룡선이 대마도의 수부인 이즈하라항구에 정박한 뒤 조선사신들은 배에서 서둘러 내리지 않고 관례대로 일본국의 선위사가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담배 한대 피울 시간이 지나갔다. 그러나 선위사들이 배에 올라오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 나라 사람들이 외국 사신에 대한 접대를 이렇게 소홀히 할수 있단말인가?)
의혹의 눈길을 서로 마주치던 통신사일행은 곈쇼오를 부두에 내려보내여 동정을 알아오게 하였다.
이윽고 섬에 올랐던 겐쇼오가 얼굴에 난처한 기색을 보이며 배우로 올라왔다. 물어보나 마나 선위사가 대마도에 오지 않은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였다. 일본국에서 사신이 올 때면 우리 나라에서는 언제나 선위사를 동평관까지 파견하여 사신을 맞아들였는데 섬나라의 오랑캐들은 정말 이런 기본적인 례의도 모른단말인가? 상사 황윤길도 부사 김성일도 서장관 허성도 풀기 어려운 이 수수께끼를 두고 서로 눈길을 마주쳤다.
<<겐쇼오상, 우리 사신이 귀국으로 온다는것을 사전에 본토에 알리지 않았댔소?>>
학봉선생은 겐쇼오를 마주보고 낮으나 엄숙한 어조로 물었다.
<<통기하지 않을리가 있겠습니까? 이제 본토에서 선위사들이 떠났다는 기별이 왔으니 그들이 올 때까지 대마도에서 류숙하면서 며칠동안 기다립시다.>>
학봉선생의 물음의 무게를 가늠한 겐쇼오는 당면한 창피를 모면하려고 거짓말을 꾸며 둘러댔다.
겐쇼오의 안내하에 대마도 객관에 들어간 사신일행은 객관에서 행장을 부리우고 로독을 풀면서 일본 본토에서 영접사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였다.
이러구러 며칠이 지나갔다. 어느 하루 아침에 겐쇼오가 객관에 찾아왔다.
<<오늘 점심에 대마도 도주(岛主)께서 조선 사신들을 위해 초대연을 베푼다니 제시에 국분사(国分寺)로 오십시오.>>
<<고맙소. 먼저 돌아가 일을 보십시오.>>
일국 사신들이 섬에 들렸는데 섬의 주인은 낯 한번 내보이지 않아 괘씸하던차에 섬의 주인이 초대연을 베푼다 하니 통신사들은 분이 약간 풀리였다.
겐쇼오가 떠난 뒤 사신일행은 객관을 나왔다. 그들은 조선땅과 판이하게 기암괴석이 즐비한 해안과 향나무, 대나무들로 우거진 수려한 산천경개를 두루 구경하다가 한낮이 되자 국분사로 올라왔다.
<<조선국의 사신이 옵니다!>>
사신일행이 국분사의 대문안으로 들어서자 심부름군 하나가 돌층계를 뛰여오르더니 중당(中堂)안에 있는 사람들이 들으라고 크게 웨쳤다.
사신들은 다른 한 심부름군의 안내하에 중당안으로 들어갔다. 초대연을 벌이려고 차려놓은 네모반듯한 상우에는 이미 수저가락이 놓여있었는데 주인측에서는 온 사람이 몇이 보이지 않아 어딘가 스산한 감이 들었다. 상좌에 앉아있던 겐쇼오는 사신들이 집안에 다 들어오자 일어서서 객석을 가리키면서 거기가서 앉으라고 손짓을 하는것이였다.
(손님이 오는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문밖에 나와보지도 않고있다가 손님들이 집안에 들어왔는데도 빈 인사 한마디도 변변히 할줄 모르는 미련한 자식이라구야.)
학봉선생은 밸이 울컥 솟아올랐으나 사신의 체면을 지키느라 낯빛을 변하지 않고 객석에 가서 앉아있었다.
시간은 일각 일각 지나갔다. 어느덧 정오가 지난지 이슥하여 배속에서는 꼬르륵소리가 연신 울렸다. 그러나 겐쇼오는 연회를 주최할 섬주인이 오지 않아 연회를 시작할 생각도 못하고 어색한 기분으로 시간을 끌어갔다.
한식경이나 지났을 때였다. 밖에서 떠들썩하는 소리가 나더니
<<공자께서 오신다!>>하는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사신일행이 열려진 문으로 밖을 내다보니 섬의 주인인 종이지(宗义智)의 아들인 평이지(平异智)가 가마를 타고 대문안으로 들어오고있었다. 허리에 장도를 찬 평이지는 뜰안에 들어서서도 가마에서 내릴념을 하지 않고 있어서 교군들은 가마를 메고 곧추 중당으로 통한 돌단계우로 올라오고있었다.
(일개 섬주인의 아들이란 놈이 이렇게 오만무례할수 있단말인가? 황차 지난번에 겐쇼오를 따라 조선에 와서 후한 대접을 받은자로서 이럴수가 있단말인가? 인의례절이란 털끝만큼도 모르는 이 섬나라 오랑캐들은 외국에서 온 사신조차 제 하인 대하듯하는구나!)
하찮은 놈한테서 치욕을 당했구나 하는것을 느낀 김성일은 얼굴이 숫불같이 달아올랐다.
대뜸 눈살이 꼿꼿해지고 이가 갈렸다. 그는 옆에 앉은 황윤길과 허성을 돌아보면서 가만히 입을 열었다.
<<황공, 허공, 우리는 당당한 조선국의 사신으로서 조그마한 섬주인의 아들한테 이런 목욕을 당하면서 어이 그냥 앉아있겠소? 즉시 퇴장하고맙시다.>>
<<저자들은 공맹지도(孔孟之道)를 모르는 섬나라의 오랑캐들인데 군자로서 그런것까지 탓하면 되겠소.>>
황윤길은 그 자리에서 일어날념을 하지 않고있었다.
<<황상사, 우리가 이대로 여기에 앉아서 놈들과 수작한다면 군명(君命)을 욕되게 함인줄을 상사께서는 왜 생각하지 못하시오? 나라의 치욕을 모면하기 위해서 나는 단연코 이 자리를 뜨겠소.>>
말을 마친 김성일은 분연히 일어나서 문가로 나갔다. 놈들의 무례한 행위에 밸이 꼬였던 허성도 뒤따라 일어섰다.
연회청안에 들어온 뒤에야 가마에서 내린 평이지는 김성일과 허성이 밖으로 나가는것을 보고 황윤길에게 다가갔다.
<<황상사, 김부사와 허서장관은 어이하여 중도에 밖으로 나가시오?>>
, <<에--에>>
대답할 말을 미처 찾지 못한 황윤길은 등골에 땀을 빼며 애원에 가까운 눈길로 번역을 돌아봤다.
<<부사님과 서장관께서는 로독끝에 신병이 발작하여 이제 방금 퇴장했소이다.>>
평이지의 기세에 눌리운 번역 진세운(陈世云)이 호랑이앞에 선 여우마냥 굽실거리며 거짓말을 발라맞췄다.
평이지가 하는 골에 구역질이 나서 연회청밖으로 나오던 김성일은 진세운이 지껄이는 소리를 듣고 성이 상투끝까지 치밀어올라 두가닥 수염을 푸들푸들 떨었다.
<진세운 이놈, 당장 밖으로 나오너라.>>
부사의 추상같은 호령이 떨어지자 번역 진세운은 사시나무같이 떨면서 밖으로 허둥지둥 나와서 고개를 푹 떨구었다.
<<찰싹____>>
널판자같은 손바닥이 번개같이 진세운의 볼에 떨어졌다.
<<네 이놈, 방금 평이지한테 뭐라고 지거렸였느냐?>>
<<소인이 그만 죽을 죄를 졌소이다.>>
눈에 불이 일게 따귀를 맞고 정신이 번쩍 든 진세운은 부사 김성일의 앞에 무릎을 꿇고 빌었다.
번역을 맡았으면 제할일이나 할것이지 나라를 욕되게 하는 짓을 할게 무엇이냐?>>
노기어린 김성일의 눈매는 비수보다 날카로웠다. 왜놈들의 무례한 행위에 항의는 못할 망정 놈들의 비위에 거슬릴가봐 거짓말까지 꾸며대는 번역의 행동이 가증스럽기 그지없었다.
이때 연회청밖에서 일어난 소동을 듣고 집안에 앉았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가슴이 캥긴 평이지도 뒤따라 나왔다.
<<김부사, 무슨 일로 이렇게 큰 노염을 사시오? 우리가 손님접대를 하는데 무슨 불찰이 있어서 그런게 아니오?>>
평이지가 의아해하는 표정을 보이며 김성일에게 묻자 김성일은 댜뜸 바른말을 쏟았다.
<<그렇소이다.. 부관께서 한번 생각해보시오. 부관께서 우리 나라로 오셨을 때 만약 우리나라의 선위사가 부관의 거소(居所)에 까지 말을 타고 들어가거나 가마를 타고 뜰을 지나 대청안까지 올라갔다면 부관의 마음은 편하겠소?>>
<<아, 그런 일로 노하셨군요? 그건 다 교군들의 불찰이요. 놈들이 가마를 중당까지 메고 올라와서 연회청에 들어설줄은 나도 몰랐었소. 내가 이제 그자들을 훈계하면 되지 않겠소. 어서 노염을 푸시오.>>
교활하기 여우같은 평이지는 자기의 불찰을 승인할 위인이 아니였다. 그는 독기어린 눈길로 좌우를 돌아보다가 교군 하나를 발견하고 다가가서 목덜미를 덥썩 틀어쥐더니 땅바닥에 꺼꾸러뜨렸다.
<<네 이놈, 네놈이 지은 죄를 알만하냐?>>
<<...>>
불의의 봉변을 당한 교군은 어인 영문인지를 몰라 대답을 못하고 꿇어앉아 부들부들 떨기만 할뿐이였다.
평이지는 허리에 찬 칼집에서 서슬 푸른 장도를 쓱 뽑더니 번개같이 교군의 목을 내려쳤다. 순식간에 교군의 피투성이 머리가 땅바닥에 떨어져 딩굴었다.
<<하하하하, 모든것은 다 이놈의 탓이였소. 이젠 죄범을 잡아죽였으니 부사께선 노염을 푸시고 연회청안으로 들어갑시다. 하하하하...>>
피묻은 장도를 칼집안에 밀어넣으면서 너털웃음을 짓던 평이지는 얼굴에 교활한 표정을 지어보이면서 김성일의 소매를 끌어당기였다. 웃지도 울지도 못할 꼭두각시극을 보고난 학봉선생은 어이가 없었으나 허성과 같이 평이지를 따라 연회청안으로 들어갈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술상이 차려지고 연회가 시작되였다.
평이지의 환영사에 이어 황윤길의 간단한 답사가 있은 뒤 식사를 시작했다. 술잔이 몇번 오가긴 했으나 기분없이 시작된 연회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어색한 분위기에서 인차 끝나고말았다.
연회를 마치고 국분사에서 나와 숙소로 돌아온 사신들은 모두가 기분이 잡쳐서 옷도 벗지 않고 아무런 말도 없이 제자리에 벌렁 누워버렸다.
이윽고 서장관 허성이 종이에다 글을 몇줄 적어서 김성일에게 보여주었다.
김성일이 종이장을 펼쳐보니 낮에 생긴 일을 가지고 학봉선생을 나무라는 내용의 글이였다
.
김공: 오늘 공이 한 일은 너무 과분한것 같소. 공께서 일본사람들 앞에서 번역의 볼기를 치진 말았어야 했소. 일본국의 하인이 그때문에 억울한 죽음을 당했으니 불쌍하지 않소?
김성일은 즉석에 붓을 날려 허성의 글을 반박했다.
나는 평이지가 보라고 일부러 연회청앞에서 번역의 볼기를 친것이요. 그 일로 하여 왜놈의 하인이 원통하게 죽은데 대해서는 나도 도의적으로는 동정을 금할수 없소. 그러나 나는 대마도에 와서 오만무례한 평이지의 기를 꺾어놓고 그들이 저지른 무례한 행위를 스스로 깨닫고 우리한테 사죄하도록 한것이 국체의 존엄을 위해서는 천만 다행인것으로 생각하고있소. 우리가 대마도에 오자마자 겁을 집어먹고 왜놈들을 범같이 두려워하며 그자들앞에서 벌벌 떨고 그들의 노염을 살가봐 말 한마디도 변변히 하지 못하고 어물거리면서 놈들의 굴욕을 달갑게 받아들인다면 장차 일본 본토에 간 뒤에 어떻게 처사하겠소? 행동에서 자중하지 못하고 출입을 경솔히 하고 남의 굴욕을 당하고도 그것을 수치로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찌 사신으로 왔다고 할수 있겠소?..
.
김성일의 글쪽지를 받아보고난 허성은 아무런 말도 없이 <<호---->>하고 가볍게 한숨만 쉬였다.
사신들이 객관에 든지도 어언간 7-8일이 지나갔다. 그러나 이미 본토를 떠났다는 일본국의 선위사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겐쇼오상, 우리가 대마도에 온지 수일이 지났는데 어이하여 귀국의 선위사가 아직 오지 않소?>>
<<걱정하지 마십시오. 선위사가 이제 박다(博多)까지 왔다고 합니다.>>
학봉의 질문에 겐쇼오는 또 한번 잔꾀를 부렸다.
며칠이 지난 뒤 겐쇼오가 객관으로 찾아왔다.
<<이거 대단히 실례했습니다. 선위사들이 풍랑에 막혀서 오지 못한다는 기별이 왔습니다.>>
겐쇼오는 손을 싹싹 비비면서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그의 얄팍한 속임수는 삼척동자도 얼려넘길수 없었다. 동남풍이 많이 부는 봄철이라 일본본토에서 대마도로 오는데는 순풍이 불면 불었지 역풍이 불리 없었다. 본토에서 애당초에 선위사를 파견하지 조차 않은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김성일은 대마도에 들어서면서부터 겐쇼오의 말에 의심을 가졌지만 아무려면 이자들이 설마 이렇게까지 무례하게 굴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보내지도 않은 선위사를 무작정 기다리다가 어느때에 길을 떠나겠소? 아예 우리절로 일본본토로 찾아갑시다.>>
대마도에서 여러날을 지체하여 조급증이 난 황윤길이 결단을 내리고 떠날 차비를 하였다.
<<황상사, 나라의 위신을 돌보기 위해서는 여기서 끝까지 버티여야 하오. 일본땅에 들어서면서부터 왜놈들의 손아귀에 쥐여놀아서는 절대로 안되오. 선위사가 올 때까지 뻗치고 기다리면서 놈들의 코대를 꺾어놓아야 하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앞으로 우리 사신들이 일본으로 올 때 일본에서 우리나라 사신을 영접하지 않는것이 전례로 되여 놈들은 선위사를 보내는 옛법을 아예 취소해버리고말것이요. 빨리 떠나겠다는 그 한가지만 생각하여 선위사를 기다리지 않고 자기절로 출발한다면 우리의 처신이 무겁지 못하게 되고 또 놈들의 손아귀에 쥐여 옴짝달싹 못하게 될것이니 잘 생각해서 처사하시오.>>
<<내 이미 결단을 내렸으니 공은 이제 더 말하지 마오.>>
김성일이 도리를 따져가며 굳이 만류했으나 일본령토에 들어서서 일본국왕의 비위를 거슬리여 불의지변을 당할가봐 두려워한 황윤길은 짜증을 부리면서 정사의 권한으로 출발명령을 내렸다. 수행인원들은 부사 김성일의 눈치를 보다가는 하나둘 행장을 수습하여 배우에 올랐다. 일행이 다 배에 오르니 김성일도 하는수 없어 그들의 뒤를 따라 배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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