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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의 명신 학봉 김성일 7.명나라를 다녀올 때
2015년 08월 15일 08시 04분  조회:1377  추천:1  작성자: 옛날옛적
서정시방 :
7. 명나라를 다녀올 때
            
선조 10(1577)년 조정에서는 명나라에 <<사은 겸 종계변무주청사(谢恩兼宗系辨诬
 
奏请使)를 파견하게 되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명나라에서 보내온 백과전서(百科全书)
 
식의 저작인 <<대명회전(大明会典)〉〉과 <<대명일통지(大明一统志)〉〉가 있었는데 
 
권위성적인 이 두 책에서는 조선왕조의 건립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가 적혀있었다. 
 
<<대명회전>>에는 리성계를 고려말 때의 간신이자 권신(权臣:세도를 쓰는 신하)
 
인 리임인(李仁任)과 한집안사람으로 적어놓고 리성계가 고려왕을 살해하고 정권을
 
 찬탈한것으로 기록되여있었고 <<대명일통지>>에서는 고려왕이 혼미하여 리성계가 
 
백성들의 추대를 받아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왕조를 세운것으로 적혀있었다. 
 
<<대명회전>>에 적힌 유관내용은 리씨왕조의 통치에 검은 그림자를 던져놓았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이전에도 몇차례나 <<변무주청사>>를 명나라에 파견하여 명나라
 
에서 <<대명회전>>에 적힌  조선건국에 관한 유관 내용을 수개할것을 요구하였으나 
 
명나라에서는 오랜 시간이 지났으나 <<대명회전>>에서 조선국의 창건에 관한 내용을
 
 수정해주지 않았었다. 조선왕조의 통치를 공고히 하기위해서는 <<대명회전>>의 수개
 
가 극히 필요하기에 이번에도 주청사를 파견한것이다.
 
이해 나이 40세에 이른 학봉 김성일은 서장관[(书状官:외국에 보내는 사신을 따
 
라  보내는 림시 벼슬인 기록관으로서 정부사보다는 직위가 낮지만 행대(行台)를 겸
 
하고있는 직무)]을 맡고 정사(正使) 윤두수(尹斗寿 1533--1601)와 질정관(侄正官
 
) 최립(崔立 1539--1612을 따라 명나라로 떠나게 되였다. 
 
 강직하고 청렴하기로 소문난 김성일이 이번에 서장관에 행대를 겸하고 명나라로
 
 가게 되였다는 말이 퍼지자 궁전안에는 의론이 분분하였다.
 
     <<이번에 김성일이 명나라에 서장관으로 가게 되였으니 수행일군들은 먹을알이 
 
없게 됐군 그려.>>
 
     <<중국말을 좀 할줄 안다고 거들먹거리던 통역들이 그만 줄똥을 싸게 되곘군.>>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할 때마다 밀무역을 하여 횡재를 보던 역관들을 아니꼽게 
 
보아오던 신하들은 이번에 김성일이 행대어사를 겸하고 명나라로 간다는 말을 듣
 
고 맘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와 반면에 역관들은 된서리를 맞은 풀이 되여 저
 
희들끼리 모이면 한숨과 푸념질이 일쑤였다.
 
     <<조정에서는 신하들중에 어쩌면 그렇게 까다로운 사람을 행대어사로 파견하는
 
지 몰라. 우리의 이번 행차는 헛수고야.>>
 
     <<아무데서나 그런 소리는 줴치지 말라구. 조정에서 알면 역관질하는 밥통도 떨
 
어질지 모르니까.>>
 
     <<이번에는 빈손으로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오더라도 공연히 일을 저질러 서장
 
관한테 죄를 짓지 말자구. 돈벌이하는거야 다음에도 기회가 얼마든지 있으니까.>>
 
서울을 떠난 역관들은 학봉 김성일의 눈이 무서워서 평양에서 옥하관(玉河关)에
 
 이르는 동안 짐을 일일이 조사하면서 밀무역하는것을 단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압록강을 건넌 뒤 유서깊은 봉황산을 지나고 드넓은 료동벌에 들어선 학봉 김성
 
일은 이국의 풍토인정에 대해 느낌과 감회가 실로 많았다. 학문을 즐기는 그는 료동에서 정학서원(正學書院)을 방문하여 명나라의 선비들과 학문하는 목적을 놓고 토론하면서 서로의 의견을 나누었다. 
 산해관에 들어서서 웅위로운 만리장성을 바라보나서 다시 화북평야를 꿰질러 나
 
간 대운하(大运河)를 굽어보노라니 가슴이 더없이 후련하고 시상이 끝없이 나래쳤다.
 
 격정에 넘친 그는 수시로 필을 날려 즉흥시를 지었는데 그때 지은 시들은  후에 <<
 
조천록(朝天录)〉〉이란 문집에 수록되였다.
 
 명나라 수도 북경에 이르러 만력(万历)황제를 만나본 주청사일행은 여러날의 우
 
여곡절끝에 조정에서 맡겨준 <<대명회전>>의 조선건국부분의 유관 내용을 명나라에
 
서 수개해주겠다는 허락을 받고 귀국길에 올랐다. 
 
김성일의 감독으로 하여 이번에 주청사를 따라온 수행인원들과 통역들은 암거래
 
를 하지 못한바람에 목돈을 쥘 기회를 잃어버리고 모두 빈손으로 조선에 돌아왔다.
 
사신행차가 평양을 지나고 해주를 지나 서울과 멀지 않은 파주땅에 이르렀다.
 
   (률곡선생의 고향에 이르렀구나. 지금 그분께서 고향집에 계신다면 얼마나 좋을
 
가.)
   행차가 파주에서 하루 묵게 되자 학봉 김성일은 수하사람을 시켜서 률곡 리이선생
 
께서 지금 댁에 계시는가를 알아보게 하였다.

 률곡 리이
률곡선생께서 마침 집에 돌아와계신다는것을 알게 된 김성일은 다급한 마음으로 
 
찾아가 밤나무 우거진 률곡선생저택의 대문을 두드렸다. 활달한 성격과 강직한 품성 
 
그리고 학문과 정치견해에서 뜻이 맞은 친구가 자기의 저택을 방문하러 왔다는것을
 
 안 률곡 리이는 너무도 반가와 신을 끌며 집안에서 뛰쳐나왔다.
 
저녁상을 마주하고 별후의 정황을 이야기하던 그들은 서재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이야기가 끝이 없었다.
 
나라의 앞날과 도탄에서 허덕이는 백성들을 끝없이 우려하는 두 학자는 동서분당
 
(东西分党)이 되여 옥신각신하는 조정의 험악한 사태에 깊은 우려를 표시하였다.
 
     <<그동안 조정안의 붕당싸움은 좀 식어졌소?>>
 
     <<한번 붙은 불이 그리 쉽게 꺼지겠소. 후-->>
 
     몇달동안 외국에 가있느라 조정의 정황을 몰라 궁금해난 학봉이 이렇게 묻자 률
 
곡 리이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퇴계, 남명의 문인으로서 모두 도량이 너무 좁은 사람들이요.>>
 
     학봉은 이번 붕당싸움을 일으킨 심의겸(沈义兼1535--1587)과 김효원(金孝元
 
1532--1590)을 나무랐다.
     심의겸은 명종비 인순왕후(仁顺王后)의 동생이지만 한때 그의 외삼촌 리량(李
 
梁)이 사화를 일으키려 하자 외삼촌을 탄핵하고 사람들을 보호한 공이 있었기에 사림
 
들간에서 명망이 높았다. 그는 김효원이 일찌기 명종때의 권신인 윤원형의 집에서 기
 
숙한 일이 있는것을 알고 김효원이 정계에 진출하여 리조정랑으로 발탁되자 권신에게 
각별히 공정하고 신중한 태도를 취해야겠구.) 
 
 률곡선생의  댁을 나와 귀로에 오른 김성일의 두 어깨는  연덩이를 짊어진듯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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