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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의 명신 학봉김성일
2015년 08월 11일 12시 33분  조회:1717  추천:2  작성자: 옛날옛적
서정시방 :
조선력사인물전기
 
   조선조의 명신 ---학봉 김
성일
        <철령 박병대>
 
 성일은 남달리 정직한분이였다.리황에게서 배운 그는 어릴적부터 격앙강개하였으며 기개가 과인하였다.조정에 나서서 무엄한 새대부들을 탄핵하여 떨게 했고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례의를 지켜 왜놈들이 무릎을 꿇고 우러르게 하였다.
 
                            <<선조수정실록>>에서
 
차 례
 1.뜻은 창천에
 
 2.심중의 목소리
 
 3.<<요순걸주론>>
 
 4.사간원의 웃음소리
 
 5.<<3공론>>과 <<시호>>쟁론
 
 6.눈물로 적은 시
 
 7.명나라를 다녀올 때
 
 8.궁중의 호랑이
 
 9.두만강 굽이굽이
 
 10.황해의 우수
 
11.금성산의 봄빛
 
12.홍문관에서의 밝은 빛
 
13.파란많은 사행길
 
14.당쟁의 소용돌이속에서
 
15.붓을 칼로 바꾸고
 
16.촉석루의 삼장사
 
17.진주성의 첫승리
 
18.진주성의 대승첩
 
19.충혼은 천추에
 
    1.뜻은 창천에
 
     락동강의 상류를 이루는 한가닥 내물은 령남의 산간도시 안동을 지나 서쪽으로 줄달음치고있다. 이곳 명소 아기산우에 올라 동쪽을 내려다보면 은띠같은 시내의 남쪽켠에 근 2백세대가 사는 마을이 한눈에 안겨온다. 게딱지같은 초가집들이 움추리고있는속에 드문드문 고래등같은 기와집들이 조상의 음덕을 지랑하며 목을 빼들고 서있다. 이곳이 바로 안동부 림하면 천전동(安东府临河面川前洞)인데 사람들은 이곳을 내앞마을이라 부른다.
     조선조 제11대왕 중종(中宗) 33(1538)년 음력 섣달 초엿새날, 내앞마을의 의성김씨(义城金氏)가문에는 희사가 생겼다. 안동일대에서 명문거족으로 손꼽히는 김진(金琎)댁에서 넷째아들을 보았던것이다. 김진댁의 식구들은 옥동자를 본것을 자랑하느라고 대문에 푸른 비단띠를 걸고 새빨간 고추를 대롱대롱 달아놓았다. 
     김진이 내실에 들어가보니 안해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면서 부군을 반겨 맞았다. 안해의 곁에서 쌔근쌔근 단잠을 자는 아들의 달덩이같은 얼굴을 본 김진은 기쁨을 금할수 없어 안해를 보고 싱긋 웃었다.
     < <가군께서는 이 애의 이름을 지어놓으셨는지요/..
     안해의 연연한 목소리를 듣고 김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대장부로 일편단심 나라에 충성하여 가문을 빛내라고 내 이 애의 관명을 성일(诚一)이라 하고 학문이 깊은 선비로 되라고 자(字)는 사순(士纯)이라 지었는데 부인 생각은 어떠하오?>>
    <<첩의 생각에도 그렇게 지은것이 참으로 훌륭하군요.>>
    김진은 흐뭇한 기분으로 포대기속에서 달게 자는 옥동자의 얼굴을 보고 또 보았다. 얼굴이 말쑥하고 오관이 단정한 이 갓난애는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더 귀염상스럽고 총명해보였다.
     나라 위해 큰 일을 해보겠다는 장한 뜻을 지니고 성균관(成均馆: 당시 나라에서 인재를 배양하는 최고의 학부)에서 학업에 몰두하던 김진은 조정에서의 부패한 통치에 눈꼴이 시그러워 그만 붓을 던지고 고향 안동으로 내려와서 농사일에 종사했던것이였다. 벼슬살이 길을 버리고 산간벽지에 묻혀사는 그는 자신이 이룩하지 못한 뜻을 자식들의 대에 기대하였었다.
성일이가 생글생글 웃고 말을 재잘재잘 배우기 시작하자 김진은 그에게 글을 배워주기 시작하였다.  천자문(千字文)으로부터 시작하여 <<동몽선습(童蒙先习)》이며 <<소학(小学>> 등을 익혀주고 당시(唐诗), 송사(宋词)도 외우게 하였고 어려운 고문(古文)도 풀이하여주었다. 
 남달리 촘명한 소년은 새별같은 눈동자를 굴리면서 책속에 들어있는 오묘한 진수를 갈증이 난 사람이 샘물을 들이키듯 흡수하였다. 성격이 남달리 호방한 김성일은 아버지가 일터에 나가고나면 맨발바람으로 시내가에 나가서 동네아이들과 더불어 글짓기내기도 하고 군사유희도 즐겨하였다. 제보다 키가 주먹하나만큼 키가 더 큰 아이들도 군사놀이를 할 때면 항상 성일이의 졸개가 되여 성일이가 시키는대로 잘도 어울려 놀았다. 웅심이 깊은 그는 장난을 치면서 기발한 생각이 떠오를 때가 많아 친구들을 곧잘 웃겼다.
     김성일이 여덟살 때의 일이다. 
    김성일은 참새 한마리를 잡아 조롱안에 넣어놓고  놀았는데 장난에 빠져 제때에 먹이를 주지 않아 참새가 그만 죽어버렸다. 그는 아끼고 사랑하는  참새를 땅을 파고 정히 묻었다. 그리고 그는 새의 무덤앞에서 제문을 써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새가 죽었는데 사람이 우는것은
      도리상에는 맞지 않는 일이오나
      네가 나를 위해 죽었으니
      내 너를 위해 곡을 하노라.
 
(鸟死人哭  依理不当 你为我死故  我亦尔曲之。)
 
    김성일이 정색을 하규 제문을 읽고나서  곡을 하는바람에 꼬맹이친구들은 모두 배를 끌어안고 웃어댔다.
     며칠이 지난 어느날, 김성일은 조무래기동무들과 함께 동구밖 버드나무우에 올라가서 새둥지를 털며 장난질을 했다. 동무들과 같이 나무가지우에서 기여다니며 놀던 그는 갑자기 오줌이 마려워났다. 나무밑을 내려오려고 보니 나무가지가 너무 높은지라 내려와서 소변보기가 귀찮아서 그는 그만 허리춤을 풀고 나무우에서 오줌을 갈겨대고말았다.
    재 수가 없다보니 이때 대구부사 박응천(朴应川:15 -1581)이 나무그늘밑을 지나다가 성일이가 싼 오줌줄기를 맞고말았다. 뜻밖의 봉변을 당해 아이의 오줌에 의관을 적신 박응천은 성이 상투끝까지 올라 나무가지를 올려다보고 호통을 쳤다.
    <<요 발칙한놈같으니, 어디에서 함부로 오줌을 갈긴단말이냐?>>
    소변을 보고나서 바지를 올리던 김성일은 나무아래서 나는 호통소리를 듣고 제가 큰잘못을 저질렀다는것을 깨달았다.
    <<나으리님, 정말 실례했습니다. 제가 나으리님께서 이리로 행차하실줄 알았으면사 바지에 오줌을 싸더라도 참았을텐데요. 정말 죄송합니다.>>
    김성일은 나무줄기를 타고 땅에 미끄러져 내리더니 부사 박응천의 앞에 가서 무릎을 꿇었다.
     박응천은 자기의 앞에 있는 아이가 삼척동자인지라 애를 때리거나 어쩔수도 없었다.
     <<이놈, 한창 공부할 나이에 장난에만 미쳐서야 사람이 되겠느냐?>>
  <<공부는 아침에 날씨가 시원할 때 하고 이처럼 더운 한낮에는 나무그늘에서 노는것이 좋지 않나요?.>> 
    성일이는 부사의 책망에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고 아주 천연스레 대답을 술술 해댔다.
     <<네가 글공부를 했다 하니 어느 정도인지 알아야겠구나. 어디 보자. 네가  내앞에서 글 한구절을 지어보아라. 글을 지어내지 못하면 종아리가 부러질줄 알거라.>>
    아이의 기특한 소행에 분이 조금 풀린 박응천은 성일이의 글재주를 알아보고싶었던 모양이였다.
     <<그까짓거야 뭐 어려울게 있습니까? 그럼 제가 시 한수를 지어올리겠습니다.>>
     성일이는 새별같은 눈을 대록거리면서 머리를 두어번 갸웃거리다가 시 한수를 지어서 신나게  읊었다.
 
그대는 어이 먼저 오고
나는 어이 늦었던고?
가을에 피는국화, 봄날의 란초
저마다 성할 때가 따로 있구나.
그대 높은데 있는 계화가지를 
남먼저 꺾었다고 자랑을 마소.
그 나무가지우에 더 높은 가지
없다고야 그누가 단언하리오. 
 
(君何先达我何迟  秋菊春兰各有时
且君莫道先折桂  岂上唯有上高枝)
 
  (요 꼬맹이가 여간내기가 아니로군!)
    성일이가 읊은 시를 듣고 난 대구부사는 그만 혀를 털었다.
    <<너의 글재주가 이만저만이 아니구나. 댁이 어디 있느냐? 너의 댁에 찾아가서 너의 아버지를 한번. 만나봐야겠다. 앞에서 안내하거라..>>
    소년이 장차 큰 인재가 될것이라고 생각한 대구부사 박응천은 성일이를 따라 김진댁을 찾아가서 소년을 칭찬하고나서 주인댁의 살림살이가 어려운것을 보고 자식을 더 잘 교양하라고 분부하면서 돈 백냥을 공부시키는데 보태쓰라고 주고 돌아갔다.
세월은 빨리도 흘러갔다. 천진하고 총명한 소년은 어느새 풍채가 름름하고 학문이 깊은 19세 나이의 서생으로 변하였다. 김진에게는 이제 아들을 더 배워줄 지식의 밑천이 딸리였다. 아들이 쓰는 시나 문장은 벌써 그 아버지를 초월했고 린근마을에도 아들을 당할만한 수재들이 없었다.  
어느날 김진은 안동읍에 나갔다가 향시를 친다는 방문(榜文)을 보고 집에 돌아왔다. 그는 아들을 서재로 불러들였다.  
   <<얘, 성일아, 안동부에서 향시를 친다 하니 한번 시험쳐보는것이 어떻겠느냐?.>  
    김진은 자애에 찬 눈길로 네째아들의 얼굴을 애무하며 조용히 물었다.
    <<아버님, 소자는 아직 좀 더 학문을 련마하고싶습니다. 소자가 배운 쥐꼬리만한 학문으로 정계에 진출하여 벼슬을 한다 한들 무슨 큰일을 해낼수 있겠습니까?>>
<<네 말도 일리가 없는것은 아니구나. 하지만 나도 이젠 너한테 별로 배워줄것이 없으니 어쩌겠느냐?>>
김진이 자신의 고충을 털어놓자 아들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였다.
    <<아버님, 지금 해동의 주자(朱子 1130--1200 중국 송나라때의 유가의 대가)로 일컫는 대학자 퇴계(退溪 1501--1570) 리황선생님께서 고향에 와계시지 않습니까? 소자는 퇴계선생님의 문하에서 수학하고싶습니다.>>
    << 참 , 내가 미처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구나. 그럼 며칠 지나 네가 그분께 찾아가보거라.>>
     자식의 요구를 기특하게 생각한 김진은 쾌히 허락하고 친히 성일이의 행장을 꾸려주었다.

     퇴계 리황(李滉1501--1570)선생은 진사 리식(李植)의 아들인데 태여나서 일곱달만에 부친을 여의고 어머니와 숙부의 손에서 양육되여 28세에 진사시에 합격되고 33세에 성균관에 들어갔고 이듬해에는  문과에 급제한 뒤 정계에 진출하여 정자(正字)벼슬로부터 시작하여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여 성균관의 사성(司成)에 이르렀으나 학문연구에 뜻을 둔 그는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고향 례안(礼安)에 돌아와 양진암(养真庵)을 짓고 학문에 진력하였다. 명종(明宗:조선조 제13대왕 재위: 1546-1562)7년에 홍문관(弘文馆: 3사의 하나로서 궁중의 경서, 사서, 문서를 관리하고 왕을 자문하는 관청)의 교리(校理), 대사성(大司成),부제학(副提学),공조참판(工曹参判) 등 직에 임명되였으나 모두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도산서원(陶山书院)을 짓고 유가(儒家)의 경전(经典)을 연구하며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하고있었다.
     나귀등에 행장을 싣고 50여리나 되는 험한  산길을 걸어 목적지 례안에 이른 성일이는 곧추 도산서원을 향해 걸음을 제촉했다. 춘록의 싱그러운 냄새, 지종지종 노래하는 종달새, 수정같이 맑은 시내물... 퇴계선생께서는 이곳 산천경치에 취하여 조정의 부름을 마다하셨던가? 명종왕은 퇴계선생을 여러번이나 조정에 불렀으나 퇴계선생이 고관후록(高官厚录)에 뜻이 없다면서 번번이 마다하고 고향에서 서원을 지키고있었다. 명종왕은 도대체 퇴계선생의 고향이 어떤 곳이길래 고향을 떠나려 하지 않는지  궁금하여 화공을 시켜서 도산의 경치를 그려오라 했었다는데 그분과 도산의 정은 그렇게도 깊은가? 
   상념에 잠겨 길을 걷노라니 어느덧 서원앞에 이르렀다. 학생들의 글읽는 소리가 그의 귀를 간지럽힌다. 그는 나귀등에서 짐을 내리우고나서 서원 한구석에서 학생들의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점심때가 되자 학생들이 학당에서 우르르 몰려나왔다. 이윽고 퇴계선생께서 밖으로 나오셨다. 의관을 정제한 퇴계선생은 환갑이 가까와오는 백발로인이였다. 성일이는 인차 퇴계선생앞에 다가가서 공손히 절을 올리고나서 찾아온 용무를 아뢰였다.
      <<젊은이, 생각을 잘했네. 젊었을 때 좀더 많은것을 배워야 하네.>>
  퇴계선생은 성일이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이며 그를 환영했다. 김성일은 도산서원에 들어온것을 행운이라 여기고 학습에 진력했다.
  어느날 퇴계선생은 계몽서를 가르쳤다. 성일이는 계몽서에 있는 말이 너무 딱딱한것 같아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스승님, 이 책은 처음으로 글공부하는 사람에게는 그다지 친절하지 않은것 같습니다.>>
  성일이의 말을 듣고 한참동안 말이 없던 퇴계선생이 드디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만약 이 책을 숙독하고 그 뜻을 잘 음미하면 실체가 드러나서 눈앞의 사물이 어느것이나 다 이것이 아닌것이 없게 되는데 책을 숙독하지 않고 어찌 책이 친절치 못하다 하겠느냐?>>
  스승님의 엄숙한 타이름에서 자신의 경박함을 깨닫게 된 김성일은 황공하여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어느날 혼자서 책을 읽던 성일이는 어쩐지 글이 머리속에 잘 들어오지 않음을 느꼈다. 공부를 하려는데도 어째서 정신을 집중할수 없을가? 성일이는 의문을 풀수 없어서고 스승님을 찾아갔다.
  <<선생님, 공부를 하려해도 생각이 자꾸 분산되는데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성일이의 물음에 퇴계선생은 자신의 성리학설을 풀어가면서 대답했다.
  <<대개 사람은 리(理)와 기(气)를 합해서 마음이 되였는데 리가 주도로 되여 그 기를 거느리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생각이 한곬으로 쏠리여 딴 생각이 없어진단다. 그러나 리가 주인이 되지 못하고 기가 리를 이기게 되면 마음이 소란해지고 비뚠 생각, 망녕된 생각이 번갈아 이르러 물레방아 돌듯이 돌고돌아 잠시도 안정을 찾을수 없느니라.>>
  성일이는 도산서원에서 송오(松坞)리진(李轸 1536--1610), 서애(西崖) 류성룡(柳成龙) 등 동창들과 절친하게 지내면서 퇴계선생의 학문을 목마른 사람이 물마시듯 배워나갔다.
( 나라의 부패한 정치를 개혁하고 백성들이 격앙가를 부릀 있도록 하려면 퇴계선생의 학문의 정수를 추호도 빠짐없이 배워내야 한다.)
 김성일은 날이 밝기전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고 의관을 갖추고 종일토록 도정신해 독서하는 스승을 본받아 모든 정력을 학업에 몰부었다.
  <<내 제자들 가운데서 성일이가 학문을 제일 깊이 련마했다네.>>
  친구들이 혹시 찾아와서 제자들의 정황을 물으면 퇴계선생은 자기의 학문을 이을 사람은 김성일뿐이라고 고백했다.
  몇해가 지나 리진과 류성룡은 선후로 퇴계문하를 떠나 정계로 진출했다. 그러나 성일이는 성현으로 모시는 퇴계 리황(李滉)선생곁에서 더 많은 학문을 익히려고 스승의 신변에 계속 남아 학업에 열중했다.
  명종 17년, 25세의 혈기왕성한 청년으로 성장한  성일이가 휴가차로 내앞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고향마을의 선비들은 궁전에서 광주에 있는 중종의 정릉(靖陵)과 중종계비인 장경(章敬)왕후(조선 제12대왕 인종의 생모)의 희릉(禧陵)을 옮기는 일에 대해 의론이 분분했다. 명종은 이복형인 인종이 젊은 나이에 죽자 12세의 철부지로 왕위에 올랐었다. 명종이 아직 정사를 처리할수 없으니 명종의 생모요 중종의 다른 한 계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여 국권은 문정왕후의 손아귀에 꼭 쥐여졌다. 
문정왕후는 친정오빠 윤원로(尹元老 --1547), 동생 윤원형(尹元衡 1509--1565)과 합세하여 인종의 외삼촌인 윤임(尹任)과 싸웠다. 그들은 또 을사사화(乙巳士祸)를 일으켜 평소에 그들이 미워하던 윤임 등 사류(士类)들을 대량으로 살해하고 스스로 위사공신(卫士功臣)을 새로 설치하여 자신을 공신에 책록(策录)하였었다. 
그뒤 권세에 눈이 어두운 윤원형은  윤원로와 세력을 다투다가 조카되는 윤춘년(尹春年)을 시켜서 친형인 윤원로를 살해하기에 이르렀다.
 불교를 숭상하는 문정왕후와 윤원형은 금강산에 들어가있던 중 보우(普雨 호는虚应堂 1515--1565)를 신임하여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를 시켰다가 후에 는 보은사(报恩寺)의 주지를 거쳐 도대선사(都大禅师:조선 시대, 중의 법계(法階)의 하나. 선종(禪宗)의 최고 등급으로, 대선사(大禪師)의 위이다.)로 올려놓고 전국에 300여개의 사찰을 국가에서 공인하는 정찰(净刹:부처님이 계시는 깨끗하고 맑은 땅. 대승 불교에서 인정하는 국토를 말한다.)로 정하고 2년동안에 4천여명의 승려를 뽑는 등으로 행패가 많았다.
 명종의 나이 20세에 이르자 문정왕후는 남의 눈이 무서워서 수렴청정을 그만두고 명종이 직접 정사를 다스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형식에 불과하였다. 문정왕후는 성품이 연약한 명종의 배후에서 명종을 꼭두각시같이 주물렀고 조정의 크고작은 일은 모두다 문정왕후와 윤원형일당이 좌우지하였다. 
문정왕후는 정릉이 풍수가 좋지 못하니 왕릉을 옮겨야 한다는 보우의 말을 듣고 토역을 크게 벌려 새 왕릉터를 장만하려고 서둘렀다. 왕릉을 한번 옮기는데 인력, 물력이란 수십개 고을의 재산보다 더 많은지라 백성들의 원성은 온 나라를 진동하였다. 그러나 문정왕후의 세도에 눌려 숨도 한번 크게 쉬지 못하는 조정의 대신들은 누구하나 감히 반대의사를 내놓지 못하였다.
<<왕릉을 옮긴다면 올해 백성들은 또 죽을 고생을 해야겠군요.>>
<<그게 다 문정왕후가 죽은 뒤에 중종의 릉에 같이 묻히기 위한 수작이지.>>
<<때려죽일놈은 그 보우란 중놈이야. 보우란 중놈이 곁에서 꼬드기지 않았으면야 문정왕후가 감히 정릉을 옮기겠다고 서두를가?>>
   방안에 앉아서 형님들과 찾아온 선비들이 주고받는 말을 듣던 성일이는 끓어오르는 의분을 금할수 없었다.
서재로 돌아온 성일이는 초불을 밝혀놓고 먹을 갈아 조정에 올리는 상소문을 쓰기 시작했다. 
 
<<...... 릉을 옮기는데는 다섯가지 큰 잘못이 있습니다. 신도(神道)가 아직 조용한데 무단히 천장(迁葬)하려는것이 첫번째 잘못입니다. 자전(慈殿: 문정왕후를 가리킴)도 후일에 같은 묘지에 배장(陪葬)하려는 대책하에서 오래동안 배장되여온 원비(元妃)를  외로운 혼으로 만들려는것이 두번째 잘못입니다. 새 릉의 풍토와 형세가 바로 생맥(生脉)이 없는 절지(绝地)로 정하여 처음 곳만 못한것이 세번째 잘못입니다. 허하고 이즈러진 곳은 떼우고 막느라고 토역을 크게 일으켜 백성들이 고역에 견디기 어렵게 하게 되니 선왕(先王)의 백성을 위한 정신과 상반되는데 이것은 네번째 큰 잘못입니다. 신왕이 아직 어려서 정사가 내전에서 나오는데 요망한 중의 말에 따라 국가대사를 경솔히 결정하는것이 다섯번째 큰 잘못입니다...>>
 
  필을 던지고난 성일이는 탁상에 기대고 앉아 깊은 상념에 사로잡혔다. 서울로 올라가 대궐안으로 들어가는 장면, 승정원에 상소문을 올리고 임금과 만나는 장면, 정릉을 옮기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는 백성들의 얼굴들... 흥분에 젖은 성일은 밤이 깊었건만 서재를 떠날념을 않고있었다.
 <<부친님, 엊저녁에 소자는 조정에 올리는 상소문을 썼습니다.>>
 이른 아침, 아버지의 침소에 찾아간 성일이는 엊저녁에 쓴 상소문을 부친앞에 공손히 올리였다.
 <<음, 네가 쓴 글은 아주 훌륭하구나.>>
 김진은 상소문을 자세히 읽어보고나서 아들의 예리한 통찰력과 조리있는 문장 그리고 비범한 담략에 저으기 놀랐다.
 <<이번에 며칠 쉬는 여가를 타서 소자는 상소문을 가지고 서울로 올라갈가 하는데 부친님의 생각은 어떠하온지요?>>
 <<......>>  
 한동안 아무런 말씀도 없이 담배물부리만 빨고있던 김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쓴 글만은 아무런 흠집도 찾을수 없구나. 그렇지만 네가 쓴 그 상소문은 조정에서 받아들일리가 없다. 네가 상경해봤자 너는 임금을 만나기는 고사하고 대궐문앞에 발도 들여놓지 못할게다.>>
 <<그렇다고 집에서 가만히 참고있으면 일이 어떻게 됩니까? 칼이 목에 들어와도 마음속의 말만은 토로해야 군자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아버지를 한없이 존경하는 효자였지만 성일이는 끓어오르는 의분을 참지 못해 상경할 뜻을 고집했다.
<<아버님의 말씀이 십분 옳다.  젊은 혈기에 큰일을 해보겠다면서 상경해봤자 성공하기는 커녕 자칫하면 생목숨만 잃게 될터이니 동생은 어리석은 생각을 고쳐야 되겠구나.>>
아버지의 침소에 아침문안을 왔던 큰형님께서 이렇게 말하자 둘째 셋째 형님들도 일제히 만류했다.
성일이는 부형들의 타이름을 받으면서 자신의 생각이 너무 경솔했음을 느끼게 되였다.  상소문을 가지고 상경한다는것은 닭알로 바위를 치는격이여서 상소가 성사할수 없다는것은 너무나도 뻔한 일이였다. 지금 세상은 간신들이 득세하고있는판이라 백성들은 입이 열개라도 말을 할수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그는 몸의 피가 얼어드는것만 같았다. 이제 왕릉을 옮긴다면 이 나라 농민들은 또 얼마나 큰 재난을 덮어쓸것인가? 안타까운 사정을 하소연할수 없는 그는 가슴속으로 남몰래 눈물을 삼켰다.
명종 19년, 27세 나이에 잡아든 김성일은 퇴계선생의 요구에 좇아 과거에 응시하였다. 대학자의 수제자이기에 그는 출중한 성적으로 진사시험에 합격했다. 이때부터 그는 학봉(鹤峰)이란 호를 쓰기 시작했다. 
그 이듬해인 명종 20(1565)년 4월에 문정왕후가 병으로 사망했다. 문정왕후의 죽음은 조정에서의 개혁파들과 사림(士林)들에게 있어서  일대 경사였다. 문정왕후와 윤원형일당의 세도에 눌려 숨도 바로 쉬지 못하고 문정왕후가 죽기만을 고대하던 사림들은 문정왕후가 죽자마자 요망한 중 보우를 처형할것을 한결같이 주장하고나섰다.
 이때 령남일대의 사림들은 도내의 유교를 숭상하는 선비들에게 통문(通文: 예전에, 여럿이 돌려가며 보는 통지문을 이르던 말. )을 돌리면서 상소문을 지어가지고 대궐까지 들어가기로 약속하였다. 벌떼같이 일어난 상소대원들의 행동은 조용하던 도산서원에도 큰 파문을 일으켰다. 서생들은 둘씩 셋씩 한자리에 모이기만 하면 상소운동에 대해 이야기하군 했다.  
<<선생님, 저도 이번 상소행렬에 가담하고싶습니다. 직접 대궐까지 찾아가보지 않고는 속이 답답해 못견디겠습니다.>>
 어느날 학봉 김성일은 퇴계선생을 찾아가서 속심의 말을 털어놓았다.
 <<자네 심정만은 알만하네. 그러나 상소대렬에 가담한다는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네.>>
 퇴계선생은 흰 턱수염을 쓰다듬고나서 조용히 말하였다.
<<선생님, 젊은 혈기로 이런 투쟁에도 나서지 못한다면 학문을 배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저는 엊저녁에 상소문까지 썼습니다.>>
학봉이 밤을 지새우며 쓴 상소문을 내놓자 퇴계선생은 받아놓고 읽어볼 생각은 않고 엄숙하게 타일렀다.
<<상소문을 써올리는것은 불가한 일은 아니지만 상소문을 써가지고 직접 대궐까지 찾아가는것은 자네한테는 마땅찮네. 오래잖아 나도 이곳을 떠나야 할것 같은데 그동안 자네는 공부나 더 다그치게.>>
<<예, 잘 알아들었습니다.>>
학봉은 스승님께서 젊은 서생의 창창한 앞날을 내다보고 가장 미더운 제자가 너무 일찍 정치풍운에 말려드는것을 꺼려한다는것을 자각하고 스승의 서재에서 나왔다. 그는 상소대오에 가담하지 못한 안타까움을 학문을 연찬하는 힘으로 바꾸고 서원에서 주야로 학업에 진력했다.
그뒤 중 보우는 전국 각지에서 눈꽃같이 날아오는 배불(排佛)상소와 조정에서 일떠선 신진사류(新近士类)의 기세에 밀려 승직(僧职)을 삭탈당하고 바다건너 제주도로 귀양가게 되였는데 제주도에 들어간지 며칠 되지 않아 제주목사 변협(边协)의 손에 참형당하고 말았다. 문정왕후의 비호하에 령의정에까지 올라 천하를 쥐락펴락하던  윤원형도 도학정치가들인 백인걸(白仁杰 :1497--1579), 심의겸(沈义谦 1535--1587), 박순(朴谆 1523--1589), 류성룡(柳成龙 1542--1607), 강사상(姜士尚 1519--1581), 리발( 李拨 1544--1589), 리이( 李珥 1537--1584),류희춘(柳希春 1513--1577 ), 리준경(李俊庆 1499--1572), 김효원( 金孝元  1542--1590), 기대승( 奇大升 1527--1572) 등 신하들의 탄핵을 받아 곽작을 삭탈당하고 강음(江阴 )에 안치되였는데 미구에 사망하고말았다.
신진세력들은 조정의 권신(权臣)들을 궁전에서 몰아내고 명종의 마음을 돌려세웠으며 연산군(燕山君 조선조 제10대왕 재위1494--1506)의 폭정과 무오(戊午), 갑자(甲子) 두 사화(士祸) 때 화를 입었던 사람들을 숭상하고 신원(伸冤)하였으며 그들에게 벼슬을 추증(追赠)한 동시에 옥에 갇혔던 죄수들을 석방하였다.
 명종 20년 8월에 리준경을 령의정에 올려놓고 이듬해 1월에는 리명( 李蓂 1570--1648), 권철(权辙 1503--1578), 을 각각 좌의정과 우의정에 올려놓은 뒤 조정에서는 퇴계 리황선생을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으로 청하였으며 명종을 설복하여 량종선과(两宗禅科), 내수사(内需司)의 인신(印信)을 페하였고 6월에는 함양(咸阳)에 있는 정여창서원(郑汝昌书院)에 사액(赐额예전에, 임금이 사당, 서원 등에 이름을 지어서 그것을 새긴 액자를 내리는 일을 이르던 말. )하였다.
명종 22년 6월에 퇴계선생은 도산서원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다. 그런데 퇴계선생이 상경한지 며칠 지나지 않아 명종왕이 승하(升遐: 주임금의 죽음을 가리킴)했다. 몸이 허약하고 병이 많던 명종이 34세의 젊은 나이에 자식조차 없이 죽고나니 조정에서는 새 임금을 올려놓아야 하였다. 조정의 도학정치가들은 중종의 일곱째아들인 덕흥군(德兴君) 리초(李岧)의 셋째아들인 하성군(河城君) 리균【李钧 후에 리연(李昖)으로 고쳤음】을 조선조 제14대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들은 새로 등극(登极)한 선조(宣祖 재위:1567-1608)의 나이가 겨우 15세밖에 되지 않으므로 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게 하였다. 
조정에서는 윤원형일당이 을사사화를 일으켰을때 진도(珍岛)로 류배가서 19년동안이나 고생하던 학자 로수신(卢守慎 1515--1599)을 석방하여 대제학(大提学주:조선 시대, 홍문관과 예문관의 으뜸 벼슬. 정이품(正二品)을 시켰으며 이듬해 초봄부터는 선조가  직접 정사를 다스리도록 한 동시에 중종때 기묘사화(己卯士祸)를 만나 억울하게 죽은 정치가 조광조(赵光祖 1452-1519)에게 령의정(领议政: 3정승의 수반)을 추증했다. 신진세력이 선조왕을 옹위하고나니 기름가마같이 펄펄 끓던 조야는 잠시 안정된 국면을 이루기 시작했고 개혁에 뜻을 둔 인재들은 전국 각지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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