활하기 여우같은 평이지는 자기의 불찰을 승인할 위인이 아니였다.  그는 독기어린 눈길로 좌우를 돌아보다가 교군 하나를 발견하고 다가가서 목덜미를 덥썩 틀어쥐더니 땅바닥에 꺼꾸러뜨렸다.                 불의의 봉변을 당한 교군은 어인 영문인지를 몰라 대답을 못하고 꿇어앉아 부들부들 떨기만 할뿐이였다.      평이지는 허리에 찬 칼집에서 서슬 푸른 장도를 쓱 뽑더니 번개같이 교군의 목을 내려쳤다. 순식간에 교군의 피투성이 머리가 땅바닥에 떨어져 딩굴었다.           피묻은 장도를 칼집안에 밀어넣으면서 너털웃음을 짓던 평이지는 얼굴에 교활한 표정을 지어보이면서 김성일의 소매를 끌어당기였다. 웃지도 울지도 못할 꼭두각시극을 보고난 학봉선생은 어이가 없었으나 허성과 같이 평이지를 따라 연회청안으로 들어갈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술상이 차려지고 연회가 시작되였다.     평이지의 환영사에  이어 황윤길의 간단한 답사가 있은 뒤 식사를 시작했다. 술잔이 몇번 오가긴 했으나 기분없이 시작된 연회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어색한 분위기에서 인차 끝나고말았다.      연회를 마치고 국분사에서 나와 숙소로 돌아온 사신들은 모두가 기분이 잡쳐서 옷도 벗지 않고 아무런 말도 없이 제자리에 벌렁 누워버렸다.     이윽고 서장관 허성이 종이에다 글을 몇줄 적어서 김성일에게 보여주었다. 김성일이 종이장을 펼쳐보니 낮에 생긴 일을 가지고 학봉선생을 나무라는 내용의 글이였다 .      김공: 오늘 공이 한 일은 너무 과분한것 같소. 공께서 일본사람들 앞에서 번역의 볼기를 치진 말았어야 했소. 일본국의 하인이 그때문에 억울한 죽음을 당했으니 불쌍하지 않소?   김성일은 즉석에 붓을 날려 허성의 글을 반박했다.   나는 평이지가 보라고 일부러 연회청앞에서 번역의 볼기를 친것이요. 그 일로 하여 왜놈의 하인이 원통하게 죽은데 대해서는  나도 도의적으로는 동정을 금할수 없소. 그러나 나는 대마도에 와서 오만무례한 평이지의 기를 꺾어놓고 그들이 저지른 무례한 행위를 스스로 깨닫고 우리한테 사죄하도록 한것이 국체의 존엄을 위해서는 천만 다행인것으로 생각하고있소. 우리가 대마도에 오자마자 겁을 집어먹고 왜놈들을 범같이 두려워하며 그자들앞에서 벌벌 떨고 그들의 노염을 살가봐 말 한마디도 변변히 하지 못하고 어물거리면서 놈들의 굴욕을 달갑게 받아들인다면 장차 일본 본토에 간 뒤에 어떻게 처사하겠소? 행동에서 자중하지 못하고 출입을 경솔히 하고 남의 굴욕을 당하고도 그것을 수치로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찌 사신으로 왔다고 할수 있겠소?.. .     김성일의 글쪽지를 받아보고난 허성은 아무런 말도 없이 하고 가볍게 한숨만 쉬였다.     사신들이 객관에 든지도 어언간 7-8일이 지나갔다. 그러나  이미 본토를 떠났다는 일본국의 선위사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학봉의 질문에 겐쇼오는 또 한번 잔꾀를 부렸다.     며칠이 지난 뒤 겐쇼오가 객관으로 찾아왔다.          겐쇼오는 손을 싹싹 비비면서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그의 얄팍한 속임수는 삼척동자도 얼려넘길수 없었다. 동남풍이 많이 부는 봄철이라 일본본토에서 대마도로 오는데는 순풍이 불면 불었지 역풍이 불리 없었다. 본토에서 애당초에 선위사를 파견하지 조차 않은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김성일은 대마도에 들어서면서부터 겐쇼오의 말에 의심을 가졌지만 아무려면 이자들이 설마 이렇게까지 무례하게 굴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대마도에서 여러날을 지체하여 조급증이 난 황윤길이 결단을 내리고 떠날 차비를 하였다.                   김성일이 도리를 따져가며 굳이 만류했으나 일본령토에 들어서서 일본국왕의 비위를 거슬리여 불의지변을 당할가봐 두려워한 황윤길은 짜증을 부리면서 정사의 권한으로 출발명령을 내렸다. 수행인원들은 부사 김성일의 눈치를 보다가는 하나둘 행장을 수습하여 배우에 올랐다. 일행이 다 배에 오르니 김성일도 하는수 없어 그들의 뒤를 따라 배에 올랐다.
61    조선조의 명신 학봉 김성일 13. 파란많은 사행길1) 댓글:  조회:1556  추천:0  2015-08-17
   13.파란많은 사행길 1)       선조 23(1590 )년 4월 27일, 바람 한점 없이  맑은 화창한 봄날 아침이였다. 쪽빛 하늘에는 고기비늘같은  구름이 드문드문 비껴있고 무르른 바다에는 은빛 파도가 절주있게 일고있 항구에서 가까운 바다에는 눈같이 하얀 갈매기들이 잔잔한 파도를 희롱하며 깃을 적시기도 하고 먹이를 찾아 대가리를 물속에 넣었다가는 하늘로 날아올라 커다란 원을 그리기도 한다.       이때 라고 쓴 기발을 높이 날리는 룡선 한척이 각앵각색의 기발을 흔들며 바래주는 사람들의 정어린 눈길을 담아싣고 동래항구를 서서히 떠나갔다. 십여명의 사공들은 웃도리를 벗어버리고 룡선의 량켠에 줄지어 서서 절주있게 삿대를 젓고있었고 정중에는 사모관대를 한 량반 몇사람과 화복차림의 사람 몇이 마주 앉아있었다. 정좌에 앉아있는 나이 50여세 되여보이는  검은 수염을 기른 량반은 이번에 일본에 통신사로 가는  정사 황윤길이였고 그곁에 앉아있는 의관이 단정하고 풍채가 름름한 50대의 사나이는 례빈사정으로 있다가 이번에 통신사의 부사직을 맡은 학봉 김성일이였고 그 곁에 앉은 40대의 얼굴빛이 하얀 사람은 서장관직을 맡은 허성이였다. 그리고 맞은켠에 앉은 화복차림의 일본사람은 겐쇼오였다. 그는 원씨(源氏)를 격멸하고 일본관백으로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심복인데 작년 10월 조선에 사신으로 왔다가 답례방문을 하러 일본으로 가는 조선통신사를 안내하게 되였다.      배에 앉은 사람들중의 절대다수는 출국행이 처음이였고 더러는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서보기도 처음이였다. 사람들은 망망한 바다의 극경에 취해 아득한 수평선에 눈길을 박고 찬탄을 금할줄 몰랐다. 호기심이 어린 수십쌍의 눈길은 하늘과 바다가 맞붙은 수평선우에서 흰갈기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파도를 따라 움직였다. 흥이 도도한 악공들은 북도 치고 노래가락도 뽑으면서 천재일우의 즐거움을 누리였다.      정좌에 앉아있는 정사 황윤길과 서장관 허성은  번역관을 옆에 앉혀놓고 마주 앉은 겐쇼오와 한담을 하기에 여념이 없었으나 김성일은 그들의 대화에는 아무런 흥미도 가지지 않았는지 말 한마디 거들념하지 않고 묵묵히 먼 바다를 바라보며 보며 깊은 상념에 잠겨있었다.      ( 이번 사행길이 순통할수 있을가?)  이 일을 가지고 김성일은 몇날며칠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어쩐지 길상한 징조는 보이지 않았다. 몇년전에 서장관이란 직무를 맡고 윤두수를 따라 명나라에 주청사로 갔을 때는 가고 올 때 아무런 걱정도 없었는데 이번 행차는 웬 일인가?  외국을 가보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데 왜 일본행차에는 자꾸 불안감이 앞서는것일가? 학봉선생은 생각에 생각을 굴리였다. 그렇다. 풍토인정이며 언어례절이 우리와 다르기는 일본도 명나라와 별반 차이가 없지만 형제나라로 되여 세세대대 사귀여온  명나라와 오랑캐들이 욱실거리는 섬나라는  서로 비교할수도 없는  일이였다. 좁은 바다 하나를 사이에 두고있으면서도 근 백년동안 아무런 래왕도 없이 지낸 조선과 일본사이이니 서로간에는  아무런  좋은 감정도 있을리 없었던것이다.  이번에 겐쇼오가 가지고온  일본 관백의 국서도 사행길의 어려움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은가? 명나라를 치기 위해 길을 빌려달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엉큼한 속심, 그의 코대를 꺾어놓으면서도 동방례의지국의 너그러움을 보이도록 처사해야 할 일, 생각밖의 일들에 부딪칠 때 응급조치를 대야 할 일... 가지가지 경우를 상상해보노라니 머리는  어지러워 현훈증이 날 지경이였다. 웃음을 싣고 노래를 싣고 우수를 싣고 돛배는 동으로 동으로 미끄러져갔다.  한나절이 지나자 서쪽하늘로 기울어졌던 해는 시뿌연 구름속에 숨어버리고 해상에는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달콤한 잠에서 깨여난 파도는 바람의 부추김을 받아 기세를 올리더니 마치 힘자랑이나 하는듯 요란스레 배창을 들이치기 시작했다. 해질무렵이면 잠잘줄 알았던 바람은 점점 더 기승을 부렸고 산더미같은 물결은 성난 사자같이 날뛰면서 배를 금시 삼킬듯이 아우성을 치며 배전으로 바라오르기 시작했다.   세찬 바람에 평형을 잃은 배는 좌우로 기우뚱거리며 속도를 늦추었다. 이윽고 물사태를 몰고 천둥같이 노호하는 태풍이 일어났다. 사공들은 짭짤한 바다물방울에 눈도 바로 뜨지 못한채 이를 악물고 억세게 노를 저었으나 배의 전진속도는 점점 느려졌다. 룡선을 곱게 단장했던 꽃종이와 각종 아름다운 수식은 비물에 함뿍 젖고 세찬 바람에 갈기갈기 찢겨지고 벗겨져서 멀리멀이 날려간지 오래였고 돛도 거세찬 폭풍의 강타에 견디기 어려워 째지는 듯한 가냘픈 신음소리를 내였다.  배창안에 편안이 앉아서 바다의 황홀한 경치를 구경하며 려로의 기쁨을 만끽하던 사람들은 뜻밖의 봉변을 당해 숨도 바로 쉬지 못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창밖만 내다보고있었다. 황혼무렵이면 바람이 좀 수그러들기 마련인데 심술궂은 바람은 사람들과 엇서보려는듯  점점 더 사납게 달려들었다. 이윽고 하는 신음소리가 들려오더니 무엇인가  하는 요란한 굉음을 내며 배창을 내려쳤다. 돛대로 세워놓은 장딴지같이 굵은 참대기둥이 부러져서 배창을 때렸던것이였다.   돛을 잃은 룡선은 방향을 바로 잡지 못하고 기우뚱거리면서 굼뱅이같이 움직였다. 행여나 조금만 더 참으면 바람이 자겠는지? 하늘이 그리도 무심할라구 하면서 행여나에 실날같은 희망을 걸었던 사람들은 다가온 사신(死神)을 앞에 두고 얼굴이 재빛으로 되여 부들부들 떨었다.              누군가 맥없는 소리를 뱉어놓자         하고 누군가 맞장구를 쳤다.       이국강산을 돈 한푼 쓰지 않고 구경하려던 아름다운 꿈은 순식간에 수포로 되여버리고 자칫하면 바다에서 원통하게 어복지혼(鱼腹之魂)이 되겠다는 생각이 든 수행인원들은 하나둘 눈물을 훔치기 시작하였는데 미구에 흐느낌소리는 점차 울음의 합창으로 변해버리고말았다.     학봉선생이 황윤길과 허성네를 돌아보니 그들도 내심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고있었다.      (어떻게 하면 이 사람들의 정서를 온정시킬수 있을가?)   황윤길의 말을 이어 서장관 허성도 동감을 표시했다. 황윤길이 일어나서 사공들이 들으라고 크게 웨치자 사공들은 일제히 배머리를 돌렸다. 비록 똧이 떨어져나간 배였지만 순풍에 삿대를 저으니 룡선은 살같이 빨리 나갔다. 이튿날새벽에 배는 무사히 다대포항구에 이르렀다. 그들은 대포관(大浦馆)에 류숙하면서 돛대를 바꾸고 배창을 수리하면서 바람이 자기를 기다렸다. 5월1일 아침, 다대포바다를 연분홍빛으로 물들이며 수평선에서 솟아오른 붉은 태양이 하늘높이 떠오르자 바다에는 은빛 파문이 일었다. 언제 광풍이 몰아쳤더냐고 말 하는듯 고요한 바다는 새색시같이 유순하게 배길을 열어놓는다. 돛을 높이 올린 룡선은 동으로 동으로 서서히 떠나갔다. 망망한 바다에서 또다시 풍랑을 맞을가봐 사공들은 진땀을 흘리면서 노를 저었다. 사흘낮 사흘밤을 쉬지 않고 노를 저은 덕에 룡선은 나흩날 아침에 일본령토에 속하는 대마도에 이르렀다.
60    조선조의 명신 학봉 김성일 12.홍문관에서의 밝은 빛 댓글:  조회:1434  추천:0  2015-08-17
   12. 홍문관에서의 밝은 빛   라주를 떠난 학봉 김성일은 떠난지 4년만에 고향 내앞마을(지금의 안동시임하면 천전동)로 돌아왔다. 그는 낮이면 들에 나가 농사일을 거들고 저녁이면 댁을 찾아오는 벗들을 맞아 당면 정세에 대한 이야기나 학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손님들이 돌아간 늦은 밤에는 서재에서 초불을 밝혀놓고 밤늦도록 필을 날렸다.   학봉선생은 대현인이자 스승이신 퇴계 리황선생의 문집의 출간을 앞두고 그분의 빛나는 일생과 눈부신 업적을 상세히 정리하여 적어가는 한편 퇴계선생 문집의 교정을 보았다.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으로 력사에 길이 남을 빛나는 저서이기에 그는 퇴계선생의 유고의 매 한구절 매 한글자라도 틀릴세라 유고를 읽고 또 읽으면서 틀린 부분을 고치였다.     어느덧 2년이란 시간이 흘러갔다. 선조 21년, 이미51세의 로년기를 맞은 학봉 김성일은 종부사첨정(宗簿寺佥正)을 맡으라는 임금의 교지를 받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발없는 말은 순식간에 온 서울안에 퍼지고 뒤이어 린근 도에도 퍼졌다.          서울에 사는 선비들은 궁금증을 가지고 김성일의 상경후의 행동에 이목을 돌리고있었다.     나라의 주석지신이 되여 동인과 서인간의 모순을 조절하던 리조판서 률곡 리이선생이 별세한 뒤 조정에서는 동인이요, 서인이요, 남인이요, 북인이요 하면서 주장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옥신각신하였고 홍문관의 선비들도 붕당싸움에 말려들어 옴니암미하고있었다.     홍문관의 선비들도 다툼끝에 시비를 가리지 못하게 되자 선비들은 자기들이 맘속으로 한없이 우러르는 학봉선생을 찾아왔다.          선비들의 천박한 생각을 안타까이 여기는 학봉 김성일은 찾아온 선비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쓸어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학봉선생의 도리깊은 말을 새겨듣고난 선비들은 오리무중(五里雾中)에서 헤여나온듯  눈앞이 환해졌다. 그들은 학봉선생의 편협하지 않고 너그러운 성품에 감복하였으며 모든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감정으로 대체하지 않고 언제나 리성적으로 처사하는데 대해 끝없이 흠모하였다.       학봉선생은 너그러워야 한다는 뜻의 
59    조선조의 명신 학봉 김성일 11.금성산의 봄빛 댓글:  조회:1056  추천:0  2015-08-17
  11. 금성산의 봄빛     선조 16년 8월, 학봉 김성일은 라주목사에 부임하라는 조정의 명을 받고 남행길에 올랐다. 황해도 순무어사로 내려갔다가 서울로 돌아온지 며칠 되지 않았지만 국왕의 새로운 조서가 내린이상 편안히 쉴수는 없었다.그는 로독을 풀념도 하지 않고 인차 서울을 떠났다. 쌍두마차우에 앉아서 대통로 량켠에 펼쳐진 푸르른 전야를 내다보는 그의 머리속에는 부임후에 해야 할 일들이 맴돌이쳤다. 호남지방은 비옥한 땅이 있고 수리조건이 좋은 곳이지만 인구밀도가 높고 인심이 메마른 곳이라 다스리기 힘들다는것은 불보듯 뻔한것이였다. 해마다 풍년이 든다 해도 보리고개를 넘기기 어려워하는 곳이 라주지방이요 도적떼가 욱실거리기로 소문난 곳도 바로 라주지방이였다. 백성들의 고통을 단 얼마라도 덜어주겠다고 주야장천 로심초사하여 장계도 많이 써올렸지만 그렇다 할 효력을 보지 못한 김성일은 자신의 힘과 지혜가 작용할수 있는 라주땅에서나마 도학정치를 실행하여 백성들이 격앙가를 부르며 살아 갈 수 있게 해보겠다고 속다짐하였다.     학봉일행이 라주성에 이르러 보니 어느때 소식을 들었는지 수백수천명의 백성들이 길가에 나와서 신임목사를 환영하였다. 함경도, 황해도에 순무어사로 내려가서 선정을 베풀었다는  소문이 난데다가 문필 또한 출중한 학자가 이 지방의 목사로 내려온다는 소문을 들은 백성들은 신관사또에 대한 기대가 아주 컸었다. 라주목사로 부임한 김성일은 륙방관속을 모아놓고 지방관원들이 청렴정직해야 한다는 도리를 강조하였고 당지의 명류들을 찾아가서 도학정치를 의론하였으며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의 생활고를 자세히 료해하였다. 그는 각 고을에 방을 내걸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관청에 신소하게 하였고 법을 어긴 불법관리들을 사정없이 처단하였으며 성을 쌓고 관청을 수리하는 등의 부역을 엄격히 제한하고 농민들이 시름놓고 농사일에 몰두하도록 여러가지 합당한 조치를 취하였다.   학봉 김성일은 라주목사로 부임한 뒤,  지방관리들이 도학정치를 모르고 명문의 후손들이 조상의 뼈나 이어받았지 학문이 너무도 얕다는것을 가슴깊이 깨달았다. 명문이 많이 사는 고장에 선현(先贤)을 봉안(奉安)하는 장소조차 없으니 정말 유감스럽다고 생각한 그는 교육을 틀어잡아야 되겠다는것을 새삼스레 깊이 느꼈다.     어느날 라주성 서쪽에 있는 금성산을 돌아보던 학봉선생은 수려한 산기슭에 서원을 세우기로 작심하였다. 그는 관청에서 지방관원들과 서원을 세울 일을 토의하고나서 각 고을에 방을 내걸고 명류들이 서원을 세우는데 돈과 물자를 기부하라고 호소하였다. 오래지 않아 금성산기슭에 대곡서원(大谷书院)이 일어섰다. 이 서원의 규모나 학령(学令)은 모두 다 당시에 이름난 백록동(白鹿洞)서원을 모방하였다. 그는 서원에 사당(祠堂)을 세우고 조선조의 5현가(五贤家)들인 한훤당(寒暄堂 ) 김굉필(金宏弼1454--1504 ), 일두( 一斗)정여창(郑汝昌1450--1504 ), 정암( 静奄) 조광조(赵光祖1482--1519 ), 회재(晦赍) 리언적(李彦迪1491--1553 ), 퇴계( 退溪) 리황(李滉1501--1570 ) 등 대학자들을 봉안(奉安)하였다.  나라의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사업을 남달리 중시한  학봉선생은 관청에서 정사를 마치고 여가만 있으면  홀로 말을 타고 서원으로 달려갔다. 그는 서원에 들어서면  재생(赍生)들의 학습정황을 료해하고 재생들과 마주 앉아 경서의 오묘한  뜻을 강론하기도 하였고 재생들의 재주와 신근성을 알아볼 목적으로 글짓는 내기도 걸어보고 여러가지 과업을 맡겨 시험해보기도 하였다.  학봉선생은 대곡서원에서  퇴계선생이 만년에 지은 대표작인 성학십도(圣学十图)를 출판하였고 계산잡영(溪山杂咏)등 훌륭한 책들을 간행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행정이나 군정이나 교화나 재정이나 문화사업 등의 어느것이나 다 도학정신을 구현하는데 있어서 분리할수 없는 하나의 통일체였다. 라주백성들의 운명을 한어깨에 짊어진 학봉 김성일은 그 고장 백성들의 고통을 단 얼마라도 덜어주기 위하여 때식을 잊고 공무를 보았고 밤낮을 이어가며 사색의 실마리를 풀어갔다.   그가 부임한지 몇달 지나지 않아 둘째형님 규봉(奎峰)이 별세했고 2년이 지난 뒤에는  또 큰형님 약봉(药峰)이 세상을 떠났다. 십여년전에 과거보러 갈 때 세째형님을 잃었고 또 부친을 여인 뒤 또 손우의 형님들을 다 잃은 학봉선생의 마음은 칼로 에이는듯 아팠다. 그러나 그는 주림과 기아에 허덕이는 불쌍한 라주백성들을  버려두고  고향에 돌아가서 마음놓고 오래동안 머물수 없었다.  부고를 접했을 때마다 그는 필마단기로 고향집에 달려가서 형님의 령구앞에 엎드려서 통곡을 하고나서는 자녀들을 설복하여 초상을 간소하게 치르도록 이르고는 출상이 끝나기 바쁘게 라주로 돌아왔다.     김성일이 라주목사로 부임한지 어느덧 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짧디짧은 3년동안 라주지방은 몰라보게 변모하였다. 부역때문에 농사일을 버리고 타지방에 나가 류리걸식하던 농민들은 하나둘 고향으로 돌아왔고 농민들이 안심하고 농사를 지었기에 라주에서는 농민들이 해마다 풍작의 기쁨을 안아왔으며 금성산기슭에는 언제나 글읽는 소리가 랑랑히 울렸다.     (3년간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구나. 이곳의 도학정치도 이젠 기반을 갖추었으니 이젠 고향으로 돌아가서 학문이나 연구해야 되겠다.)     라주지방을 한바퀴 돌아보고난 김성일은 흐뭇한 기분에 사로잡혀 조정에 사임서를 써올리고는 고향으로 돌아갈 차비를 하였다. 3년만에 고향으로 돌아간다지만 그에게는 가져갈 아무런 살림살이도 없었다. 항상 아끼고 사랑하는 책밖에는 가져갈것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학봉선생이 사임하고 관청을 떠난다는 말에 온 라주백성들은 서운한 생각을 금할수 없었다.           김성일이 관청을 나서자 배웅하러 나온 관원들과 백성들은 길 량옆에 줄느런히 늘어서서 눈물을 흘리면서 안타까와하였다. 눈물투성이가 되여가지고 손을 저으며 바래주는 백성들을 돌아보는 김성일도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코마루가 시큰해났다.  3년동안 고락을 같이하고 정을 나눈 순박한 이곳 백성들과 갈라지자니 섭섭한 감을 금할수가 없었다. 라주 백성들은 전관사또의 그림자가 금성산서쪽으로 사라질 때까지 오래오래 손을 저으며 바래주었다. 이 시기에 학봉선생은 또 많은 주옥같은 시편을 창작했는데 후에 금성록(金城录)이란 책에 수록되였다.  
58    조선조의 명신 학봉 김성일 10. 황해의 우수 댓글:  조회:1422  추천:0  2015-08-17
   10. 황해의 우수     고향에서 부친의 3년상을 마치고 조정의 명을 받아 선조 15(1582)년 8월,45세의 나이에 다시  서울로 올라온 학봉 김성일은 반년동안 의정부의 사간(종3품의 관직)직을 맡았다가 이듬해 3월에는 또 황해도 순무어사직을 맡고 서울을 떠나  북으로 올라오게 되였다.     학봉선생의 행차가 의정부를 떠날 때 3사의 다수관원들과 친구들은 의정부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나와서 열정적으로 바래주었다.               학봉선생을 바래주는 사람들은 부탁하는 말들도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정언직에 있는 송응형(宋应炯1539--1592)의 말이 심금을 울렸다. 김성일이 부친상을 마치고 조정에 돌아왔을 때 조정안의 파벌싸움은 예나 다름이 없었다. 당시 리조판서에 올랐던 률곡 리이선생은 파벌싸움의 폐단을 해결할 목적에서 조정에 
57    조선조의 명신 학봉김성일 9.두만강 굽이굽이 댓글:  조회:1462  추천:0  2015-08-16
  9. 두만강 굽이굽이   리씨조선이 건립되면서부터 압록강과 두만강은 명나라와 조선의 변계로 되였다. 다 같은 변경지대이지만  압록강을 변계로 하는 평안도일대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형편이지만 명나라의 세력이 잘 미치지 않은 두만강 이북지역에는 후금(后金)의 세력이  웅크리고있어서 변경일대에는 하루도 안정할 때가 없었다. 후금의 토호들은 개인군대를 가지고있었는데 시도때도 없이 두만강을 건너와서 조선백성들의 식량을 빼앗아가거나 소나 말, 돼지를 몰아갔고 예쁘장한 녀인들을 끌고갔다.   산이 많고 옥토가 적은데다 혹심한 부역때문에 설만 지나면 식량이 떨어지는 변강사람들에게 후금의 략탈은 설상에 가상이였다. 백성들의 원망이 잦아지고 조정에 상소문이 눈꽃같이 날아드니 조정에서는 장정을 뽑아서 두만강변을 수비하게 되였다. 그러나 고향에 부모처자를 두고 끌려온 장정들은 먹고입는 기본문제조차 해결할수 없게 되자 도망치기가 일쑤였다. 이렇게 되자 외적들은 침략이 더 빈번해졌고 백성들의 원성도 나날이 커졌다. 조정에서는 두만강변경의 수비정황을 검사하고 병졸들의 인심을 수습하기 위해  드문드문 순무사를 파견하였다.      선조 12년 9월, 조정에서는 김성일을 함경도순무어사로 임명하였다. 조정의 명을 받은 김성일은 수행인원 10여명을 거느리고 쌍두마차에 올라 북정길에 떠났다. 화려한 서울을 떠나 재령벌을 지나고 유서깊은 평양을 지나 북으로 북으로 올라가는 김성일의 마음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수려한 3천리강산은 계절의 혜택을 받아 울긋불긋 단풍단장을 하여 그림같이 아름다웠건만 골짜기에 쪼그리고 앉은 마을들은 초라하기가 비렁뱅이의 모양과 다름없었다. 조이삭낱가리, 벼낱가리, 강냉이무데기는 황금산을 이뤄야 할 가을이건만 곡식낱가리란 낱가리는 어린아이의 무덤만한데 그것마저 쭉정이가 태반이였다. 팔월추석이 다가오는데 명절맞이를 하는 기분은 찾아볼수 없었고 마을은 그 어디나 초상을 치르고난 상가집마냥 어수선했다. 간혹 길을 가다가 등짐을 짊어지고 산을 내려오는 늙은이들을 볼수 있었는데 등에 진것은 식량이 아니라 나무단이나 산열매였다. 일년내내 고생하고서도 입에 풀칠도 하기 어려운 농민들의 몰골을 보노라니 코마루가 찡해났다. 학봉은 어서 빨리 두만강연안에 가보려고 닫는 말에 채찍질을 하게 되였다.     바로 추석전날, 저녁무렵에 학봉네 일행은 함흥부에 이르렀다. 함흥부에서 추석술을 마시고난 학봉 김성일은 객사의 서재에서 책을 읽다가 한곳을 보니 가 걸려있었는데 지도의 아래켠에는 멋진 제사가 적혀있었다. 룡이 날고 봉황이 춤추는듯한 글씨에 눈길이 끌려 가까이 가보니 고려말년의 충신 포은(圃隐)정몽주(郑梦周1337--1392)가 친필로 쓴 제사였다. 나라의 번영을 위해 중국과 일본을 수차례 다녀오며 불후의 위훈을 세운 정몽주의 시를 읽어내려가는 김성일은 옛영웅들의 장한 뜻에 내심 깊이 감복했다. 그는 필을 날려 정몽주의 시에 운을 밟아 즉흥시 한수를 벽에다 써내려갔다.       추석날 밤 포은과 화답하여   추석날 밤 장검날 쓰다듬으며 내 길이길이 탄식하누나. 나라에 충성 다할 이 마음 이 뜻 그 어느때에 실현할소냐. 필을 날리는 내 함흥의 벽에다 만단심회 그려내노니 앞날 어느 뉘가 이 마음 알아 나의 이 시를 거두어줄가.   (中宵拂剑长太息   耿耿此心空有期 挥笔大书匡州壁   太史何人収我诗)   붓을 던지고난 김성일은  하고 길게 탄식하다가 번거로운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여 밖으로 나와 거닐면서 휘영청 밝은 달을 쳐다봤다. 거울같은 달을 보노라니 고향생각이 절로 났고 또 저 달을 바라보며 고향생각에 눈물을 흘릴 변강의 병졸들의 초췌한 얼굴들이 떠올랐다.  (명절을 지내면서 며칠간 쉬는게 옛법이지만 순무사의 중책을 짊어진 나는 여기서 오래 머물수 없구나. 래일은 떠나야지.)     한시 바삐 두만강연안으로 갈 생각이 간절한 김성일은 수행인원들에게 래일은 출발하니 일찍 쉬라고 이르고나서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김성일네 일행은 말에 올라 함주쪽으로 떠나갔다. 함주를 지나 몇십리를 가다가 앞을 내다보니 황초령(黄草岭)이 보였다.     황초령에 올라 절간에서 하루밤을 쉬고난 학봉일행은 진흥왕의 순수비(일명 척경비)앞에 가서 술을 부은 뒤 동북방향으로 말머리를 돌리였다. 부전령(赴战岭)의 지맥을 따라 풍산(丰山 ) 과 신흥(新兴)  두 군의 지경에 가까와지니 산세는 점점 험해졌다. 얼마 더 가지 않아서 높은 산이 앞을 막았다. 백설을 떠이고 구름우에 솟아있는 이 아아한 설산은 해발 2,164메터나 되는 옥련산(玉莲山 )이였다. 학봉일행은 산아래 자리잡은 옥련보(玉莲堡)라는 마을에 들려 하루밤을 보내였다.     학봉일행은 옥련보를 떠나서 심심산곡을 에돌면서 변강에 가까운 촌락들을 돌아보았는데  눈에 덮혀 곧 내려앉을것만 같은 초가집들을 들려보면 열집에 아홉집은 빈집이였다.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집들을 찾아가보면  환갑이 지난 늙은 량주가 살고있지 않으면  병석에 누워 신음하는 사람들이 있을뿐이였다.          학봉 김성일이 한 집에 들려 부엌에서 군불을 때고있는 허리굽은 백발의 할머니에게 물었다.           늙은이의 말을 듣고보니 정말 기가 막힌 일이였다. 학봉 김성일은 길주를 지나는 동안에 보고 들은 정황을 상세히 저어서 조정에 올려보내였다.     학봉일행이 경흥을 거쳐 두만강 연안에 이르렀을 때는 백설이 만천지한 엄동이였다. 강가에는 얼음이 얼었으나 강심에는 아직 푸른 물이 굽이쳐 흐르고있었다. 강가를 따라 북으로 올라가노라니 병영이 보였다. 김성일은 박차를 가하여  병영으로 달려갔다. 병영이란 다가가보니 감옥이나 별로 다름이 없었다. 하늘이 올려다보이는 천정에서는 눈가루가 날려내려왔고 네벽에는 성에가 하얗게 덮혀있었다. 짚을 깐 봉당에는  반주검이 된 환자들이 맥없이 신음하며 누워있었는데  염라전에 들어선듯 소름이 끼쳤다.  김성일은 주방에 들어가 솥뚜껑을 열어보았다. 솥안에서는 쉬큼한 나물냄새가 물씬 났다. 강냉이 가루를 조금 섞어서 나물죽을 끓여놓았는데  간이 들지 않아서 흡사 돼지죽과 같았다.  (병사들이 이런것을 먹고  무슨 일을 해낸단 말인가? 우선 그들에게 식량과 솜옷,신발을 해결해야겠다.)  병영을 돌아보고난 학봉선생은  병졸들이 일하는 곳으로 찾아가보았다. 다 떨어져 너덜거리는  겹옷을 껴입고 발가락이 삐여져나온  짚신을 신은  병졸들은 채찍을 든 감독의 감시밑에 돌을 까고있었다.      병졸들의 거동을 보니 고역에 끌려온 죄수나 다름없었다. 저 사람들은 무슨 죄를 지었길래 부모처자를 리별하고 먼먼 북변땅에 와서 이런 고생을 해야 하는가? 저 사람들이 내심으로 나라를 사랑하는 생각이 있겠는가? 학봉은 그들을 보기가 부끄러워났고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순무어사의 령이 내리자 병졸들은 감독의 눈치를 보면서 일손을 놓았다.     학봉은 병졸들을 불러 가까이 둘러앉힌 뒤 그들의 생활고를 자세히 물어보고나서 안위의 말을 남기고 일터를 떠났다.     관청에 돌아온 김성일은 배를 곯고 추위에 떨고있는 변방전사들에게 당장 의복,신발과 식량을 해결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조정에 올리는 장계를 썼다.    학봉선생이 경원, 온성, 남양, 무산 등 두만강 연안의 고을을 돌아보니 그 어느 고을도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이 태반이였다. 고역에 견디지 못한 병졸들은 목숨을 내걸고 도망을 쳤고 그 가족들도 대역(代役)이 두려워서 남쪽지방으로 도망쳤으며 한집식구가 솔가도주를 하게 되면 그 이웃집들이 련루를 당하여 병역에 나가야 했기에 도망가는 사람들이 사태를 이루고있었다.          학봉선생은 길에서 도망가는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을 설복하여 자기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두어달이 지났을 때 조정에서 보낸 식량과 솜옷이 도착하였다. 학봉선생은 식량과 솜옷을 나눌 때 불법군관들이 제 리속만 채우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하려고 각 병영을  돌아다니면서 병사들에게 솜옷을 손수 내여주고 식량도 골고루 나눠주었다. 그는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목숨을 이어가는 변강농민들에게도 약간의 식량을 해결해주었다.               사경에 처했다가 구제량을 받아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농민들은 학봉선생의 은덕에 감지덕지하면서 칭찬을 금할줄 몰랐다. 변방의 고역도 이전보다 훨씬 경해지고 식량과 의복까지 해결되고나니 도망가는 병졸도 없어졌고 백성들도 안정한 나날을 보내게 되였으며 심산속이나 타관으로 도망갔던 사람들도 이 소식을 듣고 제 마을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일흔고개를 넘은 부친님과 사랑하는 처자를 고향에 남겨두고 먼 북녘땅 두만강기슭의 맵짠 눈보라속에서 해를 바꾸는 학봉선생의 혈관속에는 오로지 애국애민의 뜨거운 피만 굽이치고있었다.     변경을 돌아보고 백성들을 안무하면서 경원, 온성 등 지방을 지나던 김성일은 고려때의 명신이며 장군인 윤관(尹瓘)이 동북변계에 침입해들어온 녀진침략자들을 정벌하고 쌓은 아홉개성(城)과 함길도관찰사(咸吉道观察使)로 되여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확정한 정치가 김종서(金宗瑞1390--1453)가 설치한 6진(六镇)의 유적을 알알아 돌아보고 몇번이나 영탄을 금치 못하였다.     (지난 시대의 영웅들은 천고에 길이 남을 위업을 이룩하였는데 그 후손들인 우리들은 어이하여 그들이 넘겨준 강토도 지켜내지 못하고 남들의 유린을 받게 되였는가? 
56    조선조의 명신 학봉 김성일 8.궁중의 호랑이 댓글:  조회:1325  추천:0  2015-08-16
8.        어느덧 선조 11(1570)년의 봄이 찾아왔다. 이국에 사절로 갔다오느라고 부친님과 자식들이 단란히 모여 한해 한번밖에 없는 설명절도 함께 쇠지 못한 학봉 김성일은 조정에 말미를 맡고 안동 고향집으로 내려갔다.                     김성일이 내앞마을에 돌아왔다는 반가운 소문은 고향마을은 물론이고 린근 마을이며 안동부근의 사람들속에 째빨리 퍼졌다. 부모님과 친척에게 인사도 올리기 바쁘게 소문을 듣고 댁을 찾아온 소시적 친구들과 손님들은 문턱이 닳을 지경이였다. 친구들과 손님들은 김성일에게 조정에서 벌어진 붕당싸움에 대해 묻는가 하면 학문에 대해서 묻기도 하였다.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서 지금 조야에 하급이 상급한테 뢰물 바치는 악풍이 생겨나서 관청에는 바른 기풍이 점점 사라지고 지방관원들도 뢰물 받기에 눈이 어두워서 법을 잘지키지 않으니 권세없고 가난한 백성들은 참으로 살아가기 힘들다는것을 김성일은 다시 한번 깊이 느꼈다.   비록 편벽한 산간마을이라고는 하지만 인재가 많이 나온 이 내앞마을에는 나라안의 소식이 빨리도 날아들어와 학봉선생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들도 이야기를 통해 알게 되였다.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고있는데도 조정에서는 감감 모르고있으니 이것이 어이 될 일인가? 서울에 돌아가면 조정의 가지가지 부정기풍을 기어코 바로잡고야말겠다 하고 학봉선생은 속다짐했다.      학봉선생이 낮에는 들에 나가 일군들의 농사일을 거들면서 농부들과 속심의 이야기를 나누고 밤이면 선비들과 학문을 담론하는데 어느새 봄철이 다 지나가고 여름철이 다가왔다.      어느날 조정에서 내린 조서를 가지고 선전관이 찾아왔다. 조정에서는 학봉선생에게 어서 서울에 올라와서 홍문관(弘文馆:3사의 하나로서 궁중의 경서, 사적, 문서를 관리하고 왕을 자문하는 관청)의 교리(홍문관의 정5품의 관리)를 맡으라는 교지를 내렸던것이였다.     조정의 명을 받은 학봉선생은 또다시 일흔고개를 내다보는 부친님과 사랑하는 처자식을 고향에 남겨놓고 급급히 혈혈단신으로 서울에 올라왔다.     학봉선생이 서울에 올라온지 며칠 되지 않은 어느날 선조왕은 경연을 베풀었다. 경연석상에서 선조왕은 책임진 학자의 강의를 다 듣고나더니 신하들을 돌아보고나서 뜻밖의 물음을 내놓았다.         선조왕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한 신하들은 저마다 임금의 눈치만 살피고있었는데 고향에 내려가서 보고 들은 일들에서 느낌이 많던 김성일은 남먼저 자기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선조왕은 학봉의 말에 짐짓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선조왕이 격분한 기색을 보이며 따지고 묻자 김성일은 난처하게 되였다. 즉석에 이름을 대자니 자신이 그렇게 싫어하는 붕당싸움에 말려들것 같고 이름을 대지 않으려니 주상을 속이고 조정을 헐뜯었다는 죄명을 덮어쓸것만 같았다. 아무리 명망이 높은 사람이라도 뢰물을 받아먹은 범죄는 용서할수 없는 일이 아닌가? 내가 그자들의 미움을 받더라도 조정의 기강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생각이 든 김성일은 큰 마음을 먹고 선조왕의 앞에서 고향에 갔을 떄 들은 말을 고스란히 옮겨놓았다.     >           선조왕이 윤두수를 훈계하고나자 김성일은 와서제조(瓦署提调:왕실에서 쓰는 기와, 벽돌을 관리하는 사람)가 왕실에 쓸 벽돌을 사사로이 팔아 제 배속을 불리운 사실도 적발했다. 그러자 와서제조도 그 자리에서 얼굴을 들지 못하고 윤두수와 같이 콩알같은 땀을 흘렸다.  이 일이 있고난 뒤 진도군수 리수는 옥에 갇히게 되였는데 이것을 이른바 
55    조선조의 명신 학봉 김성일 7.명나라를 다녀올 때 댓글:  조회:1393  추천:1  2015-08-15
7. 명나라를 다녀올 때              선조 10(1577)년 조정에서는 명나라에 
54    조선조의 명신 학봉 김성일 6.눈물로 적은 시 댓글:  조회:1439  추천:1  2015-08-14
   6. 눈물로 적은 시     선조 8년에 병조좌랑(兵曹左郎: 조선시대에 군사에 관한 일과 무관선발을 맡은    정6품의 벼슬)에 올랐다가 이듬해에 리조좌랑(吏曹左郎:리조에서 관리를 천거하거나    처분하는 권리를 가진 정6품의 벼슬))직을 맡은 학봉 김성일은 어느 하루도 한가한    날이 없었다. 나라의 부패한 정치를 개혁해보겠다는 장한 뜻을 지닌 그는 사랑하는    안해와 귀여운 자식,손군들을 고향인 안동 내앞마을에 남겨두고 홀로 서울에 올라와    휴식을 잊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해왔건만 조정에서 그가 해야 할 일이란    아무리 해도 끝이 없었다.     어느새 뻐꾸기 우는 봄날도 지나가고 뙈약볕이 퍼붓는 무더운 여름이 찾아왔다.    조정에서는 김성일과 몇몇 전도가 유망한 젊은 학자들에게 사가독서(赐假读书 )의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사가독서란  조선 시대 젊은 문신들이 임금의 명으로 직무을 쉬면서 글을 읽고 학문을 닦던 제도이다. 글을 읽던 곳을 독서당(讀書堂) 또는 호당(湖堂)으로 불렀기 때문에 독서당 제도 또는 호당 제도로 불렀다.      은파도 잔잔한 호수가로 수양버들이 실실이 드리워지고 만화방초 우거져 별유선   경(别有仙境)인가싶은 동호독서당(东湖读书堂)에서 마음의 번뇌를 풀며 고금의 경전   저작을 열심히 읽고있는 학봉 김성일은 시상이 떠오를 때면 종종 시도 지었다.   해뜨는 아침이나 달밝은 저녁이면 독서당에 모인 학자들은 음풍영월(吟风咏月)을    즐겼으나 학봉 김성일은 백성들의 비참한 생활고와 그들의 피타는 목소리를 그리는데    머리를 짰다.      서안(书案)을 마주하고 시상을 굴리던 그의 머리속에는 지난 2월에 고향을 다녀   올 때 보고들은 일련의 참담한 일들이 주마등같이 스쳐지나갔다.   설이 지난지 한달밖에 되지 않았건만 고향마을에는 식량이 떨어져서 말리운 푸성   귀나 시래기에 강냉이가루를 쳐서 끼니를 에우는 집들이 태반이였다. 일년내내 부역   에 끌려다니거나 논밭에 매달려 하루도 편히 쉬지 못하는 농민들의 손등은 악어등을    방불케 했다. 어른 아이 할것없이 누데기로 몸을 가리우고 짚신을 내놓고는 무엇이    신인지도 모르는 고향사람들...하늘이 무정한것도 아니련만 흉년에 흉년이 꼬리에 꼬   리를 무는것은 무엇때문일가? 일년내내 곱사등이 되여 논밭에서 고달프게 일하고도    남는것이란 빚밖에 없는 불행한 농민들, 행여나 딴곳은 이곳보다 살기가 좀 낫지 않   을가 하는 생각에서 괴나리짐을 이고지고 정든 사람, 정든 고향마을을 떠나 타향살이   를 떠나가는 농민들의 눈물겨운 하소연... 이런 비참한 사정을 구중궁궐안에 계시는    당저대왕은 알기나 하고 자신을 중국력사상 가장 현명한 군주로 첫 손꼽히는 요순임   금과 비겼단말인가?   오늘날의 비참한 사회현실을  시로 그려보려고 작심하고 머리를 짜 시상을 무르   익히던 김성일은 종이우에 큼직하게 
53    력사인물전기 학봉 김성일 5.<<3공론>>과 시호쟁론 댓글:  조회:1525  추천:0  2015-08-14
5.과    선조 6년 11월 5일 밤, 궁전안에 자리잡은 비현각(丕显阁 :세자가 업무를 보고 공부를 하던 곳)안에는 초불을 총총히 켜놓아 대낮같이 밝았다. 이날 밤은 선조왕이 규례대로 비현각에 와서 경서나 학문을 배우는 날이다. 선조왕은 대신들의 옹위를 받으며 비현각에 들어와 정좌에 앉아있고 조정의 명류들이 그뒤에 앉아있었다.  이날 밤 검토관【检讨官:경연청에서 강독, 론사(论思)등을 맡아보는 정6품의 벼슬] 을 맡은 김성일은 서전(书传 서경의 주해를 달아놓은 책)의 태갑편(太甲篇)을 강의하기로 되여있었다. 일개 신하로서 잠시나마 임금의 스승이 되여 임금에게 학문을 닦아주는 이 좋은 기회에 김성일은 선조왕에게 시책(时策)에 관한 진강(进讲: 임금앞에 강론함)을 올리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에는 중국 동한때의 현명한 재상인 진번(陈蕃 ?--168)이 제기한 
52    력사인물전기 학봉김성일 4.사간원의 웃음소리 댓글:  조회:1425  추천:0  2015-08-13
4.사간원의 웃음소리   단풍잎이 울긋불긋 꽃단장을 한 늦가을이 돌아왔다. 사간원의 정언(주:사간원의 정6품의 관리)직을 맡고 눈코뜰새없이 바삐 돌던 학봉은 해가 서산으로 넘어간지 이슥해서야 사간원을 나왔다. 누군가 뒤따라오면서 학봉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김성일이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니 사간원에 와서 새로 사간이란 벼슬을 맡은 김계(金癸)라는 상관이였다. 김성일은 싱글벙글 웃고있는 김계를 보고 읍을 하였다. 김계는 학봉을 쳐다보면서 입에 침이 마를새 없이 칭찬을 거듭했다. 학봉은 김계가 치근덕거리는것이 눈꼴이 시그러워서 핑게를 대고 그 자리를 떴다.  김개는 선조왕과 인척(姻戚)관계가 있기에 임금이 믿어주는 청반(清班)에 오른 사람이였다. 그는(外职 :지방관아의 벼슬)에 있을 때 임금과의 인척관계를 빙자하여 도처에서 행패를 부렸고 정직한 관리들을 헐뜯기가 일쑤였다. 그러다보니 조야는 다 김계에 대해 불만이 그득했지만 그의 세도에 눌려서 많은 신하들은  감히 경연에서 바른 말을 내놓지 못하였다.  온 나라 백성들이 맘속으로 저주하는 탐관을 조정의 정3품이나 되는 요직에 올려놓았으니 조정이 흐려지고 사단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날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였다. 사간원의 관리들은 겉과 속이 판판 다른 간신한테 언제 어디서 봉변을 당할지 모르겠기에 그와 가까이하기를 몹시 꺼렸다. 무슨 방도를 대서라도 그자를 사간원에서 몰아내야 되겠지만  자칫하면 선불을 걸었다간 도리여 제발등에 불이 떨어질가봐 두려워서 벙어리 랭가슴 앓듯하였다. ( 임금이 오정(误政)을 적게 하도록 하려면 이런 자는 반드시 외직으로 몰아내야겠다. 하루 늦으면 하루 재화가 더 있을게 아닌가? 제몸에 화가 떨어질가봐 두려워서 할말도 못한다면 이 작자는 점점 더 득세할것이 아닌가. 적당한 기회를 봐서 임금과 단독으로 만나 이 정황을 아뢰야겠다.) 성일은 임금과 조용히 만날 기회를 찾고있었다. 이때 사간원의 정언으로 일하는  김성일은 비록 벼슬은 높지 않지만 임금과 자주 만날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충분히 리용하려고 마음먹었다. 어느날 오후였다. 김성일은 선조왕이 오침을 마치고 산보하는것을 보고 왕이 거니는 방향으로 찾아갔다. 선조왕은 심심풀이나 할겸 말동무할 사람을 찾으려던중에 마침  김성일을 보고 반가와하면서 어서 오라고 손짓했다. 절호의 기회를 만났다고 생각한 김성일은 임금앞에 가서 공손히 절을 올리였다. 선조왕은 김성일더러 의자에 앉게 한 뒤 그와 함께 경서에 관한 이야기부터 사간원의 정황에 이르기까지 많은 말을 주고받았다. 기분이 좋아진 선조왕이 흔쾌히 응낙하자 김성일은 용기를 내여  속생각을 털어놓았다. 선조왕이 신뢰하는 눈치를 보이자 김성일은 김계가 저지른 부정행위를 보고들은대로 임금앞에 낱낱이  아뢰였다. 이튿날 조회때 선조왕은 김계를 외직으로 보내게 하는 조서를 내린 뒤 김성일의 강직한 품성을 치하하였다.   조회를 마치고 궁전을 나오는 동료들은 저마다 학봉선생을 칭찬하며 그에게 경의를 표시하였다. 이로하여 사간원에는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조회에 참석하여 그 장면을 목격한 동료 김응남(金应男: 1546--1598)은 깊이 감동된 나머지 글을 지어 학봉선생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 일이 있은 뒤부터 조정의 신하들은 학봉을 은근히 공경하면서 두려워하였고 조정의 풍기는 여느때보다 엄숙해졌다.  
51    력사인물전기 학봉 김성일 3.<<요순걸주론>> 댓글:  조회:1571  추천:0  2015-08-13
 3.     선조 4년, 그해 나이 34세에 이른 학봉 김성일은 시교(侍教)를 거쳐 봉교(奉教 예문관의 정7품 벼슬)로 승진했다. 비록 벼슬은 높지 않지만 봉교란 임금과 자주 접촉할수 있는 벼슬이기에 조정에 자기의 생각을  내놓기 비교적 편리한 직무였다. 학봉은 이 유리한 조건을 리용하여 정치개혁의 큰뜻을 펼쳐보려고 마음먹고 밤마다 경서(经书)를 읽고 선왕실록(先王实录) 등 서적을 읽기에 여념이 없었다. 어느날 학봉은 를 읽고나서 안타까와 주먹을 불끈 쥐고 자기의 가슴을 마구 두드렸다. 이렇게 억울한 일이 세상에 또 어디 있단 말인가?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가 아무런 죄도 없이 3년만에 궁궐에서 쫓겨나서 강원도 녕월(宁越)이라는 심심산골에 류배되여 갖은 고생을 다하다가 비참하게 살해된 로산군(鲁山君)이며 선왕(先王)의 유촉(遗嘱)을 받고 페위된 어린 임금의 복위(复位 물러났던 임금이나 후비가 다시 그 자리에 오름)를 위해 결사적으로 싸우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사륙신(死六臣)들인 리개(李塏, 1417년 ~ 1456), 성삼문(成三问1418--1456), 박팽년(朴彭年1417--1456), 하위지(河纬地 1387--1456), 류성원(柳誠源, ?~ 1456년, 유응부(俞应孚---1456)와 생륙신(生六臣)들인 원호(元昊?), 조려(赵旅), 성담수(成聃壽), 김시습(金时习1435--1493), 리맹전(李孟專, 1392년 ~ 1480년), 남효온( 南孝溫, 1454년~1492년)등 충신들의 거룩한 형상과 로산군의 시체를 건드리면 삼족(三族)을 멸한다는 세조왕의 어명을 어기면서도 정의를 지켜 녕월관에 들어가서 로산군의 시체를 수습하여 지게에 지고 엄동설한에 심산속에 들어가 친히 시신을 안장한 충신 엄흥도(嚴興道, ?~?)의 장한 기개에 그는 탄복을 금하지 못하였으며 임금자리를 탐내여 친조카를 왕위에서 몰아내고 나라의 충신들을 무참히 학살한 수양대군[후날의 세조(世祖),조선 제7대왕 재위1455--1468]의 잔인무도한 행위에 치를 떨었다.  (나라의 앞길을 바로 열려면 억울한 안건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근 백년이란 시간을 끌어오던 이 억울한 안건을 우리 대에서는 반드시 해결하고야말겠다.)  학봉 김성일은 벼루에 먹을 진하게 갈고나서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문을 쓰기 시작했다. 예리한 안광과 강직한 품성을 지닌 김성일은 상소문에서 당시 왕들의 덕을 높이 찬양하고 정치적 페단을 날카롭게 지적한 동시에 세조왕과 로산군의 공과(功过)에 대하여 객관적으로 평가하였다. 그는 로산군의 왕위를 복위시키고 녕월에 있는 로산군(단종)의 묘소를 수리하고 승격시켜 왕릉으로 만들것과 사륙신 및 생륙신들에게 관직을 회복시키고 단종복위투쟁하던 당시에 화를 입었던 종친들도 복위시키고 그 자손들도 서용(죄가 있어 벼슬을 박탈했던 사람을 다시 임용함).할것을 강렬히 요구하였다. 이튿날 아침 문무백관들이 조회에 모였다. 룡상에 높이 앉은 선조왕은 문무백관들을 돌아보고나서 물었다.  김성일은 룡상앞으로 다가가 절을 올린 뒤 부복하고 아뢰였다.     선조왕의 명을 내리자 김성일은 품안에서 간직했던 상소문을 꺼내서 국왕에게  바치였다.   선조왕이 상소문을 펼치였다. 상소문의 앞머리에는 이란 글줄이 씌여있었다. 상소문을 읽어내려가는 선조왕의 가슴은 세차게 뛰였고 상소문을 든 손은 가늘게 떨리였다. 서예와 화공에 남다른 흥미와 조예가 있고 독서를 무척 즐기는 나젊은 선조왕은 를 읽고나서 왕실내부의 골육상쟁(骨肉相争)에 대해 한탄한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는 내심적으로 로산군과 사륙신, 생륙신을 동정하고 세조의 잔인무도한 처사에 분개하였으나 왕실의 치욕을 차마 입밖에 낼수 없어 이날까지 침묵을 지키고있었던것였였다. 그런데 오늘 일개 봉교에 지나지 않는 미관말직의 신하가 올린 상소문을 읽어보니 자신이 진작 이 일을 처리하지 못한것이 못내 후회되였던것이다.    선조왕의 명을 받고 선전관이 상소문을 소리내여 읽자 조회에 참석한 문무백관들은 너무도 놀라 숨도 바로 쉬지 못하였다. 사람들의 눈길은 선조왕과 학봉선생에게로 번갈아 쏠리였다.     학봉의 상소문을 듣고 내심으로 경탄을 금치 못하던 3사(三司 주: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등 언론3사를 가리킴)의 대다수 관원들은 선조왕의 온화한 표정을 보고 너도나도 앞다투어 발언하였다.        근 백년이란 세월을 내려오면서 항간에서만 공론이 자자하던 가시돋힌 문제를 오늘 벼슬길에 오른지 2년밖에 안되는 나젊은 김성일이 목에 칼이 날아오를 위험을 무릅쓰고 제출하였으니 고개를 숙이고 아무런 말도 못하던 문무백관들은 자책에 낯을 붉히였다.   선조왕은 조회를 마치고 침소로 돌아갔다. 그뒤 선조왕은 단종복위때 화를 입은 사람들의 후손들을 서용하고 왕족에서 밀려나 서민으로 되였던 로산군에게도 다시 군이란 봉작을 회복시켰다.  김성일의 이 상소문은 임진왜란이 후에 류실되였는데 200년이 지난 어느날 그의 7세손 상호보(相虎甫)가 우연히 옛날의 책상자속에서 초고를 찾아내였는데  학봉전집의 속집을 간행할 때 수록하였다. 간단명료하면서도 설득력이 강한 이 소문(疏文)은 당시 많은 문인들이 앞다투어 외우기에 이르렀다.  당시 실학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镛1762--1801)선생과 교분이 아주 깊던 천주교학자 금대(锦带) 리가환(李家焕1742--1801)은 학봉선생의 상소문을 읽어보고나서 깊이 감동된 나머지 글을 써서 학봉선생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해 9월, 학봉 김성일은 사간원(司谏院)의 정언(正言)으로 승진하였다. 그리하여 학봉은 선조왕이 베푸는 경연(经筵)에 참석할수 있게 되였다. 경연이란 임금이 학문을 닦기 위해 신하들중에서 학식과 덕망이 높은 사람을 궁전안에 불러들여 경적(经籍)과 사서(史书) 등을 강론하는 일이다. 어느날, 선조왕은 경연석상에서 신하들을 둘러보고나더니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뚱딴지같은 물음을 내놓았다. 이제 겨우 애티를 벗어나 스무살에 잡힌 선조왕은 자신이 집정한 이후로 퇴계 리황, 률곡 리이, 백인걸 등 많은 인재를 등용했고 또 억울하게 죽은 사림(士林)들을 신원 (伸冤 )하고 유학(儒学)을 장려하는 등 방면에서 공이 있는데다가 일부 신하들이 잘보이려고 그를 떠받들자 마음이 구름같이 둥둥 떠서 자신을 마치 성현(圣贤)이나 되는듯이 생각하고있는판이였다.  룡상에 앉아서 얼굴에 미소를 띄우고  이 말을 하는 선조왕의 목소리는 매우 가벼웠으나 임금의 신하로서 그 임금앞에서 간단한 그 물음에 적절한 대답을 내놓기란 실로 천근짐을 지고 일어나기보다 어려운 일이였다. 노한 임금의 말 한마디에 자칫하면 삼정승, 륙판서의 목숨도 귀신모르게 사라질판인데 어느 누가 감히 임금을 앞에 두고 감히 그 임금을 고야저야(高也低也)하며  평판(评判)을 할수 있단말인가? 경연석에 들어와 앉아있는 신하들은 마치 바늘방석에 앉은것만 같아 임금과 눈길이 마주칠가봐 벌벌 떨면서 저도 모르게 목을 자라목같이 움추렸다.   무거운 침묵속에 시간은 소리없이 흘러갔다.    자신을 력대에 둘도없이 어진 임금으로 착각하고있는 오만한 선조왕은 기대에 어린 눈길로 신하들의 표정을 두루 쓸어보며 집요하게 신하들의 대답을 기다렸다.   임금의 물음에 대답을 피한다는것은 신하로서 임금에 대한 불경불충(不敬不忠)이요 혀 한번 잘못 놀려 임금의 부아통을 터뜨려놓으면 성스러운 경연장소는 피비린 형장으로 변할판이라 신하들은 실로 진퇴유곡(进退维谷)에 빠졌다. 이때 사간원에서 정언으로 일하는  정이주(郑以周1530--1583)가 선참으로 침묵을 깨뜨리고 맘에 추호도 없는 말 한마디를 발라마추었다. 금상(今上 주: 현재 왕위에 있는 왕을 가리킴)의 업적이 요순(尧舜 중국 고대의 가장 현명한 두 임금)과 비교할수 있다고? 정말 소가 웃다가 꾸레미 터질 노릇이군. 아무리 입에 발린 소리를 해도 분수가 있어야지... 좌중에 있는 신하들은 저마다 이런 생각을 굴렸으나 임금앞에서 차마 그런 내색은 할 수 없어서 침묵만 지키고있었다.  그러나 신하들의 대답을 안타까이 기다리던 선조왕은 정이주의 발라맞춘 말 한마디에서 안위를 얻었던지 얼굴에서 보일락말락한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선조왕은 흐뭇한 마음으로 경연장에 모인 신하들을 돌아보았다.  (나라의 신하로 된 도리에서 입은 가로 째졌어도 말은 바로 해야지. 임금의 일시적 비위만 맞추겠다고 입에 꿀발린 말만 한다면 나라의 정사는 어떻게 되겠는가? 이 나라 백성들의 리익을 위해서도 그렇고 교만한 임금을 일깨워주기 위해서도 속심에 있는 말은 숨김없이 털어놓아야 되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이 든 학봉 김성일은 더는 좌석에 앉아있을수 없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임금이 앉아있는 룡상앞에 다가가서 부복하고 정중히 아뢰였다. (무엇이라구?  내가 걸주와 같이 될수 있다구?) 학봉의 말을 듣고난 선조왕은 자기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수 없었다. 자고로 요순은 성군(圣君)의 대명사요 걸주는 폭군의 전형이거늘 성일이가 나에게 무슨 원한이 있기에 감히  이런 불칙한 언사를 내놓는단말인가? 선조왕은 노염이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으나 임금의 체통을 지키느라 들뛰는 가슴을 가까스로 억제하고 웃는 낯을 지어보이며 학봉을 내려다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선조왕의 속내를 손금보듯 환히 알고있는 학봉 김성일은 이 시각에 왕의 비위에 티끌만치도 어긋나게 말한다면 어떤 불벼락이 쏟아질지 모르는바 아니지만 타고난 천성(天性)은 자기의 생각을 감추지 못하게 하였다. (어진 인재들을 널리 등용하고 정치개혁에서 눈부신 성취를  이룩한 나를 력사에 둘도없는 폭군인 걸주에 비유하면서 임금을 헐뜯다니.) 온 천하를 손아귀에 넣고 쥐락펴락하는 지고무상(至高无上)의 권력을 가진 임금으로서 일개 미관말직(微官末职)에 있는 신하한테 치욕을 당했다는 생각이 든 선조왕은 노염이 상투끝까지 치밀어올랐지만 경연석상에서의 임금의 도량(度量)을 보이느라 치솟는 분노를 간신히 억눌렀다.다. 그는 태연자약한 자태를 나타내려고 무등 애를 썼으나 조그마한 얼굴은 멍이 든듯 퍼렇게 상기되였고 엉덩이는 마치 바늘방석에 앉은것만 같아 연신 자세를 고치고있었다. 임금의 극히 비정상적인 기색을 살펴본 신하들은 당장에 궁전에서 8급지진이 일어날것만 같아 온 몸을 부르르 떨며 숨을 죽이고있었다.  참으루 기침 한번 깇어도 무슨 벼락이 떨어질지 모를 판이였다. 그러나 하루강아지범 무서운줄 모른다는 속담이 있듯 학봉 김성일은 아무런 기미도 못차린듯 태연한 자세로 부복하고있었다. 이때 30대의 젊은 신하가 침묵을 깨뜨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선조왕이 쳐다보니 그는 지난해에 서장관(书状官)이 되여 명나라를 다녀와서 리조정랑(吏曹正郎:리조에서 정5품의 벼슬)으로 일하는 서애(西崖) 류성룡(柳成龙 1552-1607)이였다.  류성룡은 일찍 퇴계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김성일보다 3년 먼저 벼슬길에 오른 사람인데 경위(经纬)가 바르고 강직한 품성을 지녔기에 김성일과 뜻이 맞았고 조정에서도 위망이 있는 신하였다. 그는 선조왕의 노염을 풀어주어 김성일이 당면한 화를 모면시키려고 마음먹던것이다.  류성룡은 선조왕이 앉은 룡상앞으로 한걸음 다가가서 선조왕에게 절을 올리고나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서애 류성룡        자신이 더없이 믿고 사랑하는 유망한 신하의 설득력있는 이 말을 듣고 자신의 옹졸함을 새삼스레 깨달은 선조왕의 얼굴에는 회심의 노을빛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만월(满月)이 된 활의 시위같이 팽팽했던 경연장의 분위기는 다시 처음과 같이 풀려졌다. 안도의 숨을 내쉬는 신하들은 수건을 꺼내어 저마다 이마에 송골송골 돋아난 땀방울을 훔치였다. 노염을 가까스로 푼 선조왕은 이렇게 말하고 경연장을 떠나 침소로 돌아갔다. 이윽고 주연(酒宴)이 베풀어졌다. 이 푸짐한 주안상은 실로 학봉 김성일의 전화위복을 축하하는 주연이라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경연에 참석했다가 주연에 맞이한 신하들은 김성일의 담략과 류성룡의 지혜에 탄복해마지않았다. 사람들은 성일의 행운을 축하하면서 밤이 깊도록 권커니 작거니 하면서 즐기다가 흩어졌다.
50    력사인물 학봉김성일2. 댓글:  조회:1403  추천:0  2015-08-12
 2.심중의 목소리       나젊은 선조왕을 국왕으로 추대한 조정의 개혁파 대신들은 한동안 페지되였던 현량과(贤良科)를 회복하고 전국 각지에 숨어있는 인재들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나라에서 증광문과(增广文科) 시험을 친다는 방(榜)을 본 학봉 김성일은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다.  9월달에 그는 문과시험에 급제한 뒤 벼슬길에 올랐다. 조정의 명에 의해 처음 승문원(承文院  주:조선시대에 외교문서를 관할하는 관청)에서 권지부정자(权知副正字)를 맡았던 그는 이듬해에는 정자(正字 주:승문원에서 주로 와교문서의 교정을 검토하는 직무)로 승진하였고 선조 3년에는 예문관검열(艺文馆检阅)겸 춘추관기사관(春秋馆记事官)을 담임했다.  춘추관이란 나라의 대사를 기록하고 력사재료를 보관하는 부처인바 춘추관의 기사관들은 날마다 궁전안팎에서 벌어지는 나라의 대사를 적어서 력사자료로 남기는것이 그들의 직책이였다.  학봉 김성일은 기사관이란 비록 실권이 보잘것없는 벼슬이지만 나라의 한시기의 력사를 적는만큼 무엇보다 중요한 직책임을 깊이 느꼈다. 그는 궁전에서 벌어진 크고작은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적어놓고 밤이면 그것을 일일이 정리하느라 하루도 한가한 날이 없었다.          어느날, 학봉의 침소에 마실왔던 한 동료가 학봉의 어깨를 두드리며 물었다.              김성일이 동료가 하는  말을 듣고보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성일은 엄숙하게 동료를 꾸짖었다.    이튿날 성일은 사관들이 적은 기록들을 돌아봤는데 기록들은 정말로 말이 아니였다.      X월X일 날이 흐리다.      오늘 조회가 없었다.         X월 X일 날이 맑다.오늘은 별일 없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력사기록이란 말인가? 삼척동자의 습작일기보다도 간단한 기록을 춘추관에 보관한다면 그게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하루 세끼 밥을 배불리 먹고 장기를 둔다 바둑을 둔다 하면서 온종닐 놀기만 하는 기생충들을 조정에서 쫓아내지 않고 국록을 주고있으니 나라 일이 어찌 되뎄는가? 하나둘도 아니고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해해년년 이렇게 해나간다면 신성한 춘추관은 쓰레기통과 다를 게 무엇인가? 조정의 대신들도 이런 정황을 모를리 없겠는데 왜 다 수수방관하고있는것일가? 나라의 력사의 진면모를 후손들에게 옳게 알려주려면 반드시 사관제도를 개혁해야 한다. 김성일은 사관제도의 개혁에 관한 여섯가지 생각을 머리속으로 정리하여 글로 적어 스승이신 퇴계선생에게 물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일흔고개에 오른 퇴계선생은 신상에 여러가지 병환을 지녔기에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 례안에 돌아가 휴양하고있었다. 학봉은 초불을 밝혀놓고 퇴계선생에게 올리는 글을 썼다.        
49    조선조의 명신 학봉김성일 댓글:  조회:1749  추천:2  2015-08-11
조선력사인물전기      조선조의 명신 ---학봉 김 성일             성일은 남달리 정직한분이였다.리황에게서 배운 그는 어릴적부터 격앙강개하였으며 기개가 과인하였다.조정에 나서서 무엄한 새대부들을 탄핵하여 떨게 했고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례의를 지켜 왜놈들이 무릎을 꿇고 우러르게 하였다.                               에서   차 례  1.뜻은 창천에    2.심중의 목소리    3.    4.사간원의 웃음소리    5.과 쟁론    6.눈물로 적은 시    7.명나라를 다녀올 때    8.궁중의 호랑이    9.두만강 굽이굽이    10.황해의 우수   11.금성산의 봄빛   12.홍문관에서의 밝은 빛   13.파란많은 사행길   14.당쟁의 소용돌이속에서   15.붓을 칼로 바꾸고   16.촉석루의 삼장사   17.진주성의 첫승리   18.진주성의 대승첩   19.충혼은 천추에       1.뜻은 창천에        락동강의 상류를 이루는 한가닥 내물은 령남의 산간도시 안동을 지나 서쪽으로 줄달음치고있다. 이곳 명소 아기산우에 올라 동쪽을 내려다보면 은띠같은 시내의 남쪽켠에 근 2백세대가 사는 마을이 한눈에 안겨온다. 게딱지같은 초가집들이 움추리고있는속에 드문드문 고래등같은 기와집들이 조상의 음덕을 지랑하며 목을 빼들고 서있다. 이곳이 바로 안동부 림하면 천전동(安东府临河面川前洞)인데 사람들은 이곳을 내앞마을이라 부른다.      조선조 제11대왕 중종(中宗) 33(1538)년 음력 섣달 초엿새날, 내앞마을의 의성김씨(义城金氏)가문에는 희사가 생겼다. 안동일대에서 명문거족으로 손꼽히는 김진(金琎)댁에서 넷째아들을 보았던것이다. 김진댁의 식구들은 옥동자를 본것을 자랑하느라고 대문에 푸른 비단띠를 걸고 새빨간 고추를 대롱대롱 달아놓았다.       김진이 내실에 들어가보니 안해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면서 부군을 반겨 맞았다. 안해의 곁에서 쌔근쌔근 단잠을 자는 아들의 달덩이같은 얼굴을 본 김진은 기쁨을 금할수 없어 안해를 보고 싱긋 웃었다.      
48    탑곁에 서니 사진을 찍고싶다 댓글:  조회:1831  추천:0  2015-06-20
탑곁에 서니 사진을 찍고싶다(외4수)           박병대 한층계 두층계 숨가쁘게 산등성 오르니 천년묵은 고탑이 하늘을 찌른다. 뜬 구름과  가슴 털고 세상사 말하는 탑곁에 서니 문득 사진을 찍고싶다.   무상한 세월이 강물처럼 흘러흘러 수많은 인걸들 거품같이 사라졌건만 천둥 울고 벼락치고 폭풍 덮쳐도 드팀없이 버티고선 장한 저 기상   '국태민안,풍조우순" 길이 바라는 억조창생의 한결같은 념원만을 골수에 녹여 바위뿌리 내렸거늘 강산이 바낀다고 초심이 흔들리랴?   백년도 어려운 쥐꼬리 인생인데 리속에 눈이 멀어 아웅다웅하고 헐뜯고 할퀴고 물고뜯는 야성들 고탑앞에 와보라,꼬락서니 돌아보라   세월앞에 떳떳한 탑곁에 섰노라니 가냘픈 이 한 몸 새삼스레 느껴진다 내노라 광기쓰는 어리석은 자들이야 길가에 나딩구는 돌멩이가 아닌가?   탑곁에 서니 사진을 찍고싶다. 부지깽이 요 몰골 잊을가 두려워. 이 한생 마감하는 그날그때까지  한포기 쑥마냥 깨끗히 살고싶네.
47    "천치"아저씨 댓글:  조회:2137  추천:1  2015-06-12
소설          ‘천치’  아저씨’                              (철령)              박 병대   시 민종위의 위탁을 받고 시조선족지를 쓰던 정수는 K현의 당안실에가서 해방전쟁과 항미원조시기의 영웅인물의 자료를 수집하던 중 항미원조때 정찰영웅의 명부에서 이란 이름을 발견하고 슬그머니 놀랐다.    (이 분은  내 고향마을의 천아저씨와 동성이잖은가?   설사 그들이 친척간이 아니더라도 같은 희성이니 서로 아는 사이일지도 몰라.)      전투영웅의 행방이 궁금한 정수는 천아저씨를 만나보려고  정거리뻐스역으로 걸음을 다그쳤다. 느닷없는 봄눈이 사뿐사뿐 날리며 두볼을 간지럽힌다.   “어이, 너 정수 아니야? “     귀에 익은 목소리에 흠칫 놀라 고개를  돌린 정수는 고향마을에서   9년제 학교를 다닌 학교 동창생 영구를 발견하고 반가워 그의 손을 부등켜 쥐였다.      “야-  이게 정말 얼마만이야? 그동안 친구들 다  잘지내지?”     “그래그래, 너도 부고를 받고오는길이겠구나?”      “아니, 부고라니? 어디 뉘댁에서  초상이 났는데?”     “난 니가 부고를 받고온줄 알았구나. 저기 현길이 아버지 알지?”     “그래그래 알구말구, 우리생산대의 로사양원 천아저씨말이지?”     “글쿠말구, 바로 그 ‘천치’아저씨가 엊저녁에 세상떴단다. 너 문상 안갈래? 동창들도 더러 모일건데...”     “그래? 아차, 한발 늦었구나. 난 그분을 뵈러 가는길인데 이걸 어쩐담? 생전에 만나뵈지 못하고 , 이젠 그 어른 마지막길이라도 바래줘야겠구나.”      ‘천치’아저씨에 대한  추억은 30여년전으로 일사천리 내달렸다. 50고개를 바라보는   중등키에 등이 약간 굽은 순박한 농부의 모습이 눈앞에 훤하다. 워낙 입에 자물통을 채웠는지 아는 사람을 만나면 얼굴에 해빛을 담고 고개를 끄덕이는것이 인사전부인 조용한 어른이였다.    일년삼백륙십일을 생산대 대부에서 자면서 마구간을 청소하고  새벽일찍 일어나서 작두질하여 여물을 끓이고 밤에 말여물을 주는 등 손 쉴새 없는 분이다. 낮에는  파손된 가래장부, 제초기등  연장을 찾아 손질하고 대부마당을 지푸라기 하나없이  쓸어놓지만  년말때  로력공수로 상로동력의 평균을 평해주면 과분하다며 한사코 중상정도면 넉넉하다고 우기신다. 남들은 공수를 단 몇푼이라도 더받으려고 눈에 불을 켜는데 입에 들어온 떡도 뱉으려 하니  ‘제 몫도 찾아먹을줄 모르는 천치’란 별명이 본명을 삼켜버린것도 어느 정도 리해가 간다.     천아저씨에 대한 허물은 그뿐만이 아니였다.양자강도 건넜고 압록강도 건넜다는데 한평생 농사나 짓는것도 그렇고 신수가 훤한 총각이 과부장가를 들었다는건 더욱 체면이 깎이는 일이였다.       시외뻐스를 타고 약 반시간을 달리니 정든 고향마을이 한눈에 안겨왔다. 국도와 이어진 포장도로라  차체의 흔들림감 느끼지 못했다. 마을도 몰라보게 변하였다. 정수가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할 때만해도  금세 쓰러질것같던 올망졸망한 초가집들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에 고래등같은 기와집들이 키높이를 자랑하고있었다.  아직 해가 서산마루에 이르기도 전이건만 마을은  야밤같은 정적이 깃들어있었다.      “ 환한 대낮인데 왜 마을이  쥐죽은듯 고요하노?”      “동네는 커도 사람 사는 집이 겨우 몇채길래? 젊은이들하고 애들이 없고  로약자  여남명밖에 안사는데  우짤수 있나? ” 정수가 영구의 뒤를 따라 현길이네 대문안에 들어서니 60세 안팎의 남자들 대여섯이 관곽에 씌울 종이꽃 장식할 수수대틀을 만들고있었다. 정수는  동창이며 아는 사람들과 인사나누기가 바쁘게 빈소에 들어가  령전에 술을 붓고 절을 올리고나서  상주한테  “갑자기 어르신 상사를 당해 뭐라 할말이 없구나.” 하고 위로의 말마디를 건늬고는  밖에 나왔다. 초상집치고는 참으로 한산하기 그지 없었다.      “ 조객이 겨우 이 몇뿐이야?”  정수의 물음에 영구가 대답했다.      “’천치’아저씨댁이니 이만치이라도 모였지 딴집이문  어림도 없당깨, 동네가 텅텅 비였으니 이제 우리 죽을땐   초상치러줄 사람이 있을란지 몰따. 참, 한심하지.”    정수는 저녁상을 물리고 나자  본마을의 늙은 조객들을 집에 돌려보낸 뒤  동창들과 함께 상주를 동반해 빈소를 지키였다.  영정사진에 있는 고인의  모습을 바라보노라니  미안지심이 자꾸만 가슴을 괴롭혔다.        정수가가 9학년을 졸업하고 생산로동에 참가하던 그해에 마침 4인방이 무너지고 나라에서 혼란을 바로잡아 정상을 회복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버드나무가지에  파랗게 움트는 이듬해 봄날이였다. 정수가  쓰기 좋은 가래장부를  골리려고 남먼저 대부에 갔을 때였다.     “자네 오늘 참 일찍 왔네. 일이 무척 고되잖나? 몸이 고달파도  짬짬이 공불 하게. 조만간  제힘으로 대학갈 날이 올거니깨 남먼저 준빌 해보게나.”     정수는 ‘천치’아저씨의 천방야담같은 말에 반신반의했으나 그를  아끼고 사랑하시는 아저씨가 무척 고마왔다. 그는 “행여나”에 기대를 걸고 짬짬이 교과서를 뒤지며  복습을 다그쳤더니 아니나다를가 바로 그해 겨울에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되였다. 남들이 다 놀 때 공부를 좀 한 덕분에 정수는 자기도 믿기 어려운  성적으로 꿈속에 그리던  대학에 발을 디딜수 있었다. 남이야 뭐라하든 ‘천치’아저씨의 신세를 단단히 진 정수는 그분의 생전에 고맙다는 인사말도 변변히 올리지 못한것이 못내 후회되였다.     이튿날 발인식을 마치고 빈의관에서 보내온 차에 령구를 싣고 우리 일행은 화장터로 갔다. 빈의관에는  크고작은 고별청이 몇곳 있었으나 조객이 별로 없는 현길네는 유체고별식도 없이 조용히 차례를 기다려 화장을 마치였다. 로(炉)에서 나온 유골을 벽돌장으로 부수어 골회를 만들던 정수는 유골의 가슴뼈부위에서 작은 금속덩이를 발견하였다.     “그거 탄알 아니야?’ 둘러선 친구들이 놀라자 현길이가 탄식조로 말했다.      “아버진 몸에  탄알이 박혔어도 평생 내색하지 않아서 나도 몰랐어. .”.     그들은 강가에 와서 고별제를 지낸 뒤 골회를 강물에 뿌리고나서 뻐스를 타고 상가로 돌아왔다.       빈의관에 갔던 상주가 돌아오자 상가에서는 초우제를 지내였다. 제사상을 간단히 차리고 고인의 영정앞에 상주와 상제들이 술을 붓고 절을 올렸다. 초우제를 끝낼 무렵 팔순이 넘은 현길이의 로모가  엉금엉금 기다싶이 다가와서 고인의 영정앞에 술을 붓고 절을 올리더니 콩알만한 눈물을 뚝뚝 떨구면서 넉두리를 시작하였다. “여보여보, 당신은 한평생 고생만 하시다가 이제 대우를 받으며 몇해동안 좀 편케 살라카니 복이 지지리도 없어 날 두고 그만 영영  가셨나요? 부댈 나올 때  나라에서 공작분배를 했는데도 당신은 머라카나 “먹물 먹은게 없어서  안된다”며 뿌리치고  땅파먹을락꼬 여길 내려오셨지.., 고운 처녀들이 천지백가린데도 당신은 당신을 구하다 희생된 전우의 안해를 지켜주겠다고 우기면서 나이 많고 못난 내한테 과부장가까지 왔었지,흑흑...  유공자들을 우대정책이 내려왔을때도 당신은  라고 하면서 한사코 손사랠치셨지... . 누가 봐도 당신은 성씨만 천씬게 아이라 진짜 “천치”였어요. 하기사 당신은 그렇게 사는게 오히려 맘이 제일 편타고 말했지만 흑흑...당신은 글케 아끼고 고히 건사하던 이 가방을 도라가면 나라에  바치라고 유언했는데 도대체 그안에 무슨 보배가 들어있길래 글쿠 감촸는지 한번 봐야겠어요 예?’    현길이의 로모는 색바랜 군용가방을 열고 그안에 든 물건을 방바닥에 우루루 쏟았다. 황록색 군복이 나오고 군복의 가슴팍에 달린 수많은 훈장과 메달이 번쩍이였다. 복원증서와 전투영웅증서에서 영웅의 이름석자를 발견한 정수는 화들짝 놀라 눈이 화등잔이 되였다.  “아아, 당신이 내가 그렇게도  만나보고싶었던 정찰영웅이셨군요.우리는 당신의 지척에 있어돘어도 아무것도  모르고지냈어요.”       정수는 그분의 생전에 그분의 래력은 커녕 명함조차 몰랐던 자신이 꼬집어뜯고싶도록 미웠다. 전투영웅의 지극히 평범하나 더없이 값진 생의 궤적을 우러르는 그는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코마루가 시큰하여  량볼을 타고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마구 훔치였다.                                          2015..4                                                            
46    "실종자"가족의 일기 댓글:  조회:1335  추천:2  2014-12-17
   단편소설                          " 실 종 자"의 가족일기                                             박병대         사전에서 실종자란 단어의 의미를 찾아보면 종적을 알수없게 된 사람을 가리키는데 그들은 대개 전쟁터나 참사에서 사망이 확인되지 않은 사람들이다. 한차례의 대형 참사에서 소중한 목숨을 건져낸것은 가히 천행이라 할수 있고 비록 목숨은 못건졌지만 시신이라도 찾아 안장할수 있는것은 그래도 불행중 다행이라 할수있고 끝끝내 실종자명부에서  이름을 지우지 못한 사람은 불행중 불행이라 할수있다. 실종자가족에 속하는 경호네는 이로하여 수십년동안 웃지도 울지도 못할 고통에 시달려야했다. 아래에 덕구령감네 조손3대가 쓴  일기 세편을 소개한다.                                          1. 덕구령감의 일기      부대에서 제대한 우리 원길이는 장가든지 사흘밖에 안되였지만 전쟁의 불길이 압록강에 미치자 지원군에 용약 가입하여 항미원조전선에 뛰여들었다. 나는  원길이가  참전한 후  통일된 조선, 해방된 고향에 돌아갈 그날을 그리며 날마다 신문에 실린 에 눈길을 모았다.      중국인민지원군과 조선인민군은 협력작전하여 전쟁초반에는 승승장구를 거듭하여 불과 몇달만에  삼팔선일대까지 밀고나갔지만 적군의 필사적 반격에 부딪쳐 진군속도가 점차 느려지더니 급기야 진공과 후퇴가 수없이 반복하였다.     3년간의 피비린 전쟁에서 지칠대로  지친 적아쌍방은 급기야  휴전협정을 체결하였다.  잔혹한 전쟁은 삼천리강산을 페허로 만들고 무수한 사상자를 낳았다.  뒤이어 전선에 나갔던 군인들이 대거 귀국하여 혈육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들속에는 맨손으로 범을 때려잡을 씩씩한 군인도 많았지만 손발을 잃어버린  영예군인도 부지기수였다.      나는 우리 원길이가 가슴에 훈장을  번쩍이며 무사귀환하길 눈빠지게 기다렸다. 한달이 지나고 두달이 지나자  참전용사들을 맞이하지 못한 대부분 군인가속들은 그리던 혈육 대신  렬사증을 받았지만 나한테는 그 흔한 렬사증마저 찾아오지 않았다.     내아들 원길이는 도대체 어떻게 되였나? 나는 바늘방석에 앉은 것만 같아  더는 집에서 한가히 소식오기를  기다릴순 없었다. 정부기관을 찾아가보고 아들과 한부대에 있었다는  전우들의 주소도 수소문해 찾아가봤지만 어느누구한테서도 신통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남몰래 눈물을 짜는 새아기를 보면 가슴은 칼로 에이는듯 아팠다.      피말리는 몇해가 지난 어느날,  나는 정부로부터 원길이가 전쟁터에서 실종되였다는 통지를 받았다.     내아들이 전쟁판에서 실종되다니? 그건  말도 안돼. 산사태에 매몰되여 시신을 찾지 못했거나 특대홍수에 휩쓸려내려갔거나 하면 몰라도 이국땅에서 치르는 필사적 전투에서 참전군인이 실종된다는게 말이 되나? 만약  외진곳에서 혼자 전투임무를 수행하다가  희생되였다면 누구도 신원을 모를게 아닌가? 마음속엔 도리가 굴뚝같았지만 나는 어느 누구와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시비를  따질수 없는 처지라 가슴이 터지고 피가 머리우로 마구 치솟았다...   "새아가, 나는 니가 우리집에서 아까운 청춘을  썩이는걸 차마 볼수가 없구나. 늦었지만 이제라도 좋은 신랑을 만나 잘살거라. 정말 미안하다...." 나는   며느리한테 눈물어린 내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고개를 돌리고 그애를 친정에 돌려보냈다...                                              2. 둘째아들 원식이의 일기    세월은 흐르고 흘러 1950년대가 저물더니 1960년대에 들어섰다.다재다난에 이은 전례없이 희박한 정치공기가 사람들의 심신을 괴롭혔다. 편견과 비뚤어진 상상과 억측은 우리 "실종자"가족의 마음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였다. 우리 초가집 문가에 걸렸던 "광영가속"이란 나무패쪽도 사라진지 오래였다.  예전에는 설명절이나 8.1건군절이면 생산대대에서 우리집에 위문을 왔지만 실종자가족으로 전락한 뒤에는 간부들의 그림자도 얼씬하지 않았다.     (항미원조에 압장서 나간 우리 원길이가 그래 전쟁판에서 도망이라도 쳤단말인가? 부대에서 우리 원길이의 행방을 모른다고 자식을 나라에 바친 내게 무슨 불찰이라도 있단말인가?) 아버지는 실로 입이 열개라도 억울함을 토로할곳이 없었다.     "자식을 참군시켜 잃어버린게 무신 죄가 되는겨? "아버진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무등 애썼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로인들 모임에서  좌상대접받던 아버지의 말씀은  무게를 잃어 회의때 아버지가 입을 열면 어떤 젊은이들은  어디 개가 짖나 하고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외기러기신세로 된 아버지는  화김에 두문불출하고 날마다 집에서  강술만 마시였다. 치솟는 울분을 토로할 길 없는 그의 유일한 동반자는 술뿐이였다. 점차 술중독에 빠진 아버지는 손을 사시나무같이 떨었고 술을 마시지 않으면 정신이 흐릿해지는   페인으로 변하였다.    아버지는 당신이 이 세상에  머물 날이 며칠 없음을  짐작하고 나를 곁에 불러 눈물 머금은 유언을 남기셨다.      "원식아, 나는 평생 나랄 위해 모든걸 다 바쳤으이깨  저 하늘을 봐도  한점의 부끄럼도 없단다.. 글치만 니 형 누명을 못뱃기고 죽는는 한이구나. 니가 그것만 뱃개주문 난 구천 에서도 훨훨 춤을 추마. 하늘이 무심찮으문 밝혀질날이 있을게다만 후유! 그날이 은제나 올지...."    나는 아버지의 한맺힌 유언을 실현하는것이 하늘의 별따긴듯 싶어   하염없는 눈물만 흘리였다.                                            3. 손자 경호의 일기      " 4인방"이 무너지고 개혁개방의 봄바람이 중화대지에 불어왔다. 한때 적국이던 고국 친지들과의 서신왕래가 허용되고 "손에 손잡고..." 노래전후로 고국행 길이 트였다.  아버지는 남먼저 고향에 가서 친척들을 만나보고 "행여나"에 실오리같은 희망을 걸고 이르는 곳마다 큰아버지의 행방을 탐문했으나 어느 누구도  한결같이 고개만 가로저었다. 그러니 큰아버진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어느 심산속의 무주고혼이 된게  틀림없었다.  (그까짓 손바닥만한 한국땅인데 마음먹고 빗질하면사  못찾아낼가? ) 하지만  선산에 성묘가셨던 아버지는 수림이 하늘을 가리운 마을뒤산에서조차 동서남북을 가리지 못하였다. 아버지는 어디 있을지도 모를 묘비도 봉분도 없을 큰아버지의 유해를 찾는다는건 바다속에서 바늘찾기보다 어렵구나 하며  땅이 꺼지게 후유- 한숨만 쉬셨다.      다시 2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팔순을 넘긴 아버지도 대를 이은 유언을 남기고   하늘나라에  등록하셨다. 이젠 나의 두어깨에 가문의 사명이 얹혀졌다. 몇년동안은 무장부와 민정국을  뻔질나게 드나들었지만 관원들은  반세기도 넘는  옛일이니  자기네는 속수무책이라고 한목소리같이 대답하였다. 대를 이은 유언을 받들기란 세월이 흐를수록 더 막막하였다. 나는  큰아버지의 행방을 찾는 일은 인력으로 될수 없는 부질없는 짓이라 생각하고 이를 악물고 단념하였다. 그런데 창상지변이란 말이 있듯 세상사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일이였다.       어느날 나는 시 무장부의 령도가 우리집에 60여년전에 받아야할 큰아버지의 렬사증을 가져왔다. 렬사증을 손수 받으셔야 하실  할아버지,할머니가 안계시니 자격도 없는 내가 대신  받아야했다. 나는 렬사증을 들고 허둥지둥 할아버지,할머니와 부모님의  유상을 모신 "침실"로 달려갔다. 나는 유상앞에 향불을 피워놓고 샘물같이 콸콸 쏟아지는 눈물을 아랑곳 않고 목메인 소리로 고하였다.     "할아버지,아버지, 큰아버지의 렬사증이 왔어요. 흑흑..."  아,아,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선 구천에서 나의  목소리를 듣고나 계시는지?     "도대체 어인 일인가요?" 그렇게도 그렇게도 애차게 그리던 큰아버지가 60년이란 세월의 강을 건너 한장의 렬사증으로 되여 가족의 품에 왔다는게 꿈만 같았다.     "사실은 이렇게 된것이오" 무장부의 령도는 큰아버지의 행방을 찾은 경과를 알려주었다.      얼마전 우리나라정부에서는  한국 어디에  묻혀있는  지원군렬사들의 유해를  봉환하겠다는 한국정부의 통지를 받았는데  묘지에 묻힌 사람의 명부에 기존렬사명단밖의 이름이 몇몇 들어있었단다.  그들이 누구일가? 유관부문에서는 당시 그곳에서 렬사가 많이 나온 련의 군인명부를 찾아보았는데 그중 원길이란 이름이 들어있었고 또 희생된 련장의 유물인 수첩에서 원길이와 다른  전사 둘을 당일새벽에 비밀리에  정찰보냈다는  기록이 있었다. 그러니 큰아버지와 수행전사들은 정찰도중 뜻밖에 나타난 적들과의 조우끝에 전우들과 조금 떨어진 골짜기에서  희생였으나 그 상황을 소속 련의 생존자들과 영부에서 감쪽같이 몰랐다는것이였다...   이제 며칠뒤면 사진으로만 본 큰아버지의 유해를 맞을날이 다가온다. 큰아버지는 "실종자"란 루명을 반세기를 훨씬 넘긴 오늘에야 끝내 벗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너무도 참혹했다.      아직 우리 큰아버지처럼 이국의 심심산골에 외롭게 버려진 "실종자"들은 얼마나 있을가? 그 혈육들은 이 기나긴 악몽의 세월을  어떻게 보냈을가? 나는 시대가 변한 오늘날,  이역의 원혼으로 해매는  영령들의 모든 무덤에 훈풍이 불기를 애타게 기다린다. 그리고 그날은 반드시 찾아오리라 믿어 마지않는다.                                                                                
45    공부고장의 모친상 댓글:  조회:2179  추천:2  2014-04-11
단편소설      공부고장의 모친상                                 박      병       대          시골소학교에서 정년퇴직하고 마을이 사라져 시내에 이사온 장선생은 상가집의 일을 잘돌봐준다는 소문이 나서  현성안의 아는 집,  모르는 집의  초상집에 자주  불려다녔다.          저녁상을 방금 물리고 TV앞에 앉아 드라마를 보던 장선생은  현 민정국 공부고장의 모친이 방금 사망했으니 급히 도와달라는 기별을 받았다. 그는 비록 공부고장과 일면지교도 없었으나 상사일을 도와달라는데 그것이 자기의 책임이라 생각하고 급히 사망자의 시신이 놓여있다는 양로원으로 달려왔다. 상주가 아직 부음을 알리지 못한 탓인지 시신이 놓인 침실안에는 본집식구외에 타인은 하나도 없었다. 갑자기 당한 일이라 어쩔줄 몰라 안절부절이던 공부고장은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본듯 장선생의 손을 덥석 잡았다.         "나는 정부기관에서 공작하다보니  조선족장례법엔 깜깜입네다.. 어머니가 생전에 조선족법대로 장례를 쳐달라고했으니  따르지 않고 어쩌겠시오?  모든걸 장선생께  일임하니   수고 좀 해주시구래. 내 그  은공은 요 머리 파뿌리될때까지 안잊겠시다."     장선생은 우선 렴습부터 해야겠으니  흰천 20자와 명정을 만드는데 쓸   붉은천 몇자를 사오라고 분부하였다.          먼저 고인에게 수의를 갈아입혀야 했다. 남의 초상은 강건너 불보듯하던  공부고장이라 고인의 속옷을 어떻게 벗기고 또 수의를 어떻게 입힐지 엄두도 못내고 장선생의 눈치만 살피였다.        "렴습은 내 혼자 할수 없는 일이니 신체가 식기전에 다같이 손써서 신체를 씻고 속옷을 갈아입힙시다.."       시체를 코앞에 둔 상주와 상제들은 두려움에 등골이 선뜻하고 몸에 소름이 끼쳐 손이 사시나무같이 떨렸으나 어디 기댈데가  없으니  울며 겨자먹기로 장선생의 분부를 따를수밖에  없었다.  반시간이상 진땀을 쏟아서야 간신이 속옷을 벗기고나서 수의를 입히고 렴습도  끝내였다.   띠로 시체를 묶을 때 장선생이 시범하며 묶는 방법을 차근차근 배워줬지만 남의 말을 귀등으로 들은 상제들은 외로 틀 띠를 바로 틀기도 하고 또  동작이 너무 서툴어서  매고 돌아서면 금세 풀리는 띠가 다수라 장선생은 혀를 닳게하기 싫어서 혼자 하나하나 고쳐매였다. 양로원의 침실을 급히 비워야하기에  그들은 렴습을 대충 마치자  빈의관에 전화를 걸어 시신을  그곳으로  옮겨갔다. 상주는 어머니가 생전에 고급호텔에 한번도 출입하지 못했으니 이제라도 한번쯤 호강시키겠다면서 시신을 호화령안실에 모셨는데 료금이  이 자그마한 현성의  최고급호텔도 감히 명함장을  못내밀 어마어마한 돈이였다.        령안실에서 집에 돌아온 상주는 장선생이 시키는대로 고인이 생전에 입던 옷을 아파트창문밖에 걸어놓고 발상한 뒤 "빈소"를 차리는 동시에 전화로 친지들에게 부고를 전하였다. 공부고장은  평소 한족친구들과는 잘어울리나 동족들과는 물에 기름돌듯하던 위인이라  친인척 몇 외에  조선족조객은 별로 없었고 민정국의 간부들과 한족친구들이  위주였다. 어느새 아파트담장에는 "렴로태태 천고(廉老太太千古)"라고 쓴 화환이 십여개나 줄지어 서서 어깨를 으쓱이고있었다.         비록 시신은 집에 두지 않았지만 종이관곽을 사다놓고 "빈소"를 차렸으니 명정을 써서 걸어야겠다고 생각한 장선생이 상주에게 물었다.        "명정을 써야겠는데 고인의 성씨와 본관을 좀알려주시오."       "명정이라는건  뭔대요?"      "우리풍속에 고인의 신분을 밝히는 표직이라고 할가, 예로부터 명정은 붉은 천에 붓으로 본관 등을 써서 관우에 덮고 매장하지요. 지금은 화장법을 실시하지만 우리민족은 고유의 장례문화를 지키느라 아직까지 명정을 쓰고있지요. 그런데 본관을 알아야  명정을 쓰지 않겠소.."    "본관이란 또 뭔가요?"    "어느 성씨의 조상이 처음 살던 고장 이름이지요."        "엄마 성은 렴간데 본관따윈 나도 잘모르겠는걸요.가만있자, 옛날 외할배때 환인산골에서 살았다던데 아마 환인렴씰거예요. 그따위 사소한 일은 선생이 알아서 처리하오."       (참으로 소가 웃다 꾸레미터질 일이로군. 일개 기관의 간부라는 자가 상례에 대한상식을 몰라도 몰리도 너무 모르니 이런 무지막지한자와 무엇을 의논한담?  나이 쉰고개를 바라보도록  본관이 뭔지 모르고  또 그걸 부끄러워할줄조차 모르니  낯가죽이 두껍다고 해야 할지 무지막지하다고 해야할지?  염라국의 경비가 허술하니   망자의 조상을 쥐나 개나 바꿔놓고 아웅해도 된다는건가? 까짓거 될대로 되라.) 하고 생각한 장선생은 큰붓에 먹물을  듬뿍 찍어 라고 써놓았다. 망자의 성이 렴씨이고 본관은 한국의 한 지방이름을 아무거나 써놨는데  렴씨성은 워낙 희성이라 조객중에  가타부타할 사람이  없을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빈소도 꾸리고 상도 차렸으니 향을 태우고 령전에 술을 붓고  절을 올릴 차례였다. 장선생은 술잔을 들고 상주더러 잔을 채우게 한 뒤 술잔에 연기를 씌워  지방을 대체한  유상앞에 놓고나서 상주더러 큰절을 올리라고 귀띰하였다. 남의 제사따위는 먼발치서 곁눈질도 안하던 공부고장은  어쩔줄 몰라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급기야 엉거주춤 엎디여 엉덩이를 쳐들고  이마방아를 세번 찧었고 왕부부장의 처제라는 안상주는  자기네 풍속대로 한다면서  허리만 세번  굽석이였다.      장선생은 상복을 마련하지 않은 상주와 상제들에게  흰띠를 째서 띠를 만들어 허리에 두르게했는데 상주는 그게 몹시 거치장스러운지 자꾸 벗어버렸다. 가까운 친척이 오면 상주는 "아이고 아이고"하며 곡을 해야지만  어인 영문인지 곡성이란 보청기를 껴도 들릴가말가할 지경이였다. .       담배연기가 자욱한  대청에는 조객들을 위한 주안상이 차려졌고 그옆에는 소위 밤에 "령구"를 지킨다는 조객들의 지루함을 덜어주기 위한 마작상도 마련되였다.  상주는 반드시 빈소를 떠나지 말고 조객들의 인사를 받아야한다고  장선생이 귀에 장알이 박히도록 일렀건만 마작의 홀림에 녹아난 상주의 눈길은 자꾸 마작판으로 도망가군하였다.     (고인이 저런 아들을 낳고도 미역국을 끓여먹었겠지?) 장선생은  자식이 하나도 아니고 몇이나 되건만 자식들을 위해 몸의 기름을 따 짜고나서 늙고 병드니 배구공마냥 이리저리치여다니다가 결국응 양로원에서 림종했는데도 슬픔은 커녕 한시름 덜었다고 생각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화가 치밀어 견딜수 없었다.     장선생은 상주가 민족의 상례에는 삼척동자도 못미칠 백치인걸 보고  밥이 되든 죽이 되든 모르쇠를 놓을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타민족들앞에서 조선족의 위상에 먹칠하는 험한 꼴을 보일 순 없었고 또 우리민속의 풍속만은 목에 숨이 붙어있을 때까지 지키려는게 신조인지라 상주가  락태한 고양이상을 해도  "잔소리"를  계속했다.      "아무리 고달파도 오늘밤은  견디시오.  어머님께 효도할 마지막 기회가 아닌가요? "     상주는 장선생의 충고에 못이겨 푸주간으로 끌려가는 늙다리소같이 빈소곁에 잠시 왔다가 어느새 자리를 떠 동료조객들과 한담하는데 열을 올리는게 참으로 꼴불견이였다.      이튿날은 발인하는 날이다. 상가에서는 아침일찍 발인식을 지내고 빈 관곽을 차에 실은 뒤 고인이 평소에 사용하던 물품을 보자기에 싸서 령구차에 실었다. 고인이 영영 집을 떠날때는 으례 상주들의 곡성이 진동하겠지만 이집에서는 록음기에서 울리는 애도곡외에  유달리 조용한 운구행렬이 서서히 길을 나섰다.     령안실에서 시체를 입관하고나니 어느새 8인이 메는 가마가 대기하고있었다. 상주는 어머니를  가마태워 하늘나라로 보냈으니 이만하면 아들이 어머니에게 효도한 셈이라며 어깨를 으쓱이였다.      시체를 화장하기전에 유체고별식도 진행하였다.  추모사를 읽는 사람은 민정국의  한 부고장이였다.. 고인에 대해서 티끌만큼도 아는것이 없는 그는  남의 추모사에 이름만 버꿔 목에 피대를 돋우고 열독하였다. 실속없는 미사려구로 고인을 칭송하고나서 슬픔도 모르는 불효상주와 상제들에게 슬픔을 자제하라고 말하는 꼴이 참으로 가관이였다. 고별식이 끝날무렵 상주는 참석자들에게 한족식대로 뷔페권 한장씩 내주면서  화장이 끝나면 지정식당에 가서 요기하라고 말했다.      골회를 강물에 뿌리고나서 집에 돌아오기전에 장선생은 상주더러 이틀후에 강가에 와서 삼우제를 치르고 저녁에는  이번 상사때 수고가 많은 조객들을 빠짐없이 모셔다 한끼 대접하는것이 조선족풍속이라고 알려주었다.     이틀뒤 강가에 와서 가족끼리 "삼우제"를 지낸 공부과장은 저녁에 시내의 이름있는 술집에서 초대연을 성대히 벌이였다. 연회석에는 유체고별식때 참석했던 민정국의 간부들이며 친인척 외에  몇몇 전날 보이지 않던 새 얼굴들이 나타났다. 낯이잘익은 토마토같이 상기된 공부고장은 웃음을 낯에 발라 연신 굽신거리며 그들에게 술을 권하였다. .이상하게도 이번 상사를 책임지고 이틀밤낮을 로심초사한 장선생의 모습은 연회장 어디에도 찾아볼수 없었다.                                                                    2013년 10월         
44    열여섯글자 댓글:  조회:2180  추천:1  2014-02-04
열여섯 글자 누가 이 땅에 문맹이 많다 했나?  내 알기엔 일자무식 하나도 없다. 필이 뭔지 몰라도  이름석자 못써도 열여섯 글자는 모르는 이 없구나.   열보다 작은 아홉개 수자 동, 서, 남, 북, 중 외에 만, 발 두글자 종이에 적혔으면 읽지 못해도 주사위에 새겨진 건 눈감고도 안다   열여섯 한자에 작대기, 마귀거울 머리 빈 사람들의 넋을 뽑는가 "성" 쌓고 허무는 고역에 시달려도 세월 먹는 재미에 히히 웃는다     노벨상 수상자 뉘 아들이냐 이보다 장한 "발명" 어디 있느냐? 무료에 지친 마음 달래는 "오락" "마약도 저리가라!" 인이 배겼네   안해가 쓰러졌다 기별이 온들 일어서기 아쉬해 우물거리게 하니 "요물조박" 들락날락 추파만 없어도 열손가락  그다지 간지러울가?   고약한 열여섯자 퍼뜨린 질병 편작도 고개젓고 뒤걸음치네 곪아가는 저 령혼 치유제는 없을가? 피타게 웨쳐도 메아리만 통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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